거의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눈꽃(?)

태백산 눈꽃 축제 기간.

평상시 같으면 사람 많은 곳엔 근처에도 안갔을테지만,

 아무래도 겨울산을 보아야겠다는 욕심에

길을 떠났다. 영동지방에 눈이 많이 내렸다는 소식에

가슴이 설레이며...

물은 항상 흐른다고???

겨울산의 맛은 눈과 추위다.

등산로는 눈으로 쌓여있고,

하늘은 파란 가운데 매서운 바람이 불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너무 맑은 날씨가 반갑지 않은 경우가 생기다니...

눈은 다 녹아있고, 땀은 나고...

 태백산 천제단. 돼지머리에 꽂아있는 돈의 욕망들.

그렇다고 산이 주는 즐거움이 어디 가랴!

한쪽 가슴엔 아쉬움이 남지만

산은 언제나 따뜻한 품을 내보인다.

동해안 7번 국도에서.

서해안에 잔뜩 내렸던 눈은

강원도의 겨울 풍경을 조금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평상과 다르다는 것.

그리고 평상이라는 것의 어려움.

자연은 예측 가능하면서도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신비로움을 간직한다.

태백시의 황지. 이곳이 바로 낙동강의 발원지.

산을 내려와 태백시로 향했다.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 연못.

저 조그만 못에서 시작된 물이 낙동강을 돌고 돌아 바다로 흘러들어간다니.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물이 계속 솟아나는지 알지 못하겠다.

찬찬히 들여다보아도 알 수 없는 근원.

메마르지 않는 샘물.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또는 무엇인가를 향한 목표가

절대 마르지 않고 계속 솟아나기를.

태백산 주목.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숨결이 느껴진다

태백에서 나와 동해로 나왔다.

얼마만에 보는 동해인가?

최근 계속해서 서해안쪽으로만 여행하다보니

깊고 그윽한 동해의 바다는 새삼스럽다.

바다!

말없이 모든 것을 받아주고, 생명을 잉태하는 곳.

몇시간이고 바라보아도 지겹지 않은

바다와 같은 사람일 수 있기를...

 

피곤한 몸의 무게만큼 마음은 가득찬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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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탁! 석산의 실용적인 글쓰기]

 

[탁! 석산의 실용적인 글쓰기] 아름다운 문장보다 논

리가 중요하다

주장에 대한 근거 대는 ‘논증’ 연습 또 연습
특정사건에 대해 ‘왜’라고 물으며 일기 써야

▲ 탁석산
지금은 글을 써야만 통하는 시대다. 원인은 사회발전에 따르는 합리성 요구의 증가와 사회의 시스템화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제 사회는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글쓰기를 요구하고 있다. 합리성이나 시스템은 논리를 토대로 하는 것이며 논리는 말이 아닌 글에서 더 잘 구현되기 때문이다. 그럼 일생을 통해 수행해야만 하는 글쓰기는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1문학적 글쓰기와 실용적 글쓰기를 구분해야 한다. 흔히 글쓰기라고 하면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미문(美文)은 묘사를 본업으로 하는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에서 추구하는 것이지 실용적인 글에서는 요구되지 않는다. 즉, 실용적 글쓰기는 자신의 주장을 남에게 설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미문이 아니라 논리인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실용적인 글을 쓰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려고 한다. 이것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

교통방송에서 정보를 전하는 리포터가 아름답고 수식이 화려한 문장을 구사하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정보는 사라지고 수식만 남게 된다. 이런 식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2실용적 글쓰기의 핵심인 논증을 익히고 또 익혀야 한다. 우리가 쓸 수밖에 없는 실용적 글들을 보자. 감상문, 논술, 보고서, 자기소개서, 기획안, 프레젠테이션 등등. 이 많은 실용적 글쓰기를 무슨 재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실용적 글쓰기에는 매뉴얼이 존재한다. 즉, 전제와 결론 혹은 근거와 주장으로 구성되는 논증이라는 것이 모든 실용적 글쓰기의 핵심이다. 이 논증만 자기 것으로 만든다면 모든 실용적 글쓰기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논증이란 단순히 말하자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대는 형식이다. 그런데 자신의 주장을 결론으로 삼고 근거를 전제로 삼는 논증이라는 것을 습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논증이란 개념 자체가 생소할 뿐 아니라, 막상 배워서 시도를 해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전거 타기를 생각해보라.

처음에는 넘어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던가! 하지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면 나중에는 두 손을 놓고도 탈 수 있게 된다. 논증 습득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학문이나 이론이 아니라 기술에 해당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두렵지만 연습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3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글쓰기에 마음이 급한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 중 하나는 많이 써봐야 한다는 충고를 받아들여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쌓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많이 써본다는 것이다.

즉, 일기를 쓰라고 강요받으며 책을 읽으면 반드시 감상문을 쓰라는 과제를 받게 된다. 하지만 실용적 글쓰기를 잘 하려면 쓰기 전에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즉 논증을 만드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인데 일상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즉, ‘왜?’라고 묻는 것이다.

일기를 사건 순으로 건조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에 대해 ‘왜?’ 라고 묻고 그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 선생님이 싫다면 왜 싫은지 그 이유에 대해 써본다는 것이다.

4독서는 글쓰기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흔히 많이 읽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부분적으로 맞는 말일 뿐이다. 책을 아주 많이 읽었는데도 글을 잘 못 쓰는 사람을 찾기는 매우 쉽다. 왜냐하면 독서는 독서 자체로 완결되는 행위이지 독서가 글쓰기를 함축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독서는 독서고 글쓰기는 글쓰기란 말이다. 그렇다면 독서를 글쓰기에 끌어들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독서를 비판적으로 하는 것이다. 즉, 책을 읽을 때 끊임없이 ‘왜?’ 라고 물으면서 책에서 제기된 문제를 논증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환경위기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왜 그런 주장을 하는가를 따져서 근거를 써보는 것이다.

책을 몇 권 읽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한 권의 책일지라도 얼마나 비판적으로 깊이 읽었느냐가 중요하다.

한국외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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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6-01-1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왜?왜?를 잊지 말자!
왜냐고? ^^;;;

마늘빵 2006-01-1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왜 4,5권이 안나오는지 몰라요. 1,2,3권 다 읽고 기다리고 있는데

하루살이 2006-01-17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 이러다가 탁석산식 글쓰기가 횡행할련지도...
그럼 또 누군가가 다른 개성 만점 논술전략을 주창하겠죠.^^
 
내가 심판한다 - 마이크 해머 시리즈 1 밀리언셀러 클럽 30
미키 스필레인 지음, 박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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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도 분명 유행을 탄다. 하수도 문화의 대표격으로 불리던 B급 무비가,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걸출한 감독의 등장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런 조류는 어느덧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더 이상 B급 무비가 B급 무비로 취급받지 않게 됐다. 감각적이면서 자극적인, 본능에 보다 더 가까운 소재와 이야기들이, 고급스럽다거나 교양이라는 말로 감추었던 세상 속에서 환히 드러나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보다 더 진실하다는 의미에서 재탄생된 이 B급이라는 용어는 어느새 문화 곳곳에 쓰여졌다. 이젠 자신을 B급으로 평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A가 주는 엘리트적 취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는 뜻으로도 읽혀질 수 있겠다.

<내가 심판한다>라는  이 추리 소설은 하드보일드다. 소위 B급이다. 이 소설이 1940년대에 쓰여진 것을 생각해보면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충격은 이미 1990년대 초 <원초적 본능>이라는 영화가 영상으로 이미 다 보여준 것이다. 마초적인 남자 주인공, 금발의 팜므파탈, 잔혹한 시체... 신선한 충격이었던 B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오락이 넘쳐나는 세상에 B만으로는 부족하다. B보다 더 강렬한 B플러스의 탄생을 기대하든가, 아니면 B 모양새를 갖춘 A의 진중함이 필요할듯 싶다. 그래서 <내가 심판한다>는 시대를 초월한 힘을 얻지 못하고,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이 B급 소설 속에서 황금을 발견해낼지는 알 수 없다. 10년전 <원초적 본능>의 충격처럼, 또 다시 새로운 <원초적...>무엇인가를 캐낼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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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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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즘이 팽배하던 대학시절, 오히려 동양 고전을 읽은 덕분에, 친구들에게 도사의 이미지를 얻게됐다. 지금이야 논어, 노자를 공중파 방송에서 강의할 정도로 어느 정도 대중화 되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묵자가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올 정도였으니, 그런 선입관이나 편견을 가질만도 했을 것이다. 당시 번역된 붉은 표지의 묵자는 물론이고, 한비자 등 닥치는 대로 읽었던 기억이 있지만, 아직까지 뇌리에 깊숙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노자와 장자에 빠져 소요유하는 삶을 꿈꾸었다는 정도가 동양 고전을 읽으면서 나에게 남긴 흔적이라면 흔적일 터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 그 시절 내가 고전을 읽었던 방식은, 그 고전 속에서 지향하는 유토피아를 먼저 찾아내고, 그것으로의 접근 방법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공부였던 것인듯 싶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대부분의 고전이 제왕학의 수단이었다는 것이고, 그 방법으로서 제도적 변혁 보다는 개인적 수양에 중심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즉 고전이 쓰여졌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막연한 추측만으로, 오직 텍스트 그 자체만에 치중했던것 같다. 그래서 신영복 교수가 쓴 강의는 당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시대 상황을 설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고전의 의미를 재 복원한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무척 교훈적으로 다가온다.

일단 과거 내가 읽었던 유토피아적 관점에서 이 책을 살펴보면, 유가 묵가 도가의 경우는 농본적 질서를 모델로 삼는다는 점에서 복고적 경향을 띤다. 즉 이상향이 요임금이나 순임금 시절과 같은 과거에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반면 진시황으로부터 비롯된 제국이라는 개념의 등장이나, 철로된 쟁기 등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가 등의 정치 경제적 급변과 맞물려, 법가의 경우 변화를 인정하고,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미래사관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의 사상이 어떤 뛰어난 한 천재적 개인에 의해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밑바탕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지금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사상적 기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들며, 그것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는데서 이 책의 큰 장점이 있다하겠다.

위에 말한 것은 과거 내가 읽었던 방식 자체에서 무엇이 빠져 있었는가에 대한 반성이라고 볼 수 있다. <강의>를 꿰뚫는 시점은 물론 이것 이외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관계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관계론은 단순히 인간이라고 말할때의 間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간이란 사이 존재며 사이 존재라는 것 또한 존재 중심의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존재 그 자체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사회란 것 또한 이런 관계,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 대한 극한점이 바로 불교의 화엄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화엄은 무정부주의로까지 나아간다는 점에서 양면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런 관계론으로 바라본 고전을 여기서 하나하나 언급할 수는 없겠다. (그것이 궁금하다면 직접 책을 읽어보셔야) 다만 이렇게 재해석된 고전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만 잠깐 이야기해보겠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삶과 정서가 분리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관계론이란 단순히 사람과 사람만의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나와의 관계도, 또한 내 몸과 감성과 감정, 이상 등과의 관계도 모두 포함되어져야 할 부분일 것이다. -상품 미학의 발달로, 가상 세계의 등장으로, 교환 가치가 최우선의 가치가 됨으로써 내가 느끼는 감정들과 나의 삶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따로 돈다. 그것이 바로 소외이며, 행복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허전함을 가져온다. 따라서 허구적 관계로 말미암아 삶의 진정성을 잊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소비하는 인간이 행복한 인간이 된 세상, 나혼자 즐거우면 행복한 獨樂의 세상. 과연 이곳이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진정 행복한 삶이란, 공감을 통해, 與民樂으로 흥겨운 세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고전에 대한 이 <강의>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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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느와르라는 장르에 흠뻑 빠진 적이 있었다. 아니, 느와르라는 장르보다는 영웅본색의 주윤발이라는 인물에게 반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쑤시개를 꼬아물고 쌍권총을 쏘아대는 그의 모습은 알지못할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무엇보다도 예쁘장하게 생긴 장국영과, 외유내강의 모습을 지닌 적룡 등 주변 인물들과의 우정과 사랑, 이것을 사나이들의 의리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죽음보다도 더 강렬한 감성이라는 것이 사춘기 시절, 피끓는 청춘에게 매력적일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어느 순간, 느와르의 표현방법이 과장되어지고, 또한 그 감정의 선이 무수히 반복됨으로써 조금씩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어둡고 차가운 블루라는 느낌이 고등학교를 졸업함으로써 그나마 조금은 자유롭다고 현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유혹의 정도가 약해지기도 했다. 오히려 느와르보다는 판타지가 어울리는 세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생계라는 현실에 부닥치며, 내 정신도 몸도 닳고 닳아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사회보다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니, 한국이라는 사회가 집단공황을 불러일으키게 만듬으로써 자신에게 처박히도록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시절에 느와르라는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청춘 시절의 그 향수를 느끼게 만들어줄까? 아니면 내면에 감추어진 피의 뜨거움을 불러올 것인가?

<달콤한 인생>은 그래서 내면으로의 침잠에 어울리는, 나르시스적 경향을 띠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병헌이 창가에 서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새도우 복싱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럼, 이 <야수>라는 영화는 어떤가?

개인적 의리라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 사나이들. 법이라는 제도 속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두 야수가 결국 사회적 악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의리를 넘어 정의로 향하는 순간, 이미 <야수>는 느와르를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애시당초 느와르를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순전히 이것은 나만의 착각이거나, 다른 곳에서 얼핏 들은 선입견일 것이다. <야수>는 결코 느와르로 표현되어질 수 없다. 또한 아예 법과 제도라는 것의 불완전성을 자각하고, 어둠 속에서 정의를 행사하는 <더티 해리>류의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순박하다.

이 영화 <야수>가 특이한 점은, 형사와 검사는 물론이거니와 제거되어야 할 보스와 배신을 행한 조직원 모두 가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자선택의 상황에서 가족을 택한 이들은 악당이고, 가족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는 이들이 바로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정의라는 이름하에 힘에 저항하다 가족들마저도 희생당한다. 그리고, 정의는 결코 법과 사회로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맞서 싸워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결국 90년대 초, 의리를 위해 싸웠던 홍콩 느와르의 주인공들은, 21세기 한국에선 정의를 위해 원시시대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힘에 맞서기 위해선 오직 이빨로 물어뜯고, 발톱으로 할퀴어야만 하는 야수는 빌딩 솦에 사는 애처로운 존재일 뿐이다. 세상은 결코 이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힘의 서열만이 살아있는 빌딩으로 둘러쌓인 원시시대의 밀림 속임을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정의를 위해 우리 모두가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서야만 할 것인가? <야수>는 그래서 아스팔트 위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이곳은 정글이며, 또한 정글이 아니기에... 발톱을 잃어버린 성난 야수, 세상은 이들을 길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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