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을 그리는 영화는 현재 굉장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듯 싶다. 리얼 액션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리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할지라도, K -1이나 프라이드와 같은 종합 격투기의 실재감을 쫓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각본없는 드라마라고 하는 스포츠가 갖는 매력 그 자체를 뛰어넘기 위해, 각본을 써야만 하는 숙명이 주는 어려움일 터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실적 몸놀림 위에 양념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을 터인데, 그것 또한 만만치 않다. 보다 더 새로운 것을 찾는 관객의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이 그리 쉽겠는가? 와호장룡의 경공술 이후 영웅, 연인 등에서 보여주는 특수효과는 과연 지금보다 더 새로운 무술을 보여줄 영화가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낳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축소해서 이연걸 개인으로만 한번 살펴보자.(이 영화의 주인공 곽원갑 역을 맡고 있으니까) 소림사라는 정통적인 방법에서 시작해 황비홍이라는 살짝 가미된 특수효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할리우드로 날아간 이연걸은 자신의 몸뚱아리보다는 기계적 효과에 보다 많이 의존하게 된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제작 방식의 변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눈에 뜨이는 부분은 시원한 발차기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대련에서 발을 높이 치켜드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동작이긴 하지만, 영화 속에선 큰 동작이 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연걸의 변화에 다소 실망했지만, 그래도 영웅 속에서 한가닥 희망을 보았다. 아직도 그에게는 무술의 힘이 넘쳐 흐른다는 것을. 그리고 이번 <무인 곽원갑>에선 황비홍 류의 자신에게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이 부활 또는 복귀는 순전히 원화평이라는 무술 감독의 역량 덕분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갖는 장점은 단순히 현란한 대련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 광고 카피에선 마치 K-1을 100년 전으로 끌어다 놓은 것 같이 보여지지만, 오히려 곽원갑이라는 실제 인물이 어떻게 정무체조회를 창설하게 됐는가에 대한 개인적 드라마에 눈길이 간다. 정무체조회는 이소룡의 정무문을 떠올리면 된다 외세에 맞서 자주적 힘을 가져야 함을 역설하면서도 폐쇄적이지 않고, 예를 갖추며, 상대에게 두려움 보다는 존경심으로 우러러받을 수 있는 사람, 집단을 지향했던 단체 말이다. (두려움과 존경심에 대한 이야기는 과잉해석해 보면 중국과 미국을 빗댄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강압적 폭력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중국은 결코 그런 제국적 모습이 아닌, 존경의 대상이 될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으로 부풀린 상상임에 불과하지만, 중국이 정말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주변국가들로부터 존경받는 대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 한국 또한 자본의 힘으로 남을 깔보지 않고, 존중할 줄 아는 나라이기를 희망해본다.)
곽원갑은 천진이라는 고장에서 제일가는 무술인이 되기 위해 매일 목숨을 걸고 싸우고 또 싸운다. 대의명분같은 것은 없다. 오직 1인자만이 최종 목표다. 마지막 진대인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앗아간 혈투를 벌이고, 그로 인해 자신의 가족이 몰살당한다. 충격을 받은 곽원갑은 고향을 떠나 방랑의 길을 나선다. 그리고 쓰러져버린 한 깡촌 산간 마을. 그곳에서 그는 몇 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참된 武란 무엇인가를 깨우친다. 그 깨우침의 과정은 모내기 장면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백미는 바로 이 부분이다. 시골마을의 첫 해, 모내기를 도우러 나선 곽원갑은 같이 모내기를 하던 청년들보다 속도가 뒤진 것을 보고 서두른다. 그들을 추월해 정신없이 모를 심는데, 어디선가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하고 있던 청년들은 모두 허리를 펴고 그 바람을 만끽한다. 하지만 곽원갑은 어리둥절한 채 계속 모를 심을뿐이다. 하지만 다음날 그를 살려낸 맹인의 처녀가 그가 심었던 모를 다시 심는 것을 보게 된다. 모와 모 사이가 일정하지 않고 빽빽한 것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천천히 다시 심고 있었던 것이다. "모와 모가 너무 붙어있으면 싸우느라 서로 자라지 못해요. 모 사이에도 존경하는 마음이 필요하죠. 사람과 같이 " 다음해 모내기때는 어떤 모습일까 가히 짐작할 것이다. 바람이 불면 허리를 펴고 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고 바람을 받아들이는 그의 얼굴엔 평온한 미소가 깃든다.
다시 돌아온 천진, 그곳은 외세에 의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중국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 벌어진 무술 대회. 곽원갑은 그 대회를 통해 진정한 무란 무엇인가를 설파한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고 물러섰던 아버지의 뜻도 이해한다. 무릇 진정한 무란 타인을 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이겨내는 것이다. 싸움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요, 진정한 승리는 자신의 성장이다. 4대 1의 싸움에서 마지막 상대인 일본인 무인과 차를 두고 벌이는 대화는 가슴이 찡하다. 마시는 차의 등급은 인간이 정한 것이지, 차가 스스로 정한 것은 없다. 더 낫고 낫지 않고간에 모두가 함께일 수 있다는 생각은, 1등급만을 고집하는 현대인에게 큰 감명으로 다가온다. <정무문>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소룡이 죽음을 알면서도 이단 옆차기를 감행하듯, 곽원갑 또한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세상에 알린다.
무인이란 피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그림자를 찾는 사람이란 것을 <곽원갑>은 잘 말해주고 있는것 같다. (이종 격투기가 끝나면 선수 모두가 포옹하고 위로하고 축하해주는 모습 속에서 언뜻 이런 무도의 자세가 스며 있음을 느낀다) 복수의 끝없는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 영화 <뮌헨>이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를 마치 '동화처럼' 이야기한다. (실제로야 그게 가능할지와는 상관없이 감동을 준다) 영화 <무인 곽원갑>은 예기치 못한 드라마적 감동을 지니고 있어 그 재미가 솔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