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하루
마르탱 파주 지음, 이승재 옮김, 정택영 그림 / 문이당 / 2005년 10월
품절


우아함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한 우리의 삶을 바라보며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는 태도를 수식할 수 도 있는 것이다.

저자 서문 중
나의 단상-그래 웃자. 우아하게 살아보자. 하하하. -9쪽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이라는 게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더라

나의 단상-눈치 볼 필요있나, 코치가 필요한가. 당당해보자-56쪽

인생은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난 단지 아가미가 달린 인간일뿐이다.

나의 단상-인생이 내가 만드는 것이다. ㅋㅋㅋ-102쪽

나는 사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인생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나의 단상-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잘 살아보자. 어떻게?
서문에서 말했잖아~ 우아하게.-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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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을 그리는 영화는 현재 굉장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듯 싶다. 리얼 액션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리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할지라도, K -1이나 프라이드와 같은 종합 격투기의 실재감을 쫓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각본없는 드라마라고 하는 스포츠가 갖는 매력 그 자체를 뛰어넘기 위해, 각본을 써야만 하는 숙명이 주는 어려움일 터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실적 몸놀림 위에 양념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을 터인데, 그것 또한 만만치 않다. 보다 더 새로운 것을 찾는 관객의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이 그리 쉽겠는가? 와호장룡의 경공술 이후 영웅, 연인 등에서 보여주는 특수효과는 과연 지금보다 더 새로운 무술을 보여줄 영화가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낳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축소해서 이연걸 개인으로만 한번 살펴보자.(이 영화의 주인공 곽원갑 역을 맡고 있으니까) 소림사라는 정통적인 방법에서 시작해 황비홍이라는 살짝 가미된 특수효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할리우드로 날아간 이연걸은 자신의 몸뚱아리보다는 기계적 효과에 보다 많이 의존하게 된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제작 방식의 변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눈에 뜨이는 부분은 시원한 발차기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대련에서 발을 높이 치켜드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동작이긴 하지만, 영화 속에선 큰 동작이 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연걸의 변화에 다소 실망했지만, 그래도 영웅 속에서 한가닥 희망을 보았다. 아직도 그에게는 무술의 힘이 넘쳐 흐른다는 것을. 그리고 이번 <무인 곽원갑>에선 황비홍 류의 자신에게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이 부활 또는 복귀는 순전히 원화평이라는 무술 감독의 역량 덕분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갖는 장점은 단순히 현란한 대련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 광고 카피에선 마치 K-1을 100년 전으로 끌어다 놓은 것 같이 보여지지만, 오히려 곽원갑이라는 실제 인물이 어떻게 정무체조회를 창설하게 됐는가에 대한 개인적 드라마에 눈길이 간다. 정무체조회는 이소룡의 정무문을 떠올리면 된다 외세에 맞서 자주적 힘을 가져야 함을 역설하면서도 폐쇄적이지 않고, 예를 갖추며, 상대에게 두려움 보다는 존경심으로 우러러받을 수 있는 사람, 집단을  지향했던 단체 말이다. (두려움과 존경심에 대한 이야기는 과잉해석해 보면 중국과 미국을 빗댄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강압적 폭력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중국은 결코 그런 제국적 모습이 아닌, 존경의 대상이 될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으로 부풀린 상상임에 불과하지만, 중국이 정말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주변국가들로부터 존경받는 대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 한국 또한 자본의 힘으로 남을 깔보지 않고, 존중할 줄 아는 나라이기를 희망해본다.)

곽원갑은 천진이라는 고장에서 제일가는 무술인이 되기 위해 매일 목숨을 걸고 싸우고 또 싸운다. 대의명분같은 것은 없다. 오직 1인자만이 최종 목표다. 마지막 진대인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앗아간 혈투를 벌이고, 그로 인해 자신의 가족이 몰살당한다. 충격을 받은 곽원갑은 고향을 떠나 방랑의 길을 나선다. 그리고 쓰러져버린 한 깡촌 산간 마을. 그곳에서 그는 몇 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참된 武란 무엇인가를 깨우친다. 그 깨우침의 과정은 모내기 장면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백미는 바로 이 부분이다. 시골마을의 첫 해, 모내기를 도우러 나선 곽원갑은 같이 모내기를 하던 청년들보다 속도가 뒤진 것을 보고 서두른다. 그들을 추월해 정신없이 모를 심는데, 어디선가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하고 있던 청년들은 모두 허리를 펴고 그 바람을 만끽한다. 하지만 곽원갑은 어리둥절한 채 계속 모를 심을뿐이다. 하지만 다음날 그를 살려낸 맹인의 처녀가 그가 심었던 모를 다시 심는 것을 보게 된다. 모와 모 사이가 일정하지 않고 빽빽한 것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천천히 다시 심고 있었던 것이다. "모와 모가 너무 붙어있으면 싸우느라 서로 자라지 못해요. 모 사이에도 존경하는 마음이 필요하죠. 사람과 같이 " 다음해 모내기때는 어떤 모습일까 가히 짐작할 것이다. 바람이 불면 허리를 펴고 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고 바람을 받아들이는 그의 얼굴엔 평온한 미소가 깃든다.

다시 돌아온 천진, 그곳은 외세에 의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중국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 벌어진 무술 대회. 곽원갑은 그 대회를 통해 진정한 무란 무엇인가를 설파한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고 물러섰던 아버지의 뜻도 이해한다. 무릇 진정한 무란 타인을 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이겨내는 것이다. 싸움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요, 진정한 승리는 자신의 성장이다. 4대 1의 싸움에서 마지막 상대인 일본인 무인과 차를 두고 벌이는 대화는 가슴이 찡하다. 마시는 차의 등급은 인간이 정한 것이지, 차가 스스로 정한 것은 없다. 더 낫고 낫지 않고간에 모두가 함께일 수 있다는 생각은, 1등급만을 고집하는 현대인에게 큰 감명으로 다가온다. <정무문>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소룡이 죽음을 알면서도 이단 옆차기를 감행하듯, 곽원갑 또한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세상에 알린다.

무인이란 피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그림자를 찾는 사람이란 것을 <곽원갑>은 잘 말해주고 있는것 같다. (이종 격투기가 끝나면 선수 모두가 포옹하고 위로하고 축하해주는 모습 속에서 언뜻 이런 무도의 자세가 스며 있음을 느낀다) 복수의 끝없는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 영화 <뮌헨>이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를 마치 '동화처럼' 이야기한다. (실제로야 그게 가능할지와는 상관없이 감동을 준다) 영화 <무인 곽원갑>은 예기치 못한 드라마적 감동을 지니고 있어 그 재미가 솔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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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유미리 지음, 한성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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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리의 소설은 처음이다. 이 책은 운좋게도 그녀의 처녀작이다. (처음 접하는 소설이 첫 작품이라는 것은 작가의 변화를 그대로 쫓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만든다)  자신의 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는데,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8년간 재판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 책은 그 와중에 조금 개정을 본 후 출판된 것을 번역한 작품이다. 책 후기에 쓰여진 재판 과정의 인권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 외적인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소설은 주인공이 일본에서 희곡으로 유명해지고,  그 작품이 한국에서 번안되어 공연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한국을 찾는 과정이 삽입되어져 있다. 힘없는 아버지와 남자를 찾아다니는 어머니와, 정신병원에서 요양을 받아야 하는 남동생 등등 가족들의 이야기 한편으로, 연극 연출가와의 동거 중에 카메라 작가와의 바람 등 남성과의 편력, 그리고 한국에서 만난 한쪽 얼굴이 일그러진 동성의 친구와 그로 인해 얽히게 되는 주변 인물 등의 이야기가 마치 일기장이나 다큐멘터리를 들여다보듯 그려지고 있다. 말그대로 사소설의 전형으로 보여지는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으면서 숨이 턱턱 막힌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세상은 왜 이리 주인공의 삶을 조여오는지, 그리고 왜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증오하는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해가 된다. 분노하지 않고 대할 수 있는 감나무집 사내와 리화라는 한국의 여자친구가 사이비 종교집단에 같이 있는 것을 목격하는 착각 또는 현실로 끝을 맺는 소설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불경의 한 구절만을 Ÿ슷떳게 만든다.

세상에 손을 내밀어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행복의 나라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어머니의 자궁과 닮은 바다, 물이 주는 평온함과 거리가 먼, 딱딱하고 건조한 돌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 고독과 소외감이 온 몸에 들러붙어 도저히 떨쳐내지 못하는, 끝없는 몸부림조차 유영을 가능하게 하지는 못한다. 그곳은 물 속이 아니라 돌이기 때문에. 자신 안으로의 침잠. 애벌레처럼 갇혀버린 자신만의 공간. 오직 그곳만이 나를 자유롭도록 만들 것인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만 하는가? 가끔은 스스로, 홀로, 무너져 내리는 나를 생각한다. 돌은 황무지며, 황망하지만, 그곳이 내 삶의 터전임을 자각한다. 끝내 도달하지 못할 물을 꿈꾸며 온 몸으로, 지느러미를 꿈틀댄다. 그(녀)는 (혹은 나는) 행복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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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피날레 - 종말에서 이어지는 새로운 시작
아베 가즈시게 지음, 양윤옥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일본에 오타쿠를 보고 있자면 입이 벌어진다. 참 별의 별거에 집착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다가도 한 편으론 이해가 간다. 이해란 먼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쳇바퀴 도는 생활, 탈출구가 있다면 무엇이라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예전 TV서 보았던 '앗! 이런 일도'류의  유효기간이 지난 음식을 먹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를 자극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책에선 롤리타 컴플렉스를 지닌 주인공이 나오는가 하면, 자살 사이트를 들여다보는 아이들, 환각제에 취한 어른들, 자위기구에 집착하는 남자 등이 나온다. 단편들 모음집이기도 한 이책은 첫번째 단편 <그랜드 피날레>가 워낙 강렬해 나머지 단편들의 맛을 조금 앗아가 아쉬운 점이 있다. 하지만 그 강렬함은 오래도록 머릿 속에 남아 있을듯하다.

부인에 대한 폭력으로 이혼뿐만 아니라 접근조차도 불가능하게 된 주인공. 8살 된 딸 생일에 어떻게든 얼굴 한 번 보고싶어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다. 하지만 알고보면 그를 안쓰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가 이혼한 이유는 단순히 폭력때문이 아니라, 아니 폭력은 거의 우발적인 것이고, 롤리타 컴플렉스가 주 원인이기 때문이다. 교육영화를 찍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주인공은, 오디션을 보러 온 아이들을 유혹해 아동 포르노에 가까운 사진을 찍는다. 아마도 이것이 유일한 삶의 낙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행위나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주인공을 욕하기는 무척 쉽다. 아무리 내가 도덕적이지 못하더라도 넘어서지 말아야 할 무엇인가는 상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선을 넘어선 자다.

하지만 소설이 주인공의 내면을 끊임없이 보여줌으로써 조금 당황하게된다.  그 내면이란 자기합리화에 불과할 뿐이지만, 일견 주인공의 마음을 이해할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당황스러운 것은 이 내면의 소리가 결코 타인에게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타인의 행동을 바라보고 나름대로 이해하건만, 그것은 상호 소통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따로 따로 독립된 채로 놓여져 있는 것이다. 즉, 내 생각엔... 이라고 생각하는 그 무엇은 바로 내 생각일 뿐이며, 타인이 취한 행동의 근거도 배경도 이유도 되지 못한다. 서로간의 대화로 이 간격을 극복할 수 있으련만 대화는 항상 현실의 바닥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空론이 되어버린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소통과 이해는 불가능하다. 서로 겉에서 맴돌뿐 침투하지 못한다. 마치 텔레비젼 뉴스 속에 비쳐지는 사건들이 나와 아무 상관없이 느껴지듯 말이다. 누가 살인사건이나 화재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던가?

개인은 말 그대로 파편화되고 원소화되어 공기를 떠돈다. 다른 누군가와 만난다면 비누방울처럼 펑 하고 터져버릴듯이 위태롭게 말이다. 내가 다가서려 해도, 또는 남이 다가서려 해도, 그 비누방울은 속을 보여주지도 않고, 부딪히면 터질 각오를 해야하니, 우리는 그 세상에 환성을 질러야 할 것인가,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인가? 적당히 속엣말을 내뱉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래야지 귀찮아지지 않는 삶이란...

비눗방울은 이슬처럼 영롱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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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매듭일까?

스필버그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절대 감추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도 이런 관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뮌헨>이라는 이번 영화 역시, 그런 관점이 저변에 깔려있다. 이 영화는 1972년 뮌헨 올림픽 기간 중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단이 죽음을 당하고 배후는 아랍의 '검은 9월단'임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공적인 보복을 감행하지 못하지만(아니 실제로 감행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얼마나 강한지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특수 공작원을 보낸다. 영화의 주인공은 이 특별한 임무를 맡은 인물이 11명의 제거 대상을 찾아 하나하나씩 없애가는 과정을 찬찬히 보여준다.

그 과정 속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팀들이 맨 처음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이다. 대화는 들리지 않고 장중한 음악만이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크게 웃는 그네들의 장면은 무엇인가 언발란스하게 느껴진다. 자신들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 그리고 그 임무라는 것이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과연 정의인지 살인인지 가늠하기 힘든 상황을 그 장면은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갈등들은 영화 중간중간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아이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오직 타겟만을 죽여야 한다는 휴머니즘을 보여주면서, 이들이 테러집단과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점차 이들은 테러 대상과 별도로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킬러에 대한 복수를 행하기도 하면서, 인간적인 고뇌에 빠진다. 자신들이 행한 임무가 또다른 폭력을 불러온다는 사실에 과연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회의하게 되고, 자기 자신이 살해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에 자신이 행한 살인방법을 떠올리며 침대, 전화기, 텔레비젼을 뜯어보고도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스필버그가 나름대로 중립적 입장을 취하려 애쓴 흔적은 중간중간 삽입되는 뮌헨 올림픽 당시의 상황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인질들을 잔인하게 죽인 테러리스트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묘사된 장면은 격앙된 음악만큼이나 애절하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짠하게 느껴진다. 물론 영화 속 주인공에게 보다 많은 감정이입을 요구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가족이다.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 또한 가족이다. 이들과 그들에게 있어 국가란 가족의 확장이다. 무력으로 문제점을 해결하려 했던 두 집단은 결국 이것이 해결책을 찾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무력은 보다 더 큰 무력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스필버그는 평화와 화해의 손을 잡지 않는 이스라엘 정부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요르단 장벽 앞에서 팔레스타인 남자들 옷을 다 벗기며 검색을 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떠올린다. 탁 트인 마을 앞에서, 앞에 여자가 있든, 아이들이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 수모를 이들은 어떻게 해결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영화는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걸까? 그래서 영화는 따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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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6-02-13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거기서도 가족이 튀어나오는 군요. 맘이 확 바뀝니다.
미국인들의 그 '가족'타령이 넘 질리는지라....

하루살이 2006-02-13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필버그에겐 가족은 떼어낼 수 없는 분신처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