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잡설
최창조 지음 / 모멘토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10년 전쯤일까. 최창조 교수의 강의를 청강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들었던 강연중 기억에 또렷이 남는 것은 한국의 자생풍수는 비보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무덤을 잘 써서, 후손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음택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조상들의 지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양택(?) 위주의 접근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스개 소리로 "우리나라 명당은 군부대와 절간이다"라고 말하며 돌아다닌 시절이 있었는데, 그 명당이란 개념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체험이었으니 오죽하겠는가? 바람이 유독 강한 깊은 산속에서 산불이 났을 경우, 진화를 하기 위해선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절은 산불을 감시하고, 진화시 노동력을 긴급하게 투입할 수 있는 곳에 세워졌다는 주장은, 경치좋은 곳에 '떡'하니 자리 잡은 절간이라는 기존 관념과 맞부딪히게 된 것이다.

최창조 교수의 강연으로부터 받은 인상은 상당히 강렬해 그의 책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책들은 전문적 내용이 많아 접근하는 것이 쉽지않았다. 흐지부지 세월은 흘러가고, 풍수에 대한 막연한 동경 또는 공부좀 해봐야되겠다는 의무감이 어깨를 다시 누르고 있는 요즘, 문득 그의 에세이를 접할 수 있게됐다.

이 책은 풍수에 대한 전문적 내용이라기 보다는 한국의 자생풍수를 공부하면서 겪게 된 인생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대학이라는 조직의 속성과 부딪혀야 했던 이야기며, 숨은 의도 없이 이야기했던 천도불가론 등으로 인한 세간의 관심과 질책이라는 고뇌 등등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풍수를 좋아하게 된 어렸을 적 추억이라거나, 행방불명된 형에 대한 기억, 대학을 떠나야 했던 사연 등등이 그의 다 타버린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절절하다.

최창조 씨의 기본적인 풍수에 대한 생각은, 터라는 것은 그저 인생의 무대일 뿐이며, 그것이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인가의 여부는 순전히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에게 달려있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즉, 아무리 좋은 무대라 하더라도 배우가 형편없으면 그 연극은 실패하는 것이 되고 말지만, 싸구려 무대 위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배우들이 있다면 그 연극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에 십분 동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땅에 대한 생각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산도 여러 가지 말을 해 준다. 그것을 들을 수 있어야 풍수를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는 봉천동 산동네의 산들은 그 괴로움을 다소곳이 토로하고 있다. 고층 건물을 허리가 부러지게 지고 있는 남산은 거의 사경이 되어 신음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다. 깊은 애처로움을 지니고 산을 바라보면 그런 것을 다 들을 수 있다. 그저 지나치는 관심 정도로는 산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측은지심은 사람에게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산에 대하여서도 심성의 단초가 된다. 진정한 정만이 산과의 대화를 가능케 한다. 그런데 서울생활은 그런 심성의 단초까지 마비되게 해 버린 것이다. (46~47쪽)

마치 샤머니즘이나 물신주의로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 속에 비쳐지는 술 좋아하는, 또는 술에 취해 살 수 밖에 없었던 그의 행적을 알고 있다면 결코 위의 글이 신비주의적이라거나, 호언으로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산과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을 나눈다는 것. 물론 산뿐만이 아니라 숨은 속내를 이야기하고 위로받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이 필요하다. 신음소리, 아우성 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리네는 비정하다. 산은 또는 땅은 그런 비정한 사람들에게 무정한 재앙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재앙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발을 딛고 있고, 함께 숨을 쉬고 있는 이 땅과 산에게 대화를 건네고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퍼도 퍼도 한 없는 정을 나누어 줘보자. (제발 울지마거라 새만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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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들어본 목소리. 반가움이 앞선다.

그런데 느닷없이 OO가 죽었단다. 몇달 전 골수암으로 1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병원비 모금에 몇 푼 안되지만 보탠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그런데 죽음이라는 단어가 그리 슬프게 다가오지 않았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온 그림자였기 때문이었을까. 잊고 지냈던 주위 사람들의 안부를 전해들은 것처럼 담담했다. 그 친구는 나와 중학교 동창이면서, 대학 선후배 사이이기도 한 묘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는데.

장례식장을 찾아갈 때까지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주위에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간 친구가 유독 많아여서일까? 담담하게 부조를 하고, 영정 앞에 섰을때, 잔잔하게 있던 내 감정의 물결이 파동을 일으켰다. 환해 웃고 있는 녀석의 사진. 너무 맑게 웃고 있었다. 최근에 본 것이 5, 6년 쯤 전으로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모습 그대로 웃고 있었던게다. 영정을 튀어나오는 웃음 소리가 들릴듯이 활짝.

이제서야 그의 죽음이 느껴진다. 아니, 오히려 더 믿기지 않는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 이승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던 그의 심정은 어땠을지. 그냥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장례식장에서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어설픈 인사를 나누고 급히 병원을 나왔다.

그의 죽음이 나의 일상을 흩트려놓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잊혀질것 같지도 않다. 죽음이 그렇게 찾아온다면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어냐? 세상에 대한 집착의 끈을 과연 어디까지 놓아야만 하는가? 피지도 못한 꽃에 마음이 아프다. 난,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착잡한 마음에 해답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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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코타 페닝이 말을 사랑하는 11살 아이로 나오는, 스포츠 영화다. 스포츠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경주마 이야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련을 이겨내고 끝내 승리한다는 장르적 습성을 고스란히 가져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3대에 걸친 가족이 '소냐도르'(드리머, 몽상가의 스페인어)라는 말을 통해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가족영화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감동은 언제나 승리로부터 비롯된다. 승리란 꼭 1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꿈을 완성시키는 것. ('꿈은 이루어진다'가 월드컵에서 등장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스포츠를 움직이는 진짜 힘이다.

소냐도르는 명마의 피를 이어받은 암말이다.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지만 어느날 갑작스레 부상을 당한다. 다리가 부려져 안락사에 처해진 순간, 아버지 벤은 퇴직금 일부로 말을 데려온다. 그리고 종마와의 교배를 통해 새끼를 팔면 수익을 얻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실망에 빠진 가족들. 하지만 소냐도르의 뼈가 다시 붙고 경주에 나설 수 있다는 것에 환호한다. 그리고 참가하는 브리더스 컵...

경주마는 야생마가 아니다. 즉,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 관계가 어떤 식으로 맺어지는가는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는냐에 달려 있다. 영화 속에서 소냐도르는 가족의 구성원이다. 다코타 페닝이 분한 케일은 말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말과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목숨을 구해준 사람과 그 은혜를 갚으리라는 것을 아는 아이. 언어가 전혀 필요없다. 그들은 사랑을 안다.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자식의 꿈을 이루게 해주려는 아버지들의 모습은, 그 꿈을 이루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꿈을 이루도록 도와준 이들에게도 크나큰 행복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좌절하더라도 끝내지 않는것. 끝까지 한번 달려보는 것. 꼴찌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영화기에 가능하다라고 말하려는 순간 이것이 실화였다는 것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누구나 인생의 반전을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그 반전을 맞이 할 수는 없다.

소냐도르라는 몽상가의 질주. 울타리가 없는 초원을 달리지 못한다고 해서 말이 꼭 슬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와 함께 달리는가, 무엇을 향해 달리는가가 질주하는 말을 아름답게 또는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마치 새옹지마의 우화처럼  끊임없이 뒤바뀌는 상황들이 영화의 재미를 더하기도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스포츠 영화라는 장르적 습성을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결말은 쉽게 예상이 된다. 하지만 너무나 귀여운 다코타 페닝을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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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3-09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으니 정말 이 영화를 보고 싶어집니다.
말에 대해선 잘은 모르지만 말이 예민하고 감성이 풍부한 동물이라는
느낌을 받아요. 말의 커다란 눈동자를 보면 어떤 운명적 기운이 전이된 듯하여
기분이 묘해집니다. 전생이 꼭 슬픈 사연이 잔뜩 있는 인간같기도 하구요.
일본작가 테라야마 슈지의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를 보면
경주마에 미친 작가의 삶이 나옵니다. 인생은 그렇게 질주하는 것이고,
질주하는 것에 도박을 건다는 뭐 그런 뜻이지만요.
님 서재를 늦게 알게 된 것이 너무 후회되요!!
전 지금 누룽지를 먹으며 서재에서 잠시 머물고 있답니다.
말도 누룽지를 먹을까요?

하루살이 2006-03-09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선 다코타페닝이 아이스바를 너무 많이 줘서 빠르게 뛰지도 못할 만큼 살이 찐답니다.^^
음, 영화에서도 한 장면 소냐도르의 눈동자를 클로즈업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님께서는 말을 보면서 그렇군요. 저는 소의 눈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던데...
 

8일 수요일, KBS <환경스페셜>에서 독수리를 보여줬다. 현재 세계에 만마리 정도 남아있는 보호종인 독수리는 최근 한국에서 자주 눈에 띤다.  주로 몽고의 여러 지역에 퍼져살고 있는 독수리는 강추위를 피해, 먹이를 얻기 위해, 한국 땅을 찾는 것이다. 철원지방에서 간혹 보였던 독수리들이 최근 광양까지 내려올 정도로 남하한 것은 순전히 먹이 부족때문이다. AI 영향으로 각 지자체들이 철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힘이 약한 것들이 밀려나게 된 영향인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그 이전까지 각 지자체들이 무분별하게 먹이주기 행사를 관광자원으로 활약하면서 독수리들이 떼로 몰려들도록 유도한 데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은 개인적으로 독수리도 철새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 그저 맹금류, 특히 하늘을 나는 용맹한 새라고만 생각해왔는데 말이다. 아무튼 AI 의 전파체로서 독수리가 실제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검증없이 관광의 미끼로 사용했다가 가차없이 저버리는 행정으로 말미암아 독수리는 배고픔과 싸워야만 하는 처지에 몰렸다는 것이 이내 슬프다. 또한 사람의 선입견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지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있다. 나도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알게 된 것인데, 독수리는 사체만을 먹는다고 한다. 살아있는 것을 사냥해서 먹이를 취한다고 생각해온 것은 순전히 잘못된 편견일 뿐인 것이다. (세상에, 독수리가 하이에나였다니...) 그런데 이런 편견으로 말미암아 마을 주변까지 먹이를 찾아 날아온 독수리들을 오리 우리에 가둬버리고 굶기는 잔혹한 일도 생기고 있다. 반면, 광양의 흑염소 목장에선 도중에 죽어버린 염소들의 사체를 벌판에 뿌려줌으로써 독수리들이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배부를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함정은 있다. 그 사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 상태에서 어떤 오염원이 있는지에 대한 검사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한 일인 것이다.

먹이를 인위적으로 주어서 독수리의 개체를 늘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에 대한 논란은, 독수리가 스스로 먹이를 찾을 수있을 정도로 자연이 복원된다면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다. 물론 그 복원이란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게 문제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먹이를 한 입이라도 더 먹기 위해 서열마저 무너지고, 야성마저 사라져버린 독수리들의 치열한 몸싸움을 보자니 너무 가슴 아팠다. 아무리 비정한 생존경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그토록 비열하게 만들어버린 것은 인간의 탓이다. 야성이 사라진 독수리가 상상이 가는가. 가축처럼 되어버린 독수리라니...

독수리가 다시 힘차게 날 수 있는 날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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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3-09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뵙겠습니다.
방명록에 인사를 드릴까 하다가
독수리 글 읽고 너무 동감하여 여기다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알라딘의 말 많은 파란여웁니다. 꾸벅~
어제 이 방송 보면서 말문을 잊었습니다.
조만간 독수리 공부를 해 뵈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철창안에 갇힌 독수리와 농장 주인의 얼굴 두꺼운 거짓말..
인간의 위악성에 치가 떨립디다.

오대산 사진을 보면서 예전 산행이 떠오릅니다.
갖다와서 서투른 그림을 한 장 그린 것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테지요.
앞으로 종종 님의 서재에 꼬리를 감추고 들락날락해도 되겠습니까?

하루살이 2006-03-09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반갑네요. 파란 여우라니. 제가 여우보단 늑대를 좋아하지만 색깔 중엔 파란색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방송을 보면서 치가 떨리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네요. 님은 독수리에 대해 공부까지 하겠다니... 훌륭하십니다. 그리고 그림이라... 왠지 파란여우와 무척 잘 어울리는것 같네요. 꼬리 감추지 마시고 자주 들러주세요. 저도 마실가겠습니다.
 
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첫 날 일간지에 앞으로 없어질 것 같은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미래학자가 예측한 내용이 소개된 것이 기억난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일부일처제였는데, 최근 조용남이 공개적으로 애인을 두자는 인터뷰와 일맥상통한다고 보여진다. 이 소설은 일부일처나 애인을 뛰어넘어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를 주장한다. 나의 아내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또 결혼하는 사태. 즉 1명의 아내에 2명의 남편이라는 신가족제도의 탄생을 소설은 진중하면서도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아내를 사랑하게 된 시점에서부터 아이가 태어나기까지의 전 과정을 축구와 빗대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설정은 경이롭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경쾌한 문체에 통쾌한 웃음까지 선사하니, 그야말로 재미 만점이다.

만약 축구를 좋아한다면 더욱 이 책을 놓쳐서는 안될듯 싶다. 축구에 대한 상식과 어떻게 보면 하잘것 없는 스타들의 인터뷰들이 소설 속 이야기 적재적소에 배치됨으로써 축구도 사랑이나 가족 이야기도 그 효과가 배가된다. 예를 들면 팀이 2부리그로 떨어졌음에도 팀을 옮기지 않았던 바티스투타를 그라운드의 로맨티스트로 묘사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거기에 빗대기도 한다. 그리고 남편이 둘인 상황을 투톱의 공격 형태를 지닌 포진도로 풀어내기도 하는데, 그 맞장구가 너무 절묘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소설은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현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지켜가고 있는 제도들이나 관습이 얼마나 우리를 얽매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극한의 예시로 보인다.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정의가 영화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고, 그것을 당연시여기며 마지막 희망을 가족에게 걸었던 사람들에겐 엄청난 충격일수도 있겠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가족이 구성되고, 그것이 어떤 심리적 기제를 가지고 진행되며, 현실 속에서 가능하도록 작동될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조마조마하다. 특히 주인공인 첫 남편의 심리가 어떤 식으로 혁명적 제도의 변화에 수긍해가는지 지켜보는 것 또한 재미있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축구를 현재까지 싫어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축구를 좋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니 축구를 좋아하려 노력하지 말라.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생에 손해볼 것은 없으니까'라는 단상은 어느새 아내의 또다른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있다.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이 있을까, 없다. 그 사람을 좋아하려 노력하지 말자. 그 사람을 싫어한다고 해서 인생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테니까 '라는 식의 비꼼은 소설을 유쾌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의 이 단언이 점차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일부일처제라는 가족 제도 그대로 완벽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한때 세상을 풍미했던 애인두기는 아마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능력있는 사람으로 대변될 것이다. 바람 피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바람 피우는 것을 들키지 말라라는 식의 교훈이 떠도는 현실을 보면 과연 일부일처제가 무엇 때문에 지켜져오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만도 하다.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누구의 행복을 위해서 그것이 정착되어졌는지, 또는 그 제도와 현실간에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우리는 타성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꼭 가족제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한번쯤 그것이 왜 당연한 것인지 의문을 가져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만약, 당연한 그것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나에게 괴로움을 준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말미암아 행복하다면, 그저 불온한 상상을 통해 심리적 일탈의 재미만을 느끼는 것도 괜찮을듯 싶다. 이러나 저러나 이 소설 읽기는 당신에게 웃음을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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