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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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올해 처음으로 시집을 사보기도 하고 문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문학 밖에서 살아왔던지, ‘문학동네라는 출판사도 올해 처음 알게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 가까이 참으로 무식하게 살아온 같다. 그동안의 반성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아뭏든 올해 나는 문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에겐 변화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손을>에서 말한대로, ‘책을 읽는 다는 ’, 그리고 문학 읽는다는 (물론 아타루는 문학을 음악, 미술 등의 예술과 , , 철을 아우르는 폭넓은 의미에서 사용했다.) 하나의 혁명이라고 말했듯이, 나에게는 혁명 시작이었다( 믿고싶다). 물론 이제 책을 열심히 읽자라고 마음먹은지 1년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금방 그렇게 바뀔리는 없을 것이다. 더불어 글못쓰기로 말하자면 해도해도 너무한 이공학도 아니었나.

 그동안 소설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필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알게되었는데, 문체를 나름 주목해가면서 읽어가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읽으면서 간결하고 남성적인 힘이 느껴지는 문장이 어떤 것인가 조금은 알게되었다. 아울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읽으면서 김훈 작가의 문체가 나에게 주는 느낌과 헤밍웨이의 문제가 주는 느낌이 비슷한 부분이 일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하나의 문장이라도, 아주 간결한 주어-동사 형태의 건조한 문장이 이어지는 방식을 보여주는 헤밍웨이의 문체는 하드보일드한 문제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문체까지 관심을 가지면서 읽게 되니, 빨리 읽지는 못해도 나름 색다른 재미를 느끼면서 읽게되었다.  나아가 올해는 국내의 출중한 여러 젊은 작가를 처음 알게되었는데, 김연수, 김영하, 김애란, 박민규 등의 작가들이었다(사실 아직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다.). 최근에는 김영하 작가의 글에 재미를 느끼게 되어 조금씩 읽고 있다.

  김훈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김영하 작가의 문체는 어떨까 궁금했다. 그래서 읽어보게 소설이 <살인자의 기억법>이었다. ‘짦은장편소설이었지만, 당황스럽기도하고 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흥미와 혼란을 함께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은 어떻게 읽어야할까.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잔인한 살인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조금씩 오싹오싹한 느낌도 주는 것이, 조이스 캐럴 오츠의 <이블 아이> 나오는 단편소설 같은 느낌도 주었다. 장면을 이끌어가는 1인칭의 화자는 마치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처럼 의식의 흐름들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살인자의 입장에서 일관되고 치밀한 의식의 흐름들을 모아둔 기록의 형태가 아니다. 그보다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파악이 안되는 나약한 인간의 혼란스러운 기억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후반부에 드러나는 반전에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 기억이라는 것은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중요한 기능이기도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며, ‘기억 통해 지식의 축적과 전수 그리고 사유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억이라는 요소가 빠진 알츠하이머 환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않고 기억해내기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자신의 병에 굴복하게 된다. 의식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던 화자의 인식 체계가 뒷부분에가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이 진행되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계의 즈음 발견되는 여자의 부위는 이따금 나를 섬뜩하게 만들며 강한 인상을 남기고있다.

  김영하 작가의 문장 특성을 소설 하나로 파악하기는 힘들겠지만, 문장이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고 간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김훈 작가의 문체처럼 길고 짧은 문장의 호흡을 의식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했다. 속도감있게 읽혀지는 이유는 아마도 김영하 작가의 간결한 문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마무리에서 보여지는 극도로 혼란한 상태는 소설에서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과연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을 것인지에대한 막연함때문이 아닐까. 마치 알츠하이머 환자의 머리 속에 들어갔다 나온 같은 김영하 작가의 고민과 연구의 흔적을 느껴본다. 소설을 읽고 당황스러운 막연함과 혼란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나를 김영하 작가가 본다면 성공이군!’하면서 좋아하실지 모르겠다. 나에겐 짧지만 모호하고 쉽지않은 소설이지만,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 그리고 알츠하이머에 걸린 작중 화자의 상황과 성격을 리얼하게 묘사하는 핍진성 강한 인상을 받았다.

(7면)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48면)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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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미네르바의 올빼미 4
잉에 아이허 숄 지음, 유미영 옮김, 정종훈 그림 / 푸른나무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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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에 아이허 숄 지음

 유미영 옮김/정종훈 그림

 

그리고

서경식의 <내 서재 속 고전>

백장미를 기억하던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겹쳐읽기

소설책의 제목을 닮은 책의 원제는 백장미이다. ‘백장미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 뮌헨 대학 학생들의 조직 이름이다. 책의 저자는 백장미소속의 학생이자 나치에 체포되어 처형된 한스 숄과 조피 숄의 누나이자 언니인 잉에 숄이다. 서경식 교수의   < 서재 고전>에서 책에 대해 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치하에서 독일인이 저항했던 역사를 훨씬 훗날에나 알게되었을 것이다. 마침 얼마 가토 슈이치의 <양의 노래> 읽고 강한 인상이 아직 남아 있던 차에 책을 발견하게 되어 바로 읽어보게 되었다. 가토 슈이치는 나에게 방관자이기를 그만둘것 아무리 과거의 일이든, 나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든 알아야한다 교훈을 주었기에 더욱 진지하게 읽어나갈 있었다.

그렇다면 독일 학생 교수가 백장미활동으로 처형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나치의 만행을 알리고, 히틀러에 대항해서 투쟁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삐라 6종을 42년에서 43년에 걸쳐 살포한 혐의다. 마지막 삐라를 뿌리던 , 학내 나치당원인 수위에게 발각되 체포되었고, 몇일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판결을 받은 바로 처형되었다. 나치는 유대인에게만 끔찍한 일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반발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독일을들을 감시하고 탄압했던 것이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는 나치에 동조하지 않은 일반 시민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로 두려움으로 인해 행동으로 표출된 사례는 매우 드문 같다.

 

잉에 숄이 남긴 얇은 책을 통해 알게 놀라운 사실은 나치가 장애인과 다운 증후군 같은 증세가 있는 아동들을 집단 학살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아이들이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저해할 여지가있다고 나치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계사에 관심이 덜했던 나에게 새로운 충격이었다. 위대한 철학자와 사상가의 나라에서 자행되었다고는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무엇이 나치를 이런 광기로 몰고 갔던 것일까? 어떤 이유로 750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학살을 당해야 했던 걸까? 이러한 집단 학살이 가능했던 이유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기술하듯, 나치 동조자인 아이히만의 생각없음으로만 설명 가능할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보다는 이러한 결과를 체계적이고 집요하게 추진하게했던 동인(動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잘못된 사상에의 믿음이 절대적인 정치권력의 힘과 결합하면 얼마나 파괴적일 있는지 역사는 보여주고있다.

서경식 교수는백장미 기억하던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에서  나치의 역사를 거쳐 다시 현재 일본 사회를 조망한다. 일본 자민당의 헌법 개정 추진움직임으로 눈을 돌린다. 헌법 개정의  뼈대는 자위대를 국군으로 바꾸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억압하여 외국인의 인권을 명백히 부정하려는 내용이라고 경고한다. 일본의 파시즘화는 어디까지 진행될까?  이것은 우리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안보나 외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것이고, 심지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 발전과 연관된 모든 일들에도 영향을 미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토 슈이치가 말한 방관자이기를 그만두라그리고 알아야한다 명제는 현재 우리에게도 중요하고 절실한 물음이라 생각한다.

 

백장미활동으로 체포되어 처형된 독일인들을 기억해보려 한다. 괄호 뒤의 날짜는 이들이 처형된 날짜이다.

조피 (1921-1943.02.22): 당시 철학, 생물학과 학생

한스 (1918-1943.02.22): 당시 의대생

크리스토프 프로프스트(1919-1943.02.22): 당시 의대생

알렉산더 슈모렐(1917-1943.07.13): 당시 의대생

쿠르트 후버(1883-1943.07.13): 당시 신학및 철학과 교수

빌리 그라프(1918-1943.10.13): 당시 의대생

이들 외에 백여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이후 재판을 거쳐 사형되었을 것이라고 잉에 숄은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나는 현대 실존 철학의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나치에 동조하고 몸을 사렸던 하이데거보다는 학생들 및 교수를 포함한 백장미단 위대해보인다.

 

조피 숄이 처형을 앞두고 다른 수감자에게 한 말

"나는 죽는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의 행동이 몇 천 명의 사람들 마음을 흔들고 깨우칠꺼야. 틀림없이 학생들 반란이 일어날 거야."

한스 숄이 교수대에서 마지막으로 외친 말

"자유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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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수업 -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질문
박웅현 외 지음, 마이크임팩트 기획 / 알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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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 노예로 살지 않기위해 끊임없이 물어야하는 질문일 것이다. 이에대해 고미숙 선생은 동양철학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우선 우리를 삶의 노예로 만드는 요소로 두려움 충동 말한다.

두려움의 원인은 사회구조나 인간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권력관계 그리고 구조로부터 억압과 소외를 겪기 때문이다.  영화 <스타워즈>식으로 말하면 나를 파괴할 있는 어둠의 두려움 것이다. 한편 저자는 동양사상에서 좀더 근본적인 두려움의 원인은 생로병사라고 말하고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우리가 겪는 모든 보편적인 경험들이 것이다. 특히나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죽음에대한 공포는 우리가 죽음을 모르기때문일 것이다. 

우리를 삶의 노예로 만드는 또다른 충동의 원인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식욕, 성욕이다. 나아가 지배욕, 인정욕은 이러한 기본적인 욕망의 변형이라고 한다. 우리가 뉴스에서 빈번하게 접하는 지도층의 성범죄(정치인, 대학교수 등등) 자신의 희생을 쾌락으로 보상받아야한다는 signal 몸에 내재화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고미숙 선생은 분석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가 법을 만들고, 이를 개정하거나 사회제도를 바꾼다고해서 개인인 내가 두려움과 쾌락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 그러므로 내적인 접근을 통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따져야 한다 말하며, 고미숙 선생을 이를 위해 동양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인간 우주 같이 연구했으나, 서양철학은 일찌감치 이를 분리하여 연구하여 분석에는 뛰어날 모르지만 요소들을 종합하는 데는 미숙한 결점이 있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적 관점에서,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우주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가볍게 얘기하는 관상학, 사주명리학에서는 본인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읽어내야 비밀을 있으며, 내가 어떤 리듬을 갖고 운명을 창조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라고 강조한다. 년말 혹은 매년 , 소위 점집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내년에는 나의 운세가 어떠할지, 나의 배우자는 어떤 사람일지, 나의 사업은 어떻게 될지를 궁금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주명리학과 관상학을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들은 고객에게 진실을 얘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때문일 것이다. 고미숙 선생은 중요한 것은 지도를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나의 지도를 결핍과 상처 간주하게 되면 지도는 무용해진다는 . 모든 사람이 모든 장점을 골고루 가질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넘치는 조율하고, 모자란건 채우는 이라고 후천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것이 진정한 공부이자 수행이며 이를 하지 못하면, 두려움이 자라고 나아가 영혼이 잠식당한다는 것이다. 괴테가 고뇌와 슬픔을 노래와 글로써 승화했으며, 니체가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스스로를 극복해나가라고 외쳤듯이, 우리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라고 주문한다.

인문공부를 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있는 이점 중의 하나는 우리가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인간 되는 길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자유로움은 구속 내지는 소속을 전제한다. 우리를 속박하는 대상으로부터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거리를 있는 행위는 대상을 남과 다르게 인식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럴까? 만약 이게 아니라면? 하고 의문을 던지는 일로부터 우리는 삶의 자유로운 주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강연기록의 마지막에는 고미숙 선생과 청중과의 질의응답이 들어있는데, 여기에 아주 재미있는 고미숙 선생의 답변이 있다. 질문자의 철학과 선배는 취업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과를 했는데 이렇게 외부적 요인에 의한 두려움에 어떻게 맞서야하는지를 물었더니, 고미숙 선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인류의 미래는 백수다. 백수밖에 없다. 앞으로 웬만한 일들은 모두 기계가 것이다. 하지만 백수가 자유인이 되려면 지혜로워야 한다. 인문학을 알아야한다. 철학하는 백수. 이것이 인류가 나아가야 길이다.”

 

 

 

내적인 접근을 통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따져야 한다.

내가 어떤 리듬을 갖고 내 운명을 창조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사주명리학을 언급하면서)

(관상학을 언급하며)
중요한 것은 이 지도를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나의 지도를 결핍과 상처로 간주하게 되면 이 지도는 무용하다.

(사주명리학이나 음양오행론이 알려주는 사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오행에 치우쳐 있으므로, 모든 이의 팔자는 평등하다. 모든 걸 골고루 다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해야할 일은 넘치는 건 조율하고, 모자란건 채우는 것이다. 이것이 공부이자 수행이다. 이를 하지 못하면 두려움은 자라고, 강박증, 분열증을 통해 영혼이 잠식하게 된다. 두려움은 정면으로 돌파해야한다.

자유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 즉 운명애를 갖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두려움과 충동이라는 삶을 노예화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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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수업 -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질문
박웅현 외 지음, 마이크임팩트 기획 / 알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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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수업> 박웅현 편 -‘왜는 왜 필요한가’그리고

          박웅현의 <여덟단어> 중 ‘자존自尊’ 편 겹쳐읽기

 

 

   박웅현 선생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제시하며 강의를 시작한다. 인생의 즐거움은 느낌표를 찾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물음표가 있어야 느낌표가 따라온다. ?라고 질문하고, 아하!하는 깨닮음과 발견의 기쁨을 크게 누리는 것이 의미있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왜는 왜 필요한가라는 주제의 강의는 우리의 삶에서 ?라고 묻는 일이 필요한가에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해본다. ? 내가 좋아하던 자연과학을 선택하여 공부했는가라고. 하지만 지금은 왜 그만 두게 된 것일까? 분명 나는 ?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진 일이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답을 찾기는 커녕 회피로 일관했다. 결국 좀더 나이가 들어서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대한 답을 구해야만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위기상황에서 나 스스로 무너졌던 것이다. 사상누각. 나는 나의 실패의 원인을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회피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싶은가? 나는 왜 이러한 주제를 선택했는가? 등등 나의 인생에는 수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고 나는 그때마다 스스로를 책임져야만 했는데. 매번 내 안으로 움츠려들었던 것이다. 나는 나를 가두고 있던 알을 스스로 깨고 나오지 못했다. 아니 깨고 나올 용기를 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뭐가 그렇게 부족했기에 용기를 내지 못했던걸까. 그 실마리 중 하나로 박웅현 선생은 자존自尊을 제시하고 있다. , 나에게는 나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이 부족했던 것아 아닐까. 나의 인생에서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그 가치를 지키려는 용기가 되어주는 것이 자존이라 할 수 있겠다. 박웅현 선생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자존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동의할 수 없는 권위에 굴복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곧 ?라고 묻는 일은 관습과 권위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도록 해주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수긍할만한 것에는 느낌표를 가지고 수긍할 수 있게 하는 반면, 동의할 수 없는 가치에대해 이건 아닌데라고 말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박웅현 선생의 다른 책 <여덟 단어>는 여덟가지 단어를 통해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혹은 태도를 생각해보려는 시도이다. 그 중 가장 첫 장이 자존自尊 편이다. 우리 나라는 다름에 대해 굉장히 민감한 면역반응을 보이곤 한다. 근래에 들어 다문화라는 표현이 사용되고있긴 하지만, 내가 학창시절에는 단일민족국가로서 대한민국을 이야기하던 시대였다. (대체 신라 시대 50여개, 고려 시대 60여개, 조선 시대 30여개, 도합 140여개의 외국 성씨가 귀화했던 나라에서 단일민족국가라니!) 우리 사회는 이 다름을 강박적으로 두려워하며 심지어 분노하기도 한다. 내가 대학에 가지 못하면 나는 실패자인가? 40대의 나이에 외제차를 타고, 집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인가? 우리는 이 자존自尊을 스스로 보살펴 키우지 못했기에 남과 다름을 두려워하고, 때론 좌절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그 이유로 나의 기준점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준점은 언제나 내 안에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나아가 자존을 키워주는 교육과 관련하여 미국과 한국의 교육제도를 비교하고 있다. 미국의 교육제도는 네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교육이라면 한국의 교육제도는 네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교육이라고 말한다. 미국 교육이 학생의 안에 있는 자질과 열정을 발견하고 외부로 끌어내도록 도와준다면, 한국 교육은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삶을 살도록 필요한 것들을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완벽한 교육제도는 없으니 논란의 여지가 있을 만한 세부 사항들은 제외하기로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생의 자존감을 북돋우는 교육을 말하려한다는 점이다. 결국 박웅현 선생은 자존이란 그 기준점을 나의 안에 찍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그 기준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길을 무시하지 말것을 주문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인생의 답이 지금, 여기 우리의 인생 안에 있으며, 살아가는 우리 인생을 사랑할 것(amor fati)도 잊지 않고 당부하고 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배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니다."
-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중에서, <생각수업> (29면)에서 재인용

Be Yourself
"여러분은 모두 폭탄입니다. 아직 뇌관이 발견되지 않는 폭탄이에요. 자존을 찾고 자신만의 뇌관을 찾으세요."
- <여덟 단어>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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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막스 코즐로프 외 지음, 박태희 옮김 / 안목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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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는 필립 퍼키스의 사진집 <THE SADNESS OF MEN>에서 제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존 브레이버리 러바인과 나눈 대화와 예술 평론으로 퓰리쳐상을 받은 막스 코즐로프가 쓴 사진집의 서문을 함께 엮은 책이다. 이 책의 번역은 역시 필립 퍼키스 선생의 제자이자 본인 역시 사진가이기도한 박태희 선생이 진행하고 기획한 것으로, 책의 후반부에서는 대화록에 나오는 모호한 부분들을 직접 필립 퍼키스 선생과 함께한 대화를 통해 좀더 명확히 밝히고있다.

 

   가끔 살펴보면 이 책은 얇고 어려운 얘기를 나눈것 같지 않아 지나지키 쉬운 내용들이지만 책을 다시 들여다볼 때마다 '사진을 찍는 활동을 한다는 것'에대해 정말 본질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말처럼, 이따금 이 책을 들여다보면 필립 퍼키스 선생은 늘 사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췌한 부분은 내가 만든 키워드에 따라 다시 배열해서 묶어보았다.

 

 

  #바라보기.사진 찍기.셔터 누르기.인화에 관해

"나는 정보 전달을 위해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내 사진의 주제는 다른 방식으로 나옵니다. 세상에 대한 동정을 담아내기보다 그저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 어떤 질서를 찾아내려 합니다."  (41)

 

"불현듯 무언가 다가오는 순간 셔터를 누릅니다.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단지 바라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마법과도 같은 변화를 말합니다. (중략)... 사진에 담긴 형식 혹은 사진의 순간성 혹은 사진에 찍인 바로 그 순간의 무엇, 찍힌 순간의 모습, 프레임 안에 담긴 방식 때문에 일어나는 초월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44)

 

"35mm 카메라를 쓴다면 노출은 더 주고 현상시간은 줄여야 그림자 부분이 잘 살아나는 필름을 만들 수 있다."   (24)

 

"대상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그저 시선을 끄는 것을 향해 셔터를 누릅니다. 그 다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결정하는 과정이 편집과 인화입니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는 최대한 '백치'상태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와 이게 뭐지? 멋지다. 저 나무덤불에 떨어진 빛을 봐! 저사람의 손 모양 좀 봐!' 이런 식입니다. 그저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인화와 편집을 할 때는 찍은 것들이 진정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건지 고민합니다. 인화를 할 지, 그냥 필름으로 남겨둘지도 결정합니다."   (41-42)

 

"사진은 그야말로 삶의 방식 그 자체 입니다. 대상에 반응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우린 항상 무언가에 반응합니다. 그러므로 사진이란 반응하는 법을 배우는 매체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사진가이므로 삶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도 모르겠어요. 우린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진정으로 삶이 경이롭기 때문이지요."

 

"인화는 기억을 바깥으로 공표하는 과정입니다."    (81)

 

"(tone)안에, 그 단계들 안에 수많은 감정이 존재한다."   (25)

 

 

  #사진 배열(sequencing)에 관하여

"편집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소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의 연결이다."   (9)

 

"주제나 소재보다는 사진과 사진 사이에 존재하는 무의식의 흐름을 중시하려 했어요. 음악의 선율이나 시적인 감수성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풍경, 인물, 거리, 멕시코... 그래서 독자들이 편집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하게 될지는 전혀 예측을 못하겠군요. (중략)... 난 다른 이들이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거나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모호하고 혼란스러워도 만일 내 사진과 어떤 공감이 가능하다면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82)

 

  #프로와 아마추어

"아마추어가 되길 원하는지 프로페셔널이 되길 원하는지 스스로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선 누구나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이 꼭 내 삶의 전부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중략)...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강의를 하고 상업 사진을 찍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내 가족을 부양합니다. 하지만 내 작업과 돈 버는 일을 혼동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작업과 일을 섞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작업은 아마추어처럼 하고 돈을 버는 일은 프로처럼 하세요. 두 가지를 혼동하지 마세요. (중략)... 누구나 위대한 사진가로 인정하는 스티글리츠는 평생 자신을 아마추어 사진가라고 불렀지요."   (83-84)

 

  #사진과 사색하는 삶

 

"사진은 시각적인 '하이쿠'라고 할 수 있다. (존 러바인)"   (46)

 

"나는 사진 작업을 사랑합니다. 무언가를 보존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 풀어낼 수 없는 무한한 수수께끼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사진은 답이 없는 수수께끼같아요."   (35)

 

"내 작업에서 소통이란 주제 그 자체보다는 심리적, 정신적 공명에 대한 것입니다."

(37)

 

"사진은 목격한 대상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 속에서 감수성이 풍부하거나 예민한 존재에 대한 가치는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있지요.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행동가이며 생산자이고 아이디어 맨이지요. 충만한 감성으로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사색에 잠기거나 하는 대신 말입니다."   (45)

 

 

 

‘사색하는 삶’의 중요성은 한병철 교수의 <시간의 향기>에도 등장한다.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시간성을 다르게 느끼는 이유에 대해 한병철 교수는 우리의 시간이 원자화 되어 사건과 사건사이의 중력이 소멸되어버렸고, 그로 인해 시간의 역사성, 시간의 서사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이해한 것을 나의 언어로 바꾸면 시간의 원자화사건과 사건사이에 존재했던 끈적 끈적함이 사라진 결과인 것이다. 사건사이의 유의미성이 소실되고 시간이 파편화되어버린 사회에서 우리는 항상 시간에 끌려다니고 시간에 쫒길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만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손으로 스마트 폰의 화면을 전환하고 언제나 정보를 찾아 다니는 상황, 디지털 사진기로 대상을 포착하고 즉시 화면을 쳐다보며(침팬지가 하는 행동을 닮았다해서 외국 사진가들은 chimping이라고 한다) 삭제할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 사진의 과정이 그러하다.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를 썼던 것은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 애도 과정에서 보게 된 어린 시절의 어머니 사진에서 비롯되었다. 사진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햐야할지를 오랜 시간동안 사유한 끝에 나온 책이었던 것이다. 결국 (전통적인) 사진의 과정, 다시말해 셔터를 누르거나 사진을 인화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 혹은 사진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것은 기존 사진 매체의 제약으로 인해 사진가 개개인의 사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것이다. 현재 디지털 작업을 하고 있는 사진가 중에서도 아날로그 사진에 익숙한 작가들의 작업 흐름은 분명 디지털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들과 많이 다를 것이다. 이는 디지털 매체가 우월하냐 아날로그 방식이 우월하냐와 같은 맥빠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의 본질이 어떤 것이었나를 생각해보기 위함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진을 하는 과정이 내 앞에 있는 어느 대상, 어느 사진이 나에게 주는 반응이 사진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라고 바르트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고 생각한다. 필립 퍼키스 역시 이 책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게 하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혹은 영화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에서 보듯, 마들렌 과자 하나가 등장인물의 옛 기억을 불러일으키고있다. 한 인간의 몸에 저장된 기억은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이다. 미국 CIA가 연구비를 지원한 전기 충격(고문) 기술에관한 연구(1950년대 캐나다 맥길 대학에서 진행됨)를 보면 인간이 정체성을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외부에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자극(현재 내가 어디 있으며, 지금이 언제인가를 인식)과 기억(나는 누구인가)이라고 했다. 자의든 타의듵 외부의 자극을 통해 과거를 끊임없이 기억하는 행위는 나에게 의미있는 사건들 사이의 유의미성, 서사성을 이루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한병철 교수는 이 과정을 사건과 사건 사이의 중력이 회복된다라고 말할 것 같다.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 필립 퍼키스는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그저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관찰하거나 사색에 잠기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파편화된 시간들의 연속 속에 우리 자신을 그냥 내던지는 일일 것이다. 사색하는 삶은 이 시간의 원자화에 저항한다. 결국 우리의 시간은 사진을 바라보고 이에 반응하고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50년 넘게 아날로그 사진, 오로지 흑백의 톤(tone)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흑백 사진만으로 작업해온 필립 퍼키스의 간결한 대화록은 다시 꺼내  볼 때마다 묵직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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