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의 시대 - 진단은 어떻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수잰 오설리번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잉 진단의 문제와 당사자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 진단의 시대

: 진단은 어떻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수잰 오설리번(Suzanne O'Sullivan) 지음

이한음 옮김 [까치] (2025)




 

최근 집안 어르신 한 분이 임플란트 시술을 받으셨다. 여기까지는 어르신의 연세를 고려할 때 부실해진 치아를 보완하는 의료 행위로서 수긍할 수 있는 팩트일 수 있다. 다만, 나의 의문은 어르신의 연세가 95세라는 점이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임플란트는 모든 이에게 적용할 수 있는 치료 시술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아무리 치아가 불편하다고 해도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임플란트 밖에 없었을까.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으나 95세가 된 노인에게 임플란트를 권한 의사는 어떤 근거로 시술을 제안하고 시행했는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또 다른 기억도 떠오른다. 이미 몇 년 전의 이야기인데, 어느 날 뉴스에서 OECD국가 중 유독 우리나라 산모들에게 적용되는 제왕절개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통계를 보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왕절개는 개복 절차로 전신 마취까지 해야 하는 상당히 큰 의료 시술이다. 자연 분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료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제왕절개 수술로 인한 출산은 산모의 회복도 자연 분만보다 몇 배 느리기도 하고, 따라서 산모의 회복에 필요한 의료 절차나 비용도 그만큼 더 많이 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출산 과정에서 유독 한국인만 산모가 제왕절개를 해야만 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 아닐 텐데,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제왕절개는 누구를 위한 의료 행위인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 풍자 문학의 대가라고 불리기도 했던 조너선 스위프트가 신랄한 독설과 문제의식을 드러낸 자신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서 이렇게 말하는 대목을 만났다. “의사에게 있어서 가장 탁월한 능력은 진단하는 기술이다.”(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325) 풍자의 대가인 그가 이 문장을 쓴 맥락은, 일부 의사들이 자신의 무지를 가리고자 의사의 권위를 내세우는 위선을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나아가 정치가나 국왕 역시 이 비판의 대상에 넣고자 했다. 과거에 환자의 질병이 악화되면, 사기꾼 의사는 환자가 곧 사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함으로써 그 예언이 이루어지거나, 예상 외로 환자가 회복하면 자신이 병을 치료하는 약품을 적절히 사용했다고 말하는 행태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신경과 전문의이자 작가인 수잰 오설리번의 진단의 시대를 읽으며 진단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앞의 두 사례와 더불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물론 저자 수잰이 스위프트과 같은 독설과 풍자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지만, 두 저자 모두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안고 있는 제도적, 구조적 문제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들여다보았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수잰 오설리번과 조너선 스위프트는 모두 아일랜드의 더블린 출신이라는 사실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의 흥미를 잃지 않게 해주었다.


 

진단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로는, 환자가 지닌 병의 상태를 의사가 판단하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의학에서 진단이 갖는 의미는 좀 더 복잡해 보인다. 저자가 말하는 진단은 병의 정체를 밝히고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넘어선다. 의사가 내리는 진단 행위는, 환자 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시선이나 삶의 의미에까지도 영향을 주는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곧 오늘날 자격을 갖춘 의사의 진단이란,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진단이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행위라는 점을 한 가지 사례로 따져보자. 자폐증의 경우다. 지구상의 모든 자폐증을 지닌 사람들이 같은 정도의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자폐 진단을 받은 이들은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데 반하여, 사회는 명확한 기준으로 이들을 범주화하길 요구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과연 누가, 어떻게 이 기준을 정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나아가 의학의 발달로 이 기준이 매우 합리적으로 규정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에도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뿐만아니라 자폐로 진단을 받은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구별 짓기, 바로 낙인 효과도 의도치 않게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자폐 경계성아이들에 대한 주변인의 시선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다. 진단 범주에 포함된 아이의 정체성과 심리적 상태, 자존감, 행복감 등에 오래 지속되는 영향을 남길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ADHD 진단이나 우울증 진단에도 이와 같은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례 모두 진단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진단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책 전체를 통해 유지되는 관점은, 진단 행위에 좀 더 신중해야한다는 입장에 가깝다. 그는 현대 의료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진단 행위가 정도를 벗어남, 곧 과잉 진단, 과잉 의료 행위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빈번히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나는 앞서 언급한 집안 어르신의 임플란트 시술 행위나 우리나라 제왕절개 시술의 유독 높은 비율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자폐증 진단이나 ADHD 진단에서 해당 진단 범주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은, 바로 이 기준 정하기, 혹은 경계 짓기의 모호함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보완하고자 스펙트럼이라는 아이디어를 도입했을지 모르나,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증상을 가진 이들을 몇 가지 범주로 단순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오염 물질이나 공해의 증가, 스트레스의 증가 등이 자폐나 ADHD 진단 결과의 증가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거의 폭발적인 증가라고 여겨질 정도의 즉각적인 큰 변동을 초래하는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저자는 오히려 진단 기준, 혹은 경계 위치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보는 듯하다. 현대 사회에서 자폐증 진단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통계는, 새로운 진단 기준/범위의 설정으로 인해 폭넓은 증상의 차이가 단순화되고 새로운 진단 범주로 편입되면서 발생하는 결과라고 해석될 수 있겠다. 저자는 이 지점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들여다본 셈이다.


 

진단은 이처럼 판단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에 달려 있다. 전문가라도 결국 사람의 판단과 결정에 의존하는 까닭이다. 특히 과잉 의료, 과잉 진단의 결과는 간단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누군가가 과잉 진단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되었다고 해보자. 저자에 따르면 여기에는 추가 과정, 곧 한 개인에게는 추가 검사와 우울증 진단에 따른 약물 처방과 치료 과정이 개입하게 된다. 당사자의 입장에선 어떤가. 진단을 받은 당사자는 우울증 환자라는 낙인을 얻게 될 수 있고, 기존에는 의식하지 못하거나 심하지 않았던 불안 증세로 더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도 우울증 환자에게 적용되는 의료 행위에 대한 보험 처리, 약물에 대한 보험 사항이 추가로 검토되고 시행될 것이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이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지 않았다면, 진단에 따라오는 일련의 의료 행위나 당사자 혹은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불필요했을 것이란 의미다. 따라서 저자가 반대로과소 진단으로도 진단을 받은 이의 고통과 불편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진단하는 행위 그 자체는 의사의 전문 행위이면서도 주관적인 성격을 내포하는, 복잡하고 책임감을 요하는 행위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저자는 의료계의 과잉 진단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의료계의 노력과 진단에 대한 새로운 시선도 필요해 보인다. 진단을 받은 당사자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자주 눈길이 갔던 지점은, 당사자 입장의 관점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진단이 가져오는 낙인효과에 대한 점이다. 최근 어느 유명 과학커뮤니케이터가 방송에서 인간의 유전 형질과 관련한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된 사례가 있다. 그는 쌍커풀이 대립 형질 가운데 우성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모양인데, 여기에 생물학자들의 거센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쌍커풀이 우성이라는 지식은 현재 중학교 3학년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대목이라 틀린 정보는 아니라 할 수 있다. 다만 나의 짧은 지식을 동원하여 이해한 바로는, 이 문제에 몇 가지 사회·문화적 파장을 가져올 수 있는 지점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몇 가지 특정 대립 형질이 비교적 뚜렷하여 우성과 열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언급된 교과서적 지식이 지니는 맥락이 조금 미묘하기 때문이다. 이는 순수하게 생물학적 관점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유전자의 형질을 지시하는 개념이지만, 이 표현이 자칫하면 왜곡되어 소비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우성과 열성이 대중의 인식으로는 우월함과 열등함으로 소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방송 매체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미 전 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공영 방송에서 우월한 유전자라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쓰고 있지 않은가. 이 표현은 사회 속에서 혐오와 차별에 이용되고 소비될 여지가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이 인식이 우생학적 사고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문제는 쌍커풀과 같은 인간의 대립 형질이 비교적 뚜렷하다고 해도, 멘델이 완두콩으로 한 실험 사례처럼 특정 형질의 발현 기작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멘델이 완두콩에서 비교한 대립 형질은 하나의 유전자가 특정 형질을 발현할 정도로 단순한 사례다. 반면 인간의 대립 형질의 경우, 어느 유전자 하나가 쌍커풀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인간의 형질은 대개 수많은 유전자가 개입하여 발현되는, 꽤나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드러난다는 점이다. 쌍커풀이 우성과 열성이라는 매끄럽고 단정적인 판결을 내리기에 여전히 모호한 지점이 있다. 그러므로 생물학자들의 비판을 받은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발언이 현재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이기에 완전히 틀린 지식은 아닐더라도, 이러한 유전자 발현의 우열의 문제, 경계 짓기의 문제가 언제나 매끄럽고 분명하게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다. 쌍커풀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존재가 열등하게 인식되어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이렇게 사회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식은, 특히 교과서 저자들이 주의를 기울여 앞으로 다듬어가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쌍커풀의 생물학적우성/열성 판단은 인류 사회의 오랜 이분법적 논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른바 정상/비정상의 문제와도 잘 결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저자가 사례를 든 자폐증’, ‘ADHD', '우울증’, ‘진단 같은 문제 역시 의사/전문가의 진단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진단 범주에 포함된 당사자의 경우, 이들은 진단 이후 사회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저자는 우리 인류의 문명이 고도로 발전함으로써 진단의 범주에 들어간 병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라기보다는, 의료의 발달, 진단 도구의 발달과 고도화로 이전에 규정된 정상 범주가 협소해지며 상대적으로 과잉 진단이 증가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에 이 당사자를 바라보는 비-당사자의 인식과 태도가 중요해진다. 나와 다른 특징을 가진 인간에 대한 이해 역시 관용과 배려의 시선에서 더 깊어져야 할 일이다. 또한 어느 진단 범주에 포함된 당사자는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진단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존재로서 관심을 갖고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일도 필요하겠다. 이 당사자들은 의사의 진단 선언에 수동적으로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불안하고 어려운 순간을 직접 경험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사회와 공동체는 진단 당사자들의 곁에서 이들의 경험과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혼자가 아님을 알도록 응답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더월드 - 심해에서 만난 찬란한 세상
수전 케이시 지음, 홍주연 옮김 / 까치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해, 물과 맺어진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는 곳

<언더월드>

(The Underworld)


수전 케이시 지음

홍주연 옮김 [까치] (2025)

 



최근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서 진도 8.8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전후로 태평양을 마주한 일본의 해안에 향유고래 4마리가 밀려왔다는 기사를 보고 마침 지난 81일이 탄생 206주년을 맞은 허먼 멜빌도 생각이 났더랬다. 이번 향유고래 기사와 같이 바다 깊은 곳에서 발생한 지진을 감지하는 바다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심해 갈치가 제주 해안으로 떠올랐다는 기사도 비슷한 사례다. 이런 동물들의 행동을 보면 <모비딕> 1장에서 이슈메일이 혼잣말하듯 내뱉은 우리는 영원히 물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이번 더위에 느릿느릿 읽은 책의 저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수전 케이시의 <언더월드>는 이슈메일의 말이 뜻하는 바를 피부에 와 닿게 전하는 책이다. 우주 속의 섬, 그 섬의 표면에서도 3분의 2가 바다인, 이 기적 같은 곳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면 분명히 실감할 일이다. 나아가 표면아래 바다 깊은 곳까지 고려할 때, 모든 생물권의 95퍼센트가 심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을 터다. 동시에 우리가 바다에 대해 이토록 무지하고, 또 무관심했던가 싶기도 할 것이다. 지구를 떠나려는 계획에 엄청난 자원과 자본을 쏟아 붓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바다에 투자하는 노력과 돈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책은 바다, 무엇보다 심해에 초점을 맞춘 심해 안내서다. 심해에 다가고자 한 인간의 노력들, 심해와 인간과의 관계, 심해의 존재가 행성 지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취재하고 고찰한 기록이기도 하다.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서 빛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이제 상식이다. 하지만 태양광이 아예 도달하지 않는 심해저의 암흑 속에서, 그러니까 대략 수심 3,000미터 이하의 깊이에서 저자가 눈으로 확인한 생태계는 미사만 존재하는 죽은 사막 같은 곳이 결코 아니었다. 심해에서 생물은 어디에나 분포되어 있었”(74)던 것이다. 심해에는 지표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생태계가 실재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수심이 비교적 얕은 유광층과 박광층에서 볼 수 있는 구성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물들이 풍부한 곳이었다. 수심 7000-8000미터 아래에서도 살아가는 쥐꼬리물고기나 덤보문어, 붉은새우 등의 생물들, 암흑 속에서 마치 별이 반짝이듯 자체적으로 빛을 내어 먹이를 유인하는 여러 발광생물들과 마주했을 때, 저자가 느꼈을 황홀함, 1100기압을 견디고 있는 두꺼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대상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감각을 한 번 상상해보라. 이런 감정들은 우리가 직접 바다 밑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위험을 무릅쓴 탐험가들이 직접 유인 잠수정을 타고 심해 탐험을 한 이들의 공통된 반응이기도 하다. 이들은 하나같이 한 번 심해를 보고 올라온 사람이라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올라온다고 말한다.


 

한편 바다 깊은 곳에서는 생물들만 풍요로운 것이 아니었다. 저자는 심해 탐사의 선구자들과 직접 만나 취재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우주선 제작만큼 혹은 이보다 더 제약조건이 까다로운 잠수정 제작의 역사와 현재를 소개한다. 여기에 바다 속 지형의 격렬한 활동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는다. 지구는 인간의 눈으로 파악하기에 지극히 느린 지질학적 시간 속에서 변해가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바다 밑은 지각 아래에서 생성된 마그마가 지금도 분출하며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 내고 있다. 동시에 어느 곳에서는 지형과 지형이 충돌하는 곳도 있음을 과학자들은 알아냈다. 지형이 충돌하는 곳에서 한 쪽 지형은 다른 쪽 지형 아래도 들어가는 섭입대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저자는 특히 이 지역에서 격렬한 지각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 섭입 과정이 이루어지는 일본의 해저, 미국의 캘리포니아 지역만 보아도 화산활동이나 지진이 멈추지 않고 격렬하게 일어나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유인 잠수정 심해 탐험가들은 바로 이런 현장을 바다 밑에서 직접 목격해왔다.


 

현재까지 인간이 알아내고 탐험한 초심해저대의 깊이는 수심 10,000미터가 넘는다. 저자가 해준 이야기 가운데 특히 기억나는 내용은, 지상과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초심해저대의 장소에서도 인간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이야기였다. 바다 밑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맥주 캔이 버드와이저라는 심해 탐험가들의 씁쓸한 경험담이나, 수심 10,000미터 넘는 심해 바닥에서 발견한 곰인형, 그리고 심지어 친환경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비닐봉지가 떠다니는 순간과 마주했을 때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과 감정을 경험했을까.

 


2020년에 발견된 한 심해 단각류의 이름이 에우리테네스 플라스티쿠스라고 지어진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의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웅변한다. 이 생물의 학명이 농담처럼 들리지만 정말 진지하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초심 해저대에서 채취한 모든 생물 표본의 내장 안에서 플라스틱 미세 섬유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염물질과 하나가 되어버린 이 종은 우리가 바다의 가장 깊은 곳과 가장 작은 생물들까지 플라스틱으로 오염시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417) 이제 이로써 지구상에 남아 있는 어느 곳도 미세 플라스틱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간이 배출한 온갖 독성 물질이 오염되고 축적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려주는 저자의 말에는 우려의 목소리가 가득 담긴 듯했다.


 

이런 사례들로부터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은, 심해가 지표의 생물권과 결코 동떨어진 섬과 같은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구 생물들이 살아가는 95퍼센트가 심해 영역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심해는 인간이 배출한 과도한 탄소를 흡수하고, 바다를 지구적으로 순환시켜주는 완충지대이기에 지구 전체의 기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점차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바닷물은 비열이 큰 물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태양열을 지표보다 더 흡수하고 온도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하여 지구 생태계를 지금껏 지켜준 환경요소다. 이 역할의 해심에 바로 심해가 있었다. 선구적인 심해 탐험가가 조금씩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심해의 고마운 역할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늦었을지 모르지만 심해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소중한 인류의 환경으로 이 지역을 지구적으로 공유하고 심해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작은 위안을 준다. 인류의 미래는 99%이상이 지구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우주 보다는 모든 이가 예외 없이 영향을 받는 바다에 있다. 바다, 나아가 심해의 중요성이 바로 이러하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달이나 화성으로 탐험을 하고 식민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국가는 많지만 바다 깊은 곳의 가치를 실제로 이해하고 여기에 투자하려는 이들은 극히 적기 때문이다. 그나마 바다에 대한 관심은 세계 여러 국가들의 자원 확보 경쟁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요한 생태계 환경으로서 보다는 무한한 자원의 보고로서 심해에 눈독을 들이는 상황인 것이다. 저자가 들려주는 심해 채굴 움직임은 단순한 우려를 넘어 심해 생태계가 심해 채굴의 위협으로 얼마나 큰 위기에 처해 있는지, 나아가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여기에 영향을 받을 수 있을지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하지만 바다를 보호하고자 설립된 국제 해저 기구가 여러 글로벌 기업의 편에 서서, 인류 공동의 자산인 해저 생태계를 채굴 권한을 국제 사회의 검토와 합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판매하여 수익을 올리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극소수의 세력이 인류 전체를 앞장서서 위협에 빠뜨리는 행보가 아닌가. 이 현실을 보고하는 저자의 문장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저자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심해 채굴에 상당한 우려를 표하며 이를 반대한다. 저자는 무작위로 이루어지는 심해 채굴 방식과 후유증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심해저의 어느 지역을 채굴하게 되면 표면에 있는 모든 것(모든 생물과 암석들)을 거대한 기계에 넣고 갈아내는데, 이때 기계에서는 걸쭉한 혼합물이 만들어지며 이를 수면 가까이로 퍼 올리려 폐기해버리게 된다고 한다.


 

심해 채굴을 추진하려는 기업인들은 이 과정이단지 먼지가 조금 나는 정도뿐이며, 큰일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문제를 일으킨 행위의 주체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를 안전평가라고 사람들에게 제시한다면 당신은 그 결과를 믿을 수 있는가? 이런 결과에 대한 신뢰는 확보되기 어렵고, 그저 사람들의 우려만을 더 부추길 뿐이다. 어느 해양학자가 심해 채굴에 대해 직접적인 채굴이 이루어지는 지역에서 어떤 생명체든 살아남으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습니다. (...)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347)라고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심해가 해양의 화학적, 생물학적 균형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이런 균형을 위태롭게 만드는 심해 채굴과 파괴 행위는 되돌릴 수 없기에 더욱 신중해야할 일이다. 파괴된 심해가 원상 복구되려면 지질학적 시간만큼이 또다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심해가 복구되긴 할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인류가 여전히 그 때까지 생존할 가능성이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 책은 심해 탐험과 이와 관련한 저자의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 과정에서 탐험팀과 함께 했던 저자는 점차 바다에 대한 경외감과 겸허함을 배우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원 확보를 향한 여러 국가들의 무모한 심해 탐험과 경쟁은 과거 서구 세계의 식민지 쟁탈 과정의 역사를 지극히 닮아 있었다. 공공 기관의 역할을 자임한 해저 심해 기구가 한술 더 떠서 심해 채굴권을, 극소수의 단독적인 결정으로 심해 채굴을 신청한 기업에 판매하고 있는 현실을 다시 떠올려보자. 식민지의 역사가 인류의 자원 및 시장 확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들의 행동은 과거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던 행보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패턴으로 다가온다. 다만 정복의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반면 심해 탐험가들과 저자는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심해로 들어가 풍요로운 생물과 격렬한 지구의 활동을 목격한 이들이다. 이런 풍경을 본 이상, 수면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더 이상 정복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생명의 아름다움과 겸허함의 감각으로 충만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밖에 없는 듯했다. 이들은 심해의 법칙에 복종하는 것 말고는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복종이란 표현은 대상(심해)에 대한 우리의 존중과 사랑을 요구한다. 또 이 표현은 인류 공동의 책임을 자각하고 참여를 필요로 한다.


 

다시 확인하는 부분이지만, 이 책은 심해에 관한 저자의 매혹과 사랑을 진하게 고백하는 책이기도 하다. 독자들도 저자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면 독자의 마음가짐 역시 이에 반응하여 여기에 맞추어질 것이다. 또 심해 곳곳이 인간의 활동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현실을 알게 되면, 인류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자연으로부터 취하기만 해 왔는지 상상해본다. 인간은 문명의 편리함과 이익을 추구하느라 앞으로 인류가 치러야 대가가 얼마나 될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우리는 조속한 시간 내에 좀 더 진지하게 마주할 기회가 필요하단 생각을 해본다. 저자는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하지만,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빼기의 과정”(405)이라고 일러준다. 심해로 잠수하는 과정만 보아도 잠수정으로부터 공기를 빼고, 또 내려가면서 빛이 빠진다. 나아가 심해의 법칙에 복종하며 자아를 빼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과 통제라는 환상을 빼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문명의 편리함과 이기심을 비운 이후에야 그 빈자리에 비로소 진정한 겸허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시각, 인식의 변화를 채워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자의 취재 활동과 참여를 통해, 독자는 우리와 너무나 멀리 존재하던 심해가 실제로는 우리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실감나게 전한다.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플라스틱으로부터 안전한 장소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심해는 현재 우리에게 낯선 세계이지만, 동시에 지구 생태계를 이 정도나마 유지하게 해준 주요 요소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나아가 우리는 지구의 가장 깊은 곳과 가장 작은 생물들을 오염시킨 장본인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의 손에 결정적인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 심해를 파괴하고 정복함으로써 우리의 문명이 심해에 처박힌 곰인형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미래를 지속가능하게 열어둘 수 있을 것인지는 우리의 결정과 행보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우리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에서 영원히물과 맺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자신의 존재로 받아들인 심해의 매혹과 애착 그리고 지구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서 겸허함을 조금이나마 함께할 수 있다면 분명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책 속으로>



[1] "심해의 가장 작은 거주자들은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생물 세력이다. (...) 미생물이 없다면 우리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 P33

[2] "사실 우리의 생존은 바다에 달려 있다. (...) 이제는 자연이 상호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작동하며 심해가 그 기반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심해는 우리가 만든 과도한 탄소를 흡수하고(적어도 지금까지는) 바다를 순환시키며(따라서 기후에도 영향을 미치고) 지구의 화학적 성질을 조절하고(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여분의 열을 흡수한다(이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 P34

[3] "초심해저대와 그곳이 품은 태고의 아름다움, 격렬함, 진실에 매혹되고 그곳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곳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장소들이 있다는 증거이다."(저자의 말)

"왜 우리는 심해의 그토록 많은 부분을 그토록 오랫동안 무시해 왔을까?" - P239

[4] "유네스코는 해저에 남아 있는 배의 수를 약 300만 척으로 추정한다." - P248

[5] "침몰한 배는 본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여 물속에 잠들어버린 배들은 있어서는 안 될 곳, 있어서는 안 될 시간 속에 갇힌 인류 진보의 상징이다." - P256

[6] "인류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구해야 할 때 대단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세계 최대 펀드 회사 창립자 레이 달리오의 말) - P301

[7] "지구의 비밀스러운 파티가 가장 웅장하고 생생하게 펼쳐지는 곳."
(박광층에 대한 설명) - P310

[8] "그곳은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난 장소였다. (...) 심해에는 늦은 것도, 이른 것도 없었다. 오직 심원한 시간, 지구의 지질학적 시계가 무한히 느리게 째깍거리는 소리뿐이었다." - P327

[9] "지구 생물권의 95퍼센트는 심해이며 그 바다의 역사는 40억 년에 달한다."

"심해의 숭고한 차원 앞에 머리를 조아릴 때 찾아오는 은총도 있다. 사물의 진정한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달음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평화이다."

"우리는 빛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빛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사실 생물권의 대부분은 어둠 속에 존재한다." - P328

[10] "놀랍게도 나를 덮친 감정은 슬픔이었다. 쿡쿡 쑤시는 듯한 아픔, 어렴풋한 그리움으로 시작된 그 감정을 처음에는 억눌렀다. 흥분과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는 것이 터무니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자가 심해에서 올라올 때 느낀 감정) - P332

[11] "직접적인 채굴이 이루어지는 지역에서 어떤 생명체든 살아남으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습니다. (...)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MIT 해양학자 톰 피콕의 말) - P347

[12] "바닷속에 떠다니는 이 물질들(채굴 후 바다에 버린 잔재들)이 해양 생태계에 심각하고도 다양하며 전 지구적 규모의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은 무서울 정도로 명백하다."
(심해연구자 스티븐 해덕과 어넬라 초이의 말) - P358

[13] "(생물량/몸집이 커야만 생명 체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생물 다양성, 즉 종의 만화경, 생태계 내의 방대한 유전적 저장소이다. 생물량과 달리 생물 다양성은 대체 불가능하다." - P363

[14] "우리가 지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최선의 기회에요.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오래된 숲이든 온전한 사막이든 초원이든 간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연적인 탄소 포집 체계를 지키는 일이에요."(해양학자 실비아 얼의 말) - P371

[15] "잠수정 밖에서는 실체와 무게를 가진 박동이 거대하고 평온한 존재의 길고도 느린 심장 박동 같았다. 나는 빛과 어두움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심해의 모습을 사랑했다." - P397

[16]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하지만,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빼기’의 과정이다. 공기를 빼고, 빛을 배고, 날씨를 빼고, 수평선을 뺀다. 자아를 뺀다. 인간의 우월성과 통제라는 환상을 뺀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다른 것을 더할 수 있다. 진정한 겸허함,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시각, 변화된 인식, 때로는 낯설기도 한 생명의 표현 방식 말이다." - P405

[17] "심해에서는 그러한 신비를 엿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서 고정된 지점은 나 자신의 의식뿐이다. 시간을 빼고 나면 존재만 남는다. 심해에서는 방향을 잃는 대신,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마지막 문장) - P4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쓰는 과학자들 -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
브라이언 클레그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학책을 매개로 한 지적 탐구의 역사

- 책을 쓰는 과학자들

: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


브라이언 클레그 지음

제효영 옮김 [을유문화사] (2025)

 




요즘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챗GPT를 비롯하여 AI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뜨거워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미 AI를 활용하여 쓴 책을 판매하고 있는 저자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금 인류에게 AI라는, 이제는 일종의 이 되어버린 기술이 우리의 삶 속에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한편에서는 AI에 대한 위기의식을 말하며 AI가 가져올 수 있는 미래를 경고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AI가 가져올 인류의 미래상에 대한 논의와 기대감이 함께 공존한다. 이 모든 혁신과 혁명적인 삶의 조건들을 압축적으로 일구어낸 성취의 근간에는 문자를 기반으로 하는 지적 전통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전통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에게 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책은 인류가 발명한 문자를 기록하고 인간의 지성을 키운 요람이었다.


 

책을 쓰는 과학자들은 과학 분야의 도서들에 관한 서평을 많이 게재하는 사이트 파퓰러 사이언스의 편집자 브라이언 클레그의 책이다. 인류의 고전에 속하는 도서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활발하게 활동하는 과학 저술가답게 저자는 인류사에서 큰 영향력을 미친 과학책 150권을 추려내 소개하고 있다. 고대에 문자를 기록한 역사로부터 과학적 전통의 맥락에 닿아있는 분야의 도서들과 그 저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풀어 놓았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무엇보다 본문에 수록된 풍부한 그림 자료들이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책은 전문 필경사들의 손에 의해 옮겨졌다. 당시의 지적 유산은 이들의 관점에 의해 재해석되고 기록에 남게 되었다. 따라서 필사된 책들은 인류 지성사의 최전선에 있었던 필경사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거울인 듯도 했다. 지식을 매개했던 당사자들의 영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 상상해 보라. 500년 전 천체 망원경도 없던 시절, 육안으로 천체를 정밀하게 관찰하고, 황도12궁과 함께 화성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도록 정교한 수치를 담은 표를 수록한 천문학 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과학책의 역사를 통해 단순히 책 제작의 역사를 넘어 인류의 지적 전통을 견인한 지성사의 여러 장면들을 실감하고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한편, 이 책은 고금의 위대한 과학책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다분히 서양 과학의 전통이 중심을 이룬다. ‘과학분야가 서양의 지적 전통으로부터 크나큰 영향을 받아 온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반면 이 책에는 동양의 과학적 전통으로 AD200년 경에 완성되었다는 중국의 <구장산술>이나 7세기에 인도에서 발간된 <우주의 창조에 관한 해설서>의 소개 정도로 비서양 문화의 과학책이라는 관점에서는 제한적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것이 서양에만 과학적 전통이 있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아는 아라비아 숫자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인도에서 출현하여 아라비아에 소개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서양의 지적 전통, 특히 과학 분야의 전통이 중세 이후 본격적으로 일어나기까지는 지금의 지중해 및 중동 지역의 지적 전통을 고려하지 않고서 과학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도 과학의 역사는 결코 서양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인류가 발전시켜 온 과학의 역사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좀 더 다양하게 서술될 여지는 충분할 테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동서양의 여러 과학사가들이 과거에 인류의 과학적·지적 전통을 이야기할 때 답습해 온 서구 중심의 과학사관에서 탈피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정황을 발견한다. 저자의 관심사로부터 이 책에서도 일부나마 이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갖는 제약에도 이 책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매력들이 상당함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우선 과학의 여러 분야를 망라하여 전 세계의 독자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또 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과학책을 만나는 장()으로서, 인류 지적 편력의 역사를 일별하는 즐거움이 있다. 무엇보다 과학책 읽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유명한 과학책을 둘러싼 뒷이야기가 과학책의 역사에 관한 책읽기에 풍성함을 더한다. 여기에 더하여 독자는 인류 지성사에 큰 영향력을 지닌 과학책의 원서 표지와 내부 삽화 일부도 볼 수 있다. 책에 수록된 다양한 책에 대한 지식을 풀어 놓는 저자의 입담과 폭넓은 관심 분야에 번번이 놀라기도 하지만, 번역서임에도 저자의 위트와 유머를 곳곳에서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을 만나보자.


 

책을 읽으려 한 사람 대비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의 비율에 있어서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에 비견할 만한 책이 등장했다. 1945년에 뉴욕에서 태어난 미국의 인지과학 교수 더글러스 R. 호프스태터가 쓴 <괴델, 에셔, 바흐>(1979). ‘영원한 황금 노끈이라는 부제와 함께 광범위한 생각을 펼쳐 낸 이 책은 심오한 사상이 담겨 있다는 찬사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아 왔다.”(291)


마치 나의 책읽기를 저자가 지켜보고 내게 귀뜸해 준 것처럼 뜨끔하기도 하다. 불현듯 학창 시절에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읽기에 도전했다가 제대로 이해한 대목이 없어 낭패감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이 책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나만의 경우는 아니었구나하는 안도감(?)과 더불어, 동지 의식마저 느낀다. 이제야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에 기본적인 물리학 지식을 갖추기도 전이었으니 사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책읽기의 과정에 관해서라면, 나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책을 읽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일단 바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우선 앞에서 나온 관련 내용을 다시 살펴보거나 다음으로 넘어간다. 아니면 책을 덮고 다른 책을 먼저 보기도 한다. 과거에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에 집착하지 않게 되니 오히려 책 읽기가 더 편하게 다가왔다고 볼 수 있겠다. 언젠간 지금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들이 언젠가 이해가 될 순간이 올 것이라 믿으며 읽게 되었다. 저자가 소개해주는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는 내게도 색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는 책이었다.


 

저자 브라이언 클레그가 소개한 과학책 속에도 그 책을 저술한 저자의 삶이 담겨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특히 과학책은 저자가 자연, 나아가 세계를 바라보았던 관점이나 태도가 저자를 둘러싼 세계와 만들어낸 상호작용의 산물이기도 하다. 저자가 소개하는 과학책과 저자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인류의 위대한 지적 전통의 한복판에서 그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이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인류의 지성이 불과 몇천 년 만에(?) 이만큼 성숙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과학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중립적일 수 없는 인간에 의해 수행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인류의 번영을 앞당겨온 지적 전통이었을 뿐만아니라, 인간성을 파괴하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도 사실이다. 인간의 지적 전통이 어느덧 도달한 AI의 시대에 과학책의 역사를 통해 과학과 인류의 지적 전통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독서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웃사이더 -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뇌
마수드 후사인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외딴 섬이 아니다

- 아웃사이더

 


마수드 후사인(Masud Husain) 지음

이한음 옮김 [까치] (2025)




 

신경과 의사 마수드 후사인의 임상 기록이자 에세이 아웃사이더의 원제목은 <Our Brains, Our Selves>이다. 우리의 뇌와 자아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제목이다. 반면 번역서의 제목 아웃사이더는 인간의 정체성과 뇌가 만들어 내는 자아와의 관계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이민자 1.5세대이기도 하다. 런던과 버밍엄의 도심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쯤되면 그의 청소년 시절이 대강 그려진다. 자신과 가족이 다른 피부색과 억양만으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매순간 감지하며 살았을 것이다.


 

번역서의 제목처럼 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특수성(피부색과 억양 등), 곧 고유한 표지들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지 못한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학교를 오가는 동안에도 혐오와 조롱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상상해볼 수는 있으나,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그저 불안하고 위축되는 기분을 늘 감지하지 않았을까. 때론 절망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을 법하다. 특히 장차 신경과 의사가 되고 싶다고 결심했을 때, 친구가 해준 조언(‘넌 유색인종이니 이방인이고 이 세계(신경학계)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차라리 류머티스 분야를 택하라’)은 백인 상류층을 구성하는 영국 신경학계의 현실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여 극복하고 결국 신경과 의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로도 활동해왔다. 기득권에 속한 이들이라도 열린 마음으로 저자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웃사이더30년 동안 저자가 진료실에서 환자와 만난 임상기록이기도 하지만, 저자 자신의 개인사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뇌의 문제를 이해하고 질환을 치료하려는 노력에 인간의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더해진 역작이다. 저자가 오랜 시간 만나온 뇌 관련 질환 환자 중에서 대표적인 증상을 보이는 환자 7명의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면, 뇌졸중으로 모든 행동의 동기를 잃거나 한쪽 시야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 언어와 사물에 대한 의미를 점점 잃어가는 사람, 기억을 잃거나 가짜 기억을 회상하는 사람, 불쑥불쑥 나타나는 환영이 나타나거나 이상한 복장이나 언행을 하게 된 사람, 한쪽 손과 발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환자들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 뇌와 관련한 질병으로 인해 한순간 자기다움의 일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개인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더 중대한 문제는 그 개인이 인생의 한 시기에 집단과 맺어온 관계가 뇌 질환으로인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경험을 하고, 더 나아가 그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배제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본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일어나보니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단지 정치적인 개인의 결정에서 비롯되는 것만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신체의 변화, 특히 뇌질환만으로도 누구나 겪게 될 수 있는 일임을 생생히 보여준다. 인간이 어느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소속감을 잃게 될 때 이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지 다양한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가 소개하는 환자들의 사례를 보면, 과연 인간이 자각하는 나 그 자체’, ‘자아란 도대체 무언인가, 하는 의문을 되짚어보게 된다. 신경과 의사로서 저자는 뇌의 어느 특정 부위가 아니라 뇌 전체에 긴밀하게 연결되고 얽혀 있는 전체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쥐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뇌가 담당하는 다양한 역할이 모여 우리의 자아를 구성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내 안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우스개 소리로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 수많은 가 모두 나의 자아를 구성하는 실체이기도 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저자는 우리의 마음이 이런 다양한 면모들을 모두 포함하는, 보다 구체적으로 내 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인지 기능들의 긴밀한 협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한 가지 더 저자가 잊지 않고 덧붙이는 사항이라면, 이러한 내 안의 여러 자아들은 우리가 속한 환경, 특히 집단과의 의식적, 무의식적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다. 나는 내가 속한 환경, 공동체 속에서 결코 피할 길 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진화하는 존재인 셈이다. 이 사실은 개별자 개인을 바라볼 때, 그 개인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시선이 되어준다.

 


특히 저자와 가족이 아웃사이더가 된 경험, 그리고 이를 극복해간 과정은 이 책의 메시지와 공명하며 더욱 힘을 발한다. 그가 신경과 의사가 되어 진료한 환자 가운데 와히드나 애나, 윈스턴 같은 이들을 떠올려본다. 이들은 20세기, 그리고 영국이라는 시간-공간적 특수성이라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저자처럼 자신이 합류한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다. 책에 소개된 아웃사이더 되기의 경험들은 우리 사회와 인간성에 대해 되돌아볼 기회를 준다. 애나가 자신의 모국어 폴란드어로 전화 통화를 했다는 이유로 혐오가 담긴 언어를 듣고 물리적으로도 폭행을 당했던 사건은, 유독 영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영국 사회의 귀족적-엘리트적 성격, 그리고 일부 이긴 하지만 외국인 혐오의 시선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 장면은 분명 영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집단에 속한 인간이 외집단에 속한 이들에게 가질 수 있는 정서적 반응이나 이질감, 배척 행위를 구체적인 사례로서 보여주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에 이지메라고 불렸던 집단 따돌림도 우리는 직접 겪거나 드물지 않게 보아 왔음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 소속감, 혹은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짐을 자각하는 정서는,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구성원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이 책은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큰 물음에 대한 전문가로서 저자의 답변으로 책의 성격을 이해해볼 수 있겠다. ‘우리의 자아는 뇌의 여러 기능들의 총체이면서 이는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요약해볼 수 있겠다. 저자가 제시한 사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체성 혹은 자기동일성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자아의 속성이, 때로는 얼마나 취약한지를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우리 각자의 소망 혹은 욕구에도 불구하고, 뇌는 바로 이 자기다움’,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경계이면서, 또한 이 길에 이르는 열쇠일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평생 어딘가에 속해 살아간다. 이러한 자각은 전통적인 공동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넘어 구성원들이 파편화, 원자화 되고 고립되어가는 동시대에 보다 중요한 주제가 된 듯하다. 이 주제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우리를 우리답게만들어주는 것이 우리가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정서, 소속감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들려주는 뇌 이야기는, 인류가 학문으로서 수행하고 참여하는 모든 활동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로 수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저자가 제시한 사례와 통찰에서 우리는 신경과학의 한 갈래를 따라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의 길로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생각거리는, ‘자아라는 실체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공동체, 나아가 환경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고 긴밀히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자아는 작게는 내가 속한 가정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자각을 일깨우는 일도, 우리가 인간다움을 확인하는 길이 되기도 할 테다. 우리는 결코 외딴 섬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의 물리학 - SF가 상상하고 과학이 증명한 시간여행의 모든 것
존 그리빈 지음, 김상훈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간의 물리학함께 읽기

(원제: Nine Musings on Time)

존 그리빈 지음 [휴머니스트] (2024)

 



과학책 읽기 모임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 책은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존 그리빈의 시간의 물리학입니다. 저자의 저서는 꽤 오래 전부터 국내에 많이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과학자를 비롯하여 폭넓고 다양한 과학 주제로 글을 써온 과학저술가입니다. 부인인 메리 그리빈(Mary Gribbin)과 함께 많은 과학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번에 함께 읽은 책은 70대 후반의 노()과학자가 현업 작가로서 2022년에 출간한 책입니다. 시간 및 시간 여행에 관해 쓴 이 책을 함께 읽다보니 과학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열정과 호기심, 그리고 무엇보다 SF에 대한 그의 오랜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Nine Musings on Time입니다. 여기서 musings는 우리가 영감의 원천으로 언급하는 뮤즈(muse)라는 용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동사로는 사색하다, 골똘히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musing숙고/사색을 의미하기도 하죠. 그러니까 이 책은 시간에 대한 과학자의 생각을 모은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주목해보는 지점은, 번역서와 원서의 차이입니다. 번역서에는 다양한 그래프와 과학개념을 소개하는 그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원서에는 대부분 과학자를 비롯한 인물 사진만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원서에는 없는 그래프나 그림들을 출판사/역자가 적극적으로 배치하는데요, 이 작업은 분명히 번역자 혹은 편집자의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저자가 시간과 시간 여행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독자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는 의도보다는, SF 덕후인 그가 시간 여행을 다룬 과학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이 책을 읽는 과정이 한결 가볍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이번 읽기 모임에 오신 한 참여자분은 저자가 청년 시절 흥분하며 읽었던 SF잡지 <어스타운딩 Astounding>의 표지 사진을 스티커로 만들어 선물해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본인의 SF사랑을 모임에서 한껏 나누어주셨으므로, 저자가 이 책을 쓸 때 바라던 대로 실천하신 것이 아닐까요.


 

한편 모임 중에 몇 가지 과학 개념들을 짚고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참여자분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바로 시간임을 알 수 있었는데요,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떻게 (과학적으로) 이해하면 좋을지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책을 읽고 보니 과연 시간의 정체에 대해서는 과학자들마다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견해차가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봅니다. 과학자들이 열역학적인 관점(엔트로피 관련)에서 시간의 의미를 설명하더라도, 일반인인 우리에게는 여전히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자는 몇몇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시간이 흐른다라는 설명을, 인간의 감각에 기반 한 환상이라 본다는 견해도 제시합니다.


 

유유히 흐르는 시간의 비유는 그 역사가 깊습니다. 자연철학서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시간의 정체를 궁리하다가 영원히 움직이는 모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을 강의 이미지와 연결 짓는 역사가 이미 충분히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서구 기독교 교리의 토대를 마련한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자신의 고백록에서는 아예 작정하고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내게 물어서 설명해주려고 하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라는 것이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지요. ‘흐르는 시간의 개념이 여기에서도 발견됩니다.


 

현대인은 우주의 기본 구성 요소로 만든 원자시계를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년///초의 개념은 지극히 인간적인(혹은 지구적인) 시간 개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개념은 인류가 살아가는 지구의 조건과 떨어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주기, 지구의 자전주기, 달의 지구 공전 주기 등은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 체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지만, 이것이 유효한조건은 역시나 지구에 한해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SF의 단골 주제인 시간 여행방식 중에서 원하는 시대(과거든 미래든)에 타이머를 맞추어 가는 방식은 분명 불가능합니다. 또 우연히 시간여행이 가능한 문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지점으로 되돌아올 수는 없다고 말해줍니다.


 

나아가 질량을 가진 존재가 시간 여행을 하기 위해 광속에 준하는 속력이 필요하다면, 이것은 상대성 이론에 의해, 태양계에 존재하는 에너지보다도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해집니다. 그럼에도 저자의 입장은 시간 여행은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과학적 조건들을 검토합니다.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질량이 없는 으로 시간이동을 가능하게 한 실험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정보를 광속보다 빠르게 과거로전달함으로써 말입니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시간여행을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대신 을 이용하여 시간이동을 할 수는 있다, 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이때 이동한 시간의 차이는 (아직까지는) 지극히 찰나에 가깝긴 하지만요.


 

이번에 읽은 책을 통해 저자가 SF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SF는 저자가 과학자가 되도록 이끈 영감과 열정의 원천임을 알 수 있었거든요. 물론 SF는 저자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준 장르이기도 합니다. 현재 실현된 과학기술 가운데 많은 것들이 과거의 SF에 이미 등장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SF를 단순히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무시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요? 적어도 저자 존 그리빈에게 SF는 그를 과학이라는 지적활동의 세계로 이끌어준 원동력이었으며, 읽기와 쓰기에 대한 열정을 불어 넣어 준 뮤즈였던 셈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읽은 시간의 물리학은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SF에 보내는 저자의 오마주이자 사랑고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한 뒤로 시간여행은 줄곧 나를 매료했다."(7) - P7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현대 과학이 직면한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 중 하나다."(37) - P37

"몇몇 과학자(그리고 철학자)는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이 인간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50) - P50

"빛이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려면 양자 터널링으로 알려진 현상에 의존해야 한다."(71) - P71

"쾰른대학교의 귄터 니미츠 연구팀은 정보를 광속보다 빠르게 과거로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81) - P81

"아서 C. 클라크의 유명한 격언이 시사했듯이 충분히 발달한 과학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는 법이다."(126) - P126

"(프레드) 호일은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끊임없이 흐르는 강이라는 시간의 이미지는 ‘그로테스크하고 부조리한 환상‘이라고 단언한다."(136) - P136

"과거에 존재했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은 언제나 존재하며, 우리가 역사나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감각은 오로지 우리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137) - P1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