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끝, 파랑
이폴리트 지음, 안의진 옮김 / 바람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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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다시 환대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 지중해의 끝, 파랑


이폴리트 글·그림

안의진 옮김 [바람북스] (2025)




 

인간의 역사는 늘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가 공존해 온 역사다. 지중해 역시 이곳을 무대로 기록된 역사에 숱한 전쟁이 있었지만, 내게는 무엇보다 환대의 전통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바다였다. 일리아스오뒷세이아만이 아니라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은 오랜 이야기에는 늘 먼 곳으로부터, 혹은 공동체 밖으로부터 방문한 나그네들이 누군가의 환대를 받고, 그들의 사연이나 경험을 들려주는 전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상대의 정체를 알기 전에 이미 음식을 대접한 후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던 전통을 떠올려보게 된다. 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의례의 과정이 상대방의 삶을 존중하고 공감하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유구하고 훌륭한 문화가 이제는 쉽게 발견하거나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 된듯하다. 특히 환대의 전통을 떠올리게 해 주었던 지중해에서는 오히려 침묵만이 일상이 되다시피 했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이폴리트는 이런 현실을, 그래픽노블의 형태를 빌어 인상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림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책 지중해의 끝, 파랑에서 다루는 주제는 현재 지중해에서 발생하고 있는 난민/이주민 문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대부분 아프리카 북부의 리비아에서 목숨을 걸고 보트로 탈출하여 지중해를 표류하는 난민들을 구조하는 구조선 ‘SOS 메디테라네가 이야기의 중심을 이룬다.


 

저자 이폴리트가 함께 승선하여 취재한 ‘SOS 메디테라네의 운영비는 98%가 개인의 기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루 필요한 운영비의 액수도 놀랍지만, 바다 위를 표류하는 이들을 구하는 구조대에게는 무엇보다 시간은 돈이라기 보다, ‘시간은 생명이었다. 지중해 주변 국가들에 의해 구조선이 억류되어 발이 묶인 시간만큼,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수많은 생명이 실시간으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들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는 그 무게감이 상당히 다르게 전해졌다. 특히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전 세계인들이 고통을 받았던 코로나 봉쇄기간이었기에 그렇다. 우리가 겪은 전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서는 취약한 이들의 삶을 더 무겁게 내리누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의 삶이 예기치 않게 제약을 받거나 위기에 처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 이들은 무엇에도 기댈 곳이 없는 이들이었다. 저자가 저널리스트로서 취재 노트에 해두었을 법한 메모가 구조팀의 존재 이유를 말해준다. “국가들의 무책임은 SOS 메디테라네가 존재하는 이유다.”(108)라고.


 

특히 지중해 연안의 지역 혹은 국가들, 이를테면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비롯한 아프리카 북부의 국가들은 이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 침묵과 무반응으로 대응하고 있다. 난민 구조팀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이러한 냉담과 침묵인 것같다. 이는 문제의 원인을 직시하거나 해결하기를 회피하는 행동이다.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으니, 문제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렇게 문제가 눈앞에 있을 때, 이를 외면하고 침묵하는 일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에 참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국제 사회에서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 어려움에 처한 난민들의 인도적 도움을 요청하는 호소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서유럽에 중심을 두고 있는 서유럽의 EU 회원 국가들(비교적 부유한 국가)이 이탈리아나 그리스, 리비아와 같은 지중해 국가에 거액의 지원금을 주고 지중해로부터 유입될 수 있는 많은 난민을 막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책에 소개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나 섬이 많은 그리스의 여러 섬에는 열악한 상황의 난민 캠프가 조성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지중해 지역의 난민 캠프는 서유럽 국가들에 유입되는 난민들을 막는 중요한 관문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지중해 주변, 혹은 유럽 국가들의 침묵과 냉담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이런 행보를 보이는 부유한 서유럽 국가들을 비난할 처지는 못 된다. 고작 한 차례의 난민을 받을 것인가를 두고 국론이 분열되고, 난민을 외면하고 내친 적이 있는 우리가 이 국가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적어도 이들은 상당수의 난민/이주민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모여있는 난민들의 인구 밀도가 과도하게 높고 시설은 열악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결속력이 상당히 강한 공동체이긴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타자에 대한 관용도가 그만큼 낮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김없이 존재하는 문제는, 난민/이주민들은 지금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이 태어난 곳을 떠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외면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는 결단코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이 품고 있는 현실, 혹은 내가 책에서 건져 올린 질문은 이렇다. ‘사람들은 왜 떠나야 할까?’ 혹은 그들은 왜 떠날 수밖에 없는가?’와 같은 질문들이다. 누구는 빈부를 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자본의 탐욕을 이야기할 것이다. 또 누구는 보다 보편적으로 인간의 탐욕을 언급할 지도 모르겠다. 자본 자체가 탐욕을 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결국 난민/이주민 문제는 어느 기득권 세력의 현상 유지, 혹은 이들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대다수를 희생하게 만들어버린 시스템의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하나는, CNN이 취재하여 보도한 리비아의 노예시장에 관한 언급이었다. 무엇보다 판매 대상이 된 난민 당사자들이 처한 조건을 상상해 보게 된다.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온전히 타인에게 맡겨진 상황이라면, 타인의 몸에 대한 권한을 손안에 쥐고 있는 자는 어떤 행동도 할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바다에서 구조된 어느 여성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하겠다고 말문을 닫아버린침묵의 언어가 구체적인 언어 표현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특히 나는 시리아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자신의 몸값으로 거액을 내고서야 풀려난 후, 다시 목숨을 걸고 바다로 탈출했던 여성 나딘의 삶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임신 8개월이었기에 더 큰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나와야만 했다. 그녀가 구조선에 오르기까지 겪어야 했을 삶의 여정을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또 수감된 남편을 뒤로 하고 딸 아이샤를 살리기 위해 거친 바다로 나온 마타의 사례도 기억난다. 큰돈을 뇌물로 제공하고 나서야 감옥에서 딸과 자신의 몸을 풀어낼 수 있었던 그녀는 돈이 부족하여 남편을 감옥으로부터 구출할 수 없었다. 언젠간 남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SOS 메디테라호가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저자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저자가 취재한 실제 구조 현장의 사진도 눈에 들어온다. 구조 당시 현장의 혼돈과 흥분을 반영하듯 그림과 사진이 번갈아 등장한다. 마치 저자의 아름다운 그림 속에만 머물던 캐릭터가 실제로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하여 내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지닌 존재들이다. 이폴리트가 하나하나의 담요 아래엔 하나의 몸,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삶이 있다.”(165)라고 말하듯 개별적인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어떤 숫자나 분석의 언어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 지중해는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해상 이주 경로라고 인식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지중해 바다 어딘가에선 출렁이는 바다에 몸을 맡긴 채 리비아의 해안 경비대가 아니라 ‘SOS 메디테라네와 같은 이들에게 구조되기를 기다리는 보트피플이 있다. 지중해의 끝, 파랑에서 느낀 것은, 난민/이주민 문제가 단지 지중해 지역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지중해는 인류애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고향을 등지고 떠날 수밖에 없던 이들은 과연 무엇때문인지 많은 독자를 비롯한 현대인들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코 개인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서 내게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구조된 이들이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항구에 하선하는 풍경이 지나간 후 이폴리트가 아들과 통화하는 장면부터다. 인도적으로 난민을 구조하는 활동을 널리 알리고자 저널리스트로 참여한 그였지만, 그 역시 가족이 있는 가장이기도 하다. 구조 현장에서 몸을 가누지 못한 아이들을 품에 안아 돕기도 했던 그는 내 손은 아기 바구니가, 내 팔은 요람이 된다.”(156)는 심경을 남겼다. 아들과 통화한 후 자신이 머물던 방과 창문을 통해 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전면으로 그려놓은 장면이 특히 인상 깊다. 갑자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풍경 속에서 천천히 방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저자의 시선처럼 느껴져서다. 자신이 머물던 빈방의 풍경에는 아들을 향해 가고 싶은 마음과 함께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저자의 마음이 가득 채우고 있는 듯했다. 이 순간 이폴리트가 중얼거렸을 단어는 이 말이었을 것 같다. “안디아모 뚜띠(Andiamo Tutti, 다함께 가자)!”라고.






[책속으로]

[1] "함께 간다. 함께 살아간다."
"나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 - P14

[2] "관광에는 열려 있지만, 인간에게는 닫혀 있는 바다." - P46

[3] "낭비되는 시간만큼, 생명들이 사라지는 거예요." - P49

[4] "그날 놀라울 만큼 많은 생명을 구하고도, 한 번의 실패가 그의 마음을 전부 움켜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닿지 않을 손을 뻗는다. 모두가 외면하지만, 삶을 행해 발버둥치는 그들을 위해." - P79

[5] "안디아모 뚜띠(Andiamo Tutti, 다 같이 가자고!)"
"이곳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면한다." - P80

[6] "국가들의 무책임은 SOS 메디테라네가 존재하는 이유다." - P108

[7] "내 손은 아기 바구니가, 내 팔은 요람이 된다." - P156

[8] "이 아이들을 전부 품에 안을 수 있으면 좋겠다." - P157

[9] "하나하나의 담요 아래엔 하나의 몸,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삶이 있다. 파도는 그 어느 때보다 거세다. 배가 출렁이고, 우리의 마음도 휘청인다." - P165

[10] "우리는 문명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인류의 요람이 우리의 존엄을 묻는 무덤이 되게 해선 안 됩니다."(203, 교황 프란치스코가 마크롱 대통령에게 전하는 말) - P203

[11] "2014년 이후 중앙 지중해에서는 22,631명이 사망했다."
"중앙 지중해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해상 이주 경로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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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타자에 대한 철학자의 탁월한 시선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 어떻게 살 것인가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김상운 옮김 [arte] (2025)

 



일본의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의 책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통독하면서 우선 떠오른 감상은 탁월하다는 표현입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내용은 많이 없지만, 저자가 철학자인지라 한가함지루함이라는 개념부터 정리하고 논의를 시작합니다. 사람이 토끼 사냥을 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 그에게 고되고 때로는 다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사냥 활동에 나가는 대신 잡은 토끼를 던져줄 때, 그 사람이 행복할까라고 묻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어요. 저자는 그 이유가, 인간은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진단합니다. 기분전환을 위해서라고 말이죠.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에게 열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몰입의 대상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지복에 이르는 열쇠 한 가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줄곧 저자의 글에 탁월하다를 연발하는 이유는, ‘한가함지루함이라는 키워드로 인류 문명의 핵심을, 그리고 우리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설명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저에게도 이해가 가도록 쉽게 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글쓰기를 하는 저자를 또 다른 수준(another level)'의 저자라고 분류합니다. 철학 전공자가 보시기에 어떨지는 모르겠네요. 적어도 저에게는 이 책과의 만남이 여러 모로 놀라움을 줍니다.

 

어떤 면에선 재독 철학자 한병철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는 일본의 한병철이라고 평가한다면, 좀 더 친근하게 여기실 수 있으실지. 다만 한병철의 문장은 좀 더 압축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문장 자체가 고이치로의 문장보다는 좀 더 밀도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 철학 비전공자에겐 고이치로의 문장이 좀 더 친절하게 다가옵니다. 저자는 우리 인류의 문명, 그리고 문화를 진단하고 요약하면서 독자가 잘 이해하도록 글쓰기를 하는 저자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철학 비전공 독자로서는 우리 현대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써주는 저자의 등장이 반가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탁월하다는 생각을 줄곧 하게 됩니다. 이 책으로 저자의 글에 입문했는데, 곧바로 팬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만큼 현재 제 수준에서 저자의 사유와 글쓰기에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책의 6장인 한가함과 지루함의 인간학 때문입니다. 이 장의 부제는 도마뱀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인데요, 도대체 한가함과 지루함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도마뱀이 갑자기 뭔 소리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이 장(chapter)의 시작은 햇볕을 쬐는 도마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햇볕을 쬐고 있는 도마뱀은 햇볕과 바위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을까?’라고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 한 생물학자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6장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 바로 움벨트(umwelt, 둘레세계, 주변세계)이라는 개념인데요, 이 개념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건 19-20세기에 걸쳐 살았던 에스토니아 출신의 동물행동학자 야콥 폰 윅스퀼입니다. 그는 1934년에 출간한 책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이 둘레세계개념을 소개했습니다. 이 개념은 생물이 저마다의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한 세계를 뜻합니다. 말하자면 각 생물체의 감각을 통해 인지된(혹은 구성된) 세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플라톤 철학과 연결 짓자면, 각 존재마다 감각기관을 통해 구성된 어떤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세계를 말하죠. 모든 감각적인 생물의 주체성에 주목하고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고, 동시에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와 같은 사람에게서 말이죠.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려 합니다. 어쨌든 이 모든 생물체의 주체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근대 철학의 문을 연 칸트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윅스퀼은 칸트주의 생물(생태)학자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 책은 제가 올해부터 진행하는 과학책 읽기 모임의 두 번째 선정도서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6장에 주목하면, 이 장이 바로 윅스퀼이 제시한 둘레세계의 개념 위에서 전개된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처음에 햇볕을 쬐는 도마뱀에서 진드기로 갔다가 결국에는 인간에 이르고 있는데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둘레세계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335)라고 비판했다고 고이치로는 말해줍니다. 하이데거는 당대의 생물학자 윅스퀼을 비판했다고 소개하는 거죠. 그 이유는 동물은 그 자체로서의 사물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336). 하지만 고이치로는 오히려 하이데거의 논리를 비판합니다. 하이데거가 동물은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고이치로의 말대로라면 대철학자 하이데거가 이 부분에서만큼은 다소 무리수를 둔 것 같거든요. 하이데거는 인간이 (동물과 달리) 특별하다는 신념을 갖고, 이에 합치되는 주장을 전개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어쩌면 동물과 인간에 대해서는 하이데거가 데카르트의 관점을 지녔던 것이 아닐까요? 데카르트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고 신체만 있는 기계라고 보았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는 인간을 영혼이 있는 기계로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특별하다.’는 관점으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논의는 저도 시간이 필요할 듯하므로, 이장의 결론으로 곧장 나아가봅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이죠. 각 존재의 둘레세계는 생물마다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감각기관의 차이가 종마다 크게 다르니까요. 각 종이 인지한 세계의 모습은 엄청나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 차이를 저자 고이치로는 인지된 둘레세계를 넘어 이동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생물은 이 둘레세계 사이를 이동하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동물 보다는) “인간이 다른 동무에 비해 매우 높은 둘레세계 이동능력을 가지고 있다”(352)는 의미로 풀어 설명합니다. 이를 제가 이해한 바로 풀어 설명해보자면,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상상력이 뛰어나다라는 것입니다. 고이치로는 이 능력을 가리켜 둘레 세계 간 이동 능력’(inter-umwelt mobility)라고 좀 더 폼나게 정의합니다. 제게 좀 더 익숙한 표현으로는 인간이 보다 뛰어난 역지사지의 능력을 갖고 있다라고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 이제 고이치로가 인간의 한가함과 지루함을 다룬 책에서 둘레세계(움벨트)를 이야기한 이유에 한 발 더 나아간 듯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저자는, 인간은 뛰어난 상상력과 공감력을 통해, 다른 둘레세계로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기에 지루해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저자의 표현을 가져와 정리해볼까요. “인간은 둘레세계를 상당한 자유도를 가지고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지루해 하는 것이다.”(355)라고요. 지루해하지 않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이 지루해하는 이유를 윅스퀼이 제시한 개념을 기반으로 설명해내고 있는 것이죠. 물론 이에 동물의 감각에 주목한 후대의 과학 연구자들은 보다 많은 동물이 인간에 상응하는 둘레 세계 간 이동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추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몇몇 동물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지루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어미 앞에서 대나무를 입에 물고 앞구르기를 하는 팬더 푸바오의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단지 생존을 위해, 본능에만 따른 행동은 아닐 것 같은데요. 생물학자들은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합니다. 이 점은 물론 더 많은 연구와 확인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저자는 6장을 마무리하면서 이 책의 제목인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이야기하는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떡밥을 던집니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었으니 마지막 장 까지 힘을 내서 읽어줄 것을 기대하겠죠.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눈앞인데, 정녕 책을 덮을 것이냐?’고 독자를 유혹하는 듯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이 탁월한 책을 읽어보시길.

 


개인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인간의 뛰어난 공감력/상상력으로 둘레세계를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도 긍정과 부정의 영향이 따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저자는 여기에 윤리학이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았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윤리학의 작동 원리는 판단하기 전에 여러 조건을 검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다른 입장에서 행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죠. 달리 말하면, 다른 둘레세계를 검토하고 다가가려는 태도/마음가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윤리학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상 고쿠분 고이치로의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 입문하자마자, 바로 저자의 팬이 되어버린 철알못독자의 감상이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행복의 비결이 뭔지 알고 싶은 독자라면 한 가지 실마리를 이 책에서 찾아보시라는 겁니다. ‘강남 아파트 입성을 이야기하는 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어 보는 것이 행복의 비결을 발견하는 데 더 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 참으로 탁월하군요! 적어도 제겐 그렇습니다.







*참고로 글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움벨트'개념이 소개되는 다른 책을 추가해봅니다.

- 에드 용 <이토록 굉장한 세계>

- 캐럴 계숙 윤 <자연에 이름 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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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 까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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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존재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글쓰기

- 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까치] (2025)

 




나는 머나먼 것들을 끊임없이 동경하고 갈망하는 사람이다. 나는 금단의 바다를 항해하고 야만인의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좋아한다.

- 허먼 멜빌, 모비 딕,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2, 42p

 


19세기 중반에 출판된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은 인류의 대항해시대가 저물어 가는 시기에서 출현했다. 이 이야기는 경계가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바다 위를 떠다니며 뭍(육지)의 세계를 지탱할 자원을 캐내던 사람들의 서사로 볼 수도 있다. 특히 포경선은 세계의 여러 곳에서 몰려든 다양한 젊은이들이 부대끼는 고립된 공간이기도 하다. 위에 인용한 문구는 이슈메일이 바다로 나가는 고래잡이 항해를 받아들이는 이유를 독백처럼 말하는 대목이다. 이 소설이 나에게 인상 깊게 남는 이유 하나는 작가가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 대해 잠시나마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만으로 판단할 때, ‘문명에 속해 있는 이슈메일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해안을 야만인의 그것으로 상정하는, 백인의 시선도 살짝 엿보인다.


 

내가 이 대목을 떠올리게 된 것은 아즈텍 연구의 권위 있는 역사학자 캐럴라인 도즈 페넉의 책 야만의 해변에서을 만났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노예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아프리카 원주민’, ‘검은 피부를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접해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캐럴라인은 관심의 대상을 조금 달리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에 주목한다. 캐럴라인의 책을 만나기 전까진 그토록 많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도 자신이 조상들과 더불어 살아왔던 터전으로부터 단절을 강요당하고, 구세계인(유럽인)들에 의해 납치·감금·폭행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사실 한 번도 제대로 상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의 시선이 백인 중심의 상투적 시선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를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책이기도 하다.


 

따져보자. 한 인간 존재가 다른 인간에 의해 의지와 자유를 빼앗기고, 인간성을 박탈당하는 일을 우리는 과연 상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나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역사학자인 캐럴라인은 마치 내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오래된 1차 사료들(이를테면 노예 거래 관련 서류, 법원에서의 소송 기록, 영수증과 같은 자료들)을 찾아 헤맸을 것이었다. 역사학자로서의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당연한 듯 여겨지는 역사 서술의 관점은, ‘문명 vs. 야만의 이분법적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받아들여지는 것은, ‘문명에 속하고 있다는 전제다. 이러한 시각이 자연스럽게 정해지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 인디저너스(Indigenous, 토착민)이 과거에 존재했던 사실이 우리에게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유럽인들의 목소리에 덮이고, 인디저너스의 존재 증거는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에 의해 가려져왔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디저너스들은 삶의 터전으로부터 단절되어 강제 이주당한 상황뿐만 아니라 감금·폭행의 일상적인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당시 유럽인들에 의해 대상화된 인디저너스들은 일개 사물로서 취급당했다. “(인디저너스들은) 유럽인들의 사상과 열망이 깃든 일종의 암호가 되어 갔다.”(32)는 표현이 처음부터 나의 시선을 붙들었다.

 


저자의 서술방식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특징은, 인디저너스의 입장에서 그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부단히 상상했다는 점이다. 역사가 엄밀한 사실에 기반 한 실증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캐럴라인의 서술방식은 좀 독특하다. 서술자 자신이 인디저너스의 입장이 되어보길 주저하지 않는 듯 보이는 까닭이다. 어쩌면 학계에서 동료 학자들의 비판을 상당히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을 더욱더 열심히 찾아내야 한다”(84)며 역사학자로서의 사명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도 잠시 언급되고 있지만, ‘문명야만의 시선에 주목할 때 흔히 떠오르는 텍스트는 몽테뉴의 에세. 몽테뉴는 자신의 식인종에 관해서라는 글 중에서, 브라질의 한 마을에서 유럽에 온 3명의 투피남바인과 대화했던 장면을 집어 넣었다. 그러면서 우리(유럽인들)’가 그들보다 더 야만적이라고 한 바 있다. 훗날 에세를 탐독했던 허먼 멜빌의 야만에 대한 자각은 자신의 작품 속에 반영되기도 했다. 이를 테면, “만취한 기독교인보다는 정신이 맑은 식인종과 자는 게 나을지도 몰라.”(모비 딕,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2, 64p)라며 야만인에 대한 편견에 저항하고, ‘문명 세계의 한 단면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가 버젓이 존재하던 고려할 때, 몽테뉴나 멜빌 모두 캐럴라인의 지적대로, “야만과 문명이 상대적이라는 점을 인식”(302)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인디저너스의 역사를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는 줄곧 애도의 성격을 띠는 듯하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유럽을 방문하게 되었지만, 또 그만큼 많은 수가 여정 중에 바다에 버려지기도 했다. 유럽 땅에 도착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노예 제도 시스템과 평범한많은 유럽인들에 의해 소유되고 매매되었으며, 때론 낙인이 찍히고 폭행을 당했다. 인간성이 박탈된 역사였다. 따라서 저자의 연구와 저술 작업은 소리 없이, 흔적 없이 사라져간 인디저너스들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다독이는 의식(ritual)으로도 보였다. 그들은 대다수가 애도 받지도 못했던 이들이다. 역사학자 캐럴라인의 역사 서술이 내게는 잃어버린 존재들의 간극을 상상하고 이를 인간의 일로 채우는 작업처럼 보인다. 한 가지 생각을 덧붙이자면,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인디저너스의 시선에서 야만의 해변이란 어쩌면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의 자유와 신체를 구속하고 억압하던 구세계 문명의 해안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경계의 어느 쪽에 발을 딛고 바라보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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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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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황금기는 씨 뿌리는 마음들에 달려 있다


-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2024)


 




미국의 황금기가 지금 시작됩니다.’(The Golden Age of America Begins Right Now)

 

이 문구는 두 번째 집권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공식 슬로건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이하 극단적 소수)를 출간할 당시(2023)만 해도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훨씬 낮아 보였을 것이다. ‘트럼프가 백악관을 떠나 민주주의가 다시 균형을 회복했다고 믿고 싶다던 저자의 바람과 달리, 트럼프 행정부는 복귀에 성공했고 이제 막 100일이 지났다. 한 사회가 중요한 교훈을 배우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던 탓일까? 저자가 슬며시 내비치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극단적 소수에서 저자는 헝가리 독재자 빅토르 오르반에 대해 들려준다. 오르반은 성숙한 헝가리의 민주주의를 거의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완전히 허물어뜨린 인물로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그라면 트럼프 행정부의 귀환과 대한민국의 계엄 사태를 보고 정치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90), 우리의 상상력 부족(?)을 조롱했을 법하다. 이 책은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가 어떻게 극단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 탁월하게 분석한다. 한편 현대인이 살아가는 지배적인 환경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일러주고, 동시에 민주주의 국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균형 있게 설명한다. 대한민국의 독자가 이 책을 펼쳐볼 이유는 바로 여기, 트럼프 행정부의 귀환과 대한민국의 계엄 사태가 교차하는 지점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퇴행의 위기에 처한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느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까?


 

한 국가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는 무턱대고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이 아니다. 그럼 정말 위험한 존재는 누구인가?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주류 정치인들 중에서 표면적으로’ 민주주의에 충실해 보이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권력을 지닌 소수이지만, 기득권에 대한 집요함을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권력에 대한 의지는 정치인이라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이들이 소수만의 이익을 위해 기존 제도를 교묘히 비틀어 합법적으로 보이는 기회를 마련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결과는 공공의 이익에 반하고, 심지어 개인의 자유마저 심각하게 침해하거나 훼손할 여지가 있다. 이런 이유로 표면적으로 충직한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데 결정적으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존재들이다.


 

기득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이로 인한 위기감은, 권력을 지닌 소수가 공권력을 동원하고 때로는 폭력에 호소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한다. 이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극단주의자들(이를 테면 극우 단체)에게도 손을 내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정치적 패배나 기득권 상실의 두려움은 이들의 행보에 보다 근원적인 동인으로 작동한다.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반하는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국민을 대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을 동원하고, 사법 기관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집단을 두둔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대한민국만의 유별난 사례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 몇 달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상황만 보아도, ‘완전무결해 보이는헌법에 본질적인 맹점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여러 민주적 제도들은 양날의 검과 같다. 동일한 헌법 조항도 당파적 이익을 위해 무리하게 사용될 때,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집단을 무너뜨리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 위해 왜곡된 법률 해석을 필요로 했던 인디라 간디의 권력 남용과 정치적 몰락은 우리에게 기시감이 들게 하는 사례다. 권력을 쥔 이들이라면 어떤 제도를 시행할 때마다 손에 든 검처럼 신중을 기해야할 일이다.


 

민주주의 제도는 가능한 한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한다. 이는 지극히 합리적인 태도다. 하지만 인류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통해 소수의 의견도 소중하다는 것을 어렵게 배웠다. 다수라고 항상 합리적이거나 옳은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수의 의견을 경청하고 보존하려는 장치가 도리어 다수에게 족쇄를 채우는 경우다. 미국 내 인종 차별적인 투표법들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투표권법이 대법원 5명에 의해 폐지되어 버린 사례를 떠올려 본다. 이는 권력을 지닌 소수가 민주주의의 정체, 혹은 퇴행을 불러온 사태다. 적은 표를 얻고도 승리하는 선거를 가능하게 하여 트럼프 2기의 출범을 견인한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는 어떤가. 미국 민주주의에서 다수에게 재갈을 물리고 민주주의의 구현을 가로막는 소수 권력의 문제도 있다. 헌법 수정을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게 만든 미국 상원 제도가 그렇다. 간접 선거 방식인 선거인단 제도를 직접 선거인 보통 선거 방식으로 전환하려는 사회의 운동과 입법 과정이 상원에서 거듭 무산된 상황은 미국이 마주한 고질적 문제로 그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기로에 서있는 미국 민주주의의 현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서다.


 

극단적 소수에서 저자들은 권력을 차지한 소수가 공동체 다수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 국가가 어떤 부작용을 겪을 수 있을지 보여준다.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다시금 배우는 중이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그 자체의 취약성과 제도의 불완전성이 있음을 인식하는 일은 매주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재검토하고 새로 구축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제도의 잠재된 한계를 깨닫는 일에서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상상력과 인내심이 절실하다. 주류 정치인 중에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을 가려내는 일도 필요하다. 이 책을 읽고 사회의 제도들을 직접 운용하는 각 분야의 대표들의 자질을 검증하고 이를 요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우리는 미래의 대표들에게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가짐이 있는지를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같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와 그 구성원을 아끼고 살피는 마음이 없는 이들이 어떻게 다수를 대표할 수 있을까.


 

여기에 우리는 정치인들의 손에 든 민주적 제도라는 검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도 지켜봐야 한다. 침묵하지 않고 말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움직이기 위해 우리의 몸을 가볍게하면 더 좋겠다. 응원봉을 들고 시위 현장을 찾은 수많은 대한민국 시민들처럼 말이다. 노르웨이 인들이 오랜 시간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축해온 사례는 우리에게도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일은 이러한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 아닐까. 물을 주어 보살피고 어떤 열매와 만나게 될지 상상해보는 일과 함께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의 독자부터 발걸음 가볍게 씨 뿌리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책속으로]

[1] "오늘날 미국 사회가 직면한 급박한 위협은 소수의 지배다."(21) - P21

[2] "민주주의는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시스템이다."(29)

"패배를 받아들이고 권력을 평화적으로 넘겨주는 규범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근간이다."(29)

"정당이 지는 법을 배울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뿌리를 내린다."(36) - P36

[3] "정치인들이 패배를 지지 기반에 대한 존재적 위협으로 느낄 때, 그들은 권력 이양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39) - P39

[4]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더 급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독재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이 의미하는 바다."(76)


"그들은 심오한 원칙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에 무관심할 뿐이다. (...)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붕괴에 반드시 필요한 조력자 역할을 맡게 된다."(76) - P76

[5] "시민들이 헌법적 강경 태도를 보고 이를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77)

"21세기의 독재 정권 대부분이 헌법적 강경 태도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89) - P89

[6] "독재 세력은 주류 정치인들이 그들을 묵인하고 보호할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182) - P182

[7]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와 관계를 끊는 것은 민주주의 행동의 세 번째 원칙이다."(183) - P183

[8] "선출된 정부가 일시적으로 차지한 다수 지위를 활용해서 야당을 무력화하고, 혹은 게임의 법칙을 바꿔서 경쟁을 가로막음으로써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206) - P206

[9] "반민주적인 정당은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제도를 이용해서 독재를 인정하고 ‘강화’하기까지 한다. (...) 반다수결적인 제도는 소수 정당을 경쟁 압박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전제적인 극단주의를 강화한다."(276) - P276

[10] "미국은 2023년 이전에 전직 대통령을 기소한 적이 없었지만, 일본과 한국, 프랑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등 많은 기존 민주주의 국가들은 그렇게 했고, 그럼에도 그들의 정치 시스템은 후퇴하지 않았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중범죄를 저지를 때, 민주주의는 그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331) - P331

[11] "투표를 더 쉽게 만들고, 게리맨더링을 없애고, 선거인단 제도를 직접적인 보통선거로 대체하고, 상원 필리버스터를 없애고, 상원을 보다 비례적으로 만들고, 대법원 종신제를 폐지하고, 헌법 수정을 좀 더 쉽게 만드는 개혁. 이 모든 변화를 통해 미국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따라잡게 될 것이다."(341, 저자들이 주문하는 미국의 개혁안 요약) - P341

[12] "더 중요한 것은 헌법 개혁을 위한 아이디어가 거대한 국가적 정치 토론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침묵이다."(342)

"변화를 고려하지 않을 때, 우리는 변화를 이룰 수 없다. 논의와 아이디어는 결코 공허한 노력이 아니다."(344) - P344

[13] "사회 운동은 개혁을 지지하는 새로운 유권자 집단을 양산하고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이들의 입지를 약화시킴으로써 정치인의 선거적 계산을 바꾼다. (...) 대규모 사회 운동이 정치적 셈법을 바꿔놓으면서 그들은 포괄적인 개혁을 받아들였다."(353) - P353

[14] "오늘날 미국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 개혁 의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개혁 ‘운동’일 것이다. 이를 통해 각계각층의 시민을 국가 차원의 지속적인 사회 운동으로 집결시킴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하고 공적 논의의 틀을 바꿔나가야 한다."(358) - P358

[15] "미국의 민주주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리 민주적이지 못했던 과거를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365) - P365

[16] "민주주의 수호는 이타적인 영웅의 과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선다는 말은 우리 자신을 위해 일어선다는 뜻이다."(369)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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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윌리엄 에긴턴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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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실재는 없다 - 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원제: The Rigor of Angels)


윌리엄 에긴턴 지음 | 김한영 옮김 [까치] (2025)

   



종종 한 권의 책을 읽고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단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천사들의 엄격함을 읽고 나서 입가에 맴도는 단어는 백일몽이라는 단어다. 인류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세 사람-칸트,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을 중심으로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했던 발자취를 따라가는 독서였다. 저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세 사람을 어떻게 주목하고 연결짓게 되었을까 놀랍다. 이 책에는 근대 철학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문학가이면서 실재와 영원성에 대해서도 깊이 사색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리고 양자 역학의 토대를 세우는데 기여함으로써 현대 물리학의 역사를 새로 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등장한다.


 

무엇보다 이 세 사람이 이 책에 모여 연결될 수 있었던 단초는 철학자 칸트가 제공했다. 칸트의 사상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저자는 세계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감각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인간의 감각은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창구이자 세계로 통하는 채널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를 파악하는 데 제약이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감각이다. 저자 윌리엄 에긴턴이 소환한 사상가 세 사람은 바로 실재의 본질을 탐구한 이들이다. 이들에게 실재, 존재에 의해 감각되어 재구성된 이미지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에서 실재란, 측정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고, 칸트 역시 바라보는 존재(주체)의 절대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노출된 자연이다.”(115)이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언급에서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저자가 보르헤스나 하이젠베르크가 모두 칸트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주목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생생한 인물의 모습으로 되살려 놓은 부분이다. 실재의 모습을 파악하는 문제에 있어 현대 물리학의 역사 일부를 생생하게 들여다본 느낌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이 시공간이라는 토대 위에서 원자는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은 상식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이, ‘실재하는원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인가? 결국 이 문제는 존재와 우주의 근거를 설명하는 본질과 이어져 있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질문이 단순히 철학과 문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문제를 관통하고 있었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 역학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보는 방식을 마련해주었다. 그렇다면 칸트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에 인간이 파악한 실재란 같을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동시대인에게도 이 실재란 같을 수 없지 않겠는가. 나아가 각 존재에 의해 구성된 실재는 각 주체가 세계로부터 추출한 극히 작은 이미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파악된 실재는 결코 실재와 동일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 대한 에피소드는, 주체에 의해 파악된 실재의 이미지가 실제의 실재와 동일한 경우 그 주체는 자유를 잃고 그 실재에 구속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이 놀라운 능력과 반대로, 자신이 받아들인 정보를 통합하여 의미를 추출하는 일은 잘하지 못했다. 결국 완벽한 기억혹은 완벽한 재현이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존재는 내부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구조화하는 기능이 필요할 듯하다. 결국 주체가 세계를 파악하려면 세계로부터 흡수한 정보를 통합하고 의미를 추출하는 추상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은, 양자 역학의 토대를 놓은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행렬 역학으로 양자 역학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대화의 방법이었다. 그는 모든 진영에게 열린 중간 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존 지식이나 현상에 대해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는 영역이 하이젠베르크가 생각했던 중간 지대에 가까운 것 같다. 하이젠베르크는 핵이나 전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정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견해와 다르고 때론 논쟁도 벌였던 닐스 보어, 이보다 더 큰 견해차를 지니고 대립했던 아인슈타인과도 중간 지대를 유지한 점에 주목해 본다. 지대는 그와 이 영역 내에서 공존했던 이들에게 서로의 논리를 다듬고 재점검하는 기회를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중간 지대는 견해차에 따른 상대방을 배제하기만 하는 우리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대는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이는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에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상가가 언급한실재의 본질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큰 틀에서 주체가 파악하는실재는 각 주체만큼이나 다양한실재가 존재한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의중간 지대는 단지 학문적이고 심도 있는 대화를 위해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혹은 의식 있는 주체에게 필수적인 요건 혹은 덕목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서로의 관계가 경직되고 메말라가는 지금, 기후 정의와 같이 시급한 인류 공동의 문제를 직시하는 데에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한다.


 

전후 하이젠베르크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동료 과학자이면서 나치에 의해 부모님 모두 희생당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구드스미스와 하이젠베르크의 인연이 책의 대미를 장식한다. 구드스미스가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거둔 것은, 어쩌면 저자가 말한대로 자신을 위한 조치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구드스미스 자신이 하이젠베르크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스스로에게 관대해진 것은 아닐까 싶다. 다르게 말하면 타자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이 세상의 실재는 객관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에게는 그만의 실재가 존재할 수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부분은 나의 생각이지만, 타자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실재의 개념을 마찬가지로 적용하면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담긴 세 사상가의 실재에 대한 주장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칸트의 사상이 보르헤스와 하이젠베르크에 영향을 주었고, 실재를 파악할 때 실재의 본질이 이를 바라보는 이, 곧 주체에 달려 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우리 각자는 세계라는 이미지가 통과하는 다른 렌즈를 지닌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 책은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한 현대 물리학사의 한 단면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보른을 포함한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는 집단과 슈뢰딩거 아인슈타인의 논쟁은 일단 현대 물리학계의 실험을 통해 하이젠베르크가 제안한 해석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말이다. 또한 이 책은자유의지라는, 사상사의 오랜 주제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생각해볼만 하다. 무엇보다 서로 무관해 보이기까지 한 세 명의 지식인들을 실재라는 주제로 엮어내는 저자의 통찰과 안목을 경험할 수 있었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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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자가 취한 경로는 입자를 관찰하는 우리의 행위, 바로 이것을 통해서만 생겨난다."(25, 하이젠베르크의 말)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노출된 자연이다."(115, 하이젠베르크의 말)
- P25

[2]"사실 영혼이나 의식은 시간에 걸쳐 존속하는 통일된 자아감이다. 영혼 또는 의식이란 세계를 지각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지각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바로 이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연결되고, 또다시 다른 순간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불과하다."(77, 칸트의 입장)
- P77

[3]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과학을 실행해야 하고, 어떻게 세계에 관한 정확한 판단을 형성해야 하는가를 항상 비판적으로 조율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이성에 자연스럽게 끌려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우리 자신을 붙잡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79)
- P79

[4] "실제 운동은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이 아니라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시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80, 제논의 역설에 대한 헤겔의 반박)
- P80

[5] "모든 진영에게 열린 중간 지대가 필요하다."(89,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89

[6] "우리는 무엇을 관찰하기로 정했는가에 따라서 실재의 각기 다른 측면을 볼 수 있고 두 가지 측면은 서로를 보완하지만, 실재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124, 닐스 보어의 상보성)
- P124

[7] "우리의 근본적인 비결정론 가설은 실험과 일치합니다."(127, 코펜하겐 해석을 낳은 보른과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127

[8] "외부 세계는 추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연구는 아름답습니다."(146, 하이젠베르크가 1935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P146

[9] "시간은 상실이다. 시간은 비통함이다. 시간은 영원함에 대한 욕망이다."(190, 보르헤스의 <알레프>에 나타난 시간에 대한 통찰)
- P190

[10] "확률적으로 모든 것이 생겨날 수 있으니 우주에는 정말 독창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211, 글쓰기 주제로 카발라를 택한 보르헤스의 말)
- P211

[11] "세계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는 유한하므로, 시간을 무한대로 늘리면 가능한
순열의 수가 소진되어 우주는 되풀이될 것이다."(212, 니체의 입장)

"니체의 초인은 똑같은 것이 영원히 반복되는 우주적 부조리에 용감히 맞서거나,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똑같은 삶을 기꺼이 반복적으로 영원히 사는 존재였다."(212)
- P212

[12] "도서관은 하나의 구체이고, 그 구체는 한가운데가 어찌 되었든 육각형이며, 구체의 바깥 둘레에는 도달할 수 없다."(222)

"끝없이 절망적이고 부조리한 도서관에서 길을 잃은 보르헤스에게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것이 중심이고, 그 둘레, 그 불가능하고 모든 것을 감싸는 점이자 기원은 어디에도 없거나, 적어도 도달할 수가 없다."(224)
- P222

[13] "일반 상대성 이론은 단순히 실험 자료를 해석한 것도 아니고, 더 정확한 법칙을 발견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실재를 완전히 새롭게 보는 방식이었다."(244)
- P244

[14] "숭고는 우리가 만든 세계 표상에 대하여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반작용이다."(282)

"숭고라는 미학적 감정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과 우연성에 둘러싸인 존재의 울타리를 벗어나 절대적인 어떤 것 – 광활한 우주,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의무 – 을 그려볼 수 있다는 깨달음에서 생겨난다."(286)
- P282

[15] "인간의 이해력은 무한하다.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것들에 관해서까지도."(286,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286

[16] "자유의지는 형이상학적인 이식물이나 위대함에 대한 망상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기 쉬움에 대한 인정이다."(297)
- P297

[17] "그만 하면 됐네(Es ist gut)"(313, 칸트의 마지막 말)
- P313

[18] "시간과 세월의 담요에 감싸이기 전에 칸트는 이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생각한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흡수한 것으로부터 최소한의 것을 뽑아내고 추상하는 능력은 그 존재에게 자유를 그 세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행동 과정을 결정하고 선택을 판단하는 능력을, 더 나아가 필요성을 부여한다."(315)
- P315

[19] "(양자가 취하는 경로는) 우리의 관찰, 오로지 이것을 통해서만 생겨난다."(317,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317

[20] "원자는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357,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양자 역학의 역설은 하이젠베르크의 발견을 신의 눈으로 자연을 보는 관점에 일치시키려는 시도로부터 생겨났고, 그것은 애초에 우리의 관점이 아니었다."(357)
- P357

[21] "자유와 책임은 다르게 선택했을 경우를 상상할 줄 아는 존재의 필수적인 가정이자, 지금 이 삶을 여러 갈래의 길 중 내가 선택한 하나의 길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의도를 판단할 때 우리는 절대로 그 사람의 생각에 접근할 수 없고, 그들의 눈으로 세계를 볼 수가 없다. (...) 그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한 비밀을 안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했었을 행동, 해야만 했을 행동을 고려하는 것이다."(367)
- P367

[22] "사실,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구드스미스)가 내린 면죄는 하이젠베르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368, 마지막 문장)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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