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윌리엄 데이비스 킹지음 | 안기순 옮김 | 책세상

 

 

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는 남자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우리가 흔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 대상을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한때는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버려진 쇠붙이를 가져와 광이 때까지 집요하게 문질러대기도 하던 사람이었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된 용어의 다른 표현은 아마도 무가치한 ’,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의미한다고 있겠다.

     책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43세이자 교수였던 저자는 이혼을 앞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된다. 아마도 이혼에 앞서 아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오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저자가 7 써내려 개인적인 수집기이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성찰의 흔적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수집하며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존중받기를 원하는 분열적인 자화상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자기 기록 과정을 거쳐 책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50세가 저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희망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저자의 수집관은 매우 독특하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위해 돈을 들여 구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수집할만하다고 생각할만큼 가치있는 대상을 수집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말하는 자신의 수집행태는 매우 독특하다.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99)

 

나는 (…)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99)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사회가 의도한 욕망이 개인에게, 우리에게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으로 물신화된 가치체계에 익숙해져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치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은 의식화된 사회의 욕망이 아닐까. 반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가신에 대해 알기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 나타낼 있는 솔직한 반응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대상들에 반응하는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사이의 반응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을 , 우리는 작가의 의도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일종의 텍스트로 제한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었다고 있다. 반면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가 텍스트를 배제해버렸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작가의 의도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또는 관람자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과 배경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마치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고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43세의 교수이었지만, 중년의 초입에 이혼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건너는 상황이었다. 저자에게 수집행위는 이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과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26)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준다.”(99)

 

     평생 수집을 하면서도 중년이 저자가 자신의 중년기 7 써내려간 독창적인 기록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둘러싼 맥락에서 소환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차원과 비개인적인 차원에서 수집행위를 다름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수집은 사랑과 사랑의 상실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수집은 자기 가치와 자기 혐오에 대해 말해주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서투름에 대해 말해준다. 비개인적 수준에서는 20세기 말이라는 시대의 풍요과 과도함에 대해 말해준다.”(215)

 

결국 솔직하게 개인의 부족함을 고백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보고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모습을 엿볼 있다. 

 

     저자의 수집행위는 우표수집으로 시작했지만, 어릴 어머니가 애써 모은 우표들을 동생과 함께 못쓰게 만든 중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쇠붙이를 주워오거나 자신이 소비한 식표품의 라벨을 수집하는 행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고 소모되는 개인의 저항적인 의미로서도 의미를 확장해서 있을것 같다. 부분은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무한긍정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표출할 있는 저항적이고 부정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 절차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버전으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소비하듯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 하나가 바로 수집이다. 우리는 가치를 지배함으로써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다.”(26)     

 

바로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 뼈속까지 내면화된 물신화, 상품소비주의적인 우리의 무비판적인 삶에 대해 우리는 No라고 말할 있는 부정성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내가 판단한 이유이다. 개인이라는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저자의 수집을 통한 저항행위 다음에서 엿볼 있다.

 

나는 컬렉션의 불필요함과 가치 없음에 집중함으로써 컬렉션의 가치와 필수성을 찾아내려고 했다.”(316)

 

     저자에게 수집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저자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없는, 때로는 저자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행위이지만 저자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이자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의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집의 의미를 성찰한다.

 

 

수집광의 수상록  몽테뉴적 자기 성찰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500여년 전의 사람이 자신에 대해 성찰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테뉴의 수상록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책에서는 수집이라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점이 좀더 다른 부분일 수는 있겠다. 몽테뉴는 자신의 화려한 귀족의 신분과 법관, 보르도 시의 시장을 지낸 배경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저자 윌리엄 교수도 역시 자신의 작은 키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기는 서슴지 않는다.

 

사실 때로는 사전 삽화 컬렉션이 자신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나는 컬렉션을 질투한다. (…) 나는 종종 자신이 중년의 비평가로서, 망설이는 사람으로서, 망가진 채로 남겨진 어휘 사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다.”(283)

 

     물러남의 대가라고 몽테뉴를 표현한 어느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기억이 난다. 물러남은 아마도 몽테뉴의 소심함 드러내주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로서 자신과 거리두기 대가라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멀찌감치 두고 들여다보는 사람을 의미할 터이다. 혼란과 비극의 시대 가운데서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인물에 경도되어 살아가지 않았던 몽테뉴에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란 상당히 메말라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몽테뉴의 인간 관계는 사심을 초월한 보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관계맺기의 모습이라고 수도 있겠다. 윌리엄 교수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엿볼 있다.

 

내가 품는 의혹은 (…) 수집이라는 것도 대부분 관계를 맺기 보다는 관게에서 물러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222)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신의 수집물(또는 행위) 무엇을 반영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있다. 연극무용과 교수답게 저자는 자신의 연극에 관한 인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분노와 욕망이, 그리고 정체성의 탐구가 물건들 사이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한다.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Anagnorisis라고 불렀던 것으로, ‘다시 알기또는 자기 자신에 관해 알기 뜻하며, 비극 형식의 본질 하나다.”(314)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절정은 바로 시리얼 상자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어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딸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1579개의 시리얼 상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학과의 강당으로 가지고가서 바닥에 초대형 퀼트처럼 펼쳐놓았다. 자신의 창고에 모아 두었던 종이상자들을 펼쳐 배열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짐으로서 개인의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예술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이 세상에 노출되어 연결됨으로써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500여개의 종이 상자들은 윌리엄 교수와 딸이 먹어치운 시리얼 상자였다. 가족이 거부할 없는 물질사회에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이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1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는 대상물인 셈이었다. 개인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남긴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윌리엄 교수도 무가치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어떤 유의미한 특징을 이미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해 알기라는 과정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남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저자 역시 자신이 죽고나면 자신의 컬렉션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궁금해하고 있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반추하며,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서 자신의 수집물들에 대한 행방을 역시 고민한다.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어떤 존재를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로 어던 인간 존재도 뭔가를 진정으로 소유할 없는데, 죽음이 소유를 휩쓸어가기 때문이다.”(361)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수집품이 유용한 물건들이 아님을 알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임도 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수집물들이 스미소니언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TV프로그램 소품으로나 쓰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부분에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딸들 역시 아버지의 수집물들을 물려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대목이 흥미롭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를 떠올린다면 결정은 언제든 바뀔 있겠으나,  저자는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단순히 덧붙이고 있다.

 

내가 물려주는 것들 가운데서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다. 희망컨대, 아이들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336)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 찾아낼 아는 능력은 개인의 세계관과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번성기는 바로 마지막 , 나머지 모든 것의 날이다. 창조에 뒤따르는 휴식은 뭔가가 되기를 멈추는 순간이고, 그것은 죽음의 리허설이다. 휴식의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알고 느끼는 방식이다.”(350)

 

수집은 소유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90)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수집품들은 자신의 일부이자 인생의 축약품으로서 자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속성으로서의 바램과 희망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별적이도 무가치해보이는 사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이고, 주인에 의해 끊임없이 분류가 되고 정리되고 하면서 수집물의 전체는 낱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수집가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본능으로서 연속성을 보장받는 방법이기도 것이다. 다시 저자의 자기 성찰 과정을 상기해보면 몽테뉴의 자기 탐험과 성찰 행위와 매우 유사함을 깨닫는다. 세계에 저항하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로서 저자의 수집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거울과 창문과 같은 수단으로서의 수집행위

     글의 초입에 언급했던 수집이 저자에게 갖는 의미로 다시 돌아가본다. 저자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듯이 수집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거울 기능을 가지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외부에서 들여다볼 있는 창문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의 경우처럼 평생동안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수집물이 주는 역할은  예술활동을 통해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자기 성찰 수단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시에서처럼 내가 예술을 자신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이용한 경우는 드물었다.”(146)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이라는 수단은 자아의 확장수준으로 이어졌다.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컬렉션을 사랑하고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208)

 

컬렉션은 중년이 나를 그린 그림이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중년을 서술하는 것이다.”(209)

 

나는 메타포들을 수집한다. 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자신의 비유적 형상을 그려낸다.”(238)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의할 뿐인 권의 . (사전삽화 컬렉션 ) 표현하지 않는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281)

 

     이처럼 여러군데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수집이라는 행위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다. 인간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하나의 박물관으로 생각해볼 , 윌리엄 교수가 말하는 수집이란,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행위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대상물을 지속적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평가하는 행위가 평생 지속된다.

     누구나 수집행위는 본능이라고 말할 있겠다. 실례로 무형이기는 하지만 우리 안의 모바일 기기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소유하는 행위를 떠올려볼 있을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는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물들을 폴더에 소유한다. 윌리엄 교수의 수집물처럼 낱개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할 없다. 반면 이러한 수집물들이 평생동안 모이고, 분류되어 하나의 집합체로서 특징을 띠게 되면 자체로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의 매일 찍은 사진들이 어느 사용자에 의해 분류되고, 재배열되고 관리된다면 사진들은 새로운 형태로서 생명력을 가질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진들 어떤 특정 주제하에 선별된사진들은 더욱 주인의 의도를 반영하는 자아의 확장 버전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집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은 자아의 표출 도구이자 자신을 성찰하는 수단이라고 정리할 있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읽으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수집행위 과정은 수집가에 대한 실존적인 자기 발견 수단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책장을 들여다보면 책의 목록을 통해 수집가의 욕구와 욕망을 상당히 읽어낼 있다.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열등감은 무엇이고,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을 인지하고 있을까 하는 점들도 그러하다.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이는 영어 관련 책이 많을 있고,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유독 부분에 대한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집의 양상은 보다 의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반면 윌리엄 교수의 수집 형태는 상당히 무의식적인 자기 표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에는 저자의 누나와의 관계(오랜 시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로부터 받은 상처 내지는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일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집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기도 하였다. ‘수집행위는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과도 보여주었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모은 1570여개의 시리얼 종이상자, 800개가 넘는 우편봉투 속지 컬렉션, 6000장이 넘는 명함 등은 의식적인 수준을 넘어 저자의 무의식이 투영된 어떤 실체, 저자의 분신을 보여준다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고, 대부분은 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버리고, 정리하여 간단하게 살라고 하는 /운동이 활발히 눈에 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간소하게 살라고 하는 현대사회에서 윌리엄 교수와 같은 수집광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많은 이들이 간소하게 살라고하는 유행 동조하는 가운데, 저자처럼  싫다라고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있는 부정성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토록 많은 것이 제공되는 세상에서 최소한으로 소유하고 살을 빼는 것은 이중의 박탈처럼 보일 있다.”(26)

 

     누구나 여행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회만 된다면 여행은 반드시 해야하고,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반면 나는 여행이 싫다.’라고 말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도 그렇게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행이 좋다라는 점은 수긍을 하면서도 다수의 집단적인 견해 앞에서 자신의 부정 드러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책을 덮으며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수집행위는 바로 자신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행위와 다름아니다.

     내가 윌리엄 교수처럼 상당한 수집품을 소유했다면, 나는 거대한 컬렉션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나는 모든 것에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는 진리에 따른 것같기도 하고 결국은 그렇게 하기 힘들것 같기도 하다. 왜나하면 자신도 윌리엄 교수처럼 집요함과 애착, 물건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갖는다는게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교의 만다라 예술과도 같이 정성들여 완성한 자신의 모래 그림들을 순간에 손으로 쓸어버리는 것처럼 컬렉션도 임종 전에 소각장에서 모든 컬렉션이 불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멸과 함께 나의 정체성의 연장이었던 컬렉션도 (nothing) 속으로 사라진다는 행위로서 말이다.

     책은 수집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자, 불완전한 존재를 자각하는 자화상을 그린 결과물이다. 아울러 유별난 개인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뒤집어 있게 해주기도 하며, 우리 자신에게 삶의 실체를 자각하게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22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한다. 그것도 무척 열정척으로."

(30면)
"나는 발견하고 보관했다."

(26면)
"수집은 사물에서 질서를, 보존에서 미덕을, 모호함에서 지식을 발견한다."

(33면)
"대개의 경우 수집의 정수는 그 세상을 미니어처 형태로 소유하는 것이다."

(208면)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그 컬렉션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281면)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으할 뿐인 한 권의 책. 그 책(사전삽화 컬렉션북)은 표현하지 않는 내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

(238면)
"내가 풀칠을 하며 바친 시간들, 내 끈적거리는 손가락으로 그 섬세한 종이들을 서툴게 다루던 시간들에 대해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면 좋겠다."

(66면)
"수집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과거로부터의 대상물들이 현재에 수집되어 미래를 위해 보전된다. 수집은 현존을 처리하는 한편, 욕망의 미스터리들을 하나하나 연쇄시킨다."

(95면)
"나는 (유진) 오닐의 모든 책, 오닐과 관련된 모든 책을 다음 컬렉션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책들로부터 중력의 법칙을 배웠다. 중량감이 생긴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갖는 것이었다. 더 많은 오닐을 (그리고 더 많은 헤비메탈을) 소비할 수록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26면)
"수집은 종종 그 시스템의 부조리, 가치라는 것이 자유 시장 안에서 과도하게 자유를 행사한다는 부조리를 드러낸다. 수집가들은 물질적 세계가 미친듯이 박쥐 똥을 싸지르는 순간들을 주시하고, 그 똥더미에 구더기를 싸지른다."

(170면)
"수집 충동은 죽음에 맞서는 투쟁이고, 그런 투쟁에서 돈은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316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부유한 남자의 전형인 동시에, 많은 것을 가진 가난한 사람의 전형이다. 바로 여기에 오이디푸스의 패러독스가 있다."
"충분히 성장한 컬렉션은 그 수집가를 초월해서 나아간다. 컬렉션은 그 자체의 정체성을 짊어지게 되는데, 그건 마치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와 같다. "

(337면)
"수집은 내가 내 삶을 붙들고 있는 더 큰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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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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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

(Becoming a Mountain: Himalyan Journeys in Search of the Sacred and the Sublime)

스티븐 얼터(Stephen Alter) 지음 | 허형은 옮김 | 책세상

 

 

 

(걷기의 철학)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육체적, 심리적 상처를 입은 저자 스티븐 얼터는 어느 문득 산행을 결심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았고 산사나이들에 대해 알지만 저자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 작가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사냥을 접고 대신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예순에 가까운 그가 집의 침입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은 서서히 회복한 산을 오르며 치유하는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스티븐 얼터의 기나긴 히말라야 등산기가 나에게 특별히 닿은 이유는 자신도 마음의 감기 불리는 우울증 경험해 적이 있어서이다. 자신이 산을 주로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살기위해서걸었더랬다. 집안에 박혀서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재확인하지 않기 위해 나역시 밖으로 뛰쳐나가 걷고 걸었던 것이다. 저자가 산행에 동행한 라투와 죽음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스러운 살아남는 과정이다라고 대목을 읽을 역시 스티븐 얼터가 되었다. 같은 이유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루에 시간이고 걸었다고 하는 시인 랭보가 나는 머릿속에 자리 잡은 유령들을 쫓아내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 다녀야만 했다.”(231)라고 말한 부분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내가 혼자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던 나의 걷기 경험은 이미 시인 랭보가 같은 이유로 무한히 걸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산행을 했나라는 말이 나올법하게 저자는 힘겨운 산행을 결심하고 강행한다. 그는 그토록 심하게 상처를 입은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스물 살때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50 중반이 되어 기나긴 산행을 기획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럴 이해가 되는 표현이다. 어쨌든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경험을 , 단순한 육체의 회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말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아온 스티븐에게 걷기란 도시인들의 걷기와는 다른 생활의 중심일 같다. 스티븐 얼터는 걷기를 물활론자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자연에는 존재하는 신성(神聖), 정의하기 힘든 존재의 발자취를 인정하는 의식”(223)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스티븐 얼터에게 히말라야 산행은 자유의지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부딫쳐 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신성을 인지하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티븐은 산행 과정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히말라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아니라 걷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속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2년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 철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도로와 닦인 길을 버리고 미답의 황무지를 찾아다니라라고 말한 소로의 생각은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외친 니체의 철학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명상 행위로서의 걷기를 말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걷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 증진뿐만 아니라 명상의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가우타마 붓다는 방랑하라. 물질적 부를 모두 버리고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줄 길을 찾아 나서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을 여행할 없다.”(218)라는 가우타마 붓다의 말은 과연 무슨뜻일까. 말은 저자의 기나긴 산행을 따라가며 줄곧 나에 숙제를 던져 준말이었다.  

 

       

 

(만다라의 철학)

산행을 하며 걷기의 철학을 상당히 이야기 하지만, 불교의 수도승들이 정성을 들여 완성한다는 만다라에 얽힌 이야기도 새롭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불교 수도승들이 며칠 또는 주에 걸쳐 완성하는 모래 만다라라는 완성된 직후,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없애버린다고 한다. 황당한 행위 또한 만다라의 과정에 속하는 행위로서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이러한 행위를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더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정신수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한 만다라를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 없애버리는데, 이는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이다.”(318)

 

 

 

(자연에 대한 신성함과 숭고함)

세속을 훌쩍 떠난 장소인 해발 5000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자연은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준다. 히말라야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모두 신성과 얽혀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여러 인도의 신화 이야기에는 변신 하는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형신화는 히말라야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산을 타넘는 구름의 모습, 짙은 구름에 의해 가려진 산의 봉우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누군들 자연의 모습에 감탄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있을까. 스티븐은 숭고함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감정적 현기증이다.”(356)라고 표현해두었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책의 부제에도 밝혀 두었다. 신성함과 숭고함을 찾아나선 히말라야 산행이란 표현에서도 있듯이 산행을 통해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이 주는 경외감과 숭고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등반에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주는 위안)

스티븐은 결국 산행 과정에서 불길해보이는 꿈이 예언한 , 산이 도와주지 못해 산행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로 이렇게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남은 절반의 여정인 돌아가는 길을 살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독인다. 스티븐의 산행을 따라가며 그의 산행은 산이 거기에 있기에정복하려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있었다. 저자의 산행을 통해 그는 좀더 산이 주는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인 같다. 저자 스스로에게 전하는 자신의 위안 대목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번 원정에 쏟아부은 모든 육체적, 물질적 자원과 희망, 기대들 하등 무익한 모험에 낭비된 것처럼 보일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옳은 결정들을 내렸음을, 그리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음을 앎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다. (…) , 패배를 받아들이되 우리 정신과 육체가 감당해야할 한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다.”(417)  

 

   책을 덮으며 문득 스티븐의 히말라야 산행은 자체가 만다라수행과정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래를 손에 쥐고 정성껏 모양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오르는 산행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오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 때가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다라를 손으로 쓸어 담아야 순간임을 알게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전문 등반가들도 언제나 번의 시도로 산에 오른 사람은 없음을 스티븐이 만난 최고의 등반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오히려 그들은 전문 등반가가 되어갈 수록 산을 이해하고, 앞에 더욱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친애하는 히말라야 > 저자의 히말라야 정상 정복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자의 실패한 산행 기록을 따라가며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변덕스러운 모습과 너그러운 모습을 모두 있었던 점이 좋았다. 저자가 지고 다른 저자의 산행기의 저자(브루스 채트윈) 책에 남긴 말도 오래 인상에 남는다. 저자의 동행 짐꾼들이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있게하루 동안 쉬어가야한다고 넉살좋게 주장하는 대목도 마음에 든다. 산행 밤새 쉬지 않고 폭풍우를 겪은 아침, 해발 3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있다는 브라만카말 수만송이를 발견했을 꽃밭의 절경 모습과 저자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저자 스티븐 얼터 스스로의 치유과정이기도한 자신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산행을 취재하는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읽어나갔던 여정이었다. 여운을 좀더 남겨두기 위해 다소 교훈적인 느낌은 나지만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기로 한다.

 

이런 운명론적 해석은 제쳐두고 우리는 계단식 논밭이나 , 돌와 댐을 얼마나 만이 건설하든 산은 항상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길들이고 굴복시키는 대신 연민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실체를 없는 신앙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산에 접근해야 한다. 고지를 정복하고 식만화하는 대신, 경계가 불명확한 영토를 따먹기 하듯 차지하며 고산지대의 너그러운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우리는 산을 닮아가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존재이자 인간에 비해 무한히 영속적인 존재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8면)
"우선, 내가 불굴의 존재라는 생각을 감히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살아남은 정도의 도전을 넘어 나는 오히려 육신을 더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69면)
"정상까지 오르는 데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발을 붙잡는 건 마음 속 공포였다."

(80면)
"산과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타인이 쓴 책을 전부 덮어버리고 오직 바위와 얼음에 새겨진, 혹은 저 위쪽 숲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새겨져 있는 말들만 읽는 것이다."

(135면)
"라투는 죽는 건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고통스러운 건 살아남는 과정이다."

(159면)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산에 오른다."

-저자는 과연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262면)
"챙겨온 책 중에서 브루스 채트윈의 <노랫길>을 읽는데, 동행한 짐꾼들이 몇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수 있게‘ 하루 쉬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356면) 숭고함에 대하여
"에드먼드 버크나 칸트 같은 철학자도 인간이 자연의 가장 극적인 경이로움을 접하면서 경험하는 양면적인 반응을 ‘숭고함의 심미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산의 절경을 보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알프스나 히말라야에서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목격할 수 있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조는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자아낸다. 한마디로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정신적 현기증이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발밑으로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보다 더 불안하고 더 향정신적인 은유의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선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원시적인 반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존재를 찾아 자꾸만 산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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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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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인형: 구슬 @kooseul23]


 


문명의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의 '우주 고딕' 소설


궤도

 


서맨사 하비(Samantha Harvey) 지음

송예슬 옮김 [서해문집] (2025)

 



서맨사 하비의 소설 궤도(Orbital) 2023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이어서 2024년에는 곧바로 부커상을 수상하고, 국내에는 2025년 여름에 출간되었다. 말하자면 이 번역서는 하비의 따끈따끈한 작품이다. 소설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실려 있는 한 그림에는 세계 지형의 윤곽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지도 위에 1에서 16까지 숫자가 적힌 곡선이 이어져 있고, ‘북반구가 낮일 때 지구 궤도의 24시간이라는 캡션이 붙어 있다.


 

처음 책을 펼쳐보았을 때 이 책은 은유로서가 아니라 정말 우주선의 궤도를 그린 지도구나라는 점을 알게 된다. 나아가 소설을 어느 정도 읽고 나서야 이 무질서해보이는 번호들은 지구를 도는 우주선 혹은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우주정거장이 매90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일정한 간격으로 인공위성/우주정거장의 궤도가 한쪽 방향으로 조금씩 밀려나는 듯한 선들이 보인다. 게다가 이 선들이 순차적으로 이동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언가 규칙적인 운동을 암시한다. 그러면 또 궤도는 왜 16개일까 싶은데, 이는 지구주위를 도는 우주정거장이 약 90분 동안 지구 상공을 한 바퀴 돌며 이동하는 궤도를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소설은 처음부터 다음과 같이 시작하며 낯선 느낌을 만들어 낸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돌다 보면 너무 함께이고 또 너무 혼자여서 생각과 내면의 신화조차 이따금 한데로 모인다.”(7, [궤도 1])

 


이제 독자는 우주에서 벌어질 스펙터클이 조만간 시작되는 건가, 기대해보다가도 책의 절반을 넘어서까지 아무런 사건이 보이지 않으면 당황하기 시작한다. 소설이 그만큼 점점 더 낯설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른 소설에서 체감되는 플롯이 이 작품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일 테다. 이 소설의 목소리는 한편으로 칼 세이건이 태양계 탐사선 보이저호가 태양계 밖을 나가기 전에 카메라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 지구를 바라보았던 시선에서 창백한 푸른 점을 발견하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암흑의 고립감 속에서 독자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시선이 바로 이 작품에서 제일 먼저 드러난다.

 


이 소설은 과감하면서도 실험적인 문체, 시와 같은 잔잔한 리듬과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지구 표면를 벗어나 자신이 떠나온 지점을 바라보는 우주적 존재로서 자신에 대한 자각, 우주 속의 작은 점과 같은 존재가 자기 자신과 지구의 운명에 대해 명상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정보만 주어지기에 캐릭터 혹은 서사에 대한 몰입이 약하게 다가올 수 있다. 이 점은 기존의 소설 문법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생소하고 밋밋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반면, 캐릭터들이 지구를 바라볼 때 느끼는 독특한 정서를 담은 표현들은 매우 인상적이고 아름답다. 특히 화자가 독백하듯 들려주는 이야기는 거대한 에코 체임버(반향실) 속에 있는 한 지구인의 목소리가 배경 소음처럼 이어지는 반향같이 들린다.

 


화자는 자신이 타고 있는 우주선 혹은 우주정거장을 거대한 금속 알바트로스라고 비유한다. 이 말이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던 것은, 1년 넘게 땅을 밟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 하늘에 떠 있는 태평양의 알바트로스처럼 그의 우주선이 지구 주위를 도는 동안 끈임 없이 추락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곳은 지구와 가깝고 중력이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자유 낙하 상태다. 그러니까, 나는 게 아니라 추락하고 있었다.”(191, [궤도11]) 이는 놀라운 관점의 전환이다. 점처럼 무한히 작아 어떤 존재로도 느껴지지도 않는 존재, 하지만 사유하는 존재의 자기 발견의 순간이 아닌가. 고립된 우주정거장에서 우주인들끼리 서로 부대끼면서도 이들 사이의 대화는 작품에서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 여겨진다. 독자는 이 금속 알바트로스에 타고 있는 우주인들의 생과 사 이 경계에 자리 잡고 자신과 문명을 사유하는 존재 에 더 주목하게 된다.

 


수많은 소설의 형식과 달리, 이 이야기에서 화자는 역동적인 체험이나 사건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우주인 각자의 인간적인 문제,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나 회상이 의식에 따라 두서 없이 자리를 잡는다. 뿐만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생각, 인류의 오만과 지나친 자기애, 그리고 멈추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 젠더 갈등과 서로에 대한 몰이해의 문제 등으로 사유를 넓혀 간다. 더 나아가면 인간과 지구라는 행성과의 관계에 대해 관조하기도 한다. 이른바 인간이 야기한 환경 문제와 지구 온난화의 문제를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태양도 수명이 있듯이 지구와 인류에게도 종말은 불가피하다. 지금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인류의 종말이 인류에게 다가 온다는 자각, 또는속도에 따라 다라 옮아 대신 덮는다. 바로 이것이 중요한 건 속도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우주의 한 가운데에 금속 알바트로스인 우주선 혹은 우주정거장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자신과 인류를 사유하고, 나아가 문명의 죽음을 상상하는 시선을 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문학 속의 고딕과 관련한 전통을 떠올려 보았다. 중세 유럽의 문학에서는 어떤 기준으로부터 이탈하여 이질적이고 괴이한 이름부터, 공포스러운 정서에 이르기까지. 여기 에 주목한 유럽적 고딕 양식이 있었다면, 이 정서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 오면서 황량하고 거대한 육지의 깊은 내륙에서 지독히 고립된 인간들의 군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미국 남부의 고딕이 있다. 이쯤되면 미국 사회에서 이 모습을 산업화의 여파로 이어진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맞물려 독특한 정서를 전달한다. 이를테면 이 분야에 대한 에드거 앨런 포를 위시하여 플래너리 오코너, 셔우드 앤더슨, 팀 오브라이언, 존 윌리엄스 등의 작가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궤도 에서도 미국 남부의 고딕에서와 같은 다른 듯 같은정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구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추락하고 있는존재의 절대적인 고립감, 금속벽을 경계로 삶과 죽음의 두려움과 문제들을 직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 화자 혹은 작품 속 캐릭터 개인의 서사가 강하게 개입되면서도, 지구인 대부분이 경험해보지 못한 환경(이를테면 하루에 16번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지금껏 누가 경험해 보았겠는가?)은 인간의 문제를 좀 더 먼 거리에서 지켜보고 고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극적인 플롯이 없음에도 매우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우주인, 인간은 결국 이런 존재론적인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다. 장소뿐만 아니라 인간이 모든 시간대에 존재하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117)는 경험을,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 처음 사용하는 감각인 까닭이다.

 


하비의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유럽의 고딕이나 미국 남부의 고딕 문학이 주는 정서의 연장에서, 한편으로는 이전의 고딕 문학과 달리 지구를 벗어나 있는 인간의 시선과 그 인간이 느끼는 내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고딕양식을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물론 처음 읽을 때는 이게 소설인지 아니면 우주인 남긴 실제 보고서에 메모를 해둔 글인지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달리 말해 이 글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 나아가 이 소설처럼 뚜렷한 플롯이 부재하면, 독자들은 몰입을 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소설이 중반 이후 넘어가면 비로소 아무 플롯도 없어 보이는 고요한 작품이 비로소 조금씩 익숙해지고 눈에 들어온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서맨사 하비의 소설을 우주 고딕’(Cosmic Gothic)이라 새롭게 부를만하지 않을까 제안해본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라도 이미 사용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주인들의 경험도 점차 확대되면서, 우주인들이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사건들을 반영한 문학이 본격적으로 나온 현상에 새롭게 주목해 보는 것이다. 지구 중력에 속박된 우주선 혹은 우주정거장에 고립된 채, 지구라는 행성이 직면한 위기와 문제를 직관하고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시도야말로 기존에서 보았던 고딕 양식과는 차별점을 갖는다. 나아가 인류의 멈출 줄 모르는 정치 행위와 인류가 서서히 맞이하게 될 문명의 죽음을 마주하고 명상하는 일은 결국 앞서 언급한 우주 고딕으로서 어울리지 않은가.

 


저자가 주목한 바와 같이 인류가 현재 마주한 큰 문제들에 대해 구성원 개개인이 인간 스스로 가속화한문명의 몰락을 중단 시킬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인류의 문명이 쇠락해가고 종말을 맞이할 것이란 사실 앞에서 이를 중단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말이다. ‘우주 고딕에는 이런 압도적인 운명, 하지만 어느 누구도 회피할 없는 흐름에 대한 두려움의 정서가 있다. 이는 기존의 고전적인 고딕양식의 정서를 계승하면서도 지구 밖에서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일탈과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우주 고딕이란 표현은 나름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혹은 이 소설이 우주라는 절대 고립 속에서 지구를, 인류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며 동시에 인류가 마주한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는 지구인의 아포리즘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책속으로]

[1] "가끔은 놀라운 생각을 한다. 자신들이 진공 심연을 홀로 지나는 잠수함을 타고 있다는 생각. 밖으로 나가면 안전할 것 같지 않다. 지구 표면에 다시 떨어졌을 때 이들은 생경한 존재들이리라. 미쳐 버린 낯선 세상을 배우러 온 외계인들."(39, [궤도3, 상행]) - P39

[2] "지구가 하찮고 작은 행성임을 깨닫고 우주 속 지구의 자리를 비로소 이해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멀리 지구와 떨어져야 한다."(51, [궤도4, 상행]) - P51

[3] "왜 이러고 있지? 절대 번영할 수 없는 세상에서 바득바득 살아 보려고 하는 이유는 대체? 완벽한 지구가 저기 있는데 굳이 우주가 원치 않는 곳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갈망은 호기심일까 아니면 배은망덕함일까."(89, [궤도 5, 상행]) - P89

[4] "신경질적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인류를 어떻게 아름답게 봐줄 수 있겠는가? 인간의 오만함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그에 필적할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뿐이다. 남근을 닮은 우주선을 우주로 쏘아 보내는 것만큼 오만한 행동은 또 없다. 우주선은 자기애로 미쳐 버린 종족의 토템이다."(96, [궤도 5, 상행]) - P96

[5] "눈 모자를 쓰고 양옆에 구름을 끼고 있는 안데스산맥 너머 북쪽으로 향하자 연한 빛이 보인다. 구름이 듬성듬성해지면서 저 아래 화재로 물러터지고 맨살이 훤히 드러난 아마존이 나온다."(99, [궤도 5, 상행]) - P99

"이게 세상이야. 남자들의 놀이터, 남자들의 실험실. 경쟁할 생각은 하지 마. 그래 봤자 결국 사기만 떨어지고 열등감과 열패감을 느끼게 되니까. 왜 절대 못 이기는 경주를 시작하고, 기를 쓰고 지려고 달려드니. 그러니 딸, 꼭 기억하렴. 너는 열등하지 않아. 그걸 굳게 명심하고서 존엄한 존재로 보잘것없는 삶을 살아가렴. 엄마를 위해 그렇게 해 주겠니?"(108, [궤도5, 하행]) - P108

[7] "달을 걷는 사람들을 경이롭게 생각해도 되지만 그 영광의 순간을 위해 인류가 치른 대가를 절대 잊지 말거라. 인류는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몰라."(109, [궤도5, 하행]) - P109

"우리(우주비행사들)에게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어디에서든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가상의 공간 같은 이곳 우주선까지 오기 위해서 말이다. (...) 국가도 국경도 없는 이 최후의 전초 기지는 생명체의 한계를 밀어낸다."(112, [궤도 6]) - P112

[9] "그렇게 유럽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당신 참 안쓰럽네요, 음성은 여전히 따스하게 말을 건넨다. 모든 시간대에 존재하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요. 이 거대한 금속 알바트로스를 타고 경도를 넘나들면서 두뇌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을 요구받는다니요."(117, [궤도 6]) - P117

[10] "오염되고 온난화되고 남획되는 대서양에서 아찔한 네온색 또는 붉은색 조류가 대발생하는 현상은 대부분 정치와 인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정치의 영향력은 너무나 자명하게 보인다. (...) 인간의 욕망이라는 실로 놀라운 힘이 지구를 형성한다."(130-132, [궤도 7]) - P130

[11] "빛나는 서구 자본주의가 꿈꾸는 우주 같은 건 여기 없다. 이곳은 불굴의 공학 기술과 천재적인 실용주의를 숭배하는, 칙칙하고 효용을 중시하는 육중한 사원이다."(170, [궤도 10]) - P170

[12] "우리는 다른 존재들보다 부싯돌 몇 번 부딪친 것만큼 앞서 있을 뿐이다."(187, [궤도11]) - P187

[13] "이들은 지구의 낮이나 밤 풍경이 펼쳐진 창가에 떠 있다가 새삼 자신들이 추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이곳은 지구와 가깝고 중력이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자유 낙하 상태다. 그러니까, 나는 게 아니라 추락하고 있었다."(191, [궤도11], 관점의 전환) - P191

[14] "지금 우리는 무상하게 피어난 삶을 살고 있다. 광란의 존재가 딱 한 번 손가락을 튕기면 모두 끝나리란 것도 안다. 여름에 터져 나오는 이 생명은 새싹보다 폭탄에 가깝다. 이 풍요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201, [궤도13]) - P201

[15]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지구는 물질성이 희미해지고 환영이나 성령에 가까워진다. 전 지구가 발아래를 지나갔다."(225, [궤도13])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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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자렛 - 즉흥의 상태
이기준 지음 / 시간의흐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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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이 부담되지만 책이 정성스럽게 제작된 것을 알겠네요. 과거에 찰리 헤이든의 공연을 놓친 것, 잭 드 조넷의 부고가 더 아쉽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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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여기를 산다


영화 프랑켄슈타인(2025)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족의 신이다. 그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내고,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인류의 은인으로 여겨진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창조해 내었기에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가 작품에 붙게 되었다. 이처럼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와 메리 셸리의 서사는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인상적인 영상미, 인간 사이의 관계와 사랑, 존재에 관한 철학적인 화두를 던진 바 있는 영화로 <물의 모양 shape of water>(개봉작 명칭은 사랑의 모양’)을 떠올리곤 한다. 이 영화를 제작했으며 국내에도 잘 알려진 멕시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올해 개봉했다. 영화는 원작에 충실한 면도 있는 반면, 토로 감독만의 개성 있는 영상미와 해석이 추가되었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생명의 이면인 죽음의 문제를 영화에서는 더욱 깊이 고민한 결과가 예술로 승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영화 속 인물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의 조각들을 이어붙이고 생명의 에너지를 가미하여 영혼을 불어넣으며 이른바 필멸자의죽음을 정복하고자 욕망했다. 하지만 미리 생각하는 자(prometheus)’라는 이름의 무게와 달리, 끝나지 않는 생명을 부여한 이 창조자는 피조물의 탄생 이후에 대해서는 먼저 생각해보지 않은 듯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거역한 죄로 벌을 받아 카프카스 산맥의 한 바위에 묶인 채,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이 쪼이는 고통을 당한다. 인류의 은인으로도 여겨지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 가운데 이 부분에 주목해보면, 창조물은 프로메테우스의 이면 혹은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자라고 볼 수도 있을 법하다.

 


죽음을 정복하고자 욕망했던 빅터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영원히 살아가야만 하는 이 창조물은 이제 우리 시대에서 범용 AI(AGI)로 변신을 꾀한 것으로 보아도 그럴듯하다. 레이 커즈와일이 제기한 특이점을 넘는 순간에 이 인간의 창조물은 이미 괴물이 되어버릴 것인가, 질문해볼 수 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영원을 살아야 하는 창조물의 가려진 고통과 근원적이면서도 비정한 욕망을 우리에게 이미지의 상징과 은유로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원작은 고전으로 여전히 살아남아 현재적 의미에 주목하고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며 현대인에게 유효한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아름답고 독특한 영상미와 색감이다. ‘기예르모 감독의 색깔이란 것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 곧바로 떠오르는 색(color)은 크게 4가지다. 토로 감독은 화면을 구성하는 추상적인 조형요소로서 색이 지닌 톤과 이 색이 내뿜는 분위기, 그리고 그 색의 상징성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잘 활용하는 감독이라 생각한다. 특히 그의 여러 작품에서 보이는 선명한 빨강, 순백색, 그리고 몽롱한 초록색과 짙은 푸른색, 혹은 이 두 색이 묘하게 섞인 청록색이 떠오른다. 특히 푸른색과 청록색은 이전의 작품 <사랑의 모양 The shape of water>에서 물과 사랑의 이미지를,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욕망과 공허함과 같은 감성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준 색으로 기억한다. 이렇듯 토로 감독이 작품에서 사용하는 색은 생의 화려함 생명력, 그리고 그 이면에 가려진 공허함과 죽음의 세계에 대한 예감, 혹은 삶과 죽음에 관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창조물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해서 주변의 모든 이들의 죽음을 보고 떠나보내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결코 죽을 수 없는존재로서,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이 쪼이는 것처럼 끝나지 않는 고통과 고립감, 외로움을 마주해야했다. 정작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지만 말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창조물의 잘못된 만남은 이렇듯 존재의 고통을 극대화한다. 생명체, 특히 의식을 지닌 생명체에게 죽음은 언제나 타자의 죽음을 간접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바닥이 없는 깊고 거대한 두려움. 이는 토로 감독이 늘 배경색으로 보여주는 짙고 무거운 느낌의 푸른색을 떠올린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느낀 한 가지는, ‘죽음이란 현상이 한편으로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에게는 우주가 선사한 /휴식의 시간이란 생각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창조물나를 끝낼 수 있는 축복을 달라고 프랑켄슈타인을 따라다니며 죽음을 갈망했던 장면을 떠올려본다. 이를 떠올려보면 우리는 이제 삶이 권태롭거나 두렵고,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만이 존재에게 더 큰 중요성을, 혹은 유일하게 중요한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제 피할 수도 없이 중년이 되어버린 내게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이 공통적으로 내게 한 가지 교훈을 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떠난 후에 상대방을 정성스럽게 애도하고 추모하곤 하지만, 살아있는 나에게지금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 중요하다고 느낀다면 상대방이 나를, 우리를 떠나기 전에 당신이 나와 함께해서 좋다, 함께 해주어 고맙다고 얼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좀 더 자주 그리고 가볍게 말이다.

 





[종이 인형(메리 셸리) 협찬: 구슬 @kooseul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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