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 0 : 구상섬전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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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0>로 류츠 신 입문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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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올리버
올리버 색스.수전 배리 지음, 김하현 옮김 / 부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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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애가 아름다운 감각들로 충만한 기억이기를

- 디어 올리버


: 두 신경과학자가 나눈 우정, 감각, 그리고 인생의 두 번째 시선

 

수전 배리+올리버 색스 지음

김하현 옮김 [부키] (2025)

 




한동안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책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손에 쥔 책들은 얇은 책이거나 편지를 엮은 책이었던 것 같다. 화가 세잔과 작가 에밀 졸라의 30년 넘는 우정이 담긴 교차된 편지들에 이어서 이번에는 두 신경과학자가 10여 년간 주고받은 편지글을 모은 디어 올리버를 읽었다. 올 여름 집안의 어르신을 떠나보낸 후 황망하고 헛헛한 마음에 작은 위안을 주었던 책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수신자, 곧 독자가 분명히 정해진 서간문이 지닌 고유한 친밀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편지는 지금 내 곁에 부재한 대상을 다시 불러들이고 당신과 나누는 대화이기 때문일 터다. 그러므로 서간문은 쓰는 이의 상실, 결핍을 전제로하며 지금 내 옆에 있지 않은 상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흔적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830)은 신경과학자이자 의사인 올리버 색스의 10주기가 되는 날이기에 이 책을 읽고 난 인상은 더욱 특별하다. 그의 기일에 맞춰 출간된 이 편지글에 그와 우정을 나누었던 또 다른 사람의 손길이 더해져 미래의 독자에게 전해진 셈이다. 책의 또 다른 저자인 수전 배리는 신경과학자로, 올리버의 말년에 10여 년 간 편지와 만남을 통해 삶과 연구 주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던 멘토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삶에서 이런 대상을 만나기란 얼마나 드물고 어려운가.


 

한편 무엇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수전 배리의 시각과 관련한 경험이었다. 50여 년간 단안시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수전이 훈련을 통해 입체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은 한 존재가 새로 태어나는 것과 다름없는 존재론적인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어린 시절에 단안시를 지닌 사림이 성인이 되어 입체시로 된 사례가 없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그러니 이 사연을 흥미롭게 여긴 올리버가 수전을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를 듣고자 한 것은 평생 호기심을 잃지 않았던 올리버다운 행위였다. 이처럼 올리버의 호기심은 지구인의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상대를 단순히 조사 대상으로서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상대를 보다 순수하게 인간이라는 동료로 관심을 갖고 상대를 인정해주었다는 점이 달랐다. 수전이 바라보기에 올리버는 누구든, 혹은 어느 것에든 관심을 주었던 사람이었나 보다.


 

올리버의 관심과 공감을 받지 못할 만큼 시시하거나 사소한 것은 세상에 없었다.”(92)라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리버가 직접 수전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대목도 있다. “우리는 연구자연구 대상이 아닌 좋은 파트너였습니다-정말로요. 제게도 전례 없는 경험이었습니다.”(124)라고 편지의 수신인에게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올리버는 자신이 관심을 나누어 준 어느 누구에게도 그들만의 고유함을 인정해주는 인물이었다.


 

두 신경과학자 수전 배리와 올리버 색스는 수전이 나이 50세 즈음 획득한 입체시에 대한 경험을 올리버에게 전해준 2004년 즈음부터 교류를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머지않아 올리버는 망막에 종양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고, 이를 수전에게도 알렸다. 10년 후에 올리버는 안구 흑색종이 간으로 전이가 되었다는 소식을 역시 편지로 수전에게 전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수전 배리가 나이 50세 즈음 단안시로 살았다가 입체시를 획득하며 갑작스러운 환희의 순간을 맛보기 시작했던 반면, 올리버는 이와 반대로 70 년 가까이 입체시로 살다가 한쪽 눈에 생긴 종양으로 시력을 잃게 되면서 단안시로 되어갔다는 사실이다. 수전의 표현대로 그녀는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방대한 공간감을 만나는 동안, 올리버는 3차원의 세계가 2차원으로 압축된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셈이다.

 


올리버의 생애에서 한 가지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자 정성을 다하고, 그 삶을 매순간 기념하듯 살았다는 점이다. 10여 년 옆에서 올리버를 지켜보았던 수전은, 그가 어떤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 나가는”(140) 사람이었음을 증언한다. 물론 올리버 자신도 이렇게 편지에 남기고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제가 열심히, 꾸준히, 의욕적으로, 또 생산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쳐서 나가떨어질 정도지요.”(140) 종양으로 시력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올리버의 삶, 그리고 매 순간 그가 삶의 주체로서 선택했을 행위들을 떠올려본다. 그에게 글쓰기는 매일 거르지 않는 끼니처럼, 혹은 쉬지 않고 발을 내딛으며 걷는 의식과도 같은 행위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이해하는 세계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세계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각자 나름의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진 정보가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저마다 다르게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감각의 중요성을 축소하거나 폄하해서도 안 될 것 같다. 수전과 올리버가 주고받은 편지글은 오랜 우정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두 존재가 함께 만들어 나간 충만한 감각의 기념비라고 생각한다. 특히 시각과 관련하여 두 사람이 극적으로 상반된 방향으로, 극적으로 다르게 인식되는 현실을 경험하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였기에 더욱 숙연해지기까지 한 읽기 경험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우리가 매일 누리는 감각의 향연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두 사람은 누구보다 일찍 이해하고 있었을 테다.


 

두 신경과학자가 주고받은 편지글에는 늘 상대에 대한 진심과 귀 기울임이 보이는 듯했다. 상대와 마주하여 진심으로 연결되고, 또 연결되기를 희망하던 두 주체가 서로 조응하며 변해가는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러므로 진심이 담긴 한에서 편지글은 어느 한 사람만이 영향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 모두 함께 변해가는 공진화가 수반되는 과정이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어떤가.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사회다. 때론 이 연결됨이 지나쳐 보인다. 올리버는 전자 기기와 네트워크에 지나치게 연결된 나머지 내적인 사생활이 사라진 세대를 걱정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은 사생활과 자유로울 수 있는 내면의 빈 공간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 여겼다. 나아가 이렇게 전자 기기에 연결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눈과 귀를 닫는 것 같다고 올리버는 우려했다. 성인이 된 누군가에게 어린 시절,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일종의 배경 음악처럼 작동하는 기억이야말로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올리버와 수전이 나누었던 교감과 신뢰의 대화는 우리가 유한한 생애동안 함께 만들어가는 기억이 아름다운 감각으로 채워진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수전이 쓴 편지 가운데 아흔이 넘은 아버지의 임종에 관한 언급이 생각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잠들지 못하던 어린 자녀들(수전과 오빠)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아이들을 재워주었던 아버지였다. 음악을 들을 때 음마다 뚜렷한 색을 떠올리는 공감각을 지닌 수전에게 아버지의 바이올린 소리는 어느 것보다 소중한 아버지의 사랑과 자상함이 함께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에게는 아버지의 바이올린 음악 소리가 어린 시절의 배경음악”(351)이었다고 올리버에게 말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감각이 남겨준 기억은 부재한 아버지와의 연결됨을 유지해주는 마들렌과 같은 것이었을 테다.


 

올리버가 사망하기 몇 주 전인 201589일자 편지는 수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 몸이 극도로 약해져 지인의 도움을 받아 구술로 써 내려간 이 편지에서 올리버는 수전을 알게 되어 기뻤으며 그녀와의 돈독한 우정에 감사한다고 전했다. 수전의 편지는 늘 즐겁게 받아보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 편지가 마지막 작별 인사는 아니지만, 그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합니다. 제가 이번 달을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간 교수님과 나눈 깊고 고무적인 우정은 지난 10년간 제 삶에 추가로 주어진 뜻밖의 멋진 선물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382)


 

올리버는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했던 것일까. 같은 달 30일에 그는 이승에서의 삶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10년 후인 오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느 독자는 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 속의 단어를, 그리고 그의 마음을 상상해보고 있다. 이 마지막 편지에서 올리버는 평소에 쓰지 않던 친애하는’(Dear)라는 표현을 쓰고 있음에 눈길이 갔다. 생전에 자신이 쓰는 글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까다롭게 고르던 올리버의 습관을 떠올려본다면, 이 표현은 수전과 나눈 우정과 삶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나 역시 가족 한 명이 병으로 주저앉고 생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던 모습을 지켜본 이번 여름의 시간을, 올리버와 수전이 나눈 마음들로 위안을 얻고 지나올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들에게 남은 삶이 아름다운 감각으로 충만하게 기억되길 바란다




[책속으로]

[1] "장애를 극복하면 힘들게 얻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된답니다."(60, 수전의 편지) - P60

[2] "올리버가 관심을 보이며 내 경험을 인정해 주자 내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70) - P70

[3] "내 이야기를 검토하고 정리하고 결국 책으로 낼 수 있었던 건 올리버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은 덕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환자에서 주체로, 다시 저자로 변신했다."(81, 수전의 편지) - P81

[4] "올리버의 관심과 공감을 받지 못할 만큼 시시하거나 사소한 것은 세상에 없었다."(92) - P92

[5] "역에서 한낮의 햇빛 속으로 걸어 올라가는데, 갑작스러운 환희의 순간이 찾아왔어요. (...) 길 건너편 건물의 둥근 파사드가 저를 향해 불룩 튀어나와 보였어요."(105, 수전의 편지) - P105

[6] "우리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이 아닌 좋은 파트너였습니다-정말로요. 제게도 전례없는 경험이었습니다."(124, 올리버의 편지) - P124

[7] "올리버는 어떤 질병이나 장애를 이해하려면 과학과 심리학, 역사, 철학을 폭넓게 아우르며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책을 통해 내게 알려 주었다."(133) - P133

[8] "(...) 진정한 의사가 되려면, 자신이 치료하고자 하는 질병을 전부 경험해봐야 한다..."(137, 올리버가 재인용한 몽테뉴의 말) - P137

[9] "지금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제가 열심히, 꾸준히, 의욕적으로, 또 생산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쳐서 나가떨어질 정도지요."(140, 올리버의 편지) - P140

[10] "나는 그때, 그리고 훗날에도 여러 번, 어떤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 나가는 올리버의 능력에 크게 감탄했다."(140) - P140

[11] "입체시가 내게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 일인지를 보는 즉시 알아차렸던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의 입체시를 잃게 되었다는 사실은 슬픈 아이러니였다."(203) - P203

[12] "피아노를 조율하려면 연주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해요."(212, 수전의 조율사가 수전에게 해준 말) - P212

[13] "올리버는 이 세상 모든 생명체 중에서 두족류, 즉 앵무조개와 오징어, 문어, 갑오징어를 가장 좋아했다."(249) - P249

[14] "제 어머니가 78세에 돌아가셔서, 저는 78세라는 제 나이에 어떤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운명의 여신들이 부디 고관절 골절에 만족했으면 좋겠습니다."(302, 올리버가 편지에 남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 - P302

[15] "그 말은 사실상 학생들에게 내적인 사생활이 없고 뇌의 ‘디폴트 네트워크’가 자유로울 수 있는(상상에 빠지거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내면의 빈 공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 이처럼 전자기기에 ‘연결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눈과 귀를 닫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연결을 끊는 것이지요."(327, 올리버의 편지) - P327

[16] "아마도 ‘생존’기간을 6-9개월에서 15-16개월로 늘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늘린 몇 달이 좋은 시간이라면, 그 동안에 글을 쓰고(일부 또는 거의 다 쓴 책이 여러 권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조금) 여행을 다니고, (철없이 군다거나 하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361, 올리버의 편지) - P361

[17] "이 편지가 마지막 작별 인사는 아니지만, 그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합니다. 제가 이번 달을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간 교수님과 나눈 깊고 고무적인 우정은 지난 10년간 제 삶에 추가적으로 주어진 뜻밖의 멋진 선물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382, 수전에게 보낸 올리버의 마지막 편지)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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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올리버
올리버 색스.수전 배리 지음, 김하현 옮김 / 부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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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는 장애/질병을 가진 이들에 진심으로 공감하던 의사였을 듯합니다. 입체시를 갖게된 신경 학자와의 교감과 공감의 편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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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된 편지들 - 폴 세잔-에밀 졸라 1858-1887
앙리 미테랑 엮음, 나일민 옮김 / 소요서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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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밍 세잔-비커밍 졸라, 그리고 두 예술가의 변함없는 우정

<교차된 편지들>

: 폴 세잔-에밀 졸라 1858-1887

(원제: Lettres croisees: 1858-1887)


앙리 미테랑 엮음 | 나일민 옮김 [소요서가] (2025)

 




이 책을 왜 읽을까? 이 책을 엮은 앙리 미테랑의 표현대로, 그건 폴 세잔에밀 졸라이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시절에 이미 서로를 알아본 그 순간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죽마고우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예술가 동지로, 이 두 예술가가 주고받은 신뢰와 우정의 연대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지금껏 졸라가 자신의 소설 <작품>에서 묘사한 실패한 화가가 자신을 모델로 했다는 이유로 분노한 세잔이 절교를 선언했다는, 그동안의 근거 없는 믿음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더욱 느끼는 일이지만, 인간은 몇 가지 MBTI로 사람을 분류하고 정체성을 규정하듯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한 세대가 지나가는 세월 동안 두 친구 사이에 오간 편지 100여 통을 따라가다 보면, 미술 평론가나 역사가들의 시선이 아니라 당대를 살아 나갔던 실존들의 시선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예술적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리고 삶을 살아야 했던 인간 존재로서 그들이 떠올렸던 생각의 편린들과 만난다. 여기에 각자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자 분투했던 청년 예술가들의 지독한 목마름을 감지해낼 수 있다. 책에 실린 편지들에는 막 인상주의라 불리기 시작한 미술 사조를 이끌어간 사람들이,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빛처럼, 또는 유성처럼 스쳐지나기도 한다. 아카데미즘에 저항하고 새로운 시각을 획득하고자 저항했던 이들 화가의 초상을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내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점이 이 책의 큰 매력이다.


 

<교차된 편지들>에서 나름대로 재구성해본 화가 세잔은, 당대의 전통적이고 고착화된 화풍과 아카데미즘을 비판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작업을 집요하게 추구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기약 없는 실패, 무참한 낙선의 연속이었다. 세잔에게 살롱전의 낙선 소식은 일상의 의식처럼, 혹은 더운 여름 낮잠을 자다 꾼 악몽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작은 일탈과도 같은 사건이면서도 삶의 일부로서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년이 되도록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자의식 강한 예술가였으리라. 여기에 아버지의 눈길로부터 숨겨둔 동거인과 그녀 사이에 둔 아들의 삶까지 걱정해야 했던 화가였다. 그럼에도 당대의 주류 화풍이나 미술계의 관행, 유행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오랜 시간 실험적인 작품을 추구했기에 화가 세잔이 되었을 터다. 그토록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시각을 발견하고자 분투하지 않았더라면, 피카소가 그린 독특한 시각의 인물들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와 분명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와 달리 에밀 졸라는 우리로 치면 중학생 시절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새로운 삶의 국면으로 내던져진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직장 동료로서 아버지의 건설 회사를 법적으로 탈취한 이들에 의해 아버지의 회사도 빼앗긴 채 말이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환경 속에서도 문학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견디어냈던 인물이었다. 단순히 그 시절을 견디어 낸것만이 아니라 시와 소설과 같이 문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 작가 에밀 졸라를 빚어낸 것이리라. 이때 몸에 각인된 경험 때문이었을까, 홋날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은 그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한 세잔을 비롯하여 모네와 같은 당대의 화가들의 지원 요청에 변함없이 친구들을 돕고 글로서도 그들을 평생 지지했다.


 

한편 그의 글은 바로 자신을 그대로 닮아서 너무나 직설적이고 솔직한 나머지 수많은 반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던 모양이다.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데 주저함이 없던 그는 주류 비평계로부터 배척되기도 한 수모를 겪기도 했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청년 시절, 현실에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습작 기간을 견디어 내고 자신을 극복해나간 점이 인상적이었다. 어려운 시절을 견디어 낸 그에게 드디어 <목로주점>과 같은 작품이 경제적인 안정을 가져다주기 시작했을 때 졸라와 세잔의 관계도 조금씩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었을 것 같다. 이 책에는 30년에 걸쳐 왕래한 100여 통의 편지가 실려 있지만, 졸라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변하는 일련의 과정에서도 변함없이 세잔과 인상주의 화가들을 한결같이 지지하고 도움의 손길을 건넨 인물이었던 것 같다.


 

40-50대에 이르기까지 주류 평단의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일원으로서 세잔을 위대한 패배자라 불러볼 수 있을까. 위대한 패배자폴 세잔과 세기의 자연주의의 대표적 문호에밀 졸라의 존재는, 조금 과장을 섞어 표현해도 된다면, 두 사람을 각각 따로 떼어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우뚝 섰던 두 사람의 존재를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잔에게 졸라가 없었다면, 당대의 화가들보다 돋보이는 문학적 소양과 그림에 대한 안목을 개발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졸라에게 세잔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열정적으로 인상주의에 대한 분석적이면서 애정을 담은 비평을 쓰고, 화가들을 응원하며 그림에 대한 깊은 안목을 습득할 수 있었을까. 중학교 시절 서로를 알아본 후 집 주변의 강둑에서 함께 옷을 벗어 던지고 강으로 뛰어들던 두 사람. 그들은 이미 오랜 시간 그림과 언어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각자의 안목을 구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리하면, 졸라와 세잔은 서로가 없었더라면 각자 그만한 문학과 회화에 대한 소양과 깊이을 습득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만큼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역사에 무의미한 가정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편지글은 그 나름의 고유한 형식 때문에, 편지를 작성한 인물들의 의식 일면을 행간에서 엿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청소년 시절, 대학입학자격 시험에 해당하는 바칼로레아를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서로에게 토로하며 편지를 통해 징징거리기도 했다. 또 편지지에는 그들 나름의 언어유희와 시적 언어를 실험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분명히 서로에게 독특한 형태의 소울 메이트였던 모양이다. 150년 전-후의 시기에 작성된 이 편지들을 읽고 나니 이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터다. 화가 세잔과 작가 졸라는 두 사람을 완전히 떼어 놓고 그들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이라고 말이다. 세잔이 없었다면 졸라의 인상주의에 대한 관심과 비평글, 그리고 루공-마카르 총서에 등장하는 인물의 창조나 그림과 같이 생생하고 감각적인 묘사들은 그만큼 창조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세잔은 오랜 기간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그 자녀에게는 다행한 일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세잔은 어떤 형태의 조직에서 일을 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세계가 확보되어야 했던 인물 같다. 그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중년의 나이에 이르도록 아버지의 용돈을 받으면서도 그림만 그리기 원했던 사람. 여기에 인상주의 그림에 대한 조롱을 일삼던 심사위원들이 평가하던 살롱전에 출품하여 줄기차게낙선했던, ‘위대한 패배자였다. 세잔의 나이 50이 가까운 나이에 그린 가르단(Gardanne) 지역의 풍경을 언급하던 1880년대 중반에 그가 친구 졸라에게 보낸 세잔의 편지글을 보면, 그림에 대한 열정이나 자신감의 불꽃이 한풀 꺾인 상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역시 현실의 삶과 인정받지 못한 화가로서의 자괴감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토록 예민한 사람이 왜 그런 생각이 없었겠는가. 스스로 생활비를 벌지 못하여 아버지 몰래 상당 기간 숨겨둔 아내와 아들의 생활비를 졸라에게 요청해야 했을 세잔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여기에 프랑스의 주류 언론계로부터 추방되다시피 했던 친구 졸라가 그의 소설 <목로주점>의 대성공으로 점차 대작가로 부상하는 상황이 세잔 자신의 상황과 더욱 비교가 되었을 터다. 이는 오랜 친구에 대한 단순한 질투라기보다는, 성공가도를 달리던 친구와 대비되는 자신의 변하지 않는 현실이 더욱 큰 고통과 불안감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19세기 후반 회화와 문학 분야에서 이름을 남긴 두 사람의 편지를 통해 발견하는 것은 그들이 직업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해낸 사람들임을 확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 역시 고된 현실에서의 삶을 견디어 내고 관통했던 사람들이었음을, 그리고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서로를 빚어내는 데 아낌없는 지지와 시간을 할애했음을 알게 된다. 사람에 대한 연민과 신뢰를 평생 이어간 두 사람의 세계를 보다 내밀히 따라가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두 사람의 편지를 엮은 에밀 졸라 연구가 앙리 미테랑의 손길 덕분이다. 주류 예술가들과 비평가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았던 인상주의화풍과 그 화가들과 교류했던 두 사람이기에 이 책은 또한 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서, 그리고 예술가/창작자로서 자신의 사명에 임하는 태도와 접근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비교적 형편이 넉넉했던 마네와 드가와 잘 어울리지 못했던 시골뜨기 세잔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고, 기성 문단이나 주류 예술가들에 도전하던 인상주의 청년 화가들을 실감나고 친근하게 재구성해낼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화가와 작가의 이름이 이제는 보다 생생하게, 당대를 살았던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책속으로]


[1] "네가 엑스를 떠난 뒤, 친구여, 슬픔의 그림자가 나를 짓누르고 있어.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야. 내 몸에서 힘이 빠졌고, 나는 어리석고 굼뜬 인간이 되었지."(69, 파리로 떠난 졸라를 그리워하는 중학생 세잔의 편지, 1858년 4월) - P69

[2] "매일 쓸 약간의 돈만 있다면 나는 바스티동으로 물러나 거기서 은둔자로 살고 싶어. 속세에서 사는 것은 내 일이 아닌 것 같아. 세상 속으로 며칠만 나가도 나는 곧 슬픈 표정을 지을 거야. 그래서 한편으로 나란 사람은 결코 백만장자가 되진 못할 거야. 돈은 내 삶의 관심사가 아니거든."(179, 청년 졸라가 세잔에게 보낸 편지, 1860년 2월) - P179

[3] "나는 네 편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고, 네 편지를 받으면 온종일 행복해. 너도 잘 알잖아. 그리고 사과 따윈 하지 마. 너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라도 할 생각이니까."(186, 세잔에게 보낸 졸라의 편지, 1860년 3월) - P186

[4] "우리의 감정은 하루에도 수시로 변하고, 우린 쉽게 그것에 매몰되지. 가장 간단한 인간의 관념을 이해하려고 하는 순간,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지. 그러나 명백하게 모순적인 너의 면모도 이젠 내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 나는 너를 좋은 사람이자 시인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지. ‘나는 너를 이해해.’ 이 말을 영원히 반복할 수 있어."(186, 세잔에게 보낸 졸라의 편지, 1860년 3월) - P186

[5] "네가 보내준 몇몇 시들에서 깊은 슬픔을 느꼈어. 쏜살같이 흘러가는 삶과 젊음의 찰나성, 또 그 너머의 죽음까지, 그렇지, 잠깐이라도 그런 것을 생각하면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오지. 그러나 숨 가쁘게 흐르는 존재의 흐름에서 젊음, 이 생명의 봄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스무 살에도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나이 들면, 그래서 혹독한 겨울날 아름다운 여름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상념에 빠질 수 없다면, 그것이 더 우울한 그림이지 않을까? - 그러나 그것은 나를 기다리지."(193, 졸라의 편지, 1860년 4월) - P193

[6] "스승을 지나치게 존경하지 말길 바란다. 그 대신 너의 꿈, 그 아름다운 황금빛 꿈을 네 캔버스에 담고, 네 가슴 속 그 이상과 열정을 표현하려 해봐. (...) 무엇보다 빠르게 제작된 그림을 높이 평가하지 말길 바란다."(195, 졸라의 편지, 1860년 4월) - P195

[7] "보통 사람의 눈에는 쓰레기 같은 작품과 걸작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을 거야. 보통 사람은 양쪽 모두 흰색과 빨강색이 있고, 붓 자국이 보이며, 캔버스가 있고, 액자틀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나 걸작만이 가진 미세한 차이는 뭐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생각이나 취향 같은 것을 통해 드러나지. 이 무엇, 그러니까 어떤 예술적인 감성을 발견하고 경탄해야 한다는 뜻이야."(199, 졸라의 편지, 1860년 4월) - P199

[8]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그날만큼은 나도 흰 드레스를 걸친 정숙하고 발랄한 수녀처럼 아름다운 수레국화를 한 아름 안고 걸었지. 맙소사! (...) 나는 그걸 안고 초원을 달렸어. 더는 인가가 보이지 않아서 나는 행복했고 (...) 나는 혼자였고, 거기선 누구도 나를 염탐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서 기쁜 마음으로 계속 꽃다발을 만들며 걸어갔지. 수레국화는 정말 매혹적인 꽃이야."(212, 졸라의 편지, 1860년 6월) - P212

[9] "좋은 순간을 즐기고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또 괴로운 순간에는 욕을 하고 창문을 깨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지. 장단점을 동시에 가진 것이 (그/그녀가 선하든 나쁘든)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해. 물론 정말로 현명한 사람이라면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즉 마음에 어떤 증오도 들어설 수 없는 그런 모습이겠지."(217, 졸라의 편지, 1860년 6월) - P217

[10] "미래의 불확실함이 너를 힘들게 하겠지, 안쓰럽게 생각해. 그러므로 나는 더욱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 이것 혹은 저것,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진정한 변호사 아니면 진정한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 물감으로 더러워진 법복을 걸친 무명의 존재로 남지 말길 바란다."(234, 졸라의 편지, 1860년 7월) - P234

[11] "너는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는 했지만, 단 한 번도 진지하고 정기적으로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으니 자신을 무능하다고 여길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용기를 내."(235, 졸라의 편지, 1860년 7월) - P235

[12]"너는 붓을 택했고, 잘한 일이야. 자기만의 길을 찾아야 하니까, 너에게 색을 버리고 다시 펜을 들어 너만의 스타일을 찾으라고 조언하고 싶진 않아. 한 가지 일에 뛰어나려면 그것에 전념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나는 지금 네 안에서 사라지는 한 시인을 위해 애도하고 있어. 반복건대 네 토양은 비옥하고 풍요롭기에 약간의 경작만으로도 많은 수확을 할 수 있지."(240, 졸라의 편지, 1860년 8월) - P240

[13] "나도 너희 생각대로 작가라면 이미 끝을 낸 작품에 다시 손을 대선 안 된다고 생각해. 물론 시인이라면 글 전체를 다시 읽으며 여기저기 선을 긋고 본래 생각을 고수하되 수정할 수는 있지. 그 자체는 문제가 없고 필수적인 과정이라고도 생각해. 그러나 몇 주, 혹은 몇 달,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작품을 거꾸로 뒤집고, 여기저기 손을 보며 재구성하려는 것은 어리석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242, 졸라의 편지, 1860년 8월) - P242

[14] "나는 월계관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시를 위한 시를 사랑해. 그 누구도 내 꿈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펜과 종이만큼은 나를 이해해주지. 같은 생각을 나누는 친구인 너희들을 좋아하듯이 나는 나의 시, 그러니까 이야기 그 자체를 사랑해. (...) 기다리자, 삶과 시간이 우리에게 내보일 거야."(244, 졸라의 편지, 1860년 8월) - P244

[15] "돈을 생각하지 말고, 의식 있는 작가로서 자기만의 시와 소설을 창작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 만일 2년이 필요하다면 온전히 그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또 돈에 관한 관심이 예술 행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거야."(245, 졸라의 편지, 1860년 8월) - P245

[16] "현실은 계속 나를 속이고 배신해서 이제 나는 보이는 것만 믿게 되었어. 현재 소유한 하나가 미래에 가질 두 개에 대한 희망보다 더 낫다고 생각해."(257, 졸라의 편지, 1860년 10월) - P257

[17] "진정한 예술가라면 모두 그가 생각하는 문학의 목적, 즉 비극이나 드라마 등의 거짓된 장르를 하지 않고 새로운 극 형식을 창조하길 소망할 거야. 진정한 인간의 이성과 정열을 담은 걸작을 창조하고, 진실로부터 문학의 위대함을 길어 올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작가가 품는 고귀한 야망일 것이고, 그 책임은 막중하면서 고통스럽지."(259, 졸라의 편지, 1860년 10월) - P259

[18] "나는 육체만 사용하고 지성을 억누르는 거친 활동에는 게으르지. 하지만 예술은, 영혼을 채우는 이 행위야말로 내게 기쁨을 주지. 그래서 나는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그 순간에 가장 생산적이지."(302, 졸라의 편지, 1861년 3월) - P302

[19] "내 간절한 바람은, 그러니까 매일 내가 생각하고 꿈꾸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찾는 것이지. 나만 생각하며 살 수 없는 상황이 나를 움츠리게 한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만일 내가 아프기라도 하면, 내가 조금씩 더 약해지면, 그건 스물두 살의 나 같은 조숙한 청년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모두 잃는다는 것을 뜻하지."(306, 졸라의 편지, 1862년 2월) - P306

[20] "오늘의 슬픔에서 나는 행복을 느끼네. 오늘 저녁 나는 자정까지 글을 쓸 것이고, 어제처럼 멋진 문장을 또 쓴다면 내일의 기쁨을 비축하는 일이겠지. 얼마나 가여운 바보인가, 나는! (...) 현실을 잊기 위해 힘들고 치열하게 일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야. 식욕을 억제하려면 많이 먹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해. 나는 지금 몹시 배가 고파."(311, 졸라의 편지, 1862년 9월) - P311

[21] "우린 늘 다른 이들과 똑같은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침묵해야 할까? 우리가 나눈 긴 대화들을 기억하는지? 그 어떤 새로운 진실도 분노와 야유를 일으키지 않고선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고 했던 것을 말이야."(354, 졸라의 편지, 1866년 5월) - P354

[22] "회화는 그럭저럭 진척되고 있으나 낮이 너무 길게 느껴져. (물감이 마르길 기다리며) 유화로 작업하지 못할 때도 계속 작업할 수 있도록 수채화 물감을 한 상자 사야 할 것 같아. 내 그림 속 인물들을 모두 바꾸려고 해. 이미 델팡은 다른 포즈로 (아주 약간) 바꿨어. 그렇게 그를 표현하는 편이 더 나은 것 같아."(358, 세잔의 편지, 1866년 6월) - P358

[23] "나는 책을 거의 읽지 않나. 자네가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또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나는 점점 예술을 위한 예술이 촌스러운 허세라는 것을 깨닫고 있지. 이건 우리 둘만의 이야기로 남겨두자고."(363, 세잔의 편지, 1866년 10월) - P363

[24] "알렉시네 시골 마을 근처 철로를 달리다보면 동쪽으로부터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놀라운 모티프 하나가 펼쳐지지. 바로 생트-빅투아르 산과 보르쾨이를 뒤덮은 암석들이야. 나는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티프인가’라고 말했고, 그는 ‘선이 너무 흔들린다’라고 했지."(456, 세잔의 편지, 1878년 4월) - P456

[25] "과연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올까? 요즘 날씨를 보면 먼 이야기인 것 같아. 얼마 전 강물에 손을 담가보았는데 물은 여전히 차더군."(492, 세잔의 편지, 1879년 6월) - P492

[26] "나는 계속해서 나의 회화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네. 자연은 내게 가장 어려운 대상이지."(497, 세잔의 편지, 1879년 9월) - P497

[27] "흐린 날뿐만 아니라 맑은 날에 대한 습작 여러 점을 시작했다네. - 자네가 하루빨리 정상 상태를 회복해 작업에 몰입할 수 있길 바라네. 내 생각엔 그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대안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자신의 만족을 얻을 유일한 피난처이니 말이야."(525, 세잔의 편지, 1881년 5월) - P525

[28] "나는 계속 조금씩 작업을 해. 하지만 자주 의욕을 잃어."(527, 세잔의 편지, 1881년 6월) - P527

[29] "자네에게 조언을 좀 구하려 하네. 유언장을 어떤 형식으로 써야 할지 도움을 좀 줄 수 있겠나?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내가 죽으면 내 수입의 절반을 어머니에게,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아들에게 상속하고 싶어."(538, 세잔의 편지, 1882년 11월) - P538

[30] "작업은 계속하는지? 만족스러운지? 나는 새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 이게 내 삶이지. [그것]외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고, 우린 계속 자리 잡는 중이며, 꽤 잘 지내고 있어."(545, 졸라의 편지, 1883년 5월) - P545

[31] "예술이 너무나 표피적인 것으로 되어가면서 평범하고 하찮은 형태로 변하고 있어. 동시에 조화에 대한 경솔한 태도는 채색의 부조화에서 나타나고, 더 심각하게는 색조의 과장됨으로 드러나지. 이렇게 한탄하고 난 뒤에는, 그토록 아름다운 빛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태양을 위해 만세를 외치자고. 반복하지만 나는 자네의 충실한 벗이라는 것, 그리고 졸라 여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잊지 말길 바라네."(552, 세잔의 편지, 1884년 11월) - P552

[32] "나는 미쳤거나, 제정신이겠지.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욕망으로 움직인다!(Trahit sua quemque. voluptas!) 자네에게 도움을 청하고 용서를 구하네. 현명한 이들이여 행복하여라!"(554, 세잔의 편지, 베르길리우스 <목가>의 한 구절 재인용, 1885년 5월) - P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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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오펜하이머 청문회
하이나어 키파르트 지음, 양도원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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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성공하기로 할 것인가, 실패를 선택하고 책임을 질 것인가?’

-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 풍경을 조명한 희곡

 

<오펜하이머 청문회>

하이나어 키파르트 지음

양도원 옮김 [지만지드라마] (2024)




 

(원폭실험을 하던) 그때 나는 두 가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 실험이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이 실험이 성공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오펜하이머가 보안청문회에서 언급한 말)

 


눈을 떴을 때 나는 아주 조용한 가운데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광선이 눈부시도록 하얀 불덩어리가 되어 점점 커져서는 하늘과 산을 삼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에 나는 내가 그때 가지고 있었던 힌두교의 찬가에 나오는 두 가지 시구가 생각났습니다. 하나는 수천 개의 태양으로 된 햇빛이 하늘에서 홀연히 비친다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는 모든 것을 삼키는 죽음이다. 세계를 모두 흔들어 놓는 자다였습니다.”

 



올해(2025)는 대한민국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 가운데 의식 있는 꽤 많은 시민들, 심지어 명사들 마저도 우리의 광복이 미국의 덕분이라고, 특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원자 폭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의 기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표현으로 정리해버리고 마는 이들이 내게는 온전한 인식을 갖춘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 까닭이다.


 

1945년 초부터 일본 군부는 연합국 측에 항복 의사를 비공식적으로 타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 군부는 원자 폭탄의 위력을 실제로 사용해서 위력을 검증하고자 결정을 내린다. 여기에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문제가 있다. 미국의 역할 없이는 우리의 광복이 분명히 쉽지 않았을 테지만, 우리가 국외에서 활동하던 임시 정부와 국내 진공 작전의 준비, 그밖에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목숨 건 투쟁과 희생, 여기에 더불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이들의 희생을 놓쳐서도, 잊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세의 도움만으로 무기력하게 독립을 얻어낸 것이 결코 아니다. 홍범도 장군의 업적을 지우려는 세력은 바로 이런 부분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미국 군부가 일본에 투하하기로 결정한 우라늄과 플루토늄 기반의 원자 폭탄은, 일본에 대한 승리를 목적으로 떨어뜨린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나치 독일이 먼저 원자 폭탄을 개발하기 전에 미국에서 개발하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이 먼저 패망한 후 개발된 원자 폭탄 제작 사업은 사라진 초기의 목적 대신 새로운 명분이 필요했을 터다. 이는 오펜하이머가 청문회에서 지적하며 이후의 수소 폭탄 계획에 비판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원자 폭탄 제조 이후 수소 폭탄 제조로 경쟁하듯 이어지는 대량 살상 무기 개발 사업은 그 한계 설정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성격을 간파한 오펜하이머는 수소 폭탄 개발 경쟁이 결국엔 인류의 실존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미 군부가 우리의 독립에 관심을 두고 있기 보다는(이건 이들이 내세울 수 있는 부수적 효과에 불과하다) 한 때 손을 잡았고 일본과 싸웠으나 이제는 적대 국가로 부상한 소련(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견제의 측면이 더 중요했다는 점을 읽어낼 수 있다. 이는 미국 내에서 거세지고 있는 반공주의의 서막을 알리는 불길한 사건으로 볼 수 있을 터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이자 극작가 하이나어 키파르트의 희곡 <오펜하이머 청문회>를 관심 있게 읽으며, 영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 보았던 오펜하이머 청문회 과정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미국 상원 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시작한 보안청문회의 기록을 바탕으로 원자 폭탄 제조 계획(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이었던 오펜하이머가 얼마나 고립된 상황이었는지, 그리고 만들어진 신과 같은 국가라는 실체가 개인에게 가할 수 있는 국가 폭력의 메커니즘과 더불어 오펜하이머 개인의 복잡한 심경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결국 인간은 지극히 복잡하고 다층적인 존재인데 말이다. 분명하게 무언가를 경계 짓고자 개인을 강요하고 폭력적으로 재단할 때 그 공동체에는 무엇이 남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희곡 대본은 단순히 공적 인물로서 오펜하이머의 고난과 희생의 국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가 마주해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과 강요된 선택의 딜레마에 초점을 맞추고 독자에게 질문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국가 주도 사업(첫 원폭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 여부에 대한 공인으로서의 입장은 어떠해야 하는지, 공동체에게 큰 영향력을 지닌 한 인간이 갖게 되는 무거운 책임감과 윤리적 결정의 경계에서 주저하던 인물의 내면을 상상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다만, 과학자의 책임 문제에 대해 오펜하이머는 일본에 투하된 무기에 희생된 일본인들에 대한 무거운 죄책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무기를 투하할 만한 지점을 선정하는 데 과학적기술적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언뜻 이해가지는 않지만, 그의 논리에 따르면 개인적인 양심과 국가 혹은 공동체를 위한 공인으로서의 행보 사이에서 주저했을 법하다. 그는 과학적/기술적 정보만을 제공한 것이라 말했다. 최종적인 결정은 정치인들이 내린 것이라고 선을 긋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기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의 책임은 면제되는 것일까? 정답은 없지만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애초에 폭탄 제작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 하더라도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만을 가지고 그를 비롯한 당대의 과학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런 문제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또 개개인의 복잡한 심리와 입장 차이에서부터 국가 간의 민감하고 첨예한 이해관계 등을 고려할 때,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결정과 행동이 늘 간결하고 명료하게 정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과학 활동이 수행될 때, 이는 이미 과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을 넘어 공적인 역할을, 다시 말해 정치적인 결정을 수반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생각해야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가 과학적 연구 결과의 책임을 온전히 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특히 현대 과학 연구는 특성상 개인의 아마추어적인 유희적 특성을 훌쩍 뛰어 넘어 버린 지 오래다. 공공에 대한 의무, 공적 특성과 보다 많이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자의 책임은 그가 속한 사회, 나아가 지구 위의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무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성공적으로 원자 폭탄을 만들어 내었으나, 이후 이어지는 (원자 폭탄 위력의 1만 배 이상 강력한)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매카시 광풍의 희생자가 되었다. 개인의 모든 사생활이 낱낱이 파헤쳐 공개되었다. 이후로도 오랜 세월 감시 및 도청당했으며, 학자로서의 길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사실상 막혀버린 셈이었다. 청문회 과정에서 잠시 언급된 수소 폭탄 개발과 사용에 있어서, 만약 한국 전쟁 당시에 한반도에서 수소 폭탄이 사용되었더라면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오펜하이머 청문회>에 언급되는 자료에 의하면, 전 세계의 핵무기 중에서 현재 러시아에만 핵무기가 1만 여기, 미국에는 9000 여기가 있다. 오펜하이머의 우려대로 전 세계의 핵무기 경쟁에는 상한선이 없어졌던 셈이다. 핵무기 경쟁에서 유일한 제약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오로지 폭탄 제조에 필요한 원료의 수급가능성 밖에 없는 듯하다. 이제 우리 인류는 잠재적 인류 공멸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 사실이야말로 그로테스크하지 않은가. <오펜하이머 청문회>는 올해 80주년이 되는 광복절을 맞아 눈에 들어와 읽게 되었으나, 영화 <오펜하이머> 보다 오펜하이머가 겪어야 했을 개인적 고통과 청문회의 풍경을 좀 더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는 텍스트였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고 여겨진 국가 주도 사업의 책임자가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성취해내면 인류가 위기에 처하게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을 때, 당신은 일단 성공하고볼 것인가, 아니면 성공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인류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음에 안도하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감수하겠는가. 여기에 정답은 없다. 그럼에도 좀 더 높은 기댓값으로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은, 오펜하이머라면 또다시 똑같은 행보를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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