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의 현상학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음, 주성호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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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못하겠지만 또 샀군요. 꾸준히 다시 번역되고 재평가되며 재해석되는 책들이 나오겠지요. 또 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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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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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인형: 구슬 @kooseul23]


 


문명의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의 '우주 고딕' 소설


궤도

 


서맨사 하비(Samantha Harvey) 지음

송예슬 옮김 [서해문집] (2025)

 



서맨사 하비의 소설 궤도(Orbital) 2023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이어서 2024년에는 곧바로 부커상을 수상하고, 국내에는 2025년 여름에 출간되었다. 말하자면 이 번역서는 하비의 따끈따끈한 작품이다. 소설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실려 있는 한 그림에는 세계 지형의 윤곽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지도 위에 1에서 16까지 숫자가 적힌 곡선이 이어져 있고, ‘북반구가 낮일 때 지구 궤도의 24시간이라는 캡션이 붙어 있다.


 

처음 책을 펼쳐보았을 때 이 책은 은유로서가 아니라 정말 우주선의 궤도를 그린 지도구나라는 점을 알게 된다. 나아가 소설을 어느 정도 읽고 나서야 이 무질서해보이는 번호들은 지구를 도는 우주선 혹은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우주정거장이 매90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일정한 간격으로 인공위성/우주정거장의 궤도가 한쪽 방향으로 조금씩 밀려나는 듯한 선들이 보인다. 게다가 이 선들이 순차적으로 이동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언가 규칙적인 운동을 암시한다. 그러면 또 궤도는 왜 16개일까 싶은데, 이는 지구주위를 도는 우주정거장이 약 90분 동안 지구 상공을 한 바퀴 돌며 이동하는 궤도를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소설은 처음부터 다음과 같이 시작하며 낯선 느낌을 만들어 낸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돌다 보면 너무 함께이고 또 너무 혼자여서 생각과 내면의 신화조차 이따금 한데로 모인다.”(7, [궤도 1])

 


이제 독자는 우주에서 벌어질 스펙터클이 조만간 시작되는 건가, 기대해보다가도 책의 절반을 넘어서까지 아무런 사건이 보이지 않으면 당황하기 시작한다. 소설이 그만큼 점점 더 낯설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른 소설에서 체감되는 플롯이 이 작품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일 테다. 이 소설의 목소리는 한편으로 칼 세이건이 태양계 탐사선 보이저호가 태양계 밖을 나가기 전에 카메라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 지구를 바라보았던 시선에서 창백한 푸른 점을 발견하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암흑의 고립감 속에서 독자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시선이 바로 이 작품에서 제일 먼저 드러난다.

 


이 소설은 과감하면서도 실험적인 문체, 시와 같은 잔잔한 리듬과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지구 표면를 벗어나 자신이 떠나온 지점을 바라보는 우주적 존재로서 자신에 대한 자각, 우주 속의 작은 점과 같은 존재가 자기 자신과 지구의 운명에 대해 명상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정보만 주어지기에 캐릭터 혹은 서사에 대한 몰입이 약하게 다가올 수 있다. 이 점은 기존의 소설 문법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생소하고 밋밋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반면, 캐릭터들이 지구를 바라볼 때 느끼는 독특한 정서를 담은 표현들은 매우 인상적이고 아름답다. 특히 화자가 독백하듯 들려주는 이야기는 거대한 에코 체임버(반향실) 속에 있는 한 지구인의 목소리가 배경 소음처럼 이어지는 반향같이 들린다.

 


화자는 자신이 타고 있는 우주선 혹은 우주정거장을 거대한 금속 알바트로스라고 비유한다. 이 말이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던 것은, 1년 넘게 땅을 밟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 하늘에 떠 있는 태평양의 알바트로스처럼 그의 우주선이 지구 주위를 도는 동안 끈임 없이 추락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곳은 지구와 가깝고 중력이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자유 낙하 상태다. 그러니까, 나는 게 아니라 추락하고 있었다.”(191, [궤도11]) 이는 놀라운 관점의 전환이다. 점처럼 무한히 작아 어떤 존재로도 느껴지지도 않는 존재, 하지만 사유하는 존재의 자기 발견의 순간이 아닌가. 고립된 우주정거장에서 우주인들끼리 서로 부대끼면서도 이들 사이의 대화는 작품에서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 여겨진다. 독자는 이 금속 알바트로스에 타고 있는 우주인들의 생과 사 이 경계에 자리 잡고 자신과 문명을 사유하는 존재 에 더 주목하게 된다.

 


수많은 소설의 형식과 달리, 이 이야기에서 화자는 역동적인 체험이나 사건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우주인 각자의 인간적인 문제,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나 회상이 의식에 따라 두서 없이 자리를 잡는다. 뿐만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생각, 인류의 오만과 지나친 자기애, 그리고 멈추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 젠더 갈등과 서로에 대한 몰이해의 문제 등으로 사유를 넓혀 간다. 더 나아가면 인간과 지구라는 행성과의 관계에 대해 관조하기도 한다. 이른바 인간이 야기한 환경 문제와 지구 온난화의 문제를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태양도 수명이 있듯이 지구와 인류에게도 종말은 불가피하다. 지금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인류의 종말이 인류에게 다가 온다는 자각, 또는속도에 따라 다라 옮아 대신 덮는다. 바로 이것이 중요한 건 속도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우주의 한 가운데에 금속 알바트로스인 우주선 혹은 우주정거장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자신과 인류를 사유하고, 나아가 문명의 죽음을 상상하는 시선을 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문학 속의 고딕과 관련한 전통을 떠올려 보았다. 중세 유럽의 문학에서는 어떤 기준으로부터 이탈하여 이질적이고 괴이한 이름부터, 공포스러운 정서에 이르기까지. 여기 에 주목한 유럽적 고딕 양식이 있었다면, 이 정서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 오면서 황량하고 거대한 육지의 깊은 내륙에서 지독히 고립된 인간들의 군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미국 남부의 고딕이 있다. 이쯤되면 미국 사회에서 이 모습을 산업화의 여파로 이어진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맞물려 독특한 정서를 전달한다. 이를테면 이 분야에 대한 에드거 앨런 포를 위시하여 플래너리 오코너, 셔우드 앤더슨, 팀 오브라이언, 존 윌리엄스 등의 작가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궤도 에서도 미국 남부의 고딕에서와 같은 다른 듯 같은정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구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추락하고 있는존재의 절대적인 고립감, 금속벽을 경계로 삶과 죽음의 두려움과 문제들을 직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 화자 혹은 작품 속 캐릭터 개인의 서사가 강하게 개입되면서도, 지구인 대부분이 경험해보지 못한 환경(이를테면 하루에 16번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지금껏 누가 경험해 보았겠는가?)은 인간의 문제를 좀 더 먼 거리에서 지켜보고 고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극적인 플롯이 없음에도 매우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우주인, 인간은 결국 이런 존재론적인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다. 장소뿐만 아니라 인간이 모든 시간대에 존재하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117)는 경험을,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 처음 사용하는 감각인 까닭이다.

 


하비의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유럽의 고딕이나 미국 남부의 고딕 문학이 주는 정서의 연장에서, 한편으로는 이전의 고딕 문학과 달리 지구를 벗어나 있는 인간의 시선과 그 인간이 느끼는 내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고딕양식을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물론 처음 읽을 때는 이게 소설인지 아니면 우주인 남긴 실제 보고서에 메모를 해둔 글인지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달리 말해 이 글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 나아가 이 소설처럼 뚜렷한 플롯이 부재하면, 독자들은 몰입을 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소설이 중반 이후 넘어가면 비로소 아무 플롯도 없어 보이는 고요한 작품이 비로소 조금씩 익숙해지고 눈에 들어온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서맨사 하비의 소설을 우주 고딕’(Cosmic Gothic)이라 새롭게 부를만하지 않을까 제안해본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라도 이미 사용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주인들의 경험도 점차 확대되면서, 우주인들이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사건들을 반영한 문학이 본격적으로 나온 현상에 새롭게 주목해 보는 것이다. 지구 중력에 속박된 우주선 혹은 우주정거장에 고립된 채, 지구라는 행성이 직면한 위기와 문제를 직관하고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시도야말로 기존에서 보았던 고딕 양식과는 차별점을 갖는다. 나아가 인류의 멈출 줄 모르는 정치 행위와 인류가 서서히 맞이하게 될 문명의 죽음을 마주하고 명상하는 일은 결국 앞서 언급한 우주 고딕으로서 어울리지 않은가.

 


저자가 주목한 바와 같이 인류가 현재 마주한 큰 문제들에 대해 구성원 개개인이 인간 스스로 가속화한문명의 몰락을 중단 시킬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인류의 문명이 쇠락해가고 종말을 맞이할 것이란 사실 앞에서 이를 중단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말이다. ‘우주 고딕에는 이런 압도적인 운명, 하지만 어느 누구도 회피할 없는 흐름에 대한 두려움의 정서가 있다. 이는 기존의 고전적인 고딕양식의 정서를 계승하면서도 지구 밖에서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일탈과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우주 고딕이란 표현은 나름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혹은 이 소설이 우주라는 절대 고립 속에서 지구를, 인류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며 동시에 인류가 마주한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는 지구인의 아포리즘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책속으로]

[1] "가끔은 놀라운 생각을 한다. 자신들이 진공 심연을 홀로 지나는 잠수함을 타고 있다는 생각. 밖으로 나가면 안전할 것 같지 않다. 지구 표면에 다시 떨어졌을 때 이들은 생경한 존재들이리라. 미쳐 버린 낯선 세상을 배우러 온 외계인들."(39, [궤도3, 상행]) - P39

[2] "지구가 하찮고 작은 행성임을 깨닫고 우주 속 지구의 자리를 비로소 이해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멀리 지구와 떨어져야 한다."(51, [궤도4, 상행]) - P51

[3] "왜 이러고 있지? 절대 번영할 수 없는 세상에서 바득바득 살아 보려고 하는 이유는 대체? 완벽한 지구가 저기 있는데 굳이 우주가 원치 않는 곳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갈망은 호기심일까 아니면 배은망덕함일까."(89, [궤도 5, 상행]) - P89

[4] "신경질적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인류를 어떻게 아름답게 봐줄 수 있겠는가? 인간의 오만함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그에 필적할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뿐이다. 남근을 닮은 우주선을 우주로 쏘아 보내는 것만큼 오만한 행동은 또 없다. 우주선은 자기애로 미쳐 버린 종족의 토템이다."(96, [궤도 5, 상행]) - P96

[5] "눈 모자를 쓰고 양옆에 구름을 끼고 있는 안데스산맥 너머 북쪽으로 향하자 연한 빛이 보인다. 구름이 듬성듬성해지면서 저 아래 화재로 물러터지고 맨살이 훤히 드러난 아마존이 나온다."(99, [궤도 5, 상행]) - P99

"이게 세상이야. 남자들의 놀이터, 남자들의 실험실. 경쟁할 생각은 하지 마. 그래 봤자 결국 사기만 떨어지고 열등감과 열패감을 느끼게 되니까. 왜 절대 못 이기는 경주를 시작하고, 기를 쓰고 지려고 달려드니. 그러니 딸, 꼭 기억하렴. 너는 열등하지 않아. 그걸 굳게 명심하고서 존엄한 존재로 보잘것없는 삶을 살아가렴. 엄마를 위해 그렇게 해 주겠니?"(108, [궤도5, 하행]) - P108

[7] "달을 걷는 사람들을 경이롭게 생각해도 되지만 그 영광의 순간을 위해 인류가 치른 대가를 절대 잊지 말거라. 인류는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몰라."(109, [궤도5, 하행]) - P109

"우리(우주비행사들)에게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어디에서든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가상의 공간 같은 이곳 우주선까지 오기 위해서 말이다. (...) 국가도 국경도 없는 이 최후의 전초 기지는 생명체의 한계를 밀어낸다."(112, [궤도 6]) - P112

[9] "그렇게 유럽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당신 참 안쓰럽네요, 음성은 여전히 따스하게 말을 건넨다. 모든 시간대에 존재하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요. 이 거대한 금속 알바트로스를 타고 경도를 넘나들면서 두뇌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을 요구받는다니요."(117, [궤도 6]) - P117

[10] "오염되고 온난화되고 남획되는 대서양에서 아찔한 네온색 또는 붉은색 조류가 대발생하는 현상은 대부분 정치와 인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정치의 영향력은 너무나 자명하게 보인다. (...) 인간의 욕망이라는 실로 놀라운 힘이 지구를 형성한다."(130-132, [궤도 7]) - P130

[11] "빛나는 서구 자본주의가 꿈꾸는 우주 같은 건 여기 없다. 이곳은 불굴의 공학 기술과 천재적인 실용주의를 숭배하는, 칙칙하고 효용을 중시하는 육중한 사원이다."(170, [궤도 10]) - P170

[12] "우리는 다른 존재들보다 부싯돌 몇 번 부딪친 것만큼 앞서 있을 뿐이다."(187, [궤도11]) - P187

[13] "이들은 지구의 낮이나 밤 풍경이 펼쳐진 창가에 떠 있다가 새삼 자신들이 추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이곳은 지구와 가깝고 중력이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자유 낙하 상태다. 그러니까, 나는 게 아니라 추락하고 있었다."(191, [궤도11], 관점의 전환) - P191

[14] "지금 우리는 무상하게 피어난 삶을 살고 있다. 광란의 존재가 딱 한 번 손가락을 튕기면 모두 끝나리란 것도 안다. 여름에 터져 나오는 이 생명은 새싹보다 폭탄에 가깝다. 이 풍요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201, [궤도13]) - P201

[15]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지구는 물질성이 희미해지고 환영이나 성령에 가까워진다. 전 지구가 발아래를 지나갔다."(225, [궤도13])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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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자렛 - 즉흥의 상태
이기준 지음 / 시간의흐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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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이 부담되지만 책이 정성스럽게 제작된 것을 알겠네요. 과거에 찰리 헤이든의 공연을 놓친 것, 잭 드 조넷의 부고가 더 아쉽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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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여기를 산다


영화 프랑켄슈타인(2025)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족의 신이다. 그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내고,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인류의 은인으로 여겨진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창조해 내었기에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가 작품에 붙게 되었다. 이처럼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와 메리 셸리의 서사는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인상적인 영상미, 인간 사이의 관계와 사랑, 존재에 관한 철학적인 화두를 던진 바 있는 영화로 <물의 모양 shape of water>(개봉작 명칭은 사랑의 모양’)을 떠올리곤 한다. 이 영화를 제작했으며 국내에도 잘 알려진 멕시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올해 개봉했다. 영화는 원작에 충실한 면도 있는 반면, 토로 감독만의 개성 있는 영상미와 해석이 추가되었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생명의 이면인 죽음의 문제를 영화에서는 더욱 깊이 고민한 결과가 예술로 승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영화 속 인물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의 조각들을 이어붙이고 생명의 에너지를 가미하여 영혼을 불어넣으며 이른바 필멸자의죽음을 정복하고자 욕망했다. 하지만 미리 생각하는 자(prometheus)’라는 이름의 무게와 달리, 끝나지 않는 생명을 부여한 이 창조자는 피조물의 탄생 이후에 대해서는 먼저 생각해보지 않은 듯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거역한 죄로 벌을 받아 카프카스 산맥의 한 바위에 묶인 채,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이 쪼이는 고통을 당한다. 인류의 은인으로도 여겨지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 가운데 이 부분에 주목해보면, 창조물은 프로메테우스의 이면 혹은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자라고 볼 수도 있을 법하다.

 


죽음을 정복하고자 욕망했던 빅터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영원히 살아가야만 하는 이 창조물은 이제 우리 시대에서 범용 AI(AGI)로 변신을 꾀한 것으로 보아도 그럴듯하다. 레이 커즈와일이 제기한 특이점을 넘는 순간에 이 인간의 창조물은 이미 괴물이 되어버릴 것인가, 질문해볼 수 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영원을 살아야 하는 창조물의 가려진 고통과 근원적이면서도 비정한 욕망을 우리에게 이미지의 상징과 은유로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원작은 고전으로 여전히 살아남아 현재적 의미에 주목하고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며 현대인에게 유효한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아름답고 독특한 영상미와 색감이다. ‘기예르모 감독의 색깔이란 것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 곧바로 떠오르는 색(color)은 크게 4가지다. 토로 감독은 화면을 구성하는 추상적인 조형요소로서 색이 지닌 톤과 이 색이 내뿜는 분위기, 그리고 그 색의 상징성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잘 활용하는 감독이라 생각한다. 특히 그의 여러 작품에서 보이는 선명한 빨강, 순백색, 그리고 몽롱한 초록색과 짙은 푸른색, 혹은 이 두 색이 묘하게 섞인 청록색이 떠오른다. 특히 푸른색과 청록색은 이전의 작품 <사랑의 모양 The shape of water>에서 물과 사랑의 이미지를,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욕망과 공허함과 같은 감성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준 색으로 기억한다. 이렇듯 토로 감독이 작품에서 사용하는 색은 생의 화려함 생명력, 그리고 그 이면에 가려진 공허함과 죽음의 세계에 대한 예감, 혹은 삶과 죽음에 관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창조물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해서 주변의 모든 이들의 죽음을 보고 떠나보내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결코 죽을 수 없는존재로서,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이 쪼이는 것처럼 끝나지 않는 고통과 고립감, 외로움을 마주해야했다. 정작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지만 말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창조물의 잘못된 만남은 이렇듯 존재의 고통을 극대화한다. 생명체, 특히 의식을 지닌 생명체에게 죽음은 언제나 타자의 죽음을 간접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바닥이 없는 깊고 거대한 두려움. 이는 토로 감독이 늘 배경색으로 보여주는 짙고 무거운 느낌의 푸른색을 떠올린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느낀 한 가지는, ‘죽음이란 현상이 한편으로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에게는 우주가 선사한 /휴식의 시간이란 생각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창조물나를 끝낼 수 있는 축복을 달라고 프랑켄슈타인을 따라다니며 죽음을 갈망했던 장면을 떠올려본다. 이를 떠올려보면 우리는 이제 삶이 권태롭거나 두렵고,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만이 존재에게 더 큰 중요성을, 혹은 유일하게 중요한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제 피할 수도 없이 중년이 되어버린 내게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이 공통적으로 내게 한 가지 교훈을 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떠난 후에 상대방을 정성스럽게 애도하고 추모하곤 하지만, 살아있는 나에게지금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 중요하다고 느낀다면 상대방이 나를, 우리를 떠나기 전에 당신이 나와 함께해서 좋다, 함께 해주어 고맙다고 얼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좀 더 자주 그리고 가볍게 말이다.

 





[종이 인형(메리 셸리) 협찬: 구슬 @kooseul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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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아포리아 14
롤랑 바르트 지음, 류재화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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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겐 늘 겹겹이 가려져 있는 듯한 작가. 바르트를 좀 더 알고 싶어 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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