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끝, 파랑
이폴리트 지음, 안의진 옮김 / 바람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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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다시 환대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 지중해의 끝, 파랑


이폴리트 글·그림

안의진 옮김 [바람북스] (2025)




 

인간의 역사는 늘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가 공존해 온 역사다. 지중해 역시 이곳을 무대로 기록된 역사에 숱한 전쟁이 있었지만, 내게는 무엇보다 환대의 전통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바다였다. 일리아스오뒷세이아만이 아니라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은 오랜 이야기에는 늘 먼 곳으로부터, 혹은 공동체 밖으로부터 방문한 나그네들이 누군가의 환대를 받고, 그들의 사연이나 경험을 들려주는 전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상대의 정체를 알기 전에 이미 음식을 대접한 후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던 전통을 떠올려보게 된다. 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의례의 과정이 상대방의 삶을 존중하고 공감하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유구하고 훌륭한 문화가 이제는 쉽게 발견하거나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 된듯하다. 특히 환대의 전통을 떠올리게 해 주었던 지중해에서는 오히려 침묵만이 일상이 되다시피 했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이폴리트는 이런 현실을, 그래픽노블의 형태를 빌어 인상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림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책 지중해의 끝, 파랑에서 다루는 주제는 현재 지중해에서 발생하고 있는 난민/이주민 문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대부분 아프리카 북부의 리비아에서 목숨을 걸고 보트로 탈출하여 지중해를 표류하는 난민들을 구조하는 구조선 ‘SOS 메디테라네가 이야기의 중심을 이룬다.


 

저자 이폴리트가 함께 승선하여 취재한 ‘SOS 메디테라네의 운영비는 98%가 개인의 기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루 필요한 운영비의 액수도 놀랍지만, 바다 위를 표류하는 이들을 구하는 구조대에게는 무엇보다 시간은 돈이라기 보다, ‘시간은 생명이었다. 지중해 주변 국가들에 의해 구조선이 억류되어 발이 묶인 시간만큼,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수많은 생명이 실시간으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들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는 그 무게감이 상당히 다르게 전해졌다. 특히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전 세계인들이 고통을 받았던 코로나 봉쇄기간이었기에 그렇다. 우리가 겪은 전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서는 취약한 이들의 삶을 더 무겁게 내리누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의 삶이 예기치 않게 제약을 받거나 위기에 처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 이들은 무엇에도 기댈 곳이 없는 이들이었다. 저자가 저널리스트로서 취재 노트에 해두었을 법한 메모가 구조팀의 존재 이유를 말해준다. “국가들의 무책임은 SOS 메디테라네가 존재하는 이유다.”(108)라고.


 

특히 지중해 연안의 지역 혹은 국가들, 이를테면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비롯한 아프리카 북부의 국가들은 이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 침묵과 무반응으로 대응하고 있다. 난민 구조팀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이러한 냉담과 침묵인 것같다. 이는 문제의 원인을 직시하거나 해결하기를 회피하는 행동이다.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으니, 문제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렇게 문제가 눈앞에 있을 때, 이를 외면하고 침묵하는 일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에 참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국제 사회에서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 어려움에 처한 난민들의 인도적 도움을 요청하는 호소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서유럽에 중심을 두고 있는 서유럽의 EU 회원 국가들(비교적 부유한 국가)이 이탈리아나 그리스, 리비아와 같은 지중해 국가에 거액의 지원금을 주고 지중해로부터 유입될 수 있는 많은 난민을 막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책에 소개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나 섬이 많은 그리스의 여러 섬에는 열악한 상황의 난민 캠프가 조성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지중해 지역의 난민 캠프는 서유럽 국가들에 유입되는 난민들을 막는 중요한 관문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지중해 주변, 혹은 유럽 국가들의 침묵과 냉담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이런 행보를 보이는 부유한 서유럽 국가들을 비난할 처지는 못 된다. 고작 한 차례의 난민을 받을 것인가를 두고 국론이 분열되고, 난민을 외면하고 내친 적이 있는 우리가 이 국가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적어도 이들은 상당수의 난민/이주민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모여있는 난민들의 인구 밀도가 과도하게 높고 시설은 열악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결속력이 상당히 강한 공동체이긴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타자에 대한 관용도가 그만큼 낮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김없이 존재하는 문제는, 난민/이주민들은 지금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이 태어난 곳을 떠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외면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는 결단코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이 품고 있는 현실, 혹은 내가 책에서 건져 올린 질문은 이렇다. ‘사람들은 왜 떠나야 할까?’ 혹은 그들은 왜 떠날 수밖에 없는가?’와 같은 질문들이다. 누구는 빈부를 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자본의 탐욕을 이야기할 것이다. 또 누구는 보다 보편적으로 인간의 탐욕을 언급할 지도 모르겠다. 자본 자체가 탐욕을 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결국 난민/이주민 문제는 어느 기득권 세력의 현상 유지, 혹은 이들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대다수를 희생하게 만들어버린 시스템의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하나는, CNN이 취재하여 보도한 리비아의 노예시장에 관한 언급이었다. 무엇보다 판매 대상이 된 난민 당사자들이 처한 조건을 상상해 보게 된다.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온전히 타인에게 맡겨진 상황이라면, 타인의 몸에 대한 권한을 손안에 쥐고 있는 자는 어떤 행동도 할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바다에서 구조된 어느 여성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하겠다고 말문을 닫아버린침묵의 언어가 구체적인 언어 표현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특히 나는 시리아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자신의 몸값으로 거액을 내고서야 풀려난 후, 다시 목숨을 걸고 바다로 탈출했던 여성 나딘의 삶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임신 8개월이었기에 더 큰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나와야만 했다. 그녀가 구조선에 오르기까지 겪어야 했을 삶의 여정을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또 수감된 남편을 뒤로 하고 딸 아이샤를 살리기 위해 거친 바다로 나온 마타의 사례도 기억난다. 큰돈을 뇌물로 제공하고 나서야 감옥에서 딸과 자신의 몸을 풀어낼 수 있었던 그녀는 돈이 부족하여 남편을 감옥으로부터 구출할 수 없었다. 언젠간 남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SOS 메디테라호가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저자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저자가 취재한 실제 구조 현장의 사진도 눈에 들어온다. 구조 당시 현장의 혼돈과 흥분을 반영하듯 그림과 사진이 번갈아 등장한다. 마치 저자의 아름다운 그림 속에만 머물던 캐릭터가 실제로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하여 내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지닌 존재들이다. 이폴리트가 하나하나의 담요 아래엔 하나의 몸,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삶이 있다.”(165)라고 말하듯 개별적인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어떤 숫자나 분석의 언어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 지중해는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해상 이주 경로라고 인식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지중해 바다 어딘가에선 출렁이는 바다에 몸을 맡긴 채 리비아의 해안 경비대가 아니라 ‘SOS 메디테라네와 같은 이들에게 구조되기를 기다리는 보트피플이 있다. 지중해의 끝, 파랑에서 느낀 것은, 난민/이주민 문제가 단지 지중해 지역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지중해는 인류애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고향을 등지고 떠날 수밖에 없던 이들은 과연 무엇때문인지 많은 독자를 비롯한 현대인들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코 개인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서 내게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구조된 이들이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항구에 하선하는 풍경이 지나간 후 이폴리트가 아들과 통화하는 장면부터다. 인도적으로 난민을 구조하는 활동을 널리 알리고자 저널리스트로 참여한 그였지만, 그 역시 가족이 있는 가장이기도 하다. 구조 현장에서 몸을 가누지 못한 아이들을 품에 안아 돕기도 했던 그는 내 손은 아기 바구니가, 내 팔은 요람이 된다.”(156)는 심경을 남겼다. 아들과 통화한 후 자신이 머물던 방과 창문을 통해 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전면으로 그려놓은 장면이 특히 인상 깊다. 갑자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풍경 속에서 천천히 방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저자의 시선처럼 느껴져서다. 자신이 머물던 빈방의 풍경에는 아들을 향해 가고 싶은 마음과 함께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저자의 마음이 가득 채우고 있는 듯했다. 이 순간 이폴리트가 중얼거렸을 단어는 이 말이었을 것 같다. “안디아모 뚜띠(Andiamo Tutti, 다함께 가자)!”라고.






[책속으로]

[1] "함께 간다. 함께 살아간다."
"나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 - P14

[2] "관광에는 열려 있지만, 인간에게는 닫혀 있는 바다." - P46

[3] "낭비되는 시간만큼, 생명들이 사라지는 거예요." - P49

[4] "그날 놀라울 만큼 많은 생명을 구하고도, 한 번의 실패가 그의 마음을 전부 움켜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닿지 않을 손을 뻗는다. 모두가 외면하지만, 삶을 행해 발버둥치는 그들을 위해." - P79

[5] "안디아모 뚜띠(Andiamo Tutti, 다 같이 가자고!)"
"이곳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면한다." - P80

[6] "국가들의 무책임은 SOS 메디테라네가 존재하는 이유다." - P108

[7] "내 손은 아기 바구니가, 내 팔은 요람이 된다." - P156

[8] "이 아이들을 전부 품에 안을 수 있으면 좋겠다." - P157

[9] "하나하나의 담요 아래엔 하나의 몸,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삶이 있다. 파도는 그 어느 때보다 거세다. 배가 출렁이고, 우리의 마음도 휘청인다." - P165

[10] "우리는 문명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인류의 요람이 우리의 존엄을 묻는 무덤이 되게 해선 안 됩니다."(203, 교황 프란치스코가 마크롱 대통령에게 전하는 말) - P203

[11] "2014년 이후 중앙 지중해에서는 22,631명이 사망했다."
"중앙 지중해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해상 이주 경로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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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뇌
마수드 후사인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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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외딴 섬이 아니다

- 아웃사이더

 


마수드 후사인(Masud Husain) 지음

이한음 옮김 [까치] (2025)




 

신경과 의사 마수드 후사인의 임상 기록이자 에세이 아웃사이더의 원제목은 <Our Brains, Our Selves>이다. 우리의 뇌와 자아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제목이다. 반면 번역서의 제목 아웃사이더는 인간의 정체성과 뇌가 만들어 내는 자아와의 관계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이민자 1.5세대이기도 하다. 런던과 버밍엄의 도심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쯤되면 그의 청소년 시절이 대강 그려진다. 자신과 가족이 다른 피부색과 억양만으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매순간 감지하며 살았을 것이다.


 

번역서의 제목처럼 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특수성(피부색과 억양 등), 곧 고유한 표지들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지 못한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학교를 오가는 동안에도 혐오와 조롱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상상해볼 수는 있으나,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그저 불안하고 위축되는 기분을 늘 감지하지 않았을까. 때론 절망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을 법하다. 특히 장차 신경과 의사가 되고 싶다고 결심했을 때, 친구가 해준 조언(‘넌 유색인종이니 이방인이고 이 세계(신경학계)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차라리 류머티스 분야를 택하라’)은 백인 상류층을 구성하는 영국 신경학계의 현실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여 극복하고 결국 신경과 의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로도 활동해왔다. 기득권에 속한 이들이라도 열린 마음으로 저자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웃사이더30년 동안 저자가 진료실에서 환자와 만난 임상기록이기도 하지만, 저자 자신의 개인사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뇌의 문제를 이해하고 질환을 치료하려는 노력에 인간의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더해진 역작이다. 저자가 오랜 시간 만나온 뇌 관련 질환 환자 중에서 대표적인 증상을 보이는 환자 7명의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면, 뇌졸중으로 모든 행동의 동기를 잃거나 한쪽 시야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 언어와 사물에 대한 의미를 점점 잃어가는 사람, 기억을 잃거나 가짜 기억을 회상하는 사람, 불쑥불쑥 나타나는 환영이 나타나거나 이상한 복장이나 언행을 하게 된 사람, 한쪽 손과 발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환자들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 뇌와 관련한 질병으로 인해 한순간 자기다움의 일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개인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더 중대한 문제는 그 개인이 인생의 한 시기에 집단과 맺어온 관계가 뇌 질환으로인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경험을 하고, 더 나아가 그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배제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본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일어나보니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단지 정치적인 개인의 결정에서 비롯되는 것만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신체의 변화, 특히 뇌질환만으로도 누구나 겪게 될 수 있는 일임을 생생히 보여준다. 인간이 어느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소속감을 잃게 될 때 이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지 다양한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가 소개하는 환자들의 사례를 보면, 과연 인간이 자각하는 나 그 자체’, ‘자아란 도대체 무언인가, 하는 의문을 되짚어보게 된다. 신경과 의사로서 저자는 뇌의 어느 특정 부위가 아니라 뇌 전체에 긴밀하게 연결되고 얽혀 있는 전체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쥐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뇌가 담당하는 다양한 역할이 모여 우리의 자아를 구성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내 안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우스개 소리로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 수많은 가 모두 나의 자아를 구성하는 실체이기도 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저자는 우리의 마음이 이런 다양한 면모들을 모두 포함하는, 보다 구체적으로 내 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인지 기능들의 긴밀한 협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한 가지 더 저자가 잊지 않고 덧붙이는 사항이라면, 이러한 내 안의 여러 자아들은 우리가 속한 환경, 특히 집단과의 의식적, 무의식적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다. 나는 내가 속한 환경, 공동체 속에서 결코 피할 길 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진화하는 존재인 셈이다. 이 사실은 개별자 개인을 바라볼 때, 그 개인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시선이 되어준다.

 


특히 저자와 가족이 아웃사이더가 된 경험, 그리고 이를 극복해간 과정은 이 책의 메시지와 공명하며 더욱 힘을 발한다. 그가 신경과 의사가 되어 진료한 환자 가운데 와히드나 애나, 윈스턴 같은 이들을 떠올려본다. 이들은 20세기, 그리고 영국이라는 시간-공간적 특수성이라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저자처럼 자신이 합류한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다. 책에 소개된 아웃사이더 되기의 경험들은 우리 사회와 인간성에 대해 되돌아볼 기회를 준다. 애나가 자신의 모국어 폴란드어로 전화 통화를 했다는 이유로 혐오가 담긴 언어를 듣고 물리적으로도 폭행을 당했던 사건은, 유독 영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영국 사회의 귀족적-엘리트적 성격, 그리고 일부 이긴 하지만 외국인 혐오의 시선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 장면은 분명 영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집단에 속한 인간이 외집단에 속한 이들에게 가질 수 있는 정서적 반응이나 이질감, 배척 행위를 구체적인 사례로서 보여주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에 이지메라고 불렸던 집단 따돌림도 우리는 직접 겪거나 드물지 않게 보아 왔음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 소속감, 혹은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짐을 자각하는 정서는,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구성원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이 책은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큰 물음에 대한 전문가로서 저자의 답변으로 책의 성격을 이해해볼 수 있겠다. ‘우리의 자아는 뇌의 여러 기능들의 총체이면서 이는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요약해볼 수 있겠다. 저자가 제시한 사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체성 혹은 자기동일성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자아의 속성이, 때로는 얼마나 취약한지를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우리 각자의 소망 혹은 욕구에도 불구하고, 뇌는 바로 이 자기다움’,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경계이면서, 또한 이 길에 이르는 열쇠일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평생 어딘가에 속해 살아간다. 이러한 자각은 전통적인 공동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넘어 구성원들이 파편화, 원자화 되고 고립되어가는 동시대에 보다 중요한 주제가 된 듯하다. 이 주제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우리를 우리답게만들어주는 것이 우리가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정서, 소속감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들려주는 뇌 이야기는, 인류가 학문으로서 수행하고 참여하는 모든 활동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로 수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저자가 제시한 사례와 통찰에서 우리는 신경과학의 한 갈래를 따라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의 길로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생각거리는, ‘자아라는 실체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공동체, 나아가 환경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고 긴밀히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자아는 작게는 내가 속한 가정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자각을 일깨우는 일도, 우리가 인간다움을 확인하는 길이 되기도 할 테다. 우리는 결코 외딴 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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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와 사회적 죽음
올랜도 패터슨 지음, 김혁.류상윤 옮김 / 이학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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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렸는데 마침내 나왔군요. 노예제도의 오랜 역사에 대한 책 같아 참여했습니다. 19세기 조선의 노비 인구 비율은 19세기 노예제 의존도가 최고조에 달했던 미국 남부 오예 인구 비율보다 높았다는 대목부터 흥미를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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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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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꾼에 사는 세상을 꿈꾸며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창비] (2022)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상상을 해본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이하 해방일지)의 화자(아리)의 아버지가 아리를 번쩍 들어 올려 목말을 태우고 어머니 마중 나가던 순간. 화자의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입산하기 전, 사시도 아니었던 10대의 의기양양한 아버지의 모습을 사진에서 확인하던 장면처럼 말이다. 내게도 아리처럼 나의 전부였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목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해방일지를 읽고 나니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이 좀 더 너그러워질 수는 있겠다 싶었다.


 

정지아의 소설 해방일지는 어느 노동절 아침, 과거에 구례 지역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여든 두 살의 남자 고상욱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이 남자의 딸, 그러니까 빨치산의 딸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조문 온 사람들을 처음 마주하며, 굵거나 가늘게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로부터 비로소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하게 된다. 결국 화자는 빨치산 아버지가 아닌, 나의 아버지를 찾게 되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1948년의 여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아리의 아버지는 이 사건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곧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때 고문후유증으로 사시가 되었다. 이는 개인에게 드리워진 우리 현대사의 상흔이었다. 아버지의 사시는 시대와 반목하고 시대에 부적합했던, 한 남자의 운명을 보여주는 듯했다. 사시의 특징 하나는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타인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6년 동안의 수감 후 출소하는 날 함께 찍었던 가족사진에서도 어딘가를 응시하지만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불분명한 시선을, 딸은 기억해냈다. 아버지는 이제 곁에 없었지만 사진 속 아버지의 골똘한 응시는 내게 이렇게 묻는 듯했다. ‘너희는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가?’, 라고. 소설을 읽는 동안 이 질문이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다.


 

장례식장에 조문 온 사람들은 아버지의 생전에 어떠한 식으로든 그와 얽히고 엮인 인연들이었다. 70년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의 동생(작은아버지)은 망자의 영정을 마주보게 되었다. 여기에 빨치산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창창한 미래가 족쇄 채워진 삶을 살아야 했던 아리의 사촌 오빠 길수, 빨치산 동료의 동생으로 월남전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돌아온 절름발이 노인은, 이들이 지나온 이 세계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증언한다. 물론 아버지의 관계망에는 안쓰럽고 애처로운 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심지어 목숨을 살려준 인연도 있었다. 아버지의 담배 친구였던 슈퍼마켓집 10대 소녀도 조문을 와 눈물을 훔치는 기이한 상황은, ‘빨치산의 딸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숨은 세계를 보여준다.


 

이렇듯 화자가 확인하는 아버지의 여러 인연들은 그가 이 세상에 남겨놓은 촘촘한 그물망이었다. 이 관계의 그물망에는 무참한 시절,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겪어 낸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득했다. 아리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깔끔하고 매끄러운 인연이 아니라, 질퍽하고 끈적거리며 질긴 인연들의 세계가 아버지의 세계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온 구례라는 상징적인 장소는, 오랜 인연이 만들어 온 작은 감옥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 (...) 질기고 질긴 마음,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이어진 세계이기도 했다. 부모 세대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그랬다. 이렇듯 잘 보이지 않는 인연들의 그물망으로 서로 돕고 의지하며 때론 서로 일으켜주며 살아온 세계를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197)던 심정으로 읽었던 것이다.


 

화자 아리는 장례식장에서 비로소 제대로 마주하게 된 아버지의 인연들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빨치산의 딸임을 항상 억울해했던 만큼 아리는 이제 아버지의 인연들 각자의 사정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나아가 이들로부터 결국 아버지의 수많은 얼굴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혁명가 아버지, 경우 바른 아버지를 넘어, 어머니에게 하자고 조르기도 했던 인간아버지의 모습을, 따스해진 유골을 통해 느꼈다. ‘생각이 다르면 안 보면 되지, 맨날 싸우면서 왜 맨날 같이 놀아요?’라고 묻는 딸에게 늘 해주는 아버지의 말은 긍게 사램이제였다.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 용서도 한다”(138)는 아버지는 늘 누군가의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아버지의 이 하염없음, 신념보다는 사람의 도리로서 그러했다. 그가 죽는 날까지 인간임을 잃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자신의 신념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마주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게 된 시절이다. 다시 소설을 읽는 동안 아버지의 초점 없는 시선을 환기해본다. 어딘가에 멈추지 못하고, 머물지 못했던 가족사진 속 그의 시선을. 우린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또 우린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까? 이들은 뚜렷한 정답이 없는 물음이었지만, 해답의 실마리는 보인다. 한때 서로 총을 겨누기도 했던 박선생과 아버지의 공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상대방도 나와 같은 인간임을 잊지 않는 일, 또 아버지가 말한 사람의 도리이기도 하다. 완전무결하지 않은 나, 마찬가지로 완전무결하지 않은 상대방이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을 간직하는 일. 아버지의 인연들이 응시하는 지점에는 바로 이렇게 인간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었다. 이는 아버지의 동창 박한후 선생의 한 마디, “항꾼에(함께) ... 올라네”(50)에 담겨 있었다. 아리에게 아버지 없는 노동절의 아침은 꿈결처럼 낯설었을 것 같다. 대신 아리는 이제 항꾼에 사는 세상을 새롭게 꿈꾸기 시작했을 테다.





[책속으로]

[1] "작은아버지의 사정은 작은아버지의 사정이지,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렇게 모르쇠로 딴 데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42) - P42

[2] "항꾼에, 올라네, 말 사이의 짧은 침묵이 마음에 얹혔다. 저런 말이 하염없이 인생을 살았던 한 남자의 애틋한 정일지 몰랐다."(50) - P50

[3]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아버지도 구례사람들도 나는 늘 신기했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 긍게 사램이제. (...)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138) - P138

[4] "무엇에도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버지가 몇마디 말로 정의해준다 한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옳았든 틀렸든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147) - P147

[5]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 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 감옥일지도 모른다."(163) - P163

[6]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181) - P181

[7]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ㄴ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197) - P197

[8]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198) - P198

[9]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 - P231

[10]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252) - P252

[11]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265) [마지막 문장] - P265

[12] "사램이 오죽하면 글것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을 받이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268) [작가의 말 중에서]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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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 되는 법 - 읽고 쓰는 사람으로 책 세계를 만끽하기 위하여 땅콩문고
김성신 지음 / 유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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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가 많은 사회는 병들지 않는다

- 서평가 되는 법


 김성신 지음 [유유] (2025)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일단 서평가가 되어 보라. 되기 어렵지 않다. 책을 읽기만 했던 것에서 딱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책에 대해 쓰기만 하면 된다. (...) 서평가가 되는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다.”(140)


 

서평가 되는 법을 쓴 작가 김성신은 서평가들의 서평가’, ‘서평가들의 멘토라 할 수 있겠다. 이력을 보면 30년 넘게 출판계에 몸을 담고서, 책을 알리고 책에 대해 글을 쓰며 방송에도 출연하여 책을 알려온 작가였다. 그런 출판 전문가가 이번에는 서평가 되는 법에 대해 정리한 글이다. 그가 말하는 서평가 되는 법, 책을 읽기만 하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읽은 책에 대해 쓰기만 하면 된다고. ‘, 쉽죠~!’라는 유행어가 떠오른다. 이렇게 그는 30여 년의 노하우를 담아 서평가 되는 법을 한 문장으로 얘기해버렸다.

 


그럼 이제 무슨 할 얘기가 더 남아있단 말인가? 일단 책을 읽기만 하면 서평가가 될 수 있다고 했으니, 책의 나머지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책의 나머지 지면에는 저자가 끌어들인 주변 지인들이 서평가로 거듭나는 과정 담겨 있다. 이들은 저자 주변의 느슨했던 지인들이 책을 매개로 어떻게 그와 친밀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며 함께 가는 동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지도 볼 수 있다.

 


코미디언이 책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며 웃기는 서평가가 된 에피소드, 또 오랜 지인이자 호텔에서 30년 일해온 셰프를 꼬드겨 요리하는 서평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게 도운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물론 글만으로 서평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번에 새로 알게 되었다. 책을 읽은 감상을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독후화라고 명명한 독후 감상 활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글이 새로운 매체로의 창작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신기한 경험이다. 이렇듯 저자는 책을 읽은 이라면 누구나 서평가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서평과 독후감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고, 실제로 서평가들의 글을 읽어보면 학창시절에 종종 머리를 쥐어뜯으며 써가야 했던 독후감과도 사뭇 다르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서평 쓰기는 독후감 쓰기와는 분명 뭔가 다르다. 하지만 이 느낌에서 나아가 무언가 서평다운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는 언제나 나의 큰 관심주제다. 내가 쓴 글을 읽으면 언제나 어딘가 부족함을 느끼던 차였다. 물론 내 글의 기술적인 부분, 특히 표현상의 부족함도 많을 테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기술적인 면이 서평의 본질은 아니라고 하니 저자는 이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까.

 


좋은 글은 좋은 표현이기보다는 좋은 생각이다.”(18)

 


뭐랄까, 이 단비 같은 명쾌한 답변이라니. 내게 무엇보다 부족한 건 아마도 좋은 생각의 부족이 아니었을까. 좋은 생각에 이르도록 고민하는 일이야말로 서평가가 주목하여 해결해야할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자가 이야기하는 서평가 되기의 요건 중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 있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서평의 본질은 사랑과 공공성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공공성은 글을 쓰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이미 모든 서평가가 무의식중에 염두에 두는 조건이 아닌가?

 


그럼 서평가의 본질로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뭘까? 이쯤 되면 나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자부하는 독자들이 자신감을 얻을 만 하지만, 이것이 어떤 사랑인지는 좀 따져봐야 할 것 같다. 그가 서평가의 자질로 요구하는 사랑이란 결국 존중이었다. 서평글을 매개로 사랑의 작대기를 연결해 보자면, 글을 쓴 사람과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이어진다. 곧 서평을 쓰는 이들은 바로 이 두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이를 또 내 방식으로 풀어보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서평가의 사랑은 애써 글을 쓴 사람과 애써 이 글을 읽게 될 사람에 대한 환대가 아닐까. 저자가 말하는 쓰는 자와 읽는 자에 대한 존중을 조금 달리 얘기하자면, 결국 쓰는 이와 읽는 이에 대한 마음가짐, 배려하기에 이르기도 할 것이다.


 

서평은 책을 매개로 하는 비평의 한 장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때 사람들은 비판적인 읽기를 떠올리다 그만 비판적인 공격’, 혹은 비난을 하기 쉽다. 자신의 잣대를 기반으로 따져가며 읽는 행위에 잘못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을 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정성껏해야 한다고 본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서평도 결국 대상(작가와 독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먼저였던 것이다.


 

이렇게 혼자 놀이하듯 정리하고 나니, 저자의 말들이 더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저자와 같은 선배를 만날 수 없는, 나와 같은 독자를 위해서도 이런 이야기들을 애써 이야기 해주어서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서평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18)라고, 소심한 나에게 처음부터 겁을 잔뜩 주긴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니 그가 거듭 당부하고 있는 서평가의 요건, ‘사랑공공성또한 이 둘이 서로 별개의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서평가는 책(혹은 저자)과와 책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단순히 연결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기능적인 면에서 AI가 서평가를 가까운 미래에 대신할 수 있는 영역이 있겠지만, 도덕성·윤리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AI에게 대상에 대한 존중과 아끼는 마음, 그리고 공동체의 안위를 염려하고 스스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이러한 마음가짐을 지닌 서평가가 점점 더 많아진다면, 정지우 작가의 표현대로 외롭지 않고 병들지 않는공동체를 가꾸는 데 서평가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평은 의외로 힘이 세다.”(140)는 작가의 말을 믿어 보자.  




[책 속으로]

[1] "서평가가 되고 싶다면 ‘공공성’이란 단어만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17) - P17

[2] "누구나 서평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

"좋은 글은 좋은 ‘표현’이기보다는 좋은 ‘생각’이다."

"책에 대한 사랑과 무엇보다 공공성에 대한 엄격한 자기 검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엇인가 되고 싶다면 그 일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서평의 본질은 바로 사랑과 공공성이다."(18) - P18

[3] "나는 파불루머 프로젝트를 통해 성실한 사람이 유능해지고, 유능한 사람이 훌륭해지고, 훌륭한 사람이 멈추지 않고 계속 정진하는 진정한 고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56) - P56

[4] "그림은 명사지만 ‘그리다’는 동사지요. 그림은 아무리 대단해져 봐야 고작 비싼 물건 취급이나 받지만 ‘그리는 행위’는 때로 숭고해서 ‘그리는 사람’은 위대함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57, 독후화 화가 천지수의 말) - P57

[5] "탈북인에게는 남한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내비칠 창구가 없다. 대한민국 사회는 200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체제 우월성의 증거쯤으로만 탈북인들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71) - P71

[6] "서평의 본질은 책(또는 저자)과 독자를 잇는 것이다. 이 일을 잘 하려면 대상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책과 그 책을 쓴 이 그리고 독자에 대한 존중 말이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화려한 글 솜씨를 동원해 책에 대해 떠들어도 결코 좋은 서평가라고 할 수 없다."(127)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도 스탈린도 유난스러운 독서가였다. (...) 독서에는 실체적인 위력이 있어서 잘못된 철학이나 생각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127) - P127

[7] "서평의 핵심은 저자와 독자를 향한 존중이다. 좋은 서평가가 되고 싶다면 ‘나는 저자와 독자를 여전히 존중하고 있는가?’하고 스스로 자주 되물어야 한다."(128) - P128

[8]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일단 서평가가 되어 보라. 되기 어렵지 않다. 책을 읽기만 했던 것에서 딱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책에 대해 쓰기만 하면 된다. 공공성에 대한 인식만 잘 갖추고 있다면, 서평가가 되는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다."(140)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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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5-05-1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사랑’이고, 사랑을 알려면 ‘사람’과 ‘살다·살리다(살림)’와 ‘사이(새)’라는 낱말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한자말 ‘존중’은 ‘사랑’하고 멉니다. 사랑을 안 하더라도 얼마든지 모시거나 섬기거나 높일 수 있으니까요. 한자말 ‘배려’도 ‘사랑’하고 멉니다. 사랑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마음쓰기’를 하면서 자리를 내주거나 돈을 나눠주거나 밥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사랑’이라는 낱말을 사랑 그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고서, 자꾸 다른 낱말을 끼워맞추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을 더욱 모르거나 등지면서, 사랑흉내나 사랑시늉이나 사랑척으로 기웁니다. 이를테면 ‘좋다·좋아하다’를 섣불리 끼워맞추려 하는데, ‘좋다·좋아하다 = 마음에 들다’이고, ‘마음에 들다 = 마음에 안 들면 모두 쳐낸다’는 밑뜻입니다. 그래서 ‘좋은글·좋은책’이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안 쳐다보거나 치우거나 등진다”는 굴레로 치닫습니다.

한자말을 풀자면, ‘서평 = 글을 짚으며 말하다’요, ‘독후감 = 글을 읽고서 느끼는 대로 말하다’입니다. ‘서평가’란 “글을 찬찬히 짚으면서 꾸밈없이 말하는 사람”일 노릇이라서, 서평가라는 사람은 모름지기 ‘까칠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꾸밈없이 말하려면 ‘좋은말’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듣기에 나쁜말”을 자주 해야 하니까요. ‘독후감’은 누구나 느끼는 대로 밝히는 말이기에, 좋거나 나쁘다고 가를 수 없이, 저마다 다른 삶 그대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여러모로 보면, 우리는 ‘서평가’가 되기보다는 “사랑을 하며 살림을 짓는 새로운 하루를 스스로 그려서 짓는 사람”으로 서면 됩니다. 스스로 사랑을 배우고 익혀서 나누는 사람이라면, 글을 읽건 일을 하건 놀이를 하건 노래를 하건 논밭을 일구건 부릉부릉 쇳덩이를 몰건, 언제나 ‘사랑’을 바탕으로 움직이기에, 서로 살리는 길을 저절로 펴게 마련입니다.

굳이 어려운 한자말로 ‘공공성’이라 할 까닭이 없이, 어린이 곁에 서는 쉬운 우리말인 ‘같이’와 ‘함께’와 ‘모두’와 ‘나란히’와 ‘서로’를 그때그때 다르게 살피고 짚으면서 쓸 줄 알면 된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