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에 있다는 것
클레르 마랭 지음, 황은주 옮김 / 에디투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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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절한 자리에 놓인다는 것, 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변두리로 몰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목을 끌지 말고 움츠릴 줄 알아야 한다고 요구받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의 삶은 “위축되고” “발목 잡히는 ”비주류의 양상을 띤다. 우리 안의 무엇이 우리를 저지할까? 우리는 신체, 젠더, 외모, 그리고 사회와 시대 환경이 우리의 신체에 투영하는 판단에 의해서 매우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방식으로 발목 잡힌다. …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할당된 자리와 은밀한 명령에 순종한다. … 이 세상은 당신을 위해 어떤 공간도 만들지 않았다. 


(p52~53)


책 소개에 올라온 이 문장 때문에 구매를 결심했다.


김현경 작가의 <사람, 장소, 환대>에서는

메리 더글러스의 <순수와 위험>이 곧잘 인용된다. 



여기 소개된 문장 중에 이게 있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


<사람, 장소, 환대:74p)

우리 발을 따듯하게 해 주는 양말이지만 새 양말도 더럽게 느껴진다.

식탁은 밥 먹는 장소니까.


미국에서는 두루마리 휴지가 식탁에 올라오면 기겁한다.

연상된다고.(이 풍부한 상상력이라니)


부적절한 자리에 놓인다는 것, 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변두리로 몰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목을 끌지 말고 움츠릴 줄 알아야 한다고 요구 받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 문장을 자꾸 다시 보게 된다.


부적절한 자리에 놓여 

이목을 끌지 말고 움츠리라고 요구 받는 사람들.


고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산 지 오래됐다.


여긴 처음부터 내게 부적절한 자리였다.

이목을 끌지 말고 움츠리라는 요구?

숱하게 받았다.

뼈가 시리도록 받았다.


아니, 그런 요구를 받기 전에 알아서 기었다.


언어가 안 되니까.


한국에서는 영어 학원 다니면 고급반에도 들어가고 그랬는데

여기 와 유치원생 말도 못 알 아먹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원래 유치원생 말은 알아 먹기 힘들단다. 어느 나라건.)


세상 많은 책 중에 가장 반가운 책은 '나'가 들어 있는 책인지 모른다.

글자 사이에 낀 내가 보인다.

텍스트 저변에 움츠려 앉은 내가 보인다.


내가 쓰지 않았는데, 내 이야기를 하는 책.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책.

이제껏 내가 만난 적 있고, 앞으로 만날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책.


이 책은 어쩌면 나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할 것 같다. 

내가 모르는 나의 이야기.

즐거운 독서는 담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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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5-18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 장소 환대, 를 완독했는데 리뷰를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어렵게 읽었거든요. 이 어려운 책을 쉽게 풀어 쓰는 리뷰를 쓰고 싶군요. 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꽤 공부가 되었던 좋은 책입니다.

젤소민아 2025-05-18 21:36   좋아요 1 | URL
그 책이 나온 초기에 제목보고 그냥 샀어요. 저는 소설을 쓰니까..그 제목이 소설에 대입됐더랬죠.

제게 소설은, [어떤 장소에서 벗어나 혹은 그곳으로 들어가 어떤 사유로든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을 소개하는] 문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목만으로도 큰 걸 해내는 책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 제목에 아마 많이들 각자의 장소에서 나름의 환대를 생각했을 듯하거든요.

이런 이야기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페크님~

2025-05-21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5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5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신병동 수기
크리스티네 라반트 지음, 임홍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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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동 수기, 마귀들린 아이. 중등 교육과정도 받지 못한 작가. 이미 작고했다. 삶과 죽음의 사이. 정상과 광기의 사이. 평균과 곤궁의 차이. 평범과 특별의 차이. 그는 사이에 서 있었을까, 한편에 치우쳤을까. 어디든 그가 서 있던 자리가 궁금해졌다. 적어도 틀에 박힌 소설은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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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는 법 - 화가와 미학자의 맛있는 그림이야기
야자키 요시모리.나카무라 겐이치 지음, 이수민 옮김 / 아트북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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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절판된 책이다.

특별히 좋은 책들이 자주 그렇듯.


몇백, 몇천 번의 시행착오를 겪는 가운데 일생일대의 진짜 선 하나를 발견하기 위해서죠.

그림을 보며 뭔가 어색하다고 느낄 때, 형태의 세계를 선으로 보는 버릇을 들이면-그 선의 진위를 알 수 있다면-데생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39p)


문장은...


이 문장의 서술어를 찾기가 힘들다.


훌륭하다, 위대하다...같은 상투어를 갖다대기가 싫다.


문장은...


이 문장의 서술어는 이 문장을 읽은 모두가 제각각 채워주기를.

그게 또, 문장이 부리는 마술 아니겠는가.


문장은 이것을 말하는데 읽는 사람은 저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


미술을 말하는데, 소설을 생각했다.


소설을 쓰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공모전에서 떨어져 보기도 했다.

내 소설은 뭐가 부족해서 떨어질까, 생각했다.


힘들게 탈고하고, 내 마음에 안 들기도 한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마음에 안 든다.


이것도 소설이라고 썼냐???

스스로 호통치거나 머리를 쥐뜯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앞으로는 감히, 소설을 쓰지는 말자.


그래놓고 또 쓴다. 

다른 글을 쓰다가도 퍼뜩 한 장면이나 이미지가 떠오르면 

소설의 첫문장이나 결말을 쓰고부터 본다. 


이 책에 의하면, 혹시 '일생일대의 진짜 선 하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정수리가 따끔했다.


정수리를 따끔하게 하는 문장들이 있다.

그런 문장은 외우려고 애쓴다. 물론, 잘 안 된다.

그래서 여기에 써서 남기려 한다.

많이들 읽고 정수리가 따끔거렸으면 좋겠다.


그림을 보며 뭔가 어색하다고 느낄 때, 형태의 세계를 선으로 보는 버릇을 들이면-


그림을 세상으로 치환해 보자.

인간관계로 치환해 보자.


관계에 뭔가 어색하다고 느낄 때, 관계란 형태의 세계를 '선'으로 보자.


흠...선...이라...


여기서 '선'을 해석하고 치환하는데 필요한 게 내공이다.

인생의 내공, 사유의 내공, 경험의 내공, 지식의 내공 등등.


내 수준이 딱 나올 것 같아 섣불리 말하기가 힘들다..끙.


그런데 뭔가 감이 잡히는 것도 같다.


삶을, 인생을, 고통을, 통증을, 고독을, 문제를, 관계를 대함에 뭔가 어색하다고 느낄 때,

'선'으로 보자...선으로 보자...선으로 보자...


어디쯤에서 선이 비뚤어졌나.

이 선은 왜 여러 가닥인가.


나와 너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진짜 선 하나는 어떤 가닥인가.


이 선을 비뚤게 할 내 얄팍한 감정들을 관찰한다.

내가 기억할 것은 이것이다.


일생일대의 진짜 선 하나.


그럼, 데생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그 다음 문장도 정수리가 후끈거린다.


중요한 것은 윤곽이 아니라 골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의 여부예요. (40p)


크하.


미술서가 아니라, 아니, 미술서면서 자기계발서. 아주 훌륭한.

숨은 장르 찾기.


아, 밑줄긋기 채워넣다가 29쪽에서 발견한 이 문장!

정수리의 찌릿함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게 하는.


선을 하나 긋는 것은 아이도 어른도 아마추어도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죠.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선을 파악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진 않아요. 우리는 수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두 개의 점을 연결하는 직선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은 알죠. 


아무리 선이 많아도, 모든 선이 다 좋은 건 아니에요. 좋은 선을 하나밖에 없죠. 어떤 방향에서든 하나의 선이 잡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는 아니에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선은 달라집니다. 또 한 번 움직이면 다시 무수한 선이 생기죠. 그런 가운데 유일한 좋은 선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데생입니다. 그 선은 대단한 결정력을 갖고 있어서, 결코 흐릿하게 그릴 수 없죠. 화가는 이것을 '진짜' 선이라고 합니다. 


화가의 가장 큰 고민은 무수히 교차하는 선 중 이 진짜 선을 결정하는 것인데,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죠.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29p)

읽으면서 후설의 '현상학'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후설을 다시 찾아 읽어야 할 듯. 

이분이 뭔가 '선'과 이어질 만한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본질'과 연관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그런 책이 좋은 책이다.

꼬리를 아낌없이 내주는 책.


더 읽어나가면서 소설 쓰기도 그렇고, 인생의 제반 문제에 관해 치환 가능한 '정수리 후끈한' 문장들을 밑줄긋기에 계속 업데이트할 생각이다.

훌륭한 그림은 조합된 요소의 어느 한 부분도 수정할 수 없을 정도로 구도가 긴밀하죠. 한치의 오차로도 그림은 흐트러지고 맙니다. - P14

라파엘로의 위대함은 단지 귀여운 성모 마리아를 그렸다는 데 있지 않아요. 면과 형태의 문제를 해결한 뛰어난 능력 때문이죠. - P15

데생은 단순히 윤곽을 만드는 것 이상의 작업으로 입체, 운동, 감정까지도 담고 있죠. - P16

그림을 감상할 때는 역사를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그림을 평가하면 이해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요. - P17

종교의 제약을 받아 그린 것이라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조화를 이룬 화가의 재능을 엿볼 수 있어요. - P18

그러나 그림 그 자체로 말하면 제약 같은 것은 없습니다. - P19

여하튼 감명이라고 해야 할지, 인상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을 나누는 구분 선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들라크루아나 루벤스도 그림을 그리려면 종이에 형태와 색을 사용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표현의 문제가 중요한 겁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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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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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뭔지....하는 고민을 한방에 날려줄 책. 처음엔 이해가 잘 안 갔다. 뭐, 이렇게까지. 두 번 읽고 느꼈고, 세 번 읽고 울었다. 네 번째 읽으면 아마도 난 드디어 사랑이란 걸 할 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이렇게 하는 거라곤 못하겠다. 그러나 이런 사랑도 있다는 걸 아는 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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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소포스의 책 읽기 - 철학의 숲에서 만난 사유들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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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이 재미있어 보이는 걸 보면 사유가 깊어졌....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고, 그저 나이가 들어감 때문일 지도. 나이가 들어간다고 사유가 깊어진다고 저절로 믿는 이들이 보아야 할 책이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다면 솔선수범해서 내가 먼저. 앞서 사유한 이들의 빛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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