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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스트리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평점 :
소설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소설의 문장마다 기억하긴 힘들다.
온갖 미디어에 중뿔나게 소개되는 명문장조차 단 한 줄도 외우기 힘들다.
우리가 기억하는 건, 그냥, 소설의 줄거리다.
그래도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
어디 가서 소설의 몇 문장-명문장 아니고, 몇 문장-은 외워서 읊는 척도 하고 해야 할 것 같아
외우려고 해 봤다. 머리가 시멘트처럼 굳었나보다. 안 된다.
그래서 외우기를 포기하고 매달린 게 밑줄이다.
밑줄을 긋기 위해 온갖 펜을 동원했다.

(요즘 내 독서의 밑줄긋기를 맡아주기 위해 엄선된 애들)
펜을 동원하다 보니 펜에 관해 쫌 알게 되었다.
펜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팬 말고, 펜-.
내 책상을 볼 기회가 있는 사람들은 문구점이냐, 필기구 공장 차렸냐,
하는 말들을 잊지 않고 한다. 난 칭찬으로 듣는다.
뭔 이야길 하다가 펜으로 흘렀나...
아, 밑줄긋기.
문장을 외우지 못해 밑줄을 긋다가 위기에 봉착했다.
어느 책의 어디에 밑줄을 그어놨는지 당췌 알 길이...
책을 일일이 열어봐야만 그어놓은 밑줄을 찾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또 짱구를 굴렸고, 그래서 찾은 방법이 '머리띠' 끼우기다.
책갈피 위에 '머리띠'를 끼우듯 head tab을 하나 붙이는 거다.
끄트머리에 메모를 적어서.
이렇게.

이게 얼마나 유효한지 모른다.
뭘 찾아야 하는데 어떤 책에서 봤더라???
그러면 책꽂이로 달려가 이 '머리띠'를 훑으면 된다아!!
<미겔 스트리트>에서 그렇게 머리띠를 끼워놓은 문장이다.
내가 미겔 스트리트로 돌아와서 처음 만난 사람은 해트였다.
그는 팔에 신문 한 부를 끼로 평발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카페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손짓을 하며 그에게 소리쳤다.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나는 네가 이맘때쯤 하늘 위에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실망했다. 해트가 이렇게 냉랭하게 맞아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영영 이곳을 떠나기 위해 가버렸는데도 모든 것은 이전과 같았고
나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실망했던 것이다.
289p)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나'가 어디 다른 나라로 떠났다가 돌아온 게 아니다.
어디 다른 나라(런던)로 가려고 공항으로 갔는데 비행기가 6시간 연착돼서
다시 미겔 스트리트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말하자면, 엄청 민망한...
나도 이런 적 있다.
나도 '나'와 꽤 비슷한 상황이었던 때.
다른 나라로 갈 때.
가족, 친구, 친척 다 모여 울고불고 콧물 짜고 했더랬다.
나는 그들 곁에 내가 있던 자리가 받을 타격을 상상하며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았더랬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여권을 빼놓고 택시를 탔고,
나는 곧 죽을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택시를 돌렸다.
이미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고 그랬는데,
내가 다시 돌아가자 내 자리는 이미 거기 없었다.
내가 사라지기 직전까지는 내 사라짐에 대해 하늘 무너지던 사람들이
나의 귀환에 "너, 왜 또 왔어?" 였다.
두번째 이별은 밖에 나와 보지도 않드라...
예전에 지방으로 전보나서 떠나는 직장 동료와 뜨거운 작별 회식자리에서
그 동료가 먼저 뜰 때도 그랬다. 손수건 없이는 볼 수 없는 눈물의 허그와 울먹임.
그러고 먼저 나간 그 동료가 10분 쯤 우산을 두고 왔다며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린 어깨동무를 하고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부르느라
그 동료가 왔다 간 줄도 몰랐다.
나중에 우산이 있다가 없어진 걸 알고 알았다.
나는 실망했다. 해트가 이렇게 냉랭하게 맞아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영영 이곳을 떠나기 위해 가버렸는데도 모든 것은 이전과 같았고
나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실망했던 것이다.
289p)
내가 이 문장을 외우고 밑줄 긋고 머리띠를 하고 난리치는 건
이 문장 속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 얼마나 실망했던지.
나는 영영 그곳을 떠나기 위해 가버렸는데 모든 건 이전과 같았다.
나의 부재를 가리키는 건, 끔찍하리만치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나를, 50여년 전에 쓰여진 문장 속에서 만난다.
내가 언어화하지 못한 나, 내 마음, 내 처지, 나의 무엇-.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태어난 소설가에게 기댄다.
나의 언어를 좀 찾아달라고.
그게,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가진 위력적인 힘이다.
내게 기댈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의 언어를 좀 찾아줘어어-.
내가 오늘 단 한줄의 소설도 쓰지 못한 이유.
내 언어부터 찾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