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보는 방식 삶을 대하는 시선, 식 시리즈 1
온정 지음 / 마누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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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소개말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구매결심. 표지 색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인데, 정말 정확한 바로 그 shade이기 때문이다.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살면서 ˝이거다!˝ 하고, 자기도 모르게 손뼉치게 되는 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볼때, 구매동기는 충분했다. 뭐, 남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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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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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전에 발표된 소설이고 한글 번역본도 있었다.

절판됐지만.


예전에 이 소설을 읽을 때는 내가 소설을 쓰지 않을 때였다. 

그냥 커트 보거네트가 좋아서, 아니 신기해서 읽었다.


그런데도 소설 작법에 무지 유용하겠다, 싶었던 책이다.


이 소설은 쫀쫀한 줄거리 같은 걸 늘어놓고

캐릭터의 삶이나 인생을 보여주는 시도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커트 보네거트는 자타공인 포스트모던 작가니까.

나는 포스트모던을 '실험적'이라고만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의 소유다 보니

이 소설의 무엇이 포스트모던인 지는 잘 모른다. 


그냥, 참 희한한 소설이네 &&&&


없는 줄거리를 캐내려 기를 쓰다가 지쳐 나가 떨어진 내게 

작가가 "자, 여기." 하며 적선하듯 던져준 게 있었다.


인물의 삶이나 인생의 구구절절함 대신 말이다.


그 인물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지-.


작자는 소설 속으로 직접 뛰어가 인물 행세를 하며 온갖 간섭을 하고 오지랖을 부리며

종횡무진 쏘다닌다. 그러다 마지막에 심지어는 또 다른 인물에게 스스로를

'창조자'라고 커밍아웃한다.



이쯤되면 싫든 좋든 운명처럼 떠올리게 되는 또다른 소설이 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그럴 것 같다.


글치.


칼비노의 <어느 겨울 밤 한 여행자가>


이 소설에서는 인물이 독자더러 '당신'이라고 부르며 온갖 개입을 유도한다.


물론, 이런 쌩뚱맞음과 어이없음은 '포스트모던'이라서 용서받을 수 있다.


소설에서 작가와 독자는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

결코, 초대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들 아닌가 말이다.


절대로 간단히 말해서는 안 되는 소설들이지만

용기 내서 간단히 말하자면,


커트 보네거트는 '쓰는 행위'에 관해 말하는 면이 있고

이탈로 칼비노는 '읽는 (+쓰는)'에 관해 말하는 면이 있다는 소리다.


소설에서 금기시된 존재인 작가와 독자를 과감히 끌어들여...


여기까진 비-포스트모더니즘 소설가들도 '메타픽션'틱하게 풀어간 게 많지 않으니까.


그런데 작가와 독자를 끌어들여 소설을 쓰고 읽는 행위 자체에 관해 다루고

그걸 주제화한 경우는 생각해 내기가 쉽지 않다. 


소설가가 소설 쓰는 일 자체를 놓고 고심하는 소설은 몇 있다.

키리니의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머리로만 책을 쓴 남자> 같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누군가를 끌어 들였는데...가물가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인물(토마스 같음)을 자기 모습을 보는 것처럼 썼던가.


아무튼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에서는 인물이 자신의 삶이 허구라는 걸 알고 좌절한다.

이는 글을 쓴다는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다르게 왜곡하거나 어떤 식으로 규정짓는 방식일 수 있다는 걸 고발한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소설 쓰는 소설가라는 게 또 아이러니)


<어느 겨울 밤 한 여행자가>는 열 편의 소설이 나오지만 모두 감질나게 '초반'만 보여준다.

독자 입장에서는 감질나서 몸부림 날 지경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를 통해 독서란 것의 정의를 새로이, 혹은 자기 식으로

내리고 있는 것 같다.


독서는, 작가가 무언가를 제시하고 

그 완성은 독자가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적하고 탐구하면서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말하자면, 독서는 미완으로 시작하고 미완으로 펼쳐지다가 미완으로 끝날 건데

'완료'는 당신(독자)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다소 무책임하고 모질다고 생각돼 살짝 기분 나빠지려고 하는. ㅋ


아무튼 이런 연고로,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두 권 다 꼭꼭꼭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지금쯤 '구매'에 마우스를 갖다대고 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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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와 열한 개의 우물 b-SIDE 1
신우승 지음 / 비(도서출판b)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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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작품을 구성하는 기호만을 소리 내어 읽음을 뜻하지 않음은 자명하다. 이제 막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어린아이가 보르헤스의 소설을 큰 소리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작품 읽기’가 아니라는 점을 안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을 뜻하며, 그 ‘무언가’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독자가 작품에서 읽어내고자 하는 무언가를 작가의 의도라고 이해한다. 독자는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독자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의도하는 바를 임의적 개입이나 주관적 판단 없이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포착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예컨대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을 통해 일제 치하에서 조선 민중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사는지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자 했다. 이것이 현진건의 의도라고 할 때, 「운수 좋은 날」을 읽고 나서 ‘김 첨지는 가정 폭력범인데? 죽은 아내의 따귀를 때려?’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이 반응은 작가의 의도를 포착하지 못한, 따라서 작품을 잘못 읽는 행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작가의 의도 파악을 작품 읽기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일은 독서의 능동성을 약화하고, 작품에 대한 건전한 평가를 차단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통한 작품의 다각적 확장을 막지 않는가? 작가의 의도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 자신의 입장에서 작품을 새로이 읽는 일은 작가의 의도를 포착하는 일 이상으로 중요하며, 이렇게 새로이 읽을 때 원래의 작품은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된다.”


(알라딘 책소개 인용문 중에서)


완전히 공감하면서 읽어 내려오다가, 뒤로 가면서 조금 흠...


작가의 의도 파악을 작품 읽기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일은 독서의 능동성을 약화하고, 작품에 대한 건전한 평가를 차단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통한 작품의 다각적 확장을 막지 않는가?


작가의 의도 파악만을 위해 소설을 읽으면 안 될 것이다.

당연하다.

그런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은 정말정말 중요하다.


작가가 왜 그런 인물을 내세웠고, 왜 인물들은 별 것도 아닌 것을 놓고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독자는 그걸 이해해 보려 애써야 한다.


그걸 다 모아 놓으면 결국, '작가의 의도'로 모아진다.


작가의 의도에는 그 소설을 쓰고자 결심하는 첫마음이 담겼고,

그 소설을 끝내 써나가는 소신이 담겼고,

그 소설을 종내는 완성하는 고집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게 바로 '이유'. 

그 소설이 쓰여져야 하는 이유. 


나는 소설 읽기에서 그 일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만을 위해 읽지는 않지만, 그게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는 믿는다.


그것만을 위해 읽는다,와

그걸 핵심으로 삼는다,는 아주 많이 다른 말이다.


저자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으면

[독서의 능동성을 약화하고, 작품에 대한 건전한 평가를 차단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통한 작품의 다각적 확장을 막지 않는가?]하고 우려하는 것 같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공감도 간다. 


작가의 의도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 자신의 입장에서 작품을 새로이 읽는 일은 작가의 의도를 포착하는 일 이상으로 중요하며, 이렇게 새로이 읽을 때 원래의 작품은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 말도 사실, 아주 중요하다.

보르헤스의 소설에 독자 나름의 입장에서 작품을 새로이 읽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말 그대로, 원래의 작품이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고 싶은 게 있다.


그 소설은 원래의 작품보다 새로운 작품으로 꼭 거듭나야 할까?


보르헤스의 소설 한 편이 품은 힘을 백분의 일이라도,

독자로서 나눠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소설을 읽을 때 늘 이런 생각을 한다.


그 소설이 나를 관통해, 내 나름의 입장에서 새로이 읽어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되길...


그다지 원치 않는 것 같다.


무슨 말인지도 알고, 그게 의미 있다는 것도 안다.


다만, 나는 그걸 그렇게 바라면서 소설을 읽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오늘도 내 책상에 소설 한 권이 올려져 있다.


댈러웨이 부인


나는 댈러웨이 부인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먼저 알고 싶다.

작가의 생각에 닿고 싶다.


소설을 읽으며 왜 내 나름의 입장과 생각을 펼치기엔 

소설이 내겐 너무 높고 크다.


인물의 소소한 감정이나 상황과 사건에 대한 촌평은 물론, 끊임없이 하면서 읽는다.


그러나 소설 '작품' 앞에서 내 나름의 입장과 생각을 펼쳐놓으며 

'작품에 대한 건전한 평가를 차단하'지 않으려 노력할 생각은 별로 없다.


나는 그럼 깜냥이 못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저,

작가의 의도를 백만분의 일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면,

하느님, 감사합니다! 할 일이니까.


(그 외 소설 독법과 관련해 좋은 문장도 많고,

보르헤스의 단편을 풀어준다니~~카트에 안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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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송이 말하는 브레송 - 1943~1983 인터뷰집
윤진 옮김, 로베르 브레송 인터뷰이 / 고트(goat)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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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e the ideas, but so that people find them. The most important will be the most hidden.

아이디어는 숨겨두되,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하세요.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는 가장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브레송이 한 말이다.


이건 단지 그가 천착한 영화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소설에도 더할 수 없이 적절하게 적용된다.


소설을 쓰다 보면 인물의 감정과 처한 상황을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강박에 눌린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세히, 상세히 묘사하고 풀어내려 든다.


친절해도 너무 친절해진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좋은 소설이나 영화는 그런 방식으로 독자와 관객을

감응시킬 수 없다. 독자와 관객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작가와 감독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고, 더 많은 걸 느끼고, 더 많이 경험한

사람이 그들이다.


소설은 문장으로 다 보여주면 안 된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무언가가 ‘피어나고 자라나게’ 해야 한다. 


감정을 강요하면 큰일난다. 망한다.


소설이든 영화든,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정말 골백번도 더 들었다.

실제로 쓸 때, 그게 정말 너무 너무 어려워서 그렇지.


작가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이 더 많아야 한다.

결핍을 감추고, 연결을 감추고, 장면을 감춰야 한다.


그래서 생긴 여백과 사이에 무언가가 들어찬다.


긴장

의미

감응


독자는 소설을 침묵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오히려.


신춘문예나 문학 공모전에서 그 많은 소설을 심사위원이 어떻게 다 읽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들어서도 알고, 겪어서도 안다.


다 읽지 못한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예심에서 걸러지고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이야 꼼꼼히 보겠지만.


그들은 보이는 텍스트보다 보이지 않는 텍스트를 더 많이 읽어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매직아이'처럼 텍스트의 밑면을 응시하며 거기서 부양해 올라와야 할 텍스트를 자동으로,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그래서 그것들이 적절히 표면으로 떠올랐는지, 그 적절한 타이밍과 분량과 정도를 포착한다.(나는 심사위원이 아니니 들은 소리다)


즉, 브레송하고도 논조가 통하는 것 같은데,

'예술'에서 좋은 작품은


말해지지 않은 것을 잘 말하지 않는데 성공한 경우인지도 모르겠다.


소설 한 권을 읽었는데 책 무게 외에 손에 묵직하게 뭔가 남는 게 느껴지는 

책이 있다. 농담 아니고 있다. 뭐, 가슴이 그득해진다...는 오글거리는 멘트는 하기 멋쩍다.


진짜로 손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최근에는 존 밴빌의 <오래된 빛>이 그랬다.

이건 디지털로 책을 읽었을 때는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레송의 철학은 소설가에게 ‘신뢰하라’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자를 믿고, 그래서 텍스트의 여백을 믿는 것-.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배치하고 충돌시키고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만들어지는 '침묵' 속에서

생성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남겨두는가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다.

 그 부재의 미학 속에서 진실은 더 또렷해진다-.


소설가들의 산문집, 작법서, 또 스승님한테서도 골백번 들은 이야기를 다시 상기하게 됐다.


사운드트랙이 분위기를 창조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침묵을 발명했다”고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화는 관객이 눈을 감을 때 보이는 것을 닮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에서 그의 영화는 비로소 완결되며, 그의 영화와 말은 우리 관객 자신에게도 참으로 자유로운 여정이 되고 맙니다.


-출판사 소개글 중에서

A sigh, a silence, a word, a sentence, a din, a hand, the whole of your model, his face, in repose, in movement, in profile, full face, an immense view, a restricted space…Each thing exactly in its place: your only resources.

한숨, 침묵, 단어, 문장, 소음, 손, 모델의 전체 얼굴, 정지한 얼굴, 움직이는 얼굴, 옆모습, 얼굴 전체, 광활한 풍경, 제한된 공간... 

각 사물은 정확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유일한 자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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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6-28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민아님 리뷰 정말 잘 쓰시네요. 정말 이책 읽어보고 싶어져요. 왠지 모르게 민아님의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감정을 강요하지 말라는 말에도 공감합니다.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신간이네요. ㅋ

젤소민아 2025-06-29 12:51   좋아요 1 | URL
앗, 스텔라님, 어디서 쓸쓸함이 느껴졌는지요~~~. 속내를 보인 것 같아 부끄럽지만, 쓸쓸한 거 맞을 거예요. 글을 쓴다는 작업이 좀 쓸쓸하거든요. 이 좋은 주말, 내내 책상에 붙들려 있었어요. 만 이틀만에 바깥을 나가니 가을날씨처럼 선선한 거 있죠. 그렇게 덥다가~~. 브레송 감독은 말의 귀재기도 한 것 같아요. 창작과 예술에 영양제 같은 좋은 말씀이 너무 많네요~. 창작과 예술을 하는 사람/향유하는 사람 모두에게요. 더위에 건강 조심하셔요, 스텔라님!

페넬로페 2025-07-04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ella님 말씀처럼 매번 젤소민아님의 글에 감명 받습니다. 글을 잘 쓰신다는 것도 팍팍 느끼고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저도 영화나 책이 모든 것을 다 주는 것보다 여백과 생략, 침묵을 좋아합니다.

젤소민아 2025-07-05 01:58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도 이달이 리뷰 당선작 되셨지요? 저도 읽은 책이라 더 반가웠어요. 자주 교류해요~.
 
본심
심재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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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춘문예 등 문학 공모전에서 낙선한 작품으로 묶은 소설집이란다. 그러나 ‘실패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심사평이 같이 실렸다는데 그렇다면 결선이나 최종경합에 오른 작품들이다. 말하자면, 범작은 넘는. 그 틈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당선작으로부터 배울 것보다 많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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