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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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전에 발표된 소설이고 한글 번역본도 있었다.

절판됐지만.


예전에 이 소설을 읽을 때는 내가 소설을 쓰지 않을 때였다. 

그냥 커트 보거네트가 좋아서, 아니 신기해서 읽었다.


그런데도 소설 작법에 무지 유용하겠다, 싶었던 책이다.


이 소설은 쫀쫀한 줄거리 같은 걸 늘어놓고

캐릭터의 삶이나 인생을 보여주는 시도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커트 보네거트는 자타공인 포스트모던 작가니까.

나는 포스트모던을 '실험적'이라고만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의 소유다 보니

이 소설의 무엇이 포스트모던인 지는 잘 모른다. 


그냥, 참 희한한 소설이네 &&&&


없는 줄거리를 캐내려 기를 쓰다가 지쳐 나가 떨어진 내게 

작가가 "자, 여기." 하며 적선하듯 던져준 게 있었다.


인물의 삶이나 인생의 구구절절함 대신 말이다.


그 인물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지-.


작자는 소설 속으로 직접 뛰어가 인물 행세를 하며 온갖 간섭을 하고 오지랖을 부리며

종횡무진 쏘다닌다. 그러다 마지막에 심지어는 또 다른 인물에게 스스로를

'창조자'라고 커밍아웃한다.



이쯤되면 싫든 좋든 운명처럼 떠올리게 되는 또다른 소설이 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그럴 것 같다.


글치.


칼비노의 <어느 겨울 밤 한 여행자가>


이 소설에서는 인물이 독자더러 '당신'이라고 부르며 온갖 개입을 유도한다.


물론, 이런 쌩뚱맞음과 어이없음은 '포스트모던'이라서 용서받을 수 있다.


소설에서 작가와 독자는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

결코, 초대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들 아닌가 말이다.


절대로 간단히 말해서는 안 되는 소설들이지만

용기 내서 간단히 말하자면,


커트 보네거트는 '쓰는 행위'에 관해 말하는 면이 있고

이탈로 칼비노는 '읽는 (+쓰는)'에 관해 말하는 면이 있다는 소리다.


소설에서 금기시된 존재인 작가와 독자를 과감히 끌어들여...


여기까진 비-포스트모더니즘 소설가들도 '메타픽션'틱하게 풀어간 게 많지 않으니까.


그런데 작가와 독자를 끌어들여 소설을 쓰고 읽는 행위 자체에 관해 다루고

그걸 주제화한 경우는 생각해 내기가 쉽지 않다. 


소설가가 소설 쓰는 일 자체를 놓고 고심하는 소설은 몇 있다.

키리니의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머리로만 책을 쓴 남자> 같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누군가를 끌어 들였는데...가물가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인물(토마스 같음)을 자기 모습을 보는 것처럼 썼던가.


아무튼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에서는 인물이 자신의 삶이 허구라는 걸 알고 좌절한다.

이는 글을 쓴다는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다르게 왜곡하거나 어떤 식으로 규정짓는 방식일 수 있다는 걸 고발한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소설 쓰는 소설가라는 게 또 아이러니)


<어느 겨울 밤 한 여행자가>는 열 편의 소설이 나오지만 모두 감질나게 '초반'만 보여준다.

독자 입장에서는 감질나서 몸부림 날 지경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를 통해 독서란 것의 정의를 새로이, 혹은 자기 식으로

내리고 있는 것 같다.


독서는, 작가가 무언가를 제시하고 

그 완성은 독자가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적하고 탐구하면서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말하자면, 독서는 미완으로 시작하고 미완으로 펼쳐지다가 미완으로 끝날 건데

'완료'는 당신(독자)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다소 무책임하고 모질다고 생각돼 살짝 기분 나빠지려고 하는. ㅋ


아무튼 이런 연고로,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두 권 다 꼭꼭꼭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지금쯤 '구매'에 마우스를 갖다대고 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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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재에 요즘 리뷰를 자주 쓰는 편이지만,

거의 쓰지 못했다.


어차피 읽는 책이니 독서로그 쓰자는 기분으로, 날 위해 쓴다.

좋아요를 눌러주는 이름은 기억하려 애쓰고

댓글 남겨주는 분은 기억하려 애를 쓰지 않아도 기억된다.


그러고 보면, 기억하려 애쓰는 자체보다

저절로 기억하는 게 더 큰 마음인 것 같기도 하고.


알라딘을 이용한지 십수년이 지났는데

오늘에서야 알라딘 서재 '친구 사이' 되는 법을 알았다.


서재관리에서 팔로잉/팔로워를 누르면

내가 친구신청한 사람이 나오고


팔로워를 누르면 내게 친구신청한 사람이 나온다.


내가 친구신청한 사람은 까먹었다 치더라도(그걸 다 외우고 있을 순),


내게 친구신청한 사람들한테 응답을 못했다~~~~~~~~.


내게 친구신청한 지 벌써 몇 년 된 경우도 있었다.


몇 년 묵은 답을 뭐라고 생각할지.


무심하거나 거부한 게 아니라(그럴 이유가 없지요!)


제가 기계치라 그래요~~~~~~~~~.


나는 도통 기계가 싫으다.


'친구 신청' 수락하고 나도 거기 그 서재에 가서 뭘 해야 친구 사이가

제대로 되는 건지, 또 그 고민 하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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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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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책이다. 작가의 의도를 한 줄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하느님, 감사합니다‘ 할. 제발트의 소설은 단 한 단락도 이해하지 못했다. 텍스트만 이해했다. 제발트의 소설을 전부 이해할 수 있다면 난 훌륭한 작가가 되어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나의 꾸준한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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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와 열한 개의 우물 b-SIDE 1
신우승 지음 / 비(도서출판b)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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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작품을 구성하는 기호만을 소리 내어 읽음을 뜻하지 않음은 자명하다. 이제 막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어린아이가 보르헤스의 소설을 큰 소리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작품 읽기’가 아니라는 점을 안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을 뜻하며, 그 ‘무언가’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독자가 작품에서 읽어내고자 하는 무언가를 작가의 의도라고 이해한다. 독자는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독자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의도하는 바를 임의적 개입이나 주관적 판단 없이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포착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예컨대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을 통해 일제 치하에서 조선 민중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사는지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자 했다. 이것이 현진건의 의도라고 할 때, 「운수 좋은 날」을 읽고 나서 ‘김 첨지는 가정 폭력범인데? 죽은 아내의 따귀를 때려?’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이 반응은 작가의 의도를 포착하지 못한, 따라서 작품을 잘못 읽는 행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작가의 의도 파악을 작품 읽기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일은 독서의 능동성을 약화하고, 작품에 대한 건전한 평가를 차단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통한 작품의 다각적 확장을 막지 않는가? 작가의 의도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 자신의 입장에서 작품을 새로이 읽는 일은 작가의 의도를 포착하는 일 이상으로 중요하며, 이렇게 새로이 읽을 때 원래의 작품은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된다.”


(알라딘 책소개 인용문 중에서)


완전히 공감하면서 읽어 내려오다가, 뒤로 가면서 조금 흠...


작가의 의도 파악을 작품 읽기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일은 독서의 능동성을 약화하고, 작품에 대한 건전한 평가를 차단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통한 작품의 다각적 확장을 막지 않는가?


작가의 의도 파악만을 위해 소설을 읽으면 안 될 것이다.

당연하다.

그런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은 정말정말 중요하다.


작가가 왜 그런 인물을 내세웠고, 왜 인물들은 별 것도 아닌 것을 놓고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독자는 그걸 이해해 보려 애써야 한다.


그걸 다 모아 놓으면 결국, '작가의 의도'로 모아진다.


작가의 의도에는 그 소설을 쓰고자 결심하는 첫마음이 담겼고,

그 소설을 끝내 써나가는 소신이 담겼고,

그 소설을 종내는 완성하는 고집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게 바로 '이유'. 

그 소설이 쓰여져야 하는 이유. 


나는 소설 읽기에서 그 일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만을 위해 읽지는 않지만, 그게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는 믿는다.


그것만을 위해 읽는다,와

그걸 핵심으로 삼는다,는 아주 많이 다른 말이다.


저자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으면

[독서의 능동성을 약화하고, 작품에 대한 건전한 평가를 차단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통한 작품의 다각적 확장을 막지 않는가?]하고 우려하는 것 같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공감도 간다. 


작가의 의도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 자신의 입장에서 작품을 새로이 읽는 일은 작가의 의도를 포착하는 일 이상으로 중요하며, 이렇게 새로이 읽을 때 원래의 작품은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 말도 사실, 아주 중요하다.

보르헤스의 소설에 독자 나름의 입장에서 작품을 새로이 읽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말 그대로, 원래의 작품이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고 싶은 게 있다.


그 소설은 원래의 작품보다 새로운 작품으로 꼭 거듭나야 할까?


보르헤스의 소설 한 편이 품은 힘을 백분의 일이라도,

독자로서 나눠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소설을 읽을 때 늘 이런 생각을 한다.


그 소설이 나를 관통해, 내 나름의 입장에서 새로이 읽어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되길...


그다지 원치 않는 것 같다.


무슨 말인지도 알고, 그게 의미 있다는 것도 안다.


다만, 나는 그걸 그렇게 바라면서 소설을 읽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오늘도 내 책상에 소설 한 권이 올려져 있다.


댈러웨이 부인


나는 댈러웨이 부인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먼저 알고 싶다.

작가의 생각에 닿고 싶다.


소설을 읽으며 왜 내 나름의 입장과 생각을 펼치기엔 

소설이 내겐 너무 높고 크다.


인물의 소소한 감정이나 상황과 사건에 대한 촌평은 물론, 끊임없이 하면서 읽는다.


그러나 소설 '작품' 앞에서 내 나름의 입장과 생각을 펼쳐놓으며 

'작품에 대한 건전한 평가를 차단하'지 않으려 노력할 생각은 별로 없다.


나는 그럼 깜냥이 못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저,

작가의 의도를 백만분의 일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면,

하느님, 감사합니다! 할 일이니까.


(그 외 소설 독법과 관련해 좋은 문장도 많고,

보르헤스의 단편을 풀어준다니~~카트에 안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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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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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소설의 문장마다 기억하긴 힘들다.

온갖 미디어에 중뿔나게 소개되는 명문장조차 단 한 줄도 외우기 힘들다.


우리가 기억하는 건, 그냥, 소설의 줄거리다.


그래도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 

어디 가서 소설의 몇 문장-명문장 아니고, 몇 문장-은 외워서 읊는 척도 하고 해야 할 것 같아

외우려고 해 봤다. 머리가 시멘트처럼 굳었나보다. 안 된다.


그래서 외우기를 포기하고 매달린 게 밑줄이다.

밑줄을 긋기 위해 온갖 펜을 동원했다. 


(요즘 내 독서의 밑줄긋기를 맡아주기 위해 엄선된 애들)


펜을 동원하다 보니 펜에 관해 쫌 알게 되었다.

펜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팬 말고, 펜-.


내 책상을 볼 기회가 있는 사람들은 문구점이냐, 필기구 공장 차렸냐,

하는 말들을 잊지 않고 한다. 난 칭찬으로 듣는다.


뭔 이야길 하다가 펜으로 흘렀나...


아, 밑줄긋기.


문장을 외우지 못해 밑줄을 긋다가 위기에 봉착했다.

어느 책의 어디에 밑줄을 그어놨는지 당췌 알 길이...


책을 일일이 열어봐야만 그어놓은 밑줄을 찾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또 짱구를 굴렸고, 그래서 찾은 방법이 '머리띠' 끼우기다.


책갈피 위에 '머리띠'를 끼우듯  head tab을 하나 붙이는 거다.


끄트머리에 메모를 적어서. 

이렇게.



이게 얼마나 유효한지 모른다.


뭘 찾아야 하는데 어떤 책에서 봤더라???


그러면 책꽂이로 달려가 이 '머리띠'를 훑으면 된다아!!


<미겔 스트리트>에서 그렇게 머리띠를 끼워놓은 문장이다.


내가 미겔 스트리트로 돌아와서 처음 만난 사람은 해트였다.

그는 팔에 신문 한 부를 끼로 평발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카페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손짓을 하며 그에게 소리쳤다.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나는 네가 이맘때쯤 하늘 위에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실망했다. 해트가 이렇게 냉랭하게 맞아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영영 이곳을 떠나기 위해 가버렸는데도 모든 것은 이전과 같았고

나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실망했던 것이다.


289p)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나'가 어디 다른 나라로 떠났다가 돌아온 게 아니다.
어디 다른 나라(런던)로 가려고 공항으로 갔는데 비행기가 6시간 연착돼서
다시 미겔 스트리트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말하자면, 엄청 민망한...

나도 이런 적 있다.

나도 '나'와 꽤 비슷한 상황이었던 때.
다른 나라로 갈 때.

가족, 친구, 친척 다 모여 울고불고 콧물 짜고 했더랬다.
나는 그들 곁에 내가 있던 자리가 받을 타격을 상상하며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았더랬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여권을 빼놓고 택시를 탔고,
나는 곧 죽을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택시를 돌렸다.

이미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고 그랬는데,
내가 다시 돌아가자 내 자리는 이미 거기 없었다.

내가 사라지기 직전까지는 내 사라짐에 대해 하늘 무너지던 사람들이
나의 귀환에 "너, 왜 또 왔어?" 였다.

두번째 이별은 밖에 나와 보지도 않드라...

예전에 지방으로 전보나서 떠나는 직장 동료와 뜨거운 작별 회식자리에서
그 동료가 먼저 뜰 때도 그랬다. 손수건 없이는 볼 수 없는 눈물의 허그와 울먹임.

그러고 먼저 나간 그 동료가 10분 쯤 우산을 두고 왔다며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린 어깨동무를 하고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부르느라 
그 동료가 왔다 간 줄도 몰랐다.

나중에 우산이 있다가 없어진 걸 알고 알았다. 

나는 실망했다. 해트가 이렇게 냉랭하게 맞아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영영 이곳을 떠나기 위해 가버렸는데도 모든 것은 이전과 같았고

나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실망했던 것이다.


289p)


내가 이 문장을 외우고 밑줄 긋고 머리띠를 하고 난리치는 건

이 문장 속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 얼마나 실망했던지.

나는 영영 그곳을 떠나기 위해 가버렸는데 모든 건 이전과 같았다.

나의 부재를 가리키는 건, 끔찍하리만치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나를, 50여년 전에 쓰여진 문장 속에서 만난다.

내가 언어화하지 못한 나, 내 마음, 내 처지, 나의 무엇-.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태어난 소설가에게 기댄다.

나의 언어를 좀 찾아달라고.


그게,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가진 위력적인 힘이다.


내게 기댈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의 언어를 좀 찾아줘어어-.


내가 오늘 단 한줄의 소설도 쓰지 못한 이유.

내 언어부터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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