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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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쯤 이 책이 나왔다. 

정지아 선생님의 소설이다. 

그녀와 인사동 어딘가에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녀가 단풍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주변 사람이 단풍을 보고 느꼈다던 감수성을 얘기했었는데… 그 자리가 선연한데도 이야기는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다. 죽을 때는 그 얘기들도 한번에 다 지나갈까. 예전에 토끼 한 마리를 키우다 아파서 그 토끼를 내가 제대로 돌보지 못해 그런가 밤새 간호를 하다 숨을 못 쉬는 토끼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숨을 쉬게 해야 하나 했을 때 토끼가 온몸을 비틀었다. 그때 토끼와의 처음부터 그때까지의 모든 시간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구성이나 주인공은 전혀 달랐으나 그 이야기로 소설을 썼었다.

학교 소설 수업시간에도 그녀가 강의를 했던가. 기억이 희미하다. 그녀가 교수님석에 앉아있었던 것도 같고, 후배들 수업을 했던 것을 내 기억이 만들어낸 것도 같다. 빨치산의 딸을 썼다는 그녀, 그녀의 글을 좋아해서 '봄빛' 같은 작품집을 사서 읽었다. 계간지에 작품이 실려있으면 꼭 보곤 했다. 

그녀의 이 소설이 몇몇 유력 인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명해졌다고 했을 때, 내가 예전에 찜뽕해둔 누군가가 이제야 빛을 발하는구나, 기뻤다. 우스운 얘기다. 글을 쓰겠다는 나는 여전히 습작생 신세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데도 이미 소설가 반열에 올라 교수인 그녀가 대중들에게도 유명해지니, 기쁘다니, 그럼에도 기뻤다. 언젠가 그녀의 글이 빛을 발하기를, 그 가치를 세상이 알아봐주기를 바랐다. 그녀의 단편소설 중, '그래, 시상에 나와봉께 좋은가?'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그 말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다시 찾아 읽어봐야겠다. 

아버지 사고 소식이 들려오던 순간부터 죽음까지, 병원에서 장례식장까지, 산재로 그의 사고를 마무리짓기까지 몇 달의 시간은 버거웠다. 그전의 나의 삶부터 현재까지, 실은 그 죽음 속에 여전히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죽은 뒤의 결심과 그 결심을 약간 철회하였음에도 그때의 의지 같은 것은 여전히 내게 있기 때문이다. 혹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결혼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겨우 그러고 싶은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게 돼 인연을 맺은 것도, 그의 죽음이 빚어낸 시간의 연속 속에서 지금을 바라보게 되는 측면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글로 쓴다면, 나의 아버지의 죽음을 글로 쓴다면, 투철한 의식을 가진 이도 아닌, 결국 노동자로 생을 마감한 나의 아버지, 그의 죽음 속에 그의 한 생애와 한국사가 담겨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 나 또한 나의 인생과의 화해를 위해 그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신파 없이는 인생은 쓰여지지 않는다'는 한 문장을 쓸 수 있을 뿐인데, 그것은 내가 여전히 내 생을 동정하는가, 하는 질문에 닿는다. 그녀 역시 빨치산의 딸로 발목 잡힌 인생, 교도소에 간 아버지, 그의 주변인물들과의 관계들과 화해하는 그 죽음의 길목을 소설로 쓰며 죽음이 부활이며 화해나 용서를 위한 하나의 관문 같은 것이라 하였듯, 한 인생의 질곡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여정 속에서, 그의 삶에 대해 가졌던 온갖 감정들이 풀려나는 그 응어리를 한 편의 소설로 썼듯,… 결국 소설은 심장을 꺼내야만 쓸 수 있다는 깨달음을 근 20년 전 좋아했던 소설가의 장편소설, 그녀의 생애의 심부와도 닿아있을 소설을 보며 오랜만에 다시 떠올렸다. 

그간 나는 심장을 꺼내 글을 썼던가, 심장을 꺼낼 용기, 그녀는 아마 첫 소설부터 그 심장을 꺼낸 것 같은데, ...

20년 동안 헤매던 세상이 한 줌 같기도 한데, 그 걸음걸음 헤매임도 떠오르고, 언젠가 집 근처 대학인 상명대 도서관에서 그녀의 소설을 보고 너무 좋아했던 기억도, 그때 만나던 사람도, 선연하여 20년 전 같지 않기도 한데, 금세 시간이 이리 흘러 눈앞에 그려질 듯도 한데 모두 연락할 수 없을 만치 멀어졌으나, 그녀가 여전히 좋은 소설을 쓰고 있고, 그녀 또한 마음에 품은 것들을 이리 소설로 펼쳐보이며 살고 있구나, …



사람은 어떻게든 세상과 만나야 한다. 

노동으로 만나든 글로 만나든 무엇을 하든.

소설을 읽고 든 또 하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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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 P197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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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갑자기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자식에게 찾아온다. 그것이 자식의 운명이다. 인생은 꼭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 없이. 불만도 연민도 없이 말도 논리도 없이. 글썽거리는 눈물 따위 없이. 단 한 순간에. - P308

일행들이 화장실에 가서 둘만남았을 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강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 인생은 아름다운 거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걸 영영 알지 못할까봐, 그게 가장 큰 걱정인 것처럼 그렇게 반복하셨다. - P322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있다는 것을. - P331

그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더듬더듬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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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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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이가 녹는 동안에도 지구 어딘가는 고통에 신음한다. 
전쟁은 끊이지 않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 속에서 남겨져야 한다. 
 
'살아남의 자의 슬픔' 
브레히트의 유명한  제목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한강의 '  송이가 녹는 동안'
권여선 '이모'
김애란 '입동'
황정은 '웃는 남자'
관심있는 작가들의 작품 4편을 읽었다.
오랜만에 한국 단편소설을 읽었는데한강의 소설 '  송이가 녹는 동안' 아주 좋아   읽었다.
  송이가 녹는 동안조차 지구는 고통이 없는 때가 없다는 지독한 사실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지독한 사실에 예전에 엄청 괴로워했는데
 소설은 정면으로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언제나  고통으로 비켜서있을 수밖에 없는 작가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고통으로 비켜서있다는 희안한 고통.)

 
 소설을 읽으면 하는 생각은
 이렇게 소설은 쓸쓸하고 슬플까 이다
세상은 남의 슬픔에 관심이 없고
나의 성공과 행복과 손해보지 않는 데만 관심이 있으니
소설이라도 그래야 하는 걸까
세상에는 이런 마음들도 있다고 알려주듯.
 
생각해보면 서사는 전통적으로 그렇다.
그리스비극은 종종  고통을 생의 표지판처럼 떠올리라 하였지 않았나.
 
 
4편의 소설은 모두 죽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죽은 자들이 때로 지금의 삶을 두드리는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직장 동료이자 친구가아이가애인이피붙이는 아닌  친척인 이모가 죽고  뒤의 이야기.
 
언제 죽음은 우리를 찾아올까
분명 죽음과 삶은 가장 극명한 경계인데도 불구하고
죽음이 삶을 붙들 
그것은 삶이 그만큼 경쾌하지 못할 
'애도'하지 못한 마음을 붙들  되는  아닐까.
아직 애도를 끝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
 
 
 
세상은 고통과 잔혹이 가득하고 오히려 착한 사람들이 먼저 죽는  같기도  현실이나
죄없는 아이가 죽었음에도  보험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제가 맞물려있는 삶이나
죽음이라는 불가해를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이나
쓸쓸한 생이나 그런 것들
 
 불가해함에 대해 소설은 토로한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여전히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 고통으로부터 비켜선 채로이지만)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  현실이 실은 아주 불가해하다는 
그런 세상을 우리가 겨우 살고 있다는 
그런 생각을 오랜만에 하며
나는 사람들이 소설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오랜만에 생각했다.
 
 
10  한국소설과는 확실히 달라져있다.
10  읽던 소설은 (박민규나 김애란이 떠오른다)
팍팍한 현실에 대해 얘기했지만
살아남은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하지는 않았었는데,
살아남은 자책감에 시달릴 정도로
지금  현실이 지독해져가고 있다는 경보가 아닐까?




2016. 2. 29.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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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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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장강명 작가 책을 두 권이나 다 봤다.

거의 앉은 자리에서 독파 수준이다.


지난 주에 친구집에서 본 책은

<한국이 싫어서>


제목 백만 프로 공감

엎드려서 두, 세 시간 보니 다 본 듯 해서

이렇게 읽게 하는 힘은 뭐지 궁금해서


일요일 새벽 12시부터 5시까지 본 책은

<호모 도미난스>


그래서 오늘 엄청 힘든 하루였다ㅠ


예전에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웃기지만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나 <크루서블>(작가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이럴 수가. 유명한 아자씨인데...)

이런 책들을 밤에 앉은 자리에서 다 봤다.

그리고는 짝짝짝 박수를 쳤던 기억이 여러 번.

재밌어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고 읽다 보면 빠져들어서

그랬다.


<호모도미난스>는 이우혁의 <퇴마록>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꽤나 열심히 읽었는데

자율학습 시간에 읽다가 사회 선생님한테 이런 쪽지를 받았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다면 모를까 이런 책을 자율학습 시간에 왜 읽는 거니?'


그때는 무슨 이런 고리타분한 말씀을

이라고 생각했지만

읽어보니

도스토예스프키도 재미있다.

<죄와 벌>은 어느 살인자의 참회 이야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살해한 자식은 누구일까요

정도로 요약된다.

내용 자체는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여기 도덕적인 문제가 개입해 들어가며 주제가 확장되는 형식이다.

<퇴마록>은?

정말 열심히 읽었음에도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충분히 다양한 역사적 고리들이나 맥락들이 있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지만.


왜 <호모도미난스>를 읽고 나서 떠오른 게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퇴마록>이었을까?


소설은 몇 번의 반전이 있다.

사건 해결의 핵심을 이루는 반전이다.


전체 내용은

내가 말하는 대로 따르는 마법(대신 전염병성 바이러스)를 얻은 자들의 이야기다.

과연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가 이 소설의 중심


지배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배 욕망을 자제시키는 데 능력을 쓰는 사람도 있다.

주인공은 선한 자

그가 어떻게 호모도미난스가 돼서 맞서 싸우는가 정도로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맞서 싸우다 부딪히는 몇 번의 딜레마에서

반전이 중요하게 기능한다.

주인공 시현이 힘을  얻게 된다든가

쿤이 알고 보면 이쪽 편이었다는

반전이 그 주다. (이건 대박 스포일러이무니다ㅠ)

 

어딘가

영화적인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영화적인 설정은 무엇이고 문학적인 설정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들어

까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페스트 역시 급박한 전개를 하면서도 이런 반전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서다.

아직 다시 안 읽어서 뭐라 말은...)

어쨌든

실제 인생은 이런 반전이  없다

흐르는 대로 흘러간다.

내가 쌓은 탑이 나에게 무너지고

내가 쌓은 탑을 누군가 우러러 본다.

그러니까 실제 인생과는 다른 스펙타클

이런 측면에 '영화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 같다.

영화는 두 시간에 내용을 해결하기 위해 '반전'을 잘 사용한다.


그럼에도 소설은

흡입력 있고

어떻게  궁금하다.


그러나 소설을 덮어도 실은 상관없다.

 인생과는 무관하다.

(밤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덮어도 상관 없구나.)

소설 속에서 누군가 말하는 대로 하건 말건...

나는 내일 회사에 가야하고

아마 회사에서 내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고

고무줄처럼 늘어진 일상 속에서

끊어지지 않기 위해 버팅기는 힘 정도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은 이유는?

덮으면 다시 읽기 힘들다

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덮고 일주일이 지나면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설정은 휘발되고 인물은 누가 누군지 헛갈리므로

영화관에서 우리를 가둬놓고 어떤 설정인물들을 주입하는 것과 달리

소설은 덮으면 끝이다.

페북을 보고 네이버를 보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소설은 덮인 채로 그 자리에서 멈춘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책이 팔리지 않는 이유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부분의 소설은

현실과의 관계성은 떨어지고

대단히 미적인 경우도 있고(<눈에 대한 백과사전>이 그런 게 아닐까)

내 현실은 그런 것들 속에서 수영하다가는

물에 빠져 죽기 십상이다.  


어쨌든

이 책은

결국 끝까지  읽었다.


다 읽고

김진명퇴마록의 이우혁 같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주인공의 캐릭터 면에서 어딘가 닮았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던 한국 문학은 이제 장강명을 받아들인다.


 이유가 뭘까


물론 그런 한국문학의 보수성을 몹시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약간  아쉬워지는 느낌도 있었다.


이제 그런 시대는 가버린 건가

그런 탐미적인 문장들이 독자를 사로잡던 시대는

(아마 다시 오지 않을  같다.

요새는 차라리 에세이집을 보는 듯 하다. 잠깐 폈다가 덮어도 내용전개를 떠올릴 필요 없는.)


한편으로는 소설의 본래의 기능

이야기에 집중하는

그래서 다음에 어쨌는데

라는  기능에 집중하는  수도

라고 생각했다.

 


<한국이 싫어서>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다.   밀접하게

지금  현실

말이다.

지하철에 낑기는 일상 속에서 존엄은 무너지고 모두가 그렇게 살며 

도저히 아무리 해도 이 일상은 내 힘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래서 다들 떠나고 싶어 하는

이 현실

말이다.

 

(이러니까 호모도미난스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았나 싶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치열한 경쟁 현실이 호모도미난스 같은 인종을 만들어낸다는 설정은 누구나 공감할 법하다.)

소설 읽다가는 너 물에 빠져 죽어

라는 이 한국 사회 현실을 떠나는

나의 이상을 대신 실현해주는 한 주인공이 <한국이 싫어서>에 나온다.

카타르시스 파바박

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호모도미난스>도 그런 측면이 있구나.

내가 하라면 하는 사람들. 그게 뭐든 이유도 조건도 없이.


이 내 맘대로 되는 것 없는 세상에

장강명 소설이 잘 읽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럼 나는 왜 옛날에 '마의산'이며 '크루서블'을 밤새서 읽었을까.

그때는 좀 더 여유로운 나날이었나.)





2015년 8월 10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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