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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둥이 생각


 
손택수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 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 누우신 아버지의

약봉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날 아침 멀리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지 달디달게 핥고 있는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나를
 
다만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는 것이었다
 
개장수의 오토바이에 끌려가면서

쓰윽, 쓱 혀보다 더 축축히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고만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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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1 교과서에 이 시가 나왔다. 요즘 공부하는 데서 같이 본 손택수 시인이라니, 와 반갑다 하면서 애들하고 이야기를 하며 "정말 귀엽지 않아 " 말했다.

아이들이 모두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이물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넌 어떤데 하면서 애들에게 묻기 시작하니

애들은 슬프다고 이야기 했다.

왜?

그럼 너라도 이 흰둥이를 풀어줬을 거야?



아이들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들 그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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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밑이 검고 핼쓱하다


누군가는 죽여달라고 외쳤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유체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


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아 있다

 

여자들은 남자처럼 힘이 세어지고 눈빛에선 쇳소리가 울린다


대개는 이유도 없는 적개심으로 술을 마시고


까닭도 없이 제 마누라와 애들을 팬다


 

아침에는 십팔평 칸칸의 집들이 밤새 욕설처럼 뱉어낸


악몽을 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운명도 팔자도 모르는 화단의 꽃들은 표정이 없다


 

동네를 떠나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전보다 조금 더 살림을 말아먹은 아내와


그들을 자식으로 두고 죽은 노인들이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교과서를 족보책처럼 싸짊어지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아파트는 서서히 눈에 불을 켠다


이빨이 가려운 잡견처럼 무언가를 갉아먹고 싶은 아이들을 곁에 세워놓고


잘사는 법과 싸움의 엉성한 방어자세를 가르치는 젊은 부부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밤이면 아파트가 울고, 울음소리는


근처 으슥한 공원으로 기어나가 흉흉한 소문들을 갈기처럼 세우고 돌아온다


새벽까지 으르렁거린다


 

십팔, 십팔평 임대아파트에 평생을 건 사람들을 품고


아파트가 앓는다, 아파트가 운다


 

아프다고 콘크리트 벽을 쾅쾅 주먹으로 머리로 받으면서 사람들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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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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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비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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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박남철 

 

 

-마치 한 치도 크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20살에 좋아하던 시를 좋아하고 있다.  

게으름이란 레파토리마저 지겨워질 무렵 

여전히 나는 짐노페디를 듣고 앉아서 

나는 왜 나인가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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