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마르 열린책들 세계문학 173
나기브 마푸즈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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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어느 펜션. 미모의 한 여성과 여러 남자들. 곧 일어나는 살인 사건. 무언가 엄청난 진실이 숨어 있을 듯했지만 의외로 싱거운, 게다가 살짝 공감도 어려운 살인 동기가 작품을 좀 맥빠지게 한다. 화자를 바꿔가며 이야기하는 설정인데 그 목소리가 한사람처럼 느껴지는 것도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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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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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사기 위해, 시를 읽기 위해 서점을 찾은 일이 얼마 만인가.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 시대, 시집이 발간되어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 같은 시대. 나조차도 시를 읽지 않는 이 시대. 최승자의 시집 발간 소식은 언제나 내겐 기적과도 같다. <쓸쓸해서 머나먼>에 이어 <빈 배처럼 텅 비어>까지...... 한때는 그녀의 시를 다시는 읽을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몇 년을 주기로 그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새벽에 비가 내렸고, 갑자기 센티멘탈해진 나는 최승자의 시집을 펼쳐들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시인이 되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고,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오는 시선 시리즈 전권을 사 모아 방 한편에 두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시선 집에 눈길이 가는 일이 드물어졌고, 어느 북페스티벌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이 권당 천 원에 팔리는 기가 막힌 광경을 목격했어도 더는 시집을 사는 일이 없어졌다. 아주 가끔 드물게 시에 대한 허기증으로 시를 찾더라도 그것은 백석이나 정지용, 김소월, 윤동주처럼 그 옛날 시인들의 시였지, 현대시는 아니었다. 최승자도, 황지우도 기형도도 더는 읽지 않게 된 요즈음. 최승자의 <쓸쓸해서 머나먼>은 이런 나를 다시 현대시의 세계로 불러들였다. 아니, 어제 내린 비 때문이었을까.

이 시집은 언제 어떻게 읽어야 할까? 아주 늦은 밤, 또는 이렇게 비가 내리는 새벽, 노란 스탠드 불빛 하나에 의지해 시집을 읽는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삼십세’, <이 시대의 사랑>)’고 말하던 그녀가 이제 마흔, 쉰을 훌쩍 넘겨 돌아왔다. 그녀는 그동안 많이 아팠다고 한다. 그 아픔의 흔적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쓸쓸해서 머나먼>에는 ‘세월’이나 ‘시간’ ‘세계’라는 단어가 무한 반복된다. 투병을 하며 창가에 서서 세상을 한없이 바라보며 써내려 간 기록으로 읽힌다. 아픔의 무게가 컸던지 죽음의 저편까지 넘나들다 살아 돌아온 사람의 관조랄까, 생에 대한 조금은 달라진 시선도 엿보인다.

예전 그녀의 시는 시니컬함, 냉소, 위악, 절망 그러면서도 뜨거움이었다. 여성적인 말랑함이라고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남성적인 목소리. 나는 그런 그녀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그런 거친 투박한 열정, 냉소에 젊음이 있었고 반항과 뜨거움이 있었다. 그런 그녀를 <쓸쓸해서 머나먼>을 통해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최승자 그녀도 늙는구나. 아프고 나니 삶에 대한 자세도 시선도 달라지는구나, 이런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런 세월의 흔적과 그녀의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바라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함께 나이를 먹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일까?

최승자 그녀도 자신의 이런 변화를 아는지 이렇게 노래한다. ‘내 시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 오랫동안 내 시밭은 황폐했었다 / 너무 짙은 어둠 (…중략…)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내 시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쓸쓸해서 머나먼>)처럼 황폐했던 시밭에서 조금은 따뜻한, ‘포오란’ 집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녀 자신과 그녀 주변에서 머물던 시선이 좀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인 면모도 만날 수 있다.

이런 관조적인 시선을 얻게 된 그녀는 시집의 말미에서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의 서두 시인의 말에서는 ‘이제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아프고, 그 아픔의 시간을 통해 시를 쓰고, 비로소 깨어난 그녀. 나이를 먹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은 조금 달라지었을지언정 여전히 아이처럼 팔랑거리고, 소녀처럼 포르르 할 수 있는 그녀의 시를 만날 수 있어서 무척이나 반갑다.

그녀의 작품을 다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뜨겁게 감사한다. 비내리는 새벽 시집을 펼쳐 읽는, 잊고 지내던 기쁨을 다시 알게 해준 그녀, 최승자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아직 읽지 않은 그녀의 또다른 시집 <빈 배 처럼 텅 비어>가 책상 위에서 살포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일찌기 나는’, <이 시대의 사랑>, 1981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오.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즐거운 일기>, 1984



 
참 우습다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참 우습다’, <쓸쓸해서 머나먼>,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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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0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10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6-12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문단은 여성 시인(‘여류 시인’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어서 이런 표현을 쓰면 안 되지만)의 평가에 야박합니다. 그리고 시인의 근황을 모를 정도로 너무 무관심합니다. 최근에 박서원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 ‘최측의농간’ 출판사에 재출간되었어요. 박서원 시인이 201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4년이나 지나서야 시인의 부고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잠자냥 2017-06-13 09:46   좋아요 0 | URL
네 참 맞는 말씀입니다. 박서원 시인 소식은 저도 몰랐는데 함 안타깝군요....

Falstaff 2021-12-28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2017년, 햇수로 벌써 5년 전, 며칠 있으면 6년 전 페이퍼네요. 요새 최승자, 최승자 해서 검색했더니 이 글이.
전 <쓸쓸해서 머나먼>을 읽고 평을 좀 야박하게 했었군요.

˝개인사에도 불구하고 최승자는 내게 시인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그녀에게 이별을 고한다. 안녕히 가시라. 그동안 오랜 세월 참 고마웠다. 당신을 찾는 일은 이제는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ㅋㅋ 제가 뭐가 잘났다고 이렇게 시건방지게 얘기했었을까요. 책 읽고 소감을 남기는 일이 가끔은 재미나네요.

잠자냥 2021-12-28 12:29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렇게 또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요즘 최승자 시인 산문선이 재출간되면서 그이의 이름이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라도 최 시인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뭐 그렇습니다.
저는 이 페이퍼에서 <빈 배 처럼 텅 비어>를 곧 읽겠다고 해놓고 여태 안 읽었네요. ㅎㅎㅎ

가끔 시건방 떤 페이퍼 다시 보면 재미나긴 해요. 저도 오늘 그레이엄 그린하고 종말을 고할까... 뭐 이런 페이퍼를 남기긴 했는데요. 나중에 보면 웃기겠죠. ㅋㅋㅋㅋㅋ (아, 오늘 제가 올린 그레이엄 그린 <사랑의 종말> 리뷰는 폴님은 읽지 마세요. 스포일러 만땅입니다.)
 
하이타니 겐지로의 생각들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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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담백한 문장으로 모든 생명의 존엄성, 자연의 위대함, 인간다운 인간을 기르는 교육의 중요함 등을 말한다. 그저 공허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것은 하이타니 겐지로 자신이 몸소 그런 삶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 어느 교육자의 삶 앞에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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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식총서'는 100페이지 남짓한 작고 가볍고 얇은 두께에 하나의 주제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책이 시집 한 권 값 정도 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물론 내용이 수박 겉핥기 식으로 허탈하게 끝나는 주제들도 있긴 하지만. 오늘 소개하려는 책 <르 몽드>나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는 얇은 분량 안에서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드러나 있어서 꽤 괜찮았다.

공교롭게도 두 권의 책이 모두 '프랑스 사회'와 관련한 책이었고, 또 공교롭게도 우리 사회의 그것과 비교할 만한 책들이었다. '부르르' 언론에 한번 더 분노를 느끼고, '부르르' 한국 사회의 공고화되고 갈수록 심화되는 계급화에 분노를 한 번 더 느끼면서 두 권의 책을 덮었다.

중도 좌파적 성격을 지닌 '르 몽드'지가 프랑스의 대표적인 언론으로, 세계 10대 신문으로 꼽히게 되는 그 과정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적혀있는 <르 몽드>에서는 우리나라 신문이 왜 썩었는지, 왜 신문을 보면 안되는지 세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르 몽드'는 일단 우리나라의 신문 시장과 달리 철저히 독립되어 있다. 조중동 처럼 거대 재벌이나, 언론 재벌의 부속물이 아니며, 주식은 오히려 르 몽드 기자회가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신문의 중심이 기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 기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도 않는다. 더구나 우리나라 신문들이 광고 수입에 70% 이상 의존하는 것에 비해 '르 몽드'는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니 거대 광고주들의 눈치를 봐야 할 이유도 없다. "특정 이데올로기 그리고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려면, 무엇보다도 재정적으로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부분에서는 울컥, 뭔가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르 몽드'는 사진도 철저하게 배재한다. 스펙타클한 이미지가 사실을 왜곡할 우려가 꽤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신문을 보면, 1면은 늘 대형 사건, 사고, 혹은 아수라장인 정치판 사진으로 빵~빵~ 때려준다. 그것도 신문사들의 입맛에 맞게 조작된 이미지의 사진들이. 마치 사실인 양, 진실인 양 버젓이 걸린다. 무엇보다 감명 깊은 부분은'독립성'이다. 우리 신문들이 '중립 언론'을 표방하고 아무 소리도 못낸채, 거대 자본 세력들의 시녀 노릇하기에 바쁜 것에 비하면, 르 몽드는 '좌파', 르 피가로는 '우파'로 철저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부럽다. "신문이 피해야 할 것은 왜곡이지 당파성이 아니다" 라는 부분에서도 일정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여본다. 인종주의나 극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르 몽드'의 분명한 독립 선언과 자기 색깔의 목소리. 이런 것들은 진실과 사실이라는 가면을 쓰고 양비론으로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오히려 정치, 경제라는 거대 권력자들의 대변인 노릇만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신문들과 크게 비교되는 지점이다.

신문을 끊어버린지 꽤 오래 되었다. 하지만 신문을 끊으면, 과연 내가 정보를 어디서 얻을까? 했던 고민은 완전 기우였음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우리 신문의 제호는 르 몽드(Le Monde, 세계)이지 라 나시옹(La Nation, 국가 또는 민족)이 아닙니다." 라는 르 몽드 편집국장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신문에 대하여>에서 신문이 궁극적으로 나아갈 길은, 국가나 민족 자기 안의 일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부르디외의 저서들을 접하다보면, '구별짓기' 즉 문화적 취향, 문화의 취사 선택을 통해 자신이 어떤 계급인지, 그리고 그 문화적 취사 선택의 과정들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습득 되는지, 그래서 '학교'라는 공간이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게 한다. 프랑스 사회는 논술과 구술 시험 등을 통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좋고 나쁜 대학의 진입 여부가 결정된다. 또 그 대학을 나오고 어떤 지식 사회로 편중되느냐에 따라 상중하 계층이 갈린다. 대부분 노동자의 자식은 노동자로, 고위 간부의 자식은 고위 간부로 다시 재생산 된다. 어찌보면 우리나라 보다 꽤 오래 심화된 교육의 불평등이다. 개인의 능력 차이라고 치부하지만, 이미 상하층 계급으로 나뉘어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대화하고, 생각하고, 어떤 문화적인 습득을 했느냐에 따라 기회가 주어지는 통로는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이제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이미 서울대연고대 등을 차지하는 신입생 수에서 서울 강남권에 사는 학생들의 수가 절반을 넘어섰다는 점은 프랑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음을 시사한다. 그들이 다시 국가 권력의 상층 핵심부를 다 차지하고, 또 다시 그들의 자식들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문화적 식견을 교육받고 또 다시 상위권 학교에 입학하고..... 계급과 계급이 반복, 재생되는 이 악순환은 그칠 줄 모른다. "현대 사회에서 학벌이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계급의 신분 상승 기회가 바로 학교의 서열제도를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은 부르디외가 왜 그토록 프랑스의 학교와 교육제도에 비판적이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부르디외의 책을 읽다보면, 나 또한 어떤 고상한, 혹은 조금은 타인과 다른 (?) 문화적 취향을 드러냄으로써 하나의 구별짓기라는 또 하나의 상징 폭력을 타인에게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은근한 자기 반성과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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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0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르 몽드의 제호는 훌륭한 말입니다. 하지만, 인터넷 세계가 점점 확장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낙관적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SNS 중심의 인터넷이 부당한 사회 현상을 널리 알리고, 세계적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세계에도 종이신문만큼이나 편견과 가짜 뉴스가 판을 칩니다. 인터넷으로 전달되는 뉴스가 세계를 바라보는 창(窓)이 되지만, 일부 가짜 뉴스는 타인에게 폭력과 억압을 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창(槍)이 될 수 있습니다.

잠자냥 2017-06-01 14:41   좋아요 0 | URL
네, 가짜뉴스는 언제나 조심해야 할 덫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되는군요.
 
이런 사랑
필립 베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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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서정적이지만 늘 강렬한 내용을 담고 있는 필립 베송. 그의 <이런 사랑>은 스물아홉 살의 남자 '루카'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늦여름의 이탈리아, 피렌체 아르노 강 다리 아래서 한 남자의 익사체가 발견된다. 그의 이름은 '루카 살리에리'- 그의 죽음으로 시작된 작품은 루카, 그의 약혼녀 안나, 그리고 또 다른 남자 레오의 독백으로 번갈아 가며 이어진다. 그리고 필립 베송의 작품답게 왜? 그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없이 궁금해진다.


루카, 안나, 레오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죽은 남자 루카는 이탈리아에서 꽤 명망 있는 집안의 자식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안나'라는 아름다운 여자친구와 5년 동안 진실한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나 '레오'라는 한 남자의 등장으로 루카에게 '안나'라는 여자만이 애인은 아니었다는 것도 이내 알게 된다. 잘 생긴 외모와 좋은 집안, 아름다운 여자친구 등등 부러울 것 없어 보였던 루카에게 죽을 때까지 숨겨야 했던 단 하나의 비밀이 있었다면 그것은 '레오'라는 존재였다. 레오는 기차역에서 하루하루 몸을 팔며 살아가는 남창이었던 것-


소설은 루카의 죽음으로 충격받은 그의 두 연인 안나 모란테와 레오 베르티나의 시점으로 루카가 과연 왜 죽었는지를 미스터리처럼 풀어간다. 그리고 그의 죽음 탓에 상기되는 추억을 통해 이들의 삶과 사랑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독자는 책을 읽으며 한 번은 루카가 되었다가 또 한 번은 안나가 되었다가, 때로는 레오가 되어 그들의 상실감과 고독감을 맛보게 된다.


루카는 죽어서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나는 과정을 겪으며 더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머물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안타까움에 절망한다. 자신의 죽음에서 무언가를 캐내고자 분주한 형사들의 움직임에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그의 비밀이 밝혀질까 죽어서도 두려워한다.


안나는 5년 동안이나 성실하고 섬세하고 다정했던 남자친구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해하고 자살일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이야기에 왜 자신과 행복하지 못했을까 괴로워한다. 게다가 부검 후 보이는 루카 부모님의 석연치 않은 행동,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형사들의 태도. 루카의 집에서 발견한 낯선 남자의 이름 등등 5년 동안 자신이 믿어왔던 그 모든 관계가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욱 망가져 간다.


레오는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거리에서 만난 남자들과 의미 없는 만남을 이어가던 중 유일하게 진짜 삶과 이어줄 연인 루카를 만나지만 어느 날 그의 죽음과 맞닥뜨린다. 장례식장조차 갈 수 없다. 그는 철저하게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형사들의 집요한 추궁으로 그는 사랑하는 연인을 살인한 장본인으로 몰리기까지 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루카, 안나, 레오 세 인물 모두 무척 고독했으리라는 짐작을 해본다. 평생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루카나, 정말로 진실한 관계라고 믿었던 5년간의 사랑이 배신으로 돌아온 안나나, 유일한 사랑이자, 세상과 이어주는 끈이었던 루카를 잃어버린 레오나 모두 고독하고 또 고독할 것이다. 쓸쓸하고 건조한 주인공들의 독백을 통해 이 고독함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마지막에야 밝혀지는 루카의 죽음에 관한 비밀까지- 이 작품은 흡인력 있게 단숨에 읽힌다. 어찌 보면 상투적인 삼각관계 같은 내용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작품이 ‘사랑’보다는 인간이 살면서 느끼는 고독과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엄밀히 말한다면 고통은 육체의 이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루카의 몸이 지독하게 그립다 해도, 루카의 육체는 나를 자주 허전하게 했으므로 육체의 부재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제 짝을 잃었다는,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존재가 되었다는 엄연한 현실과 관련이 있다. 나는 존재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둘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혼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의 둘이라는 복수에서 단수가 되는 법을 모른다. - 안나



내가 평온함을 맛볼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몰랐었다. 루카와 함께,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 - 레오


사람들은 그림의 이면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평소에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던 매력적이고 이상적인 청년, 그들을 흡족하게 해주던 감탄스럽고 눈부신 청년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증스럽다고 외치고, 배신이라고 소리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은 한순간도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수치심과 불쾌감을 초월하고 받아들인다면, 그다지 기분 상할 일은 없다. -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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