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는 사랑에 관한 책이다. 한때 한 사람을 사로잡아 그의 온 존재를 불사르게 했으나 사랑이 늘 그렇듯이 마침내는 잃어버리고 산산이 부서지게 되는 그런 사랑의 기록. 사랑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으며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으며 조직이거나 공동체 또는 그 모두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으리라. 어떻게 공산주의와 로맨스를 나란히 놓을 수 있느냐고. 그러나 무언가에 열렬하게 빠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로맨스, 그러니까 사랑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 공산당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는 마르크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상대를 사랑하더라도 상대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그대의 사랑이 사랑으로서 상대의 사랑을 산출하지 못한다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삶의 발현을 통해 그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마르크스, <경제학, 철학 수고>, p.202)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지금도 열렬히 누군가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존재라는 점에서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미국이라는 자본주의의 화신과도 같은 나라에서 수천,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을 탄생시켰고 그들의 뜨거운 열정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저세상에서나마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그토록 열정을 바친 자들의 삶은 현재 어떠할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으나 그 사랑이 결국 깨져버린 후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 비비언 고닉은 그들의 사랑이 끝난 이후의 삶을 추적한다. 헌데 왜 하필이면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일까? 사실 고닉 그 자신이, 그런 환경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뉴욕 브롱크스의 좌파 노동계급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틈바구니에서 살아온 고닉에게 공산주의는 페미니즘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가 이제는 흩어져 한때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 열정의 대상을 애써 잊거나 감추거나 또는 증오하거니 마워하거나 그 나날들을 후회하면서 단지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만을 지닌 채 살아가기에 바쁜 그 시절 공산주의자들을 찾아가는 여정은 자신의 과거이자 지난날 사랑을 추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책 초반, 고닉이 풀어놓는 이야기 속 그들은 전형적인 사랑에 빠진 자들이다. 이제는 노회한 그들이 젊은 시절 공산당원이 되기까지 거기에 매료당한 경험을 털어놓는 모습은 처음 사랑에 빠진 기억을 떠올리며 수줍은 미소를 짓는 사람들 같다. 전율, 그토록 강렬하게 다가와 번개처럼 타오르고 가슴 가득 의미로 꽉 찬 느낌. 생활이 삶이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듯한 느낌. 생의 충만함이, 인생의 의미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나의 삶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삶조차 바꿀 수 있을 듯한 의욕이 샘솟는 그런 기분…. 누군가는 그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를 처음 읽었을 때,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그 기분, 인간의 지성을 향해 샘솟는 그 사랑 말이오.... 맙소사 난 처음으로 마르크스를 발견하고 동시에 나한테 정신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그 시절처럼 그렇게 자유로워 본 적이 없었소.”(p.129)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한다. "인생은 똥이야, 사람들도 똥이고. 그치만. 가끔 인생은 위대해. 그리고 사람도 위대하지. 그리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거기서 뒷걸음질쳐 나오기가 힘들어. 다른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말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공산당이 그랬던 거지. 물론 공산당엔 똥이 많았지. 똥 같은 인간들도 많았고. 하지만 내가 인생이 위대하다고,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느껴본 유일한 시절은 공산당 안에 있을 때였어. 오만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그 삶에는 의미가 있었지. 그 삶은 자기 힘으로 만회했어. 만회하고 또 만회했지. 거기에는 진짜 의미가 있었거든. 그리고 내가 그 일원인 동안에는 나한테도 진짜 의미가 있었던 거요."(p.103)
그렇다. 인생은 똥이다. 사람도 똥이다. 대다수가 똥이다. 나 또한 그 똥무더기를 이루는 똥일 뿐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사람은 위대하다. 그런 사람이나 상황을 맞닥뜨릴 때 인생은 가끔 의미 있다. 나도 똥을 조금은 벗어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차피 똥일 바엔 거름처럼 의미 있는 똥이 되자고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전환의 순간, 스위치가 확 켜지는 순간, 이때가 바로 열정에 불꽃이 당겨지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열정의 대상은 앞서 말했듯이 마르크스가 쓴 책일 수도 있고, 마르크스라는 사람일 수도 있고,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무리들일 수도 있다. 대상은 달라도 불꽃이 일어난 것은 똑같다.
이렇게 사로잡힌 영혼은 열정을 불러일으킨 대상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마르크스 또는 그가 제시한 유토피아의 환상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사랑에 붙들린다. 사랑은 그들을 고양시키지만 때로는 일그러뜨리기도 한다. ‘그들 한 명 한 명은 내면의 발광을 경험한다. 영혼을 찢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빛. 그 발광을 알아차리는 것, 내면에서 불이 켜지는 것, 그러다가 그 빛을 잃어버리는 것, 그 빛과 열기를 잃고 내동댕이쳐지는 것, 그 뒤 빛 없이 캄캄한 일상의 평범한 회색을 맛보는 것, 그것은 어쩌면 깊은 사랑에 빠졌다가 그 사랑을 잃고 어딘가가 부서져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황홀감과 공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p.43)
사랑이, 열정이 그 미몽迷夢 안에서 끝없이 유지된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탈진하거나 쓰러지거나…. 그래서 그런 것일까, 그들은 어느 순간 불꽃을 놓아버린다. 불꽃에서 멀어진다. ‘공산주의라는 정치적 열정의 자장 안에서 자기의 영혼을 반사하는 그 거칠고 눈부신 광선 안에서 살며 처음에는 그 닫힌 시스템의 언어에서 자양분을 얻지만 그 때문에 곧 박탈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 협소한 강렬함으로 다져지지만 바로 그 강렬함 때문에 형태가 틀어지고, 찬란한 영향력의 시기,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 자신의 깊고 가장 특수한 부분에 말을 걸어온 역사의 한 순간에 내려진 결정의 힘에 의해 자존감을 얻기도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절뚝거리기도 하면서’(p.254) 대개의 사람들은 미몽의 시간을 벗어난다.
콩깍지- 열정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비극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공산당이 선물처럼 안겨주었던 자아에 대한 감각은 소련의 부패를 공산당원들이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소련의 전체주의적 성향까지 외면하게 만든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실체를 마주하기를 회피하면서 또는 직시하기를 거부하면서 스스로를 계속 기만한다. 그러는 사이에 매카시즘 광풍이 불어 닥친다.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투옥되고, 어떤 이들은 행방불명을 자처하거나 지하로 침잠한다. 흔들리던 관계에는 종말 또는 파국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흐루쇼프가 스탈린 통치의 참상을 폭로하는 내부 스캔들이 터지면서 미국 공산당뿐 아니라 전 세계 좌파 조직은 속절없이 허물어져간다. 환멸. 열정의 대상으로부터 얻은 이 깊은 환멸과 실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가 지닌 태생적 한계나 모순보다도, 흐루쇼프의 폭로로 터져버린 스탈린 치하의 참상보다도 당원 개개인을 더욱 속절없이 무너뜨린 것은 자기를 사로잡았던 바로 그것, 자기가 매혹되었던 바로 그 지점에 대한 환멸이 아니었을까. 유토피아를 꿈꾸게 했던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어느 순간 도그마가 되어 그를 옭아맨다. 자본주의가 인간성을 말살시킨다는 이유로 투쟁하던 그들이 당의 강령과 어긋난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자들을 감시하고 기록해 고발한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며 저마다 살길을 찾아 누군가를 고발하고 숙청하면서 인간성을 저버린다. 이것이 유토피아인가? 더욱이 음악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등 예술가로서의 삶을 꾸려나가던 이들은 바로 그 강력한 도그마 때문에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잃어버린다. 이것을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사랑했던 존재가 바로 자기를 유혹했던, 매료시킨 속성으로 자신을 옭아맨다면 그 사랑을 벗어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선택이 아닐까.
그러나 사랑은 끝나고 잃어버리고 부서질지라도 기억은 남는다. 한때... 나는 공산당원이었노라고 모두 과거시제로 그 사랑을 회한에 찬 심정으로 이야기하더라도 그때의 정체성은 ‘방향을 찾는 탐험가에게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바늘이 그렇듯 존재의 지도에서 안정된 기준점’이 된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디에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또는 무엇인지 같은, 좋든 싫든, 사랑하든 증오하든, 그 기억을 이상화하든 욕하든 공산당원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 각각이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여전히 기대는 경험”(p.340)으로 자리 잡는다.
고닉은 말한다. “인간의 정신에는 시공을 초월한 허기가 숱하게 존재하고, 그 각각의 허기는 자기현시적인 생명을 얻는 순간 열정으로 타오를 역량을 품고 있다. 이런 허기 중 하나는 의문의 여지없이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다. 거기서 동기로 작용하는 힘은 무의미한 삶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허기는 육신이 아닌 정신의 욕구에, 인간에 대한 가장 심오한 정의와 관련된 욕구에 말을 건다. 그리고 인간의 다른 욕구가 그렇듯 이런 태곳적 허기를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사람, 이념, 사건과 조우하지 못한 채 일생을 사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한번 마주치고 나면…”(p.45)
고닉의 저 말줄임표 다음에는 어떤 말이 생략되어 있을까. 한번 마주치고 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란 어렵다 정도가 아닐까. “열정이라는 허기. 그 허기를 살게 했지만, 종국에는 그 허기가 그들을 살게” 한다. “열정이 성립되려면 그것이 전부여야 하는 까닭에, 그리고 무언가가 전부가 될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서로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까닭에, 본질적으로 인간다움을 강제하지만 동시에 인간다움의 말살을 강제하는 열정”(pp.45~46). 고닉은 공산주의와 사랑에 빠진 자들의 초상을 좇으면서 페미니즘과 사랑에 빠졌던 자신의 경험도 털어놓는다. 빛을 본 자는 또 다른 빛을 본 자를 알아본다. 그 빛은 모두 갈망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극심한 갈망, 무명의 자아에 파묻혀 있던 갈망, 우리 내면의 그 지리멸렬한 삶의 중심에 있는 불가사의하고 나약한 심장을 직격한 갈망,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과 관계된 갈망’…. 파리스에게 헬레네와 같았던 갈망, 공산당원이 된 사람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가 헬레네였고, 고닉에게는 페미니즘이 그러했다. 나에게는 그 갈망이 무엇인가? 살아도 살아도 허기진 이 생에서 불꽃을 당겨줄 그 갈망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