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에 걸맞은 표지는 내 말이 세상을 걸어가는 동안, 독자들과 만나러 가는 동안 내 말을 감싸주는 우아하고 따뜻하며 예쁜 외투 같다. 잘못된 표지는 거추장스럽고 숨 막히는 옷이다. 아니면 너무 작아 몸에 맞지 않는 스웨터다. 아름다운 표지는 기쁨을 준다. 내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이해해주는 느낌이다. 보기 흉한 표지는 날 싫어하는 적 같다.
- 줌파 라히리, <책이 입은 옷>, 25쪽




진짜 아작 내고 싶은 책 표지네;;;



책을 사서 실물을 받아보면, 진짜 표지 디자인이 너무한다 싶은 책들이 종종 있다. 최근에 본 책 표지 가운데 단연코 압도적인(나쁜 의미에서) 책 표지는 레이 브래드버리 단편선일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가 있지? 책 표지 디자이너나, 이걸 또 컨펌한 출판사 관계자나 모두 하나 같이 레이 브래드버리에 대한 정보나 이해가 전혀!!!! 없었던 게 아닐까???!!!


저 이상한 꽃은 뭐며? 저 음울한 소녀는 또 뭐란 말인가?! 무덤에 있는 레이 브래드버리가 벌떡 일어나서 한국까지 와서는 책 표지를 '화씨 451'도로 모두 불태워버릴지도 모르겠다. 책 표지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디자인 하는 책을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작가라든지 그 작품에 대한 정보라도 좀 수집하고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럴 거면 그냥 표지 디자인을 하지 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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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7-09-19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덤에 있는 레이 브래드버리가 벌떡 일어나서 한국까지 와서는 책 표지를 ‘화씨 451‘도로 모두 불태워버릴지도 모르겠다.‘
잠자냥님 이 문장 너무 웃겨서 지금 사무실에서 웃음 참고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이 책 내용 뭔지 모르지만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봐도 표지 너무너무 구리네요. 무슨 문구점에서 파는 싸구려 연습장 표지 같아요. ‘화씨 451‘은 제5공화국 시절에 출판됐다고 해도 믿을만한 디자인인데요? 세상에나.....
전 소설 책표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검정색에 금박으로 글자만 써 있었음 좋겠단 생각 많이 해요. 그 디자인으로 쭉가면 차라리 더 소장하고 싶은 맘이 들 것 같은데, 우리나라 책 중에는 그런 디자인 흔치 않죠. 괜히 디자인 바꿔서 개정판 내놓고 예전에 한권이었던거 두권으로 내놓고 그렇게 가격만 올리고.. ㅜㅜ

잠자냥 2017-09-19 15:11   좋아요 0 | URL
흐흐흐. 사무실에서 웃음 참으면 더 웃기는데;; 하하하-
레이 브래드버리는 거의 전설처럼 꼽히는 SF작가인데요, 저도 이 책은 읽어보려고 사서 아직 시작도 못했지만 전에 읽은 레이 브래드버리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을 보면 절대 저 표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을 쓴 작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저 표지에는 정말 분개하는 레이 브래드버리 팬들이 많더라고요.

맞아요. 정말 우리나라 책 표지 가운데 디자인 너무 엉뚱한 게 많아서 차라리 검은 장정에 금박으로만 만드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요. ㅠ_ㅠ

레삭매냐 2017-09-2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쌈 대로 이럴 거면
그냥 백지에 제목만 달아서 낼 것이지
싶네요.

출판사 사정이 어려운 걸까요.

잠자냥 2017-09-21 15:00   좋아요 0 | URL
널~~리~ 이해해서 SF장르 이미지를 파격적으로 벗어나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하하하하하.

이박사 2017-09-2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사는 것이 망설여지네요... 너무나 기다린 책인데...

잠자냥 2017-09-27 17:23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럼에도 저는 샀습니다. 표지는 아쉽지만 내용은 래이 브래드버리가 쓴 것이니까요.

2019-08-05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5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포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그것>을 손꼽아 기다린 까닭은 순전히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 <그것> 예고편에 나 또한 홀딱 반했고, 그 예고편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믿음, 그러니까 아무리 영화를 못(?) 만들어도 웬만큼은 하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이 원작자이니까. 지난 주말, 매우 늦은 시각, 고작해야 열 명 남짓한 관객들이 띄엄띄엄 앉아서 공포를 더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극장으로 향했다. 마침내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스티븐 킹의 <그것>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사실 나는 이른바 장르 소설에 크게 재미를 못 느낀다. 내가 소설을, 문학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스토리, 그러니까 이야기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야기가 흥미진진해도 이야기 밖의 것들이 엉망이면 그런 작품에는 도무지 재미를 못 느낀다. 그래서 나는 로맨스라든지, 추리라든지, 공포라든지 SF라든지 특정한 장르에 ‘충실’한 소설들을 (끝까지) 잘 읽지 못한다. 물론 그런 장르를 쓰는 이들 가운데 빼어난 작품으로 대중성과 문학성을 두루 갖춘 작가로 꼽히는 사람도 있다. 또 그런 작가들 가운데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꽤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장르 작가’ 또는 ‘대중 작가’ 쯤으로 치부되어온 스티븐 킹도 아마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그런 작가. 대중문학,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의 ‘장르’ 구분 자체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몸소 보여준 작가. 물론 나는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내 주제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

그런데도 생각해보면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참 많이도 봤다. 공포 영화를 잘 보지 못하는 심약한(?) 성격임에도 스티븐 킹 원작이라는 이유만으로 <캐리>와 <샤이닝>을 봤으며(심지어 몇 번이나!), 지금 그냥 떠오르는 영화들만으로도 <스탠 바이 미>,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미저리>, <돌로레스 클레이본> 등등 엄청난 작품들이 많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이 작품 리스트를 보고 아니, 이게 다 스티븐 킹 원작이란 말이야? 놀랄 수도 있다. 공포 영화 계열인 <캐리>와 <샤이닝>은 일단 제외하고서라도 <쇼생크 탈출>은 이제까지 몇 번이나 봤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신기한 점은 이 영화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걸 보면 마치 처음 보듯이 또 빠져든다는 것이다.

<캐리>와 <샤이닝>에 압도되었던 나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드디어 극장에 갔다. 중간 중간 으악! 소리를 지르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영화는 대체로 슬프고 매혹적인 성장영화였다. 말더듬이, 책벌레, 바이러스를 두려워하는 천식 환자, 유대인 소년, 소문이 좋지 않게 난 소녀 등 학교에서 ‘왕따’에 속하는 아이들, 루저라고 서슴없이 불리는 그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무시무시한 공포 영화를 기대하고 간 이들이라면(공포 장르에 충실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무척 시시할 것이다. 영화를 본 뒤 인터넷 관객 평을 보니 이게 무슨 공포 영화냐고 불만을 쏟아내는 평도 많았다. 하지만 나처럼 ‘성장영화’에 방점을 두고 좋은 평을 내린 사람도 보였다. 나는 공포영화로서도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이 영화를 ‘무시무시하게 매혹적인 성장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나처럼 공포 영화를 잘 못 보는 친구들에게 ‘공포 때문에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영화를 놓치는 것’이라며 꼭 보라고 권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 말은 영화 <그것>의 주제와도 어떤 면에서는 통한다. 두려움, 공포 등을 극복해야만 인간은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다는, 한 걸음 성장할 수 있다는. 그럼으로써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느끼지 못했던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인생의 또 다른 아름다움(물론 이 아름다움은 ‘미(美)’적인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 자체를 알게 되고 느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움 일 수 있다)을 만날 수 있다는….

영화 <그것>에서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저마다 다르다. 읽어버린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하고,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하는 게 틀림없는 소녀에게는 성적 성숙을 의미하는 모든 징후들-이를테면 초경 등-이 공포 그 자체이다. 이 소녀가 목욕탕에서 피를 뒤집어쓰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며, 한편으로는 돼지 피가 담긴 양동이를 뒤집어썼던 ‘캐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엄마의 과보호 속에서 이 세상의 온갖 바이러스가 위험하다고 배워온 아이에게는 문둥이가 가장 두려운 대상이고, 책벌레인 아이에게는 책에서 읽은 어떤 내용이 공포로 다가온다. 공포를 느끼는 대상은 이렇게 각각 다르지만, 그 공포의 근원에는 모두 ‘광대’가 자리한다. 아이들은 왜 ‘광대’가 무서울까? 어른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운 존재인 ‘광대’가 아이들에겐 가장 큰 공포의 대상 중 하나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이 세상에는 아이들에게 ‘만’ 보이는 공포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광대’로 상징화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두려움을, 공포를 이겨낼 때 인간은 왠지 ‘슬프지만’ 어른의 세계로 나아간다.

영화 <그것>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아이들 캐릭터의 생생함이다. 어디서 그런 아이들을 캐스팅 했는지 궁금할 만큼 하나 같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영화 속에서는 다들 ‘루저’에 ‘왕따’로 그려지지만, 다들 마음이 약하고 소심하고 악하지 못한 아이들일 뿐이다. 스티븐 킹이 창조한 아이들은 주로 이렇게 왕따를 당하는 루저인 경우가 많은데,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캐리’처럼 초능력을 가진 아이도 있다. 영화 내내 루저 아이들을 못살게 굴며 괴롭히던 ‘헨리’조차 실은 나름의 사정이 있다. 이렇게 나약한 아이들 하나하나 아픈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을 풀어가는 연민어린 시선도 무척 좋다.

충격적이게도(?) 이 영화가 끝날 즈음 이런 자막이 나온다. ‘그것: 1장 (IT: Chapter 1)’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단 한편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원작은 국내 판본으로 총 3권 장장 1800페이지에 달하지 않는가. 어쨌든 다음편이 나온다니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러는 한편 속편에서는 이 사랑스러운 꼬마들이 어떤 모습으로든 달리질 테니, 그 사실이 벌써부터 안타깝다. 기대보다 더 좋았던 영화 <그것>- 영화도 이 정도인데, 원작은 또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매혹적일까? 다가오는 추석에는 스티븐 킹의 <그것>을 완독해야지. 드디어 마침내, 스티븐 킹을 제대로 읽어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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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9-18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생크는 채널 돌리다 나오면 무조건 끝까지 보게 되는 마력의 영화죠. ㅎㅎ

잠자냥 2017-09-18 13:47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그 자리에 그냥 앉아서 끝까지 보게 만드는 대단한 영화입니다.

cyrus 2017-09-18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헌책방에 가면 절판된 (고려원출판사의) 스티븐 킹 번역본을 만납니다. 그런데 낱권만 있는 경우가 많아서 포기합니다.. ㅎㅎㅎ

잠자냥 2017-09-18 22:1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헌책방에서는 시리즈 제대로 모으기 참 힘들죠. ㅎㅎ 그래서 저도 그냥 포기하고 온 책이 종종 있어요.

레삭매냐 2017-09-21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전에 <언더 더 돔> 보면서 스티븐 킹의 실력을
좀 짐작해 봤었는데 <그것>이 다시 영화화되면서
새로운 표지로 나온 모양이네요.

영화가 아쉽게도 소설의 전반부만 다루고 있다니
우선 책부터 읽어야 싶네요.

잠자냥 2017-09-21 15:01   좋아요 0 | URL
영화 한 편에 모두 담기에는 아무래도 원작이 훨씬 방대한 것 같더군요.

지지 2017-09-2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를 먼저 보고 너무 매혹되어서 이번에 원작으로 읽고있는데 스티븐 킹 필력이 어마무시하네요 ,,

잠자냥 2017-09-27 17:07   좋아요 0 | URL
네, 영화가 참 좋았죠. 전 아직 원작은 시작 못했는데 기대됩니다! ㅎㅎ
 
슈베르트 : 피아노 소나타 20번 D.959 & 21번 D.960 [디지팩]
슈베르트 (Franz Schubert) 작곡, 짐머만 (Krystian Zimerman) / 유니버설(Universal)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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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머만과 슈베르트의 조합이라니 그저 행복할 뿐. 맑고 깨끗하고 그러면서도 서정적인 연주. 이 가을과 완벽하게 어울린다. 짐머만은 진정 이 시대의 클래식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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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7-11-19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정말 고급스럽게 궁상맞은 명곡이지요?
저도 자주 듣는 곡인데 주로 캠프, 리히테르, 브렌델로 듣습니다.
가끔 들어야지 자주 들으면 우울증 돋는지라 가을엔 조금만 찾으세요. ^^

잠자냥 2017-11-20 09:31   좋아요 0 | URL
네! ㅎㅎ 말씀하신 것처럼 캠프와 리히테르 연주는 전설의 명연주에 속하는 것 같고요. 짐머만의 이 연주도 좋더라고요. ㅎㅎㅎ
 
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 더 저널리스트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영진 엮고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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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는 보물 같은 책이다. 헤밍웨이 작품은 좋아해도 작가로서 그를 좋아한 적은 없다. 그런데 이 책에 담긴 글들로 만난 ‘기자‘ 헤밍웨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글도 빼어나고 아름답지만 끊임없이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태도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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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촌 레이첼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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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 아니 천재 이야기꾼이라는 표현이 무엇보다 적절한 작가들이 있다. 대프니 듀 모리에도 틀림없이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단편선을 시작으로 <자메이카 여인숙>에 이어 <나의 사촌 레이첼>을 읽었다. 국내에 번역된 작품 가운데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은 <레베카>와 <희생양>. 두 작품이나 남아 있다니! 참, 다행이다!!

<나의 사촌 레이첼>은 확실히 재미있다. 이 작품보다 먼저 읽은 <자메이카 여인숙>도 흥미진진했지만 <나의 사촌 레이첼>이 이야기 몰입도로 치자면 별 두 개 정도는 더 주고 싶다고나 할까. 아니, 작품 전체적으로도 <나의 사촌 레이첼>이 여러 면에서 더 좋았다. 그저 단순히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든, 흥미진진한 작품이라고만 하기엔 읽고 나서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섣불리 결론 내릴 수 없어서 요즘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있다. 읽어보고 이야기 좀 하자고. 이 서늘한 결말에 대해서.

사실 이런 작품은 줄거리, 그러니까 내용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 책을 읽을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서스펜스가 작품을 압도하는데 이러쿵저러쿵 줄거리를 언급하는 일만큼의 만행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의 사촌 레이첼>의 매력과 그 빼어남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몇 가지 이야기는 할 수밖에 없다. 그저 단순히 이 책 재미있으니까 꼭 읽어보라, 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지 않은가.

다들 잘 알겠지만, 혹시라도 ‘대프니 듀 모리에’를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짧게 언급하자면, 그녀의 별명은 이른바 ‘서스펜스의 여왕’ ‘히치콕의 뮤즈’이다. 히치콕의 그 유명한 영화 <새>의 원작을 쓴 사람도 그녀이며, 히치콕의 또 다른 영화 <레베카>의 원작자도 그녀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가 쓴 작품들은 현재까지 50차례 이상 영화와 드라마화 되었다. <나의 사촌 레이첼>도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졌고, 곧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원작을 다 읽은 지금, 영화도 꽤 기대된다. 스크린으로 만날 레이첼, 그녀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지…….

<나의 사촌 레이첼>은 처음부터 음울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서술자인 필립이 어린 시절 교수대에 목 매달린 사람을 본 광경을 떠올리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때문에 독자는 이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은 아닐 것이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럴 즈음 레이첼의 등장과 함께 예상대로 그들 사이에 무언가 불행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필립과 앰브로즈 두 남자에게 일어난 일은 과연 무엇일까? 그 일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필립, 본인에겐 아무 결점이 없는데도 재앙을 불러오는 여자들이 더러 있단다. 좋은 여자들인 경우도 아주 흔하지. 그들은 뭐든 손을 대기만 해도 비극을 일으킨다. 너한테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만 꼭 해줘야 할 것 같구나.”

본인에게는 아무런 결점이 없는데도 재앙을 불러오는 여자, 그녀가 바로 ‘레이첼’일 것이라고 쉽사리 예상할 수 있다. 필립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를 잃는다. 고아가 된 그가 안쓰럽던 앰브로즈는 어린 사촌에 대한 연민으로 필립을 데려다 키우기 시작한다. 필립과는 꽤 나이 차이가 나는 앰브로즈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필립을 훈육한다. 그는 어쩐지 여성혐오자,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인간혐오자로도 보인다.

그러던 그가 건강 악화로 습하고 어두운 콘월 지방을 떠나 햇볕이 잘 드는 지역, 지중해 연안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필립에게 저택을 잘 지키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난 앰브로즈. 그런데 곧 돌아올 줄 알았던 그의 여행은 꽤 길어진다. 이따금 보내는 편지로만 소식을 알 수 있을 뿐인데, 그 편지로 필립은 앰브로즈가 한 여인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했음을 알게 된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겠다던 앰브로즈가 말이다! 문제의 여인, 그녀의 이름은 ‘레이첼’-

앰브로즈와도 먼 친척 관계이고 그러므로 필립과도 친척 관계인 레이첼. 결혼까지 했으니 곧 신부와 함께 돌아올 것도 같은데 앰브로즈는 여전히 돌아올 줄 모른다. 그러다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온다. 앰브로즈가 죽은 것이다! 죽기 직전 앰브로즈는 필립에게 전과는 사뭇 다른 편지들을 보내온다. 이런 상황에서 필립 앞에 레이첼이 나타난 것이다. 앰브로즈의 편지들 때문에 필립은 레이첼이 그의 죽음과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그런데 인생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그 결심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은 계획할 수 없으며 예측할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지금 말한 내용들은 거의 작품 초반으로, 500쪽을 훌쩍 넘는 분량 가운데 처음 50~60쪽에 다 드러나는 이야기들이다. 남은 400쪽 이상은 순전히 필립과 레이첼, 그리고 앰브로즈의 편지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하다. 독자의 예상대로 가는 부분도 있고 전혀 뜻밖의 부분도 있다. 거의 모든 독자가 예상할 수 있듯이, 필립은 계획대로 레이첼을 대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그랬는지도 모른다. 적대적으로 무엇이든 삐딱하게 그녀를 대하기. 그런데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차츰 레이첼에게 매혹 당한다. 그리고 그 감정에 스스로도 놀라워한다. 어쨌든 그녀는 앰브로즈의 아내이지 않은가? 그가 이제는 죽었고 늘 검은 상복 차림의 그녀이지만, 그럼에도 필립은 레이첼을 향한 감정을 점점 숨기기 어려워진다. 필립과 레이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자꾸만 결말이 궁금해서 마지막 장을 펼쳤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앞으로 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사이에 어느덧 그 마지막 장을 읽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당혹감과 쓸쓸함, 연민과 같은 이 작품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감정에 휩싸였다. 이 작품에 그려진 사랑의 온갖 모습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지만, 사실 100% 믿을 수 없는 화자인 필립. 게다가 앰브로즈의 편지는 과연 정말 진실만을 담았을까? 그 두 남자의 고통과도 같은 사랑, 그 열병과도 같은 상태가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들의 시선이 정말 온당한가 의심하게 된다. 그들이 느끼고 바라본 ‘레이첼’은 진짜 ‘레이첼’일까? 헛헛하고도 쓸쓸한 감정이 몰려온다.

레이첼 또한 그렇다. 그녀의 이야기는 모두 진실일까? 그녀는 정말 선한 여자였을까? 아니면 팜므파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죄인일까? 아니면 천사일까? 두 남자의 시선으로만 그려진, 그렇기에 ‘레이첼’이 아닌 ‘나의 사촌’인 레이첼, 필립이나 앰브로즈 두 남자에겐 그저 결국 ‘대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시선 속에 가두어진 ‘레이첼’- 그것이 진실한 그녀의 모습일까? 그러므로 영원히 누구도 그녀의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일까? 대프니 듀 모리에가 레이첼을 이르러 ‘이 여인은 천사인지 악마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했다는데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거의 모든 사랑이 그러하지 않은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을 때 우리는 그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감정 상태에 따라 선한 얼굴이 악한 얼굴이 되기도 하고, 못나게 보였던 점들도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세상에 다시없을 장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모두 마음의 상태에 달렸다. 필립이 처음 봤을 때는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레이첼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인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 순수한, 완전무결할 것 같던 사랑이 뒤틀리는 순간은 의심과 질투가 찾아들어올 때이다. 필립과 앰브로즈 또한 그 덫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덫에 걸린 두 남자가 뜨겁게 사랑하고 욕망한 ‘레이첼’- 그녀의 진실을, 참모습을 나는 좀 더 선한 쪽으로 해석하기에 이 작품의 결말은 몹시도 쓸쓸하고 애잔하다. 자, 필립과 앰브로즈의 눈이 아닌 당신만의 시선으로 '레이첼'을 바라보고 싶지 않은가?


덧: 작품을 읽을 분은 이 책 첫머리에 실린 로저 미첼 감독의 서문은 일단 넘기고 본 작품부터 읽으시라. 큰 스포일러는 없지만 그래도 작품을 다 읽은 뒤에 서문을 읽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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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3-23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팁~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