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에 대하여 찰스 부코스키 테마 에세이 삼부작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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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존재 그 자체`라는 부코스키와 그의 집에 둥지를 틀게 된 떠돌이 고양이 9마리. 그들의 공통점은 `자유로운 영혼`이 아닐까. 속박된 삶이 아닌 자유를 누리는 존재들. 고양이 안고 흐뭇해하는 부코스키 사진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게 된다. 냥덕후 부코스키의 애정만땅 고양이 헌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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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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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덥다, 소리도 더울 만큼 덥다. 이토록 무더운 여름날엔 오싹오싹 공포물도 좋지만, 나처럼 공포물을 즐길 수 없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에게는 추리물이 어떨까?


누구나 한번쯤 추리소설에 열광하는 때가 있을 듯하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를 마칠 그 무렵까지가 최고였다. 그때는 아마 날마다 추리소설(만) 미친 듯이 읽어댔다. 너무나도 유명한 코난 도일의 소설은 물론, 애거사 크리스티, 애드거 앨런 포, 앨러리 퀸, 모리스 르블랑…. 그들이 만들어낸 홈즈, 포와로, 뒤팽, 뤼팽 등의 ‘탐정’에 흠뻑 빠졌다.
 
추리소설에 대한 열광은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에 대한 열광으로까지 이어졌다. ‘추리형식’을 갖춘 영화라면 정신을 못 차리고 봤다. 물론 이런 기호는 훗날 내가 ‘필름 느와르’를 좋아하게 된 데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필름 느와르’는 여전히 좋아하는 장르인데 언제부터인가 ‘추리소설’은 읽지 않게 되었다. 아마 그저 ‘재미’만을 추구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지도 모르고, 웬만한 유명한 ‘추리소설은 다 읽었다’라는 오만한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게 되면서 살짝 다시 ‘추리소설’에 애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존 르 카레의 작품은 장르적으로 추리소설, 미스터리 문학에 속하지만 읽다 보면 흔히 생각하는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공식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에 비해 그의 소설은 좀 지루하다 여겨질 정도인데 전통적인 추리소설이 ‘중요한 사건과 이야기’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비해 존 르 카레 소설에서는 중심 이야기와 크게 상관없을 듯한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문장의 흐름도 가파르지 않다. 그래서 전통적인 추리소설 읽기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지루한 소설’이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문체나 묘사, 작품 속 세계관 등에서 ‘문학적’으로 뛰어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 또한 그렇다. 장장 600여 페이지의 이야기 속에서 중심 사건과 탐정 ‘필립 말로’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만 추려본다면 절반 이상은 잘라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잘라내도 될 것 같은' 그 절반이 이 책이 여타의 추리소설과 ‘다른 위치’를 점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어 본 사람이라면 레이먼드 챈들러나, 레이먼드 카버, 스콧 피츠제럴드 등의 이름을 종종 접했을 것이다. 하루키는 공공연히 이들 작가를 좋아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챈들러의 책을 읽고 나니 하루키가 레이먼드 챈들러를 왜 ‘그는 나의 영웅이다.’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간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에서 뻗어나갔고, 고독한 분위기, 모든 사건이나 사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건조하면서도 한없이 쓸쓸하고 서정적인 문체 등등 챈들러의 소설이 없었다면 하루키의 소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 중 어떤 것을 먼저 읽을까 하다가 주저 없이 <기나긴 이별 : The Long Good Bye (1954)>을 선택했는데, 이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제목에서부터 쓸쓸하고 황량하지만 어딘지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정서가 이 책을 지배한다. 조금 마초 같기는 하지만 탐정 ‘필립 말로’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부패와 범죄가 난무하는 쓸쓸하고 냉소적인 대도시- 그곳에서 ‘정의’에 대한 열망을 겉으로는 ‘냉소주의’로 애써 감추고 묵묵히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 필립 말로- 그가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 그가 사람과 사물, 도시를 보는 시선 하나하나에서 황량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특히나 지금까지 내가 알아온 ‘탐정’들이 불타는 사명감으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필립 말로는 ‘이 일을 때려치우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하고 있다.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은가.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챈들러는 자신의 글 쓰는 재능을 살리고 생활비도 벌 목적으로 싸구려 통속 소설인 펄프 픽션(pulp fiction)을 쓰기로 결심, 이런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챈들러의 시작은 ‘펄프 픽션’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의 챈들러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비극은 아름다운 것들이 젊어서 죽는다는 데 있지 않아요. 다만 아름다운 것들이 늙고 추잡해지는 데 있는 것이죠. (기나긴 이별, p.545)’ ‘이별을 말하는 것은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다. (기나긴 이별, p.601)’ 이런 문장을 쓰는 싸구려 통속소설 작가가 세상에 그리 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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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6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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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궁금하다. ‘삶이란 행복한 것 같아요? 행복하기 보다는 슬픈 것 같아요?’라고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대부분은 어떻게 대답할까? 돈이 많고 건강하고 권력도 있고 명예도 있고 이런 것들을 다 가진 사람이라면 사는 게 행복할까? 반대로 그렇지 못한 이라면 사는 게 늘 불행할까? 사람의 평생을 80년이라고 가정한다면 80년 내내 행복한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아주 어릴 적에 ‘새옹지마’라는 고사 성어를 알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사람 사는 건 좋을 때도 있지만 결국엔 나쁠 때도 늘 뒤따라오는 것 같다고…. 그러니 지금 아무리 좋거나 행복하다 한들 언젠간 그 행복도 조금씩 사그라질 것이고 불행하다 한들 다시 행복의 기운이 찾아올 것이라는….

굳이 삶을 행복과 슬픔, 두 가지 중 하나로 정의하라 한다면 난 그런 것 같다. 산다는 건 기본적으로 슬픈 가운데 가끔 행복이 찾아오는 게 아닐까. 태어나자마자 죽어가니까 삶은 슬프다(하지만 죽음이 꼭 슬픔인가? 하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떤 의미로 죽음을 '해방'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어가는 과정이 모두 슬픈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등바등 살아봐야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삶은 슬프다. 내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 사람도 ‘지금’ 결국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그 죽어가는 길 사이사이에 행복과 웃음이 찾아온다. 흐린 날이 있지만 반짝반짝 해가 비치는 날도 있는 것처럼. 삶은 그래서 그런 순간을 되도록 많이 간직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아닐까. 그래서 죽음이 임박한 순간 자기 삶을 되돌아 볼 때 햇빛이 비치던 때가 더 많았다고 기억한다면 그 삶은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늘 그렇게 빛나는 때를 찾는 것도 어렵다. 하루 24시간 일년 열 두 달 환하게 빛나기만 한다면 그 빛의 소중함도 모를 뿐,더러 너무 눈부셔 그늘로 도망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평온한 삶이란 기본적으로는 슬프지만 찬 이슬 보다는 따뜻한 온기가 베어 나오는 쪽에 몸과 마음을 두고 있는 상태는 아닐까 싶다. 내게는 체호프의 작품이 딱 그런 느낌이다. 체호프의 단편을 읽다 보면 ‘삶이란 사실 무척 슬픈 거란다. 살기 힘들지? 힘든 게 당연한 거야. 산다는 건 정말 고달픈 일이거든. 하지만 늘 그렇게 힘들기만 한 건 아니야. 가끔 좋은 일도 생기지. 그렇다고 그 좋은 일만 목이 빠져라 기다릴 수는 없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고 찾아와도 정작 본인은 모르고 지나갈 때도 많거든. 그러니까 그저 담담한 상태로 살아가는 게 가장 좋은 거야. 그래야지 불행이 찾아왔을 때도 크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행복이 찾아왔다가 사라질 때도 크게 낙담하지 않을 수 있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는 이 작품 외에 ‘굽은 거울’ ‘어느 관리의 죽음’ ‘마스크’ ‘애수’ ‘하찮은 것’ 등 17편 정도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맨 끝에 실려 있는데 나는 이 작품부터 읽었다. 예전에 본 영화 <더 리더>에서 마이클이 한나에게 이 작품을 읽어주는데 한나가 무척 좋아한 기억이 나서 먼저 읽어보고 싶어졌다. 읽고 나니 한나가 왜 그렇게 이 작품을 좋아했는지, 왜 이 작품에 몰입했는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무척 아름답고 슬프고 애잔한 작품이었다.

바닷가 휴양지에서 구로프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점차 그 여인에게 빠져 휴양지에서 하룻밤 정도 상대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고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는 부인 ‘안나’와 그런 사이가 된다. 구로프도 그렇지만 안나 역시 결혼한 사람이다. 휴양지에서의 하룻밤 정도로 생각한 사이였는데 현실로 돌아와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둘 모두 깨닫는다. 환상, 꿈 혹은 신기루처럼 여겨졌던 휴양지에서의 생활이 현실 생활의 그것보다 더 값어치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들은 비밀스러운 둘만의 생활을 계속 위태롭게 유지한다. 남들이 보는 진짜 삶은 따로 있지만 구로프와 안나에게는 둘이 은밀히 만나는 작은 호텔방이, 그 호텔방에서의 짧은 시간이 진짜 삶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구로프도 안나도 알 수 없다.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둘의 만남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정말 의미 없는 매일 밤이고, 흥미도 가치도 없는 나날들이다! 미친 듯한 카드놀이, 폭식, 폭음, 끝없이 이어지는 시시한 이야기들. 쓸데없는 일과 시시한 대화로 좋은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고 결국 남는 것은 꼬리도 날개도 잘린 삶. 실없는 농담뿐이다. 정신 병원이나 감옥에 갇힌 듯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고 외치던 구로프의 삶이 안나를 만나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은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그들의 진짜 삶은 둘만 알 뿐이고 그 둘 모두 누군가에게 미친 듯이 자신들의 진짜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구로프는 ‘누구나 밤의 덮개 같은 비밀 아래서 자신만의 가장 흥미로운 진짜 생활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구로프 자신의 진짜 삶은 호텔 방 안에 깊숙하게 숨겨둔 채 거짓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 진짜 삶 또한 언제 어떻게 부서질지 모른다. 그런 불안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남들보다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없는 농담 같았던 시시했던 그의 인생에 안나라는 볕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르지만…. 이점은 안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 진짜 삶을 지켜가기 위한 안나와 구로프의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눈물겹기도 하다. 그늘진 방에 슬며시 들어온 햇볕을 붙잡아 두기 위한 노력…. 현실은 무겁고 고단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행복한 순간이 찾아왔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비록 인생은 슬프고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따뜻한 쪽에 몸을 많이 두고 있으면 행복하다 여길만한 그런 것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체호프의 작품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우울한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지만 묘하게도 절망하거나 낙심하게 되지는 않는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 돈을 벌고자 한때는 농담처럼 가벼운 단편을 써댔던 체호프. 슬플 때도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 있음을 알고 있던 그였기에 이런 작품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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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8-0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편 소설집이라고는 단 두 권 읽어 본 게 다인데 (김애경씨 것과 레이먼드 카버 것) 두 작품 다 전체적으로 너무 우울해서 유명하다는 단편 소설집은 다 우울하고 나랑 안 맞는군 하며 단 두 권으로 밑도 끝도 없는 결론을 내렸는데 체호프 좋군요. 잠자냥님께서 묘하게도 절망하거나 낙심되지 않는다고 하시니 조만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잠자냥 2016-08-03 14:27   좋아요 1 | URL
저는 단편을 좋아해서 단편 작품을 많이 읽었는데요. ㅎㅎ 현대 단편 작가들 가운데 체호프에게 빚지지 않은 작가들은 없을 것 같네요. ㅎ 우울한 작품을 쓰는 작가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모두 말입니다. 체호프 작품 중에도 우울하고 슬픈 것도 많지만 유머러스한 작품도 분명 있답니다. 그나저나 레이먼드 카버는 정말 너무 우울하잖아요? ㅋㅋ
 
또 고양이 - 사계절 게으르게 행복하게
미스캣 지음, 허유영 옮김 / 학고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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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도 귀엽고 글도 따뜻하고 귀엽다. 보는 내내 우리 냥이들 행동이 떠올라서 마구 웃음 짓게 된다. 고양이 좋아하는 이들에겐 고양이처럼 딱 힐링되는 책이다.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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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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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때리고 밟고 하는 물리적 폭력,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 등등 파괴적인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폭력은 언제나 늘 나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폭력시위’는 미디어에서 항상 ‘나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는 이런 눈에 보이는 폭력(지젝은 이를 ‘주관적 폭력’이라고 말한다)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란 무엇일까?

지젝이 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상징적 폭력 : symbolic violence)’은 달리말하자면 ‘구조적(systemic violence)’인 폭력이다. 구조적인 폭력이란 쉽게 말해 사람들이 주관적인(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폭력 시위, 혹은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들 등등. 이렇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시스템이 바로 ‘구조적인 폭력’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구조적 폭력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조적 폭력을 만드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서고 있는 이들의 ‘위선’에 속거나 현혹되어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지젝은 그런 인물들로 빌게이츠나 조지 소로스 등의 예를 든다(구글, 이베이, 인텔, 아이비엠 등의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선을 베풀면 그들의 무자비한 이윤 추구 행위도 상쇄된다는 듯이 엄청난 기부를 하며 사회적 책임, 인도적 책임을 강조한다. 지젝은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라며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모든 행위가 ‘거대한 기만’ 이라고 주장한다.

지젝은 이런 구조적 폭력이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임을 지적하며 그들을(혹은 그런 시스템을) 바로 모든 진보적 투쟁의 적으로 간주한다. 원제가 <Violence : Six Sideways Reflections> 인 이 책은 1장에서 이렇게 폭력의 의미를 살펴 본 후 이어 폭력의 원인, 언어와 폭력,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테러리즘 등의 문제를 살펴본다. 물론 이 안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종교’가 갖는 폭력성에 대한 성찰도 담겨있다. 주된 내용은 사람들이 가진 이웃에 대한 공포(폭력적 타자)를 이용해 내부 체제를 공고화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비판과 이런 폭력적인 세계를 과연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젝이 내놓은 해결책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소외’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더 많은 의사소통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는 말을 인용한 지젝은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태도에 더해 ‘서로 비켜서기’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슬로터다이크의 주장에 동의한다. ‘때로는 어느 정도의 소외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며 ‘가끔은 소외가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이 될 때도 있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이 주장에는 꽤 수긍이 간다. ‘인도주의적 차원’이라는 명분에서 이루어진 서구의 이른바 제3세계에 대한 간섭이 오히려 역사상 언제나 큰 문제를 일으켜오지 않았는가?

지젝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제안하기도 한다. 그는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감추라는 요구’가 가장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참여와 행동이 허락된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 안에서는 진정한 자유가 주어져 있다고 사람들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지젝은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 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더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어 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다.’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자본주의를 가장 잘 작동하게끔 하는 메커니즘이고 이 민주주의 안에서 사람들 모두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듯한 착각(그러나 가짜 ‘자유’)를 심어주는 것이 오늘날 지배 계급이 원하는 것이다. 지젝은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라며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지젝은 ‘민주주의 메커니즘이라는 게 자본주의적 재생산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기구의 일부’라며 이런 의미에서 알랭 바디우가 ‘오늘날 궁극적인 적의 이름이 자본주의, 제국, 착취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주장한 의견에 동의를 표한다. 때문에 자본주의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가로막는 민주주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아주 예전에 <삐딱하게 보기>로 처음 만났다. 그의 저작 중에는 가장 쉽기 때문에 입문서로 적당하다던 그 책은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지만 지젝의 온갖 현란한 사고의 결과물을 만나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 책은 오래 전에 읽은 터라  내용의 99%이상은 잊어버렸다. 그래도 남은 게 있다면 지젝은 정말 똑똑하다, 그러나 읽기 어렵다 정도랄까. 그러나 그의 저작은 집중해서 읽다보면 100%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탄성이 나오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힘이 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또한 읽기 어렵다는 지젝의 저작치고는 그래도 쉽게 읽히는 편이고 번역도 괜찮다(원문과 비교를 할 수준은 못되지만 국내에 번역된 지젝 저작이 기본 문장도 안 되는 경우가 많음에 비한다면 이 책은 그런 이유로 읽기 힘들지는 않다). 또한 지젝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문학, 영화, 회화, 음악 등 여러 대중매체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기에 흥미로운 점도 많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적 = 폭력 시위’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그런 폭력을 낳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 눈을 돌려야한다는 깨우침을 준다는 점에서도, 오늘날 정치적인 문제가 모두 문화적인 현상으로 희석된다면서(대표적인 예로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이론) 정치적 투쟁을 ‘관용’의 문제로 돌리는 적들의 이데올로기에도 현혹되면 안 된다는 깨우침을 준다는 점에서도 꼭 한 번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지젝이 내놓은 제안 중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만, 적어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이 나라에서 바로 그 민주주의가 승자독식 시스템을 공고화하고 지배계급의 배만 불리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그 시스템을 돕는 일을 계속 하는 게 온당한 일일까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이 폭력적인 시스템이 계속 굴러가도록 하는 일에 동조하기를 멈춘다면 지젝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온한(?) (그러나 실현 가능성 제로인) 상상을 조금 해본다.

‘모든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프레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다. 지젝이 말했듯 ‘계급 지배 기구로서의 국가라는 존재와 폭력은 분리될 수 없으며 바로 이 때문에 종속적이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국가라는 존재 자체가 폭력’이기에 그의 말처럼 ‘이와 같은 엄격한 의미에서 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의 국가에 저항하는 모든 폭력은 궁극적으로 ‘방어적인’ 것이 되지 않겠는가. 아랍에서 일어난 혁명의 기운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적’을 상대로 폭력을 사용할 것인지,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인지의 여부의 문제는 결국 지젝의 말처럼 ‘언제나 전략적 고려의 문제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오늘날 악을 대표하는 좋은 예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사회적 유대가 무너져 가는 폭력적인 세상에 살아가는 평범한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런 전반적 파괴와 오염을 조성하는 데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 돈을 써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부터 쏙 빠져나오는 자들, 빗장 공동체에 살면서, 유기농 식품을 사다 먹으며, 자연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악이다. (58~59쪽)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그 유명한 ‘자유로운 순환’의 물꼬를 텄지만, 여기서 자유롭게 순환하는 것은 ‘사물들’(상품들)에 국한되며, ‘사람들’의 순환은 점점 더 많은 통제를 받고 있다. (149쪽)

진정하고 유일한 해결책은 진정한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 이민 관리국의 벽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할 필요가 없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해결책이다. (151쪽)

왜 오늘날에는 그토록 많은 문제들이 불평등이나 착취나 불의의 문제가 아니라 불관용의 문제로 인식되는 것일까? 왜 해방이나 정치적 투쟁도 아니고, 하다못해 무장투쟁도 아니라 관용이라는 게 해결책으로 제안되는 것일까? 즉각 떠오르는 답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속에 내재된 이데올로기, 즉 ‘정치가 문화화’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가 문화화 되면서 정치적인 차이(정치적 불평등이나 경제적 착취로 인해 발생하는 차이들)는 본래의 정치적 의미가 중화되어 ‘문화적’ 차이, 즉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한다. 그리고 이런 문화적 차이나 생활 방식의 차이는 이미 정해진 것, 극복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199쪽 - ‘관용은 이데올로기다’)

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자유로이 결정하라는 요청을 받지만 사실은 그렇게 할 것을 강제당하는 역설적인 순간에 처하곤 한다. 우리는 모두 조국을, 혹은 부모를 사랑해야만 한다. 이런 역설, 즉 자유로운 의지나 선택을 내세우지만 결국 그것이 의무이며,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데 마치 있는 것처럼 외양을 유지하는 역설은, 거절이 기대되는 제스처(제안)라는 텅 빈 상징적 제스처와 그 개념상으로 상호의존적이다.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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