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할 것 같았다. 아무리 보뱅이지만, 성 프란체스코라니. 가난한 이와 동물들의 수호성인(聖人) 프란체스코- 성인(聖人)은 말 그대로 성인,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 비루하기 짝이 없는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애초부터 나와는 다른 종자라는 생각에서 위인이라는 존재에게 딱히 관심이 없는데 하물며 성인의 삶이야 말해 무엇하랴. <지극히 낮으신>은 그래서 보뱅의 책인데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문장이 읽고 싶어서 완벽하게 외면은 하지 못하던 이 책.

결국 늦가을, 이 책을 손에 든다. 책을 펼치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그 이름 “지슬렌”- “잉크로 쓰인 모든 길을 웃음으로 해방시킨 지슬렌 마리옹에게”라는 헌사가 눈에 들어온다. 이, 지독한 인간. 보뱅에게 지슬렌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를 수 없었던, 그 조그만 단어만으로 명명하기에는 부족하기만한 존재. 이 지독한 사랑꾼 보뱅은 이 책을 평생의 연인이자 절대적 이름과도 같았을 여인 지슬렌에게 바치면서 시작한다.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이 헌사를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보뱅에게 지슬렌이 절대적인 그 무엇이었다면 프란체스코에게는 신, 하느님이 절대적인 그 무엇이었다. 성 프란체스코에게 이 세상은 “잉크로 쓰인 모든 길을 웃음으로 해방시킨 하느님에게”라는 이름으로 헌사할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나에게는 그런 존재가, 대상이 과연 무엇일까. <지극히 낮으신>은 그런 질문을 남긴다.

오래전 카잔차키스의 눈으로 그린 <성자 프란체스코>를 만난 적이 있다. 세속에 찌들대로 찌든 나날을 살다 보면 가끔은 그 속세를 벗어난 길을 걸어간 이들을 만나고 싶어진다. 그때가 그랬던 것 같다. 뭐랄까, 하도 자극적인 음식만 먹다보니 사찰 음식처럼 담백한 맛이 그리워지는 그런 거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사찰 음식은 하루, 또는 한 번이면 족하다. 카잔차키스가 그려나간 프란체스코의 삶이 그랬다. 아니, 성 프란체스코라는 사람의 인생 자체가 그랬겠지. 남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 부를 누리면서 술과 여자 도박 등 온갖 향락적인 삶을 마음껏 누리던 사람이, 어느 날 문득 갱생하여, 그 세속의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특권을 모두 내려놓고 스스로 나환자를 비롯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아니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고행을 선택하고 실천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 삶에 잠시 경도되기도 하지만 내가 갈 수가 없는 길. 인간은 누구나 자라 성인(成人)이 되지만 성인(聖人)은 아무나 될 수 없기에, 프란체스코의 삶은 그래서 내겐 너무나 먼 길, 하늘의 별 같은 이야기처럼 뇌리에 남았을 뿐이다.

역시 보뱅은 달랐다. 성자 프란체스코의 삶을 기록하지만 그의 삶을 일대기 형식으로-그렇게 뻔하게 그려나가지 않는다. 프란체스코의 삶에서 결정적인 어느 한 때의 장면, 장면만을 스케치하듯 그리면서도 프란체스코라는 한 사람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재현한다. 그렇다고 보뱅이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완벽하게 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극히 낮으신>은 “아이는 천사와 함께 떠났고, 개가 그 뒤를 따라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거듭 반복된다. 보뱅은 이 문장이 프란체스코에게 딱 들어맞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지만,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리니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고 믿으며 그 사람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의 참모습을 놓치기 일쑤”(12쪽)이므로. 또 보뱅은 “아이와 천사, 웃음과 침묵, 장난기와 우아함을 쫓아가는 이 개”가 바로 프란체스코라고 말한다. 보뱅의 장점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평범한 소재에서도 다르게 볼 줄 알고 달리 표현할 줄 아는 그, 크리스티앙 보뱅. 프란체스코를 아이와 천사를 즐겁게 쫓아가는 한 마리의 개로 보다니. 이 찬탄은 책을 읽어나갈수록 구체화된 모습으로 나의 눈앞에 드러난다.

프란체스코는 앞서 말했다시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무 살 무렵까지는 그 부와 향락을 즐기면서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 가진 게 많았기에 결핍도 없었고 잘생겼기에 아름다운 여자들이 그를 따른다. 그러므로 그는 이 삶에서 애써 구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때로 인간은 신기한 존재라서 그는 어느 날 문득 여행을 떠난다. 이것은 예전의 여행들과는 달라서 “명예도 무기도 예고도 없는 여행”이다. 아무도 그를 모르는 곳, 로마에서 “예전에 더없이 아름다운 여자들 주위를 서성였듯이 이제 그는 거지들 주위를 배회”한다. 보뱅은 그런 프란체스코를 “사냥감을 찾는 사냥개”(70쪽)와 같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프란체스코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다. 그는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부富를 구하는 것이다.”(70쪽)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싶은데 이어지는 문장이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진리는 분명 높은 곳에 있기보다 낮은 곳에 있음을, 충족 속에 있기보다 결핍 속에 있음을 그는 본능적으로 감지한다.”(71쪽)는 이 문장.

진리(眞理)- 과연 무엇이 진리일까? 보뱅은 진리란 결코 우리 외부에 있지 않다고, “진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아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 속에 있다.”(71쪽) 말한다. 진리는 그 무엇으로도 바래지 않는 기쁨으로 보뱅에 따르면 진리는 “죽음조차도 앗아갈 수 없는 보물”이다. 그리고 프란체스코는 그 진리를 하느님, 그 하느님 안, 가난한 자들의 삶속에서 찾았다. 프란체스코는 “가난이 내포하는 물질적 헐벗음에 매료”당한다. 부잣집 도련님의 가난코스프레인가? 가난을 알기 위해 가난을 배우려는 것일까 잠시 의혹이 싹튼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말뿐인 사랑, 사랑 없는 사랑”의 공허함을, 그것이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구멍이 숭숭 난 부서지기 쉬운 감정”임을 안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이해타산에 부합하는 가난한 자를 꿈꾼다. 사제들은 그들의 소망에 부합하는 가난한 자를 꿈꾼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꿈꾸는 것이 없다.” 그는 “가난이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며 “가난은 어떤 결함이며 고통이며 상처”이고 “사랑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없는 무엇”임을 안다. 그리하여 그는 가난한 자들 속에서, 그 채울 수 없는 결핍에서 사랑을,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곧 프란체스코에게 진리가 된다.

보뱅은 “한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의 삶이 남몰래 지향하는 대상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이 대상에 대고 말한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그렇다고. 그가 침묵 속에서 대면하는 이 대상에 모든 게 달려 있다고. 그리하여 인간은 “이 대상에게서 인정받기 위해 사실과 증거를 축적했으며, 이 대상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현재와 같은 삶의 모습에 이르렀다.”(134쪽)고. 프란체스코가 남몰래 지향했던 이 대상은 대개의 인간들이 그렇듯이 아버지도, 어머니의 세계도 아닌 하느님의 세계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가장 결핍을 느꼈을 이들은 가난한 자들이다. 인간은 사랑이 자신들을 가득 채워 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보뱅 또는 프란체스코는 말한다. 사랑은 “아무것도-당신들 머릿속에 뚫린 구멍도, 마음속 심연도-채워 주지” 않는다고. “사랑은 충만한 상태라기보다 우선 결핍”이므로 “사랑은 결핍의 충만함”이므로(147~148쪽). 프란체스코는 사랑이 결핍임을, 결핍의 충만함임을 알았기에 하느님과 가난한 이들의 삶 속으로 뛰어 들었고 그것이 그에게는 곧 진리이자 사랑이었다.

보뱅에게는 그 진리가 지슬렌이라 불리던 한 여인이고 그 사랑이 아니었을까. 보뱅은 지슬렌을 잃고 쓴 글에서 그녀를 이렇게 묘사한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두 번 결혼했고, 수많은 관계로 이어져 있던 너. 너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 더 자유롭고, 더 지혜롭고, 더 사랑이 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그리고 지슬렌을 표현하는 이 언어, “자유와 지혜와 사랑은 세 단어이나 똑같은 말”이라고 덧붙인다. “각 단어가 다른 두 단어와 유리되면 알맹이도 의미도 없는 텅 빈 언어가 되어버리므로.”(<그리움의 정원에서>, 44쪽) 자유와 지혜와 사랑은 곧 지슬렌이며, 그녀 없이는 텅 빈 언어가 되어 버린다. 그리움, 공허, 고통, 기쁨은 지슬렌이 보뱅에게 남긴 보물(<그리움의 정원에서>110쪽)로 그 보물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보뱅에게 지슬렌은 결핍의 충만함을 알려주는 사랑 그 자체이며 진리인 것이다.

보뱅은 인간은 이런저런 도시에서, 이런저런 직업을 갖고, 이런저런 가정에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곳은 사실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고, “우리가 정말로 살고 있는 곳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곳이 아니라, 무얼 희망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희망하는 그곳이며, 무엇이 노래하게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노래하는 그곳”(<지극히 낮으신>, 58쪽)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그리움의 정원에서>의 “진정한 거처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와 꼭 들어맞는다. 프란체스코도 보뱅도 “자신의 주인이 계시는 집”, ‘지극히 낮으신 분’이 어디에 거하는지 알고 있던/알게 된 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찾던 그 ‘지극히 낮으신 분’이라는 존재는 “세속의 빛이 가까스로 닿는 곳, 삶에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는 곳”(73쪽)에 있었다. 그곳에서 삶은 “단순한 경이요, 조촐한 기적”이 된다. 아이와 천사의 웃음을 따르던 한 마리의 개, 프란체스코- 자유와 지혜와 사랑이라는 이름의 지슬렌을 따르던 한 마리의 개 보뱅, 나는 무엇을 따라가는 한 마리의 개가 되어야 할 것인가. 나에게 "잉크로 쓰인 모든 길을 웃음으로 해방시킬" 그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이 가을, <지극히 낮으신>이 내게 남기는 묵직한 질문이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3-11-13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가 가기 전에 보뱅의 책을 읽겠다는 다짐.

잠자냥 2023-11-13 15:15   좋아요 0 | URL
최근에 읽은 책들 중에 보뱅의 문장처럼 제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문장이 공허하지 않아서 더 울림이 남다른....

새파랑 2023-11-13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지슬렌‘인가요?ㅋ ‘지슬렌‘에게 마치는 또다른 책이군요. 리뷰 초반만 읽고 패쓰 했습니다 ㅋ 오늘 바로 구매해야 겠습니다.

프랑스에 지슬렌이 있다면 한국에는 잠자냥님?


보뱅 = 은오님
지슬렌 = 잠자냥님

잠자냥 2023-11-13 15:16   좋아요 2 | URL
지슬렌에게 바치는 또 다른 책입니다만 지슬렌은 헌사 외에 더 나오지는 않아요.
그러나 어떤 이의 눈에는 지슬렌이 보입니다. ㅎㅎㅎ

아니 그나저나 은바오를 보뱅에게 비유하기엔 은바오는 글을 쓰지 않음..,,

독서괭 2023-11-13 17:07   좋아요 2 | URL
판다 손으로 글쓰기는 좀 무리겠죠.. 슬프다..

잠자냥 2023-11-13 17:22   좋아요 2 | URL
먹고 자고 싸기 바쁜 은바오.

라파엘 2023-11-13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된 책으로 읽고 그 책이 절판되어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새로운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더 멋지게 나왔군요!! 보뱅의 문장에 버금가는 자냥님의 멋진 리뷰를 기쁘게 읽었습니다~!!! 😃 👍👍

참고로, ˝아이는 천사와 함께 떠났고, 개가 그 뒤를 따라갔다˝ 라는 문장에 등장하는 천사가 바로 라파엘입니다~! 😆

잠자냥 2023-11-13 15:39   좋아요 1 | URL
네, 전에 저도 이 책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버전을 보관함에 담아돴었는데(새로운 번역이 나오길 바라면서...) 이렇게 출간되어서 읽게 되니 기쁘더라고요.

그 라파엘 천사 저도 좀 따라가보고 싶네요. ㅎㅎ

독서괭 2023-11-13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다음 “구간 세권 작파 후 살 책” 후보로 임명합니다. 보뱅의 문장에 반하신 마음이 뿜뿜 느껴지는 리뷰네요!

잠자냥 2023-11-13 17:24   좋아요 2 | URL
괭, <가벼운 마음>처럼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다락방 2023-11-13 18: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리뷰 읽고나니 <그리움의 정원에서>가 읽고 싶어졌는데, 잠자냥 님 이 책은 구매자평만 있네요? 저는 이 책으로 다시 보뱅 도전합니다. 안좋다면서 자꾸 도전하게 되네요.. 인생.. 잠자냥 알고 달라지고 있다...

잠자냥 2023-11-13 18:3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우리 오늘 밤 보뱅으로 한몸이 아니다 이상하닼ㅋㅋㅋㅋㅋㅋ 일치단결 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3-11-13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잉크로 쓰인 모든 글을 웃음으로 해방시킬˝로 읽었네요.ㅋㅋㅋ
잠자냥 님의 글이라면 웃음으로 해방시킬 수 있는뎅...ㅋㅋㅋ

잠자냥 2023-11-14 09:34   좋아요 1 | URL
나무 님 요즘 살짝 우울하신 것 같은데 제가 웃음으로 해방시켜 드리겠습니다! ㅋㅋㅋㅋ

은오 2023-11-14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뱅의 필력을 가졌다면 잠자냥님을 두고 이런 책을 썼을텐데!
그 존재는 이미 찾았습니다ㅋ

잠자냥 2023-11-14 18:43   좋아요 1 | URL
쓰지도 않으면서 필력 타령은….

은오 2023-11-14 20:21   좋아요 1 | URL
제가 글을 올려도 잠자냥님 피드에 뜨지 않을걸 생각하니 쓰고싶지 않네요ㅜㅠ

잠자냥 2023-11-14 20:46   좋아요 2 | URL
뻥은…..오

은오 2023-11-14 21:42   좋아요 2 | URL
근데 볼수록 흐뭇하네요 리얼 커플프사 ㅋㅋㅋㅋㅋㅋㅋ
 
지극히 낮으신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3년 8월
평점 :
품절


프란체스코와 보뱅과 하느님의 만남이라니. 신을 믿지 않는 나같은 사람조차 울릴 만한 조합이다. 아름다운 문장과 그 문장을 공허하게 만들지 않을 내용 있는 그들의 흔적이 어우러져 깊은 감동을 남긴다. 가슴 미어질 지경의 아름다움. “사랑은 결핍의 충만함”이라는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3-11-1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뱅! 저도2023년부터 보뱅 팬 하겠습니다. 이 책도 빨리 구매해야겠군요~!!

잠자냥 2023-11-12 23:39   좋아요 1 | URL
최근에 책 다 사서 모으는 유일한 작가입니다. ㅎㅎ

유부만두 2023-11-13 0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잠자냥님 울었어요?

잠자냥 2023-11-13 10:04   좋아요 0 | URL
울지는 않았고..; 진짜 가슴이 미어질 듯한 경험! 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3-11-13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두기만 해도 좋은 보뱅, 읽으며 더 좋겠죠. 근데 왜 저는...

잠자냥 2023-11-13 15:25   좋아요 0 | URL
왜 저는!? 뭐죠? 왜요 왜..... 언능 읽으세요. ㅎㅎ
 
풀꽃
후쿠나가 다케히코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에 의해서만 지상의 고독에서 이데아의 세계로 날아오를 수 있다”고 믿은, 별을 바라보느라 발밑을 보며 걸어가는 평범한 타인들의 사랑을 어쩌면 이해하지 못해 자기만의 고독 속에 갇혀버린 어느 청춘의 이야기. 예상하지 못한 BL적 요소. 일본 사소설 속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의 한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오 2023-11-12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완전 제얘긴데
잠자냥님이 아니면 모든게 의미없다..

잠자냥 2023-11-12 19:07   좋아요 0 | URL
징그럽다규 이 곰탱아!!! ㅋㅋㅋㅋㅋ

은오 2023-11-12 19:28   좋아요 0 | URL
귀엽다고 더 잘해주시려나 했건만..
ㅜㅜ

잠자냥 2023-11-12 19:32   좋아요 0 | URL
줄담배 그만 피고 대나무 먹자 곰탱아…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인과 섞이기보다는 은둔자가 되기를 즐긴다는 점에서 나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냅은 본질적으로는 사랑이든 우정의 관계에서 끝없이 완벽한 사랑과 애정을 갈구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욕구들>에서도 부모를 향한 애정&인정욕구가 중독과 거식증으로 나타나 보였는데….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오 2023-11-10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반대로 제가 냅 언니를 좋아하나봅니다

잠자냥 2023-11-10 23:28   좋아요 4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냅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요즘은 판다도 명랑한 은둔자를 읽고 감상을 나누고…. 참 놀랍네요. 어느 대나무 숲에서 은둔하시는 판다 님인지…?

은오 2023-11-10 23:32   좋아요 3 | URL
초면에 죄송하지만.... 친구신청좀 받아주시면 안되나요ㅠ 제가 판다라고 무시하시는건가요ㅠ?

잠자냥 2023-11-10 23:35   좋아요 2 | URL
아니 그건 아닙니다. 인간도 317명 대기 중입니다….

은오 2023-11-10 23:36   좋아요 0 | URL
헐......ㅠ

우끼 2023-11-11 10:31   좋아요 2 | URL
헐…. 판다님이 알라딘에 새로 오신줄로 착각했는데 이름보니 은오님이네요
그렇다면 잠자냥 대나무숲에서 은둔하는 분이겠거니…
아니 근데 왜 쫓겨났죠?? 판다에게 대나무를!!!

은오 2023-11-11 12:31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이 어제 징그럽다고 쫓아내셔서.. 대나무를 못먹었더니 배가너무고프네요..

잠자냥 2023-11-11 17:27   좋아요 0 | URL
곰탱이가 지꾸 사랑한다고 결혼해달라고 하니까 징그러워서 이웃 끊었어요;;

얄라알라 2023-11-11 0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오프라인이었으면 잠자냥님 빼뺴로 300박스 받으셨을 인기!

은오 2023-11-11 12:35   좋아요 1 | URL
하.. 제가 더 일찍 가서 잠자냥님 책상 위 빼빼로 다 숨겨야겠어요

잠자냥 2023-11-11 17:27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알라님…..



400박스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도 안 시켰지만 그냥 하는 글쓰기 공부> 4일차- 아주 오래전에 읽은 터라 제목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지만 심리학 관련 책으로 기억한다. 그 책에 따르면 목요일 오후, 그러니까 목요일 저녁에는 중요한 약속(소개팅이나 중요한 협상을 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을 잡지 말라는 것이었다. 인간의 생체 리듬에 따르면 일주일 중 목요일, 그것도 목요일 저녁 무렵에 가장 피로함을 느끼기 때문에(심리적으로 금요일은 주말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사람들 기분이 좋기 마련이라나), 예민해지기도 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일주일 중 다른 날보다 중요한 약속에서의 성공률 같은 것이 낮아지기 쉽다는 이야기였다.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던 이야기라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것 같다. 실제로 목요일이 좀 제일 피곤하지 않은가?

어제가 바로 그 목요일이었고, (서울은) 비까지 내려서 추적추적한 날씨에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챙겨서 신촌으로 가자니 지하철 파업으로 사람은 왜 또 그렇게 많던지- 아이고야, 정말 희진쌤 강의만 아니었다면 어제는 정말 수업을 포기했을 것 같은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래도 이번 강의의 마지막 시간이니 힘을 내서 교실로 향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6시 40분으로 수업 시작하기 거의 한 시간 전. 강의실에 아무도 없었다! 흐흐흐. 이걸 노렸지. 그러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선생님께 직접 선물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서(부끄럽습니다), 강의실에 가장 먼저 도착해서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두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공! >_< (암튼 선물 관련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하철 파업 여파로 선생님도 어제는 평소보다 좀 늦은 시간에 도착하셨다. 아아, 그런데, 숨을 잠시 돌리시더니 책상 위에 놓인 선물- 정확히는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시고는 살짝 웃으셨다. 내가 쌤에게 쓴 편지도 바로 꺼내 읽으셨다..... 안 보는 척 지켜보는 나의 심장은 콩닥콩닥 ㅋㅋㅋㅋ (선물 이야기 그만 하자)

쌤은 “탈식민은 내 안에 식민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탈식민이라고 하니까 단어로 인해 반일이나 반미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안에도 이런저런 모순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 예컨대 쌤은 외모주의를 비판하지만 당신 스스로 잘생긴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이런 모순, 이때 “왜?”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는 것, “왜?”라는 사유를 해야, 즉 이 모순을 고민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고.

보편성과 객관성은 구성되는 것으로(making/조작造作) 이때 조작이라는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지어서 만든다는 의미이다. 지식의 권력 관계는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 보편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나 자신이 변화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 언급한 “포지셔닝”은 곧 “글로써 개입하는 실천(투수의 눈/포수의 눈/심판의 눈/관중의 눈 어떤 눈으로 글을 쓸 것인가)”이다. “글로써 개입하는 실천”이기에 “글쓰기가 곧 사회운동이 되는 것”이다.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2016> 같은 글은 사회운동이 되지 못한다. 그런 현상을 바라보는 나를 전시하는 것일 뿐.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좋게 봤던 터라-켄 로치식의 거리두기가 오히려 좋았는데....쌤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겠지만 이런 식의 영화도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시하기는 하지만 그 전시가 곧 다른 이들-그런 세상을 알지 못했던 이들에게 전달하는 파급력이 있지는 않을까?)

이야기는 이렇게 이번 강의 주제 <왜 쓰는가, 왜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가 : 글쓰기의 정치와 윤리>로 넘어갔다. 쌤은 근본적으로 왜 쓰는지, 왜 써야만 하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라고 하면서 다시,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언급하셨다. 여기서 잠깐.... 예전에 읽은 이 책에서 ‘쓰는 동기’에 관하여 내가 메모해둔 부분을 옮겨 본다.


내가 이런 배경 설명을 일일이 하는 것은, 어릴 때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한 작가의 동기를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의 주제는 그가 사는 시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그는 작가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나름의 정서적 태도를 갖게 되며, 그것은 그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이다. (중략) 나는 생계 때문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글을 쓰는 동기는 크게 네 가지라고 생각한다.

1. 순전한 이기심 :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이게 동기가 아닌 척, 그것도 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 건 허위다. 작가의 이런 특성은 과학자, 예술가, 정치인, 법조인, 군인, 성공한 사업가 등, 요컨대 최상층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특성이다. 사람들 절대다수는 그다지 이기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많은 경우 자신이 한 개인이라는 자각조차 거의 버리는 게 보통이다)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다.

2. 미학적 열정 :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끼치는 영향,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 기쁨이기도 하다.

3. 역사적 충동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 정치적 목적 :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292~294쪽)



쌤은 이어서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프란츠 파농의 말을 읊으면서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몸이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 모두에게는 칼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칼자루를, ‘여자’는 칼날을 쥐고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대화를 시도할수록 우리는 피를 흘릴 뿐입니다.”라는 나혜석의 말을 빌려와 여성은 칼날을 쥐고 있으므로 손에 피를 흘린다, 그러므로 다른 칼자루(칼날을 잡고 살아갈 수는 없으니)를 잡아야 한다. 이것은 곧 다른 언어를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고.

쓰지 못하는 것과 아예 쓸 게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 평일 저녁에 이곳까지 온 분들은 대단한 의지, 절실한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쓸 것이 없는데 쓰는 사람이 문제다. 이런 사람들이 글을 쓰면 지당한 말씀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언제 글이 쓰고 싶어지는가? 억울할 때, 외로울, 때 화가 날 때, 연애할 때, 사랑에 빠졌을 때, 그리울 때, 슬플 때, 고생스러울 때 등등 감정이 솟아날 때이다. 감정적인 것이 과연 나쁜가? 인간은 분노하고 억울할 때 할 말이 많다. 이것은 곧 세계와(외부와) 갈등, 투쟁, 억압 상태라는 증거이다. 특히 분노는 인간의 감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구조적으로 억울한 상황이 반복될 때가 있고(젠더/계급 인종/권력 관계 등) 자기 자신의 인생에서 억울했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 리스트를 짜보라,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을 때의 경험 등. 이 리스트가 많은 사람들은 글을 꼭 써라. 인생은 고통이다. 억울한 게 많을수록 글감이 많아진다. 고통이 글쓰기에는 나쁜 게 아니다. 여성이나 장애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끊임없이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끊임없는 결핍과 갈증 상태이기 때문이다. 분노, 결핍, 갈증은 모두 쓸거리가 된다.

언어는 약자에게 최고의 무기이다. 모두가 분신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이 호모사피엔스인 이유는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강자는 매스컴이나 지면 같은 매체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원이 없는 이들도 언어는 갖고 있다. 장 주네를 보라, 그는 노숙자였지만 썼다. 그리고 언어는 읽기와 쓰기에서 나온다(읽기와 쓰기를 해야 하는 이유). 분노와 억울함, 약자라는 상태는 나쁜 것이 아니라 쓰기의 자원이다.

그러나 이때 이런 자원 자체만으로 완성품이 되지는 않는다. 약자라는 자원 그 자체에서만 그쳐서는 안 된다.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예컨대 똑같이 고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있다. 임철우의 <붉은 방>과 정찬의 <얼음의 집>, <슬픔의 노래>, <길 저쪽> 등의 작품. 그런데 임철우의 작품은 고문 피해자의 입장에서 쓴 글이며, 정찬의 작품은 고문 가해자의 입장에서 쓴 글이다. 정찬은 왜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썼을까? 피해자의 시선이나 관점에서 썼으면 더 쉽지 않았을까? 정찬은 이런 작품을 통해서 무엇이 가해자로 하여금 고문을 영광스럽게 했는가를 탐구한다. 가해자들이 왜 그랬는지를 알아야 피해를 또 막을 수 있다(고문의 구조를 이해). 그러나 이때 윤리적 고민이, 치열한 사유가 필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폭력 포르노(고문 포르노)가 되거나 가해자 옹호의 글로 읽힐 수도 있다. 분노를 성찰해야 한다, 가해자와 나의 관계를 성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나는 그런 적이 없는가를 성찰. 여기에서 글쓰기의 윤리가 발생한다.


Maurits Cornelis Escher, <Drawing Hands>. 1948



에셔의 <그림을 그리는 손>을 보라. 이 그림에서는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없다.” 글은 “대상에 대해 쓰는 게 아니라 대상과 나의 관계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손이나 꽃병이나 사과나 모두 같다. 대상을 그리는 것,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나의 관계를 성찰해야 한다. 중산층인 나와 노동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중산층인 내가 노동자 다니엘 블레이크와 동일시하기란 어렵다. 불가능하다. 흔히 “연대”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배려, 동정심, 자기만족이 아닐까. 연대는 쉽지 않다. 또 연대, 카르텔, 네트워크, 연줄은 어떻게 다른가. 중산층과 노동자의 연대? 불가능하다. 연대는 어려우므로 이런 글을 쓰려면 아주 구체적이어야 한다. 자원이 많은 사람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도 하기 쉽다. 이 모순에 대해 써라. 연대의 당위성이 아니라, 연대의 어려움, 모순을 성찰해야 한다.

<밀크맨>의 작가 애나 번스의 말 인용. “문이 열리고 내면의 모순이 드러나면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충돌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을 하기는커녕 나 자신에게조차 말이 되게 설명할 수 없다.”(<밀크맨> 필독!) 글쓰기는 세상을 바꾼다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상을 이해(인식/언더스탠드/동의/수용)하고 모두가 모순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기도 하다. 복잡한 삶 속에서 글을 써라. 이것이 글쓰기의 운명이다.

기억하자. “약자의 유일하고도 품위 있는. 영향력 있는 자원은 언어”이다. 분노는 투명하지만 세상은 복잡하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서 쓰려면 길을 잃기 쉽다. 그래서 글쓰기가 어려운 것이다. 분노에 차서 막상 쓰고 나면 화풀이만 되고 말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약자의 특성이 아닐까.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은 인생이 지루할 것이다. “분노한 자신을 인식하는(사유하는) 또 다른 자신을 탄생시켜야 한다. 에셔의 그림처럼. 이럴 때 분노는 자원이 된다.”



















마지막 시간이라 수강생들에게 질문을 받으셨고 두 사람이 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시간이 좀 길어졌다. 하나만 더 받으셨으면 나도 질문할 거 있었는데....(이건 메일로 할 수밖에)- 아무튼 그러고 나서!!!!!!!! 만면에 웃음 가득한 얼굴로 쌤이 다급하게 물으셨다.



“이 천하장사 소세지 놔둔 사람 누구예요? 누구죠?”

침묵하는 천하장사 소세지 잠자냥.

수강생들 중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쌤은 “아무튼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이거 먹고 내가 00kg 돼서 나타난다.”라고 하셨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부담되지 않으면서도 쌤이 좋아하실 만한 것으로 고른 천하장사 ㅋㅋㅋㅋ 이게 좀 생각보다 무거워서;; 쌤이 고생 좀 하셨을 것 같다.......







참, 그리고 얘들아 주목... 12월은 강의 없고, 1월, 2월에 강의하실 거라고, 이번에는 이론/합평반 따로 하는 게 아니라 합평반만 토요일에 4번씩 하신다고. 1월 합평반 토요일 4번, 2월 합평반 토요일 4번 이렇게. 강의 공지는 곧 올라갈 것이라고 하는데.... 한겨레문화센터 홈페이지나 <정희진의 공부> 댓글 중 쌤이 올리는 댓글 주목하라능... 합평반은 글을 써서 내야 하고, 그 글에 대해 쌤의 코멘트를 받을 수 있단다. 공쟝쟝아, 들을래? 들어라, 들어볼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앞희진 좌천하장사 우은오, 2024년 쟝의 극락은 이뤄질 것인가?ㅋㅋㅋㅋㅋㅋ



댓글(52)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스키 2024-02-29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퍼가기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어제 댓글 달고 보니 저와 함께 사는 사람의 아이디로 댓글을 단 것이었습니다.ㅜㅜ 위의 댓글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혼란 드려서 죄송해유) 3년전쯤인가 한겨레에서 선생님 논문 글쓰기 강의 6강짜리 들은 적이 있고 (논문 쓸 건 아님 ㅎㅎ) 요즘은 정희진의 공부 들으며 행복해하는 1인입니다.. 정희진 선생님께 더 배우고 싶어서 언제나 드릉드릉하는 중인데, 한겨레 개강알림일 신청까지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알라딘 서재에 요렇게 책 좋아하는 분들이 모여계시는군용...! 깊고 넓은 알라디너의 세계에 감탄하고 갑니다. 글 퍼간 블로그 주소는 https://blog.naver.com/iskii82/223368715943 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이스키 2024-02-29 10:57   좋아요 1 | URL
앗 죄송해요.. 위의 댓글을 지웠더니 거기에 달아주신 잠자냥님의 댓글도 삭제되었나봅니다 죄송합니다 엉엉엉 ㅠㅠㅠㅠ

잠자냥 2024-02-29 10:59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알라딘서재는 여성주의 책 읽기 모임도 있고, 정희진 선생님 사랑하는 분들이 모여서 함께 책 읽고 생각 나눔도 많이 하고 있으니 서재활동 하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즐거운 공부 생활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제 댓글 지움은 뭐 한겨레 강좌 링크만 알아두셨다면 괜찮습니다. 그거 알려드리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