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김규식과 그의 시대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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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의 개인 일대기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이자 한국 근대사로서 읽을 수 있는 고마운 책이다. 김규식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파리강화회의로 대표로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얻는 과정, 이후 1930~40년대 독립운동 세력 간에 균형자로의 노력과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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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상한 정상가족 (개정증보판)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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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가족‘이라는 제목부터 느꼈지만 내용은 더 불편하고 가혹하다. 몇 세대를 지나쳤음에도 한국은 가부장제와 가족주의가 공고하며 시스템은 여전히 낡아 있다. 개개인의 타인을 향한 공감 능력 키우기도 중요하나 개인과 가족에게만 출산, 양육을 기대서는 한계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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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과 그의 시대 2 - 3·1운동의 빛, 한반도를 비추다 (1919~1921)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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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을 읽자 마자 얼른 읽고 싶어서 2권을 바로 읽었다. 2권의 내용은 신한청년당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과 3.1운동의 여파에 따른 상해 임시정부의 생성,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 독립운동가 세력과 미국 독립운동 세력 간의 충돌, 미국 내 한인 세력의 분열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대목이지만 외부 환경, 내부 세력 간의 입장 차이로 분열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깝고 아쉬울 따름이다.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김규식은 외몽골 등지에서 생활인으로 살았다고 1권 내용에서 언급했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종전되자 그는 상해로 귀환했다. 그리고 재미 한인 지도자인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내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자신이 파견된다는 사실을 알리며 미리 도움을 요청해두었다(이승만이나 안창호과 접촉했다는 흔적은 없다). 이로써 그가 상해로 귀환한 것이 파리강화회의 대표 자격이 준비된 것을 알고 복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북경에 있던 미국 공사에게도 자신이 파리 강화회의 공식 대표로 참석할 예정이라는 말을 전하며 조선의 해방을 주장하는 비망록을 제출하였다. 윌슨 대통령에게 쓴 독립청원서는 신정, 김성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신정은 한국공화독립당 총재인 신규식이며 김성은 사무총장인 김규식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한국 병합은 승인된 상태이므로 한국 대표를 만날 필요는 없다로 정리되었다(편지는 혹시 모르니 보관하라 명했다). 비망록은 1919년 1월 말 작성이 되었는데 김규식은 2월 1일 파리로 떠났기 때문에 아마도 그의 측근이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11월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이 상해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여운형은 크레인 환영회에서 중국 처지를 동정하고 중국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라는 말에 자극을 받고 조선인들의 억압 상황과 호소를 담은 청원서를 작성하여 한 부는 크레인에게 전하고 다른 한 부는 밀러드(윌슨 대통령의 측근)에게 전달한다. 1918년 여름부터 여운형을 비롯해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호 등은 이미 긴밀한 교류를 맺고 있는 상태였는데 크레인 청원서 제출을 계기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게 되었고 이때 김규식은 이사장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애초부터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시작을 한데다가 중국 내 입지도 김규식이 더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비록 김규식이 신한청년당의 이사장은 되었으나 과거 동제사 조직과의 오랜 인연으로 동제사 회원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다. 그러나 동제사는 이미 과거가 되었고 이제는 신한청년당이 상해의 독립운동세력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한청년당은 국내외로 밀사들을 파견했다. 간도와 연해주에는 여운형이, 일본에는 장덕수와 이광수가, 국내에는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가 활약했다. 특히 장덕수는 재일한인유학생과 상해 신한청년당, 동제사를 연결해 파리강화회의 대표를 파견하고 2.8독립선언을 연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8독립선언은 3.1운동에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1919년 2월 24일 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가 개최되었고 상해에 있던 현순이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알리면서 3월 9일에는 미국에 있던 한인들에게도 그 소식이 전달되었다. 3.1운동은 민중이 주체로 등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자 독립운동 진영이 연계망을 형성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김규식은 파리에 도착한 뒤 잠시 중국인인 이욱영의 집에서 하숙을 하다가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그 집을 나온다. 4월 말에는 파리 샤토덩가 38번지에 파리위원회 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4월 말에 상해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 김탕, 5월 18일 전후에는 이관용, 6월 3일 황기환, 6월 말에는 조소앙, 7월 초에는 여운홍이 조직에 합류했으나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 및 비망록을 전달한 것은 5월 10일이었으므로 김규식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5월부터 6월 사이에는 김규식은 미국 측과 접촉을 시도하며 고군분투를 했다. 미 대표단은 3.1운동에 미 선교사가 개입했다거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책임을 지우려는 일본 측 주장(미 선교사와 3.1운동을 그런 식으로 엮는다니…)에 반대했으나 그 여파가 자국에 미칠 영향 때문에 묵과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이익이 없는 한국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대통령 고문의 통역이나 국무장관의 개인 비서, 극동전문가 등은 김규식에게 대체로 호의적이고 한국의 주장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파리 강화회의에 조선의 입장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서 성과 없이 끝나자 김규식은 국제 연맹에 임시 정부를 승인받는 것으로 외교 방향을 전환했다. 통신국을 설립하고 통신전을 간행하였으며 다른 약소국가 대표단과 지도자들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김규식은 8월 파리를 떠나 워싱턴으로 향하는데 이승만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3.1운동 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임명된 이승만은 국채 발행권과 신임장을 상해의 현순에게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승만은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국무경 지위를 이용해 미국 내 선전을 하고 청원 외교를 벌이다가 상해 임시정부 결성 소식으로 더는 그 자리를 버틸 수 없자 그 후에는 부여된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자격을 대통령으로 자칭해 부르며 활동을 한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로 들어가는 미주의 자금을 독점 관할하여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내 워싱턴에 임시 공사관 본부를 설립하고 구미위원부를 결성하겠다고 하며 재가를 받아낸다. 

김규식이 워싱턴에 도착하자 그는 구미위원부 위원장이라는 직함을 받았지만 공식 외교 및 선전 활동은 이승만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고  미 한인의 네트워크 및 교류는 한국친우회의 서재필이 관할하고 있는 상태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미 한인이 모은 독립운동자금인 애국금을 줄기차게 보내라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공채금 발행에 목을 맸다. 김규식이 상해와 북미 간 조율을 위한 타협책으로 애국금과 공채금을 병행하는 정책을 제기했지만 결국 이승만은 1920년 2월 애국금을 폐지한다. 김규식은 파리에서 활동할 때부터 과로 누적과 스트레스로 몸이 계속 좋지 않았는데 1920년 3월 병으로 뇌수술을 받는다(미국에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은 그가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는 것 뿐인 것 같다). 그는 건강을 핑계대고 구미위원장 사직을 요청하는데 실질적으로는 구미에서 자신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승만에 의해 미국의 운동 세력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더는 머물러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호주를 거쳐 상해로 귀환한다(상해로 돌아가는 길도 험난했다고). 이 무렵 이승만도 상해 임시정부의 끊임없는 소환 요구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승만은 그곳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줄 사람으로 김규식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거부하자 구미위원장직에서 그를 해임해버리고 만다. 현순이 뒤이어 구미위원장이 되었는데 그가 말많고 탈많은 공사관 설립 등의 폐지를 추진하자 이승만은 현순도 직위에서 해임해버린다. 이승만은 김규식과의 만남을 재요청했으나 비공식 국무회의 자리에서 김규식이 이승만 사퇴를 주장하자 그는 김규식을 학무총장 자리에서 해임했고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는 임정을 떠나게 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3.1운동의 영향으로 호기롭게 세워진 상해 임시정부는 이렇게 분열과 갈등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서 특사로 해보려는 노력은 일본 등 외부에 입김에 의해 힘이 제대로 실리지 못하며 실패했고 미주에 가서 외교적 힘을 보태려던 그의 생각은 이승만에 의해서 제대로 먹힐 수가 없었다. 이는 미주에 있던 박용만과 안창호도 마찬가지다. 미주 독립운동 세력에도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상해 임시정부 내부에도 혼란을 가져온 이승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곱씹어도 참 답답해지는 부분이다. 


이제 3권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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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과 그의 시대 1 - 고아 소년 “존”의 근대로의 여정 (1881~1918)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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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했던 책을 만나는 일은 정말 소중하고 좋은 경험이다. 저자가 김규식 평전을 준비 및 집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들뜬 기분이었는지 아직도 그 감정이 생생하다. 2014년부터 집필을 시작해서 2023년까지 초고 완성을 했으니 집필 기간만 자그만치 10년이다. 시작도 끝도 어려웠을 작업이었을텐데 무사히 나와서 정말 독자로서 감사할 뿐이다. 


책의 제목을 ‘김규식 평전’이라 하지 않고 ‘김규식과 그의 시대’라 한 것은 왜인가. 김규식은 대한제국부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까지 넒은 시기를 거쳐 살았고 조선, 미국, 중국의 상해, 북경, 몽골, 파리 등 다양한 공간에서 활동했으며 다양한 사람과 교류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그의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만으로 정리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1권의 내용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가족 관계, 성장 환경과 미국에서의 생활, 조선에서의 활약과 상해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표이자 해방 후 중도 우파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1권은 생소한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나 또한 몰랐던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그동안 그를 너무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김규식의 부친은 김용원으로 철종의 어진을 그릴 정도의 유명한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는 고종에 신임을 얻어 일본 수신사로 파견되었고 일본 공관에서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사진술, 유리제조술, 금은분석술을 배웠다. 당시 사진 촬영에는 유리 원판이 사용되었고 감광제를 바른 후 은 용액에 담그는 과정이 필요했다. 사진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귀국 후 촬영국과 순화국(서양 담배 제조회사)을 개설하였다. 

1884년 김용원은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된다. 고종은 조러조약 비준서 교환, 조선과의 육로 통상 문제 해결, 외부 압력이 있을 시 조선을 보호하기 위한 공식 사절단 파견 등을 요청했고 러시아 측은 이에 화답하는 밀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청일 모두 러시아가 조선에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 고종은 살아남기 위해 부정, 회피하는 방법을 택했고 김용원은 희생의 제물이 되어 유배형에 처해진다. 김규식은 얼마 후 사망한 어머니, 많았던 형제들도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1886년 만 5살 남짓 된 상태에서 언더우드 고아원에 들어갔다. 김규식의 어학 재능은 출중했던 것 같다. 배운지 얼마되지 않아 조선 여성들의 선교에 대한 통역을 맡을 정도였다 한다. 1891년 유배형에서 풀려난 아버지와 함께 1년 남짓 살다가 할아버지, 큰 형마저 사망하자 그는 스스로 서울로 가 관립영어학교를 수학하고 잡화점에서 영어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독립신문사에서 영어 직원 겸 회계로 일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16살 무렵 김규식은 의화군의 도미 유학 준비를 위해 언더우드 선교사와 외부 통역관 박용규와 동행하게 된다. 당시 의화군은 고종의 잠재적 정적이었는데 일본에 체류 중임에도 그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고종의 명령으로 반강제적으로 도미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화군은 생면부지인 김규식과의 미국 동행을 거부하고 박용규와 수행원인 신성구와 유학길에 오른다. 김규식은 의화군이 떠난지 40일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언더우드와 로녹대학 학장인 드레허와의 인연으로 세일럼의 로녹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로녹대학은 미국 남북전쟁 중에 개교하였으며 1876년부터 외국인 학생을 받기 시작한 곳이었는데 서병규가 한국인 최초의 입학생이었다. 김규식은 4년 내내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문학회 활동을 하기도 하고 대학 학보에 글도 썼으며 사교클럽에 간부로 선출되면서 연설 능력도 키웠다. 

사실 나는 그가 프린스턴 대학에 재학했다고 잘못 알고 있었는데 이는 시중에 알려진 잘못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고(프린스턴 대학의 재학생 목록에 김규식이란 이름이 없다). 


1904년 국내에 들어온 김규식은 YMCA 교사를 하다가 1905년에는 고종의 밀사로 비밀 접선 외교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언더우드의 개인 비서로 일을 했는데 총독부가 교수직을 제안하자 이를 거부하고 중국으로 망명을 한다.

그는 신해혁명 후 자극을 받아 신규식, 박은식이 만든 동제사 활동에 참가한다. 동제사는 독립운동단체이기도 했지만 유학 한인 학생들의 생활 학습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도 했다. 김규식은 신규식 자택에서 거주하면서 서서히 동제사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1913년 반원세개 운동인 토원운동이 벌어지자 중국인 의사 모대위란 사람과 적십자 조직을 만들어 출동하기도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당시 중국 전역에서 원세개에 반대하는 세력이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원세개 세력에게 진압당했다고). 동제사는 중국에 있는 한인 학생들의 도미 유학을 적극적으로 돕기도 했는데 김규식은 상해 거점의 한국 학생 도미 네트워크의 중심 인물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립운동가들은 독립 추구 및 망명 정부를 수립, 이를 위한 계획을 추진한다. 신한혁명당은 1차 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한다는 가정 하에 독일, 중국과 일본의 전쟁을 예상하고 한국 독립의 방략을 추구했다. 독일, 중국은 제정국가이므로 이왕가를 이용하기로 하고 고종과 연락해 그를 당수로 추대하겠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신한혁명당은 신규식, 박은식을 비롯해 신해혁명을 주도한 친손문세력이자 공화주의 세력과 성낙형 계열의 근왕주의, 친원세개 세력도 있었는데 이는 전략적인 결합이었다. 작전을 위해서는 고종과 접선을 시도해야 했다. 그러나 국내에 잠입한 혁명당 관련자들은 고종을 만나기도 전에 일제에 체포되어 실패했다. 원세개가 사망하고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이전에 추구한 복고주의 왕정이 아닌 공화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목표 쪽으로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대동단결선언은 주권불명, 주권재민론을 펼치며 3.1운동,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김규식은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한 중국 내 독립운동을 위해 의주에 잠입해 자금 모금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군사 훈련 학교를 운영하고자 유동열, 이태준과 외몽고의 고륜(지금의 울란바토르)으로 넘어가게 된다. 김규식은 러시아 상업학교에서 교사를 하기도 하고 러시아인들에게 영어 개인 강습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몽골리언프로듀스사에서 회계 및 비서 일을 했고 앤더슨마이어사에 취직해서 상해, 천진, 홍콩 및 장가구 지점의 부지배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일제는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끊임없이 추적했는데 1914년 이후 김규식의 이름은 종적을 감춘다. 1916년 장가구, 외몽고로 넘어간 뒤부터는 위의 활동 내역처럼 생계를 위한 활동에 집중한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그의 청년 시절이 다양한 활동으로 채워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와의 유대, 의화군(의친왕)과의 연결고리도 놀라웠고 고종은 아버지 대부터 끈질긴 고리였음을 느끼기도 했다. 유년기 버려진 고아에서 언더우드의 양자로 입적되어 미국 유학을 거쳐 지성인이 되기까지가 한 편의 이야기였다면 국내에서 종교,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중국 망명 뒤 혁명 운동과 독립 운동에 뛰어든 일은 또 한 편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2권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시기이자 그의 독립운동사에도 중요한 3.1혁명 이후부터 1921년까지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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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7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빨리 읽으셨군요. 저는 엄두가 좀 안나던데요. 두께가 참.... 김규식 선생 역시 우리나라에서 지나치게 저평가된 분이란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해방후 단독정부 수립 반대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면서 이승만에 대립했던게 결정적이지 않을까싶은데요. 지금이라도 우리 역사가 이런 분들의 삶을 복원해나가야 하겠죠. 한 인물에 대해 이정도의 책이 나온건 정말 대단하다싶은데 천천히 저도 읽어야겠어요.

거리의화가 2025-08-22 10:20   좋아요 1 | URL
저평가된 분 중에 한 분이라는 말 정말 공감해요. 사실 근래 들어 여운형 선생은 관련 자료나 책들이 많이 쓰여짐으로 인해서 대중들에게도 이제는 꽤나 알려지고 그 지위도 복원되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향후를 위해서도 이렇게 참고할 수 있을 만한 책이 나오게 된 것이 다행인 것 같습니다.

희선 2025-08-18 0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세권이군요 1914년 1916년까지만 있어서 그 뒤는 모르는 건가 했습니다 2, 3권에 더 나오겠네요 저는 잘 모르는 분입니다 독립운동 하신 분을 다 아는 건 아니기도 하네요 부끄러운 일이네요 거리의화가 님은 이 책을 기다리시고 이렇게 만나셔서 기쁘시겠습니다 다는 아니어도 여러 가지 알게 되실 테니...


희선

거리의화가 2025-08-22 10:21   좋아요 0 | URL
네^^ 사실 저도 김규식 선생님 관련 역사는 너무 소략하게만 알고 있어서 군데 군데 비어있는 부분이 많았어요. 일단 1권만 읽어봤는데도 몰랐던 사실이 많아서 정말 놀랐답니다. 기다리던 책을 받아보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감사합니다^^*

얄리얄리 2025-08-18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복절에 한겨레에서 본 책 소개가 생각나네요. 제목이(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해방 시기 리더가 김규식이라면‘이었나.. 그만큼 후대 관점에서 보아도 아까운 인물이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고, 저자나 분량만 보아도 그 의미와 들인 공력이 어마어마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는 다 읽을 자신이 없어서, 화가님 리뷰를 기다리려 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5-08-22 10:23   좋아요 0 | URL
한겨레에서도 이 책이 소개됐군요. 제가 보는 한국일보에도 이 책이 소개되었거든요. 김규식 선생 관련하여 기존에 잘못 알려진 사실들도 있고 모르던 이야기도 많아서 읽는 것만으로 즐거운 시간입니다. 도움이 된다면 저야 기쁘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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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 서정시학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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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80주년 즈음에 맞춰 이 책을 읽었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당시 시대상과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주변 인물을 들여다보는 일은 역시 중요한 것 같다. 단순한 시 감상에서 나아가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의 노고 덕분에 이제 윤동주 시인의 위상은 높아졌고 그의 시도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시가 어떤 배경에서 쓰여졌고 당시 시대상은 어떠했고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이해하지 않으면 어떤 생각으로 그 시를 썼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은 평전으로 증언과 증거를 바탕으로 객관성을 확보하며 최대한 담백하게 씌여 있다고 보여진다. 


평전을 통해서 그간 잘 몰랐거나 대강 알고 있었던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윤동주는 1917년 집안에서 8년 만에 얻은 큰 아들이었으며 아명은 해환으로 ‘해처럼 빛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 할아버지인 윤하현은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인 윤영석은 1913년 북경으로, 1923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갈 정도였을 정도로 언어 감각이 출중하였고 시적 기질이 남달랐다고 하니 윤동주 시인의 재능은 아버지를 통해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어머니인 김용은 몸이 약했으나 손재주가 좋았고 성정이 강인한 분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길까지 함께 했던 송몽규는 이 책의 내용에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송몽규는 아버지의 큰 누이동생인 윤신영의 아들로 고종사촌 형이었지만 출생일도 3개월밖에 차이나지 않았던데다 학창시절을 함께 하고 일본 유학을 하다 같이 체포되는 운명을 겪었으니 윤동주와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윤동주 가문은 북간도 용정촌에 이주했다가 나중에 명동촌으로 이사한다. 명동촌은 조선의 유학자 집안들이 많이 넘어가 초기에는 유학적인 풍토였다가 1909년 무렵 기독교가 확산된 것이라고 한다(1929년에는 공산주의 유입). 명동촌이라는 이름은 명동서숙(후에 명동학교가 됨)이 개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1929년 9월 북간도의 사립학교가 모두 중국 당국의 연길 교육국 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다니던 명동학교도 인민학교가 되었다. 윤동주 가문은 이때 용정으로 이사를 간다. 

용정이란 지명은 마을에 있던 용두레 우물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현재도 불리는 유명한 가곡인 선구자 가곡의 배경도 용정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은 캐나다 선교부가 자리한 동산 일대로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일본 측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곳이었다 한다. 


1935년 무렵 송몽규는 중국 측에 잠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윤동주와 문익환은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했다. 송몽규가 중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이 책은 밝히고 있다. 그는 임정 낙양군관학교에 있었다가 제남의 조선독립운동단체인 이웅 일파의 산하에서 활동했다가 산동성의 제남에서 일본 영사 경찰에게 붙잡혀 요시찰인으로 낙인찍혔다고 한다(이것이 일본 재판 기록에 소상히 나온다). 

윤동주가 쓴 동시들은 정지용의 동시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그 전까지는 현학적이고 어려운 시상의 흐름을 보였다면 1935년 10월 이후부터는 구체적이고 진솔한 표현을 담은 동시를 여러 편 써냈다. 

숭실중학교에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한 대가로 교장이 파면되자 재학생들은(윤동주 포함) 동맹퇴학을 감행했다. 윤동주는 부득이하게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는데 이곳은 그곳에서 고등취업이 가능한 유일한 5년제 학교였으나 친일적 분위기가 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있을 때 윤동주는 어린이 잡지에 동시를 투고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마음이 어지러울 법한데 동시가 가능하다니… 

대표적으로 ‘조개껍질’을 보자. 이 시는 현재 남아있는 윤동주 작품 가운데 최초의 동시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소리


아버지가 시적 기질이 풍부한 분이었음에도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그가 문학을 하겠다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의사가 되라고 하셨다고). 다행히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 문과 입학시험에 통과했다. 놀라웠던 사실을 알았는데 시 ‘자화상’의 배경이 된 곳이 명동의 우물이 아니라 2학년 재학중 하숙하던 곳 근처에 있었던 우물이었다는 것이다. 1939년 9월부터 1940년 11월까지 윤동주가 쓴 단 한 편의 시도 남아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아마도 1939년 11월 창씨개명 공포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를 비롯하여 1940년은 특히 암울한 결정들이 이어졌던 시기다. 그 시기 유일하게 윤동주에게 기쁨이 된 일이 있다면 평생지기 정병욱을 만났던 일 뿐일 것이다. 모태신앙이었던 그가 기독교에 회의를 가졌을 정도였다면 그 힘든 심경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1941년에 쓴 ‘看板 없는 거리’는 당시의 그의 심경을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듯했다.


停車場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른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慈愛로운 헌 瓦斯燈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그는 ‘참회록’을 쓸 무렵 히라무라 도오쥬우’라는 창씨개명을 한 뒤 일본 동경 입교(릿쿄) 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한다. 이때는 전과 달리 아버지가 적극 밀어주셨다고(!). 일본은 본과와 구분하기 위해 선과라는 명칭을 붙여 일부러 학생들 간의 경쟁 및 파벌을 중요시하고 위계를 강화시켰다. 그는 학교에 들어간지 한학기만에 경도의 동지사(도시샤) 대학으로 전학을 하는데 육군대좌 반도신지라는 군사교련 담당관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군국주의 사상을 강요하며 엄격한 지도라는 미명 하에 학생들을 못살게 했다고 한다. 그시대 졸업생들에게도 (악질로?) 유명인이었다는 것을 보면 알만할 것 같다. 이곳에서 박춘혜라는 여성을 만나 호감을 가졌다는 증언은 진짜 놀라웠다. 


동지사 대학에서는 두 학기를 다니고 ‘경도에 있는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사건’으로 1943년 7월 14일 사상범으로 체포되었다. 일본의 특고경찰 기록을 보면 송몽규를 비롯한 사건 가담 인물들을 1년간 미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지독한 놈들). 송몽규가 하숙하던 곳에 함께 하숙하던 고희욱도 체포자 중 하나였으나 그는 1944년 1월 19일 6개월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고 한다. 1944년 2월 송몽규와 윤동주는 기소되었고 징역 3년이 구형되어 출감예정일은 윤동주가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가 1946년 4월 12일이었다. 일본 형무소 중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복강(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을 한 두 사람은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 매일 육체 노동을 했다. 가족 간 편지는 가능했으나 매달 엽서 한통, 그것도 일본어로만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편지 내용이 검열되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다 드러내고 쓸 수 없었다. 해방이 얼마 남지 않았던 1945년 2월 16일, 1945년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이역 땅에서 옥사했고 우여곡절 끝에 두 분의 묘는 용정 동산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살아 있는 동안 동시 이외에는 정식 시집을 출간해보지 못했던 윤동주는 특히 정병욱, 강처중, 정지용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고 그의 시도 빛을 보게 되었다. 강처중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필사본 원고를 보관하고 있었고 강처중은 일본 유학 가기 전 서울에 두고 간 원고 등 윤동주의 유품과 일본에서 쓴 5편의 시(편지에 적혀 있었음)를 고이 보관했다. 누이동생 윤혜원은 중학생 시절 쓴 시와 동시의 원고들을 보탰다. 정지용은 윤동주의 시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유고시집의 서문을 쓸 정도로 애정이 남달랐다. 해방 후 시인의 시가 최초 실린 것이 경향신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였고, 정지용은 주간의 자격으로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현재 남아 있는 윤동주 시인 대부분의 시는 담백하며 난해하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울림을 주며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한다(물론 그의 민족 정신도 한몫을 하겠지만). 나 또한 시인의 시를 참 좋아하는데 평전을 읽고 그와 그의 시가 더 좋아졌다. 광복절 80주년이 되는 날 이 책을 읽을 수 있어 더욱 특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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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5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동주시인은 안타까운 죽음이 아니었다면 정말 얼마나 훌륭한 시를 많이 남길수 있었을까요. 광복절에 더 마음이 와닿는 리뷰입니다.

거리의화가 2025-08-17 21:08   좋아요 1 | URL
댓글 마음 제 마음입니다^^ 하필 광복 몇 달전에 돌아가셨다는게 더욱 마음이 아플 따름이죠ㅠㅠ

희선 2025-08-16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동주 시인은 죽은 다음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졌네요 아쉬운 일입니다 죽지 않고 살았다면 좋은 시 많이 썼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한들 바뀌는 일은 없겠네요 윤동주 시인 시가 남아서 지금까지 읽히는 것만으로도 좋게 생각해야겠습니다

가리의화가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8-17 21:09   좋아요 1 | URL
많은 분들의 노력 덕분에 윤동주 시인의 시를 보고 읽을 수 있음은 정말 천만다행이고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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