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십자군은 프랑스 왕 필리프와 영국 왕 리처드가 이끄는 군대가 중근동에 도착한 1191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하틴‘에서 대패하고 예루살렘마저 탈환당한 1187년의 나머지 반년이 채 지나기 전에티루스를 놓고 벌어진 공방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티루스 공방전이제3차 십자군의 첫번째 전투인 셈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티루스 공방전의 승리가 그리스도교측에 힘을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무적 살라딘이 더이상 무적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하틴‘ 이후 계속되던 패전의 여운도 일소된 듯했다. 티루스 공방전은 티루스라는 항구도시를 유지하는 이점에 더해 심리적으로도 그리스도교측에 매우 이롭게 작용했다. - P39

그리스도교측에는 최고사령관이라는 두뇌가 없었다. 반면 이슬람측은 수족을 확보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군과 이슬람군이 정면으로 부딪친 아코 공방전은 제각기 멋대로 격돌하는 전투의 연속이었다. 그리스도교군과 이슬람군 모두 기록상으로는 격렬한 전투의 연속으로 표현했지만, 양쪽 다 그 전투들을 인과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었던 것이 2년 동안이나 결판이 나지 않았던 아코공방전의 실상이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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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수도사와 기사의 겸업집단인 종교 기사단은 십자군의 산물이다. 수도회와 기사단은 그 밖에도 있었지만, 그 둘을 겸하는 집단은 십자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현상이 제1차 십자군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을 주목했으면 한다. 제1차 십자군을 이끈 제후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프랑스 왕보다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던 대영주들로, 그 봉건제후의부하 기사나 원래부터 주군이 없는 떠돌이 기사는 제1차 십자군 시대에 로렌 공작이나 툴루즈 백작의 군대에 가담해 오리엔트로 올 수 있었다. - P34

제2차 십자군의 실패는 무엇보다 중근동 현지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교도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 사람들은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프랑스 왕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었다. 그 양대유력자가 병사를 이끌고 와서, 실제로 적과 싸운 것은 나흘에 불과한짧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전투를 하고는 군대를 물려 돌아가버린 것이다. 유럽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P118

초기 연구자들은 이 성채들의 건축양식이 비잔틴제국 성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얼마 전,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한 연구자가 이에 이론을 제기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중세시대 성을 조사한 뒤 중근동에서의 실지답사를 통해 얻은생각에 기초해 쓴 연구논문에서, 십자군 시대의 성채 대부분이 비잔틴제국이 아니라 동시대 유럽 성채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젊은 학도의 이름은 T. E. Lawrence. 이후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나중에 로렌스는 역사학이 아닌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지만, 그의 주장은 이후의 십자군 연구를바꾸어놓게 된다. - P176

산마르코 광장에 모인 시민들 앞에서 도제 미키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40척의 갤리선, 28척의 범선, 4척의 대형 갤리선으로 구성된 베네치아 함대를 도제가 직접 지휘해 오리엔트로 떠난다. 중근동의 성지를
‘해방‘하고 있는 십자군과 같은 그리스도교도로서 함께 싸우기 위해바다 쪽을 공격할 것이다. 아코, 하이파, 티루스, 아스칼론 등의 항구도시 중 어느 한 곳이, 아니면 그 모든 곳이 전장이 될 것이다. 이 군사행동으로 베네치아가 얻는 것은 공략에 성공한 후 이들 항구도시에베네치아의 교역기지를 설치하는 것이다.
이 군사행동에 필요한 비용은 얼마이고 참여하는 인원은 1만 명이 - P218

다. 시민 여러분이 이 군사행동에 대한 찬반을 결정해주었으면 한다.
이렇게 설명한 후에 표결로 결정하는 것이 중세 이탈리아 공화국의방식이었다. 군주국에서는 한 사람만 이런 결정을 하면 되지만 공화국에서는 다수가 결정하기 때문에 항상 설명할 책임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 P219

독자적인 거류지를 설치할 수 있는 건 그리스도교의 지배하에 들어간 도시에서만이었다. 같은 중근동에서도 아직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에서는 거류지 같은 것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거류지 설치는 불가능해도 상관을 두는 것은 가능했다. 물론 그 지역의 위정자인 술탄이나 아미르(태수)의 허가를 얻어야 했지만. - P220

3월 13일, 카이로를 떠난 살라딘이 다마스쿠스에 도착한다. 이 다마스쿠스에서 이슬람측은 십자군 시대가 된 후 처음으로, 이교도 배척을소리 높여 외치는 ‘성전(jihad)‘을 선언한다.
‘성전‘은 원래 이슬람교도가 외치기 시작한 말이므로 이슬람 세계의 성직자인 이맘 중에는 이전에도 이를 입에 담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대군을 앞에 두고서 최고사령관인 술탄이 선언한 것은 이때가처음이었다. - P295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십자군이 ‘해방‘하기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린것뿐이었다. 유럽에서 오는 순례를 허용하되, 예루살렘이 이슬람의지배하로 돌아갔다는 것을 유럽에서 온 순례자들이 인정해야 한다는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시대처럼 예루살렘 대주교가 남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지만, 성묘교회에서 봉사하는 수도사들이 남는 것은허용했다. 같은 이유로, 의료에만 종사하는 조건으로 병원 기사단의단원 열 명이 남는 것도 인정해주었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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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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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 전쟁의 전개 과정과 결과를 다룬다. 이야기에 매혹을 느낄 수 있도록 매력적인 인물에 집중하여 서술하는 것이 특징이라 보여진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십자군 병사들의 마음에 묘한 감정이 일면서도 과연 이 전쟁을 종교 전쟁만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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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4-1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전쟁이라기보다 권력과 돈을 위한 전쟁이란 생각이 더 듭니다.^^
 

갑옷들의 금속음을 내며 제후들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치 교회에 들어선 것처럼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투구를 벗었다.
기사들도 말에서 내려 그들의 뒤를 따랐다.
병사들 중에는 저도 모르게 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하늘로 올리며울음을 터뜨리는 이도 있었다.
모두가 감동에 몸을 떨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태어났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성도 예루살렘이 지금 그들의 눈앞에,
때마침 붉게 물든 석양을 받으며 조용히 그곳에 있는 것이다. 마침내여기까지 왔다는 감회가 모든 이의 가슴 가득 차오르고 흘러넘치는것을 감미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순간 제1차 십자군의 전사들은 온전히 겸허한 순례자가 되었다. - P221

그런데 팔레스티나의 이슬람교도들은 왜 고드프루아가 아닌 레몽에게 무혈입성을 요청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은 동서고금 변함없는 ‘뉴스‘에 대한 고찰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까지의 십자군을 기술한 그리스도교측 기록자와 이슬람측연대기 작가의 공통점은, 십자군에 참가한 제후들 중 고드프루아를 언급하는 빈도가 적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종교의 차이와 상관없이 가장 자주 기술한 것은 보에몬드와 레몽이었다.
안티오키아 공방전 때 보여준 보에몬드의 활약상은 주지의 사실이었으니 당연하다 해도, 그때부터 레몽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 것은이 사람의 언행이 항상 떠들썩했고, 따라서 그 시대 ‘저널리스트‘들의 - P251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기록자든 연대기 작가든, 항상 화제를 제공해주는 사람의 언행에 주목하는 성향은 오늘날의 저널리스트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한편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처럼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아니면 동료들끼리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고 담담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유형의 인물은, 뉴스, 바꿔 말해 가십을 제공하는 일이 적기 때문에 언급되는 횟수도 많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유명도를 재는 기준이 이렇다면, 이슬람측이 받는인상도 그에 좌우되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레몽은 제후들 중 가장연장자이며, 이슬람 세계에서는 연장자를 존중하는 기풍이 강했다.
그래서 그들은 제안을 받아줄 사람으로 레몽이 적격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 P252

예루살렘의 대주교는 콘스탄티노플과 안티오키아의 대주교와 함께, ‘아르키베스코보(arcivescovo)‘가 아닌 ‘파트리아르카(patriarca)‘ - P264

로 불린다. 후기 라틴어인 ‘아르키베스코보‘와 달리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 ‘파트리아르카‘를 나는 ‘대주교(敎)‘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대도시의 종교 지도자라는 의미가 담긴 명칭이다. 예루살렘은대도시를 의미하는 ‘메트로폴리스‘는 아니었지만 그리스도교 최대의성지라는 이유로 메트로폴리스와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었던 셈이다. - P265

병사의 수가 줄었다고 해도 이것을 강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탄크레디의 정복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또한 그후에산악지대를 사이에 두긴 했지만 대도시 다마스쿠스 영주 두카크의코앞을 태연하게 통과하기도 했다. 두카크는 이를 알면서도 방해조차하지 못했다.
이 에피소드를 기술한 이슬람측 기록은 분기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집안싸움만 벌인 것이 원인이다, 즉 프랑크인의 성공은이슬람이 통일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집안싸움은 그리스도교측에도 많았다. 다만 제1차 십자군의주역이었던 제후들은 궁극적인 목표 앞에서는 다른 걸 잊었던 것뿐이다. - P269

성직자는 종교인이므로 정신적인 면을 갈고닦는 데만 전념하고 세속의 자산 등에는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중세의 가톨릭교회는 신도들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재산, 이 시대로 말하자면 토지를 소유하는 데 무척 열심이었다.
게다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는 그리스도교도에게 ‘성지‘다. 그리고예루살렘은 ‘성도‘다. 성지이고 성도인 이상 그 소유권은 교회로 돌아 - P275

간다. 다임베르트 역시 추호의 의심 없이 이렇게 생각하던 중세의 성직자였다. - P276

피사인과 제노바인은 해적을 상대하는 해전과 이슬람교도와의 교역 둘 다에 무척 적극적이었지만, 이 사람들의 활약은 개인이거나 혹은 그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제노바는 개인주의가 심해서, 갤리선과 범선처럼 속도가 다른 배들을 한 선단으로 편성하는 것조차 싫어했을 정도다.
그런데 베네치아인은 이들이 과연 같은 이탈리아인인가 하고 놀랄정도로 다르다. 베네치아의 통사를 다룬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말한 것처럼, 모든 베네치아인을 ‘베네치아주식회사‘의 사원이라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항상 한데 뭉쳐 진출했다. - P277

이것이 이슬람 세계를 환호하게 만든 1100년 십자군측의 3대 불행이었다.
고드프루아가 죽었다.
보에몬드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잡혀 있다.
레몽은 콘스탄티노플로 가버렸다. - P284

같은 이탈리아인이면서 베네치아인에게서는 그들 같은 적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베네치아 교역의 주요 대상이 비잔틴제국이나 중근동의 이슬람 국가였고, 북아프리카와의 교역량은 그에 비해 적었기 때문이다. 즉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습격과 약탈을 당하거나, 선원과 상인이 납치되어 돈을 내고 자유를 얻어야 했던 일이 적었던 것이다. - P304

베네치아와는 반대로 피사와 제노바가 해양국가가 되어 강력한 해군을 갖게 된 것은, 교역에 앞서 북아프리카에서 습격해오는 해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든해군은 해적에 대한 방어책으로 생긴 것이지만, 피사와 제노바의 경우는 이슬람의 해적 대책이 최우선이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 P305

역사상의 탄크레디는 이상하게도 젊음의 상징처럼 간주되어왔다.
16세기 이탈리아 문인인 타소의 장편시 해방된 예루살렘에서 탄크레디는 청춘 그 자체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19세기에는 조아키노 로시니가 오페라 <탄크레디>를 작곡해 젊음으로 인한 비극을그려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루키노 비스콘티가 감독한 영화 <레오파드 11Gattopardo>를 들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늙은 공작 살리나의 조카를 연기하는데, 영화의 원작을 쓴 시칠리아 작가 람페두사는이 혈기왕성한 캐릭터에 탄크레디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지금도 유럽인들, 특히 남유럽 사람들은 탄크레디라는 이름을 들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신의가 두텁고 생기 넘치는, 영원한 젊은이를 떠올린다. - P336

제1차 십자군에 의해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땅에 수립된 십자군 국가는 이들 제1세대가 만들어냈다. 유럽을 뒤로한 1096년부터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까지 3년 동안 정복하고, 그후 18년을 들여 확립해나간것이다.
황제도 왕도 참전하지 않은 제1차 십자군의 주역들은 유럽 각지에영지를 가진 제후들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아니 자주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분열을 반복했지만, 최종 목표 앞에서는 언제나 단결했다.
이 점이 이기적이고 분열을 반복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던 이슬람측 영주들과의 차이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1차 십자군이 성공한 주된 요인이었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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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를 떠난 이후 여기까지 십자군이 답파한 지역은 오늘날로 따지면 시리아에 속한다. 이 길을 답파하는 데 레몽이 이끄는 군대는 4개월, 늦게 출발한 고드프루아의 군대도 3개월이나 걸렸다. 그런데 이후 레바논을 지나 이스라엘로 들어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는 3주밖에 걸리지 않는다. 전원의 생각이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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