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친구가 없어요
나카가와 마나부 지음, 김현화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20221125 나카가와 마나부.

작가 이름이 마나부라 학교 다닐 때 만화부였을 것 같지만 (육상부 하다 도망쳐서) 야구부였다고 한다…
…안 웃기죠?

큰 꼬맹이에게 먼저 보라고 찾지 말아 주세요랑 이 책이랑 주었었는데 다시 책을 찾으러 가니까 (찾지 말아 주세요 보다는) 이게 더 재밌었어…해서 너 친구 없어? 하고 놀렸다. 엄마들이 어린이집 다닐 때나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소모임을 만들어서 주말에 애들이랑 방방 타는 데도 같이 가고 애들 학교 보내놓고 카페에서 수다 떨며 선생님 흉도 보고 애가 사고 친 이야기 수학은 무슨 무슨 강사가 좋다는 이야기, 카페에 앉아 키보드 두드리는 데도 옆자리 왁자지껄한 수다들이 저절로 귀에 들려오곤 했다. 휴, 카톡도 없고 그래서 단톡방 안 해도 돼서, 저런 자리같이 앉아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회관계망의 범위를 아는 터라 어느 정도 단절에 안도하곤 했다. 그치만 코로나19가 퍼지고 원격수업이 진행되면서 그나마 학교에 가야 친구를 만나던 아이들이 고립되는 건 안타깝긴 했다. 나는 자발적 고립이지만 아이는 등교 수업하는 걸 기뻐했다. 이제 열두 살인데 올여름에 인생 처음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서 그렇게나 기대하고 설레했다. 세 아이가 닌텐도 스위치를 들고 모여서 서로가 꾸민 동물의 숲 섬을 구경하고 아이템도 공유한다 했다. 여러 번 다른 친구들 사정으로 약속이 불발되고 실망을 반복하다가 여름방학 중에 만나자던 약속이 방학이 끝나고 나서로 밀려 버렸지만… 드디어 만남이 성사되자 해 저물도록 연락도 없이 신나게 놀고 왔다. ㅋㅋㅋ 아직 휴대전화를 사주지 않았고 본인도 갖고 싶다 한 적이 없어서 당분간도 사줄 계획이 없는데 너무 고독한 아이로 키우나 싶기도 하고…스스로를 긍정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아이를 보면 늘 나보다 네가 훨씬 낫다, 다행이다, 싶다.

사회적 상호작용을 돕는 수많은 매체들이 있었다. 고딩 때는 피씨 통신 에듀넷, 이십 년 전엔 프리챌과 싸이월드, 그리고 엠에센과 네이트온, 십 년 전에는 트위터, 오 년 전에는 페이스북, 거기까지는 따라가다가 카톡과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의 시대가 오면서 그냥 멈췄다. 텍스트까지는 되는데 이미지와 동영상의 자극,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내 연락처를 어찌 알고 툭 던지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많은 무리들 사이에 끼워 넣는 것은 내 수용능력 밖이었다… ㅋㅋㅋ
워낙 많은 커뮤니티들이 망하고 수많은 기록이 유실되는 걸 겪어서 그런지 2018년 둘째 낳고 두 달 만에 알라딘 서재 시작하면서 똑같은 독후감을 네이버 블로그에도 백업처럼 올리고 있다. 그냥 독후감 저장소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로 머물 줄 알았는데, 세상은 생각보다 검색어 몇 개로 쉽게 이어진다. 네이버 블로그는 유입 검색어와 사이트를 보여주는 기능이 있어서 가끔 살펴보면 재미있다. 아주 황당한 건 음란어에 가까운 검색어가 한 번 연결되면 관계도 없는 독후감으로 유입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한때는 시아버지의 육욕(…), 요즘은 여군 성적 소비(…대체 왜… 해당 게시물은 훈훈한 그림책 독후감이었다), 소월길 쉬멜(…김소월 시인이시어…그리고 봉곤아 잘 지내니…), 남자 젖꼭지(…남자는 왜 젖꼭지가 있을까라는 진화생물학 책이었는데 정작 게시물 안에는 그 답이 없어서 자꾸 들어오는 사람들이 실망하는 게 눈에 선해서 책의 내용을 일부 발췌 정리해 수정하였다…ㅋㅋㅋㅋㅋㅋ) 뭐 그렇다…

그리고 가끔은 작가님들도 (상처받을까 봐 안 그런 분들이 더 많다는데) 자신의 신작이나 이름을 치고 들어와서 뭔가 불만이면 자기 홈페이지 같은데 내 게시물을 걸어놓고 반박하기도 하고 (그럼 가서 해명 댓글을 달고 화들짝 놀란 작가랑 서로 죄송합니다 하고…) 그랬다.

아침에는 내가 감탄하고 존경하며 읽었던 책들을 쓰신 홍승은 작가님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주셨다…깜짝 놀라서 이전 독후감에 나쁜 말 쓴 거 없나 확인하고 왔다…ㅋㅋㅋㅋㅋㅋㅋ 아… 착하게 살아야겠다… 아무튼 황송합니다… 친히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제 꾸질꾸질한 독후감 읽어주시는 이웃분들께도 한 번 더 두 번 더 세 번 더 감사합니다.

만화책 속 마나부가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처음 한 일은 서점에 가서 자기 계발서를 뒤지는 것이었다.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
-자기 생각만 한다.
-남을 헐뜯는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
-상대를 신뢰하지 못한다.
-비생산적인 일에 집착한다.
-속을 끓이다 엉뚱한 데 힘을 쏟는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푸념한다.
-사랑받지 못한 채 성장했다.
-분노와 에너지가 가득 차 있다.
“내 얘기네. 딱 내 얘기잖아.”
라고 마나부가 말했다. ㅋㅋㅋ
저기서 몇 개는 다들 동그라미 치지 않나요? 누구나 그런 거 아니었어? ㅋㅋㅋ핵인싸는 난 안 그래, 하나요.

‘침울해져서는 책에서 고개를 들어 옆에서 저처럼 서서 책 읽고 있던 여성을 문득 보니 그분도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자기 계발서 코너는 왠지 다른 코너보다 울적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 같아요. 자아 찾기 여행에 나섰다가 미아가 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듯한……’

마나부는 자신이 게으르다 하지만 만화에서 보여준 그의 친구 만들기 노력은 분투에 가깝다. 거리에 나서고 클럽 오프모임에 나가고 교회 예배에도 참석하고 작가 레지던스에 같이 살던 입주자를 만나러 네 시간 걸려 지방에 내려가기도 한다. 그만큼 세상에 이어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도 했나 보다. 이제 마흔일곱 살 되었을 마나부는 친구 0명에서 숫자가 바뀌었을까? (일단 동지는 최소 1명…)

친밀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면 충분히 행복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세상에 노출되는 사람은 그만큼 시기하고 (지들은 이유가 있다지만) 부당한 이유를 들먹이며 혐오하고 아픈 말을 던지는 사람도 많이 마주하는 걸 거쳐거쳐 보고 듣는다. (에스엔에스에 오른 걸 기자들도 캡처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캡처해서 이런저런 커뮤니티에 올리고 그걸 또 퍼다가 다른 커뮤니티에 옮기고) 금세 지나갈 모래폭풍(안녕 연수옹) 같은 것이겠지만 눈코입에 모래 잔뜩 들어간 이들은 정말 괴롭지 싶다. 신발에 모래 한 번만 들어가면 진짜 한참 동안 털어도 털어도 며칠을 나오던데. 신발 버려버리고 싶을 만큼. 그래서 일단은 숨는다. 조그만 알라딘 마을 정도면 그래도 적당한 정도로 따뜻하니까 가끔(자주 아니냐) 머문다. 여기서도 친해지려다 실패하고 다가왔다가 떠나가고 아예 원수도 지고 옆집 사는 것처럼 익숙해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갔다. 지금이 딱 적당하다. 내가 감당할 만큼만 품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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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gene 2022-11-25 1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열반인님 시아버지의 육욕에서
뿜을 뻔 했어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2-11-25 14:32   좋아요 2 | URL
자꾸 들어와서 저도 유입 검색어 눌러보니까 주로 다음 쪽에…뭔 야설이 있던 것 같은데 정작 원작(?)게시물은 어느 순간 유실이 되어 제 포스트로 자꾸 들어오더라구요… 제건 옌렌커의 작렬지 독후감이요ㅋㅋㅋㅋ거기서 시아버지가 복상사(…)하긴 하는데 ㅋㅋㅋ

scott 2022-11-25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아직 큰아이 휴대폰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 것도 넘 기특!^^

네이버 유입 검색어 충격적이네요 ㅎㅎ

검색어 이어붙이기 해보니 거의 웹툰 19金 ㅎㅎㅎ

역쉬 엔렌커 !^^

반유행열반인 2022-11-25 18:14   좋아요 1 | URL
저랑 많이 안 닮아서 체제순응? 적이고 모범생 각잡고 다녀서 조금 걱정이기도 해요. 왜 반항을 안 하니 하고…(이러다 진짜 반항기 오면 또 고민할 거면서 ㅋㅋㅋ) 옌렌커 안 읽은 게 많은데 보고싶은 마음과 이젠 그만 보고 싶은 마음 절반이요 ㅋㅋㅋ아 우리나라에서 나온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영화는 궁금해요 ㅋㅋㅋㅋ

라로 2022-11-25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재밌는데요. ^^;; 암튼 저 리스트에 있는 거 보면 ENFP-T 유형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할 것 같아요.ㅋㅋ
암튼, 다른 곳에서는 유열님이시군요!!, 우울한 열정님이기도 하신가요?? 헷갈림요. (늙은이;;;)
그런데 12살 자녀분이 저 책을 읽었다고요?? 엄마 닮아 똑똑하군요!! 저희 해든이 한국 나이로 16살인데 아직 핸드폰 안 사줬어요.^^;; 친구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학교에서 핸드폰 없는 사람이 해든이 뿐이래요. 웃겨서,, 그래서 안 사줘요. 저는 아마 고딩 졸업하면 사줄지? 아니면 자기 돈으로 사던가,, 근데 친구 관계 문제 없더라구요. 암튼 저도 이 책을 읽어보고 싶네요. 댓글 달고 가보니까 전자책이 안 나와서 출간알림 신청했고요. 오늘 출간 알림만 신청하는 것 같은 느낌;;;;

반유행열반인 2022-11-25 18:17   좋아요 1 | URL
저는 INFJ인데 라로님은 역시 E가 있으시네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줄여서 반유열이에요. 우울한 열정님은 같이 읽으신 에세이 작가 홍승은님이에요!!!! 자랑하려고 올렸는데 아무도 안 부러워 해!!!! ㅋㅋㅋㅋ듣고 보니 유열 우열 비슷하네요 ㅋㅋㅋㅋㅋ막내랑 저희 첫째랑 차이가 별로 안 나네요. 라로님 제 또래 젊은 엄마셨어…. ㅋㅋㅋㅋㅋㅋ(이러면서 저도 젊은 척) 저도 아직 아이폰5랑 5S를 쓰고 있어서 제가 새 폰을 사면 이걸 물려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ㅋㅋㅋㅋ(매정)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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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4 김연수.

나는 내년에도 올해만큼 울 것이다. 거울 속 얼굴 위에 고집스럽게 쓰여있었다. 아직 올해가 지나지 않았다고, 당장이라도 또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 잘 될 거야. 가깝고 먼 곳으로부터 그런 응원과 위로를 살면서 가장 많이 받은 한 해였다. 뒤틀린 마음은 아무리 좋은 말을 먹어도 곱게 자라지 않고 오히려 부서져내렸다.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낙관하는 거죠? 대체 뭘 믿고 내가 지금 어느 지경인 줄 알고 그렇게들 말하나요? 누가 강제로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데, 이미 시작해버린걸, 돌아갈 곳 없는 가출 청소년처럼 그저 오기만 남아서 꾸역꾸역 하루를 한 주를 한 달을 보냈고 겨우 그날을 또 지났다.

일주일 동안 지난 열 달 읽은 만큼을 읽었네. ㅋㅋㅋ여덟 권.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책만 봤다. 글자가 눈에 잘 안 들어오고 내가 뭘 읽는지 잘 모르겠는데, 별 감흥이 없는데 잡히는 대로 빌리는 대로 읽었다. 마음대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히히 나는 (일단은) 자유다. 그런데 이제 일주일 지났네…하고 잊고 있었네 수학…까마득하게…그러다 보니 다시 침울해졌다.

팔십 년 후에 나는 여기 없을 거라고. 나는 백이십 살까지 살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해도 그만큼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팔십 년은커녕 팔십일 후의 나조차 내다보기 힘들다. 팔 개월 팔 년은 하물며. 그런 내 앞에서 김연수는 끈질기고 꾸준하게 내일을, 나중을, 미래를, 거기에 사랑했던 사람의 부재나 지난 사람 시간 사건 서적에 대한 떠올림 같은 건 있겠지만 지구 멸망이나 뭐 그만큼의 지독한 결말 같은 건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이적도 안 좋아하는데… 어린 나에게 염세를 삐딱함을 심어 놓고는 나만 빼고 쏙 위로와 위안과 따뜻함의 세계로 가버린 어릴 적 우상들이 나는 밉다.

언젠가 운이 좋아 나도 그런 안식을 얻어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살다 보면 다…견딜 만해진단다… 뭐 그런 메시지를 전달할 거라고 생각하면 그런 나도 밉다. 뭔 아직도 아프니까 청춘이냐고… 아픈 사람은 그냥 내내 아프다 일찍 죽거나 고통에 찌든 노인이 되는 거야…

만화 영화 속 마왕 악당들은 이렇게 형성되는 게 아닐까 문득 생각했다. ㅋㅋㅋㅋ 마음 곱게 먹고 나도 나를 달래는 데 더 힘을 써야겠다. 환하고 따뜻하고 이런 거 지금 읽어야 역효과니까 막 필립 로스나 도둑일기 이런 거 읽어야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독후감이 왜 이래 소설 감상이 하나도 없어….

감상
1. 아무 섬에나 가고 싶다.
2. 벚꽃 보고 싶다.
3. 그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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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24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수옹 이번 신간 초 ! 대박 나고 팟캐에서 쒼나게 낭독도 했습니다 (열반인님 수능 열공 하시는 동안 ㅎㅎㅎ)열반인님의 미래는 곧 합격!

반유행열반인 2022-11-24 21:23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 이 정도 유독한 건 고통스러운 중생의 푸념 호사소마 정도로 좀 봐주세요… (굽신굽신 찐팬 사생팬 몰려와서 두드려패면 나는 팔십 년은 커녕 오늘 죽는다…ㅋㅋㅋ)미래는 나중에 생각할게요 ㅋㅋㅋㅋㅋ

Yeagene 2022-11-25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작가 신간 다들 평이 좋더라구요 ㅎㅎ저도 짬내어 읽어야할텐데;;;;;

반유행열반인 2022-11-25 14:34   좋아요 2 | URL
착하고 밝음을 말하는 소설이었어요. 최은영 많이 생각났어요. 그런데 저는 수능 망친 엔수생한테는 안 권할 거 같아요 ㅋㅋㅋ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브로콜리너마저) 때도 있잖아요 ㅋㅋㅋㅋㅋ
 
최상위권 수학머리 만들기 - 카이스트 출신 수학컨설턴트가 알려주는 수학공부법
이윤원 지음 / 반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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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4 이윤원.

온갖 책을 찾아 읽고, 그런 내가 올 한해 가장 골몰한 일이 수학 실력을 높이는 것이었으면서도, 수학공부에 관한 책 한 권 찾아볼 생각 안 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전자도서관의 신간 목록을 헤매다 이 책을 보고 한 번 보자, 했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수학 잘 한다, 잘 가르친다 자부하는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다.

시험을 보기 전까지는 많이 울었는데 정작 시험날 이후로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다가 또 조금 울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부족한 것이라지만 그야말로 노베이스로 시작한 공부를 일 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우수한 성적까지 끌어올리기란 무리였다. 그러니까 지나온 시간은 고2 올라와서 이제 처음 수능 볼 과목 한 번 배운 정도…는 되겠다. 고2 마치기 전에 수능 보라고 하면 누구나 나처럼 될 거야… 그렇게 위안 삼아보려고 해도 흐헝헝 아무리 그래도 왜 그렇게 못해…하고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다.
수학 성적은 겨우 절반을 맞출 정도 밖에 갖추지 못하고 시험장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냥 떨지 말고 어려운 건 미련 갖지 말고 쉬운 거나 풀고 나오자 했다. 시험 직전까지 미니 모의고사 하나 풀고도 세상 끝날 것처럼 울고불고 그렇게 혼자서 매일매일 진짜 수능 망한 것처럼 수십번을 하고 너덜너덜해진 채로 시험을 맞이했다. 그래서 그런가 오히려 당일날에는 다 못 풀 걸 알고도 덤덤하게 풀리면 풀고 안 되면 넘기고 마킹 대충 미리 해놓고 들여다보지도 못한 것도 적당히 포기하고 찍을 거 찍고-거의 열 문제를 못 풀고도 그냥 편안했다. 어차피 평소대로 한 건데 내 실력이 아직 여기까진데 뭐, 하고.

책을 보며 지난 시험 공부가 힘들었던 이유를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나는 최초의 수학 공부를 교과서로 시작했다. 교과서는 강사들도 나름 중요시하는 교재이긴 하지만, 그래서 보면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됐다.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개념이 담겨 있고 증명과정까지 상술된 좋은 책이긴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기초고 기본이고, 그걸로 개념 공부가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예 수능 기본서들은 교과개념/수능개념 이렇게 따로 나누고 ‘수능개념’이라는, 교과서에서는 다루지 않는, 그런데도 입시판에 있다면 누구나 이건 기본이지 하고 별도로 익혀야 하는 개념, 풀이법, 이해 방식이 있었다. 그걸 알면 일일이 증명하듯이 혹은 오래오래 에둘러 계산으로 풀 필요 없이 아주 쉬운 문제들은 순식간에 풀려버렸다. 쉬운 문제는 그렇게 몇초컷을 하고 그렇게 아낀 시간을 고난이도 문제에 쏟아부어야 했다. 그런데도 바보처럼 그걸 모르고 교과서를 푼 뒤에 바로 이비에스 수능특강 지난 해 문제와 강의를 꾸역꾸역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이름이 오르내리는 한권으로 완성하는 수학, 이라는 개념 독학서를 들고 뭐가 쉬운 거고 어려운 건지도 구분하지 못한 채 꾸역꾸역… 그러다가 또 규토 라이트라는, 개념학습과 기출공부 사이 포지션이라는 두툼한 문제집을 사서 또 꾸역꾸역…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고 대부분의 문제를 풀 수 없었다. 하루에 여섯 시간씩 수학만 붙잡고 있는데도 나아간 페이지는 몇 쪽 채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해 보겠다고 6월까지 거의 반 년을 혼자 하다가… 뒤늦게 인터넷 강의라는 걸 들었고, 당장 시험을 보긴 해야겠으니 가장 기초 커리큘럼부터 들을 수는 없고, 중간에 다소 어렵다는 만만하지 않다는 강의부터 또 시간에 쫓겨 하루에 다 소화하지 못할 많은 양을 막 진도부터 나가고, 그렇게 세 달 가량 보내다가 모의고사 대비한답시고 가장 최근의 모의고사 해설 강의 해주는 강사의 강의를 보고 이게 필요하지 싶어서 기출문제 강의를 시험 두 달 앞두고 시작해서 ㅋㅋ수능 전까지 그거만 하다 갔다.

그러니까 일단 1. 기본 개념/교과서 개념은 물론이고 수능시험을 위해 알아야 할 응용개념까지 튼튼히 다지고 이걸 어떻게 문제풀이와 연결짓는지 잘 파악했어야 했다.
2. 이게 된 다음에 그렇게 혼자서 끙끙대며 문제풀이 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나는 모든 공부를 정확히 반대 순서로 제일 어려운 것부터 점점 초반에 했어야 했던 것으로 나아갔고 ㅋㅋㅋㅋ 결국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고 막판에 문제풀이 연습 열심히 해야할 때까지도 기출풀이와 기본개념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 헤매다가 엉엉 울다가 시험을 보러 갔던 것이다…

일년 농사 망한 이유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앞으로 어떻게 공부할지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 책은 절대 답지 보지 말 것, 끝까지 얼마가 걸리든 오래오래 혼자 풀려고 시도해볼 것, 그게 상위권의 공부방법이라고 했는데, 그건 내가 초반에 그렇게 하다가 시간을 다 써 버리고 결국 할 것 다 못 하고 가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미련한 공부법을 본 주위 이과 출신 사람들은 그렇게 마냥 붙잡고 있는게 아니고, 문제 보고, 조금 고민하다 안 되면 바로 답을 보고, 답을 꼼꼼하게 보고 따라가라고 했다. 강사가 푸는 풀이도 주의깊게 보고, 그걸 체득하고 암기하고 따라가도록 연습하고 노력해야 느는 거라고… 그래서 그런 조언대로 해보려고 애쓴 결과는 성적 향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오히려 초반에는 일단 기를 쓰고 뭐라도 시도해보고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공부를 할수록 나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고 답지나 강사가 풀어주는 것과 전혀 동떨어진 헛짓거리나 할 것 같고 그래서 점점 더 시작조차 못하고 생각은 돌아가지도 않고 그런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뭐 그런 상태…완전 자신감을 잃었네…

그래서 이번에는 일단은 애들이 소위 풀커리 탄다는대로 기초개념강의부터 강사가 짜놓은 커리큘럼을 따라가보는 게 목표이긴 하다. 그런 와중에 이책에서 문제풀이 강의를 본다고 실력 느는 거 아니라고…답지 보지말라고…아 저도 한때 그런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ㅋㅋㅋ 답지를 봐도 안 봐도 안 되는 건 마찬가지인데 어쩌라구요….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수학 잘하는 분들 존경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삐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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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gene 2022-11-24 1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도 보시고 공부방법 꾸준히 찾아보고 계시니까 금방 좋아지실 거에요♡

반유행열반인 2022-11-24 21:24   좋아요 1 | URL
그만 찾아봐야겠어요 ㅋㅋㅋㅋㅋ 늘 감사합니다 예진님

라로 2022-11-25 0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학이 어렵군요!! ㅠㅠ 갑자기 이 글을 읽으니까 맨날 너드라고 속으로 놀렸던 사위가 좀 괜찮아 보여요. ㅎㅎㅎㅎ 암튼 저는 무식한 라테라 그런가 그냥 무작정해파입니다. 아무생각도 하지 않고. 이러니 늘 실수투성이죠.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2-11-25 12:53   좋아요 0 | URL
때로는 우직하게 그냥 해, 하고 아무 생각 없는게 좋은 것 같아요. 뭐 한입 먹으면 행복해지고 저지르고 그냥 하고…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뇌가 알아서 자동 실행하고 있는 겁니다 ㅋㅋㅋ 실수는 주변에 보완해줄 사람들이 있는 만큼 자아가 알아서 제한하니 괜찮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2-11-25 0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새는 수학의 정석으로 안하나보군요? ㅋ 전 고딩때 정석 풀었던 기억만 남니다 😅 수학 넘 어렵다는 ㅋ


답지를 봐도 안봐도 마찬가지라는 말은 어려운 소설은 다 읽고 나서 해설봐도 잘 모르는것과 비슷한 느낌 같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2-11-25 12:54   좋아요 1 | URL
저는 어려서도 정석을 안 했더니 뭔가 주춧돌 같은 게 부족하네요 ㅋㅋㅋ(개념원리파…그런데 개념도 못 갖춘 ㅋㅋㅋ) 저는 답지 보는 것도 싫어하지만 소설 뒤 해설 읽는 건 더 싫어해서 잘 안 봐요 ㅋㅋㅋㅋ그러니 오독 오해 오개념이 넘치는 거겠죠…
 
찾지 말아주세요 -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흑역사 청산 만화
나카가와 마나부 지음, 김현화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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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3 나카가와 마나부.

부제-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흑역사 청산 만화.
흑역사. 그게 청산이 되긴 하는 걸까.
알라딘 당신의 기록 올해치를 보고 놀랐다. 수험서 등등은 통계에 제외한다는데 왜 구매 권수는 111권으로 되어 있는지… 작년에는 왜 320권인 건지 이거 보고 더 깜짝 놀람ㅋㅋㅋ… 주로 아이들 책이랑 스티커북을 샀을 것이다. 내 책도 사긴 했을 텐데 시험 전까지 11달 내내 읽은 건 8권, 시험 끝나고 이제 일주일 되어 가는데 벌써 6권. 역대 최저 독서 암흑기가 되겠다…내년에는 이거보다는 더 읽을지도…

올해 산 책 중에는 이런 만화책도 있었지. 아이에게 먼저 읽으라고 주었던 만화책을 찾아보았다.
찾지 말아 주세요.
2월에 짐 싸가지고 교무실을 나올 때 약간 이런 마음이었는데. 나는 1년 안에 탈출 루트가 마련될 줄 알았는데 안일했다… 독서대 하나 없으면 어깨랑 목이 아파서 옴짝달싹 못하는 노쇠함이여… 책 속 마나부의 어깨에 어두운 음영 표시로 두 개의 팔이 덜렁 얹혀 있는데 그 기분 왜 알 것 같은지…
중학교 수학교사였던 마나부는 어느 날 찾지 말아 주세요,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잠적한다. 우리에게는 잠수탄다는 말이 있구나… 십오 년 후 얹힌 듯 가슴에 남아 있던 부끄러움? 미안함? 그런 걸 직면으로 해결하고 싶었는지 마나부는 다시 그 탈출 루트를 되짚으며 억누르고 잊고 있던 당시의 상황과 그때 그 일을 목격했던 사람들의 입장을 듣고자 한다.
의외로 사람들은 남의 일에 별로 큰 관심 두지 않고 큰 영향을 받지도 않고 그저 덤덤했다. 마나부의 엄마는 제일 힘든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저 살아돌아와서 고마워- 하며 마냥 오냐오냐해줘서 마나부는 그게 더 죄스럽고…아빠는 이미 돌아가셨다.

나는 스스로 포기를 모르는 꾸준함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해왔지만 이 만화를 보면서 내가 생각보다 금세 포기하고 다른 새로운 것들을 찾아 나섰다는 걸 떠올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합창부가 하기 싫어져서 그날로 아침 연습에 가지 않았다.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맘대로 빠져버리니 화가 난 지도 선생님은 나를 불러다 앉혀 놓고 악독한 것,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혼냈었다. 그뿐인가 고등학교 때는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스쿨 밴드 오디션에 통과해서 보컬이 되었지만, 아이들과 잘 지내지 못하고 연습을 안 하고 자꾸만 객원 보컬을 데려오는 연주자들에게 실망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밴드를 때려치우고 나와 그 아이들 공연하는 수학여행 저녁에 화장실에 혼자 숨어 한참 엉엉 울던 기억도 있다. 좋아하는 아이가 나를 안 받아주면 또 엉엉 울다 곧 다른 아이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임용을 보고는 아 망했네 나 이 시험 죽어도 못 붙음 하고는 사립학교 원서 30 몇 군데 쓰고 학교 취직 안 되면 일반 기업 취업이라도 시도하자, 하고 토익책 사서 토익 시험 준비를 했었다.(그러다가 1차 붙는 바람에 큰일 났다…하고 열흘 동안 2차 벼락치기 하기도…) 기타를 배우겠다고 학원에 등록했다 건초염이 생기고 연습이 지루해지자 몇 달 못 되어 관둬버리고, 보컬 레슨을 받겠다고 또 학원에 갔다가 몸과 마음이 힘들어지니 그것도 얼마 안 되어 관둬버렸다. 나름 다른 형태의 삶을 꿈꾸며 들어간 대학원에서도 전공 학문에 도무지 흥미를 갖지도 적응하지도 못하고는 논자시까지 봐놓고는 논문을 쓰지 않기로 했다.
쓰고 보니 나의 도피의 역사는 끝이 없구나…원가정에서는 가출도 많이 했었지 참…

아마 이번 도피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밥벌이로 되돌아갈 수도 있겠다. 나는 생각보다 포기가 빠르니까… 마나부는 선생을 관두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 전전하다가 만화가가 되어 이 책을 냈다. ㅋㅋㅋㅋ 이 책 말고도 만화가 하겠다고 도쿄 와서는 친구 못 사귀어서 절절매는 이야기 ‘나는 아직 친구가 없어요’도 같이 사놨더라…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서사 궁금하고 공감하고 찾아보는 나도 흑역사에 절절매는 마나부도 안쓰럽다. 그래도 나만 그런 거 아니란 거 알려줘서 고마워 마나부 ㅋㅋㅋㅋㅋ친구 잘 사귀나 못 사귀나 다른 책도 보러 갈게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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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23 2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딩 5학년 생 한테 악독한 것이라뇨!

기타 들고 열반인님
홍대에서 데뷔를 하셨어야 ㅎㅎㅎ

요즘 최고의 인기 직업은 예능인
유툽에 얼굴 손 빠꼼 내미는 유투버들 !^^

약사 친구 가게 문 닫으면 조명등 키고 유툽 촬영하고 살아여 ㅎㅎㅎ

열반인님 북플에선 사라지지 말귀~@@@@@

반유행열반인 2022-11-24 08:12   좋아요 1 | URL
화장도 엄청 세게 하고 무섭게 가르치던 선생님이셨는데 센 말이라 여태 기억에 남네요. 저 홍대 클럽 잠깐 돌다 멤버들 하나둘 떠나가고 밴드 역시 임신출산과 함께 금세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ㅋㅋㅋㅋ유튜브 이런거 하는 거 보면 대단한 거 같구 이제 관종병(?)은 치유가 된 건지 최대한 숨어 살고 싶습니다…
 
[전자책] 숨은 말 찾기
홍승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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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3 홍승은.

내키지 않을 때 말하지 않아도 되는 한 해를 보냈다. 그건 축복이다. 가장 친밀한 사람들하고만 말을 나누고 그럴 시간마저도 문제집을 붙들고 있느라 쪼그라들었다.
먹고살기 위한 말하기와 그밖의 말하기는 사뭇 다르다. 평소 말하기대로 하면 정말 큰일 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어린이들에게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최대한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졌고, 나를 내보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아마 내 말들은 재미 없어졌을 것이다. 존댓말을 하거나 나이에 상관없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주고받으면 대체로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생겼다. 그러다가도 방심하면 왜 애고 어른이고 선을 넘는 성희롱의 언어를 던지는지. 이제는 어른이 그러면 그 자리에서 불쾌감을 표시하고 그 말은 잘못됐으니 사과하시오, 하고 사과를 받아내는데 이상하게도 어린아이들이 나쁜 말을 하면 그런 말은 안 돼, 그 이상 대응하지 못한다. 혼을 내거나 벌을 주거나 벌점을 매기거나 하지도 못한다. 나도 나쁜 말을 많이 하니까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대화 상대방이 사람 때문에 힘든 순간을 토로하면 나는 상대방보다 더 오버를 하면서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람을 욕하곤 한다. 그게 부모든 배우자든 연인이든 공통으로 모시는 상사든 상관없다. 나는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을 나이 불문하고 그 새끼 글러처먹었네, 미친 새끼네, 하고 온 힘을 다해 비난한다. 그게 위로가 될 거라 믿었다. 그러면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사람은 약간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너 왜 우리 00를 그렇게 말하니…하지는 않고 그냥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흥분한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 돌아보면 나는 매번 왜 그리 주제넘었나 싶다. 곡비처럼 대신 통곡하는 대신, 대신 욕해드립니다…하고 있었구나…

그러면서도 늘 집에 돌아오면 내 말과 행동을 곱씹고 너무 말이 많았던 것, 상대의 말 중간에 끊고 들어간 것, 과도하게 센 비유를 쓰거나 비속어를 남발한 것을 자주 후회했다. 코로나19를 거쳐오며 이제는 만남도 모임도 대부분 끊겨버리고 그래서 말로 죄짓는 걸 덜하게 돼서 다행이기도 하지만. 주호민의 만화 ‘신과 함께’의 지옥에서 염라대왕이 말로 죄지은 이들의 혀에 밭을 갈고 한라봉 아니지 염라봉을 키워 수확하는 걸 보며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저기다, 내가 죽어서 가게 될 곳.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가 너무 좋아서 밑줄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쳤던 기억이 난다.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에서 작가의 삶을 보고 그 문장들이 진짜 삶에서 짜내어진 거구나 이건 진짜였어…하고 존경심마저 느꼈다. 그래서 홍승은 작가가 쓴 말에 관한 에세이를 보고는 주저 없이 펼쳤다. 전에 읽은 두 책만큼 마음에 와닿지 않은 건 말로부터 도망치는 중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도망치는 나와 달리 작가는 강연 노동자, 집필 노동자로 살면서 끝없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고 나아지는 자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또다시 존경합니다…했다. 나는 결국 포기하고 피하고 숨는 길을 찾고 있는데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소리 내지 않는 삶을 꿈꾸는데요… 이 무기력의 근원은 뭘까요…
기를 죽이고 윽박지르는 세상을 향해 계속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용기를 내는 작가와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을 곱씹어 보면…연대와 경청의 유무였다. 끝없이 세상과 이어지고 다른 이의 고통을 듣고 고개가 아프도록 끄덕여주는 사람은 그만큼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세상에는 정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다양하게 살고 있다는 걸 살아갈수록 새삼 느끼는데, 그럴수록 더욱더 뻗어나가기 보다 움츠러드는 난 비겁하지만… 일단은 방구석에서 숨어서 응원할게요… 숨을수록 말도 꼬이고 손가락도 꼬부라지는 것 같고 문장도 의미를 잃어가고 점점 후져지는 것 같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는 날이 다시 오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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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1-23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는 저도 반열샘 덕분에 읽으면서 엄청 줄을 많이 그었던 책,,, 그 저자가 책을 냈군요. 가만보면 반열샘 늘 의리있고 일관성 있어요!! 그래서 좋아해요,, 저는 내가 누구 욕할 때 나보다 더 욕 세게 많이 해주는 사람 좋아해요,, 그런데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어요,,, 앞으로 그런 욕하고 싶은 일이나 사람이 생기면 반열샘에게 하고 싶은데 앞으로는 안 그러실 거라는 거죠??^^;;;

반유행열반인 2022-11-23 17:47   좋아요 0 | URL
저 그렇게 좋아하다가 뭔가 이제 이별할 시간이다 싶으면 가차없어요 ㅋㅋㅋㅋ장강명 전작하다가 올해 가진 책 대부분 팔아버리고 신작도 안 샀어요 ㅋㅋㅋ최고의 안티는 최고의 팬에서 나오는 구나 싶습니다…(척지고 살지 맙시다….)
라로님 말씀 듣고는 다시 올라가서 읽어보니까 이젠 안 그럴게요…소리는 없네요… 반성만 하고 안 그런다 소리는 왜 없니 나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욕할 사람 욕할 일 없이 가능한한 평온한 하루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만약 생기면 그때 알려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

Yeagene 2022-11-23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단은 방구석에서 숨어서 응원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2-11-23 18:44   좋아요 1 | URL
바깥 세상은 위험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