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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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2 아고타 크리스토프.

나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 묶인 책을 읽지만, 사실 이 책은 ’커다란 공책(Le Grand Cahier)‘, ‘증거(La Preuve)‘, ‘세번째 거짓말(Le Troisième Mensonge)‘ 세 소설을 모은 것이었다. 번역 제목은 ’비밀노트‘, ’타인의 증거‘, ’50년간의 고독‘이 되어 버렸는데, 국경을 넘는 책이 겪는 숙명이고, 자국어 밖에 모르는 무식쟁이가 만나는 필터링이다. 나쁘다는 건 아니고, 어쩌면 소설도 번역도 다 거짓말일지도. 외국어를 몰라 무성영화관에서 아무말 잔치를 했다는 변사들이 괜히 떠오른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 좋은 소설들 읽게 해주셔서 감사한 번역가님들...난 고2때 프랑스어를 택하지 않은 걸 한 번 더 후회한다.

’잘못 걸려온 전화‘도 컵에 박힌 프랑스어를 가는 눈으로 가늠해 보면 ’틀린 번호‘ 같다. 작년 여름 휴가를 다녀오면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그 짧은 소설 모음을 먼저 읽었고, 좋았다. 난 이 작가 좋아하겠군...하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바로 다음 날 무려 5500원에 사 놨다. 가끔 난 금속 탐지기 아닌 종이 탐지기 같은 거 들고 헐값에 버려진 책들을 주우러 다니는 넝마주이 같다. 싼 옷도 같이 줍고 다니니 뭐 비슷하네… 그래도 이런 넝마주이라면 행복.

1부를 읽을 때는 악동 쌍둥이들이 서로를 두들겨패며 단련시키는 것처럼 내가 얻어 맞는 기분이었다. 와. 세게 팬다. 어디선가 이 소설을 자기 앞의 생 비슷하다고 한 걸 들은 듯 한데 로맹가리 먼지네, 싶었다. 로맹가리 팬들께는 죄송합니다…
1부에서 우리, 였던 아이들은 국경을 두고 분리되어 2부에서는 3인칭으로 지독히 형제를 그리워하고 여기저기에서 애착을 갈구하지만 끝내 사랑하는 이들을 다 잃어버리는 루카스 이야기가 절절했다. 독립된 소설이지만 둘이 세계관이나 인물들이 딱 들어맞았다. 그러다가 3부에서 1인칭 나, 클라우스의 가족사와 형제 이산을 따라가는 순간 조금 혼란에 빠진다. 뭐여 소설 속의 소설이었던 건가...구운몽인가… 소설은 사실 다 만들어낸 이야기니까 저 세계에서는 폭격에 내장 터지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이 세계에서는 욕설 퍼붓는 할머니처럼 살아 있기도 할 수 있다. 유럽은 기차가 많으니까, 안나 카레니나도 그렇고 가엾은 루카스도 그렇고 마지막은 기차로구나, 스크린도어는 많은 생명을 살렸지만 지하철에서 죽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죽였겠다 싶었다.

오랜만에 푹 빠져 읽을 소설을 만나서 신이 났다. 뭔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괴로울수록 그 세계가 가혹할수록 내가 후해지는 느낌이다. 소설 속 전쟁과 국경과 죽음들도 가혹하지만, 현실의 이야기조차 못 남기고 고통 받다 사라진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을 것이다. 좀 더 어릴 때 국경 근처에서 다람쥐 쫓다 총에 맞아 다리를 절게 된 형의 저항을 답답하게 바라보는 동생과, 통제된 세상과, 국경을 넘는 책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비슷한 느낌적 느낌으로다가 명작들이 나도 모르는 새 이미 너무 많이 나와버렸으니 나는 열심히 찾아서 감사히 읽고 독후감이나 쓰자… 그리고 지난 번의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에 이어 또다시 까치 홍보대사를 해야겠다. 여러분 헝가리 노벨상 받은 할아버지 소설도 뭐 멋지긴 한데 아고타 크리스토프 할머니 소설도 너무 좋아요. 야 이 정도인데 왜 노벨상 안 줘? 했는데 이미 14년 전에 돌아가셨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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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허가 없이 연대를 떠났거든. 도망친 거야. 난 탈주병이란 말이야. 잡히면 총살형이나 교수형이야.”
우리가 물었다.
“살인자처럼요?”
“그래, 꼭 살인자처럼.”
“그렇지만, 아저씨는 아무도 죽이려고 하지 않았잖아요. 다만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인데.”
“그래, 난 집에 가고 싶을 뿐이야.” (48)

-“그러면 ‘십계명’도 알겠구나. 너희들은 그걸 지키니?”
“아니요, 신부님. 우리는 지키지 않아요.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거기에는 ‘살생하지 말라’고 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죽이기를 일삼고 있어요.”
신부가 말했다.
”그렇구나...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90)

-한 남자가 말했다.
”당신, 입 닥쳐. 여자들은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 여자가 말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바보 같은 소리! 온갖 궂은 일, 온갖 걱정에 빠져 지내는 게 여자야. 아이들 먹여 살려야지, 부상병들 돌봐야지. 당신들은 일단 전쟁만 끝나면, 모두 다 영웅이 되잖아. 죽었으면 죽어서 영웅, 살아남았으면 살아서 영웅, 부상당했으면 부상당해서 영웅. 전쟁을 발명한 것도 당신들 남자들이고, 이번 전쟁도 당신들의 전쟁이야. 당신들이 원해서 그렇게 한 거야, 개똥같은 영웅들아!”(106,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자들을 짓누르고 짓이긴다.)

-“너희는 너무 예민해. 너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희가 본 것을 모두 잊어버리는 거야.”
“우리는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거예요.” (117, 이 책의 많은 장면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듯해.)

-아이가 물었다.
”왜 늦게 크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지. 넌 다른 사람들만큼 크지는 않겠지만, 영리하잖아. 키는 중요하지 않아. 영리한 게 더 중요하지.“ (242, 전국의 키작인들이여 단결하라)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302)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것,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나는 그가 더 좋은 처지에 있고,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비-신의 악의가 만들어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545)

-기계의 리듬에 맞춰서, 작품을 끝냈을 때의 기분은 허탈했다. 완성된 작품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쓰는 행위를 정신 분석과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거기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이다. 쓰면 쓸수록 병은 더 깊어진다. 쓴다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나는 쓰는 것 이외에는 흥미가 없다. 나는 작품이 출판되지 못하더라도 계속 쓸 것이다. 쓰지 않으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쓰지 않으면 따분하다. (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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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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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동명의 김영하 소설을 읽었다. 그러고나서 김영하 에세이에서 이 소설을 소개해서 관심이 갔다가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중고책으로 2002년 초판을 구했다. 책 상태가 깨끗했다.

번역이 이상한지 원래 서술이 그런 건지, 독백하듯 -이다, 체를 쓰다가 갑자기 샤미소에게 말을 걸다가 난리가 난다. 일인칭이긴 한데 중간중간 서간체로 돌아가는 게 일부러 그런 건지는 몰라도 몰입을 방해하는 면이 있었다.

제목은 표지에 독일어로 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페터 슐레밀의 환상적인 이야기-해설에 원제대로 해석되어 있다) 하고 써 있는데, 겉표지를 넘기니 샤미소가 프랑스 샹파뉴 출신이라고 해서 엥? 했다. 귀족 집안이라 프랑스 혁명 때 독일로 망명을 했고, 이후 독일에 정착한 이야기를 마저 읽고 끄덕끄덕 했다.

나도 독일과 프랑스의 갈림길에서 고민한 적이 있다. 바로 고2 올라갈 때, 문과로 행로를 정하는 동시에 문과-독일어반인지, 문과-프랑스어반인지 택해야 했다. 나는 고민 없이 독일어를 골랐다. 프랑스어는 뭔가 느끼하고 나랑 안 맞는 듯해… 이름만 알지만 왠지 힙해 보이는 칸트, 니체, 비트겐슈타인 다 독일이름이니까 왠지 독일어를 배우면 나중에 그들의 철학책도 슈슉 읽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흠...밀란 쿤데라가 체코 사람이지만 내가 좋아하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체코어 아닌 프랑스어로 쓴 걸 알았더라면, 조금 더 고민했을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주로 읽는 지금은 프랑스어를 택해 조금이라도 어릴 때 맛이라도 보지 않은 걸 후회하지만...듀오링고로 프랑스어랑 독일어를 다시 좀 해 보려다가 무료 버전이다보니 매일 배터리가 부족해 그만 두었다. 대신 200일 넘게 아랍어를 하고 있다. 우힙앨키라아(I like reading).

저자는 왜 돈 받고 팔면 안 될 것으로 그림자를 꼽았을까? 슐레밀은 곧바로 영혼을 팔지 않고 그림자부터 팔았다. 회색옷 남자는 그림자를 돌려줄테니 대신 죽은 후 영혼을 넘기라고 한다. 슐레밀은 차마 영혼은 못 팔고 매매계약서에 서명을 거절한다. 슐레밀의 선은 그림자까지는 그럭저럭 넘길 만했고, 영혼은 아니다 싶었나 보다.

나의 존엄, 자유, 건강, 이런 건 돈이랑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인 걸 알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일터에 나가서 그것들을 조금씩 갉아가며 돈으로 바꾸고 있지 않냐… 대부분 볕 없는 곳에서 해 쨍 뜨기 전부터 해 저물 때까지 갇혀 일하고 있으니 돈에 팔려 그림자를 잃은 거 아니냐… 물론 달빛과 가로등이 우리를 비춰주지. 그림자는 아마도 저 존엄, 자유, 건강 이런 것의 은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깊이 공감가는 소재는 아니었다. 그림자 팔았다고 세상 사람이 인간 취급도 안 하는 게 더 놀라웠다. 악마에게 그림자를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되는 거 아니냐… 오히려 현실에서는 무슨 짓을 해서 번 돈이든 간에 사람들은 돈이 많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 사람을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19세기 초에 나온 자연과학연구자겸 문학인이 쓴 짧은 소설은 이렇게 기대보다는 재미가 없었다. 우연히 길을 걷다 회색 남자를 봐서 돈자루랑 그림자랑 거래한 것도 신기한 일인데, 슐레밀에게는 신기한 일이 또 생겨서 중고 시장에서 산 장화가 하필이면 세계를 휙휙 돌아다닐 수 있는 헤르메스의 신 같은 것이었다. 뭐 환상적인 사건은 얘만 쫓아다니는 거야… 그림자 없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빠른 발걸음으로 극복하고, 세계를 누비며 자연연구에 몸 바쳐 살아간다. 돈이 무한정 나오는 자루가 없어도 공간을 재빨리 넘나드는 재주로 세계의 이것저것 먹고 싶은 걸 먹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필요한 건 아프리카 상아 주워다 팔아 사고 말이다. 그런데 회색 남자는 어디갔어…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할 것 같은데 포기했나 어느 순간 안 나오고 끝에서도 슐레밀이 샤미소에게 훈수두며 그림자 팔지 마라, 하고 회색 남자의 행방은 묘연한 채 끝난다.

해설은 돈만 우선시하는 세태를 비판한 작품으로 풀어갔다. 그러나 소설 속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림자 없는 걸 알고 나면 다들 그를 천시하고 몹쓸 취급했다. 그걸 보면 효과적인 비판 같지는 않았다. 아무도 돈을 그림자보다 우선시하지 않고, 슐레밀 자신도 매우 후회하고, 아무리 부자여도 그림자 없으면 사랑도 결혼도 안 되는 세상인 거 보면 그림자만 우선시하는 세상이잖아… 우연한 사고로 병에 걸리거나 장애가 생기거나 이런저런 정체성이 소수자인 사람을 차별하는 이야기에 더 가깝지 않나… 영화 ‘박쥐’에서 흡혈귀 된 현상현이 자기 괴물 취급하는 걸 억울해하던 생각도 나고… 슐레밀이 조금 더 뻔뻔했으면 미나에게 내가 그림자 있었으면 당신이랑 만날 수 있었겠어요? 내가 돈 뿌리고 다녀서 왕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기나 했겠어요? 하고 따질 법도 했는데...슐레밀은 그냥 질질 짜기만 한다. 어휴… 돈자루 나한테 내놔라 내가 아주 잘 쓸 자신 있다…

19세기에는 어쨌는지 몰라도 지금은 내 소중한 걸 내놓겠다 해도 그걸 마법 돈자루처럼 무한에 가까운 부와 바꿔줄 악마는 없다. 내 온갖 신체 부위와 영혼을 다 갖다 줘도 자본주의는 몇 푼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목숨은 살려드리고,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야금야금 돈과 바꿔주는 편이 뽑아먹기엔 더 유리하다는 걸 아는 영악한 악마 같은 시스템이 더 납득이 간다. 생존을 위해 야금야금 말고는 다른 선택지를 모르겠다. 그림자 한 방이 오히려 내 존엄을 지키는 데 지장이 없을 것 같은데, 내 윤리관이 이상한 건가 샤미소의 세계관이 허술한 건가 아무래도 둘다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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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악수를 나누고서 지체 없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그가 놀라운 솜씨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 그림자를 풀밭에서 살짝 거둬들여 둘둘 말아 접어서 주머니 안에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시 일어나 내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장미 숲을 향해 되돌아갔다. 나직한 그의 음성이 들렸다. (29, 간편한 걸? 내 그림자도 사 가…난 후회 안 할 거 같아…얘들아 그림자 없어도 나 사랑해줄 수 있니?)

-그는 주저하면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머리카락을 끄집어내자 거기서 토마스 존의 창백하고 일그러진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창백한 주검의 입술이 다음과 같은 말을 힘들게 웅얼거렸다.
“신의 정의로운 심판으로 나는 처형당했다. 신의 정의로운 심판으로 나는 저주를 받았다.” (109, 회색옷 아저씨는 악마인데 영혼을 판 존 씨는 신을 들먹인다. 신은 어쩜 우리의 고통을 재미삼아 이런저런 시련을 주는 만악의 근원일지도. 반박시 니말이 맞음. 이 장면이 그나마 인상 깊은 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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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아 문학과지성 시인선 454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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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6 김이듬.

나는 시를 쓰기는 커녕 읽기도 힘들었다. 시는 너무 어려워.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어떤 말들이 나를 휙휙 휘감아 어떤 느낌을 전해주는 때가 있었다. 자기실적평가서라는 걸 쓰는데, 귀찮아서 4년 전 걸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했더니 거짓말 해 버렸다. 연간 130여권의 책을 읽으며 자기계발을 어쩌구… 그해에는 130권을 넘게 읽었구나. 올해는 그 서류를 낼 쯤엔 겨우 100권을 넘겼었다. 나는 거짓말쟁이구나. 그래서 얇은 책들만 골라 보기 시작한다. 역시, 시집이 얇지.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해서 일단 거짓말을 해 놓고 그걸 거짓말이 아니게 바꾸는 편이다.

대부분 시집은 얇지만 쉬이 읽히진 않는다. 그런데 이 시집은 후다다다다다다닥 읽어버렸다. 시집 그렇게 읽는 거 아니라고 맨날 되뇌이면서도...이전 ‘말할 수 없는 애인’은 그렇게까지 잘 읽히지 않았는데. 이 시집은 귀기. 슬픔. 체념. 그래 나 미친년이다 꺄아아아아악 하는데 이건 내가 좋아하는 방식의 꺄아아아아악이라서

숙제를 하다 말고 자꾸 놀려고 도망다니는 어린이에게 ‘너 숙제나 다 하고 놀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린이가 글자 연습을 하던 깍두기 10칸 공책을 내려다 보니 ‘소리를 지르면 안 돼.’라고 써 있어서 머쓱해졌다.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꺄아아아아악 하지 말아야겠다. 아님, 이런 나라도 괜찮나요? 괜찮지 않나요?

글을 쓰러 도서관에 온 내 친구에게 떡을 나눠주던 이듬이 누나가 계속 시를 무섭게 잘 쓰면서도 조금은 덜 불행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집 감상이 왜 이 모양이냐. 내 생일날 어울리는 시집이다.(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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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지방 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춘다(64, ‘시골 창녀’ 중. 시집 펼치자 마자 처음 읽은 시)

-아무 이유 없이 몇. 시인지 궁금하다 아무도 모르게 내 안장과 핸들은 뜯겼고 한쪽 바퀴도 사라졌다 터진 타이어 같은 내 영혼은 보관대에 붙어 있다 컴컴한 시각 폐자전거들과 함께 이 땅에 발 딛고 있다 나는 멈추었다 뭐가 보이는가 공구함을 열고 찢어발겨진 영혼을 수습해보려 한다 축축한 어깨 또 다른 도둑이 다가온다 나를 만진다 내 구부러진 살에 바퀴에 오줌발을 갈긴다 마치 신나게 달려 나갈 것처럼 나의 발판은 흔들린다 (105, ’어른‘중. 일부만 훔쳐가지 말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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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은 - 13일 동안 이어지는 책에 대한 책 이야기
요시타케 신스케.마타요시 나오키 지음, 양지연 옮김 / 김영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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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5 요시타케 신스케, 마타요시 나오키.

그 책은 한 번 펼치면 멈출 수가 없다.
다정하게 함께 읽던 아이들이 한 쪽 더, 12쪽, 20쪽, 30쪽, 더, 더, 읽게 만든다. 그 책을 펼친 아이들은 경이로운 행복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책장은 읽을 수록 점점 불어난다. 책의 결말은 알 수가 없는데, 읽는 속도가 불어나는 속도를 미처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요시타케 신스케와 잘 모르는 마타요시 나오키라는 작가가 협업해서 낸 책이다. 책에 관한 책은 역시 ’있으려나 서점‘을 넘길 만큼 귀여운 걸 아직 찾지 못했다. 그림책 부분은 좋은데, 잘 모르는 작가의 부분은 잘 몰라서 그런가, 정말 재미가 없게 써서 그런가 책 두께가 쓸데없이 두껍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듯하다 느낌이 안 들고 진귀한 책 이야기라 하기에는 많이 식상했다. 종이 두께도 빳빳해. 재미 없는 부분은 찢어서 비행기를 접어 날리면 잘 날아다닐 것 같다. 하늘을 나는 책(이었던 것)이다. 배를 만들어 물에 띄우면 안 젖고 먼 바다까지 갈 것 같다.

마타요시 나오키를 검색해보니 ‘불꽃’이라는 소설로 아쿠타가와상을 탔다고 한다. 이름이 나오키라서 나오키상은 안 줬나 보다. 올해는 아쿠타가와상도 나오키상도 수상자 없음이라고 한다. 일본도 문학이 쭈그러드는 시절인가 보다. 아니 문학은 저 할 일 한다고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제 문학에 관심이 없어진 건가. 이 책은 문학이라고 해야 하나, 그림책이라고 해야 하나, 애매했다. 책 이야기라고 해도 재미있는 책도 있고 뻔한 것도 있으니, 늘 좋기만 할 수는 없지.
책에 대해 엄청 떽떽 거리는데도 재미있게 읽은 건 조 퀴넌 아저씨의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정도였다. 그런데 의외로 극불호인 독자들도 많아서 놀랐다. 그러니 ‘그 책은’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겠다...하고 찾아보니 정말 내가 후하게 친 앞의 책보다 별점이 훨씬 더 높고 좋다는 리뷰도 많다… 취향 뭘까… 이게 책의 매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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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자기 자신을 구할 수는 없다.
다른 누군가를 구할 뿐.
그렇기에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른 누군가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77, 구원은 셀프, 하던 내게 콩밤을 날리는 구절)

-마지막 그림은 나랑 너. 우리는 인간이야. 인간은 강하지? 어떤 이야기에서든 귀신을 이기잖아. 전부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 이기잖아? (118, 이겨라)

-’어쩌면 나는 본래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스쳤다.
한때 마가 끼어서 잠시 인간이 되고 싶다고 바랐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전부터 내가 내가 아닌 듯한
내 자리가 아닌 곳에 내가 있는 듯한 불안을 느껴 왔다.
그건 내가 본래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155, 어쩌면 나도 본래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상상 이상으로 악마는 예의 발랐다.
“엇, 악마는 무서워야 하는 거 아냐?” 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악마는 웃으면서 “다 옛날 얘기죠. 그땐 저도 어렸고요.”라고 말했다. (164, 인간은 어릴 때가 덜 무서운데.)

-세상에는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실은, 가닿지 못한 책들이 별만큼이나 많을지도 모른다. (177, 내게 닿고자 했으나 내가 쳇 하고 튕겨버린 책들에게 미안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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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에 Historie 12
이와키 히토시 지음, 오경화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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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나온 걸 오래 냅뒀다가 이제야 봤다. 그간 스토리 다 잊어버림... 사람이 많이 죽었다. 13권은 또 몇 년 뒤에 나올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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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5-12-15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걸 샀나... 안샀나.... 집에 가서 확인해봐야겠네요 ^^;;;
(전에도 그런 적 있는듯)

반유행열반인 2025-12-15 19:43   좋아요 0 | URL
저도 꽂힌 걸 간만에 발견해서 읽었어요. 또 한 5년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