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이노 비가 읻다 프로젝트 괄호시리즈 4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최성웅 옮김 / 읻다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20250418 라이너 마리아 릴케. 최성웅 옮김.

랭보가 에티오피아에서 커피 장사 했던 건 아주 나중에야 다른 책 보고 알았다. 처음 읽은 랭보 한 구절은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에 인용된 것이었다.

-“지금쯤 모두들 청소를 하느라 바쁠 거야.”
아다마는 바다를 보면서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나도 웃었다. 아다마는 땡땡이를 치는 재미를 처음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시집을 다시 한번 보여 줘, 하고 아다마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보았다.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태양이 녹아드는 바다.

아다마는 소리내어 랭보의 시를 읽었다. 태양이 빛의 띠를 만들어내며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다마는 시집을 빌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시집에 덧붙여 크림과 바닐라 펏지의 앨범까지 빌려 주었다.
지금까지 32년의 인생 중에서 세 번째로 재미있었던 1969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17세였다. (무라카미 류, ’69‘, 20-21)

딱 저 나이 무렵에 지금 나보다 어린 류 할배가 내가 태어나던 해 쓴 소설을, 2000년대 초의 내 또래 겉멋 든 아이들이 서로 칭송하고 권하면서 읽었다. 무라카미는 하루키보다는 류야, 하는 69스러운 마이너 청소년들 대열에(아니 근데 이거 마이너 맞냐 남의 취향은 잘 몰루) 나도 합류했다. 지금 다시 읽으라면 오그라들어서 못 읽겠어…

집에 엄마가 사 둔 랭보 시집 있던게 생각나서 저 시, 통으로 다 읽고 싶네 하고 뒤져 봤었다. 암만 봐도 저런 구절은 못 찾다가 비스무레한 걸 발견했다.

재발견되었다!
무엇이?-<영원>이.
그것은 태양과 섞인
바다이다.
(랭보, ’헛소리2‘ 중, <<지옥에서 보낸 한 철>>, 김현 옮김, 108)

Elle esst retrouvee!
-Quoi-I‘Eternite.
C‘set la mer melee
Au soleil.

원문까지 곁들여졌지만, 나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선택한(그리고 수능이 끝나는 순간 다 잊어버린) 문과라서 프랑스어를 일본어로, 다시 한글로 번역한 소설 속 시 구절과,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옮긴 시집 사이의 표현의 차이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한자가 적고 섞인,을 녹아드는,으로 옮긴 소설 쪽 번역이 낫다 싶으면서 랭보 시집은 흥, 하고 덮어 버렸다.

그 기억을 되짚으며 꺼내다 옮기느라 그 소설과 그 시집을 다시 몇 구절 읽고 앉았는데(그때 그 책들은 역시나 아직 있다 내 폐지모음에. 시집 펼치니 기침 나더라) 오, 난 왜 독일어를 선택했을까, 이거나 저거나 까막눈이긴 마찬가지인데 프랑스어를 하나도 안 배운 건 조금 아쉽다.

그런 내가 오늘 다 읽은 시집은 정작 독일어 시를 옮긴 릴케의 ‘두이노 비가’였다… 2023년에 읽다 놓다가 왠일인지 전자책 뒤지다가 2년 만에 시집 파일을 열고서 그냥 다 읽어 보자...하고 읽었다기 보다 눈으로 훑었다. 최성웅 번역가와 그 동료들이 낸 시선집이 마음에 들어서 사 둔 시집이었는데 제3비가 쯤 보면서 후회했었다. 아….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이거 전자책이라 못 팔잖아… 절반쯤 봤던 걸 오늘 그냥 다 읽었다. 시는 이렇게 한 번에 우르르 읽는 거 아닌데...하면서 맨날 또 그런다.

말이 다른 말로 건너오면서 가족오락관의 ‘고요속의 외침’처럼 이리저리 바뀔 수 있겠다는 짐작만 한다. 내가 원문 읽을 외국어를 아주 깊이 배우지 않는 한 그저 길잡이들이 먼저 읽고 옮긴 글에 기대 내 본토어로 더듬거릴 뿐이다. 한국어로 처음 쓴 글조차 잘 이해 못 할 때도 많은데 뭐… 번역가들은 옮기는 사람들이라기보다 다시 쓰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다시 쓴 문장이 마음에 드는 번역가 책들은 일부러 모으고 찾아볼 때도 있다. 컴필레이션 앨범 듣듯 이 분이 먼저 읽었으면 읽어볼 만할 것 같아… 이러고…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뭐 그렇다.

릴케 시집 독후감인데 릴케 얘기는 왜 이렇게 없어...엄마가 나 어릴 때 화장실 벽에 붙여 둔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서나 무수히 보던 이름, 릴케의 시를 이렇게 보긴 봤는데 보기만 하고 읽은 건 아닌 것 같고 뭐가 그렇게 슬퍼서 비가를 10개나 줄줄 주륵주륵 써 놨을까, 그런데 랭보고 릴케고 짐승 타령 월계수 타령 꽃 타령 시인들 생각보다 공유하는 단어 너무 많은 거 아니냐… 천사 영원 거울 소년 사랑 바다 어디서 제일 예쁜 거만 주워모아다 계속 스펠링비 같은 거 한다고 하면 이제 시인들이 떼로 몰려와 또 꼴밤 한 대씩을 맞겠구만… 심심하면 랭보 시집이나 천천히 읽어 봐야 겠다. 조롱의 대가라면 아마 내가 좀 좋아할 거 같기도 하다구… 근데 이 분도 체코 출신이면서 오스트리아 시인이래고 독일어 시 썼는데 카프카도 그렇고 밀란 쿤데라도 그렇고 왜 체코에서 태어난 사람들 체코어로 글 안 써? 독일어나 프랑스어로 쓰는 편이 더 많이 읽힐 거라고, 말 건너가다가 육이오가 오징어가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지레 걱정했을 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오징어로 읽는 애들 못 쫓아내니까 더 그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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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에 투자하세요 - 제5회 틴 스토리킹 수상작
황이경 지음 / 비룡소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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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5 황이경.

‘우린 세상을 바꿀 수 있겠지?’
교장실 문과 교내 여기저기에 열 장 남짓도 안 되는 인쇄물을 붙이고 돌아온 날이었다. 고3이었다. 후기 겸 일기처럼 친구가 운영하는 커뮤니티에 그날의 일을 적었다. 나는 알량한 글자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자꾸 공동현관 앞에 비밀번호를 적어 놓지 말라고, 누가 자꾸 적어놔서 보안이 엉망이라 경찰에 신고 했다고, 씨씨티비도 확인하고 지문 채취도 해갔다고(실제로 외부 학생이 옥상에 몰래 올라와 투신 소동을 벌여 소방차랑 경찰차가 출동한 적이 있었다. 그외에 신고도 채취도 다 뻥이다) 인쇄물을 몰래 붙여 놓고 다시 적히지 않는 비밀번호에 안도한다. 글로 내 이미지를 만들려고 친절한 (척) 단체 메시지를 구구절절 보낸다. 그걸 또 다른 사람들 재사용하려면 하라고 공유도 한다.

멀티수납 북엔드 받으려고 오랜만에 주문한 청소년 소설은 조금 귀엽긴 했다. 청소년 심사위원 여러명이 선정한 소설이라고 했다. 애들 재밌었으면 됐지. 그렇지만 너무 으른이의 컨텐츠에 노출이 많이 된 나는 ‘투자’라고 부르는 ‘시스템’이 너무 단순하고 후려쳐졌구만...이건 그냥 도박에 가까운 무언가인데… 하긴 세상이 말만 번드르르하게 투자이지 대부분 도박처럼 뭔가에 돈을 내던지고 잘 되길 기대하는 사람 투성이인 걸 생각하면 나쁜 비유라고도 못하겠다. 어린이들 책이라 그런가 마지막은 데이빗 린치의 가짜 울새처럼 희망의 상징을 불꽃놀이 펑펑 하면서 끝내는데 어우, 난 이런 데 면역이 안 되어 있다. 아마 평생 안 될 것 같아… 단 거 밝히고 우물우물 케익이나 도넛 같은 걸 달고 사는 예언자 캐릭터도 우웩 애들 이런 거 정말 좋아하는가… 슬프게도 나는 애들이었던 적이 없나 보다. 아니면 너무 짧았나 보다. 자기 계발서 읽고 스쿼트하며 머리 안에 긍정 스위치 켜대는 소망이도 아이라기보단 그냥 애 늙은이? 독특한 어린이들 많이 봤지만 그냥 저런 게 환상의 유니콘 같은 걸까… 픽션에서 자꾸 주인공한테 핍진성 내놓으라 하면 못써… 범인 주제에 비범한 (그러니까 파멸자 내지 구원자 되는) 인물 까면 못 써… 그래도 난 좋은 말 못 써…...ㅋㅋㅋㅋ

멸망, 파멸자, 투자, 예언, 미예테(미래예측테스트), 강렬한 키워드들로 밑밥 깔고 읽으려는 아이들의 흥미를 끌어들일 수는 있었겠다. 시나리오 쓰던 작가라 그런가 영상화도 염두에 둔 서술이나 인물 설정의 느낌도 나고. 그런데 자기 아가리에 총알을 박아 넣고 우리는 이상할 때 만났어, 하면서 금융 자본주의의 상징인 고층 건물 무너뜨리는 자기가 타일러 더든인지도 몰랐던 에드워드 노튼이나, 꼬리칸 머리칸 위치는 정해져 있어! 하며 신발 던진 손 꽁꽁 얼리던 틸다 스윈튼이나(어우 근데 그 영화에서 이 배우 1인2역 한 거 방금 처음 알았음), 금융 위기 이후 월가를 점령하려다 큰 변화는 거두지 못한 시위대도 겹치는데, 수능 날 가지런히 앉아 있는 아이들도 생각나는데, 에스에프나 판타지 같은 걸 좀 양념쳐도 별로 새롭진 않았다. 애들 소설도 문장이 좀 아쉽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을 바꿀 수 있냐고 묻던 나는 나 하나 바꾸는 데도 너무 오래 걸린다. 이젠 뭘 바꾸려 드냐 어차피 언젠간 다 죽고 인류도 망할 건데 하는 나쁜 어른이가 되었다.

+밑줄 긋기
-소망은 자신이 지나치게 간절해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동시에 간절함이 모자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루고 싶은 게 있을 때, 그리고 그 마음이 간절할수록 그런 모순된 생각에 휩싸인다. 그러다 바라던 게 이뤄지지 않으면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사소한 생각과 행동에서 찾는 것이다.
내가 너무 간절함이 부족했나 봐, 내가 너무 간절함이 지나쳤나 봐. 그때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그때 뭐라도 해야 했는데.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일까지도 통제하려는 인간이 가진 의지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뭔가 할 일을 찾는다. 그러다 문제와 자신 사이에 말도 안 되는 인과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간절함이나 기대감을 버리려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절실히 매달리는 사람도 있다. 마치 그렇게 하면 결과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실제 결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미 결과는 정해졌고, 그것은 지금 전파를 타고 날아오는 중이었다.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10-11, 오, 딱 한 쪽 넘겼을 뿐인데, 뻔해 보이기도 하지만 띠잉-문단 두 세개가 짚혀서 통으로 옮겼다. 제법 치시네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전국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는 일생에 단 한 번! 전 국민의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졸업시험과 미래 예측 테스트를 모두 통과한 학생들에게 이 엄청난 기회가 주어지는데요.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20, 아다시피! 하기도 전에 왠지 모르게 고3, 일생에 단 한 번, 여기서 질질 짜는 타이밍...인생의 기회는 한 번이 아닌 걸 알지만 또 매번 성공하지 않는다는 걸 안 늙은이는 왜 이런 중이병 고삼병 모드에서 눈물을 흘리는가...병인가)

-“어머니, 오늘도 인공지능이 지시하는 일 처리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이제 그런 단순직에서 벗어나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우리가 당장 먹고살 방법은 단순직뿐이란다. 정신 차려라, 아들.” (29)

-“나도, 실제 악당이 되려고 했던 건 아니야. 투자를 받으려면 어쩔 수 없어서 그랬을 뿐이지.”
그리고 조금 있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세상에 악당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주연은 조그맣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147, 100페이지 넘도록 밑줄 그을 만한 문장이 없다가 오랜만에 쳤다. 좀 이상하고 서툰 문장들은 봤지만 그냥 냅두고 이야기를 따라갔다. 애기들은 이런 거 좋아하는 구만...)

-“맞아. 그래서 난 널 파멸자가 아니라 ‘구원자’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생각해. 투자청의 분류에는 없는 이름이지만 말이야.” (185)

-“어차피 세상은 언젠가 망해.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소망은 과연 엄마다운 답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이 단번에 끝나길 바라는 건 인간들의 꿈일 뿐이야. 고통은 단번에 끝나지 않아. 아주 길고도 길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엄마를 보면 알잖아. 이건 죽기 전에는 안 끝나는 건데, 바로 그런 걸 멸망이라고 하는 거지. 나머진 내가 알 바 아니야. 너도 알 바가 아니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 생존이야. 세상의 생존이 아니라. 그러니까 무조건 투자부터 받고 생각해.”(209)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지는 세상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닙니다. 저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일 뿐이지만, 그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끝없이 실패하는 존재입니다. 누군가는 그걸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평범한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실패작이다’” (219-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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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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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2 읽기 중단. 정용준.

또 생존 소설가의 산문집을 사서 읽으면 나는 개다.

아마 이 책 포함 얼마를 사면 알라딘이 사은품 준다 해서 마침 신간이네, 하고 전자책을 구매해 놨다. 20여일 정도 동안 읽어 보려고 가끔 펼쳐서 애를 썼는데, 30몇 퍼센트쯤 읽었다는 독서 진행 상태를 보고 생각했다. 전자책은 팔지도 못해.
집에 쟁여둔 정용준 소설은 아마 읽을 것이다. 소설은 좋았거든. 산문은 하아...식상하고 진부하고 쓸데없이 진지한데 껍데기만 뒤적이는 느낌이었다. 누구는 진지하게 쓴 건데 이렇게 말하면 속상하겠지만 견디면서 다 읽어 보자, 하다가도 야 왜 견뎌...인생 짧다… 이럴 시간에 이 작가 소설을 봐 그냥… 아니다 다른 거 봐 다른 거… 문장들이 도무지 내부로 들어오지 않고 튕겨나갔다. 자꾸 왜 하나마나한 소리 하냐… 문학이 하는 하나마나한 소리는 가끔 울리기라도 하는데 이건 진짜 텅 공허해서 나랑 공명하지 못했다.
시보다 꽃을 잘 엮어서 꽃집 사장님 된 누군가가 갑자기 궁금해서 가만 꽃 사진들을 보고, 나는 문학에 애정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질투가 많아 엉망인 것이냐 이럴 시간에 재밌는 걸 읽고 쓰는 편이 낫지 않겠냐, 그러다가 전자책을 기기에서 지워버려야지, 했다. 그렇다고 밑줄을 긋지 않은 건 아닌데, 그어둔 밑줄들을 가만히 다시 읽어보니, 읽어 봐도 아...안녕. 소설 만세. 내 비슷한 혹은 조금 더 나이 든 사람들의 노화로 내 노화를 감각하는 게 싫다. 이미지든 글이든 사유든 싫어…

+밑줄 긋기
-그러나 동시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게 노력 탓이라면 합격하지 못한 나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과정이 어떻든 결과가 나쁘다면 게으른 청춘이자 부도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침잠을 줄이며 이토록 열심히 매진했어도 당신은 더 노력했어야 한다는 이상한 결론.

-사랑을 말할 때 사실을 말하는 이가 싫다. 팩트를 정의라고 믿는 이들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 일기와 편지를 미워하는 이들이 밉다. 소설책으로 머리를 때리는 선생과 이야기를 거짓과 가짜라고 가르쳤던 화학 선생이 싫다. 번호를 부르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뒤 책을 읽으라고 했던, 읽지 못하는 나를 죽어도 포기하지 않던 송곳니가 뾰족했던 국어 선생이 싫다.

-어느 날 티브이를 보다가 무심하게 엄마에게 물었다. 그때 할아버지에게 했던 말이 뭐였냐고. 엄마는 빨래를 개면서 말했다.
“아버지, 이제 편히 쉬세요. 당신의 손녀가 천국에 먼저 가 있어요.”

-이 정도 나이가 됐으면 어른이 되어야 할 텐데. 철들고 성숙한 몸과 마음으로 안정을 느껴야 할 텐데. 나는 불안했고 늘 초조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제 알겠다. 나는 속았다. 서른이라는 이미지. 마흔이라는 무게. 그것들은 다 허상이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작하는 육십이 있고 도전하는 오십이 있고 포기하는 스물이 있으며 안주하는 서른이 있다. 나는 끝났다고 믿는 마흔이 있는 반면 새로운 꿈을 꾸고 배우고 도전하는 마흔도 있다.

-욕심. 욕망. 꿈. 소원. 그것들은 ‘지금’과 ‘여기’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그 충동들이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삶을 나의 욕구와 나만의 가치로 살아본 적 없는 아무개가 될 수도 있죠.
어떤 충동은 미래를 품고 도래합니다. 어떤 충동은 이야기를 담은 한 권의 책이 되어 내 앞에 펼쳐집니다. 충동. 그것은 갑자기 빨라지는 심장의 박동만큼이나 중요한 에너지입니다. 우리는 물에 빠질 수 있지만 파도를 탈 수도 있습니다. 떨어질 수 있지만 하늘을 날고 더 빨리 더 멀리 이동할 수도 있죠. 박동과 충동은 변화를 위한 도약이자 도전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변화 그 자체입니다. 어떤 직관과 직감,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적인 그 느낌을 소중히 여기세요. 내 안에 무언가 들어왔다는 기분. 무엇이 내 마음속에 불을 놓았나. 나는 무엇을 향해 타오르고 싶은가.

-사유의 높이는 높고 크기는 무궁하며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만큼 좌절한다. 이상이 큰 존재는 하찮은 자신에게 실망하기 마련이다. 비루한 육체는 사유와 정신이 만든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원하는 것이 눈앞에 있지만 움켜쥐지 못한다. 상상은 현실을 누추하게 만들고 어떤 생각은 현실을 한계와 낭떠러지로 느끼게 한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지 못함으로 우주에서 가장 슬픈 생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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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은 닭의 미래 - 양안다의 4월 시의적절 4
양안다 지음 / 난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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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8 양안다.

시의적절 시리즈를 시인의 산문집이라 생각했는데 이번 양안다의 4월은 시가 더 많았다. 하이브리드 시집 쯤 되는 것 같다. 황인찬의 7월은 작년을 안 넘기고 읽었는데 4월은 한 해 넘겨 또 온 4월에 읽었다. 역시 나의 일타는 황인찬 안다야 미안해 자꾸 이등 시켜서…
4월의 기념일과 4월이 생일인 사람들을 가끔 아니 종종 아니 자주 생각한다. 어느 4월 이맘쯤엔 벚꽃이 피었거나, 이미 잎이 났거나, 아직 피지 않았다. 올해는 잎이 쑥쑥 꽃 사이로 이미 자랐다. 꽃잎 말고 초록 잎도 사랑해주세요.
저녁에 엄마가 구워둔 달걀 하나를 까 먹었는데 나는 닭의 미래를 먹은 걸까. 나는 조류가 먼저 생겼다고 했는데 친구는 포유류가 더 먼저라고 했다. 나는 고집탱이라서 아니야 아니야 이러고 심통을 부렸다. 남은 공룡이 조류니까. 아니 파충류가 포유류보다 먼저인 건 맞는데 공룡보다는 포유류 조상이 먼저래. 쥐나 개보다는 길에서 나무 위에서 알아서 뭘 주워다 쪼아다 먹으며 알아서 지내는 새가 더 좋긴 하다. 사실 나는 개를 질투하는 것 같다. 날씨가 좋으면 목줄에 개를 데리고 걸으러 나오는 사람이 많다. 나는 목줄은 필요 없고 뭐에 채우고도 싶지 않지만 같이 걷는 건 부럽고 좋은 일이다. 개를 너무 미워하진 말자. 치킨이 더 맛있다고 개고기를 무시하면 안 되요.
그럭저럭 읽었는데, 직전 읽은 시집 보다는 밑줄 긋기도 옮겨 적기도 많이 안 했다. 그냥 시인이 내 생각처럼 영화를 좋아하고 영상처럼 시를 쓰는 구나 확인한 것 정도가 소득? 왜 소득이란 비유가 천박한 느낌일까. 얻은 점, 이라고 하면 좀 점잖아질까. 4월은 아침엔 너무 춥고 낮엔 너무 덥다. 옷을 입기가 제일 까다로운 시절 같다. 책을 고르기는 사실 까다로울 필요가 없다. 그냥 아무거나 집어다 읽으면 대체로 좋잖아. 그만 사고 있는 거나 읽자. 나는 숫자 중에 4를 가장 좋아한다. 초록색은 그만 좋아했으면 좋겠다.

+밑줄 긋기
-오후 세시의 햇빛 속에 네가 잠들어 있습니다

창문으로 새 두 마리가 아른거리고요

식물은 그림자를 키우고 있습니다

감은 너의 눈꺼풀을 열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빛은 어둠에게 용서받은 적이 있겠습니까

그림자를 증오한다는 이유로 나무를 베어선 안 되어요

너는 꿈속에서도 의지가 약하고 눈물을 짜내었습니다

4월이 겨울에게 허락받은 음악은 어떤 장르입니까

너무 많은 그림자는 식물을 죽이는 것입니까

한낮은 꿈을 빛으로 물들이려고

내가 너의 꿈을 훔치려고

사랑을 하고 있네 운 얼굴 망가졌네, 새 두 마리는 노래하겠지

나는 네가 꿈을 꾸고 있는 꿈을 꾸는 중이라고
(‘낮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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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헌법은 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질문하는 사회 10
곽한영 지음, 오승민 그림 / 나무를심는사람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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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7 곽한영.

7번째 읽은 곽한영 선생님 책이다. 전작 쯤 되는 ‘귀찮아 법 없이 살면 안 될까?’에서 법 일반적인 내용을 다뤘다면 이 책은 헌법을 더 자세히, 친절히 파고든 책이었다.

내 전공은 일반사회교육인데, 한 학년은 이번 학기 지리를 가르치고(어린이들에게는 세계여행한다고 말한다), 또다른 학년은 인권과 헌법이 첫 꼭지이다. 인간은 어떻게 되먹은 존재인지, 많은 유머가 남을 조롱하고 비꼬고 괴롭히는 종류가 많다. 그러니까 인권 단원에서는 재밌게 하겠다고 나서기 쉽지 않다. 일단 말실수 줄이도록 엄숙 근엄 진지……어린이들에게 학기 시작할 때 오찬호 선생의 ‘곱창 1인분도 배달되는 세상, 모두가 행복할까?‘와 이 책을 권했다. 인권과 헌법 단원에서 중학생 읽기에 나름 적절해 보였다. 어떤 미친 사람이 이딴 책 운운하며 인권 같은 허접한 개념으로 뭘 어쩔 수 있겠냐고 비웃는 백자평 쓴 걸 보고 저런 인간이 세금으로 월급 받으면서 자기 잘난 줄 알고 살고 있구나… 저런 마음으로 군림하는 인간들이 국민 위해 일하라 맡겨둔 권력으로 국회에 군대 보내 놓고도 국민 계몽시키려고 한 일이라는 소리가 나온다. (그냥 좋은 답변-인터넷 밈-만 해주고 싶다. 그럼 죽어- 는 심하니까 그냥 꺼지세요 정도. 얄팍한 인간의 인권이라도 보호해 드려야지 암암)

사실 당위로 하는 독서는 더디다. 헌법 관련 이런 저런 풀어 놓은 책들을 보았다. 내 읽기의 목적과 목표는 헌법학을 하는게 아니라 어린이들이 조금이라도 헌법 조항 맛보고 이게 왜 존재하고 본인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지 한 번이라도 듣고 가게 하는 것이다. 나중에 억울한 일 생기면 그런 거 배웠지, 하고 기억이 안 나네? 하면서도 검색이라도 해볼 수 있게. 그러라고 온갖 청소년용 헌법 이야기 책이 나왔는데, 친절한 것도 있고 불친절한 것도 있다. 이 책은 친절한 쪽이었고 최대한 쉽고 자세하게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도움되는 부분은 밑줄을 박박 그어놨는데 다 까먹고 못 써먹을지도...어딘가엔 남겠지…

5년 전 이 무렵에는 박근혜 탄핵을 예시로 입법 사법 행정 기관과 헌법재판소까지 다뤄볼 수 있었다. 그 사이 사례 갱신된 게 놀랍구요… 이렇게까지 전직 대통령들 감방 수순 내지 임기도 못 채우고 맛가서 탄핵하는 일이 이어지는 걸 보면 대통령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좀 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각보다 막강하다. 한 사람이 맛이 가버리면 행정부도 같이 돌아버리는데 이걸 매번 탄핵으로 막는 것도 국민들이 치르는 걱정도 비용도 너무 크고 그런데 아무도 의원내각제는 고려조차 안 하는 것 같아… 이런 말하면 차기 대통령 노리는 사람들이 너 죽어, 하고 암살범 보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뭐라고… 에라이 싸우자 독재, 싸우자 민주주의, 아무하고나 나 혼자 그림자 권투 하다가 맨날 쓰러진다. 헌법은 좋은 거지만 부족한 나는 그 좋은 것이라도 이것에 관해 반복해서 말하는 게 너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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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국민 모두의 믿음과 애정이 바탕이 되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는 아주 연약하고 소중한 정치 체제니까요.

-하지만 헌법상에서 양심은 단순히 착하고 좋은 마음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마음, 인격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에 가까워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내리고 있는 대답과 같은 거죠.

-헌법이 보호하려는 양심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 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이지,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양심이 아니다. (1997. 3. 27. 96헌가11)

-우리 헌법에서 교육을 국민의 의무로 설정해 놓은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구성원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지 않으면 운영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앞에서 민주 사회는 모든 국민들이 주인이 되는 사회라고 설명했죠? 그런데 그렇게 모든 국민들이 주인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선거에도 참여하고, 법도 지키고, 국가에서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고치라고 요구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글을 읽고 쓰는 건 당연히 알아야 하고, 다양한 사회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필요하지 않겠어요?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소양을 갖추도록 하려면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인 조건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견제’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선을 넘지 않고 법과 원칙을 지키도록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다 보면 모두가 헌법의 원칙에 따르는 ‘균형’이 만들어지게 되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로 독립되어 있어야겠죠? ‘권력을 분립하여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에요.

-헌법에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독립되어 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조항은 없지만 제40조에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 제66조 4항에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 제101조 1항에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라고 각각 규정하고 있어서 각각의 권한이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고유 권한이라고 밝히고 있어요. 그러니 이 조항들이 법치에 관한 권한을 셋으로 쪼개어 나누어 놓은 삼권 분립에 관한 조항이라고 볼 수 있어요.

-국회에서 입법권을 갖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부가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서 집행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 권한을 분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즉, 입법권을 통해 정부를 견제하는 거죠. 하지만 입법 외에도 돈을 직접 통제하는 것 또한 정부를 견제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에요.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얼마나, 어떻게 거둘 것인지,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등에 대해 국민의 대표들로부터 결재 도장을 꽝, 받아야 한다는 거죠.

-따지고 보면 헌법은 이런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의지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문장들이 아닌가 해요. 그러므로 마치 앙금처럼 바닥에 가라앉은 그 문장들이 다시 현실 속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고여 있는 물을 힘차게 휘젓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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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4-13 0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부터 헌법 이야기하는 책 나왔을 텐데, 요새 자주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책도 2021년에 나왔군요 지금은 2025년... 법은 사람이 사는 것보다 늦는다고 하더군요 여러 사람이 찬성을 해야 만들어지는 것이어서일지도, 절차가 길어서... 어떤 건 빨리 되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게 이 나라에 사는 사람한테 도움이 되는 거면 좋겠네요 누군가 몇 사람만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고...


희선

반유행열반인 2025-04-13 10:07   좋아요 0 | URL
희선님 법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으셨군요 ㅋㅋ저는 애기 때 법교육을 전공하려다 에잇 내 길 아니다 튀어 이러고 수료생으로 학비만 버린 기억이 남았는데 그래도 청소년용 책들이라도 까먹을 때마다 쪼오오끔씩 보게 되네요. 졸고 있는 저한테 죽비 같은 것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