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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에 투자하세요 - 제5회 틴 스토리킹 수상작
황이경 지음 / 비룡소 / 2025년 3월
평점 :
-20250415 황이경.
‘우린 세상을 바꿀 수 있겠지?’
교장실 문과 교내 여기저기에 열 장 남짓도 안 되는 인쇄물을 붙이고 돌아온 날이었다. 고3이었다. 후기 겸 일기처럼 친구가 운영하는 커뮤니티에 그날의 일을 적었다. 나는 알량한 글자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자꾸 공동현관 앞에 비밀번호를 적어 놓지 말라고, 누가 자꾸 적어놔서 보안이 엉망이라 경찰에 신고 했다고, 씨씨티비도 확인하고 지문 채취도 해갔다고(실제로 외부 학생이 옥상에 몰래 올라와 투신 소동을 벌여 소방차랑 경찰차가 출동한 적이 있었다. 그외에 신고도 채취도 다 뻥이다) 인쇄물을 몰래 붙여 놓고 다시 적히지 않는 비밀번호에 안도한다. 글로 내 이미지를 만들려고 친절한 (척) 단체 메시지를 구구절절 보낸다. 그걸 또 다른 사람들 재사용하려면 하라고 공유도 한다.
멀티수납 북엔드 받으려고 오랜만에 주문한 청소년 소설은 조금 귀엽긴 했다. 청소년 심사위원 여러명이 선정한 소설이라고 했다. 애들 재밌었으면 됐지. 그렇지만 너무 으른이의 컨텐츠에 노출이 많이 된 나는 ‘투자’라고 부르는 ‘시스템’이 너무 단순하고 후려쳐졌구만...이건 그냥 도박에 가까운 무언가인데… 하긴 세상이 말만 번드르르하게 투자이지 대부분 도박처럼 뭔가에 돈을 내던지고 잘 되길 기대하는 사람 투성이인 걸 생각하면 나쁜 비유라고도 못하겠다. 어린이들 책이라 그런가 마지막은 데이빗 린치의 가짜 울새처럼 희망의 상징을 불꽃놀이 펑펑 하면서 끝내는데 어우, 난 이런 데 면역이 안 되어 있다. 아마 평생 안 될 것 같아… 단 거 밝히고 우물우물 케익이나 도넛 같은 걸 달고 사는 예언자 캐릭터도 우웩 애들 이런 거 정말 좋아하는가… 슬프게도 나는 애들이었던 적이 없나 보다. 아니면 너무 짧았나 보다. 자기 계발서 읽고 스쿼트하며 머리 안에 긍정 스위치 켜대는 소망이도 아이라기보단 그냥 애 늙은이? 독특한 어린이들 많이 봤지만 그냥 저런 게 환상의 유니콘 같은 걸까… 픽션에서 자꾸 주인공한테 핍진성 내놓으라 하면 못써… 범인 주제에 비범한 (그러니까 파멸자 내지 구원자 되는) 인물 까면 못 써… 그래도 난 좋은 말 못 써…...ㅋㅋㅋㅋ
멸망, 파멸자, 투자, 예언, 미예테(미래예측테스트), 강렬한 키워드들로 밑밥 깔고 읽으려는 아이들의 흥미를 끌어들일 수는 있었겠다. 시나리오 쓰던 작가라 그런가 영상화도 염두에 둔 서술이나 인물 설정의 느낌도 나고. 그런데 자기 아가리에 총알을 박아 넣고 우리는 이상할 때 만났어, 하면서 금융 자본주의의 상징인 고층 건물 무너뜨리는 자기가 타일러 더든인지도 몰랐던 에드워드 노튼이나, 꼬리칸 머리칸 위치는 정해져 있어! 하며 신발 던진 손 꽁꽁 얼리던 틸다 스윈튼이나(어우 근데 그 영화에서 이 배우 1인2역 한 거 방금 처음 알았음), 금융 위기 이후 월가를 점령하려다 큰 변화는 거두지 못한 시위대도 겹치는데, 수능 날 가지런히 앉아 있는 아이들도 생각나는데, 에스에프나 판타지 같은 걸 좀 양념쳐도 별로 새롭진 않았다. 애들 소설도 문장이 좀 아쉽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을 바꿀 수 있냐고 묻던 나는 나 하나 바꾸는 데도 너무 오래 걸린다. 이젠 뭘 바꾸려 드냐 어차피 언젠간 다 죽고 인류도 망할 건데 하는 나쁜 어른이가 되었다.
+밑줄 긋기
-소망은 자신이 지나치게 간절해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동시에 간절함이 모자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루고 싶은 게 있을 때, 그리고 그 마음이 간절할수록 그런 모순된 생각에 휩싸인다. 그러다 바라던 게 이뤄지지 않으면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사소한 생각과 행동에서 찾는 것이다.
내가 너무 간절함이 부족했나 봐, 내가 너무 간절함이 지나쳤나 봐. 그때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그때 뭐라도 해야 했는데.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일까지도 통제하려는 인간이 가진 의지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뭔가 할 일을 찾는다. 그러다 문제와 자신 사이에 말도 안 되는 인과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간절함이나 기대감을 버리려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절실히 매달리는 사람도 있다. 마치 그렇게 하면 결과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실제 결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미 결과는 정해졌고, 그것은 지금 전파를 타고 날아오는 중이었다.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10-11, 오, 딱 한 쪽 넘겼을 뿐인데, 뻔해 보이기도 하지만 띠잉-문단 두 세개가 짚혀서 통으로 옮겼다. 제법 치시네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전국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는 일생에 단 한 번! 전 국민의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졸업시험과 미래 예측 테스트를 모두 통과한 학생들에게 이 엄청난 기회가 주어지는데요.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20, 아다시피! 하기도 전에 왠지 모르게 고3, 일생에 단 한 번, 여기서 질질 짜는 타이밍...인생의 기회는 한 번이 아닌 걸 알지만 또 매번 성공하지 않는다는 걸 안 늙은이는 왜 이런 중이병 고삼병 모드에서 눈물을 흘리는가...병인가)
-“어머니, 오늘도 인공지능이 지시하는 일 처리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이제 그런 단순직에서 벗어나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우리가 당장 먹고살 방법은 단순직뿐이란다. 정신 차려라, 아들.” (29)
-“나도, 실제 악당이 되려고 했던 건 아니야. 투자를 받으려면 어쩔 수 없어서 그랬을 뿐이지.”
그리고 조금 있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세상에 악당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주연은 조그맣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147, 100페이지 넘도록 밑줄 그을 만한 문장이 없다가 오랜만에 쳤다. 좀 이상하고 서툰 문장들은 봤지만 그냥 냅두고 이야기를 따라갔다. 애기들은 이런 거 좋아하는 구만...)
-“맞아. 그래서 난 널 파멸자가 아니라 ‘구원자’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생각해. 투자청의 분류에는 없는 이름이지만 말이야.” (185)
-“어차피 세상은 언젠가 망해.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소망은 과연 엄마다운 답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이 단번에 끝나길 바라는 건 인간들의 꿈일 뿐이야. 고통은 단번에 끝나지 않아. 아주 길고도 길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엄마를 보면 알잖아. 이건 죽기 전에는 안 끝나는 건데, 바로 그런 걸 멸망이라고 하는 거지. 나머진 내가 알 바 아니야. 너도 알 바가 아니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 생존이야. 세상의 생존이 아니라. 그러니까 무조건 투자부터 받고 생각해.”(209)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지는 세상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닙니다. 저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일 뿐이지만, 그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끝없이 실패하는 존재입니다. 누군가는 그걸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평범한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실패작이다’” (219-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