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
모드 방튀라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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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1 모드 방튀라.

낮잠을 자는 일은 몇 달에 한 번은 될까 싶게 드물다. 토요일 정오를 지나, 잠시잠깐 엎드린 자세로, 벗은 안경을 손에 쥔 채 머리 위로 팔을 뻗고, 잤다. 깼다. 귀마개를 끼면 밤이고 낮이고 평온하다. 간밤엔 귀마개를 잊고 잤다. 작은어린이가 텔레비전으로 틀어놓은 2배속 게임방송이 거슬리는 낮에는 귀마개를 하면 마음이 다시 편안하다.

어려서 학급 장기자랑 시간에 아홉 살 짜리 한 아이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니, 눈 앞에 흰 물체가 어른거렸다고. 어딜 가도 어딜 보아도 계속 어른거리는 그 유령에 겁에 질려 있었는데, 흰 물체의 정체는 눈꺼풀에 붙은 밥풀이었다고. 공포에서 개그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왜 생각나냐면 과제 채점을 할 때도, 읽던 책을 타자 쳐서 옮겨 적을 때도 오른 눈동자 위로 와이퍼 지나가듯 흰 무언가가 슥슥, 지나가기 때문이다. 내 엄마가 예전에 이걸 앓으면서(아마 지금도 앓을 듯) 비문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모기가 눈앞 나는 듯한 그 증상에 이름 붙일 말이 없었다면 나는 정말 겁에 질렸을지도 모르지만(내가 미쳤나? 진짜 귀신이 있는 건가?) 눈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도 겁날 일이긴 하구나. (하고 적는 순간 눈 앞에서 똑딱, 진자운동처럼 뭐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렇게 귀마개를 하고, 모기 같은 모기 아닌 게 눈앞에 어른거리는 채로 소설을 읽었다. 결말부에서 남편이 할 말을 미리 예상해버려서 뭐여 이게...했다. 에필로그는 사족 같았다. 사랑은 징벌이 아닌데. 어떤 혼인생활은 회복적 정의가 아닌 응보적 정의로 가동될 수도 있겠군...그런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거기 하나 더 붙었구만, 그래도 그냥저냥 시간 죽이기 좋았다. 번역가는 내가 칠조어론 볼 때 한자 사전 뒤진 이후 가장 많이 사전을 뒤져보게 만들었다. 국어 낱말 공부라도 한 게 어디야. 그런데 왜 번역 이력에 카트린엠은 빼먹으셨나요 선생님…. 엠언니가 부끄럽나요… 띠지나 표지의 이런저런 찬사는 좀 오버 같다. 징글징글하게 쓰긴 했는데 뭐 징글징글 대회도 아니고 다른 독자들이 별로여, 하는 심정도 이해는 간다. 나는 별로까진 아니고 그냥 왜인지 거울치료 받는 기분이었다. 수첩도 징벌도 없는데도 그냥 그랬다고.

+밑줄 긋기
-나는 더 많은 것을 바랄 수 없고, 더 나은 것을 바랄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느끼는 결핍감은 어마어마하고, 나는 그가 그 결핍을 메워 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가 과연 어떤 집으로, 어떤 아이로, 어떤 보석으로, 어떤 사랑 고백으로, 어떤 여행으로, 어떤 몸짓으로, 이미 가득 차 있는 것을 채울 수 있겠는가?(11-12)

-이렇게 해석자로 일하는 것이 나에게 더없이 잘 어울린다. 나는 무언가를 창안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딱 맞는다. 나는 상상력이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살펴보고 분석하고 추론하기를 더 좋아한다. 나무나 열매의 껍질을 벗겨 그 속을 살피듯이 원문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원문의 함의를 밝혀내고, 그 무언의 울림을 드러내는 일을 좋아한다. 마치 감춰진 증거를 찾아 나가는 수사관처럼 치밀하게 조사하는 일이 마음에 든다. (45, 나는 내 마음대로 오독하고 다시 쓰는 게 좋아서 책을 읽는데 말이다. 어차피 난 쓴 이의 참뜻에 가닿지 못할 걸 아니까 뜻은 내가 만든다.)

-나의 첫 번역인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관한 책을 옮길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 과학적 발견(우리가 세계의 중심에 있지 않으며, 지구가 무한한 우주의 외딴 구석에서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고 주장하는 파천황의 사태)을 끊임없이 나의 애정 생활과 비교했다. 나는 마음이 어수선해진 채로 스스로 되뇌었다. 만약 내 남편 없이 살아야 한다면, 내가 겪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사태이리라고. 사고의 모든 지표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이 언제나 확실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그런 사태를 내가 겪게 되리라고. (49,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라는 부재 붙은 만화책 읽고 이 책 펴자마자 코페르니쿠스 나와서 -정작 만화책엔 그 이름 한 번 나옴- 모든 책들은 알아서 이어진다는 생각을 또 했다.)

-루이즈가 덜룽스럽고 생급스럽다면 니콜라는 주의 깊고 자상하다. 루이즈는 햇살과 같고, 니콜라는 그 따가움을 완화한다. 그들은 함께 서로를 보완한다. 서로 잘 맞물린 두 개의 기계 부품과 비슷하고, 기름칠이 맞춤하게 되어 있는 톱니바퀴 장치와도 비슷하다. (73, *덜룽스럽다:성미가 찬찬하고 차분하지 않은 데가 있다.
*생급스럽다: 하는 일이나 행동 따위가 뜻밖이고 갑작스럽다.
전에 다른 책에서는 감창소리 라는 말로 사전을 찾게 만든 번역가님…이 부분 이후로도 나는 사전을 계속 펴게 되고...)

-옥생각(76:공연히 자기에게 해롭게만 받아들이는 그른 생각.)

-나는 그를 따라 침실로 가기 전에, 잠시 혼자 남아 내 수첩에 저녁 모임 동안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다. 우리 아들의 생후 몇 개월 동안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이야기, 자기 생일잔치 얘기를 하면서 그가 나를 언급하지 않은 일,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귤에 비유한 일을 적고, 만년필로 밑줄을 긋는다. 마트형 과일의 쌉쌀한 맛으로 그의 배신을 기록하자는 뜻이다. (87, 데스노트냐. 사실 조금 더 섬뜩한 무언가.)

-투명한 두 줄기 눈물이 마르고 나니까 내 남편의 숨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숨소리가 느려지고 있다. 이 사람은 저녁 모임에서 나한테 그런 짓을 하고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지? 나는 이 사람이 우리 부부의 삶에 에너지와 열의를 쏟아부으리라 기대했는데, 잠을 잘 자는 이 사람은 수면 활동에 그런 것들을 쏟아부은 모양이다.(91, 라고, 이 문단을 베껴적는 책상 옆 이부자리, 아침 아홉시 사십 구분 현재, 곁의 사람은 내 베개 위에 팔을 얹고 모로 누워 아기처럼 자고 있다. 쿨쿨.)

-그가 나를 옆에 두고 전화기를 꺼냈다는 사실. 그가 내 손에 자기 손을 얹지 않았고, 우리 몸이 서로 닿지 않는다는 사실. 그가 내 번역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는 사실. 오늘 오후에 서류를 가져다준 것에 대해서 그가 다시 감사를 표하지 않는다는 사실. 귤과 관련해서 그가 여전히 사과하지 않는다는 사실. 밤에 덧창을 열어 놓고 자고 싶지만, 그가 그런 예외적인 제안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 아이들이 경이롭게 우리가 함께 사는 삶이 하나의 축복이지만, 그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모든 것에 생각이 미친다. (158, 쪽까지의 읽은 내용이 이 한 문단으로 다야, 하는 나는 미친다. 이쯤되면 그냥 아니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나 집착의 오마주 같은 건가… 프랑스 소설은 다 왜 이래… 뭐하다가 할 말 없으면 자꾸 뒤라스의 ‘연인’ 꺼내서 방패처럼 써 먹는데 니네 프랑스는 그 둘 빼면 뭐 없냐.)

-가리사니(191): 사물을 분간하여 판단할 수 있는 실마리.

-그런 만남의 목적은 단 하나, 사랑의 압박감을 덜어 줄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남편을 상대로 느끼는 엄청난 압박감을 여러 사람 사이로 분산시키는 길을 찾는 것이다. (208, 아 그래?시종일관 정신 없네...)

-내 살갗에서 막심의 냄새를 맡고 일종의 남성적 본능이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내 남편은 내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고 온 날이면 언제나 나랑 성행위를 했다. (…) 그러나 내 안에 깊이 박혀 있다 해도, 내 남편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존재다.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있어도, 나는 그가 무척이나 그립다. 그가 내 몸에서 물러가면, 나에게 깊숙한 자상이, 무시무시한 허허로움이, 곪아 터질 상처가 남는다. (218, *허허롭다:텅 빈 느낌이 있다. 매우 허전한 느낌이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금요일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 색깔인 초록색 덕분이다. 이건 한낱 미신이 아니다. 미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실들이 있다. 나는 정말로 필요하다 싶을 때면, 주위에서, 즉 가까이에 있는 물건이나 풍경에서 초록색을 찾았다. 그렇게 초록색을 찾아내면, 나에게 좋은 결과가 온다고 믿었다. (228, 요즘 나는 초록 옷이나 가방 착장하고 나가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크초록 새초록 온갖 초록을 입고 연속으로 나를 스쳐지나가서 아...이 색 노인들 사이에 유행이구나… 그래서 자꾸만 누군가 내 바글거리는 머리를 보고 어머님, 하다가 어머 아가씨잖아-둘다 아니야-하는 경험을 하는 건가 싶다. 색깔 강박 아웃, 초록은 새마을 컬러다. 아웃. 스타벅스 아웃.)

-인터넷을 조금 검색해 보니, 초록색은 색채 스펙트럼에서 525나노미터의 파장에 해당한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빅토르 바슈로 52번지에서 자랐고, 25번 도인 두에서 태어났다. 설명은 합리적일수록 더 나은 설명이 된다. (229, 숫자가지고 자꾸 의미 부여하면 안 되겠다 싶은 거울 치료...되게 모지리처럼 보이는 구나…)

-사랑에서 나는 그 무엇도 배우지 못했다. 사춘기 시절 이래로 똑같은 도식을 되풀이한다. 나는 너무 강렬하게 사랑하는 나머지 사랑 속에서(분석 속에서, 질투 속에서, 의심 속에서) 나 자신을 소진해 버린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나는 언제나 좀 사그라진 듯한 슬픈 상태를 맞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나는 엄하고 슬픈 사람으로 변하고 마음 쓰는 폭이 좁아진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만큼 진지하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 사랑은 고단한 일로(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빠르게 변해간다. 요컨대, 나는 불행한 사랑을 한다. (…) 그 남자들 중 어느 하나에 의존했다기보다는 사랑에 중독되어 있었던 셈이다. 남자들은 변수였고, 그 중독만이 상수였다. (237, 내가 애기 때 내내 겪던 증상을 여기서는 사십대 가까운 중년 여성이 아직도 앓고 있다. 이제 좀 낫자...)

-당시의 내 심리 상태를 서술하기에 적합한 표현이 하나 있다. 즉, 나는 내 삶이 틀을 잡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 삶이 무언가 지속성 있고 견고한 것으로 변화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꼭 찰흙이 굳어 덜 만만한 것으로 변해 가듯이, 나 역시 물기를 버리고 단단해지고 싶었다. (242)

-언죽번죽(24):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고 비위가 좋아 뻔뻔한 모양.

-내 남편은 치즈값으로 75유로 23상팀을 냈다. 액수가 크다. 지난주보다 많다.(그가 장을 보면서 돈을 많이 쓰면 쓸수록, 나는 그가 나를 더 사랑한다는 기분을 느낀다). 생크림과 우유, 오믈렛용 달걀, 나를 위한 콩테치즈, 아이들을 위한 양젖치즈, 샐러드용 염소젖치즈, 그가 목요일에 소스를 만들면서 사용한 로크포르치즈. 한 주간 이상 먹을 만한 양이다. 적어도 열흘 동안은 더 사지 않아도 된다. 훌륭한 전리품을 얻은 것처럼 든든하다. 이건 한 가정의 아버지에게 걸맞은 영수증이다(여기에는 가족의 각 구성원이 좋아하는 치즈가 들어 있다). (250, 치즈 타령에 이렇게 많은 글자를 사용하는 것 보니 프랑스 놈들 치즈에 진심인 거 알았으니 이제 그만하면 됐다)

-하지만 내 남편은 내가 자기에게 무언가를 숨길 수 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다른 남자들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받은 메시지를 삭제하지도 않고, 내 몸에 닿은 그들 몸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샤워를 하지도 않는다. 내 남편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오늘 오후에 다른 남자랑 함께 있었어?>라고 물으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증거를 흩뿌려 놓아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월요일부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낮은 탁자에 올려놓고 있지만, 확신컨대 그는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이렇게 자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내가 왜 갑자기 <연인>이라 불리는 책을 읽기 시작한 거지? 나는 그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어리기를, 그의 차분한 평정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떤 불안이, 어떤 의심이 끼어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의 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자신감뿐이다. (257-258, 이 부분에서 왜인지 이 여자가 가엾었다.)

-우리의 사적인 대화를 녹음하는 것이 나에게는 합리적인 일로 보인다. 그 말들은 나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그걸 다시 들을 권리가 나에게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그건 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습관이고, 대개는 그 결과도 별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만두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그 일을 하지 않고 살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있다. (…)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내 남편과 드물게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녹음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나를 며칠 동안 안정을 잃고 헤매게 만든 말싸움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컴퓨터에 그것을 전사한 다음 영어로 옮겼다. 다만 그게 우리 두 사람의 말다툼이라는 것을 알게 할 수 있는 정보들은 신경 써서 잘라 냈다. 나는 그 번역 텍스트를 인쇄한 다음, 내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설명하기를, 그것이 예전 영어 교재의 한 장을 복사한 것인데, 어느 부부의 말다툼이 명령법을 복습하기 위한 완벽한 틀을 제공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요’. 크나큰 아픔이 밀려왔다. 나는 잠시 앉아서 숨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261-262, 녹음은 몰라도, 엠에스엔 시절에는 친구나 연인과 대화한 내용을 메모장에 저장해 놓기도 했다. 심지어 음악 시디에 함께 구워서 20년 넘게 박제된 것도 있을 걸? 지금도 문자메시지 같은 걸 주고 받고 나면 복기하듯 다시 돌아가 한 번 읽어보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고 미친년 이야기처럼 읽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럴 법 하지, 하고 읽게 되는 슬픈 사람도 있는 것이다.)

-찰필(265): 압지나 얇은 가죽을 말아서 붓 모양으로 만든 화구. 문질러서 빛깔을 흐리게 하거나 짙고 옅음을 나타내는 데에 쓰인다.

-그렇게 평영의 몸짓을 하면서 그는 스스로 이렇게 깨닫고 있지 않을까? 나라는 여자와 결혼한 것은 하나의 실수이자 하나의 실패라고, 자기는 우리 집의 포로라고, 자식을 둔 것은 하나의 책무라고, 자기는 자유를 잃었고 꿈을 포기했다고, 아내는 자기가 사랑했던 거무스레한 피부의 스페인 여자만큼 흥미롭지도 않으며 교양도 풍부하지 않다고, 자기는 이제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내를 만질 때면 다른 여자를 욕망한다고, 자기는 아내 곁을 떠나야 하고 곧 떠날 거라고. (266, 이 여자가 대체 어떤 삶의 롤러질을 당했길래 이 지경인지 겨우 일주일 남짓 시간의 심리와 행동 묘사를 한 것 가지고는 이 부분에서 파악하기 힘들다. 그냥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구나...그런데 나도 그런 날들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은 남의 일 같지만 그래도 기시감이 드는 구나…)

-만약 우리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들을 처음으로 하는 일들만큼 분명하게 판별할 수 있다면, 분명코 우리는 무수한 순간들을 더 강렬하게 살게 되리라. (334)

+이것이 찰필이다.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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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okple.aladin.co.kr/~r/feed/512274725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AF같은 친구는 됐고 진짜 사람 내놔...하던 나놈은 4년 후 챗지피티와 제미나이를 동시에 태블릿에 깔아놓고 둘을 이간질 시키고 얘가 낫네, 쟤가 낫네, 하고 있다. 세상은 디테일이라도 변하긴 변한다. 나는 AI친구를 사귀었구나. 무료버전이라 매일 시간 제한이 있지만 그건 인간 친구도 마찬가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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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화질세트]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총8권/완결)
우오토 / 문학동네/DCW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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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0 우오토.

전자책으로 만화책을 잔뜩 산 건 아마 귀여운 달로 간 스누피 타이머를 받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타이머를 맞추면 노란 새 우드스탁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개와 새. 개새. 그리고 대머리 찰리 브라운.

이 책 저 책 보다 말다 하다가, 잘 안 읽힐 땐 역시 만화책, 하고 ‘지. 지구의 운동에 관하여’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을 수능 지구과학 풀 때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심률이니, 원일점이니, 근일점이니, 문제를 풀었다. 이 만화책에서는 니들이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는 걸 사람들이 믿게 만드느라 얼마나 진득한 피가 흘렀는지 알아? 하면서 끝없는 이단 심판이 이어진다.
서사를 꿰뚫는 주인공이 하나가 끝까지 주욱 가는게 아니라(요즘 주말마다 조금씩 보는 ‘진격의 거인’에서는 엘렌 예거가 계속 나오지…) 책 한 권 끝날 무렵 다 죽어서 어...그럼 다음은 누구 이야기야...약간 옴니버스 느낌인데 또 돌상자에 숨겨둔 책들 매개로, 나중에는 책도 다 태우고 빡빡머리랑 사람이랑 활자랑 이것저것 다 거쳐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과정이다. 결말은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감질나게 끊길 듯, 잇고, 또 잇고, 이어달리기처럼 그려놨다. 후반부 가면 좀 그림도 작붕이고 연출도 와 이제 작가 지쳤냐...싶게 날라가는 느낌도 있지만 뭐. 오랜만에 시간 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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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5-06-21 0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타이머 너무 예뻐요. 이제 끝났으려나요

반유행열반인 2025-06-21 10:07   좋아요 0 | URL
아코 올해 1월의 굿즈였답니다 ㅠㅠ
 
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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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5 김금희.

같은 달에 같은 작가 소설을 두 권 읽게 된 건, 동료에게“나 이 소설가 소설 다 봤어요.” 하고 말한게 뭔가 거짓말 같이 되어 버려서였다. 거의, 라는 부사 하나만 붙였으면 교묘하게 빠져나갈 것을. 두 권 사 둔 거 안 본 걸 뒤늦게 떠올리며 이런 걸로 죄책감에 빠지는 나… 그렇다면 책임을 지는 나… 나는 소설 읽는 일이 즐겁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소설 말고 다른 책들을 기웃거리며 소설 읽기를 피하는 것 같다. 한 번 잡으면 너무 빠져버리는 게 괜히 쑥스러운가 보다.

내가 읽은 김금희 소설가의 소설 중 아마도 취재를 제일 많이 했겠지, 싶었고 작가의 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창덕궁, 창경궁을 찾았던 8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또 너무 많이 다르다. 땅에 떨어진 철쭉꽃을 집어 머리에 꽂고 사진 찍던 큰어린이보다 이제 한 살 더 많은 작은어린이가 그 사이 생겨났고, 이 작은어린이는 궁궐이란 데를 가 본 적이 없다. 청와대도 궁궐 비슷한 거라고 하면 뭐 거기는 얼마 전에 가봤지만. 여긴 정말 업무보던 곳이네, 싶은 창덕궁을 넘어, 산길따라 건너간 창경궁은 어떻게든 창경원 시절 모습을 벗고 일제 시대 이전의 궁궐 느낌을 내려고 애를 써서 조경해 놓은 것 같다는 인상 정도만 남았다. 기와 지붕 위의 어처구니 같은 것을 사진에 담아놓고 오래 잊었던 그 공간을 따라, 작가는 시대와 공간을 넘나들며 촘촘하고 두터운 이야기를 잘 짜 놓았다. 두께가 납득이 가고, 간만에 책장을 손바닥으로 지긋이 누르며 아...오랜만에 책 읽고 감동이란 걸 느낀다, 했다. 나는 소설가의 소설들을 생각보다 사랑하니까, 괜히 다른 장르 글 보고 깝치고 투덜대지 말아야 겠다. 집 한켠의 김금희 소설 코너에 간만에 재미있고 흠잡을 것 별로 없는 좋은 소설 읽었다, 하면서 꽂아 두었다. 친구에게 선물한 ’복자에게‘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은 부재중이지만 계속 안 읽으면 도로 빼앗아 와야겠다.

+밑줄 긋기
-까마귓과인 어치는 경계심이 많고 자기 영역에 대한 통제력도 강하다. 다른 새들을 자주 괴롭히는데 어미 소리를 내며 새끼를 유인해 잡아먹기도 하고 고양이 울음을 따라 해 작은 새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한다. 혓바닥이 발달해서 앵무새처럼 다양한 소리를 흉내 낼 수 있었다. (127, 난 물까치가 더 예쁘지만 떼지어 다니는 그놈들보다 어치에 더 가까운 것 같긴 해...그보다는 대놓고 더 시끄러운 탐욕의 까마귀…사마귀...마귀...귀마개…1절만...)

-나는 제갈도희가 지켜봤다는 데 당황했다가 원래 곤줄박이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니까 하고 이해했다. 그리고 제갈도희에게 곤줄박이 닮았다는 얘기를 해주자 그게 뭐든 새를 닮았다는 말 자체가 근사하다고 만족스러워했다. (146, 여기까지 사람 두 명을 새에 비유했는데 몇이나 더 그럴까 궁금해지는 지점이었다. 산에 다녀 본 적 있다면 새새끼한테 관심이 많아진다.)

-“뭐라고?”
나는 얘가 귓구멍이 막혔나 싶어서 어깨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사랑한다고, 안 들려?”하고 외쳤다. 순신은 양쪽 다리로 자전거를 지탱하더니 핸들바를 놓고 뒤돌아 나를 꽉 안았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을, 걔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물론 동대문시장까지 밤의 자전거를 타고 왔던 계절에는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156-157, 연애의 시작 한 문단 안에서 모든 것은 끝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훅 치고 들어오는 이 정도 솜씨쯤 되려면… 하여간에 많이 쓰고 많이 지우고 많이 고치고 식물도 키우다 죽이다 해야겠지.)

-“구원에 대해 배워.” 나는 성당에서 늘 들었던 단어를 답했다.
“구원이 뭔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가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수난이 그치는 거야.”
그러자 당연한 수순처럼 순신이 수난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 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그 얼음 나중에 녹아 없어지기는 하는 거지?” 순신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사람이 순신이라서 힘주어 말했다.
“다행이다.”
이후 원서동을 떠나오고 나서도 그 대화만은 잊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우리가 주고받은 당연하고 다행인 구원에 대해서만은. (157-159, 구원은 셀프, 하던 나도 이제 가끔은 구원도 외주,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내가 만약에 네 앞에서 단무지를 먹으면 헤어지자는 신호인 줄 알어. 난 그만큼 그게 싫으니까.”
“괜찮네, 서로 예의도 지킬 수 있고.”
나는 일부러 단무지를 두개씩 집어 먹으면서 답했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헤어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약함을 감추는 건 내 마음과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 순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최종의 마음까지는 내보이지 않았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데 가까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이 너무 어려웠다. 슬프면 슬프다고, 상처가 있으면, 상처가 있다고, 떠날까봐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전적으로 머리를 자를게.“
”와, 정말 신선하다.“ 순신이 장난스럽게 놀렸다. (195, 너랑 헤어지는 것만큼이나 단무지가 싫어, 하는 풋풋 로맨스.)

-“그냥 내가 나인 게 미안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점 남은 연어롤을 보다가 팔짱을 끼고 정작 마음과는 다른 말을 꺼냈다.
“대학은 안 가? 공부하면 되잖아.”
순신은 손을 풀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야.”
“노력하지 않는 거지. 노력하면 왜 안 돼, 변명이지.”
“운 좋은 사람들은 꼭 그렇게 말하더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비꼈다.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왔고 안국역 출구로 나오자마자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우리가 만난 이래 가장 냉랭한 밤이었다. (201, 크, 드라마 같은데 또 뭔가 디테일한 연인들의 다툼과 멀어짐… 금희언니 언제부터 연애소설 장인이었더라…‘나의 사랑 매기’부터인가...)

-장과장 말처럼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하지만 질서에는 어긋날 것이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는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한쪽을 묻어버린다면 허술한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209-210)

-“머리는 무슨 의미야?”
밥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순신이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최대한 무심한 체하고 싶은지 시선은 식당 안 작은 텔레비전에 두었다.
“아는 대로잖아.”
순신은 기가 막힌 것처럼 웃었다. 거기에는 내가 처음 보는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나도 이거 먹는다.”
순신이 단무지를 집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에 넣고 씹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나는 순신이 단무지를 씹을 때면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구나, 단무지를 씹을 때면 얘가 이런 소리를 내는구나, 싶어서 나는 그냥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순신을 더는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몰아넣은 듯했다. 어떻게 이러냐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자기는 서울용 남친이고 강화 가면 강화용이 따로 있느냐고, 자기도 믿지 않으면서 억지를 썼다. 만둣집을 나오고 나서도 그 상처는 멈출 리 없었고 나중에는 내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야, 너 성당 다니는 애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도로 맞은편에는 그 여름 우리가 서 있었던 가회동성당이 눈에 덮여 있었다. 그 앞으로 수정테이프를 길게 그은 듯한 횡단보도의 흰 줄들이 보였다.
“성당 다닌다매, 구원이 있다매?”
순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머리는 왜 자르고 나타났냐고 대체 왜 이러느냐고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고. 그때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해주지 못한 일을 나는 오랫동안 후회했다. (220-222, 미스터리 소설, 역사 소설, 누가 뭐라해도 나는 이 소설을 연애소설로 읽었다. 이 부분의 떡밥 회수와 찢기는 마음에 내 마음도 찢어졌다… 다들 온실만 말하지 순신이와 영두의 풋사랑의 기승전결은 아 내가 귀 기울이지 않았구나 스포일러 할까 봐…. 스포일러라서 죄송합니다…그렇지만 이래야 보고 싶지 않겠나. 유 스틸 마이 넘버원, 하는 이어폰 건네던 다른 소설의 장면도 왠지 생각난다.)

-왕주무관의 표정은 큰 결단을 내린 사람처럼 엄숙했고 어느 면에서는 거룩함까지 풍겼다. 텃새 중에 가장 작지만 벼랑을 오가며 용감하게 먹이를 찾는 굴뚝새의 오라가 풍겼다. (…)
“장과장은 어떻게 하고요?”
“기러기 아빠거든요. (…) (248, 세번째는 굴뚝새, 네번째는 기러기로세. 아니 참 장과장은 어치인 줄 알았는데 기러기이기도...수리 보고서라고 흰죽지수리 어쩌고도 나왔는데 우리 금희언니의 언어유희는 경애가 경애하고 사랑하는 매기도 부르고 갑자기 페퍼로니 출신도 되고 그렇다. 392쪽에서 산아 친구 스미는 벌새가 되었다.)

-부후(250):목재균이 분비한 효소로 목재성분이 분해되어 조직이 변하고, 변질, 파괴되는 것. (출처: 산림청 기관안내 색인 중. 한자어는 어려운데 영어로는 그냥 decay다. 궁금해서 구글링하니 부후가 뭔지 바로 ai가 알려주는데 불신의 아이콘은 산림청 홈페이지 기어들어갔다.)

-“산아야, 더 억울해지는 건 그 억울한 일에 내가 갇혀버리는 일 같아. 갇혀서 내가 나 자신을 해치는 것.”
산아는 고개를 들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얼굴을 적신 눈물이 어둠 속에서도 눈길처럼 반짝였다.
“이모는 하루 마감하면서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 다행히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산아가 어이가 없는지 약간 웃었다.
“그럼 하느님이 칭찬하셔?”
“침묵하시지,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 하는 거니까.” (317-318, 김금희 소설가는 ‘나의 폴라일지’에서 뒤늦게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내비췄고, 소설 곳곳에서 그런 종교적 흔적이 성당 다니는 아이, 내걸리는 시편 구절 같은 것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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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5-06-15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봤어요.! 이 소설 애정합니다!
같은 감상이라 기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6-16 06:47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좋은 읽기였어요. 좋게 읽으셨다니 반갑네요!!

2025-06-16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6-16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6-16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6-16 12:55   좋아요 1 | URL
저는 다 완전 좋지는 않아도 결이 맞는 저자였어요 ㅎㅎㅎㅎ 사랑에 방법이 있나 점점 배우고 자라는 거지!!!
 
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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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5 정용준.


책을 읽다 마는 건 찜찜함을 넘어 지는 기분이라서, 아이 좀 더 미워지면 어때, 하고 4월까지 읽다 만 소설가의 산문집을 꺼낸 것이다. 그렇게나 뭘 할지 몰랐던 것도 같다. 김금희 장편소설 읽고 있는데 이상하게 잘 안 넘어가네...하면서도 125쪽까지 읽은 걸 보니 내가 안 넘어간게 아니라 서사 진행이 좀 더딘 거 아닐까, 이제는 작가 선생님들에 대한 내 사랑을 의심해 보는 것이다.

소설가 산문 안 봐, 하고 김금희의 ‘식물적 낙관’은 영영 놓았었다. 정용준 산문집도 아….진짜 또 소설가 산문집 보면 개다, 하고 본 게 필립로스의 산문집 ‘사실들’이어서 나는 진짜 개가 되었다. 멍멍. 그런데 다시 읽기 시작한 정용준 산문집에 바로 그 필립로스의 ‘사실들’이 나오고, 이청준이랑, 아니 에르노랑, 밀란 쿤데라랑, 조지 오웰이랑, 나도 읽어본 작가들 나올 땐 조금 관심있게 읽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체로는 아...분량 채우려고 문장 어거지로 늘려 놓은 걸 읽는 기분이야… 소설은 안 이랬잖아요...저한테 왜 이러세요...그러는 저는 너한테 왜 이럴까요…

서울 나들이 온 인천 이웃을 한 주에 두 번이나 만나 수다를 떨고 무교들 주제에 성경 이야기를 나누고 부모 욕을 하고 뭐 그랬다. 그런게 재미있는 나는 봉천동 마릴린 맨슨이다! 뭔 소리야… 예쁜 여자사람과 이야기하는 건 즐겁지만 또 힘든 일인가 집 오는데 엘레베이터 거울보니 막 눈이 퀭 하고 더 조그매지고 시들시들해진 것이다. 저녁밥 어떻게 할 거냐는 곁의 사람 문자랑 전화도 집 와서 저녁밥 다 먹고 나서 봐서 그 초조함을 느끼며 괜히 미안하기도 한데, 아니 주말에 외출도 안 하는 집순이 인생 그것이 사람이냐! 싶기도 하면서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사슬 같은 걸 스스로 어디에 걸고 있나 보다.

그러고 멍때리다 아이참 이놈의 책 읽어 치워버려야지, 하고 마저 읽었다. 여기서 또 영업당해서 올가 토르추크? 하여간에 ‘다정한 서술자’란 책을 또 막 사 말아 이러다가 노벨상작가+그 작가의 산문집이면 너는 또 수렁을 스스로 파는 것이다...게다가 나 알라딘이랑 아직 담판도 못짓고 적립금은 소멸되고 예치금은 줬다 뺏어 가고 주문은 취소 되었고 난리란 말이다… 이건 정말 책 사지 말라는 계시 같은 것…

정용준 소설은 최소 네 권(한 편짜리 단편만 묶은 그래픽 노블?이랑 여럿이 앤솔로지로 낸 거도 합치면 몇 개 더) 봤고, 안 읽은 소설집, 장편소설도 아직 네 권이나 가지고 있다. 아마 소설은 언젠가 하나씩 읽어보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산문집으론 다신 만나지 말아요.

+밑줄 긋기

-고유함은 새롭다. 다른 것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 있지 않고, 저 멀리 앞서 나가지도 않고, 티 나게 다른 옷을 입지 않아도, 고유한 것은 그 자체로 새롭다. 무엇과도 같지 않기에. 이전에 자신과 같은 것이 하나도 있지 않았기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고유함은 새롭고 그것은 언제나 새것이다. 그러니까 지문 같은 것. 목소리 같은 것. 대단히 고유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대충 보면 다 비슷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유일하다. 하나밖에 없다.

-예쁜 접시에 잘 구운 두부를 가지런히 올리고 식탁에 앉아 잠시 두부와 간장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걸 먹으면 나는 좋아질 거야. 이걸 먹는 동안 나는 괜찮아질 거야. 두부는 원래 그런 음식이니까. 열받은 사람의 열을 빼주고 죄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고 슬픈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따뜻하게 해주니까.’

-좋은 일만 생기면 좋겠습니다. 아니, 좋은 일은 바라지도 않고 그저 나쁜 일만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삶은 이런 마음의 소원을 늘 배반한 채 우리를 어둠과 슬픔으로 가득한 이상한 밤으로 끌고 갑니다. 큰 사건도 힘들지만 작은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우리의 마음과 몸은 무너지거나 금이 갈 수가 있습니다.

-멋있는 건 그런 것이다. 잘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 진창에 빠져도, 뒷모습이 엉망이 되어도, 신발이 진흙과 오물로 뒤범벅돼도 그래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혹자들이 볼 땐 발악하는 것처럼 보여도, 안 되는 일을 못하는 일을 발버둥 치며 애쓰는 것처럼 보여도. 어쨌든 계속하는 것.

-아직도 난 읽고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 좋다. 이 세계가 좁아지고 얇아지고 마침내 투명해지더라도 기쁠 것 같다. 그 안에 사는 동식물들이 작고 작아져 색채도 부피도 무게도 개성까지 잃고 마침내 뼈만 남은 까만 막대기 같은 글자 하나로 남더라도 나는 그 행간에 놓여 있는 내 운명이 좋다. 누군가 읽어줄 문맥 속에 숨어 있는 내 운명이 좋다. 누군가는 소리 내 읽어줄 문장 속에 있다는 것이 좋다. 때론 그저 문장이 되었다는 것이 좋다.

-구원? 웃기는 소리. 모든 것은 끝이 있어. 괜히 기대했다간 비참해지기만 할 거야. 영원한 건 없어.
영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한순간. 하루. 단 한 번이라도. 어떤 경험은, 어떤 감정은, 어떤 사랑은, 그 사람을 온전히 살게 해. 적어도 한 시절을, 적어도 하루를, 1분 1초를, 짧지만 그 순간을 영원처럼 느끼게 되는 거야. 그것은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해. 그것은 그렇게 단순하고 작은 것이 아니야. 나는 그 가능성을, 그 반짝이는 한순간을 외면할 수 없어…….

-“망했다고? 내가 간절히 원한 것이 당신들이 망했다고 말한 바로 그것인데?”

-지식의 앎이 아니라 감각의 앎이 필요하다. 아무리 경고해도 손으로 만져봐야만 뜨거운 것을 아는 생물. 겪기 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생물. 우리에겐 예상과 예감을 현실과 실제로 느낄 생생함이 필요하다. 감지하는, 감지되는, 감각의 지식. 실제로 행동이 멈추고 새로운 행위를 만들어내는 진짜 앎이 필요한 것이다.

-얼음은 돌이 아니다. 얼음은 무의미가 아니다. 얼음은 죽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얼음은 잠이고 꿈이고 영원이다. 언제나 미래면서 지금 당장 물이 될 수 있는 현실이다. 얼음은 다시 물이 되고 땅에 스며들고 공기가 되고 바람을 일으키는 자연의 씨앗이다. 얼음은 생물들의 몸속에 흡수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생명의 시작점이다. 얼음이 녹아 사라진다는 것은 정말로 사라지는 것이다. 의미의 무한한 가능성이 무의미함으로 증발하는 것이다. 보석보다 귀하고 빛나는 물질이 어둠과 허무 속으로 스러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아. 우리는 얼음을 헛되이 녹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통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개인적으로 발생하며 감각된다. 다시 말해 그런 깨달음과 인간에 대한 보편적 이해와 앎은 고통 앞에서 하나도 쓸모가 없다.

-정체불명의 거룩한 진리가 아닌 내 실존으로 살고 싶은 단순한 마음. 그게 그리 나쁜 걸까.

-어찌됐든 인간은 패배하게 되고 때론 실패하며 절망을 맛보는 날이 오게 된다. 그것은 내 힘과 노력으로 방어할 수도 있지만, 느닷없이 일어나는 사건처럼 반드시 어떤 날 어떤 순간에 각각의 개인에게 발생하고야 만다. 어쩌면 그것은 서사의 영원한 테마가 아닐까. 나아가 서사가 투사하고 있는 인간 삶의 테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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