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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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5 김연수

작가의 소설은 단 한 권 읽었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장편소설도 먼저 읽은 소설집보다 먼저 한 권 모셔놨는데 아직 안 읽었다. 이 산문집 표지에 우표 모양으로 찍힌 게 그거네. 전에 소설 읽고 뭐라고 썼나 찾아봤다. 작년 5월 말. 꼰대. 잘난 척. 별로. 풉. 푸푸풉.
김연수랑 친구라는 김중혁 글쓰기 책 읽고 엄청 까댔는데 이 책은 즐겁고 흥미롭게 읽었다. 이건 인기 있고 싶은 인기 없는 (중혁이 같은)오빠가 아니라 진짜 인기 있는 오빠 같다. 게다가 하나도 안 꼰대 같고 위트와 여유 넘치고 그러면서도 니가 부족한 건 말야...하고 넌지시 알려준다. 와. 와아. 비소설과 문체가 너무 다르긴 하지만, 소설도 다시 찾아 읽어 봐야겠다.

우리 엄마가 십 여년 전 집을 나와 이혼에 성공한 후 한 일이 있다. 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입학. 중간에 내가 예고없이 임신 출산하는 바람에 손녀 봐준다고 휴학하긴 했지만 성실히 강의 듣고 과제해서 5년 만에 무사히 졸업했다. 검정고시 고졸에서 학사로 학력 올리는 게 본 목적은 아니었다. 엄마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책장에서 욕망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문학론과 글쓰기 작법 도서만 삼사십 권. 그런 책이 가득이어도 펼쳐볼 생각을 못했다. 그냥 저게 뭐라고 저렇게 애타게 바랄까 불구경하듯 했다.
아직 나한테 보여주고 싶은 정도로는 쓰지 못하셨나 보다. 최근에는 하이쿠랑 시를 쓴다고 하셨다. 시 쓰는 어머니는 만족스러워 보인다. 소설도 아직 놓지 않으신 걸까, 지금도 글쓰기공작소니 글쓰기만보니 하는 걸 읽는 모습을 보이신다. 문학의 어머니.

나쁜 버릇이 두 가지 있다. 남의 인생의 굴곡이나 본 적 없는 형제 자매 부모 이름까지 알게 되면 장기 기억에 넣어 버린다. 그리고 가끔 지금은 내 곁에 없는, 혹은 아예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 인터넷을 헤맨다. 싸이월드 때는 파도타기를, 지금은 페이스북에서 동명의 사람들 목록을 빠르게 스크롤 업 한다. 한번은 친구가 신인 소설가를 행사에 섭외해야 하는데 연락처를 구할 길이 없다고 해서 폭풍 검색으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발굴해 연결해주었다. 이런 짓을 하고도 칭찬 받기도 한다.
그 친구 얘기다. 고등학생 때 피씨통신 락동호회에서 수다를 떨었다. 주로 연애사, 음악, 소설에 대한 이야기였다. 만난 건 단 한 번, 동호회가 문 닫기 전 홍대 클럽에서 열린 마지막 공연이었다. 수능을 앞둔 여름이었는데 엄마한테 독서실 간다고 거짓말하고 서울행 버스를 탔다. 그 친구는 예대 문창과에 합격해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 친구를 아버지, 그 친구의 여자친구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여자친구는 매번 바뀌어 새어머니가 잔뜩 늘어났)다. 어머니께 집에서 녹음한 내 노래(소음 공해)가 담긴 카세트 테이프를 선물했다. 잠자리에서 잘 들었는데 나중에 수해로 방이 잠겨 유실(공해 퇴치)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게 물을 사달라고 했다. 편의점에 함께 갔더니 삼다수 등등 한국산 물병 사이에서 고민 없이 에비앙을 집었다. 열아홉살짜리에게 수입산 생수를 뜯어내는 스무살짜리라니 일진 양아치 풍모 가득하지만 그때는 그것조차 아우라로 느껴졌다. 그래서 여지껏 기억에 남았다.
이십 대 초반까지 그 친구가 카페에 올린 글들을 보고 조잘대다 어느 순간 연락이 끊겼다. 이 년 전 그 친구가 생각나 늘 하던대로 검색창에 그 친구의 이름이며 아이디를 넣었다. 그 시점보다 이 년 전 세 청년이 시체를 들고 다니며 유기하려고 갈팡질팡하는 소설로 일간지 신춘문예에 등단한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을 보니 동명이인은 확실히 아니었다. 까똑에 피씨통신 시절 아이디를 넣으니 내내 여기 있었지롱 하고 연결되었다.
자기가 쓴 소설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나는 옛날에 했던 것처럼 맞춤법 나치질을 하고 신랄한 평을 했다. 재미있다. 재미없다.
그 친구가 말했다. 너도 소설을 써 보지 그래. 남의 말 안 듣기로 유명한 내가 그 말에 어 그래? 하고 쓰기 시작했다. 아마도 에비앙을 당당히 요구할 때부터 이 친구의 말에는 거절할 수 없는 암시가 걸렸는지도 몰라.
한 달에 하나 꼴로 뭘 끄적여서 제출하고 욕 먹는(욕은 안 했다) 관계로 역전되었다. 문학의 아버지.

글자 수만 단편의 형식을 갖춘 네 편쯤 썼다. 문학의 어머니와 문학의 양아버지가 낳은 아이는 뭐가 될까...요?

애둘엄마가 됩니다. 이번에는 계획적인 임신 출산으로 일 년 간 책읽기고 글쓰기고 놓아버렸다. 직장에선 명예퇴직과 함께 빈 자리가 된 보직을 맡아 업무 강도가 높아졌고, 퇴근하면 유산 위험이 높은 상태로 피를 쏟으며 누워 있었다. 누워서 덱스터 전편과 에어리언 1,2,3,4, 커버넌트 같은 걸 보며 태교에 전념했다. (퍽이나. 괴물을 낳고 싶었냐.)
출산 후 한 달 후부터 다시 독서. 서너달 후부터 꼬인 수면리듬으로 잠 안 오는 밤에 스마트폰으로 끄적이기 시작. 그렇게 일 년 전부터 애기 자는 틈마다 다시 쓰다보니.
나는 토고인이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초고라고 불렀던 것들. 만사천 자 이상에 어떻게든 결말 지었다고 생각한 파일을 초고라고 불렀다. 그런게 일 년 간 열한개 더 생겼다. 열다섯 개의 음식물쓰레기 또는 구토물과 토하다 만 찌꺼기 수 십 개. 토고라니 정말 적확한 이름붙이기 아냐.

그러니까 나는 아직 아무도 아니다. 운 좋은 날 한 놈은 학교 가고 한 놈은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자주면 그 틈에 딴청을 안 한다면 겨우 뭐라도 쓴다면 편안한 숨을 내쉬는 육아휴직자다. 뭐 내내 이러고 살아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좋은 취미다. 나쁜 일이 생겨도 에이 써버리지 뭐. 미운 사람이 생각나도 써버려! 내가 한 몹쓸 짓에 괴로울 때면 써버리고 고생시켜 벌주면서 반성하지 한다. 가만, 그러면 반대로 호강시켜 주고 제대로 사는 쪽으로 써도 되는 거였네. 그런데 그건 재미가 없겠지.

아직은 토고인인 내게 부족한 게 무언지 앞으로는 어떻게 다시 쓰기 해야할지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려면 뭔가 행동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 책을 읽고 아직 아무 것도 안 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하나도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일단 지금은 애기를 업고 재우려고 시도 중이다. 그게 선행 단계)

나의 미적 감수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아름다운 건 나와 멀다 못해 맞지 않아, 선을 긋고. 예쁜 걸 좋아해 찰랑찰랑한 머리칼을 허리께까지 기르고 기타를 치던 전기과 박사과정 남자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하며 내가 쓴 형편 없는 가사를 덜 안 예쁘게 고쳐주었다. 이과생에게 발리는 조어 감각. 그런 곡들이 인터넷 어딘가를 지금도 들어주는 사람 없이 헤매고 있겠지.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의 나라, 쓰다가 저장 못하고 날아간 글들이 가는 나라를 가끔 상상한다.
급한 성질은 감추고 가리고 에두르고 그런 느림의 아름다움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직설화법. 나는 당장 이걸 만지고 저걸 가지겠다. 내놔. 얼른 말해 봐. 지금 말할테니 들어라. 으으. 촌스러움과 저열함과 파괴성의 원천이 이거로구나.

글은 아름다워야 한다. 나만 읽을 게 아니라면. 나만 읽는 것이라도. 가장 기본적인 바탕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다시 쓸 때도 늘 더 아름다운 표현을 궁리해야 한다.
그러려면 아름다움이 뭔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이 뭔지 알려면 더 느끼며 살아야 한다. 더 느끼려면 귀와 눈과 코와 하여간 뭐든 더 열어두어야 한다. 그러려면…

당위가 늘어간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를 괴롭히기 위함은 아니다. 결국 나를 몰아 넣고 다져대던 그 구석에서 나를 끄집어 내야 한다. 행복해져야 한다. 아니 행복해지려고 애써야 한다. 애쓰고 바꾸려고 움직여대지 않으면 내 글도 나도 그대로다. 난 맨날 이모양이야...이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와, 많이 배웠네. 김연수 최고. 하하하.

+밑줄 긋기
“비평가들이란 하렘의 환관과 같다. 매일 밤 그곳에 있으면서 매일 밤 그 짓을 지켜본다. 매일 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 자신은 그걸 할 수가 없다.”
  매일 지켜보면서도 그걸 할 수가 없다면, 음, 무척 슬프겠다. 사랑하는 재능을 확인한 뒤에야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까?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젊은 소설가여, 매일 그걸 해라.

내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이 ‘행동한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행동한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면, 소설을 쓰는 나 역시 ‘쓴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쓴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소설 쓰기의 절정으로 올라가야만 하리라. 그러니까 먼저 소설가가 되라고 말한다면 순서가 잘못됐다. 소설가라면 플롯의 시작점이 행동이라는 걸 알아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삶이 ‘쓰기’에서 시작한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그러니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먼저 뭔가를 써야만 소설가가 될 수 있다. 

그 말씀 덕분에 나는 문학적 표현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문학적 표현이란 진부한 말들을 새롭게 표현하는 걸 뜻한다. 결국 문학이란 남들과 다른, 더 나아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걸 뜻하니까. 욕망의 말들은 꽤 진부한 편에 속한다. 욕망의 말들이 진부한 건 예나 지금이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원하는 것은 대개 비슷하기 때문이다. “죽을 만큼 너를 사랑해!”라고 말해보라. 그건 문학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일단 죽지도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진짜 사랑한다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욕망은 뜨거운 불꽃과 같아서 제대로 형상화가 이뤄지지 못한 종이인물(영어로는 납작한 인물, 즉 ‘flat character’가 되겠다)이 그런 말을 입에 담다가는 단숨에 타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하는 건 이 때문이다. 하긴 오히려 그렇게 납작해진 것 자체가 판에 박힌 욕망의 말을 그대로 입에 담은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욕망의 말들이 불꽃과 같다면 그 말들을 다룰 때는 안전장치가 필요할 텐데, 그게 바로 비유법이다. ‘이를테면’ ‘말하자면’ ‘가령’ 등의 부사로 시작하면 비유의 문장이 만들어진다. 예컨대 “그 아이가 삶의 허무를 견딜 수 없었나봐”라고 쓴 뒤에 여기에 줄을 긋고 ‘이를테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다시 쓴다. “이를테면 마음에 난 자리가 운동장만해졌다거나”라고 써도 좋고, “이를테면 그 아이의 삶이 어떤 방송도 잡히지 않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변했다거나”라고 써도 좋다.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뜨거운 내용도 담을 수 있다. 촌철살인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시피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비유법이라면 수사학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이란 매 순간 상황과 사건에서 설득의 매개와 근거를 찾아내는 발견술이라고 썼다. ‘발견술’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한글 자모를 조합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표현의 숫자는 무한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아직 조합되지 않은 표현을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작가는 ‘이를테면’ 언어의 발견술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국 소설의 대사란 진부한 욕망의 말들을 은폐하기 위해 참신한 문장으로 다시 표현하는 데 1차적인 목표가 있고, 그다음으로는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데 2차적인 목표가 있는 셈이다. 당연하게도 두번째 목표가 소설가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다. 

소설가는 내용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다. 문장을 고치는 사람이다. 잘 고치는 사람, 그러니까 본인이 만족할 정도로 충분하게 많이……, 남들보다 더 많이 고치는 사람. 그게 다다.(그러니 술자리에서 소설가가 말이 많다고 너무 미워하지 말기를.)

시어머니 죽는 날도 있다. 사람은 다 죽는다는 잔인한 진실로 만들 수 있는, 이 얼마나 낙천적인 표현인가!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는가? 그 이유는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우리 개개인은 충분히 오래 살지 못하지만 우리 인류는 충분히 오래 살 테니, 우리 모두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겠지만 우리가 간절히 소망했던 일들은 모두 이뤄지리라. 우리가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과 역사라는 무한한 시간을 상상할 수 있다면, 과거의 빛과 미래의 빛이 뒤섞인 밤하늘처럼 과거의 사람들과 미래의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면. 먼 훗날 어딘가 다른 곳이 아니라 지금 즉시 바로 여기에서. 마흔 살이 지난 뒤에도 우리가 미혹돼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더 읽을 책들
헤밍웨이(한 권도 안 봤다니. 성격 더러운 건 나랑 제일 비슷할 거 같은데. 아니 안 읽고도 성격이 더럽다고 단언하다니.) 일단은
  (84일 동안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재수없는 노인 + 1천 5백 파운드가 넘는 어마어마한 물고기) / 이런저런 상어들 = 3박 4일 동안, 고생 끝에 잡은 물고기를 상어들에게 다 뜯겨가면서도 항구까지 끌고 오는 이야기
부터.(아홉 살 때 어린이판으로 읽은 것도 읽은 거로 쳐야 하나.)

세이쇼나곤이라는 11세기 일본의 고위 궁녀가 쓴 수필집 『마쿠라노소시』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 말하지 않고 쓰려면..)
요네하라 마리가 쓴 『속담 인류학』 (이건 꼭 봐야 해!)
불안한 건 왠지 한국어판 없고 작가가 일본어판을 읽고 자랑해 놓은 건 아닌가 하는 것...검색해 봐야지.
토머스 핀천의 『Slow Learner』
이 책 내내 PPL로 광고+홍보한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집에 있으니까), 『꾿빠이, 이상』(도서관에 있는 것 같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제목이 끌린다), 데뷔작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자주 언급되었다 첫 소설이니 아무래도..) 막상 소설 보고는 산문 쓰는 거랑 왜 이리 달라! 꼰대! 잘난 척! 별로! 또 투덜대는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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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1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김연수였다구요? 헐. 그건 아니다. 거짓말.
왜 자꾸 저를 우주로 보내시나요, 우주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그나저나 열반인님의 단편이 너무 궁금합니다.

너무너무 궁금합니다.

너무너무너무너무 궁긍합니다.

너무너무너무너무 얼마나 궁금하냐하면 너무너무너무너무 이런 짓을 십 분은 너무너무너무너무 할 수 있을 정도로 궁금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7-15 12:16   좋아요 0 | URL
혹시 남이 토한 걸 맨손으로 훑어서 드시는 취미가 있으시면 취식 가능하시고, 아니시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박수를 짝짝짝 치시며 멀찍이 토하는 게 튀지 않게 서 계심이...
그게 김연수였다니까요. 검색하다 김연수가 연재한 거 보고 아니야 설마 그럴리가 없어 하고 산문집까지 찾아보니 어릴 때 헤어진 쌍둥이(응? 개띠랑 소띠랑 그게 돼?) 마냥 글맛이 닮았더라니까요. 이쯤 되면 syo 꿇어 앉히고 그래서, 김연수 필사 했어? 안 했어? 아니면 왜 때문에 잘 써? 하고 다그쳐야 할 것 같은...

syo 2019-07-15 12:23   좋아요 1 | URL
열반인님은 본인의 작품을 토고라고 평가하셨지만,
syo를 먹고 김연수의 글맛을 떠올렸다는 대목에서 미루어 보아 열반인님의 미뢰가 썩 편파적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뢰할 수 없군요. 그런고로 직접 확인하려 합니다. ‘그래도 이거라면‘ 싶은 걸 얼른 내놓으세요...... 어떻게, 메일로 받을까요? syo8kirins@네이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배웠네요. 김연수 작가님 개띠.
과연 열반인님이 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는지를 잘 알게 되는 글과 댓글이었습니다.


2019-07-15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5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5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5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5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역시 빵이 좋아!
야마모토 아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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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야마모토 아리
빵덕후의 빵사랑이 느껴지는 만화. 일본의 다양한 제과점에서 파는 빵들을 소개한다. 맨뒤에는 소개된 빵을 파는 가게들의 위치 영업시간까지 친절하게 소개해놨다. 빵 그림이나 재료 소개, 식감, 맛을 상세히 전달하려고 애썼지만 뭐 백문이불여일식. 스토리텔링 없이 책 내내 감탄하고 황홀해하는게 다라 초밥왕이나 맛의 달인에서 먹고 뿅가는 장면만 모아 놓은 것 같다. 홈쇼핑이나 카탈로그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크게 재미는 없다는 뜻... 

관악구에도 빵집이 많다. 고시촌 살 땐 삐에스몽떼도 자주 갔는데 이젠 갈 일이 없다. 쑥고개 가는 쪽 아띠85도씨는 일부러 찾아가봤는데 맛있지만 비싸다.(빵은 최고인데 케익은 별로다) 낙성대 장블랑제리는 대학원 수업마다 밥 대신 저렴하고 큰 빵으로 때우게 해주던 곳인데 바이럴을 잘했는지 전통 있는 맛집?으로 둔갑되어 비싼 빵을 줄서야 살 수 있는 곳이 되어 버렸다.(십 년 전만 해도 아니었는데...) 제일 자주 가는 곳은 서울대입구 브레드몽드인데 자주는 아니래도 신제품을 계속 내준다. 케익은 비싸지만 다 맛있어서 꼭 여기서 산다. 써 놓고 보니 나도 빵덕이네... 슬프게도 집 주변에는 빵집 다운 곳이 없고 냉동 생지도 어마무시하게 못 굽는 빠바 두곳만 있다. 가까운 곳에도 동네 빵집 좋은 곳이 있으면 좋겠다. 빵투어 할 만큼의 열정은 없으니 빵덕은 못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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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 양을 치며 배운 인간, 동물, 자연에 관한 경이로운 이야기
악셀 린덴 지음, 김정아 옮김 / 심플라이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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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악셀 린덴

포도 농사 짓는 농부의 블로그를 가끔 구경한다. 예전에 디시에 만화를 그려 올리던 분인데 이제는 포도를 기른다. 물을 대고 밭을 정비하고 흰가루병 곰팡이병에 근심하고 열린 포도알을 세고 수확철이면 포도 판매 공지를 올린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뭔가를 제공하고 벌어 먹는 입장에서 보면 먹을 수 있는 걸 키워 파는 사람은 훨씬 정직해 보인다.

제목에 끌려 읽었는데 책 자체는 그리 열탕 냉탕하지 않다. 한국어판 판매 촉진은 제목이 다 했네. 밋밋해도 원제인 양 일기?나 영어제목 양 세기가 더 어울릴 법하다. 잔잔하고 심심해 보여도 정말 양 키우는 이야기 밖에 없다. 뭐 밖에 없다 하면 없어보이는데 양 키우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있었다. 인간과 양의 삶이 얽히니 생각보다 복잡하다. 책을 읽다 나도 모르게 발굽 깎는 영상을 찾아봤다.
https://youtu.be/OAmF7ndQpZ8
양은 너무 온순하게 주인에게 발을 맡겼다. 주인은 능숙하게 니퍼와 칼로 썩은 발톱을 도려내고 약을 발라 주었다. 석석 잘라내는데 속이 시원하네. 제 썩은 새끼발톱도 어떻게 좀..(안 될까요?)

나의 평범한 삶은 순식간에 체제 공범자, 부당 수혜자 명찰이 붙었다. 뼈를 때려서 반박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산사람이 될 수도 없고 땅덩이 좁은 한국에서 농축산업 종사자가 되는 건 도시인 못지 않게 오염 덩이를 만들고 지속 불가능한 생산(에다 지속 불가능한 경제적 삶)을 유지해야 하니 대안이 못 된다. 내가 한다고 하는 일은 생수병 쓰레기 너무 많이 나온다고 몇 년 째 물 사먹던 걸 그만 두고 유리병 두 개에 수돗물 끓인 걸 식혀 담아 먹는 정도이다. (그나마도 같이 사는 사람은 탄산수만 먹어서 전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페트병 나온다…)

테레자도 생각났다. 웨이트리스로 일하다 토마시를 만나 가게 된 도시에서 프라하의 봄을 알리는 사진 작가로, 다시 바의 종업원으로 일하던 그녀의 마지막 직업은 양치기였다. 그녀와 함께 카레닌도 목양견이라는 최초 최후의 직업을 가졌다. 양들을 풀어놓고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 해 보였다. 현실의 양치기는 도망치는 양을 붙잡아 울타리 안으로 안아 넣고, 고장난 울타리를 끊임 없이 고치고, 풀과 건초와 사료와 물의 양을 재고, 양을 세고, 양을 잡고, 양을 교미시키고, 다치고 아픈 양을 보살피거나 죽이고 눈코뜰새 없이 바빠 보인다. 물론 하루에 다하는 게 아니라 좀 낫지만. 먹고 사는 일은 안 그런게 없는 것 같다.
신념을 굳건히 지키는 삶은 어렵다.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발디딘 삶에 할 수 있는 한 충실하고 할 수 있다면 덜 나쁜 방향으로 조금씩 고쳐나가는 정도가 할 수 있는 일 같다.

남의 일기 보는 건 재미있다. 내 일기도 시간이 오래 지나고 읽으면 남의 일기 읽는 것 같다. 주로 힘들 때 일기를 많이 쓴다. 지나고 읽으면 힘든 얘기 밖에 없다. 요즘에는 일기를 거의 쓰지 않는다. 나름 잘 살고 있나보다. 별일 없이 살고 있는 일기도 가끔 남겨야 겠다. 별일 없이 양치는 일기도 읽어보니 별 볼일 없지 않고 작은 재미가 있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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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없는 새끼들 때문에 열받아서 쓴 생활 예절
김불꽃 지음 / 팬덤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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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9 김불꽃

인터넷 우스개로 돌아다니는 생활 예절 글을 본 기억이 난다. 그게 책으로 나왔다니, 제목도 기니 궁금한데 아니 뻔할텐데 볼까 말까 하다 전자도서관에 줄서서 빌려봤다.
예의 없이 없애버린 내 시간에게 미안하다.

남에 대한 기본 예의를 갖추지 못한 자들에 대한 분노는 십분 이해한다. 게시판 글로 볼 때는 우스워했던 것도 같다. 막상 책으로 엮어 보니 친구를 때린 아이를 때리는 선생님을 보는 기분이다.
뒤지는 수가 있다. 단명하시는 수가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처 외워. 인마. 확씨. 한 번 보면 실소하지만 이게 책 안에서 수십 번 나오니 작작해 꼰대새끼야 하고 울컥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정작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은 그닥 예의에 무지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의 청자라 할 만한 사람은 이 책을 절대 읽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인터넷 게시판에 떠도는 글 하나하나를 보면 뭐 이**₩&#&가 니나 잘해 이러고 새겨듣지 않을 것이다.

매체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게시판과 전자책과 종이책의 온도와 질감은 확실히 다르다.
내 싸가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내 글쓰기는 예의를 지켜왔는가, 내 기분따라 지키다 말다 하지 않았는가 반성한다.
이렇게 욕하고 강압적으로 외워라 외워 하며 개그인 척 하는 거말고 정말 제대로 예의를 익히게 하는 방법은 뭘까 생각한다. 배려, 존중, 당연한 듯 싶지만 그걸 지키는 것보다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게 더 쉬운 걸 보면 그게 본성 같다. 본성을 누르고 지배욕 과시욕 후안무치 이런 걸 없애려면 결국 그런 제대로 존중받는 경험을 해주고 남에게도 받은대로 똑같이 해줘야 함을 어려서부터 새겨줘야 할 것 같다. 야 이새*야 어른을 보고도 인사 안 하나?가 아니라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미리 인사를 건네고 행동으로 존중이 뭔지 체험하게 해줘야 한다. 예의 없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건 존중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 그토록 많다는 슬픈 반증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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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yo > 190708Mon

ㅅ의 첫 항목. 뭘 덧붙여도 오염이라 따로 스크랩.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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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09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까지요?? ( ㅇ )>

반유행열반인 2019-07-09 11:00   좋아요 0 | URL
무플방지위원회 오늘은 쉽니다. 댓글 안 다는 애독자들의 마음을 이제사 읽었달까...뭘 덧붙여도 사족이야...완벽한 호변 풍경 앞에 모텔 짓는 꼴이야 하고...

syo 2019-07-09 12:11   좋아요 1 | URL
열반인님의 항공우주공학기술이 점차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syo는 끝없이 우주를 표류하도 있다고 아뢰오....

반유행열반인 2019-07-09 12:34   좋아요 0 | URL
S...T...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