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 땐 뇌 과학 - 최신 뇌과학과 신경생물학은 우울증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앨릭스 코브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0204 앨릭스 코브

내가 어릴 때 아빠가 우울증과 조현병 때문에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다. 엄마 역시 아빠의 질병과 폭력 때문에 우울과 무기력에 쩔어 내게 무표정하게 대했고 만성 두통으로 자주 누워있었다. 지금은 잘 웃고 잘 떠들고 운동과 글쓰기 열심히 하며 즐거이 사신다. (때론 신속한 이혼이 가장 좋은 우울증 치료제 입니다…)
유전과 환경. 스물 일곱 살의 나는 수면장애와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다행히도 병원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비교적 빨리 했다. 나중에 정신보건 관련 연수에서 발병과 치료 시작 시점 간격이 짧을 수록 예후가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게 병인지도 모르고 가족들까지 잔뜩 시달리고 굿을 하고 기도원에 가고 엉뚱한 짓을 하다 치료 시점을 놓치는 안타까운 경우도 많다.
정신과의원에 갔더니 항우울제와 항불안제, 수면제를 처방해줘서 6개월을 먹었다. 상담치료는 비용이 매우 비싸서 대부분 정신과의원이 짧은 진료 후 투약 위주로 치료를 진행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내가 간 곳이 소아정신과라 그랬는지 좋은 분이라 그랬는지 의사 선생님이 비교적 오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런저런 조언도 해 주었다. 운동과 독서를 권하면서 오소희 여행책과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어보라고 했다. 읽긴 했지만 재미는 없었다.
한참 뒤에 우연히 그 의사 선생님 sns를 보게 되었다. 사진과 짧은 글들이 그분 또한 심한 어둠에 빠져있는 걸 알려주었다. 의사도 사람이고 아플 수 있구나 새삼 느꼈다.

이후로도 산후우울증과 여러 심리 문제가 종종 닥쳤고, 수면장애는 거의 평생을 따라다니고 있다. 그래도 최근의 마음 상태는 아주 좋은 편이다. 그러니 이 책도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은 좋은 시기이지만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읽어두면 좋을 것 같았다. 자신의 상태에 관해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이해하는 일만으로도 때로는 많은 도움이 된다. 예전 같으면 운동해라(이 책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 미소지어라, 감사해라, 다른 사람과 같이 있어라 같은 조언들이 다 부질없다고 여겼을 것 같다. 이번에는 읽으면서 빤한 소리지만 맞는 소리라고 끄덕거렸다. 내가 무난한 날들을 보내고 나아진 이유가 나도 모르는 사이 책에 나온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책에서는 우울증과 관련된 뇌의 부위의 구체적 이름과 기능, 우울증이 발생했을 때 해당 부분의 변화, 호르몬의 변화 등을 알려준다. 뇌의 부위 이름이 워낙 생소하고 어려워서 외워지지 않고 금세 까먹지만, 그래도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내 머릿속에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만 알아도 위로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생활 속에서 스스로 시도할 수 있는 행동의 변화가 뇌의 부위에 어떤 자극과 변화를 주는지, 어떤 메커니즘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날 힘을 주는지 과학을 바탕으로 설명해준다. 단순히 운동해라, 웃어라, 잘자라, 미소지어라, 하는 말은 한 귀로 새어나가지만 그렇게 하면 이러이러한 일이 네 뇌에서 일어난다- 하는 과학자의 말은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우울로 빠져들게 하는 나쁜 습관들과 그 연속 반응을 하강곡선, 하나라도 나아질 계기를 만들어 일어나는 변화를 상승곡선으로 표현한 것이 제법 잘 와닿았다.

다만 주변에 우울을 앓는 이들이 있을 때, 아픈 사람에게 이 책을 읽고 스스로 노력하면 쉽게 병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권하는 착각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기 자신과 타인을 해칠 수준의 우울에 빠진 사람, 자살충동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투약, 입원 등 의료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 당장 사람이 죽을 상황인데 약 먹는 일을 꺼릴 이유가 없다. 약은 상태 호전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너무 심한 우울과 무기력에 빠진 사람은 책을 읽을 기력조차 없다. 과학적 설득조차 통할 수 없고 행동변화를 시도하기도 어렵다. 본인이 강한 치료 의지가 있거나 투약으로 어느 정도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상태로 호전 중인 사람에게는 이 책의 지침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정신 건강과 뇌과학에 대한 책과 글에 관심이 많고 열심히 찾아본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잘 발견하고 내 일인양 걱정하곤 한다. 병원에 가고 약을 먹어보라는 권유도 쉽게 한다. 모두가 그렇게 해서 낫는 건 아니지만 일부에게는 확실히 효과가 있는 방법이라 그렇다.
다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와 주변 사람들 모두 마냥 행복했으면 좋겠다. 계속 들여다보고 나빠지지 않게 보살피는 수 밖에는 없다. 올해는 많이 걸을 생각이다. 읽기와 쓰기도 마음에 많은 도움이 되니 계속 할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이드 인 강남
주원규 지음 / 네오픽션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0203 주원규

같은 작가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열외인종잔혹사를 한참 전에 사 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다. 작년 이 무렵 강남 유흥가를 둘러싸고 경찰 비리, 연예인 성범죄 등등 이슈와 함께 이 책 홍보를 많이 접했다. 신나게 읽던 뇌과학책이 절반쯤 읽다가 기한을 넘겨 반납되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다 가벼운 거나 하나 보자 하고 빌렸다.

장편 문학상까지 탄 사람인데, 왠만큼은 쓰겠지 하는 기대를 이 책은 져버렸다. 읽기 어려운 내용이 아닌데도 문장이 매끄럽지 못해서 읽는 내내 힘들었다. 주술 호응 안 맞고, 주어 명확하지 않게 오락가락 거리고, 반복 중복 표현 많고, 지나치게 긴 문장에다가, 구역질이 적합한 자리에 세 번이나 비역질이 뜬금 없이 들어가 있었다. 사전 찾아 보는 게 어려운 거니… 성매매 여성을 내내 콜걸로 칭해서 되게 올드한 느낌이 들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삼류 영화 시나리오 초안이나 드라마 대본 읽는 듯한 대사가 많이 등장했다. 아무래도 시나리오로 써서 투자처를 찾다가 강남 유흥가 관련 사건 터지면서 부랴부랴 소설로 각색해 출간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미흡한 글이었다. 소설을 처음 쓰는 작가도 아닌데 이 정도 글쓰기라니 실망스러웠다.

비리 경찰, 사건을 조작 은폐하는 설계사 변호사, 포주, 부동산재벌, 멤버쉽제 변태 유흥 클럽과 그 고객인 소위 고위층과 전문직과 연예인, 성매매여성, 유흥 중 벌어진 살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또다시 사람을 죽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큰 돈이 오가는, 바로 이런 곳이 강남이다, 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범죄와의 전쟁, 신세계, 범죄도시, 내부자들 같은 범죄 영화를 꿈꾸는 스토리같은데, 그냥 그랬다. 온갖 선정적인 설정과 장면 가지고 뭘 말하고 싶은지 뭘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재미도 별로 없었다. 김성모 만화 비스무레한데 만화는 실소라도 나오는데 이 소설은 웃길 생각도 없는 것 같고 되도 않는 문장으로 멋만 잔뜩 부려놨다. 아 이걸 읽은 내 시간.

검색해 보니 저자 인터뷰 기사를 몇 개 찾을 수 있었는데 이력이 특이했다. 소설가 겸 드라마 작가 겸 목사님 ㄷㄷ. 주님,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아까운 시간 죽인 것도 후질 걸 짐작하고도 홧김에 빌려본 내 탓. 안 본 눈 사고 싶어도 방법이 없으니 다음부터는 좋은 책만 골라 봐야지. 하하하. 맨날 이러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이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02-03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는 매우 감사합니다, 반유행열반인님. 원래도 읽고 싶은 책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마음 놓고 패쓰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2-03 12:55   좋아요 0 | URL
패쓰 리뷰 전문가로 특화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ㅎ
 
시 읽는 법 - 시와 처음 벗하려는 당신에게
김이경 지음 / 유유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0130 김이경

송인 -정지상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비 갠 긴 둑에는 풀빛이 짙은데
그대 보내는 남포엔 슬픈 노래 울리네
대동강 물이야 어느 때 마를 건가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강물에 더하는 것을

고등학교 때 한문 교과서에 실린 이 한시를 정말 좋아했다. 짝사랑하는 아이를 생각하며 일기장에 베껴 적었다.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지만, 더 어릴 때는 시를 찾아 읽은 적이 있었다. 처음 인터넷을 시작한 중3-고1 무렵엔 이상의 시 전작을 올려놓은 홈페이지를 찾아 우와! 횡재했어! 하면서 잉크젯 프린터로 슉슉 뽑아 A4용지에 호치키스 박아 책인 양 고이 들고 다니며 읽었다.
중학생이 알아야 할 시 라는 책을 엄마가 사줬는데 꾸역거리고 보다가 마음에 들어서 종이에 옮겨 적은 시도 있었다. 황석우의 벽모의 묘. 어쩜 파란 털 고양이래, 하며 중이병답게 하늘색 펜으로 적어놨다. 생각난 김에 시인의 다른 시들을 검색해 읽어보니 캬아 나란 놈은 역시 이런 취향이군. 몰랐는데 이 시인 자체가 되게 기인에다 여자 밝히는 놈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린 나는 주로 세기말적이고 퇴폐적인 1920, 30년대의 시를 좋아했던 것이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에 실린 걸 보고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읽으려다 실패했던 기억도. 어둠의 자식아...
그나마 읽었던 것 중 가장 예쁜 시는 엄마가 화장실 벽에 붙여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다. 거기 이국적인 소녀 이름 중에 내 이름자가 있어서. 그래도 화장실 휴지걸이 위에 올려둔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게 처음 시를 건네준 건 제도권 교육이다. 다만 계속 찾아 읽을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을 뿐. 수능 문학영역 준비하며 시며 소설이며 나름 재미거리 위안거리로 즐겼던 것 같다. 그런데 대학 오면서는 많지도 않은 읽는 거리가 그나마 산문으로 치우쳤다. 말이 많고 친절한 말을 길게 건네 듣는 게 좋은 나한테는 시보다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짧게 요약할 만큼 시와 만난 시간이 짧고 경험도 부끄럽게 부족하다.

이 책은 얇아서 읽은 책 권수를 늘리는 데 아주 유용하다. 전자책을 빌려서 쪽수만 보고 처음엔 좀 두껍나했더니 뒤에 1/3 정도가 유유 출판사 책 광고였다. 세상에…
얇지만 시에 관해 나처럼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수업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어려운 말은 거의 안 하고, 서술도 강의에서 말로 전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작가가 실제로 시에 관해 가르쳤던 강의록을 바탕으로 한 책인 듯하다.
나한테는 시가 별로라고,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사실 괜히 겁을 내고 벽을 쳤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가로막힘을 살살 걷어내고 시를 읽어야 할 이유를 조금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말과 글을 잘 갈고 다듬어 건네는 사람을 보며 느낀 점이 많다. 나도 그런 고운 말을 써서 마음을 건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거친 말들은 고운 사포로 열심히 문질러서 부드럽게 전하고 싶다. 말로 누구를 다치게 하는 일이 너무 많았어서 이제는 줄이고 싶다. 내 속에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걸 잘 풀어줄 단어와 문장도 가지고 싶다. 소설과 다른 좋은 산문 독서도 꾸준히 해야겠지만 뒤룩뒤룩한 내 글을 날씬하게 하는 데 시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의 시 읽는 법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그럭저럭 마음을 갖추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다음 달부터는 매달 시집 한 권씩을 읽어야 겠다. ㅎㅎㅎ엄마가 모아둔 책들이 아주 많다.


+밑줄 긋기

시를 읽을 때는 시가 가진 형식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시는 다양한 라임(압운)과 장치로 운율을 만드는데 때로는 시구의 내용이나 의미보다 이 리듬이 더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19세기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이렇게 말했어요.
어떤 책을 읽는데 전신이 얼어붙어 어떤 불기로도 몸을 덥힐 수 없게 되면, 나는 그것이 시인 줄 안다. 머리 맨 위가 떨어져 나간 듯 몸이 반응해도, 나는 그것이 시인 줄 안다. 이것이 내가 시를 알아보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시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반성이에요...반성이 한자로 反省인데 돌이켜 살핀다는 뜻이에요. 돌아본다, 다시 살핀다는 건 내가 무엇을 봤는지, 제대로 봤는지, 왜 그것을 봤거나 못 봤는지 의심하고 확인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란 눈에 보이는 사물, 현실을 돌이켜서 다시 보는 것이란 뜻입니다.

보는 것은 일상적으로 하는 행위지만 시인은 이것을 의식하고 내가 어떤 대상을 왜, 어떻게 보았는지 스스로 자문합니다. 대상을 정확히 보았는지, 본다는 행위에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보는 ‘나’는 어떤 존재인지, 계속 묻는 거죠. 시란 이런 물음의 과정이고 탐구이고 그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물음에 쉽게 답하고 안주하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현이고요. 그러니까 이 말은 시란 끝없는 질문이고 의심이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끝없는 회의를 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언어를 배려한다는 건 말만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의 틈, 여백에도 마음을 쓴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백에도 의미가 있으니까요.

쉼보르스카는 시인에겐 모른다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모른다고 생각하면 열심히 자세히 보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새롭게 보게 되고 새로운 것을 보게 돼요. 새로운 발견, 새로운 표현이 나오는 거지요.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질문 자체를 낯선 말로 쓰인 책처럼 사랑하라”고 조언한 것도 비슷한 얘기입니다. 모른다는 마음,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는 마음, 이런 겸손과 호기심이야말로 시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조른다.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수명壽命을헐어서전당典當잡히나보다.나는그냥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문을열려고안열리는문을열려고. (이상-‘가정’)

별들은 어떻게 물을 구할까

전갈은 어째서 독을 품고

거북은 무엇을 생각할까

그늘이 사라지는 곳은 어디일까

빗방울은 무슨 노래를 부를까

새들은 어디에서 마지막을 맞을까

나뭇잎은 어째서 초록색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도 못되고

짐작하는 것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네루다, 「다문 입으로 파리가 들어온다」, 『에스트라바가리오』,1958)

요즘은 책들도 그렇고 시들도 위로와 공감을 앞세우면서 괜찮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사실 괜찮지 않잖아요. 그렇게 간단히 괜찮아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지요. 괜찮다고 말하는 건 하얀 거짓말 같아요. 우리는 괜찮다고 최면을 걸면서 살아요. 그런데 이 영화가 일깨우듯이, 시란 괜찮지 않음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미자는 거기서 시작해서, 어떻게 하면 내가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지, 우리가 다 괜찮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로 나아가요.

이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감옥

빠져나올 어떤 방법도 없네.

팔십 되면 모두 죽여 버리니

백성도 임금도 똑같은 신세.
(이언진)
‘아우아불우인’我友我不友人, 나는 나를 벗하지 남을 벗하지 않는다고 해요.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나를 믿고 나아간다는 거죠.

하지만 나 가난하여, 오로지 가진 것 꿈뿐이라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아 드리니

사뿐히 밟으라, 그대 내 꿈을 밟는 것이니.
(예이츠, ‘그는 하늘의 옷감을 바라노라’)

가능이 아니라 불가능을 꿈꾸는 것, 불가능의 힘을 믿는 것, 그래서 마지막까지 우리가 자기 안의 힘에 눈 뜨고 최선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200129 박서련

친구가 재미있다고 해서 읽어야지, 하다가 2년 만에야 읽었다. 어제 재미있는 책읽고 싶다고 했는데 소원성취. 와하하.
전반부는 독립운동x연애물, 후반부는 노동운동x연애물, 중반부는 물론 작품 전체 곳곳에 녹아 있는 페미니즘까지.
주룡과 전빈 커플은 근래 본 소설 속 커플 중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국가에 살기를 바랍네다.’
애국을 겸비한 사랑 고백이라니.ㅋㅋㅋ참신했다. 그렇게 함께 독립운동하던 동지이자 친구이자 배우자인, 사랑하는 전빈을 잃는 장면은 정말 슬픈데도 아름답게 그려놨다.
중후반부 가면서는 약간 지루해진 감은 있다. 그래도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마음대로 노인네 후처로 보내려는 가족을 떠나 스스로 힘으로 벌어 먹고 사는 고무공장 노동자로 꿋꿋이 서는 주룡의 모습이 씩씩해서 좋았다.
‘싸우려고 태어난 사람 같다.’
노동 운동의 동지로 만난 정달헌이 주룡을 처음 본 날 일기에 쓴 말이다. 둘은 인텔리와 직공이라는 놓인 위치의 차이 때문에 처음에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티격대기도 하지만, 점차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싸움을 하는 사람으로 상대방에게 마음을 쓰기 시작한다.

강주룡에 대해서는 독립운동가를 다룬 역사책에서 짧게 마주친 게 처음이었다. 실존 인물의 구체적인 생애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소설 속에서 마주한 강주룡이라는 인물은 투사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강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부당함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 이기고 싶은 사람. 여자이고 노동자이고 과부이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주저앉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한 사람. 오랜만에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고 존경스러운 캐릭터를 만났다. 박서련이라는 작가의 입담이 참 좋았다. 다음 소설도 궁금해진다.

고무공장 안에서의 아사농성과 을밀대 위에서의 고공농성. 분명 20세기 초반의 일인데 이런 비슷한 장면이 그간 시간 사이사이를 빼곡이 채우고 내가 사는 지금까지도 자꾸 반복되고 있다. 일한 만큼 대가를 받고 인간답게 일하고 싶었을 뿐인데 고통받고 심지어 죽기까지 한 노동자들이 너무 많다.
싸우고 죽어간 사람들 덕에 나와 배우자가 누리게 된 늘어난 출산휴가 기간, 육아휴직 급여, 최저 이상의 임금과 줄어든 법정 노동 시간 등의 혜택이 있었다. 그러나 법에 정해진 것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고 법에도 미비한 점이 아직도 많다.
우리집 두 사람 다 노동자인데 한 사람 직장은 법으로 인정받는 노조가 없고 또 한 사람은 회사에 노조가 (실질적으로)없기로 유명한 회사에 다닌다. 뭔가 웃기는 상황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본다. 어린 친구들이 노동자 권리와 노동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도록 도와야겠다. 휴직 전에 노동 인권 프로그램 진행하다 그리 성공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 좌절하지 말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시도해 봐야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식쟁이 2020-01-29 2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웬 전래동화를 읽으셨나 했더니 여성노동운동가에 관한 소설이로군요..하하;; ( 전래동화가 여기서 왜 나와.. ㅉㅉ 엉겹결에 땡쓰투해드림 ㅋ)

근데. 아늬.. 지금까지 고구려삼족오의 기운이 느껴지던 열반인님과 오늘 이 안경낀 도우넛과의 갭차이. 어쩔꺼냐구여 ㅋㅋㅋㅋ 아이고 🤣

반유행열반인 2020-01-30 06:09   좋아요 0 | URL
표지나 제목이 되게 그런 느낌이죠? 왠지 최무룡 생각도 나고...(어느 시대 사람이야 나...) 그런데 저는 재미있게 읽었어요. ㅎㅎㅎ
아이고 ㅋㅋㅋ졸지에 안경 낀 도우너ㅋㅋㅋㅋ이미지 쇄신해 보려고요. 그거 까마귀에다 다리 세 개 (아니면 다른 다리...)소리 듣던 거 어떻게 아셨어요?! 이러니 무님이 독서취향 친구 1위 하시지.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가보니 진짜 1위로 갱신되어 계셨어요.

syo 2020-01-29 2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참 이 책으로 떠들썩한 시기에 안 읽고 넘어갔더니 오늘날 이렇게 거대한 뽐뿌로 돌아오네요. 허어....

캐릭터 변신은 찬성입니다. 귀요미들은 세상의 빛이지요.

반유행열반인 2020-01-30 06:12   좋아요 0 | URL
이래놓고 syo님의 구미에 안 맞으면 원숭이 설욕전? 가는 거죠 ㅋㅋㅋ
저 근데 예전에 누가 알라딘에서 호기 프사한 거 보고 왠 할머니 사진을 해놨어? 한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네요...다시 까마귀 하고 싶어지네...

Comandante 2020-01-30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물해주고 싶은 책이네요^^ 좋은책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해요!

반유행열반인 2020-01-30 14:32   좋아요 0 | URL
좋은 선물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머니즘 - 웃음과 공감의 마음사회학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0128 김찬호

고등학교 때 같은 저자의 사회를 보는 논리를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었다. 지금 보면 또 어쩔런지는 모르겠다.
학부 졸업 때 엉성하게라도 논문을 써야 했는데, 그때 주제가 인터넷 유머사이트 이용자 분석이었다.
큰 아이 이름에 바다 해 대신 농담 해(해학할 때 그 한자)를 넣었다.
어디가면 남들을 웃기지 못해 난리다. 되게 내성적인데 어쩌다보니 이 한몸 불살라 광대짓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러니 이 책 제목에 오래 붙들렸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했다.
부제에 사회학이 붙었지만 학문적 깊이나 근거로 댄 부분이 많이 미약한 느낌이다. 그냥 적당히 가져다 붙인 듯한 서술이 대부분이었다.
지식, 정보 쪽에서 얻을 것이 없다면 웃음과 유머에 대한 에세이로서 마음을 울릴 만한 표현이 있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유머에 대한 책인데 놀랄 만큼 재미가 없었다. 읽다보면 어느새 책에서 도망쳐 딴짓 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굳이 책의 용도라면, 익히 다 알고있는 공동체 삶에서 유머의 가치를 한 번 더 설파하고, 웃겨야 할 때와 아닐 때, 웃어야 할 때와 웃어선 안 될 때, 남에게 상처주지 않고 인간다움을 훼손하지 않고 적절하게 유머를 구사하는 마음가짐을 돌아보는 정도이다. 별 내용 아닌 것을 길게 풀어놨다. 사실 웃음이나 유머에 대해 학문적 접근하는 게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 저자가 겪었을 어려움도 짐작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책의 기획과 구성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재미도 없고 유머를 잘 구사하는 방법 같은 건 가르쳐주지 않는다...일단 사람이 되고 봐야 유머도 먹힌다 정도의 원론만…

사례로 종종 나오는 우스갯소리들은 저자가 고민하고 골랐을 거라는 짐작은 되지만 잠시 피식할 뿐이고 어디 가서 써먹으면 안 되겠구나...역시 유머란 시의성과 순간에 맞는 번뜩임으로 던져야지 아재개그 열심히 수집해야 소용없다 하는 교훈만…
의외로 인용된 시들이 제일 읽을만 했다. ㅋㅋㅋ되게 따뜻한 시가 많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합성어인 유머니즘의 어원 중 유머보다는 휴머니즘에 방점이 크게 찍혔다. 인간을 생각하는 유머라는 출발점은 알겠는데 거기에 유머에 대한 게 잘 녹아들지 못한 점이 아쉽다.

보상심리로 정말 웃기는 책을 보고 싶어졌는데 추천 좀...아, 내 시간...누군가에겐 가치롭고 웃음 넘치는 책이겠지...나는 아니었다네… 날 좀 누가 웃겨다오...같이 웃읍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식쟁이 2020-01-29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벼운 마음으로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함 보시죠.
(안 웃기다구 친구 끊고 막 그러는거 아니죠?•_•)

반유행열반인 2020-01-29 07:14   좋아요 0 | URL
읽고 나서 재미없으면 여기 별점 테러 하는 리뷰 올려서 권한 사람 무안하게 하는 정도에요. (선례: 모이웃님이 권한 원숭이 자본론 읽고 어렵고 재미없네 웩 하고 까리뷰 올림ㅋㅋ) 무안해서 무님이 이웃언팔만 안 하시면 주욱 갑니다 ㅋㅋ

syo 2020-01-30 00:02   좋아요 1 | URL
원숭이 권한 모 이웃이 익독중 그 책 아는데, 그 책 재밌습니다. 최소한 독서가들한테는 통하는 개그코드. 그 책 재미없으면 독서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