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K-포엣 시리즈 12
양안다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0404 양안다.

우연히 예전에 소설 강의 듣던 문화센터 커리큘럼을 살피다 오, 양안다 시인이 이제 여기서 시를 가르치는구나, 나 다니던 때는 황인찬 시인이 강좌를 했었는데. 나의 원탑 투탑 시인들은 이래저래 열심이구나. 아주 잠시 시 강의를 듣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기초반은 평일 열한시야...그리고 나는 시를 써 본 적도 시를 쓸 생각도 없다. 그럼 다시 소설을? 하다가 아직은 쓰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걸...당장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싶어...아무 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걸 하고 싶어… 했다.

작년 4월에 나온 양안다의 산문집을 읽는 중인데, 5년 전 나온 시집이 어쩌다보니 끼어들었다. 시각장애인 복지관에 딸려 시각장애인 바리스타가 음료를 만들어주는 카페를 좋아한다. 음료가 싸고 맛있다. 작은 도서관이 연결되어 있는데, 점자 책도 제법 있고, 아르코 나눔 도서 선정된 책들도 비치되어 있다. 언젠가 그 책들을 훑다가 이 시집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그 시집을 다 읽을 때까지 딸기 말차 라떼를 쭉 빨아 먹는 것이다. 자주 보이는 어르신의 목소리를 벌써 익혔다. 다른 시각장애인들과 안부를 나누고 안 보인지 몇 년차인지, 복지관에서 무슨 활동을 하는지 (헬스도 하고, 드럼도 치고, 이렇게 친교활동도 하고) 서로 묻고 답한다. 의사소통을 목소리에만 의지해야 하는 사람들은 말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한다. 비언어적 단서가 없으니 어투에 담기는 표정도 조심스러울 것 같다. 그래서 다들 말을 유독 곱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좁은 공간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틀어두고는 있지만 말을 또렷하게 크게 하며 나누는 대화는 저절로 귀에 꽂힌다. 그러면서 시를 읽고 있으니 시인에게는 건성으로 읽었냐! 하고 미안할 일일까…

이 시집은 이전에 읽었던 최신 시집들보다 조금은 덜 난해했다. 주제도 일관되어서 연작 시 보는 느낌도 들었다. 망한 세상이라도 너, 라고 할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난 덤덤히 망함을 받아들일 것 같은데. 너, 가 망함에 너무 빠져 나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있다면 또 슬플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시들을 읽을 때는 눈뜨고코베인의 노래 두 곡이 떠올라서 한 번씩 들어봤다. 마음에 드는 시들을 통째로 아니면 조각으로 옮겨 적었다. 여기에다 산문집(시의적절 시리즈는 시도 섞여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하이브리드 시집 쯤 되겠네)까지 이달 안에 읽으면 나 양안다 팬 맞지 않냐…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 양안다의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이렇게 두 권만 사둔 채 안 읽고 있는데, 민음사에서 나온 밀란쿤데라의 ‘커튼’도 그렇게 묵히다가 할배 돌아가시고 나서 읽었는데 이건 뭐 내가 쟁인 시집 읽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내 곁에 너, 들이 끝까지 우리, 라고 말해준다면.

https://youtu.be/72gnaqACh6k
내년엔 납골묘를 만들어
여기저기 흩어진 묘들을
이장할 생각이다
그래야 너희들도 편하겠고
나도 죽기 전에
그것만은 하려고 한다

아버지 납골묘 아래에
내가 먼저 들어갈 건데요
(눈뜨고코베인 ‘납골묘’ 가사 중. 위의 영상에는 건강하던 시절의 내 친구가 드럼을 치고 있어서 조금 슬펐다.)

+밑줄 긋기
-이 밤을 사랑하는 건 신과 우리 뿐일 거야. 세계가 망가지는 건 우리와 무관한 일. 우리는 우리의 사랑과 서사에 전념하면서. 모든 게 기울어지고 있어. 어쩌면 너의 눈앞에서 춤추던 내가 쓰러질 수도. (‘영원한 밤’중)

-우리가 그곳으로 향할 때. 끝나지 않는 눈길을 걸으며. 어떤 빛을 발견하기 위해. 나는 생각했어. 우리에겐 집이 필요해. 낙하산과 에어백, 혹은 울타리라는 이름의 노래와 발목에 묶을 밧줄. 나는 누군가의 마음으로 추락하는 게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네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눈의 비명을 들었다. 우리는 하얗게 질리도록 걸었지. 숨쉴 수 있거나 숨을 수 있는 곳으로. 지평선을 향해 점으로 작아지면서. 무한해. 지평선은 닿을 수 없이 멀어지고. 우리는 무한한 발자국을 남기고 눈보라는 우리의 발자국을 지우잖아. 너의 입김은 어느 설국에서 부르는 노래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줄게. 너를 만나기 전의 일. 그러니까 내가 지금보다 작고 작은 영혼이었을 때. 그때 나의 마음은 그저 투명했다는 생각. 물을 만지면 푸른색에 잠기고 꽃밭을 걸으며 총천연색으로 물들기도 했지. 지금은 마음을 잘라 단면을 살펴보아도 핏빛이다. 그때 꾸었던 꿈과 지금의 꿈은 왜 다른 걸까.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듣고 있어?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때. 그곳에는 집, 낙하산과 에어백, 울타리라는 이름의 노래와 발목에 묶을 밧줄조차 없을지라도. 표현할 수 없는 공허. 혹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불. 갈증을 삼키려 퍼먹던 한 주먹의 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게. 듣고 있어? 아직 잠들기 이른 시간이야. 너는 두 눈을 옆으로 길게 찢으며. 웃었지. 나는 너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눈을 감지 말라고.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전문)

-다음엔 새가 되고 싶어. 너는 말했다. 새가 되면 가장 높은 나무만 골라 앉을 거야. 흔들리는 나무를 찾아오면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저 멀리 숲길을 걷는 아이들이 보였다. 문득 비가 쏟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말했다. 너는 불이 되어야 해. 불이 되어서 가장 높은 나무만 골라 태워야 해. 내가 널 찾지 못하도록.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다. 꿈에서 나는 타오르고 있었다. 불 속으로 날아드는 새가 보였다.
(’암전‘ 전문)

https://youtu.be/j0dI6Iz7_XA
세상은 너와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유로)
폐업을 선언하고 모두
사라져버렸네 (남았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세상엔 우리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옷을 벗기 시작했네
(…)
아주 오래된 약속
아주 오래된 맹세
너와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있었던
그 약속을 기억해볼까
아주 오래된 약속
아주 오래된 맹세
너와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있었던 그 이야길 반복해볼까
(눈뜨고코베인 ‘종말의 연인’ 가사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책 너무 두껍고 비싸서 이북 사려다가 전자도서관 있어서 빌렸는데 기간 내 다 읽기엔 방대하고... 그런데 책이 (번역이랑 소재랑 문장이랑 다) 재미있어서 아무래도 종이책을 사고 말 것 같다.... 발효 이야기 서두부터 막 공진화 나옴...과학 교양서 겸 레시피북 겸 하여간에 계속 재밌을 것 같다. (김치 나옴!!! ㅋㅋㅋ)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딸기홀릭 2025-04-02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어졌는데 900페이지 넘고 가격대가 ㅎㄷㄷ
도서관 검색 들어갑니다~^^

딸기홀릭 2025-04-02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고가라서 그런가 도서관에 없네요
열반님(제맘대로 줄였어요^^)처럼 전자도서관으로 ㄱㄱ

반유행열반인 2025-04-02 23:36   좋아요 1 | URL
설마 있나 했는데 강남구 전자도서관(상태 안 좋은 인터파크 도서관 앱을 깔아야 해요...)에 이게 있네? 하고 십분의 일도 안 되게 읽었습니다 ㅎㅎㅎ
 
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0329 김금희.

한 달에 네 권 읽는 정도의 학년 초라면, 감사해야 하는 걸까. 반 아이들의 몸싸움과, 아마도 올해 최초 열리게 될 자치위원회와, 격앙된 부모의 목소리로 학교 탓 교사 탓을 들으며 좀 더 잘 돌봤어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사과하던 나와, 그날의 모든 것을 곱씹으며 말실수한 것은 없을까, 나의 퇴직 도우미가 되어 버릴 또다른 실수는 없을까, 스쳐가는 얼굴들과 잔상들을 감은 눈에서 못 떨쳐 한동안 잠들지 못한 밤이 가까이 있었다.

그런 나날이라 가장 먼 곳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올해 여름 무렵, 남극은 겨울 한가운데일 무렵 어린이들에게 오세아니아와 극지방을 가르치게 될 거야, 그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굳이 이유 달 필요도 없는데 그렇게 실용주의인 척 스스로에게 말하며 남극에 살다 온 김금희의 산문집을 펼쳤다. 아니, 어쩌다 남극엘 가셨어요… 궁금한 마음이 컸고,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눈에 들어온 귀여운 일러스트와, 구절구절 문장문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 많아 안도하며(식물적 낙관을 읽다가 놔 버린 미안함 때문에 긴장했었음) 즐겁게 읽었다.

어딘가에 가고 싶은 마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게 부러웠다. 1학년 작은어린이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나의 꿈은 ( )입니다.’ 의 빈칸 채우기.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아직 앞으로의 삶이 까마득할 어린이들에게는 늘 가혹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완고한 어린이는 뭐가 되고 싶냐는 말에는 몰라요, 자기 얼굴을 그려야 하는 과제가 잦은데 자기가 그린 자기 얼굴은 실제랑 너무 달라 그 괴리감을 거의 고통으로 여기고 학교에서는 시간 내 과제를 안 하고 거부하는 아이로 찍힌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숙제가 되어버린 그리기 용지를 두고 윽박질러가며 어서 그리라고 다그치고 소리지르는 어미가 되어 버린 날들이다. 남의 어린이, 나의 어린이, 나야 말로 교차성의 총체가 아닐까 싶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뭐 하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 없어? 하고 꿈의 의미를 넓히니까 아이는 순순히 프랑스에 가고 싶다는 것을 꿈으로 적었다. 그리고 프랑스 국기 배색으로 색칠한 꿈기차에 몸을 싣고 에펠탑을 향해 가는 자신인지 엄마인지 모를 인간 하나를 겨우겨우 억지로 그려냈다.

프랑스에 가겠다, 는 건 농담처럼 친할머니댁 다녀오는 길에 이제 집에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로 가자, 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몇 년 전부터 마음에 품은 말이었을 것이다. 이건 꿈이니까 다 커서 스스로 이루게 해야 할지, 심어 놓은 말에 어미가 질 책임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더이상 가고 싶은 곳이랄게 없어졌다. 떠나고 싶은 곳만 간절하게 밀어냈다. 그게 나의 패인일지도 모른다.

김금희 소설가는 남극이 배경인 소설을 구상했고, 직접 남극에 가서 둘러보고 싶었고, 몇 년을 도전한 끝에 취재원으로 연재 기사를 쓰는 구실로 꿈을 이루었다. 세종기지에 머무르며 만난 연구자, 월동대원, 셰프,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이니셜이나 별명으로 표기된 인물들을 다 머릿속에 그려내거나 구별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가장 고독할 것 같은 땅은 어쩌면 가장 사람들과 밀착하고 나홀로는 공동체를 떠나면 그냥 얼어죽어버릴 개체라는 걸 일깨우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남극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고, 대화를 나누거나 일을 돕고, 보살핌을 받고, 펭귄과 해표와 고래를 보고, 죽을 고생으로 백두봉에 오르고, 온갖 유빙을 구경하고, 그걸 여기 남극과는 먼 사람들에게 가능한한 세세하게 전하려고 하는 사람이 작가로구나, 그럼 난 시켜준대도 못할지도 모르겠네… 읽는 내내 김금희 소설가의 친화력에 감탄했다. 사실 다시 시작하는 지점에서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의 이미지를 덧입고 다니느라 보름 만에 번아웃 지경에 이를 듯했던 나를 생각하면… 나도 어딘가 던져지면 살아남고 얼어죽지 않으려고 그렇게 사회성 있는 척 지낼지도 모르지. 그런데 김금희 소설가는 그런 생활들을 가장 나답게 보낸 순간이라고 하는 걸 보니 영 다른 삶이다.

가장 고립되고 싶었던 내가 남의 어린이들에게는 상호의존성, 상호연결, 이런 말을 내뱉는 순간 멈칫하는 마음이 있다. 이름이 불리는 걸 들으면 어색하면서도 내 존재가 선명해지는 느낌이 든다. 극지 과학자들이 하는 많은 일은 이름 붙이기, 존재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 사람들은 이끼가 밟힐까, 놓친 비닐봉지가 나동그라져 다닐까, 원래는 그 땅에 없던 생명체가 자신을 매개로 옮겨질까, 조심스럽게 종종 거리고 있다고, 읽지 않았으면 모를 이야기들을 들려 주어서 좋은 독서였다.

책 가운데 김금희 소설가가 찍은 남극 풍광 사진과 손글씨 엽서가 꽂혀 있었다. 남극의 유빙과 펭귄과 자갈과 바다 잔물결과 노을 혹은 여명과 능선이 보는 순간 마음에 들어 가까이에 놓았다. 자주 눈길이 거기에 닿는다.

+밑줄 긋기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유빙이 펭귄이나 새 모양이라는 거죠. 월동 대원들끼리 남극의 연구 주제라고 얘기해요.”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얼음들은 신기하게도 S자 모양의 유선형 몸통을 한 오리나 부리가 뾰족한 펭귄처럼 보였다. 미지의 것을 익숙한 형태로 환원시켜 인지하는 인간들의 습관일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월동 천사는 그럴 수도 있을 거예요 하고는 이전 월동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어느 바람이 심한 겨울날 눈발이 휘몰아치는 세종 기지 선착장에 누군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고 한다. 하얗게 얼어붙은 맥스웰만을 바라보며 그는 기지를 등지고 있었다. 기지 대원들은 모두 실내에 있는데 대체 누가 저렇게 아슬아슬하게 서 있을까. 위험하다 싶어 선착장으로 달려가니…... 그는 킹펭귄이었다.
현존하는 펭귄 가운데 두 번째로 큰 킹펭귄은 남대서양 사우스조지아섬에 무리를 이뤄 살아서 세종 기지에 나타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에게는 각자의 사정과 사연이 있을 터이므로 그 펭귄은 남위 62도13분까지 내려왔고 세종 기지 선착장 위에서 ‘펭생’의 무게를 짊어진 지친 뒷모습을 기지 대원들에게 들켰다. (101-103)

-“나 사실 네 책상 위의 펭귄 인형을 봤어.”
나는 아주 귀엽더라며 칭찬했다.
”아, 그는 내 친구야. 모든 여행에 함께 다녀. 사람들한테 들으니 너는 매우 매우 매우 유명한 소설가라지?“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손까지 내저었다.
“한국의 조앤 롤링 아니야?” (120-121, 남극에서 구름 씨와 대화 나누다 조앤 롤링 된 김금희 언니)

-우리의 바람과 달리 눈발은 더 심해졌고 군데군데 음영만 다른 회색빛 세상이던 해표 마을에는 눈송이들의 반짝임이 두드러졌다. 촬영을 못 하게 되나 불안했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은 느긋해 보였다. 날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남극에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 조용한 순응을 다들 잘 아는 듯했다. (137)

-정작 나는 추워 덜덜 떨고 있었지만 마음은 녹듯이 포근해졌다. 일면 슬퍼지기도 했는데 너무 순정한 것, 아름다운 것, 들끓는 자아 따위와는 무관한 자연 자체의 풍경과 맞닥뜨릴 때 느끼는 기이한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남극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나는 실제 내 삶은 이곳과 얼마나 다른가를 동시에 감각했다.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남극이 인간이 인간처럼 살 수 있고 해표가 해표처럼 살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공간이었다. (138)

-아쉬운 마음을 표하고 식당에서 나오니 마치 그 마음을 헤아리듯 특별한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기지 안으로 불쑥 들어온 그는 턱끈펭귄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해?”
내가 물었지만 멋진 붓꼬리도 없는 인간쯤은 무시한 채 턱끈펭귄은 보트동 앞을 지나 기지 앞마당까지 들어섰다.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 싶어 얼른 막아섰다.
“그만 가, 이쪽은 바다가 아니거든.”
그러자 턱끈펭귄은 앞날개를 사선으로 뻗으며 소리를 꿱 질렀다. 부리도 날개도 꼬리도 없는 주제에 감히 앞을 가로막았다고 불쾌해하는 듯했다. (166-167)

-남극행을 준비할 때 사실 ‘죽음’을 목격할까 봐 두려웠다. 대자연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먹고 먹힘의 문제, 예를 들어 새끼 펭귄을 잡아먹는 남극도둑갈매기를 보면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싶은 걱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착한 때는 한여름, 새끼 펭귄들은 그런 갈매기들에 어느 정도 대항할 만큼 자라 있었고 이상하리만치 사냥의 장면은 펼쳐지지 않았다. (176, 이 부분을 읽기 전날에 딱, 예전에 아기 동물을 갈매기가 막 뜯어 먹고 얘는 괴로워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본 걸 떠올리며 그게 아기 펭귄이었나, 거북이었나, 아마도 펭귄이지, 했는데 김금희 언니도 같은 영상을 봤던 모양이다.)

-“혹시 불편해하면 어떡해요, 운동하는데…...”
다가가고 싶지만 얼마큼 다가가야 할지 몰라 주저하는 성격은 남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배우 김수현을 닮은 LB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편해하긴요, 다들 환영할 거예요” 하며 내가 남극에서 들은 가장 잊을 수 없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환영받지 못하면 어때요, 그것도 배워가는 거잖아요.” (178, 이 구절을 읽으며, 요즘의 뉴스 헤드라인 볼 때마다 LB를 떠올리고 자책하다가 또 너무 자책하지 말자, 하는 마음을 망상해보았다.)

-풍광 맛집이라는 ‘전망대’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은 자갈밭이었다. 바닷가 자갈들은 둥글기라도 하지 이곳 빙퇴석들은 날카로웠다. 그래도 오른 보람이 있어 마침내 산 중턱에 펼쳐진 평지에 이르렀다. 마리안 소만의 경이로운 풍경이 보였다. 마리안 소만은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U자 모양이 된 거대한 골짜기로 그 일부는 드러나 있지만 대부분 바닷물에 잠긴 피오르 지형이다. 급경사를 이루고 맥스웰만과 이어져 있다. (221, 오세아니아와 극지방 단원 나갈 무렵 이 부분은 기회 되면 읽어줘야지, 하고 옮겨 적었다. 직접 가본 사람의 묘사 듣고 사진 보면 더 생생할 것 같다.)

-절반쯤 내려왔을 즈음 월동 천사가 “여기 그라운드 서클이 있네요!” 하며 땅을 가리켰다. ‘구조토’라 불리는 그 독특한 지형은 얼음의 동결과 융해가 반복되면서 큰 자갈이 바깥 테두리를 이루고 작고 미세한 돌들이 안으로 모이는 극지방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마치 벌집의 육각형 모양처럼도 느껴졌다. 신기하고 아름다워 한참을 구경했다. (230, 위와 같은 이유로 적어둠)

-나는 남극에서 그냥 ‘나’로 머물러 있는 것이 좋았다. 동료 작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근처에 작가가 없어서 좋았고(?) 예민하게 일상을 대하지 않고 무던해지는 마음이 좋았다. 세밀하게 세공하던 일상을 아주 굵은 붓으로 쓱쓱 살아내는 기분이었다. 원고 작업보다는 내 발과 내 손과 내 눈으로 행하는 경험들이 우선이었다. (255)

-조디악이 달릴수록 그들의 얼굴이 멀어졌고 나중에는 세종 기지도 미니어처처럼 아주 작아졌다. 그 대신 기지 뒤의 백두봉이, 마리안 소만이, 동이 터오는 하늘이, 그러니까 남극의 거대한 자연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치 두 달간 펼쳐졌던 내 일지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똑똑히 보라는 듯. 점점 붉어지는 하늘과 그 빛으로 도리어 아주 무겁게 어두워졌던 산등성이는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았다. 압도적인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과 평화, 인간종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만들어냈던 꿈결 같던 일상.
그것을 간직한 채 나는 여기로 돌아왔다. (2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년 전이라고, 처음 읽은 게 10살 쯤이라고 해놓고는 설마 열 살이...했는데 만 10살이니 맞긴 맞았다. 1994년에 나온 가나출판사의 (아마도 중역, 번역자도 안 밝힌 기획실의 옮김) 데미안을 알라딘 개인 중고 검색해보니 1500원쯤에 팔고 있었다. 

 그렇지만 난 그 책을 살 필요가 없었다. 책장 구석구석을 뒤지면, 다 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부터 사서 읽은 책은 버리지 않고 하여간에 다, 있다. 

 이 표지를 직접 보고 싶었다. 속 표지를 보니 나영미라는 분이 표지 그림과 삽화를 그리신 모양이었다. 아마도 이 얼굴은 싱클레어인 동시에 데미안이고 에바부인이거나 베아트리스 일 수도 있겠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나 정성을 보면 적어도 그림 맡으신 화가님은 소설 데미안을 제법 진지하게 읽으시고 또 좋아하셨을 것 같다.  

 책은 어린이책이라고 지나치게 축약하지도 않고 그냥 이번에 읽은 책이나 분량은 비슷했다. 맨 뒤에 독후감 쓰는 법 같은 사족 빼면 231쪽, 열린책들 판형(길쭉이인가) 272쪽이니 뭐. 사실 야한 것도 없고 잔인한 장면도 없고 (재미도 없고) 아이들이 못 알아 먹을 뿐이지 굳이 삭제판 무삭제판 만들 이유도 없겠다고 이번에 읽고 생각했다. 심지어 다 읽고 나니 그냥 아는 내용 맞는 것 같아... 

1994년 데미안 가나출판사판 4000원.(현재 중고가 1500원...) 2014년 데미안 열린책들판 2025년 현재 알라딘가 9720원. 책값은 내내 내려갔다고 봐야 맞겠다. 

이 시절의 독후감 노트는 찾지 못했다. 다 있다며! 독후감을 썼다는 게 거짓 기억일 수도 있겠다. 1995년의 나는 어두웠다. 내 가정이 어두웠다. 집에 조현병 환자가 강제 입원을 당했다. 자살시도도 했다. 이제 그 사람과는 만나지 않는다. 데미안의 아버지는 그러고보니 나오지 않는 군.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어머니를 사랑한다. 그걸 알고 있었니? 당연하지! 하는 둘의 대화는 좀 유쾌하다 싶었다. 그냥 그 때 애기인 나는 알아 듣지 못할 이야기를 하나 읽고 와 이런 간지나는 나는 멋져, 하고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았을까. 자존감은 높으면서도 낮던 시절. 
 감흥도 없고 이렇게 우연히 뒤적거려야지나 찾게 될 이 냄새나고 먼지 쌓인 종이더미들을 언제까지 지고 갈 건지 에휴... 내가 죽으면 자식들이 폐지처리장에 넘겨 책들에게 안식을 줄런지 또 (귀찮아서) 이고지고 할런지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5-03-24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미 알을 깨고 나온 듯한 모습이네요.

반유행열반인 2025-03-25 19:42   좋아요 0 | URL
표지 모습을 말씀하신 걸까요? ㅎㅎ사실 끝까지 읽어도 싱클레어가 득도를 했는지 어른이 된 건지 데미안 같이 된 건지 모르겠더라구요. 데미안 닮게 되는 게 진정한 나 자신이 된다고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전자책] 돌봄의 사회학 - 당사자 주권의 복지사회로
우에노 지즈코 지음, 조승미.이혜진.공영주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같은 병원 간호병동 입원만 해 봤고, 엄마 지난 번 수술에 보호자 입실 금지인 간호 병동이어서 상주 보호자 역할은 처음이다.

어제 퇴원 예정이라고 몇 달 전 진료부터 수술 직후까지 확언하던 의사 선생님이 오프날이라고 (사정도 있고 많이 힘들겠지만) 퇴원 할 날 병원에 한 번도 안 나와서 퇴원 오더를 못 받은 게 문제지만... 환자는 회복됐는데 병원에 일박 더 갇힌 상황... (큰 문제로군 입원비도 하루 더 내고 말이야)
머리 맡 냉장고는 웅웅 우우우웅 돌고(귀마개가 날 살렸다) 간병인 침대란 바닥이 왠지 더 나을 듯한, 그 신화 속 침대(짧고 큰 고통이겠지 이건 길고 잘은...)보다 불편할...

이제 아침이길! 하고 시계를 보면 세시, 깜빡 네시반, 그러고는 누워도 잠들 수 없었다. 다섯 시 반에 벌떡. 세수.

어제 마침 ‘돌봄의 사회학’ 한국어판 서문이랑 용어 해설만 읽은 터이지만(읽는 데 몇 년은 걸릴 듯), 돌봄 노동자들 처우를 잘 알려주는 구절에 밑줄을 쳤다. 그리고나서 몸소 그걸 체험... 간병노동자들과 긴 와병의 가족 돌보는 사람들은 매일 이 침대에서 잔다는 거잖아... 나쁘다. 내일은 진짜 퇴원시켜 주시오... 내보내 줘...

-지금껏 정책 설계자들은 돌봄이 아무나 할 수 있는 비숙련 노동이며 더욱이 ‘여자가 집에서 해오던 공짜 노동’이라고 여겨왔다. 돌봄노동의 싼 임금은 여태껏 정책 설계자들이 돌봄을 받는 고령자의 처우가 그만하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쓸모없어진 노인은 사회의 짐’이라고 보는 노인차별 의식이 그 뒤에 숨어 있다. 성차별과 연령차별이 겹치는 영역이 바로 돌봄에서 드러난다. <돌봄의 사회학> (우에노 지즈코)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