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리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0709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엄마친구의 아들이 엄마친구랑 사귀다가 결혼하고도 엄마친구를 못 잊고 방황하고 엄마친구는 한참 여행 끝에 돌아와서 찾아온 엄마친구 아들이랑 하룻밤을 더 보내고 그런데 엄마친구 아들이 심봉사처럼 눈이 트여서 아 엄마친구 늙었네 하는 걸 엄마친구도 알아버려서 헤어지는 이야기이다.

ㅋㅋㅋㅋㅋㅋㅋ (아 엄마친구 아들 아니고 그냥 엄마아들이다...)

줄거리만 써 놓으면 쌈마이인데 그걸 200페이지에 걸쳐 섬세한 행동 묘사, 심리 묘사, 뭐 그렇게 그려 놓은 건 인정. 처음 읽는 콜레트이자 마지막 콜레트가 될 예감도 인정. 어리광부리고 낳지 않은 어린애 대용처럼 보살피면서 밀프물(웩) 찍다가, 부재시에 갈망하던 건 그냥 환상이고, 그새 자기가 사랑하던 사람은 사라지고 더 나이들어서 현타왔어요, 그래 그럼 가라 보내줄게 쿨내- 이런 것도 사랑이겠지. 그렇지만 그런 사랑은 딱히 애틋하지도 지켜보는게 설레지도 그렇다고 한심하지도 않다. 참고 읽은 나를 칭찬할지, 이새끼야 남들 본다고 표지 예쁘다고 녹색광선 책 막 사지 말랬지 하고 혼낼지 잘 모르겠다. 셰리(쉐리)의 향기는 그닥 오래가지 않았고, 심지어 동명의 섬유유연제는 제조사가 수많은 사람들을 숨막혀 죽게 한 뒤 단종되었다. 팔영감님 말 들을 걸….삼별 반이랬는데 난 내림해서 별 셋!

+밑줄 긋기
-“나가! 꼴도 보기 싫어! 넌 날 결코 사랑한 적이 없어! 넌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에 대해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아! 넌 날 상처주고, 모욕했어, 넌 추잡해, 넌...넌...넌 오직 그 늙은 여자 생각뿐이야! 취향이 아주 병적이고, 퇴행적이고, 또, 또...넌 날 사랑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대체 넌 왜, 왜 나랑 결혼한 거니? 넌...넌…”(107, 레아에 이입한 나이 든 여자들의 작은 기쁨을 위해 어린 에드메를 이렇게 절망하게 해야 했니 작가여…)

-“저는 놀랍지도 않네요. 이혼이 결혼보다 더 즐거울 걸요. 결혼은 모두가 악마를 짊어지고 사는 거잖아요…”(146, 레아의 도우미 로즈의 말이 좀 슬프다.)

-그녀는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그녀를 늙은이들로부터 보호해주었던 스쳐지나간 관계들과 연인들을 소환했고 자신이 지난 삼십 년 동안 빛나고 푸르른 청춘들이나 연약한 청년들에게 순수하고, 당당하고, 헌신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젊은 피들이 외려 나한테 감사해야지! 대체 얼마나 많은 그들이 내 덕에 건강하고 아름다워지고, 슬플 땐 건전하게 이겨내고, 감기에 걸리면 레드풀로 회복하고, 무성의하지 않고 단조롭지 않게 사랑을 나누는 습관까지 배게 된 거냐고?...그런데 난 이제 침대에서 허전하지 않기 위해 만날 수 있는 남자가 나이 든…’
그녀는 망설이다가 위풍당당하게 몰지각하기로 결정했다.
‘나이 든 사십 대 정도?’ (148-149, 마흔 아홉, 스물 다섯, 열 여덟, 혼란하다 혼란해. 나는 더 늙네 젊네 안 따질 같은 속도의 또래가 좋아요. 젊은이아님안돼병은 무섭네요.)

-한유한 사람들의 번다한 삶에 합류하기 위한 모종의 시도들은 그녀에게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피로를 안겼다.
‘내가 왜 이러지?’ (150, 이 문장들에서 나도 피로해졌다. 한국말을 왜 이렇게 써…)

-‘나의 가엾은 셰리...생각하면 재미있어, 너는 쇠락한 늙은 연인을 잃음으로서, 나는 스캔들 급의 젊은 연인을 잃음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소유했던 세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것을 잃었으니 말이야…’(161, 본문 그대로 옮겼는데 이거 맞냐…-으로서, -으로서… 하아…)

-“(…)나의 누누, 우리가 만나기 시작했을 때 당신은 내가 알던 멋진 사람, 내가 사랑한 멋진 사람이었어. 혹여 우리가 끝내야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당신이 다른 여자들과 똑같아져야 하는 거야?...” (193, 끝까지 추해지진 말자는 말을 헤어질 결심한 놈이 하면 어쩌는 거냐...잔인해.)

-”그래서 누누, 난 그렇게 몇 달간 살다가 여기 온 거야, 그리고…“
그는 하마터면 내뱉을 뻔했던 말에 움찔하며 말을 멈추었다. 레아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여기 와서 늙은 여자를 발견한 거구나.“ (195, 가혹한 자아 인식…)

-“(….)용서해, 셰리. 나는 너를 마치 우리 둘 다 한 시간 뒤에 죽기라도 할 것처럼 사랑했어. 난 너보다 24년 먼저 태어났으니까 어느 정도 운명이 정해진 셈인데, 내 운명에 널 끌어들인 거야…” (198, 나보다 24년 후에 태어난 애들은 이제 만 16세네...징그러워!!!!)

-상반신은 벌거벗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유혹적이어서 레아는 그에게 뻗으려는 두 손을 서로 깍지 :끼고 있어야 했다. 그는 아마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는 듯 피하지 않았다. 건물 꼭대기 층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이 추락 중에 느낄 수 있는 어리석은 희망이 그들 사이에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199)

+표지랑 내용이랑 씽크 너무 안 맞음...저기 저런 뽀송한 언니 말고 50살 언니를 데려다 놨어야 한다...그럼 책 안 팔렸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2. 부모와 다른 아이들 1,2-1권은 직장에서 사 준대서 신나서 비싼 걸 지르고, 2권은 중고 구매로 조금 저렴하게 마련했다. 1권 조금 보기 시작했는데 저자랑 결이 맞을 것 같다고(일곱살 때 학교에서 카이막이랑 카다이프 빵이 제일 좋아요 하고 깝치는 거 보고) 생각함.

3. 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실버타운 씨의 책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 읽고 이전에 빌려 읽은 이 책도 왠지 소장하고 싶어, 하고 중고로 6700원에 착하게 업어왔는데 책상태 괜찮아서 햄복...

4. 바이털 퀘스천-닉 레인 아저씨 컬렉션 추가(있는 거 부터 읽기나 해). 알라딘이 적립금 주셔서 오 땡큐 하고 우주점에서 다 털었다. 일단 과학책 요거랑

5.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비교적 신간이라 일단 사 봤다. 화학에 미련 못 버리는 나놈 과학책 이거도 우주점

6. 세상의 모든 우아함에 대하여-발효책에 인용된 조지프 젱킨스의 ‘인간 배설물 핸드북’은 안타깝게도 번역되어 있지 않았다... 아쉽지만 다른 젱킨스라도, 하고서 제시카 커윈 젱킨스(W매거진 에디터였댔나)의 이 책을 이것도 아마도 우주점에서 챙겼는데, 책 겉지 벗기면 속알맹이 빨간게 제법 우아해 보여서 내용이 어떻건 간에 일단 예쁘니까 봐주기로 했다.

7. 조선 후기 성 소화 선집-조상의 지혜와 창의성을 엿보기 위해 (그냥 대충 야한 이야기 모음 같은데 문학동네에서 나왔대 문학이네 문학은 원래 야한 것)한 권 마련했다. 으쓱 이렇게 우주점 네 권으로 상받은 거 탈탈 털고 오히려 더 보태고...

8. 쌍전-삼국지랑 수호전은 고우영 만화로만 봐 놓고선 일단 믿고 읽는 글항아리, 5800원이라 착해, 하고 은촌씨 책이랑 같이 샀다.

9. 굶주림-이건 뭔가 집에 있나 이미 사놨나 했는데 없어서 2400원이라 같이 업어옴.

10. 백년 동안의 고독-민음사 백년의 고독1,2랑 동서문화사의 백년의 고독/호밀밭의 파수꾼(신기하게도 묶어둠...1+1인가) 이렇게 두 판형 가지고 있는데 안정효 번역판 이 책을 무려 1400원에 파는 것이다...그럼 세 버전 쯤 소유해도 인정이지... 그래서 같은 책 세 종류로 갖게 되었다.

11, 12, 13. 캘리번과 마녀, 여름 스피드, 시절과 기분-이제는 공부한다고 책 안 읽는 s님 서재 털어서 안 볼 거면 내놔, 하고 훔쳐왔다. 여름 스피드는 전자책 있고 시절과 기분은 생각해보니 원래 내 거다. 캘리번과 마녀는 템페스트는 읽었는데 맨날 제목만 실컷 보고 저 책은 안 읽어 봤으니 소장이라도 해야지 하고 모셔옴.

책더미에 깔려 죽을 것 같은 37.7도의 신나는 여름. 당근마켓에서 4킬로짜리 덤벨 두 개도 구해서 일요일 땡볕에 이고지고 왔는데...(물욕 물욕 하다하다 종이더미에 쇳덩이까지 모으는 놈) 책더미까지 우르르 도착해서... 집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 읽고 죽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 - 문학.신화.역사를 관통하는 조너선 실버타운의 실버과학에세이
조너선 실버타운 지음, 노승영 옮김 / 서해문집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20250706 조너선 실버타운.


독후감 제목은 책의 세번째 장 이름을 빌렸다. 저자는 그 말을 앨프리드 로드 테니슨의 ’티토노스‘에서 빌렸다.
’고니도 여러 여름 뒤에는 죽는다. 나만 홀로 잔인한 불사의 운명으로 타들어 간다.’(56)
한국어판 제목을 보면 노화와 죽음에 대한 책 같지만, 그게 다는 아니고, 인간 외의 동식물 미생물 온갖 것들의 수명과 생존율, 사망률 다룬 연구를 소개한다. 수명과 나이 먹음을 동치로 봐야 할 지는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좀 헷갈리는데. 인간의 수명 포함 건강, 관계, 행복 등 생애에 대한 방대한 연구는 ‘나는 몇 살까지 살까’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벌써 10년도 더 전에 읽었다는 군…
https://m.blog.naver.com/natf/221297906690

책의 원제는 길고 짧음(장수와 단명?)-수명과 노화의 과학이다. 번역 제목이 멋있긴 한데 좀 덜 멋진 원제가 책 내용을 더 잘 반영하고 있는 느낌이다. 같은 저자, 같은 번역가의 ’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를 오래 전이지만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절판인 이 책을 구해서 읽게 되었다. (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도 다시 읽어보려고 중고 주문 해 뒀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과하지 않게 재치를 섞어가며 문학과 과학을 비벼가지고 삶의 이어짐과 끊김, 종족의 번영, 진화, 이런 걸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책이었다. 뭐 다 이해하진 못했겠지만 생명과학 4등급 맞은 빡대가리도 읽을 만한 교양 에세이니까, 누가 읽어도 그럭저럭 재미있을 거예요.

지난 겨울에 딱 40년을 살았고, 운이 억세게 좋으면 이 두 배나 세 배쯤 사는 개체가 될 텐데, 길게 사는 건 큰 관심은 없지만, 건강하고 안 아프고 덜 불행하게 남은 삶 사는 건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 같다. 이 책도 어떻게 더 살 건지,가 아니고 그래서 어떻게 잘 살 건데? 하는 물음을 이어가며 끝맺는데, 그게 정답이 없는 것 같아서 내내 숙제하듯 어떻게 잘 살지 고민하다 죽는 게 필멸자의 삶이지 싶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건가? 하고 자꾸만 돌아보는 것도 포함해서.

+밑줄 긋기
-영국 학생들은 자기네 증조부모가 달달 외운 군주의 이름과 연대를 더는 암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1902년에 한 농사꾼이 새 감자 품종에 에드워드 7세의 이름을 붙여 그를 기렸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영국에서 에드워드 7세는 감자다. 감자가 왕보다 오래 산다. 감자의 모든 덩이줄기는 원래 감자와 유전적으로 똑같으며, 모든 감자 수확물은 앞선 수확물에서 남겨둔 덩이줄기에서 자라므로 원조 에드워드 왕 감자는 아직도 살아서 해마다 번식하는 셈이다. 아이다호 감자는 이보다 더 오래된 품종으로, 맥도널드에서 감자튀김을 만드는 데 쓴다. 이 감자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오래 살 것이다. (22-23, 불멸의 감자.)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 구역에서 추모받는 사람들을 전부 그 자리에 되살리면 그곳의 상당 부분은 결핵 병동이 될 것이다. (26)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일까? 흐르는 모래시계
아침 해에 걷히는 안개
부산하지만 반복되는 꿈
길이는 얼마나 될까? 순간의 멈춤, 순간의 생각
그렇다면 행복은? 물줄기 위 거품
잡으려 하면 사라져버리는 (32, 존 클레어 ‘삶이란 무엇일까’인용)

-여러분 몸에 들어 있는 세포의 수는 여러분의 몸을 집으로 삼은 세균과 균류 세포의 수에 비하면 10분의 1밖에 안 된다.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은 <나 자신의 노래>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크다...나는 다량의 것을 품고 있다.” 자기 말이 진짜인 줄은 몰랐겠지만. (35)

-세포는 무단 질주를 막는 수단이 자동차보다 많지만 세포분열의 결과로 만들어진 세포가 수십억 개나 되기 때문에, 세포 하나가 암에 걸릴 확률은 샌프란시스코 같은 도시 1000곳에서 가파른 도로에 자동차가 가득 주차했는데 그중 한 대가 미끄러질 확률보다 크다. 그렇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암 때문에 죽지는 않더라도) 몸에 종양을 지닌 채 죽는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세포분열의 무지막지한 힘과 맞서고 있다.
(…) 다세포동물에게서 추출한 세포가 죽기 전까지 분열하는 횟수에는 타고난 제약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랙스의 유두종에서 채취한 세포는 의학 교과서를 읽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실험실에서 조건을 맞춰줬더니 세포는 분열하고 분열하고 또 분열했다.
(38, 이 작가님의 강점이자 내가 치인 포인트는 이렇게 과학적 사실, 지식을 참신하고 찰진 비유로 잘 빚어놨다는 것이다. 이걸 또 번역가님이 말맛 살려 잘 옮겨놔서 책 선택의 기준이 누구 번역이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나무가 숲보다 오래될 수 있단 말인가? 매우 빨리 자라는 열대 나무 중에는 몇백 년이 아니라 고작 몇십 년을 사는 것도 있다. 하지만 증거로 보건대 아마존 열대우림과 그 밖의 열대림에는 수천 년을 사는 나무가 있으며 가장 나이 든 나무는 가장 느리게 생장하는 나무임이 입증되었다. (107, 대기만성인지는 몰라도 노목만성이로군요…)

-이 외로운 나무여! 너무 느리게 자라 썩지 않는
산 것. (110,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구. 주목은 하도 느리게 자라 ‘나머지 모든 생물의 나이는 버드나무 묘목(1년)보다는 많고 주목보다는 적다‘고 한다.)

-남성과 여성의 노화 속도는 같지만, 여성은 기준 또는 최초 사망률이 남성보다 낮다. 전형적인 남성의 말투로 우는소리를 하자면, “여자는 고통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남자는 죽기 위해 태어난다.” (139, 요즘 진격의 거인 파이널 파트2를 보고 있는데 적어도 그 만화 안에서는 비슷한 모습이 그려진다. 시조 여성 거인은 노예처럼 착취당하고 고통 받고(재생산도 그 두 가지에 다 일조함), (주로) 남성인 전사/병사들은 다 무기에 맞거나 거인 손에 터지거나 밟히거나 먹혀서 죽는다.)

-진화생물학자 존 메이너드 스미스는 이 요점을 자신의 학생들에게 근사하게 설명했다. 그는 시력이 형편없어서 수정 렌즈를 끼운 안경을 썼다. 시력 때문에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했는데, 이를 두고 스미스는 나쁜 시력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여 다윈주의적 적합도를 높였다고 농담했다.
(…)(수정 안경을 낀) 스미스는 50년도 더 전에 난소가 없는 돌연변이 초파리가 야생종보다 훨씬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수명 단축이 번식의 대가임을 입증했다. 나중에 초파리와 예쁜꼬마선충을 실험했더니, 생식세포가 화학 신호를 내보내어 수명을 좌우하는 분자 경로의 유전자 스위치를 켜고 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흥미롭게도, 동물원 동물은 왕족처럼 귀한 대접을 받으며 이렇게 호강하는 상태에서는 야생 개체군과 달리 생식이 암컷의 수명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환경이 이토록 중요하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140-141, 번식과 생존의 상반 관계를 설명하면서. 무자식이 상팔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인간까진 아니지만 조그만 생물들에게는 해당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들. 그러나 환경이 나아지면 번식이 생존 가능성을 갉아먹는 일은 훨씬 줄어든다. 그러니까 어쩌라고...자연 상태에서는 번식과 장수가 트레이드오프지만 생활 수준과 의료 기술이 좋아진 오늘날의 인간은 환경에 적응한 결과물이니까 저출산이라고 이 세대가 딱히 더 살고 그러지 않는다는 추론은 하겠는데.)

-다회번식자(여러해살이)가 단회번식(한해살이)을 이기려면 단회번식 개체가 낳는 자식 수에 대한 다회번식 개체가 낳는 자식 수의 비율에다 다회번식 부모가 번식 뒤에 살아남는 확률을 더한 숫자가 1보다 커야 한다. 이 법칙에 따르면 단회번식을 이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부모가 언제나 번식 뒤에 살아남는-즉, 생존확률=1-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 번식에는 늘 비용이 따르는 것이 생물학적 현실이며, 부모의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단회번식이 이기는 방법은 부모 생존의 정상적 확률을 상쇄할 수 있도록 다회번식 경쟁자보다 충분히 많은 자식을 낳는 것이다. 정상적 부모 생존율이 낮을 수록 단회번식이 진화하기 쉬워진다.
(154, 그러니까 나랑 붉은등우단털파리랑 겨루면 2(내 자녀 수)/(대략 벌레가 낳은 알)400+1(나 번식 후 안 죽음. 생존확률1)>1이면 되는데 내가 이겼다!!! 그렇지만 겨우 3-5일 사랑하다 죽는 붉은등우단털파리는 조금 불쌍해...)

-태평양연어는 여러 종으로 이뤄지는데, 바다에서 생애의 절반을 보내는 동안 솔로로 살면서 먹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이를테면 은연어는 바다에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먹이 잡아먹으러 가야지’라는 생각만 하면서 1년 반을 보낸 뒤에 살이 찌고 번식에 알맞은 몸이 된다. 그러면 해안으로 헤엄쳐 강으로 들어가는데, 아무 강에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각자 자기가 태어난 강을 찾아 상류로 올라가서는 수심이 얕고 물에 산소가 풍부하고 바닥에 자갈이 깔려 있어 알을 낳고 부화시키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를 정확히 찾아간다.(…)자신에게 너무 긴 강을 선택하면 산란지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이 위험을 최소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57, 은연어 특:연애 하기 전에 벌크업해서 몸 만듦, 고향 사람만 사귐, 원거리 연애-만나러 가다가 죽을 수도 있어서-안 함.)

-사실 대서양연어와, 은연어 같은 태평양연어 종 중에는 두 가지 사뭇 다른 종류의 수컷이 있다. 이주하고 바다에서 먹이를 먹고 주둥이가 구부러진 깡패가 있는가 하면, 훨씬 작고 어리고 치어를 닮았으나 성적으로 성숙하는 기간 동안 바다로 이주하지 않고 민물에 머무는 제비족이 있다. 이 반바지 차림의 조숙한 제비족을 잭이라 한다. 자기네끼리 다투기도 하지만,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힐 무기는 없다. 이들의 짝짓기 전략은 암컷의 보금자리 근처에 숨어 새치기를 하는 것이다. 암컷이 짝짓기할 수컷을 선택하여 갈고리 주둥이 아래에 알을 낳으면 잽싸게 달려들어 정액을 뿌린다.
저마다 다른 수컷들의 전략은 나름대로 효과를 보는 듯하다. 잭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고역을 치르지 않아도 되지만, 갈고리 주둥이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암컷을 꾀어 알을 낳게 하려면 갈고리 주둥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고리 주둥이의 개체 수가 줄면 잭에게도 손해다. 한편 갈고리 주둥이의 번식 성공에도 본질적 한계가 있다. 이 수컷들이 많아질수록 싸움이 잦아지는데, 이는 잭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은연어는 단회번식을 하기 때문에, 이 종의 잭은 갈고리 주둥이보다 일찍 죽는다. 여러 번 번식하는 대서양연어의 경우, 잭은 바다로 이주하는 시기가 늦기 때문에 살아남지 못할 위험이 크다. 아무리 따져봐도 번식과 생존의 상반 관계를 피할 도리가 없다. (160, 이 부분 왠지 모르게 웃겼다. 연어 세계에도 얌생이, 네토라레, 싸튀놈이 존재함…길게 옮겨 둔 거 보니 나 연어 좀 좋아함. 맛있어.)

-‘빨리 살고 일찍 죽는다’는 로큰롤 생활양식의 반항적 구호로, 곧잘 문신으로 새겨지거나 요절한 이의 부고에 실린다. 록음악인이 별도의 종이라면 이들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은 이들 중 상당수가 27세에 죽는다는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를 틀림없이 기록할 것이다. 27세에 죽는 유전자 또는 재능은 블루스 기타의 대가 로버트 존슨에게서 출발한 듯하다. 전기 기타의 개척자 지미 핸드릭스도 같은 기간을 살다 죽었으며 로큰롤의 여왕 재니스 조플린도 한 달 뒤에 역시 스물일곱의 나이로 죽었다. 둘 다 롤링스톤스의 브라이언 존스보다는 오래 살았지만 간발의 차이였다. 1년 뒤에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 스물일곱에 죽었다. 최근에는 영국의 알엔비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스물여덟 번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죽었다.
‘27클럽’ 회원들의 사망 원인은 스트리크닌 중독(존슨), 익사(존스), 질식(헨드릭스), 헤로인 과용(조플린), 심장마비(모리슨), 알코올 의존증(와인하우스) 등이다. 죽은 뒤에만 가입할 수 있는 이 배타적 클럽 회원은 앞의 유명인을 제외하고도 최소 40명이다. 록 음악인은 삶의 속도와 길이 사이의 가차 없는 상반 관계가 수명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안다. 애석하게도, 산통 깨기 좋아하고 할 일 없는 몇몇 통계학자들이 ‘록 음악인이 27세에 죽는 경향이 있다’라는 가설을 정말로 검증하여, 적어도 영국 팝 스타의 경우 이 패턴이 허구임을 밝혀냈다. 하지만 이 연구에서는 음악인이 20-30대에 죽을 확률이 전체 인구보다 두세 배 높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니 록 스타가 요절한다는 말이 낭설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포유류와 비교했을 때 록 음악인은 고통스러우리만치 길고 느린 삶을 영위한다. (166, 그래서 제가 그 나이에 락을 포기하고 번식을 택했지 말입니다...좀 더 살려고...ㅋㅋㅋ 요즘은 락이 더욱 더 죽어 있기 때문에 (Rock is deader than dead, 맨슨이 그렇다고 했음) 젊은이들이 좀 덜 죽겠어서 다행이지 싶다. 그런데 번식도 잘 안 함...)

-땃쥐의 먹이인 곤충은 열량이 별로 풍부하지 않다. 씨앗을 먹는 소형 설치류는 곤충을 잡아먹는 설치류보다 이 점에서 훨씬 수월하다. 씨앗은 지방과 녹말처럼 열량이 풍부한 화합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씨앗을 먹는 소형 설치류가 가스불로 요리한다면 곤충을 먹는 소형 설치류는 촛불로 요리하는 셈이다. 하지만 둘 다 작은 몸집 때문에 빨리 살아야 한다. (167, 허허허 그래서 저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곤충(번데기)과 씨앗(피칸 기타 등등)을 골고루 처먹고 있습니다...만 작은 몸집 때문에 빨리 살면 일찍 죽는다고 하니 좀 천천히 살아야 겠다.)

-표백제와 비슷한 산화력을 가진 자유 라디칼이 세포 안에 있다고 상상해보면 이것이 어떤 손상을 일으킬지 감이 잡힐 것이다. 활성 산소는 지방, 단백질, 그리고 DNA와 RNA를 만드는 핵산을 비롯한 사실상 모든 중요 분자를 손상시킬 수 있다. DNA손상은 나이가 들수록 누적되지만, 일부 과학자가 주장하듯 이 손상이 노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활성 산소 노화 이론’은 ‘삶의 속도 가설’의 빠진 고리를 채워 넣었다. (…) 삶의 속도 가설에서는 대사의 유해한 효과 때문에 수명에 본질적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활성 산소 노화 이론은 삶의 속도가 어떻게 해서 수명에 영향에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했다. 유산소 호흡은 악마와 맺은 계약이다. 유산소 호흡이 없으면 아예 살 수가 없지만, 유산소 호흡을 하면서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생명의 불에 열량을 태울 때마다 스스로를 화장하는 장작을 태우는 셈이다. (175, 그런데 펄의 삶의 속도 가설은 뒤에서 틀린 전제로 밝혀짐)

-펄이 수명과 대사 속도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한 관계는 실제로는 대사 속도와 몸집의 관계였으며, 이 또한 펄이 연구할 수 있었던 종의 범위가 협소하여 편향된 데이터였다. (177, 조류나 태반 포유류에서 크기를 제외할 경우 수명과 대사 속도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전혀 없어서 펄의 이론은 망함. 그런데 조류에서는 크기가 전부는 또 아니고, 날 수 있으면 수명이 길어지는 듯하다고 한다. 타조(못 낢)-아프리카회색앵무(낢)의 체중 90킬로그램vs450그램 그런데 50년 정도로 수명은 비슷, 에뮤(못 낢)-아메리카울새(낢)의 체중 40킬로그램vs70그램 수명은 둘다 17년)

-큰 몸집과 땅속에 숨거나 날 수 있는 능력 이외에 장수와 연관된 또다른 특징으로 자신을 맛없게 만드는 화학적 방어 수단, 동면, (포유류라면) 나무에서 사는 것, 거북이의 등 껍데기 등이 있다. (…) 몸집과 그 밖의 수많은 특징들이 수명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에 대한 단 하나의 설명은 생물체를 포식자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이다. (179, 옳은 결론 가기까지 틀린 걸 자세히도 설명해주는 친절함… 반전의 반전의 반전이냐)

-자연선택은 객차를 몇 량 채우는지 알지 못하며 몇명의 자식이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는지 세지 않는다(자연 선택의 비목표 지향성). 열차는 수만, 수억, 수조 대가 있는데, 가장 많은 자식을 데려다주는 열차가 다음 역에서 복제되며 최적의 길이보다 길거나 짧은 열차는 망각의 측선에 불명예스럽게 정차한다(유전과 자연 선택, 도태). (182, 열차의 비유 엄청 긴데 일부만 퍼 왔다. 과학 저자 중에 비유 제법 많이 쓰는 축에 든다. 개그도 제일 많이 치는 편…록스타 단명설로 가볍게 열린 이 장은 이놈의 기차 비유로 이어지면서 그리 간단하지 않고 심히 복잡했다고...)

-빨리 살면 일찍 죽는다-마찬가지 원리로, 느리게 살면 늦게 죽는다-라는 법칙은 모든 생물에게 적용되는 듯하다. 삶의 속도는 대사 속도와는 거의 또는 전혀 무관하며 세대가 지나가는 속도와 직접적 관계가 있다. 이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성체의 삶이 얼마나 위험한가다. 인간은 삶의 속도가 매우 느리다. (188, 이 말 저말 많았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챕터 말미에서 정리해 줌)

-윌리엄스는 “노화는 일반화된 상태 저하이며, 결코 한 체계의 변화가 주원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196, 이러고서 또 수명 열차 비유로 돌아가서 빡침. 이하 생략이다 쳇…)

-비유적으로 네 개의 (연결) 고리는 저마다 다른 생물학적 체계를 나타내는데, 각각은 일정한 나이 이후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이를테면 첫 번째 고리는 면역 체계를 나타내고, 두 번째 고리는 암에 대한 저항성을, 세 번째 고리는 산화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성을, 네 번째 고리는 효율적인 인슐린 신호 전달을 나타낸다. 사슬의 세기는 가장 약한 고리의 세기와 같으므로, 객차가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모든 고리가 끝까지 버텨야 한다. 이제 고리의 재료인 금속이 마모되는 것을 노화라고 가정하자. 젊은 객차에서는 각 고리가 질기고 튼튼하지만, 나이 든 객차를 연결하는 고리는 나이에 따라 점점 가늘어진다. 앞에서 보았듯 나이 든 객차에 탄 승객-자식들은 미래 세대에 기여하는 것이 거의 없기에 자연선택이 이들에게 거의 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유지 보수 직원들과 철로에 내려가 열차 중간의 연결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자. 이 객차들은 중년을 나타내는데, 자연선택은 이 객차들에 대해 흥미를 잃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쓰임새를 짜낼 수 있다. 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연결부의 고리 네 개 중에서 하나가 나머지 세 개 보다 훨씬 약하다. 다른 열차를 확인했더니 전부 마찬가지다. 항상 똑같은 고리, 즉 산화 스트레스 저항성을 나타내는 고리가 약해지기 시작한다.
유지 보수 직원들이 자연선택으로부터 지시를 받는다면 무슨 일을 해야할까? 분명히, 가장 좋은 전략은 가장 약한 고리를 강화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것이 윌리엄스의 주장에 담긴 요점이었다. 필수적인 체계가 나머지보다 앞서 약해지기 시작하면 자연선택은 그 체계를 강화한다. 산화 스트레스에 대한 방어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 완벽하지는 않지만, 산화 스트레스가 노화의 유일하고 보편적인 원인이 아닐 정도까지는 문제를 해결한다. 나머지보다 앞서 꾸준히 닳기 시작하는 필수적 고리는 전부 자연선택의 장기적 관심사가 된다. 그러다가 자연선택이 힘을 죄다 잃는 시점이 되면 고삐가 풀리고 몸이 제멋대로 굴러간다. 의학 사전에서 거의 모든 질병의 최대 위험 요인으로 환자의 나이를 꼽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노화다. (197-198, 안 옮긴다 해 놓고 청춘열차 막 벗어난 ‘중년열차’의 눈에 이 부분이 들어오자 밑줄을 안 칠 수가 없었다. ‘노화는 단일한 현상이 아니’라 ‘여러 체계의 전반적인 부전’이라는 것… )

-처음에는 ‘생명체가 왜 늙는가’라는 질문 전체에 대해 명백하고 일반적인 해답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들을 비교하면 해답이 무너져버리는 문제 말이다. (삶의 속도 가설, 산화 스트레스 가설, 텔로미어/텔로머레이스 가설 전부 다) 틀림 없이 조지 C.윌리엄스가 무덤에서 낄낄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202-203, 서태지냐고. ‘내가 말했잖아 너를 데려간다고. 너의 아픔들은 이제 없을 거라고.’ 그런데 사실 다 뻥이었습니다. 니들은 결국 다 죽는다.)

-미국은 소득 격차가 주마다 다른데, 소득 격차가 가장 작은 주의 기대 수명이 가장 높은 경향이 있다. (일본 사례도 동일) (…) 이 추세에서 눈에 띄는 점은 기대 수명이 부 자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포르투갈의 1인당 국민 소득은 미국의 절반이지만 빈부 격차는 두 나라가 다 크므로, 두 나라 모두 기대 수명이 낮은 것은 빈부 격차 때문이다.
선진국에서 왜 소득 불평등이 이런 식으로 수명에 영향을 미치는가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심리적, 생물학적 원인이 얽힌 복잡한 문제다. 이 예상치 못한 발견이 가져다준 희소식은 생물학자가 아니어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이여,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이다. (211, 생물학으로 내내 이어지다가 결론은 구조적 문제 툭 건드리고 문돌이 니들이 알아서 혀 봐, 한다. 어이어이)

-자연은 복잡하다. 자연선택의 결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최선의 설계에 따라 단번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생길 때마다 땜질한 자리를 덕지덕지 달고서 진화한다. 이 책의 미덕은 노화를 진화의 관점에서 보도록 한다는 것이다. 노화는 복잡한 현상이며, 수많은 요소가 맞물려 있기에 한 가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 노화와 필멸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헛된 집착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214, 깔끔명료한 번역가 선생님의 첨언까지. 크.)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수 2025-07-06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버타운

반유행열반인 2025-07-06 21:49   좋아요 1 | URL
은촌씨로군요

유수 2025-07-06 21:50   좋아요 1 | URL
어떤가문이기에

반유행열반인 2025-07-07 19:31   좋아요 1 | URL
이 분 자연사 책도 좋아서 빌려본 거 중고로 다시 샀다요 내츄럴데쓰 아니고 히스토리...부모님이 올리버 웬들 홈스인가 하는 법관 미들 네임 따다가 웬들 써 줬다는데 정작 책 저자 명에선 미들 네임 생략하네요 ㅋㅋㅋ아 이 책은 감각의 박물학 실버타운 버전 느낌이었어요. 개그는 더 잘 치심

유수 2025-07-08 10:35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책 들어봤는데! 후.. 오늘도 상호대차하러 쫄래쫄래..
 
찬란한 멸종 - 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
이정모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0701 이정모.

생각보다 멸종과 고생물에 진심이었다. 독서목록도 제법 되고, 모아 놓은 생명-진화 시리즈 책들도 좀 있고, 수능 생명과학1+지구과학1 선택자였답니다…두 번 다 망했지만요...흑흑

이전의 독서 목록 일부.
-대멸종 연대기
https://m.blog.naver.com/natf/221810890702

-지구의 짧은 역사
https://m.blog.naver.com/natf/222619260759

-생명의 도약
https://m.blog.naver.com/natf/222630777184

-동글동글 귀여운 고생물 도감
https://m.blog.naver.com/natf/223206864921

-이유가 있어서 멸종했습니다
https://m.blog.naver.com/natf/221572824692

빅 히스토리, 인류의 기원, 이기적 유전자, 사피엔스 뭐 이런 옛날 이야기 과학책, 인류학책까지 가져다 대면 끝도 없고… 그런데도 한 번 더 비슷한 주제를 읽기로 했다. 미리보기를 보니 일인칭 멸종자 시점으로 서술된 게 어린이들 읽기 좋아 보여서, 일단 사다가 큰어린이를 읽혔다.(반응은 시큰둥) 그러고나서 나도 소설을 읽으려다가 소설 좋은데 무서워 병 재발로, 회피스킬, 또다시 교양과학책으로 손을 뻗다보니 제법 신간이 새치기를 했구만… (묵힌 과학책 꽤 많아요 아직도…수십 권 이상임 백 권 대일수도...)

멸종된 생물 관점에서 서술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쓴 거니까 이래저래 인간 중심적일 수 밖에 없다. 그걸 내가 뭐라고 할 걸 미리 예상한 것인지, 인간 중심도 필요해! 라고 서두에서 먼저 방어한다. 하긴, 말대로 인간 아니었으면 지구에 대한 지식을 연구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 책들도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멸종과 고생물에 관한 이야기는 ‘대멸종 연대기’에서 엄청 자세하게 본 뒤라서 이 책은 그것 보다는 좀 가볍게 읽을 수 있었다. 거꾸로 읽는-이었지만 사실 연대기 순은 아니고 이 시대 갔다 저 시대 갔다, 한다. 대부분의 지구 역사 책들이 결론은 기후 위기로 향한다. 7월 첫날 되자마자 햇살이 칼 같이 지르고 많이 덥긴 했다. 직장도 집도 에어컨을 돌린다. 여기가 시원해진 만큼 어디는 또 더 더워지겠지…

닉 레인 아저씨 책 ‘생명의 도약’ 겨우 한 권 보고는 ‘미토콘드리아’, ‘산소’, ‘트랜스포머’ 다 쟁여만 놨는데 이 책 읽다보니 아...저자 선생님께서도 그 내용 미리 스포?소개해주시는 구나...하고 참고 목록 보니 역시나 먼저 읽고 맛보기로 전해주셨다. 나의 생명+진화 콜렉션도 이번 여름에는 조금이나마 읽어야 하는데… 어린이들 오세아니아 가르칠 때 보충 자료에 월리스 나와서 ‘저 사람, 다윈과 동시대에 진화론 발전시킨 사람인데, 나 저 사람이 쓴 말레이제도 사 놨어, 그런데 안 읽음…’ 하면서 조금 부끄러웠다.

이미 사라진 생물 관점에서 인간의 말로 인간이 알아낸 자연사, 지구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 조금 귀여운 부분도 있지만, 반복되다 보니 후반부 가면 조금 지루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리스 비극처럼 달과 바다의 대화로 연극적으로 대미를 비장하게 장식하는데, 여긴 새로운 형식이군, (사실 앞부분 다른 파트에서 할아버지와 손자 등장시켜 이미 써 먹은 대화체) 하면서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인도영화 마지막에 춤추고 노래하며 끝내는 것처럼 식상했다잉…
우리 종족의 멸종을 말하는데 이렇게 가볍게 말하면 좀 죄인 같지만 그래도 매번 멸종 선배들이 호통치고 교훈주고 니들 똑바로 살아라, 하는 걸 계속 듣는 게 마냥 재미있을 수는 없었다.

+밑줄 긋기
-인간 중심의 사고도 필요합니다. 본 것에 대해 생각하고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는 생명체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뿐이니까요. 우리가 없었다면 자연사도 없었을 겁니다.
물론 인간 없는 지구를 상상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지구에 미친 영향을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니까요. (7)

-인간으로의 진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뇌의 변화라기보다는 노동이며, 노동은 직립보행의 결과 손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똑바로 선 인간은 자유를 얻었고, 자유를 얻은 인간은 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노동은 다시 인간의 진화를 촉진해 마침내 ‘슬기 인간’으로 발전시켰다. (32, 노동으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조잡한 인간에게 인간 진화의 핵심을 노동이라고 말해주는 건 좀 덜 반가운 일이었다.)

-여러분은 이때 “지구를 구하자!”라고 외쳤습니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마음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외침에는 가슴 아픈 아이러니가 숨어 있습니다. 구원이 필요한 대상은 제가 아닙니다. (114, 궁서체로 쓴, 지구가 친애하는 인류에게 쓴 편지 중)

+과학책 콜렉션의 일부...저 중에 겨우 한 권 읽음ㅋㅋㅋ
+내가 좋아하는 아노말로카리스
+매년 이맘때쯤 다가오는 호구 인증샷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5-07-01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알라딘 찐 충성고객 👍👍

반유행열반인 2025-07-02 18:54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알라딘 찐호구 인사드립니다 ㅎㅎㅎ

유수 2025-07-08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야시다 큐가 누구지? 또 쭐레쭐레..

유수 2025-07-08 14:32   좋아요 1 | URL
아하!!

반유행열반인 2025-07-08 20:26   좋아요 0 | URL
만화책을 종이책으로 다 사고 또 전자책으로 한 질 중복 구매했더니 저리 됐어요 ㅎㅎㅎㅎ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0628 프리모 레비.

막연하게 난 이 작가 작품을 좋아할 것이다, 하고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프리모 레비의 책 다섯 권을 모아뒀다. 제일 관심이 갔던 ‘주기율표’는 작년 봄에 읽었는데, 역시, 나는 그 책이 좋았다. 직장에서 책을 사 준다길래 나는 ‘부모와 다른 아이들 1’이 뭔가 두껍고 비싸니까 이거 사달래야지, 하다가 맞은 편 동료가 책 살 궁리를 하는데 대고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를 권했다. 동료는 일이 바빠 전에 내가 알려준 ’밀레니엄-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도 다 못 읽은 참인데…

책 추천은 삼가는 편인데 또 그러고 나니 정말 좋았던가, 이 작가 맞던가, 확인이 필요했나 보다(이렇게나 자기 확신 없는 책쟁이놈). ’이것이 인간인가‘를 펼쳤다. 담담하게 그가 만났던 사람들, 겪었던 일들을 적어낸 걸 읽다 보니 책을 못 덮고 하루가 한 권이 되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는 참혹한 경험을, 만화 ’쥐‘나 필립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같은 데서는 수용소 생존 유대인과 그 자녀들로 이어지는 지옥도를 통해 보여줬던 것 같다. 그런데 앞서 말한 작품들이 생존자 자녀들의 시각에서 수용소 세대 이후의 삶의 고통을 주로 그린 데 비해, 소수만 살아 돌아온 생존 당사자 레비의 글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하고 담담하면서도 또 세세해서 읽는 사람이 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았다.

소설 후기 격인 독자의 질문에 대해 레비가 답한 내용에서는, 이제 평범한 삶으로 돌아와 짧은 수용소 생활을 돌아보면 격렬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이후 십 년 뒤쯤 그가 자살로 생을 끝낸 것을 보면 그렇게 괜찮아, 앞으로가 중요하지, 또 이런 일이 없어야 해, 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강조하기 보다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부단히 애쓴 작가의 저작들이 그저 묵직하다. 무겁게 가까이 꽂혀서 멍청한 소리만 자꾸 하지 말고 좀 읽어보라고, 내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하는 것 같다.

+밑줄 긋기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작가의 말 중)

-이제, 사랑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집, 자신의 습관, 옷, 다시 말해 말 그대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겨버린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는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잃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리하여 그의 삶과 죽음은 인간적인 친밀감 따위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아주 가볍게 결정될 것이다. 운이 아주 좋을 경우 그게 더 낫다는 순수한 유용성 판단 정도를 따를 수는 있으리라.
이제 ‘절멸의 수용소’라는 용어의 이중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다‘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35)

-낯선 외국어가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밑바닥으로 돌덩이처럼 떨어진다. ‘기상’. 따뜻한 담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경계, 잠이라는 튼튼하지 못한 갑옷, 고통스럽기도 한 밤으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 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이성적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너무나 춥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끝은 우리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회색빛 빵 한 덩이에 우리의 관심과 욕망을 집중시키는 것이 더 낫다. 빵은 작지만 한 시간 후면 틀림없이 우리 것이 된다. 그것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5분 동안 그것은 이곳에서 우리가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다. (94, 지금껏 들어 본 중에 가장 슬픈 “일어나기 싫어.”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수용소는 벌을 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수용소는 게르만식 사회구조 한가운데에서 시간 제한 없이 우리에게 부과된 존재방식일 뿐이다. (125)

-나이, 사회적 지위, 출신, 언어, 문화와 습관이 전혀 다른 수천 명의 개인이 철조망 안에 갇힌다. 그곳에서 그들은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통제당하는, 만인에게 동등한 삶,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된다.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다. (132)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187,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자연스럽고 평범한 호의란 겪어보기 어려운 일이지만 또 불가능한 건 아닌 듯싶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야 할 사람의 고함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무기력과 복종의 두텁고 낡은 장막을 뚫고 들어와 우리들 내부에 살아남은 인간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Kamaraden, ich bin der Letzte!˝(동지들, 내가 마지막이오) (227)

-(…)내가 보기에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게, 어떤 얼굴에게 향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책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멀리 있었고, 눈으로 볼 수 없었으며, 접근할 수도 없었다. 나치스 체제는 용의주도하게도 노예와 주인이 최소한의 접촉만 하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 또 이 책이 쓰인 그 몇 달 동안, 즉 1946년에 나치스와 파시즘은 정말 얼굴이 없는 듯했다. 그것들은 무시무시한 악몽처럼, 정확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다시 허공 속으로 흩어져버린 듯했다. 새벽닭이 울면 유령들이 사라져버리듯이 말이다. 그런 유령 집단을 향해 내가 어떻게 분노를 키우고 복수를 바랄 수 있겠는가? (269)

-책의 경우 (독재)국가의 마음에 드는 내용이어야만 출판과 번역이 될 수 있다. 다른 책을 보려면 외국에 나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자기 나라로 책을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 그런 책은 마약이나 폭발물보다 더 위험하다. 국경에서 책을 소지하고 있다가 들키면 책을 압수당하고 당신은 처벌을 받는다. 국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책, 마음에 들지 않게 된 책, 이전 시대의 책들은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진다. 1924년과 1945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일이다. 국가 사회주의가 지배한 독일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런 일은 지금도 수많은 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파시즘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웠던 소련도 이런 국가에 포함된다. 독재국가에서는 진실을 마음대로 바꾸고, 과거를 되돌려 역사를 다시 쓰고, 사실을 왜곡하고 삭제하고 거짓을 첨가하는 게 합법적이다. 프로파간다가 정보를 대체한다. 그런 국가에서 당신은 권리를 지닌 시민이라기보다는 신민이다. 또한 당신은 광적인 충성과 맹종을 강요하는 국가(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독재자)에 복종해야 한다. (272)

-고통을 덜 받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건 처음에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수용소 밖에서도 룸펜프롤레타리아가 투쟁을 선도하는 일은 드물다. ‘거지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279)

-당시에는 굴뚝 위로 불꽃이 보였다고 했다. 그녀는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 물었다. “저 불길은 뭐지요?” 그러자 여자들이 대답해주었다. “저기서 타고 있는 건 바로 우리야.”(284)

-역사적 현상의 책임을 한 개인에게 돌려(끔찍한 명령을 실행에 옮긴 자들도 결코 무죄일 수 없다!) 설명한다는 건 옳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한 개인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행동의 동기들을 해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가정들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을 변명하며 죄의 양이 아니라 질을 설명한다. 나는 솔직히 히틀러와 그의 뒤에 있던 독일의 광적인 반유대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 몇몇 진지한 역사학자들(블록, 슈람, 브라허)의 겸손함을 좋아한다.
이와 같은 일은 어쩌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되어서도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의도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01-302)

-그러므로 이성과 다른 도구로,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을 앞세워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진짜 선각자와 가짜 선각자를 구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거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의 단순성과 눈부심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해도, 무상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 게 훨씬 더 좋다. (304, 그리고 난 이렇게 실험 연구 해 본 사람의 신중함을 삶과 정치에까지 적용하는 레비의 말이 좋다.)

-사실 우리의 미래는 외적 요인들,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택과는 전혀 무관한 요인들과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내적 요인들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다. 잘 알려진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본인의 미래도 이웃의 미래도 알 수가 없다. 또 같은 이유로 과거의 일에 대해 “만약에”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아우슈비츠의 시간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글을 쓰는 일을 없었을 것이다. (305, 겨우 두 권 읽었지만, 프리모 레비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돌아 온 건 자신이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정말 강했던 덕도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나도 내 속엔 이야기가 너무 많아...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다 어딘가 잠들어 있나 보다. 라고 쓴 뒤 한 장만 넘기니까 작가 스스로 비슷한 말을 한다.)

-아마도 그보다는 지칠 줄 몰랐던 인간에 대한 관심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꼭 살아남아 우리가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이 도움이 되었다. (3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