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감사한 적립금, 벽돌을 하나 들이고 싶었는데 두 개 들여 버렸다.
읽던 중인 발효책과 마지막 산 성과학책 사이 구매 내역에 21권이나 끼어 있는 게 놀랍다...(젤리 제외... 이후로 커피와 어린이책을 또 한가득 샀는데 오늘 시켜서 안 옴...)
발효책은 왜 벌써 420여쪽 읽었는데 아직 반도 더 남음...

‘살 만한 삶과 살 만 허지 않은 삶’(오타났는데 맘에 들어 냅둬 이상허지 않어) 공저자 프레데리크 보름스가 프레데릭 웜으로 되어 있는 책도 주제가 궁금해서 중고로 구했다.

글항아리 신간 중에 뭐 사야지... 하다가 아니!!!마스터 클래스라니... 저 정도면 저 분야 도서 나름 마스터인 내가 최종 클라스로다가 봐도 되겠다...(글로) 전문가가 되겠어! 성적 자기계발과 대중과학의 콜라보라니!!!

벤야민은 하나도 읽지도 갖추지도 않다가 오...저거 수능 국어 지문에 나온 아케이드...하고 충동구매했는데 2권 잘못 삼... 1권 추가로 다시 시킴(망함 책 두권에 십사만원 가까이야) 그런데 벤야민 책 잔뜩 모은 친구가 1권 소장 중인데 필요없다고 준대서 주문 취소하고 2권은 냅뒀다. 비닐랩핑도 안 까고 그대로 베게로 쓸 예정...

책 박스 옷 박스 먹거리 박스 뜯어내고 정리하며 이러다 언제 돈 모아서 은퇴해 망했다 자본주의의 노예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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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를 바꾼다는 것 - 트랜스젠더 모델 먼로 버그도프의 목소리
먼로 버그도프 지음, 송섬별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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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1 먼로 버그도프. 원제: transitional 이행의, 과도의.(역자는 주로 ‘전환’으로 옮긴 듯)

책이나 저자에 관한 정보 없이 다른 중고책들 주워담다가 같이 담은 책이었다. 제목 보니까 그냥 궁금했다. 엘리엇 페이지의 ‘페이지 보이’도 궁금했는데 시간 지나니 안 읽어도 될 것 같았다. 이 책은 같은 번역자가 옮겼다고 했다.

먼로 버그도프의 먼로는 그 마릴린 먼로에서 따다 친구가 별칭 붙여준 걸 활동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마릴린 맨슨은 마릴린을, 먼로 버그도프는 먼로를 사이좋게 나눠가졌구만…이렇게 엮으면 저자가 질색할지 모르지만…
(맨슨은 먼로와 동년배인 배우 에반레이첼우드와 사귀는 동안 그루밍 성폭력을 했다고 고소당해 몇 년 간 법정에 다니느라 활동을 못했다. 결론이 어떻게 났나 뒤져보니 우드에 이어 맨슨을 줄줄이 고소했던 사람들이 진술을 번복하거나 증거 없음으로, 우드가 맨슨에게 불리한 진술하도록 회유했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나와서 우드에게 재판이 불리하게 흘러갔고, 맨슨은 무혐의로 송사를 벗어나고, 쿨한 척 우드 변호사 비용 다 내줄게, 땡, 이러고 우드는 그런 식으로 무마하지 말라고 빡쳐하고, 맨슨은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 나새끼는 또다시 맨슨을 꺼내 듣고… 하 지긋지긋한 인간사 연애사 성범죄여…빌어먹을 취향이여...)

먼로는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의 자녀로, 지정 성별 남성으로 길러졌다. 먼로가 여성성에 가까운 특징을 드러내는 유색인종이라는 것 때문에, 그녀가 살던 마을 사람들과 그녀가 다니던 학교의 아이들은 그녀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고 배척하였다. 가족마저 그녀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의 정체성을 인정해주지 않아 오래도록 갈등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스스로 동성애자라 여기던 먼로는 트랜스젠더 친구를 만나며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찾기 시작하고, 성별정정, 성확정 치료를 받게 된다. 내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며 자란 경험은 그녀의 자존감을 떨어뜨려 자해, 알코올 및 약물 의존, 나쁜 연애 반복 같은 생활을 하게 만들고, 강간과 스토킹 같은 트라우마를 심어주는 사건도 겪는다.

삶을 이끌어가기 힘들었지만 자신을 먹여 살리기 위한 직업을 여기저기 옮겨 가며 유지하고, 패션업계와 모델일을 하게 되면서 이제 막 유명해지려던 찰나, 그녀가 사회관계망에 인종주의에 관해 비판적인 게시물을 올린 사실 때문에 로레알에 모델로 고용되었던 그녀는 해고되었고 이후 모델일을 구하기도 어려워졌다. 몇 년 후 트렌드 따라 인종주의 반대 마케팅을 벌이는 로레알의 행보에 대해 자신이 겪은 상황에 대한 사과도 없이 기만적인 캠페인을 한다고 다시 비판하는 글을 올리고, 로레알은 긴 회의와 사과 끝에 그녀를 로레알의 다양성 포용성 평등위원회에 고용하기로 한다. 트랜스젠더 최초로 영국 코스모폴리탄, 보그 표지에 실린 모델이라고 하는데, 그게 로레알 해고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시간 순서를 잘 파악하지 못하겠다. (나중에 다시 찾아보니 2017년 로레알 해고, 2020년 SNS에서 로레알 저격하고 로레알 재입사, 코스모폴리탄 모델은 2022년, 보그에는 2022년 기고 편집자로 합류, 올해 2025년에도 기사가 실려 있다. 책은 영문판이 2023년에 나왔다.)

코스모폴리탄의 먼로 버그도프
https://www.instagram.com/p/CYrYmbjtdJz/?utm_source=ig_embed&ig_rid=25b99ffd-f319-40b0-97fc-980dfb19fdf5&ig_mid=9B148F6F-EC86-4ED4-BA6D-F7F3AAC8739E

보그의 먼로 버그도프
2022년 https://www.vogue.co.uk/arts-and-lifestyle/article/munroe-bergdorf-british-vogue-contributing-editor

2025년 https://www.vogue.co.uk/article/munroe-bergdorf-gender-affirming-care-viewpoint

책의 4분의 3정도는 자전적 이야기로 스스로의 삶을 풀어가고, 나머지 4분의 1정도는 자신이 투신하고 있는 행동주의에 관한 이야기와, 차별에 맞서겠다는 선언이 이어진다. 일찌감치 소셜네트워크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떨어져나오고, 멋진 몇 줄 글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지만, 그걸로 뭔가를 하고 있다고 으스대는 사람들 보면 가끔 심통도 나고, 글과 사람이 늘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언제부턴가 하게 되면서 그냥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키우고 모르던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런 건 뭐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긴 하다. 모든 것에서 관심을 줄여가는 것조차 특권이라고 말하면서 유색인종, 여성, 퀴어, 노동자의 차별받는 상황에 관해 나새끼한테 다시금 귀기울이게 만들기도 했으니…

다만 책 옮길 때 트랜스라는 말을 그대로 전환 이라 옮기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불만이었다. 지정 성별을 정정, 전환하는 것은 맞지만, 누구나 변하는 존재라는 걸 강조하려고 저자가 마지막까지 트랜스, 트랜지션이란 말을 쓴 것 같긴 하지만, 그냥 내가 나답게 되는 걸 전환, 뭔가 획 틀어가지고 달라지는 것처럼 표현하는 건 그게 맞나 싶었다. 언어가, 말씨가 이렇게 어렵다.

+밑줄 긋기
-집에서 독립한 지 한참 지난 뒤에도 나는 자꾸만 도망치려 했다. 그중에는 나를 죽일 뻔한 시도들도 있었다. 사실,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도망치려는 시도다. 그러다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향해 전환한 뒤에는 도망치기를 그만둔다.(21-22)

-사실, 현실주의가 늘 현실 그 자체인 건 아니다. 현실주의란 권력을 지닌 이들의 눈에 비친 정상성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 그것은 현실이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시스젠더적, 백인적, 가부장주의적, 이성애 중심적, 자본주의적 개념이다. 모든 민권 운동은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이들로부터 태어난다. 모든 해방 운동의 핵심은 직접 경험, 정체성 또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모습에 제약받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를 실현하고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어야 마땅하다. (30-31)

-우리는 사회도 전환하며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한 환원적 개념을 무너뜨린다는 걸 잊기 쉽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완벽이나 진정한 평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차이는 좀 더 편하게 언급할 수 있지만, 나머지 차이들은 여전히 악마화한다. 나같은 사람을 위한 공간도,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나를 닮은 사람도 만날 수 없던 사회에서 내가 얼마나 큰 고립감을 느꼈는지, 이제는 예전만큼 상상하기 어렵다. 차이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을 때는 차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꼭 필요하지 않은 것,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 우길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현실과 진실을 애써 찾아나서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권력을 지닌 이들이 바라는 모습대로의 세상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세뇌뿐이다. (43-44)

-나는 상대와 연결되지 못하는 섹스는 공허할 뿐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진정으로 찾는 것,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바로 연결이었다. 진정한 연결감 말이다. (91)

-부모가 “우리는 아이가 원하는 젠더를 선택하게 하고 싶어요”하고 말한다 해도, 여전히 우리의 젠더는 생식기에 따라 결정되어 국가에 등록된다. 우리는 정부가 검열한 정체성을 넘어서는 우리 자신을 자각할 기회를 빼앗긴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이고, 젠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우리 경험에 기반한 것이며, 이 경험들은 개개인에게 고유한 것이다. (96-97)

-유색인과 퀴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 자체가 우리의 억압에 기여한다. 오늘날 정치나 돈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게 편한 사람은 기존 체계에 만족하는 이들뿐이니까. (133)

-결국 나는 남을 위해 화려하게 꾸미는 건 울적한 일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드레스는 여성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한 무기라던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말을 읽은 적 있다. 나는 그 말이 거짓이라 생각지 않고, 슬픈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사회는 여성에게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특정 상황에 맞게 차려입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한번 기준이 생기고 나면, 그 모습을 자꾸만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이 뒤따른다. 매 순간 화려하지 않다면 “다 내려놓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전혀 화려하지 않다면 신뢰가 떨어진다. 그러나 화려함은 때로 타인이 우리의 깊은 내면을 볼 수 없도록 가로막는다. (157-158)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복잡한 타인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사랑할 수 없다. (178)

-따지고 보면 나 역시 사회의 산물이다. 동성애 혐오와 인종주의는 사실에 뿌리내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해체할 수 있는 믿음이고, 그러고 나면 마침내 자신의 고통을 알 수 있게 된다. 나는 나라는 사람이 가진 온갖 추한 면들을 살펴보고, 나 스스로 나에게 겨냥한 온갖 증오를 보았다. 나는 타인들이 나를 취급하는 방식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어째서 나 자신을 혐오하는지 묻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그건 타인을 위해서였고, 나는 그들에게 그런 기쁨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194-195)

-아무도 여러분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 스스로 그 이야기들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어딘가 존재하는 그 이야기를 찾는다면 여러분의 고립감이 훨씬 줄어들 거라 약속할 수 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쭉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애초부터 외부인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면 더는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인종주의 경험은 보편적인 것이기에, 때로 좀 더 부지런해지고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드러낼 수 있다. 지식은 우리가 고립에서 빠져나와 공동체로 전환할 수 있게 해준다. 지식은 왜 어떤 일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지에 대한 맥락을 파악하고 진정한 변화를 불러오게 해준다. (218)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의 목표는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인가에 따라 갖게 되는 수치심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를 형성했던 청소년기 동안 여러모로 우리가 갖도록 배웠던 수치심이다. 불편을 유발하는 것이 두려워 질문하지 않았기에, 세대를 거듭하며 전해져온 수치심이다. 하나의 사회로서 다 함께 수치심에서 벗어나 그것을 자긍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목표다.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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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 휘둘리고 요동치는 마음에게 ‘나’라는 경계를 짓다
김총기 지음 / 다반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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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0 김총기.


요즘은 잘 안 들여다보는데 정신의학신문이라는 매체의 글을 흥미롭게 찾아보던 때가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그린 연재 육아 만화가 재미있어서 나중에 책으로 나온 걸 빌려보기도 했다. 이번 책도 아마 흥미롭게 읽히는 기사를 쓰신 선생님이 책도 냈다고 해서 사 보려다가 전자도서관에 있어서 빌려봤다. 오...빌려 보길 잘했어…

간결하게 한토막으로 쓰는 기사보다 책은 ‘나의 경계’란 중심어로 관통하는 뭔가를 전달하려 하다보니 같은 말이 반복되는 느낌이 좀 있었다. 사례로 드는 영화나 매체 같은 것도 계속 토니스타크...인셉션… 저자가 영화 좋아하는 건 아마도 내가 에브리씽,에브리웨어,올앳원쓰 관련해서 쓴 글을 보고 책까지 보게 된 거라 알고는 있었는데, 예시 재탕이 너무 반복되서 오...반복되는 말들만 쳐내도 책 분량이 3분의 2쯤 줄어서 읽기 나았겠네...싶었다.

앞부분 읽다가 조금 많이 지루했는데, 오히려 책 말미에 불안과 불쾌감을 느낄 때 해볼 만한 훈련 같은 걸 실어줘서 이건 좀 실용적인데… 이미 나의 집중력은 흐트러졌구나...일단 밑줄이나 그어 퍼 놓자...했다.

내 감정과 남의 감정, 내 욕망과 남의 욕망을 혼동해서 힘들어지는 것에 대해 짚어 주는 건 생각해 볼 거리가 많아 흥미로웠다. 낮 시간에는 불안감이 덜하다고 생각해서 약을 안 먹는 중인데, 오늘은 뭔가 갑자기 불쾌감이 엄습하다 못해 자꾸 사람이 미워지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어서 야...너 지금 오버야… 좋게 생각해라… 지금 상태 안 좋은 듯...하면서 비상약을 먹었다. 그러고는 조금 차분해졌던 것 같다. 약이 아니라도 책에 나온 것처럼 여러 감각에 집중하고, 감정을 파악하고, 인정하고, 뭐 그런 방식은 인지치료 같은 건가? 쉽진 않겠지만 시도해 볼 만 해 보였다. 비쩍 마르기만 하던 나놈이 근래 갑자기 입이 터져서 뭘 자꾸 주워먹는데 그거로도 갑자기 체중이 훅 불어나는 거 아닐지 걱정하는데… 이거 거식증 아니냐… 자꾸 스스로 장원영에 빙의하지 마라… 장원영 통통해진 거 보고 불안해하지 마라… 탈탈코르셋한 흑화한 자아를 바라보며, 그냥 여기서 5킬로 내외는 불어나도 전혀 지장없으니 걱정말고 오늘 저녁에 맛있게 레토르트 자장면이랑 막국수를 해 먹기로 한다. 오 벌써 효과가 있구만…

+밑줄 긋기
-일단 내 마음이라고 느껴져 버렸다면, 그 감정과 생각을 따라가기만 해서는 사실 그게 밖에서 들어온 엉뚱한 마음이었음을 알아차리기가 결코 쉽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나의 경계는 나의 손에 잡히질 않는다. 그러니 그 경계가 무너졌다는 순간을 알아차리기 위해 열심히 그 부글부글 거리는 감정과 생각들 사이를 헤맨다 해도 큰 소득을 얻기는 어렵다.
그런 뜬구름 같은 것들 말고, 우리를 진정 현실로 되돌려줄 열쇠는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있다. 지금. 여기. 내가 서 있고 숨 쉬고 있는 지금 여기에 내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지금 여기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지금 여기의 불행이 어떻게 닥쳐왔는지를 들여다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무너진 경계와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때에 따라서는 평상시와 달리 말투가 변하기 시작하게 될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워지는 말투나 격한 표현들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하며 나의 무의식적인 분노를 눈치챌 수 있다. 혹은 더듬거리고 우물우물해지는 말투에서 불안을 미리 알아차릴 수도 있다. 무관심해지고 줄어드는 말 수에서 나의 우울을 미리 알아볼 수도 있다. 아니면 꼭 말투가 아니라 어떤 신체의 변화로 나타날 수도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든지, 얼굴에 화끈하게 열이 올라오는 것처럼 말이다. 심할 때면 이명이 들리기 시작할 수도 있고, 어지러움증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혹은 행동의 변화로 그 불쾌감이 드러나기 시작할 수도 있다. 평소보다 갑자기 거칠게 운전을 하게 될 수도 있고, 불필요하게 뛰거나 다급하게 행동하게 되는 식의 변화가 나타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건 간에 매번 어떤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힌트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이 폭발하고 지나가 버린 순간들마다, 다시 그 폭발의 전후 요소요소들을 천천히 복기해 보는 연습을 해보아야만 한다. 폭발의 전조증상들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 그 사건에서 내가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한 순간은 구체적으로 어떤 순간이었는지, 그때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그때 나의 행동이나 기분, 말투나 태도 등에서 평소와는 달라진 것들은 무엇이 있었는지 차분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힌트를 느끼기 시작했다면 스스로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작게 되뇌여 보는 것이다.
“아, 지금 내가 좀 힘들구나.”, “아, 기분이 좀 안 좋아지고 있네.” 혹은 “아 내가 지금 화가 났구나.”, “내가 좀 불안해하고 있구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시각을 활용해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를 하나씩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무엇을 하고 있었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건, 어떤 곳에 있었건 관계없이 일단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 중 5가지 이상을 하나씩 스스로에게 이야기해 보는 것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들-예를 들어, 컴퓨터, 책상, 볼펜, 벽지, 필통, 액자, 시계 등등 적어도 5가지 이상을 하나씩 세어 가며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면서 찾아본다. 그러고는 조금씩 주위를 둘러보면서 다른 것들은 또 무엇이 보이는지 더 찾아볼 수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5가지 이상을 오른쪽, 왼쪽, 뒤, 위를 보면서 찾고 이름 대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동안 나의 시야에 어떤 것들이 들어오고 있었는지, 무심코 지나치고 있던 것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에 집중하며 다시 한 번 쳐다보며 헤아려 본다. 한 발 더 나아가서는 그것들의 디테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도 있다. 벽지는 어떤 색깔인지, 그 문양은 어떠한지, 문양에 점들은 몇 개씩 그려져 있는지, 귀퉁이의 디자인은 어떻게 접혀 있는지 등등의 디테일한 부분들을 말이다.
그러고 청각으로 넘어와, 지금 귀에는 무슨 소리가 들리고 있는지를 마찬가지로 5가지 이상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후각, 촉각, 미각 등으로 확장)

-감각에 집중한다는 것은 우선 불쾌감을 분산Distraction시킬 수 있다는 데에서 그 1차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뇌에서 감지하기 시작한 불쾌감의 자극들이 마치 과도하게 ‘심각한 상황’인 것처럼 잘못 포장되어 다른 뇌의 영역들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과정, 그 악순환의 회로를 잠시 중단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착지와 알아차림을 훈련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오히려 그다음 단계에 있다. 그것은 ‘감각’을 통해 현실에 발을 붙인 채, 나의 지금 진짜 모습이 어떠한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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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모든 것
백수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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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8 백수린.

좋아하는 소설가도 아닌데, 왜 이걸 사서 먼저 읽고 있지? 했다. 그러다 찾아보니 떡 하니 ‘백수린 소설을 좋아한다’고 써 놓은 예전 독후감을 발견했다. ‘여름의 빌라’ 소설집은 5년 전 읽을 때 꽤 괜찮다 생각했다. 이번 소설에는 눈이 아주 자주 나오는데 ‘봄밤’이로구나, 작가의 말에서도 결국 그 이야기를 하던데, ‘겨울밤의 모든 것’했으면 말느낌도 촉감도 다 별로긴 했겠다.
폴링인폴, 오늘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여름의 빌라, 봄밤의 모든 것, 이렇게 네 권 소설집을 읽고, 작가가 번역한 아니에르노의 여자아이기억도 읽고,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도 봤다. 아 이제 별로 안 좋네...했던 게 마지막 읽은 그 산문집이었던 것 같다. 백수린 소설에는 할머니가 많이 나오고 새도 자주 나오는데 이제 중년배가 되어버린 나는 이번에도 젊은 작가, 라 여기던 언니들이 노화와 죽음에 천착하는 걸 볼라치면, 그걸로 내 노화를 감각하게 되는 게 참 싫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소설집을 소절집으로 오타냈어 문지여…
가만 보면 봄날은 새로운 관계나 연애의 시작, 가볍고 한껏 멋낸 옷차림, 날리는 꽃, 꽃구경, 그런 일이 많았던 것 같다.(물론 2년 전 이 봄쯤엔 혈전 및 항응고제와의 첫만남 같은 것도 있었다만…) 그러니 계절감으로 소설 뽑는 것도 제법 있을 수 있겠지. 그런데 진짜 봄을 체감하는 거랑 봄을 적은 글을 봄에 읽는 거는, 밸런스 붕괴로구나, 이런 소설은 차라리 진짜 봄을 잊었거나 아직 기다리는 겨울에 읽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냥 그랬다는 소리야...
날 좋은 오후, 근처 알라딘 중고서점까지 걸어가서 다 읽은 이 책을 팔고, 난 이제 정말 소설을 좋아하긴 하는 건가, 이거 다 그짓말 아닌가, 갸우뚱하면서 방금 판 책 값으로 와퍼주니어 네 개 값(책 판 걸로 부족. 보탬) 치르고 돌아왔다.

+밑줄 긋기(오...정말 이게 다였니)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 한때 존재했던 생이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없다니. 그건 대체 무슨 말이지?
(172, ‘호우’ 중)

-카페 안에만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거나 오프숄더 블라우스로 한껏 피서 분위기를 낸 여성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가한 중년 여성들이네, 하고 생각하다가 나는 불에 데인 듯 놀랐다. 나이가 아주 많은 여성들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그들과 우리가 거의 비슷한 연배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라고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것이다. (219,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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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들 - 한 소설가의 자서전
필립 로스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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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5 필립 로스.

생존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소설가의 산문집 안 본다던 놈이(또 보면 개라며) 연휴 때 펼친 게 필립 로스가 겨우 55살에 자서전이랍시고 싸질러 놓은 이 책이었으니, 멍멍. 월월.

내가 읽은 필립 로스 소설들을 순서대로 짚어보기로 했다.

2019 포트노이의 불평(1969)
2020 전락(2009)
202109 죽어가는 짐승(2001)
202112 새버스의 극장(1995)
2022 에브리맨(2006)
2024 울분(2008)
2025 네메시스(2010)

아니 뭐...연례행사처럼 연간 1권 이내(2021년엔 반칙) 제한한 듯 읽었다. 2023년은 혈전 생겨서(칠조어론이랑 사드 같이 더 매운 거 본다고) 쉬었습니다…

오우...딱히 의도 한 건 아니지만 처음 읽은 데서 40년을 훅 뛰어갔다가 이후로는 대략 작가 연보 비슷하게 따라갔다… 사실들이 1988년에 나왔다니 포트노이와 새버스의 극장, 전락 사이에 이 산문집이 대충 낑겨 있을 것이고…


자서전이라고 했지만 사실 대부분을 조시와의 망한 결혼 생활에 할애하고 있다. 나는 진짜로 임신했고, 아직 차 사고로 뒤지지도 않았으니 차이는 있다만 조시에 대해 시시콜콜 내가 미쳤지, 왜 이런 여자랑, 이러는 화자를 보고 아...내가 소설가랑 안 사귀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나도 내가 미쳤지, 왜 이런 남자랑, 하는 소설들을 여러번 끄적였지만 말이다...그거만한 소재가 잘 없죠…

로스의 편지-자서전 줄줄줄-주커먼의 답장, 이런 형식인데, 이걸 픽션으로 읽던 팩트로 읽든 여태 읽은 로스 소설들에 비해 되게 후진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는 소설로 말하라고!!! 하면서 셀프로 싸다구 갈기고 있는 걸 지켜 보는 느낌… 그리고 책장을 보며 아직 남은 로스옹 재고 중에 주커먼 시리즈 없지? 이 책은 주커먼 읽지 말라고 고사를 지내는 느낌이었다.

예술가나 연예인들 사생활과 과거사 궁금하다고 캐느라 정작 그들이 거르고 걸러 갈고 닦아 보여주는 예쁘장한 것들(나는 마릴린 맨슨도 예쁘다) 제대로 못 보는 너희는 얼마나 멍청하냐… 이러고 훈계하는 겨우 반백 넘게 살고 치기어린 로스 보면서… 칠십 대 쯤에 아 저 책...지우지도 못하고 어쩔… 에이 그것도 다 내 작품 세계의 일부야! 아니 그래도 쪽팔린 걸 어쩔… 마지막 장광설까지 꾹 참고 읽어낸 나라서 할배로 빙의하는 놀이라도 해 본다. 왈왈.

+밑줄 긋기
-쉰 살이 넘으면 자신을 자신에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들이 필요하지. 내가 수개월 전에 겪었던 것처럼. 갑자기 속수무책의 혼란에 빠져 그전에는 자명했던 것들, 이를테면 내가 하는 일을 왜 하는 건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왜 사는 건지, 함께 살고 있는 사람과는 왜 살고 있는 건지 더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니까. (13, 그렇다면 저는 이삼십 년 전부터 50대였네요.)

-나는 스스로 정한 규칙들, 나의 일종이자 나의 것의 투영인 대리자에게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난 그대로와는 다르게 일어나거나, 내게 일어난 적 없거나 내게 일어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상상해야 하는 규칙들로 인해 고갈되었네. 이 원고가 무언가를 전달한다면 그건 가면, 위장, 왜곡, 거짓말로 인한 나의 탈진이라고 할 수 있지. (16, 아무 것도 전달 못 했으면 이것이 진실이오! 하고 함정 파고 앉았다. 뿡.)

-당시 나는 내 인생에서 사라져주기를 염원하고 기도하던 불구대천의 원수가 자동차 사고로 갑자기 제거되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또한 믿지 않았다. 그것도 하고 많은 장소들 중에, 메이와 내가 최근에 수만 명의 군중과 함께 반전 시위를 했고 일요일이면 둘이서 긴 산책을 즐기던 센트럴파크에서 말이다. 전날 밤 내가 한 일이라곤 눈을 감고 잠든 것밖에 없는데 모든 일이 끝났다니. 누가 순진하게 그걸 믿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녀가 9년 전 소변을 사려고 흥정을 벌였던 톰킨스스퀘어 공원에서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면 (미학적 대칭성은 있어도) 믿기가 조금 더 어려웠을 터였다. (216, 나는 오늘 내 소설의 핍진성 과잉이 소설을 소설로 읽히지 않게 한다는 질책?을 들었는데, 로스 할배는 삶이야 말로 핍진성 따위 없고 니들이 작위적이다! 할 일이 툭 불거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뿡.)

-어째서 사람들은 소설에 대해 말할 때보다 사실들에 대해 말할 때 자신들이 더 확고한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느낄까? 사실들이 훨씬 더 다루기 힘들고 결론도 잘 나지 않으며, 상상력이 일깨우는 탐구심을 죽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240, 그걸 또 못 알아들었을까 봐 주커먼까지 데려와 사족 다는 걸 보고 와...이 졸작으로 나 주커먼 나오는 시리즈 보지 말라고 발악하는 것 같다 싶었다.)

-자서전은 가장 조작적인 문학 양식이 아닐까 싶네. (249, 주석 그만 달라고... 메타 메타 메타 문학 그만 해 후져)

-모든 중독자의 주된 공포는 상실에 대한 공포, 변화에 대한 공포이고, 중독자들은 늘 기댈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있지. 그들은 의존적이어야만 하고, 자넨 완벽했어. 어쨌거나 자넨 믿음직한 사람으로 길러졌고(우웩 이걸 쓰면서 낯 안 간지러웠수?), 그 믿음직함은 중독자든,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든, 아니면 그 둘 다이든 붕괴된 사람들에게 자석과도 같은 역할을 하지. 그들은 자네에게 들러붙어 놓아주려 하지 않고, 자넨 믿음직한 사람이라 일을 반밖에 못 마친 상태에서 떠나기가 쉽지 않지. (265, 내가 사랑한 사람이 난 이런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네게 머무른 거야, 하면 참 야마 돌 거야… 조시가 죽어서 이 부분 안 읽은 게 유일한 행운일지도)

-“오쿠파티오. 라틴어로 된 수사적 표현들 중 하나예요. ‘로마 제국의 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자. 침략군의 위풍당당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자, 등등.’ (그리고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도 하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수사적 장치. 내가 궁금한 건, 그가 이해하지 못한 어떤 일이 그에게 일어난 적은 없었을까, 하는 거요.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99퍼센트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요. (277, 이해할 수 없는 걸 굳이 상상해서 이해해보려고 하는 놈들이 자꾸 뭘 쓰는 거니까…)

+현재 남은 로스옹 재고 사진...우리 패거리는 안 찍힘.. 다행히도 주커먼 시리즈 하나도 안 샀네...유령 퇴장 살 뻔 어휴...퉤퉤
+연보의 스티커 보고 저렇게 까지? 죽었다고 입체적으로 붙이기까지 해야 해? 했는데..
마지막 스티커 뒷면을 보고 알았다. 로스옹 제삿날을 4월 22일로 잘못 표기해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스티커질 했을 것을...다들 같이 스티커 붙였나요... 어우 로스옹 돌아가셨어 노젓자 이러고 급하게 두 달만에 나온 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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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5-06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미국 3부작? 을 아직 안읽으셨군요 ㅋ 부럽습니다~!! 저는 이책 읽다가 포기했습니다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5-05-06 18:57   좋아요 1 | URL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후반부에 길게 이어지더라구요 ㅋㅋㅋ 미국3부작이 어떤 소설들인지 잘 모르지만 재고가 넉넉해서 연1시리즈씩 한 6년은 버티겠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