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속노화 마인드셋 - 노년내과 의사가 알려주는, 내 몸의 주도권을 되찾고 무너진 삶을 회복하는 법
정희원 지음 / 웨일북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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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2 정희원.

노년내과 의사가 쓴 건강책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최은미의 소설집 ‘별일’을 읽다가 건강 챙기는 듯한 사람들끼리 저속노화 식단이니, 가속노화니, 하는 소리를 하길래 궁금했다. 전자도서관을 뒤져보니 ‘저속노화 식단’이라는 책이 정말 있었다. 그런데 인기가 제법 있는지 다섯 권 다 대출되고도 예약자리까지 꽉 차 있었다. 그 책보다 더 나중에, 올해 나온 신간인데 이 책 ‘저속노화 마인드셋’은 인기가 덜 좋은지 두 권 중 하나 빌릴 자리가 있어서 빌려 보았다. 사람들은 먹어서 뭔가 해결될 거라는 기대가 되는 책을 마음을 다잡는 책보다 더 좋아하는가 보다.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들어서 알지만 실천하기 어려워하는 것들. 좋은 음식을 넘치지 않게 먹고, 몸을 꾸준히 움직이고(운동하고), 독서, 악기, 글쓰기 같은 좋은 취미들을 계속 하면서 고자극의 전자기기 사용, 음주 같은 몸에 나쁜 건 줄이기, 스트레스 받지 않고 과로하지 말고, 개인이 이 모든 걸 해나갈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을 사회가 갖춰주면 천천히 덜 아프게 늙을 수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 요인을 제외하면 제법 잘 지키고 있는 것들이다. 지난 주말에 건강검진을 다녀왔는데, 1년치 성적표 기다리듯, 결과가 궁금하다. 집에서 자주 재고는 있지만 부정확한 인바디 말고, 내 체성분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몸 여기저기 곁들여 사는 결절들이 안 커지고 무사히 잘 지내는지. 다른 결과는 2주 정도 기다려야 하지만, 위내시경은 비수면으로 금세 했는데 늘 나오는 위축성 위염이랑 출혈 조금 있던 거 말고는 깨끗하다고 검사 직후 알려 주었다. 적어도 위 망치는 식습관은 안 하고 있나 보다.
주중에는 아침 시간도 부족하고 수면 지장 받는 게 싫어서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고 살았다. 카페인 없는 삶은 가능하다. 물론 정신과 약을 달고 살긴 했지만, 12월에 멘탈이 세게 터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때까지 안 터지고 한해 버티게 했으면 약은 소용이 있는 것이었겠지…

건강을 위해 거창하게 해야 할 건 크게 없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안 하고, 안 하고 있고, 내 몸과 마음을 조금 더 돌보는 일. 습관되면 과일닭가슴견과류 도시락도 내내 먹어도 안 물리고, 조금씩 하는 운동도 다쳐서 못하면 근질근질하고, 수면제 도움을 받긴 하지만 푹 자는 잠도 소중하다. 사랑하는 습관. 내려놓는 마음. 너무 애쓰지 않는 삶. 적당히 읽고 적당히 쓰는 나날.

굳이 안 읽어도 크게 지장은 없었겠지만 잘하고 있어 토닥토닥, 하는 느낌을 이런 책을 읽고 느낀다면, 정말 잘하고 있는 거 아닐까. 그래서 굳이, 하면서도 ‘저속노화 식단’ 예약 줄을 걸어 놓았다. 읽고 또 굳이, 하겠지ㅋㅋㅋ

아, 몸무게는 43-45킬로그램을 계속 유지 중인데 1년 만에 검진가서 재보니 키가 컸다!!! 158.7센티미터라니. 어깨 다치고서 안 아프게 자세 잡는다고 허리랑 어깨랑 피려고 애쓰고 다녔더니 마흔 넘어서도 키가 큰다. 구부린 걸 편 거지만 어쨌든 156에서 157, 158.3, 158.7ㅋㅋㅋ 물론 160까지는 안 되겠지만...더 펼 척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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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노화는 본래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한 방법을 설명하며 나온 개념인데, 개념에 대한 오남용이 오히려 사람들을 강박과 불안으로 몰아넣고, 그로 인해 건강을 해치는 악순환이 벌어진 셈이다.

-유전이라는 복불복 요소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생활습관은 스스로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부분이다. 마치 매주 소액의 용돈으로 복권을 사는 것은 큰 문제가 없지만, 그것에만 기대어 삶을 꾸려나갈 수는 없는 것과도 같다. 평소에는 꾸준히 건강 자산을 모아가다가 가끔 한두 번 즐기는 정도로 행운에 기대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애초에 아무 준비 없이 ‘로또만 바라보고 살 거야!’ 하는 태도는 위험천만하다는 뜻이다.

- 첫째, ‘이것만 먹으면 병이 다 낫는다’라거나 ‘과학계가 숨기고 싶어 하는 죽음의 성분’ 같은 자극적인 표현은 우선 경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너무 단순하거나 극단적인 주장은 진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실제로도 식품 하나가 모든 병을 치료한다거나, 특정 물질만 먹으면 10년 더 살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거의 없다.
둘째, 단일 연구 결과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자. (…)
셋째, 해당 사안에 대해 이미 공신력 있는 학회나 공공기관(세계보건기구,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관련 의학회 등)이 내놓은 권고나 가이드라인이 있는지 확인해보자.

-이런 실랑이가 열 손가락을 넘어간 무렵이었을까? 갑자기 기도가 좁아지고 누군가 내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감각과 함께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하나의 생각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간 오래 버텼다. 이제 멈추지 않으면 안 되겠네.’

-면역력은 인체 안에서 아주 정교하게 조절돼야 하며, 조금이라도 과하게 활성화되면 면역계는 내 몸을 공격할 수 있다. 실제로 면역력을 높여준다는 성분을 과도하게 섭취할 경우, 오히려 루푸스나 류마티스관절염 같은 자가면역질환 위험이 커질 수도 있다. 결국 면역력은 뭔가를 더 먹어서 끌어올릴 대상이 아니라, 제대로 된 휴식이 부족하다고 몸이 보내는 신호에 더 가깝다. 우리가 면역력이 떨어졌다고 느낄 때, 그것은 코르티솔이 만성적으로 높아진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프랑스는 주 35시간 근무제를 법으로 정하고 최소 5주 이상의 연차휴가를 의무화했으며, 퇴근 후 업무 이메일이나 전화를 받지 않을 권리, 소위 ‘연결되지 않을 권리’까지 법제화해 직원들이 여가 시간에 완전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여름철이 되면 한 달 가까운 장기휴가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도시의 상점들이 한꺼번에 문을 닫는 풍경도 흔하다. 독일 역시 근로기준법상 연 4주의 최소 휴가를 보장하지만 실제로는 기업들이 6주 이상의 휴가를 주는 경우도 많고, 업무 시간이 아니면 직원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러한 몰입(flow, 플로우) 상태에서는 행동과 의식이 완전히 합쳐진 듯한 집중과 시간 감각의 왜곡이 일어나고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진다. 미국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상태를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드는 최적의 경험’이라고 부르며 행복의 비밀로 언급하기도 했다. 몰입 경험이 만드는 자기 목적적(autotelic)인 즐거움은 삶의 만족도를 높여준다는 연구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페이스가 늘고 달리는 거리가 늘어나다 보면 어느덧 실수가 찾아오게 마련이다.

-건강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즐겁게 사는 수단이자, 즐겁게 잘 사는 삶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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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마음산책 짧은 소설
최은미 지음, 수하 그림 / 마음산책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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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1 최은미.

최은미의 소설은 장편 하나(‘아홉 번째 파도’), 소설집 하나(‘눈으로 만든 사람’), 이제 짧은소설집 하나 ‘별일’까지 골고루 보았다. 이전 소설들은 좀 많이 슬픈 사람들이 자주 나왔는데, 이번에는 작가가 그토록 쓰고 싶었다던 짧은소설들이라 그런가, 슬픔은 많지 않고, 있어도 엷고, 지금의 내 마음에 이 계절에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남의 만두 훔쳐 먹는 이야기랑, 이희승 그 개새끼 이야기가 기억에 좀 남았다. 양배추 시리즈 1,2는 있을 법한데 막 엄청 재미있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무수히 많은 온라인 동호회, 커뮤니티, 그들의 번개 모임(요즘엔 뭐라 그러나 현피? 이것조차 옛말이네)이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나도 그러고보니 친구들이 거의 다 온라인 친구들이라네...

계절감 있는 소설이 제법 나왔다. 여름, 여름, 가을, 겨울, 또 겨울, 봄은 잘 기억이 안 난다. 내 봄… 겨울은 이제 시작인데 멀었네...

집에 오니 엄마가 김치만두를 만들고 계셨다. 그런데 나는 이미 주니어와퍼를 네 개나 사들고 집에 왔다. 햄버거 먹고 배부른데 만두도 맛있어 보여서 두세개 먹었더니 정말 맛있었다. 좀 심심한가, 했는데 햄버거가 짭짤해서 그랬던 것 같다. 작년 겨울 담근 묵은지에 고기 듬뿍 넣고 담백하고 맵지 않게 만들었다. 엄마가 다음 판을 찔 때는 청양고추 첨가해서 매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분명 배가 부른데 맛이 궁금해서 하나 또 먹었다. 만두를 참아야 할 만큼, 훔칠 만큼 만두를 너무 좋아하지도 않고, 단골집 만들어 사러다닐 필요 없이 엄마가 잘 만들어주니까, 전남친 사칭 나쁜놈들한테 보이스피싱 당할 일 없으니 복받은 인생인가 싶었다. 만두 나오는 소설 제목이 ‘이상한 이야기’인데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고 때마침 이 소설 읽자마자 만두를 먹게 되어서 허허, 싱크가 맞았다.

양배추 채 써는 칼 구경하러 간 집에서 동호인들이 저속노화, 가속노화 타령을 해서, 대충 느리게 늙기인 것 알면서도 저속하게 늙진 말아야지… 하다가 전자도서관에서 검색해보니 저속노화 마인드셋이라는 책이 있길래 빌려서 읽고 있다. 작가의 전작 저속노화 식단인가 하는 책이 더 인기 있었나 본데, 그건 예약이 꽉차 있었다. 이 책은 뻔한 소리이지만 틀린 말은 없어 보여서 그냥저냥 읽을 만했다.

소설가는 이 소설집의 모든 소설에 별일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다 들어맞을 거라고 했다. 별일 아니라고 하지 않고 하나하나 별일이라고 여기는게 약간 소설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달까. 별일 아닌게 될 수 있는 순간들을 붙잡아다 잘 써 놓으면 그게 별일이 되는 것이다. 이건 다 소설이지만, 그래 언젠가 별일 아닌 것 같은 이야기를 별일처럼 쓰던 때도 생각나고, 그때가 조금 그립지만 안 써도 충분히 견딜만한 인생이다. 난 그냥 열심히 읽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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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이 잘 되는 거 보면 그냥 기분이 좆같아.”
“에휴, 구슬 삼키고도 살아난 애기가 말본새 봐라.”
“꺼져.” (186, ‘특별한 어떤 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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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 - 맛, 음식, 요리, 사피엔스, 그리고 진화
조너선 실버타운 지음, 노승영 옮김 / 서해문집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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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251210 조너선 실버타운. 재독.

원제는 다윈과의 만찬인데, 번역 제목이 더 직관적인 느낌이 든다. 자연사 빼고 진화 같은 걸 넣었으면 어떤 사람들은 싫어했을까?

아래는 예전 독후감...
https://m.blog.naver.com/natf/221537174281

6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재미있었고 기억에 오래 남았다. 새로 읽어보니 전보다 더 빨리 읽힌 것도 같고,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전히 재미있었다. 인간과 인간의 먹거리가 된 동물, 식물, 먹거리 제공에 도움 주는 미생물까지, 흔한 식재료들을 소재로 진화, 인류의 기원과 발전, 미래 조망(주로 GM찬성 논의)까지 골고루 다루어주었다. 오랜만에 예전 독후감을 읽고 나니 저때의 나는 요약을 조금 더 열심히 했구나...전자책이라 인용도 더 쉬웠겠구나. 다행히도, 신기하게도, 이번에 종이책으로 읽으며 새로 옮겨 적은 구절들은 이전과 겹치지 않았다.

음식 책도 진화 책도 재미있는데, 음식을 소재로 진화를 풀어나가면서 이렇게 잘 써놓으면 훌륭하다. 좋은 책인데 많이 읽히지 않은 듯해 아쉽다. 여러분 제가 재독이 흔한 놈이 아닙니다… 책 사세요. 책 사 주세요. 종이책은 아쉽게도 절판이다. 전자책이 더 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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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일은 식물의 유전자라는 귀중한 짐을 감싼 일회용 포장지다. 과일의 영양소는 택시비이고, 택시비를 챙기는 새와 박쥐와 영장류는 택시이며,(식물의 관점에서) 목적지는 미래 세대를 위한 확실한 장소다. (208)

-과당의 문제는, 엄연한 당이고 열량도 포도당과 같은데도 인체가 당으로 인식하지 못해 에너지 섭취와 저장을 제한하는 조절 호르몬을 활성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9, 과당이 왜 나쁘지? 하고 매번 궁금했는데 이 책 이미 읽고도 그간 여전히 궁금했던 나…이번엔 안 잊어버려야지. 정확히는 과당 섭취시 인슐린, 포만감 센서가 작동이 잘 안 되고, 뇌는 그래도 당으로 인식한다고 함.)

-과일을 통째로 먹을 때처럼 천천히 혈류에 흘러드는 소량의 과당은 간에서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대량의 과당을 정기적으로 섭취하면 간에 위험 수준의 지방이 쌓여 대사 증후군과 제2형 당뇨병의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안타깝게도 주서기나 스무디 기계를 통과한 과일은 위에서 통과일이 아니라 매우 단 음료수처럼 행동하는데, 이것은 통과일에서 과당의 흡수를 지연시키는 섬유질이 기계적 공격을 받아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211)

-하지만 치즈는 다르다. 한 종의 산물이 아니라, 아니 두종의 산물도 아니라 수십 가지 세균과 진균으로 이뤄진 소우주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치즈는 미생물체, 즉 미생물의 군집이다. 자연에서 이와 가장 가까운 미생물체는 토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양은 진균, 세균, 그리고 죽은 물질과 서로를 먹는 미생물로 가득하다.(222-223)

-사람의 눈은 보는 용도로만 설계된 것이 아니다. 보이는 용도로도 설계되었다. 우리는 눈을 이용해 남에게 자신이 보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여기에는 어떤 진화적 이점이 있을까? 실험 증거로 뒷받침되는 한 가지 가설은 사회적 거래에서 상대방을 쳐다보면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강력하고 무의식적인 효과여서 심지어 눈을 찍은 사진만 가지고도 행동을 바꿀 수 있다. (269)

-식단을 연구하면, 여러 문화의 다양한 식단을 비교해 얻을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건강하고 균형잡힌 식단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고기를 과식하거나 동물성 단백질을 아예 끊는 극단적 식단만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 극단 사이에 있는 식단에서 건강의 최대 위협은 지나친 열량섭취라는 현대적 현상이다.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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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망원시장 - 여성상인 9명의 구술생애사
최현숙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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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7 최현숙 외.

내 부모도 장사를 했었다. 시장 안은 아니고, 시장 바깥에서 멀지 않은 사거리, 터미널로 가는 길에 있는 가건물이었다. 아빠가 귀금속 세공사 일을 했었어서 금은방을 했다. 빚을 내어 보증금, 인테리어비, 진열할 물건들 떼어오는 값으로 써서, 원래부터 겁이 많고 불안도가 높은 아빠는 매일 가게를 접자고 엄마를 들볶고 결국에는 조현병까지 걸렸다. 아빠가 아픈 동안 엄마가 가게를 혼자 운영했다. 작지만 고가의 물건이라 도난, 강도, 부도수표 지불, 반지계 파토, 외상값 미회수 등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 그렇지만 최고의 재앙은 정신질환 호전 이후에도 하루종일 나가 술먹고 놀다 들어와 깽판치고, 세콤(도난방지설비)이 잘 안 된다고(꽐라되서 자꾸 문잠그는 타이밍을 놓침) 셔터 문을 마구 발로 차고 엄마를 때리고 언어폭력을 행사하던 아빠였다.

엄마는 자기 성격과 맞지 않던 장사를 하느라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점심 도시락을 싸다가 나르고, 아빠가 안 오면 혼자 문을 닫고, 술취한 채 문을 닫겠답시고 혼자 발광을 떠는 아빠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창피하고. 아빠는 손님과 자주 싸우고, 싸게 팔아도, 비싸게 불러 못 팔아도 난리를 떨었지만, 엄마는 물건을 사지도 않을 거면서 가게 쇼파에 들러붙어 박카스를 얻어 먹거나 커피를 타달라고 하는 아빠 지인들, 주변 상인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친절, 요새 말로 감정노동을 했다. 결국에는 그 사람들이 잠재적인 손님이었으니. 1994년에 가게를 열어서 2007년 아빠를 떠나 서울로 올 때까지 13년 간 30대 후반에서 50 직전까지 장사하는 엄마를 지켜봤다. 그런 탓인지 내가 장사할 일은 꿈도 안 꿔 봤고, 실제로 형태가 있는 재화를 파는 일은 안 해 봤다. 대신 용역? 서비스?를 팔고 있읍니다...

대부분 50대 언저리인 망원시장의 여성 상인들의 생애를 구술한 것을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의 제자 작가들이 인터뷰해서 정리한 책이었다. 그래서 글마다 완성도나 가독성, 반복되는 말이나 내용 여부가 편차가 좀 있었다. 그리고 구어체로 쓰여 있으면 잘 읽힐까 했는데, 나새끼 남의 말 경청 못하는, 사회 지능 부족… 오래 더디게 읽었다. 읽던 거 먼저 읽자 하고 새로운 책 펼칠 엄두를 못 냈더니 독서 자체가 더뎠다. 힘든 한 주이기도 했다.

2018년의 여성 상인들은 온갖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지만, 그래도 먹고 살 정도는 되고, 스스로 쌓아올린 지금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삶에 대한, 자기가 몸담은 시장이라는 장소에 대한 긍정과 애정도 공통으로 엿보였다. 그렇지만 삐뚤이 나놈은 장사 잘 안 되고 힘든 상인들은 인터뷰에 응하려 들지도 않았겠지… 장사 못해 먹겠다 싶어도 이걸로 책이 나가고 내 얼굴과 이름이 나간다 생각하면 어느 정도 미화되는 부분도 있었겠지… 이 정도면 고통 서사 중독자야… 행복하고 편하고 좋다고 하는 걸 보면 못 믿거나 전체 구성원의 일부 표집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어딜가도 불행을 조금씩 남겨 놓고 사는 놈의 눈은 그렇다.

내가 사는 관악구 지역 상인들의 이야기였으면 조금 더 이입해 봤을 듯하다. 반대로 망원동 근처에 살거나 인근을 많이 돌아다녀 지리를 아는 사람들은 책을 읽는 동안 시장의 모습이 눈에 선하고, 왠지 시장 한 번 더 가서 상인 분들 여전히 잘 지내시나 궁금해서 아케이드 안 이곳저곳을 기웃대기고 뭘 사기도 할 것 같다.

책으로나마 다른 종류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읽는다. ‘뭐든 다 배달합니다’, ‘까대기’, ‘편의점 인간’(여긴 좀 많이 이상한 놈이 나오긴 하지만), ‘골목의 약탈자들’(여긴 주로 자영업자들 등쳐먹는 놈들이 많이 나온다) 같은 데서도, 그외 작가, 분식점, 부동산, 판매원, 여러 소설과 에세이에서 다른 삶을 엿본다. 과학자들이 쓴 책에서는 과학자의 삶을 봤구만… 그러고보니 선생 이야기는 많이 읽지 못했던 것 같다. 의도적으로 교육에세이 같은 거 피해서 그럴 수도 있고… 나도 학교 생활 적당히 픽션으로 재구성해서 뭘 쓸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 귀찮다… 어른들의 요구는 칼 같이 자르는데 아이들 앞에서 약자가 되는 나는 아무래도 직업을 잘못 골랐다.(친구는 나에게 최악의 상대는 악한 약자라고 했다. 말도 참 잘 골라.) 별 수 있냐 그냥 살아야지… 시장 언니들처럼 긍정 연대 협력 투쟁하면서 살 수 있을까… 됐다. 너무 애쓰지 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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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마포구에서 여성건강 사업 한다고 설문지를 돌리는데 질문에 ‘당신은 아픈데도 참고 일한 적이 있습니까?’하는데 나 거기서 볼펜을 멈추고 있었잖아요. 이걸 내가 어떻게 써야 되나. 나는 늘 아프거든요. 365일 다 아파요. (91, 노동의 고통.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이나 몸이고 마음이고 다 아프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이 최고로 편해. 내가 뭘 안 했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 40대에는 “내가 장사는 왜 하나. 여기서 뭐하는 건가?”그런 생각으로 한참 힘든 적이 있었어. 애들이 다 크고 집안이 편안해지니까, ‘아, 지금이 참 좋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해. (123, 40대에게 괴로워도 존버하면 50대엔 편해, 하는 느낌. 지금이 좋긴 한데 편하지 않은 저는 버틸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그녀는 현명하다. 이제와서 그녀의 삶이 불이익을 받았고 계급의 불평등이었다고 우긴들 무슨 소용일가. 행복했다 생각하는 긍정의 힘 앞에 계급적 논리가 무슨 소용일까. (153, 그러니까 종교든 정치든 우상이든 자부심이든 뭔가를 사랑하며 행복해하는 어르신들의 산통을 깨는 대신, 투쟁은 아직은 불행한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하자..곧 만41이 될 난 늙은이인가 젊은이인가 아리까리하다만. 투쟁 안 하려고 늙은 척하는 듯)

-우울은 좌절에서 온다. 내가 충분히 나로서 살지 못할 때, 세상이 내게 나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요구하는데, 이를 거부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을 세계로부터 닫아 건다. (271, 가사에 갇혀 있을 때 우울증에 시달리던 한 상인은 시장 일을 시작하고 시장 사람들과 나이트클럽에 놀러 다니면서 우울감이 가시고 성격도 변했다. 일을 하는 사람은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다면 내패대기 치고 싶고, 이런저런 이유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일하기를 꿈꾼다. 해도 안 해도 우울과 좌절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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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 - 작고 찬란한 현미경 속 나의 우주
김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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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251204 김준.



예쁜꼬마선충에 대한 연구자들의 책은 ‘벌레의 마음’을 이미 갖춰두고 있었다. 얇고 표지 예쁘고 아마도 과학자가 쓴 에세이라는 것 말고는 책 정보가 별로 없던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를 먼저 폈다. 그런데 이 책이 예쁜꼬마선충 연구하는 과학자가 쓴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새치기 하고 만 책…

자신의 연구생활과 연구대상인 예쁜꼬마선충에 대해 애정을 담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책이었다. 주60-80시간 연구노동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연구 안 하길 잘했다가 아니라 난 잘 못했을 것 같다… 결과가, 성취가 가시적이지도 단기적이지도 않는 일에 오래 매달리는 일에는 아직도 미숙하다. 아마 평생 미숙할 것 같은 급한 성질의 나놈아…

일터에서 많이 힘들고 상처입었다. 내 말은 다 무의미했고 사람은 변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을 변화시키라는 요구를 받으며 나는 일을 한다. 잘못하는 사람들은 늘 자신만 그런게 아니고, 자기는 억울하고,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피해를 입고 상처 입고 울게 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그건 누구의 짓일까? 나는 무력감에 감정을 폭발하고 울었다. 더는 나에게 이 짐을 지게 하지 마소서. 누가 들어줄까. 이번 생은 망했다.

예쁜꼬마선충으로 태어난 것보다는 나로 태어난 게 더 나은 일인지 자신할 수 없다. 쟤들은 그냥 짧은 순간 열심히 알을 낳고 조금 살다 죽는다. 그렇게 무수히 벌레들이 이어진다. 사람 사는 것도 상대적으로 보면 찰나일텐데, 벌레들도 그 짧은 기간 나름의 고충도 고통도 있겠지. 그렇지만 짧게 겪을 거라 생각하면 나보다 못하다고 못하겠다. 한국 좋아졌다 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꾸준하고 끈질긴 과학자 책 읽어놓고도 왜 이런 마음인지. 오늘 하루가 힘들어서 아니 이번 한주가 한달이 한해가 그랬겠지. 모두가 힘들텐데 사람은 자신의 힘듦 말고는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이 책을 보면 남의 힘듦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런 힘든 일일지라도 거기에서 재미와 발견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좀 부러웠다. 나는 내 일에서 재미도 감동도 없다. 도망칠 궁리하다가 실패했다. 다시 도망칠 길이 있나 이것저것 찾아봤지만 답이 없었다. 내 마인드셋의 문제인지 환경과 맥락의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다 문제겠지. 내 문제는 컴퓨터로 코딩해 돌리는 연구과제들보다 답이 없어 보인다.

다 읽고나서 과학자가 꿈이라 과학고에 가겠다는 한 어린아이에게 이 책을 주었다. 오늘 힘들어서 펑펑 운 내가 불쌍했는지 어린이는 주섬주섬 하리보 곰돌이 젤리를 꺼내서 내게 주려고 해서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찰나의 위로였지만 이게 내 일의 지속할 기운을 주지는 못했다.

+밑줄 긋기
-생물의 염색체는 대부분 양 끝이 노출된 실처럼 생겨서 이 양끝이 망가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책의 시작과 끝이 표지로 덮여 있는 것처럼, 염색체도 양 끝이 특정한 덮개(텔로미어)로 보호되어 있다.
그런데 때로는 이 덮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떨어져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자연히 염색체 끝부분이 망가지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마치 표지가 뜯겨진 책의 낱장이 점차 흐트러지는 것처럼 염색체도 죄다 망가질 수 있다. (…) 다행히 표지가 뜯겨나간 뒤에도 염색체라는 책이 한 방에 찢겨나가진 않았다. 어떻게든 새로운 덮개를 다시 수선해서 붙이려는 시도가 생겨났고, 너무나 얇지만 끝을 덮을 수 있는 1만자가량의 얇은 덮개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걸론 부족했던 것 같다. 이 얇은 문자 덮개 끝에, 염색체 안쪽에 있던 20만자 정도 되는 좀 더 두꺼운 부분을 끌어다가 새로운 덮개로 삼으려는 시도가 다시 한번 있었다. 덕분에 이 염색체 끝은 표지가 한 번 뜯겨나간 흔적만 남긴 채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고, 그 뒤에야 다시 원래 쓰이는 튼튼한 덮개가 염색체 끝부분에 씌워지게 됐다. (157-158, 하와이출신 예쁜꼬마선충의 염색체가 다른 동네 애들과 다른 이유를 책에 비유)

-염색체란 정말 튼튼해 보이지만 사실 자주 끊어진다. 망가진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계속해서 끊어진 부분을 때우고 수선해서 회복시켰을 뿐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돌연변이가 생겨나고 다양성이 생겨나며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긴다.
사람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겠어? 인생이라는 실타래도 매순간 끊길 듯 위태롭지만 결국 어떻게든 이어지고,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어느 순간 성장할 수 있는 것 같다. 열심히 살기 정말정말 싫지만, 살아남으려면 별수 없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159, 으으으 가혹한 체험 진화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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