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크래프트 :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
미셸 우엘벡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4점  ★★★★  A-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의 시집 악의 꽃의 첫머리에 있는 독자에게는 시집의 서문에 해당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제일 흉하고 악랄하고 추잡한 놈이 있다면서 독자에게 경고한다. 그놈은 소리 없이 돌아다닌다. 하지만 그놈은 무시무시한 힘을 가졌는데 지구를 박살내고, 한 번의 하품으로 지구의 모든 인류를 집어삼킬 수 있다. 시인은 시의 마지막 연에 그놈의 정체를 밝힌다. 그것은 권태라는 괴물이다. 시인은 권태가 다루기 힘든 괴물이라면서 이것이 인류에게 주는 고통을 아는 소수의 독자를 위선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은 시인의 동지와 같은 존재. 악의 꽃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글에서 권태를 자주 언급했는데, 그가 내린 권태의 정의는 다양하다. 그는 현대인의 악과 천박함을 말하기 위해 권태라는 소재를 즐겨 썼다. 보들레르에게 권태란 덧없고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인간이 품고 있는 불만감이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유일한 시집을 공개하면서 부조리한 세상에 맞섰고, 천박한 대중을 향해 도발했다. 그러나 시인은 위선적인 독자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이러한 시인의 진심은 미국의 소설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염세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글쓰기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러브크래프트는 철저하게 대중과의 거리를 둔 채 글을 썼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소설은 작가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준다. 러브크래프트의 글쓰기는 단순히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세상에 알려서 인정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자신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맞서는 개인적인 분풀이다러브크래프트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으나 사후에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와 함께 미국 공포문학의 대가로 평가받았다.[주1] 


러브크래프트의 삶과 작품 세계를 독자적인 관점으로 분석한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은 러브크래프트를 극단주의자라고 평가한다러브크래프트는 이 세상과 모든 존재는 악하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죽을 때까지 이 관점을 고수했다그는 세상에 불만이 많았고, 인류를 경멸했다. 어쩌면 러브크래프트가 생각한 괴물은 이 세상 자체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괴물에 분풀이하기 위해 또 하나의 괴물을 창조한다. 그것이 바로 크툴루(Cthulhu)’를 비롯한 외계의 존재들이다. 러브크래프트의 괴물들은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게 하고, 그들을 눈앞에서 본 인간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괴물과의 조우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정신을 습격하는 악몽이 된다. 악몽에 점령당한 인간에게 희망은 없다. ‘nevermore(이젠 끝이야).’[주2]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이 앵글로색슨 혈통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혈통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세상을 향한 증오는 결합되어 극단적인 인종차별적인 사고를 잉태한다. 혼혈인과 이민자들에 대한 그의 경멸은 소설 속에 반영되어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처음 읽는 독자는 이 사실을 놓치기 쉽다. 우엘벡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나타난 문제점을 언급하고 비판한다.


러브크래프트는 특이한 사람이다인류를 경멸하고,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던 그가 유독 좋아했던 일이 편지 쓰기다. 젊은 작가들은 편지를 통해 러브크래프트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초고 교정을 부탁했다. 편지를 받은 러브크래프트는 초고를 진지하게 봐주었으며 답장을 꼭 써서 보내줬다.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작가들은보들레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작가의 역량을 주목한 몇 안 되는 러브크래프트의 동지들이다. 러브크래프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작가들을 가리켜 러브크래프트 서클(Lovecraft circle)’이라 한다러브크래프트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친절하고 상냥한 신사로 기억했다.


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러브크래프트 평전이라기보다는 작품 분석에 초점을 맞춘 문학 비평서에 가깝다.[주3] 그러므로 이 책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아직 안 읽은 독자에게 권할 수 없다. 러브크래프트 입문자를 위한 책이 절대로 아니다우엘벡이 러브크래프트의 대표작러브크래프트의 골수팬(Lovecraftian)들은 작가의 뛰어난 작품 일곱 편을 그랑 텍스트(grands textes, 뛰어난 걸작)’라고 부른다의 결말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는 러브크래프트라는 불가사의한 작가와 그랑 텍스트에 대한 주석서다러브크래프트의 추종자라 자부하는 독자는 우엘벡의 견해에 반박하는 주석을 쓸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을 쓴 미국의 소설가 스티븐 킹(Stephen King)은 우엘벡의 핵심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도전적인 독서를 지향하는 러브크래프트 추종자라면 이 책을 단순히 작가를 향한 팬심을 유발하는 책정도로 봐서는 안 된다그들에게 제안한다소설과 신화로 남은 러브크래프트에 맞서라.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1] 포는 러브크래프트와 보들레르, 이 두 사람과의 인연이 깊은 작가다. 러브크래프트가 좋아하는 작가는 포였고, 그의 영향을 받아 소설을 썼다. 포의 문학적 재능을 눈여겨 본 보들레르는 포의 단편소설을 불어로 번역했다. 



[2] 포의 시 까마귀(The Raven)에 반복되어 나오는 말이다.



[주3] 히가시 마사오(東雅雄)크툴루 신화 대사전(AK커뮤니케이션, 2019)에 수록된 다른 차원의 인간-러브크래프트의 생애와 문학은 러브크래프트의 삶을 좀 더 상세하게 소개된 글이다이 글 속에 러브크래프트가 직접 쓴 개인 프로필이 있다.



* 37

 

 출간 기념 사인회를 열면 젊은 친구들이 책에 사인을 받으러 찾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롤플레잉 게임[3]이나 시디롬을 통해 러브크래프트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주3] 롤플레잉 게임(RPG: Role-Playing Game)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비디오, 컴퓨터, 모바일 게임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롤플레잉 게임은 원래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 Table-talk Role Playing Game)를 뜻하는 용어다TRPG는 여러 사람이 탁상에 모여 앉아 각자가 맡은 캐릭터 역할을 연기하는 게임이다우엘벡이 언급한 롤플레잉 게임TRPG일 것이다크툴루 신화를 소재로 만든 호러 TRPG1981년에 출시된 <크툴루의 부름>(Call of Cthulhu)이다. 이 게임은 현재까지 7판이 출시되었고, 국내 TRPG 전문 출판사 초여명이 번역 출간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통계 역학을 믿으려면 분자를 믿어야 한다.

 

(윌리엄 크로퍼, 위대한 물리학자 3에서, 105)





내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릴 것이다.” 이 말을 남긴 프랑스의 화가 쿠르베(Courbet)는 대상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회화의 중요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 또는 성서에 묘사된 성인과 천사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눈에 비친 현실을 그렸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는 원자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명했다. 원자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서다. 마흐는 어떤 현상의 원인을 설명하게 해주는 관찰과 실험을 중요하게 여겼다. 원자론자들은 마흐의 견해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 원자의 존재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세등등한 마흐는 원자론자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으리라. “내게 원자를 보여 달라. 그러면 원자론을 믿을 것이다.”





















* 데이비드 린들리, 이덕환 옮김 볼츠만의 원자: 물리학에 혁명을 일으킨 위대한 논쟁(승산, 2003)


* [절판] 윌리엄 크로퍼 위대한 물리학자 3: 패러데이의 전자기학과 볼츠만의 통계 역학》 (사이언스북스, 2007)



 


마흐를 필두로 한 실증주의자들의 공세에 원자론자들은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마흐와 같은 출신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은 원자론을 부정하는 학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들과의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수학자들의 전유물이었던 통계와 확률을 이용해서 운동하는 원자의 이동 방향과 상태를 알아내려고 했다. 볼츠만의 견해에 따르면 기체는 다수의 분자로 이루어졌다. 그는 통계적인 방식을 이용해 기체 속 분자의 성질을 설명하는 기체운동론을 주장했다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맥스웰(Maxwell)을 포함한 선대의 과학자들이 기체운동론을 논의한 적이 있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볼츠만이었다기체운동론은 통계역학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의 등장을 알리는 중요한 이론이 되었다물론 통계의 중요성을 주목한 볼츠만의 획기적인 발상 역시 원자와 분자의 세계를 믿지 못한 동료 과학자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마흐도 그렇고, 당시 과학자들은 관찰과 실험을 거쳐 원자론이 명백한 이론인지 아닌지 검증하고 싶어 했다.


볼츠만은 실증주의자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원자론과 기체운동론과 관련된 연구에 매진했다. 하지만 진전이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를 괴롭히던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 우울증을 견디지 못한 볼츠만은 1906년에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다가 호텔 방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볼츠만이 자살하기 일 년 전인 1905년에 스위스 특허청 직원이 총 다섯 편의 논문을 연이어 발표했다. 그 논문 중에 물 위에 떠 있는 꽃가루가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현상에서 나나타는 브라운 운동(Brownian Motion)’을 다룬 것이 있었다. 브라운 운동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스위스 특허청 직원은 분자의 움직임을 실험으로 검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문은 볼츠만의 원자론에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문헌이었다. 안타깝게도 볼츠만은 이 논문을 알지 못했다. 


재미있는 점은 스위스 특허청 직원이 좋아한 철학자가 마흐였다. 그 직원의 이름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다. 아인슈타인은 191512월에 논리실증주의의 발전을 주도한 독일의 철학자 모리츠 슐릭(Moritz Schlick)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이 공부한 데이비드 흄(David Hume)과 마흐의 인식론이 특수상대성이론의 탄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

















* 김현철 강력의 탄생: 하늘에서 찾은 입자로 원자핵의 비밀을 풀다(계단, 2021)




원자핵 속에 있는 입자들을 결합시키는 힘인 강력이 발견되기까지 나온 과학자들의 업적을 보여준 강력의 탄생에 볼츠만이 잠깐 나온다.



 볼츠만은 시대를 한참이나 앞선 과학자였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않던 원자론을 주장했다. 그 이듬해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던 에른스트 마흐가 빈 대학에 왔다. 볼츠만의 원자론을 따르는 사람들과 마흐를 추종하는 실증주의자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23)



나는 강력의 탄생서평에서 볼츠만을 시대를 앞선 과학자로 평가한 저자의 견해를 비판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자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볼츠만은 시대를 앞선 과학자였다. 물론 볼츠만이 원자론을 주장했다고 해서 시대를 앞선 과학자로 평가하는 건 아니다. 볼츠만이 위대한 과학자인 이유는 통계와 확률을 동원해 미시적인 원자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미시 세계에 접근하기 위해 수학을 이용한 볼츠만의 발상은 당대 물리학자들이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희한한 것이었다(《볼츠만의 원자》 80쪽).


볼츠만의 원자위대한 물리학자 3: 패러데이의 전자기학과 볼츠만의 통계 역학은 볼츠만의 삶과 업적, 그리고 통계 역학을 소개한 책이다. 그런데 볼츠만의 원자에 오자가 있다. 정오표를 남긴다.



* 27쪽: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케인스


[] 케임브리지 대학생 시절에 케인스(Keynes)는 철학 수업을 청강한 적이 있다. 케인스 전기(두 권으로 된 번역본이 있는데, 이 책의 부제는 경제학자 · 철학자 · 정치가)를 집필한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철학자로서의 케인스의 면모를 주목했다. 케인스는 마르크스(Marx)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한 1883년에 태어났고, 1902년에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그는 20세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 53쪽: 부루크너 브루크너(Anton Bruckner)


* 100쪽: 호이겐스 하위헌스(Huygens)


* 114헨리 캐빈디쉬 헨리 캐번디쉬(Henry Cavendish)


* 134내장암 대장암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그만 메모수첩 2021-08-03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빅뱅 이후 38만 년, 자유전자와 원자핵이 만나 원자들이 형성되는 장면을 읽고 있는데 볼츠만의 이야기를 읽으니 마음이 편치가 않네요. 영면하셨기를. 언제나처럼 리뷰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21-08-03 21:36   좋아요 1 | URL
볼츠만이 우울증으로 고생하지 않았으면 오래 살아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을 거고, 지금쯤 누구나 기억하는 과학자로 알려졌을 겁니다.

새파랑 2021-09-10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9월 당선 축하드립니다~!!

mini74 2021-09-10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1-09-10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서니데이 2021-09-10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조그만 메모수첩 2021-09-10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이하라 2021-09-10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초딩 2021-09-11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3점  ★★★  B






18세기 프랑스의 풍경화가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의 별명은 폐허의 로베르. 폐허가 된 고대 건축이 있는 풍경을 자주 그려서 이런 별명이 생겼다여행기 형식으로 된 장편소설 토성의 고리를 쓴 독일의 작가 W. G. 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에게 붙여주고 싶은 별명은 폐허의 제발트


토성의 고리에서 화자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기 쉬운 폐허의 현장들을 응시한다. 그가 주목한 폐허의 현장들은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최적의 여행 장소와 거리가 멀다. 그곳엔 쓸쓸함이 감돌고 있다. 화자는 자신을 덮쳐오기 시작한 공허감을 벗어내기 위해 영국의 서퍽(Suffolk) 주로 도보 순례를 한다. 소설의 부제는 영국 순례. 하지만 소설 속 화자의 여행은 영국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그의 내면은 가지처럼 뻗어서 영국 너머의 세계로 향하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장소를 답사하기도 한다예를 들면 화자는 사우스월드(Southwold)와 월버스윅(Walberswick) 마을 사이를 오가는 철교를 바라보다가 19세기 중반 중국의 시대상을 되돌아본다이것은 눈으로 보는 여행이 아닌 마음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여행이다화자가 폐허의 현장들을 둘러보면서 사색에 빠질수록 허무와 우울은 더욱 선명해진다. 우울한 순례자는 망각과 무관심의 풍화 작용으로 부식되고 퇴색된 장소들을 보며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면서 발전해왔던 세상의 허망함을 깨닫는다.


점점 세상은 더 좋아질 거라는 낙관적인 믿음은 인류를 눈멀게 한다. 세상을 좋아지게 만드는 데 기여한 인간은 역사의 승자가 된다. 승자에게만 주목한 역사는 대대손손 보존되는 우상(偶像)을 견고하게 해주는 재료다. 우상이 우뚝 서 있을수록 우상의 그림자는 더욱더 짙어진다. 우상의 그림자는 패자 또는 무명으로 기록된 역사를 가린다토성의 고리에서 보여준 작가의 글쓰기는 폐허의 장소에 드리운 우상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부식되어 뿔뿔이 흩어져버린 역사의 파편들을 모으는 작업이다토성의 고리는 토성에 접근하다가(토성의 중력에 의해서) 부서진 위성들의 잔해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 제목은 주류 역사가 만든 거대한 우상을 못 이겨 산산조각이 난 또 다른 역사의 파편들을 의미한다. 작가가 글로 기록하면서 복원한 역사는 미래 낙관론과 우상 중심의 역사관에 도취한 인류가 보지 못한 세상의 진실이다.


토성의 고리는 인내심이 필요한 소설이다. 화자의 순례는 옆길로 새거나 때로는 미로 같은 장소에서 헤매기도 한다. 여기에 폐허의 현장들을 둘러보면서 느낀 상념까지 버무려진 글은 작가의 문장을 따라가는 독자를 지치게 한다. 여행은 폐허를 응시하는 화자를 심란(心亂)하게 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이 심난(甚難)하다.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 [주1] 역자는 바실리스크(Basilisk)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전설의 뱀(32)’이라고 설명했다. 맞긴 한데 이는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전설이다. 고대 로마 제국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Plinius)의 저서 박물지(최근에 번역본이 나왔다!)에 따르면 바실리스크가 내뱉은 숨결에 독성이 있어서 그 숨결만 닿아도 죽는다. 이것이 고대 사람들이 상상한 바실리스크의 위력이다. 중세에 접어들면서 바실리스크 전설은 과장스럽게 변형되었는데, 메두사(Medusa)처럼 눈만 마주쳐도 죽는다든가 그 울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죽을 수 있다는 설정도 나왔다.



* [2] 33에 언급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환상의 존재들에 대한 책(El libro de los seres imaginarios)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민음사, 2016)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 46


 아편을 맞고 몽롱한 상태에 빠진 콜리지(1772~1834, 영국의 시인 · 평론가)라고 해도 그의 몽골 군주 쿠빌라이 칸을 위해 이보다 더 몽환적인 장면을 그려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3]

 

[3] 아편에 취한 콜리지가 몽롱한 상태에 쓴 시가 바로 쿠블라 칸(Kubla Khan)이다. 콜리지는 꿈에서 본 쿠빌라이 칸의 여름 별궁 제나두(Xanadu, 제너두)를 소재로 이 시를 썼다.

 

 


* 294~295

 

 오후에 그들은 오랫동안 함께 앉아 따소(16세기 이딸리아의 시인)해방된 예루살렘(Gerussalemme liberata)신생(Vita nuova)을 읽었고, 어린 소녀의 목이 진홍색으로 붉어지거나 자작의 심장이 목깃까지 두근거리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주4] 신생단테(Dante)의 작품이다번역본은 새로운 인생(민음사, 2005)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8-01 21: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토성의 고리, 제목부터 난해해 보이는데, 리뷰보니 더 난해해 보이네요 ㅜㅜ

cyrus 2021-08-02 17:12   좋아요 1 | URL
제목의 의미는 책 맨 앞장을 보면 알 수 있어요.. ㅎㅎㅎㅎ

Angela 2021-08-01 23: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되나요?

cyrus 2021-08-02 17:12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

붕붕툐툐 2021-08-02 0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날 더운데 잘 지내시나요?
인내심이 필요한 소설에서 전 벌써 아웃 당했습니다. cyrus님이 어려우시면 저는 읽어낼 재간이 없네요~ 하핫!

cyrus 2021-08-02 17:15   좋아요 1 | URL
국내 독자들이 생소한 인물(에드워드 피츠제럴드, 앨저넌 스윈번, 홍수전)에 대한 일화와 역사가 이 책의 주요 내용이라서 서양 문화와 서양사에 관심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지루할 수 있어요. ^^;;

바람돌이 2021-08-02 00: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자를 심란하게 한다는데서 빵!!! 작가님들 이러시면 안되어요. ^^

cyrus 2021-08-02 17:17   좋아요 1 | URL
지난 주 일요일에 <토성의 고리> 온라인 독서 모임이 진행되었는데, 이 책을 어려워한 분들이 많았어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 소설이 재미없었어요.. ^^;;

blanca 2021-08-02 17: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제나두에 그런 뜻이. 올리비아 뉴튼 존 노래 제목이잖아요!

cyrus 2021-08-02 17:32   좋아요 2 | URL
제나두라는 노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어떤 노래인지 들어봐야겠어요. ^^
 




전망 좋은 []

 

EP. 14

 


202174일 일요일

인문학 헌책방 직립보행’, 더코너북스













오늘 오전에 인문학 헌책방 직립보행에 갔다. 두 번째 방문이다. 이곳은 , 일요일에 문을 열고(토요일과 일요일에 여는 시간이 다르다. 토요일은 오후 2, 일요일은 오전 11시다), 9시에 닫는다. 매달 마지막 주말은 휴무일이다











보통 헌책방에 가면 마음에 드는 책을 마음껏 고를 수 있다. 하지만 직립보행에서는 그렇게 살 수 없다. 지금 바로 읽을 수 있는 책 세 권만 사야 한다. 인문학 분야의 책뿐만 아니라 소설, 사회과학, 과학, 역사 분야의 책들도 있다. 직립보행은 한 마디로 말하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헌책방이다. 동네책방 같은 헌책방이라 볼 수 있다.













 

3, 40년이나 된 헌책방을 인간의 생애 주기에 비유하면 노년기에 가깝다. 대구에 재개발 구역이 많이 생기면서 늙은 헌책방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이에 덧붙여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자면, 대구시청 주변에 있는 헌책방 두 곳(동양서점, 평화서적)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동양서점은 이미 6월에 폐점했고, 평화서적은 폐점 준비를 하고 있다.

 

직립보행도 헌책방 고유의 특징이 있고, 이에 따른 장단점도 있다. 장점은 시중에 구하기 힘든 책이 꽤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도서관 서고에 없는 책도 그곳에 있다. 단점은 그런 희귀본들의 가격이다. 직립보행을 동네 책방인줄 알고 방문한 손님 입장에서는 책값이 부담스럽게 느낄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책을 사지 못하게 할 정도로 비싼 책값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헌책방에서 고가의 책을 사본 적이 있는 나도 그 심정을 이해한다.

 

직립보행책방지기는 자신이 구매한 책, 특히 희귀본이 팔려가는 것을 볼 때마다 아쉬운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책방에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절판된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에로티즘의 역사(민음사, 1998)를 구입했는데, 책방지기는 그 책을 다 읽고, 나중에 다시 팔면 안 되겠느냐고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 그런데 실제로 직립보행에서 구매한 책을 다 읽고, 그 책을 다시 같은 곳에 판 손님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손님은 무소유의 독서를 지향하는 분인 것 같다. 나는 그 분과 정반대의 성격이다.

 

오늘 직립보행에 가보니 책방지기의 평생 동반자로 추정되는 여성 한 분이 계셨다. 내가 니체(Nietzsche)와 관련된 책들을 향해 눈길을 주고 있으니까 그분이 들뢰즈(Deleuze)와 푸코(Foucault)의 책을 추천했다. 철학과 관련해서 그분과 짧게나마 대화를 나눴는데 내공이 느껴졌다. 그분은 책방지기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은 마치 누나가 남동생을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책방지기와 철학 책을 추천한 분의 관계가 궁금했다. 부부일까, 남매일까? 아니면 책을 좋아해서 만난 친구? 다음번에 두 분을 만나면 여쭤봐야지.









 

오후에 대구 남구에 있는 선택의 자유라는 책방에 갔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이곳 휴무일이 월요일이라고 알고 갔는데‥…. 책방지기는 공식 휴무일이 아니더라도 개인 사정이 있다거나 아니면 자기가 내키는 대로 책방 문을 닫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이곳은 다음에 가보기로 하고, 남구에 위치한 또 다른 책방 더코너북스에 갔다. ‘더코너북스는 조용한 동네 안에 있다. 이곳에 책을 사면 책방지기가 직접 만든 가죽 책갈피를 받을 수 있다.


매일신문에 <문득 동네책방>라는 기사가 연재되고 있다. 대구와 경북의 책방을 소개한 기사인데 더코너북스(11)’직립보행(20)’이 소개되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문득 동네책방이라고 검색하면 기사 전문과 책방 내부를 담은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선택의 자유<문득 동네책방>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책방이다.


지금까지 가본 대구의 동네책방(괄호 안의 숫자는 <문득 동네책방> 연재 순서). 아직 안 가본 책방이 많다.

 


(1) 고스트북스

 

(4) 담담책방

 

(5) 심플레이스

 

(7) 서재를 탐하다

 

(9) 물레책방

 

(11) 더코너북스

 

(20) 직립보행

 

(29) 읽다익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레이스 2021-07-20 2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직립보행은 그냥 동네 서점 같네요^^

cyrus 2021-08-01 19:32   좋아요 1 | URL
동네책방인 줄 알고 들어간 손님들이 많았을 거예요. ^^

새파랑 2021-07-20 2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번에도 느꼈는데 대구에는 멋진 독립/동네 서점이 많은것 같아요. 저는 내공이 부족해서 이런데 방문하면 좀 부끄럽더라구요 ㅎㅎ 그래도 한번씩 갑니다 ㅋ 대구 가면 여기있는 서점 가봐야 겠어요 😊

cyrus 2021-08-01 19:32   좋아요 2 | URL
저는 동네서점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특히 제가 사는 서구에 주말에도 여는 책방 하나 더 생겨야 합니다. ^^

페넬로페 2021-07-20 22: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직립보행은 헌책방이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헌책방의 모습이 아닌데요.
자그마하고 깔끔해서 정감이 가고 인문학서적만 있으니 책 고르기도 쉬울듯 해요~~저도 서울에 있는 독립서점을 좀 다녀볼까했는데 혼자서는 엄두가 안나더라고요^^내년엔 몇군데라도 갈수있는 상황이 되면 좋겠어요**

cyrus 2021-08-01 19:37   좋아요 2 | URL
서울의 책방에 가보고 싶은데, 코로나 확산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

청아 2021-07-20 22: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서점 내부가 아늑하네요! 서점은 사진을 보는것 만으로도 기분 좋아져요.😊 실제로 가면 떠나기가 싫고요ㅋㅋㅋ 저희 동네도 이런 서점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cyrus 2021-08-01 19:39   좋아요 1 | URL
맞아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책방에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 싫어요.. ㅎㅎㅎ

바람돌이 2021-07-21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서점순례 너무 좋아요. 저기 직립보행이란 서점은 정말 동네 책방같네요. 언젠가 대구에 가게 되면 저도 방문하고 싶습니다. 좋은 책방 이야기들 언제나 너무 좋아요. ^^

cyrus 2021-08-01 19:41   좋아요 1 | URL
직립보행이 있는 동네가 삼덕동이라는 곳인데 그 동네에 카페와 식당도 많아요. 나들이하기 좋은 곳이에요. ^^

Angela 2021-08-01 0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개글과 사진을 보면 꼭 가보고싶어요~

cyrus 2021-08-01 19:42   좋아요 1 | URL
사진만 봐도 책방 분위기를 알 수 없어요. 직접 가봐야 책방 특유의 아늑하고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

blanca 2021-08-02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 기회되면 대구 서점 순례 저도 하고 싶어요...더위는 좀 어떤가요? 서울은 오늘부터 좀 시원합니다.

cyrus 2021-08-02 17:36   좋아요 1 | URL
대구 날씨는 매일 습하고 무덥습니다. 비가 쏟아 붓다가 어느 새에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다가 다시 비 오고.. 소나기가 자주 오는 편입니다. 그래서 외출하면 반드시 우산을 챙겨야 해요. 계속 무더울 거라는 일기예보를 믿지 않습니다... ^^;;
 
강력의 탄생 - 하늘에서 찾은 입자로 원자핵의 비밀을 풀다
김현철 지음 / 계단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3.5점  ★★★☆  B+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데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네 가지 힘이 있다. 그 네 가지 힘이 바로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이다. 중력은 중량(무게)이 있는 모든 물질을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중력은 네 가지 힘 중에 가장 약하다. 하지만 중력이 약한 힘이라고 해서 절대로 가볍게 봐선 안 된다. 이 세상 모든 물질의 중량이 0이 되는 것을 무중량 상태(Weightlessness state)’라고 한다. 무중량 상태가 된 물질은 공중에 뜨게 되는데, 우주선에 탑승한 우주비행사의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용어가 생소하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동안 우리는 무중량 상태를 무중력 상태로 잘못 알고 있었다. 중력의 상태가 0에 근접할 수 있어도 완전한 0이 되는 세계, 즉 중력이 없는 세계는 없다.


전자기력은 간단하게 말하면 전기력과 자기력의 성질을 모두 가진 힘이다. 전자기력은 강한 핵력 다음으로 힘의 세기가 강하다(강한 핵력>전자기력>약한 핵력>중력). 강한 핵력과 약한 핵력은 강력과 약력또는 강한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작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자 속에 있는 이 두 가지 힘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증명되었다. 원자는 물질의 기본 입자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Democritos)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atomos)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원자의 실체가 완전히 밝혀지기까지 몇 세기를 지나야 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한동안 잊혔고, 관찰이나 실험으로 검증 가능한 지식을 옹호한 실증주의자들은 원자론을 주장한 과학자들을 공격했다. 원자의 존재가 증명되자 과학자들은 원자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 했다. 원자 속을 들여다본 과학자들은 원자의 중심 부분인 핵(원자핵) 주변에 공전하는 전자를 발견했고, 핵 속에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까지 확인했다. 강력은 양성자와 중성자를 결합하는 힘이다. 약력은 양성자를 중성자로 변환시키는 힘이다. 양성자가 중성자로 변하는 현상을 베타 붕괴라고 한다. 유물이나 화석의 연대를 측정할 때 사용하는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은 베타 붕괴 현상을 응용한 기술이다.

 

강력과 약력은 이들보다 먼저 발견된 중력과 전자기력 못지않게 아주 중요한 힘이다. 하지만 강력과 약력의 인지도는 중력과 전자기력보다 낮은 편이다. 강력과 약력을 이해하려면 핵물리학을 공부해야 하는데, 이 학문은 과학 비전공자들이 선뜻 다가서지 못하게 할 정도로 상당히 어렵다강력은 네 가지 힘 중에 가장 크면서도 제일 약한 중력의 인지도에 밀려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다. 강력의 탄생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을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책이다


이 책은 뢴트겐(Röntgen)X선을 발견한 해인 1895년부터 시작한다. 과학자들이 X선에 주목하고 있을 때 베크렐(Becquerel)은 처음으로 방사선을 발견했다. 그는 방사선에 우라늄의 앞 글자를 딴 ‘U-(uranic ray)’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당대 과학자들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방사선 연구는 미시 세계를 규명하려는 물리학자들이 활동하기 좋은 블루 오션이었다. 특히 마리 퀴리(Marie Curie)는 남편 피에르 퀴리(Pierre Curie)와 함께 방사선이 폴로늄(polonium)과 라듐(radium)에서도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찰스 윌슨(Charles Wilson)이 만든 안개상자는 과학 역사상 획기적인 실험 장치로 평가받지만, 과학 비전공자들에게는 생소하다. 안개상자가 왜 중요한가? 이 실험 장치가 나오면서 과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던 방사선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과학자는 논리실증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과학은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반드시 검증해야 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원자, 방사선, 강력의 존재가 밝혀지는 데 오랜 시간이 지나야 했다. 이 길고 긴 과학적 여정에 수많은 과학자가 나섰다. 그중에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마리 퀴리, 방사선이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러더퍼드(Rutherford), 강력의 존재를 예측한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등은 노벨상을 받았고, 과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학자로 기억되고 있다. 반면에 이들보다 한발 늦게 실험 결과를 보고한 과학자들은 잊혀졌다. 위대한 성과를 남겼지만, 모종의 이유로 주목받지 못한 과학자들도 있다.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도메니코 파치니(Domenico Pacini) 우주에서 지구로 들어오는 방사선인 우주선(宇宙線)의 실체를 밝히는 데 성공했다. 그는 우주선 연구의 선구자로 알려진 빅터 헤스(Victor Hess)보다 먼저 우주선을 측정했지만, 영미와 독불(독일과 프랑스) 중심의 과학사는 파치니의 업적을 외면했다. 명성을 얻고 싶은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논문을 쓸 때 자기보다 앞선 연구 결과를 언급하지 않는 실례를 범한다. 강력의 탄생은 철저한 검증을 거친 뒤에야 인정받은 과학자들의 노력과 성과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과학자들의 비윤리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물리학과 교수다. 학술논문을 제외하면 강력의 탄생은 저자의 첫 번째 과학 교양서다. 저자는 핵물리학 발전에 기여한 과학 실험을 도판과 함께 설명했는데, 실험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대화하는 장면도 넣었다. 저자가 상상해서 쓴 것이지만, 과학자들의 대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실험실 내부를 코앞에서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저자의 첫 책이라서 아쉬운 점도 있다과학 비전공자에게 생소한 과학 용어의 뜻을 설명한 저자의 주석이 많지 않다. 본 책 244쪽의 보스-아인슈타인 통계(Bose-Einstein statistatics)’, 266쪽의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 355쪽의 쿨롱 힘(Coulomb’s power)’에 대한 주석이 없다. 책에 나온 과학 용어의 의미를 간단하게 정리한 부록이 필요해 보인다. 과학 비전공자를 위한 과학 교양서라면 이런 부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저자는 원자론을 주장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시대를 한참이나 앞선 과학자로 소개했다.

 

 

 

* 23쪽


 볼츠만은 시대를 한참이나 앞선 과학자였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않던 원자론을 주장했다. 그 이듬해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던 에른스트 마흐가 빈 대학에 왔다. 볼츠만의 원자론을 따르는 사람들과 마흐를 추종하는 실증주의자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데모크리토스 이후부터 잊힌 원자론을 주장한 최초의 과학자는 존 돌턴(John Dalton)이다. 돌턴이 살았던 당시에 원자의 실체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고, 원자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과학자들이 많았다. 돌턴의 근대적 원자론이 알려지게 되면서 원자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과학자들의 논쟁이 시작되었고, 원자론자 볼츠만과 이에 맞선 실증주의자 마흐(Ernst Mach)가 활동한 20세기 초에도 이어졌다. 따라서 볼츠만이 원자론을 주장했다고 해서 시대를 한참이나 앞선 과학자로 보기 어렵다.



* 53

 

 영국에서 18000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뉴질랜드, 그곳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면 남쪽 섬의 북부 한 귀퉁이에 넬슨이라는 자그마한 항구도시가 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무찌른 넬슨 제독의 이름을 따왔다.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은 영국 함대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맞붙은 전투다.


강력을 발견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여정은 쿼크(quark)와 강력이 작용하는 강입자인 파이온(Pion)이 처음 발견된 해인 1947년에 마무리된다. 물론 이 여정이 여기서 끝난 건 아니다. 1895년부터 1947년까지의 과학적 여정은 강력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다. ‘강력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한 여정이 남았다. 강력의 탄생의 저자는 1947년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후속편을 예고했다. 후속편에서는 쿼크를 비중 있게 다룰 것으로 보인다아직 나오지 않은 책에 감히 제목을 정한다면, ‘쿼크의 탄생이다.






정오표

 





* 244: 핵물학 핵물리학

 







 

* 288: 194 1949년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7-20 0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어려운 물리 책이라니~!! 정말 첫 책이어서 그런지 아쉬운 부분이 있는거 같네요.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는 Cyrus님 완전 👍 언제나 봐도 놀라운 정오표 까지~!!

cyrus 2021-07-20 20:41   좋아요 3 | URL
과학책을 읽을 때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는 내용은 대충 훑어보고 그냥 넘어갑니다. 그래서 책 한 권 다 읽고 나면 머릿속에 남는 게 없습니다. 잘 모르니까 또 비슷한 주제의 과학책을 읽고, 모르는 내용은 넘어가고.. ㅎㅎㅎ

태양의그림자 2021-07-20 19: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훌륭하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책 제목은 아마도 <세 개의 쿼크>가 되지 않으려나요? ^~^

cyrus 2021-07-20 20:45   좋아요 3 | URL
안녕하세요. 책을 쓰신 분이시군요. 서평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과학 비전공자인데 서평을 쓰면서 번데기 앞에 주름 잡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후속편이 나오면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

태양의그림자 2021-07-20 21: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원래는 한 권으로 내려고 했는데 내용이 많아서 우선은 1947년까지 냈습니다. 다음 책에서는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초딩 2021-08-06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그레이스 2021-08-06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이하라 2021-08-06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thkang1001 2021-08-06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서니데이 2021-08-06 1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1-08-06 19: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독서와 오타 발견 달인 Cyrus님 축하드려요. 항상 건강하세요 ^^

mini74 2021-08-06 1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주알고주알 팬입니다 ㅎㅎㅎ 당선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1-08-06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하나의책장 2021-08-14 0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thkang1001 2021-08-14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붉은까마귀 2022-10-19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츠만이 시대를 앞선게 맞아요 당시엔 화학계랑 물리학계랑 입장이 달랐어요 당시 물리학계에선 원자가 있다는게 주류가 아니었죠 그러한 맥락을 모르고 전체 과학계로 확대시키니 오해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