롭스와 뭉크 - 남자와 여자
국립현대미술관 엮음 / 컬처북스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롭스와 뭉크: 남자와 여자」 전이 열렸다. 뭉크(Munch), 그의 이름을 몰라도 그가 그린 『절규』는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뭉크는 요람에 있을 때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의 운명 주변에 배회하는 것을 느꼈다. 뭉크의 어머니는 다섯 살 때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 역시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특히 여동생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병든 소녀』는 폐결핵으로 고생하는 여동생을 지켜봤던 이모의 기억을 되살려 그린 작품이다. 이런 그의 생애를 알고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의 그림들이 왜 어둡고 쓸쓸한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뭉크는 불행한 기억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펠리시앙 롭스(Félicien Rops)는 우리나라에 생소한 이름이다. 롭스는 벨기에 출신의 화가이자 판화가다. 롭스의 그림은 에로틱하고 음습하다. 롭스는 세상을 풍자하기 위해 여성을 악녀로 설정하여 묘사했다. 롭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여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다. 세기말 예술가들은 퇴폐적인 미적 이상에 집착했다. 이 주제에 맞춰 등장한 것이 팜므 파탈이었다. 팜므 파탈은 자유를 요구하기 시작한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남성의 반발이자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시집 《악의 꽃》을 발표하여 물의를 일으킨 샤를 보들레르가 팜므 파탈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와 교류한 롭스는 관능적인 매력으로 남성을 끌어당기는 여성을 다양한 형태로 묘사했다. 롭스는 악마와의 섹스에 빠져 몸을 떨면서 황홀경을 느끼는 여성이나 음탕하기로 악명 높은 목신 상을 음흉하게 바라보는 여성의 모습 등을 그렸다. 그의 그림들이 명작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더라면 불경스러운 그림으로 남았을 것이다.

 

 

 

 

 

뭉크와 롭스. 이 두 사람은 여성을 관능적인 팜므 파탈로 묘사했다. 『여자에 세 시기 : 스핑크스』는 뭉크의 여성관이 반영된 작품이다. 스핑크스(Sphinx)는 남자를 고통에 빠뜨린 신화 속 악녀의 대명사다. 뭉크는 자신의 실패한 연애 경험을 극복하지 못했고,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뭉크가 그린 여성도 얼굴은 창백하고 추하고 무섭다. 그렇지만 여성을 악녀로 그리는 두 사람의 의도는 다르다. 롭스는 사회를 냉소적으로 조롱하기 위해서 노골적으로 악녀를 묘사했다면, 뭉크는 살아남은 자신의 슬픔과 비통함을 드러내기 위해 여성을 변형되고 왜곡된 형태로 묘사했다.

 

롭스의 그림들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책은 이 전시회 도록이 유일하다. 십 년 전에 나온 이 도록은 지금도 알라딘에서 구매할 수 있다. 「롭스와 뭉크: 남자와 여자」 전은 뭉크와 롭스가 제작한 판화 작품들 위주로 전시되었다. 뭉크는 생전에 판화 연작을 많이 남겼다. 그는 채색화로 표현됐던 주제와 이미지를 이용해 복제본 형식의 판화를 제작했다. 뭉크와 롭스의 그림은 다소 음울하면서도 난해하다. 게다가 여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두 남성 화가의 편견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편견에 갇혀 영향을 받는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다. 뭉크와 롭스의 그림에는 세기말을 지배했던 문화와 시대적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세기말의 사회적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크다. 롭스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대담하게 응시했다면, 뭉크는 생의 한가운데 서성거리면서 죽음을 응시했다. 뭉크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 두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병이었고, 도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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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0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11 17:17   좋아요 0 | URL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의 얼굴에서만 나올 수 있는 표정을 잘 묘사한 걸작입니다. ^^

비연 2017-08-1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6년도에 롭스와 뭉크 전시 갔었더랬어요!

cyrus 2017-08-11 17:18   좋아요 0 | URL
부럽습니다. 이런 전시회가 다시 나오기 힘들 겁니다. ^^

표맥(漂麥) 2017-08-11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글입니다...^^

cyrus 2017-08-12 17:32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그림이 흥미롭습니다. 이미지 사진을 더 올리고 싶어도 선정성이 높아서 올리지 못했습니다. ^^;;

2017-08-11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12 17:36   좋아요 1 | URL
오늘은 날씨가 선선해서 에어컨 켜지 않고 집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며칠 지나면 다시 더워지겠죠. ㅎㅎㅎ 좋은 주말 보내세요. ^^
 

 

 

 

 

 

 

 

 

 

 

 

 

 

 

 

 

 

 

 

 

 

 

 

 

 

 

 

 

 

 

 

 

 

 

※ 시드니 패짓의 삽화가 수록된 번역본들

 

 

* 《바스커빌 가문의 개》 (황금가지, 2002년)

* 《배스커빌의 개》 (시간과공간사, 2002년)

*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 (문예춘추사, 2012년)

* 《주석 달린 셜록 홈즈 6 : 바스커빌 씨네 사냥개》 (현대문학, 2013년)

* 《배스커빌 가의 개》 (더클래식, 2014년)

*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 (코너스톤, 2016년)

 

 

 

 

《The Hound of the Baskervilles》의 스태플턴은 폭력과 고문에 탐닉하는 사디스트일 가능성이 있다. 사디즘은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쾌감을 얻는 변태성욕, 즉 성도착증의 하나다.

 

 

 

다음 내용은 작품의 줄거리 및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태플턴은 그림펜 늪지대를 돌아다니며 곤충을 채집하는 아마추어 박물학자다. 그는 누이동생 베릴 스태플턴과 함께 산다. 스태플턴은 오래전부터 찰스 바스커빌과 알고 지낸 사이였다. 찰스가 세상을 떠난 후 가문의 상속자로 확정된 헨리 바스커빌 경이 다트무어의 저택으로 오게 되면서 그와 친하게 지내게 된다. 하지만 스태플턴은 여동생을 좋아하는 헨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헨리는 베릴을 직접 만나 구애를 시도하지만, 스태플턴에게 걸리고 만다. 스태플턴은 노발대발하면서 헨리에게 욕설한다. 그는 여동생을 끔찍이 아낀다. 헨리와 베릴의 결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실 그가 여동생을 과잉보호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베릴은 박물학자의 여동생이 아니라 아내다. 스태플턴은 로저 바스커빌의 아들이다. 스태플턴은 찰스 바스커빌이 소유한 막대한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지옥 개의 저주’를 이용하여 찰스 바스커빌과 헨리 바스커빌을 죽이는 음모를 꾸몄다. 그의 음모는 홈즈에 의해 밝혀졌고, 스태플턴은 집에 베릴을 결박하고, 도피한다.

 

사소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홈즈 연구가들은 결박당한 베릴의 상태를 주목했다. 홈즈 일행이 베릴을 구출했을 때 그녀의 목에 벌겋게 부어오른 채찍 자국을 발견했다. 딘 W. 베켄시트이 묘사를 근거로 아내에 대한 스태플턴의 심리 상태를 분석했다. 베켄시트는 스태플턴이 아내가 헨리 경에게 빼앗길 거로 생각했으며 아내의 외모를 망가뜨리기 위해 아내를 학대했다고 주장했다. (현대문학 주석판 283쪽, 주석 205번 참조) 스태플턴은 아내에 대한 소유욕이 엄청 강하다. 그렇다 보니 의처증이 심해졌을 테고, 자신이 제거해야 할 대상인 헨리 경이 아내에게 치근덕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스태플턴이 아내를 결박하여 채찍질을 가한 행동에서 사디즘 증상으로 볼 수 있다.

 

 

 

 

 

 

 

 

 

 

 

 

 

 

 

 

 

*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 (시공사, 1999년)

* 진중권 《성의 미학》 (세종서적, 2005년)

 

 

 

결박, 즉 본디지(Bondage)는 밧줄이나 사슬로 ‘묶여 있는 대상(남성, 여성)’에게 성적 만족을 얻는 가학적 행위다. 특히 ‘결박당한 여성’은 남성에게 성적 판타지를 불러일으킨다. 본디지 모티브는 남성 화가와 남성 관객들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인기 주제였다.

 

 

 

 

 

남성 화가가 묘사한 결박당한 여성은 수동적이다. 탈출할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풀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다릴 뿐이다. 남성은 결박당한 여성을 구출하는 정의의 사도가 설정된다. 앵그르『안젤리카를 구출하는 로저』는 당시 남성이 여성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앵그르는 날개 달린 말을 탄 기사 로저가 괴물을 물리치고 안젤리카 공주를 구출하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이 그림을 보는 남성 관객들은 괴물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출하는 로저의 행동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다. 그 감정이 바로 ‘남자다움’과 ‘용기’다. 여성을 구출하는 남성 이미지에 익숙해진 남성 관객은 자신이 여성을 보호하는 수호자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바란다. 위험에 빠진 여성을 구출하고, 보호했으니 이제 남은 건 그녀를 ‘소유’하는 것이다. 즉 여성은 남성이 차지하는 전리품이 된다. 괴물의 입을 관통한 로저의 창은 여성을 보호하면서 얻을 수 있는 육체적 보상, 성적 결합을 암시한다.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는 앵그르의 그림에서 ‘감금에 대한 남성의 환상’을 읽었고, 진중권은 그림 자체를 ‘소녀가 여성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첫 경험’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봤다.

 

 

 

 

 

홈즈 시리즈의 삽화를 담당한 시드니 패짓은 ‘감금에 대한 남성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을 그렸고, 결박당한 베릴의 모습이 인기가 있었는지 1949년에 나온 문고판 표지로 나오기도 했다. 베릴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표정은 황홀한 오르가슴을 느낄 때 나오는 표정과 유사하다. 스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80년대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배스커빌의 개》 표지는 1949년 문고본 표지만큼 에로틱한 느낌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베릴이 묶여 있는 자세, 늑대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흰 원피스에 묻은 혈흔은 성적 의미를 암시하는 어트리뷰트(속성, attribute)로 볼 수 있다. 목을 젖히는 베릴의 모습을 앵그르의 그림 속 안젤리카와 비교해 볼 것. 베릴은 황홀감에 빠져 있다. 늑대는 그녀에게 성적 학대를 가하는 스태플턴을 암시한다. 베릴은 스태플턴과 결혼한 사이이기 때문에 그녀를 ‘첫 경험을 한 여성’이라고 해석하기에 무리가 있다. 출판사가 무슨 생각으로 원작에 없는 혈흔을 그렸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동서문화사는 간혹 원작과 전혀 상관없는 표지 디자인을 만들거나 선택한다. 다카기 아키미쓰《문신 살인사건》(동서문화사, 2005)의 표지는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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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0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10 17:33   좋아요 1 | URL
저 책 말고도 19금 딱지가 붙을만한 표지가 있는 동서문화사 책이 더 있습니다. ^^;;

2017-08-10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10 17:42   좋아요 0 | URL
어떤 독자들은 이 책을 서점에서 구입했을 때 난감했다고 합니다. 표지 때문에.. ㅎㅎㅎ 이 책을 검색하면 작품 내용보다는 표지에 관한 내용이 더 많습니다. 독자 서평들을 읽어봤는데 표지 디자인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었어요. t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표지 디자인의 의미를 알겠습니다. ^^

AgalmA 2017-08-11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어라서 효과가 더 극대화되는군요. 컨셉으로 아예 밀고 나가도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하여간 동서문화사에 이런 면도 있었다니ㅎㄷㄷ

cyrus 2017-08-11 17:21   좋아요 0 | URL
의도적으로 고른 것인지 야한 느낌이 나는 표지 디자인의 책이 있어요. 동서문화사판 <아라비안 나이트>, <겐지 이야기> 2권을 확인해보세요. ^^

표맥(漂麥) 2017-08-11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황당한, 일본스런 표지군요...^^

cyrus 2017-08-12 17:37   좋아요 0 | URL
일본 원서에 있는 표지일 수도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기묘합니다. ^^;;
 

 

 

 

지난주 일요일 하루에 잡은 벌레는 총 다섯 마리. 집게벌레 두 마리, 그리마 한 마리, 그리고 모기 두 마리. 바퀴벌레 한 마리만 잡았으면 ‘벌레 퇴치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었다. 집에 있으면서 이렇게나 벌레를 많이 잡은 경우는 처음이다. 내가 잡은 벌레들은 흔히 ‘해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들 중에 해충이라고 부르기에 애매한 녀석이 있다. 그가 바로 그리마다. 이 녀석의 별명은 ‘돈벌레’다. 돈 많은 부잣집에서만 산다고 해서 돈벌레라고 불렸다. 옛날에는 이 벌레가 집안에서 발견하면 부자가 될 길조로 여겼다. 그런데 그리마가 기어가는 모습이 마치 지네와 같아서 혐오스럽게 생겼다. 돈벌레라고 반기기는커녕 일단 잡아야 하는 곤충으로 낙인 찍혔다. 이 녀석, 기어가는 속도가 장난 아니다. 잡으려고 하면 눈 깜작할 사이에 사라져 어둡고 비좁은 곳으로 숨는다. 이런 녀석이 재수 없게 나한테 걸리고 말았다…‥ 당분간 돈복이 들어오기가 힘들겠군.

 

그리마가 해충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녀석의 식성 때문이다. 그리마는 바퀴벌레의 알을 먹는다. 바퀴벌레의 번식력은 엄청나다. 최근에 나온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암컷 바퀴벌레의 무성생식으로 번식한 사례가 발견되었다. 즉, 바퀴벌레는 수컷 없이도 번식이 가능한 셈이다. 그리마가 바퀴벌레의 알을 잡아먹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집에 그리마의 출몰이 잦다면, 녀석이 좋아하는 먹잇감이 많다고 볼 수 있다.

 

 

 

 

 

 

 

 

 

 

 

 

 

 

 

 

 

 

 

* 조슈아 아바바넬, 제프 스위머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함께읽는책 · 2011)

    

 

     

집게벌레의 별명은 ‘꼬집는 벌레’다. 집게벌레에 물려본 적이 없는데, 한 번 물리면 아프다고 한다. 옛날 유럽인들은 집게벌레가 잠들 때 귀로 들어가 고막을 찢고, 뇌에 침투하여 알을 낳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가끔 사람을 무는 것만 빼면 이 녀석도 양호한 편이다. 집게벌레의 먹이는 살아 있거나 죽은 벌레, 초목(草木)이다. 결벽에 가까운 집게벌레의 청결함은 ‘곤충계의 서장훈’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집게벌레는 온종일 혀(!)로 자기 온몸 구석구석 핥는단다. 어떻게 보면 고양이의 그루밍과 같다. 그러므로 집게벌레를 ‘반려 곤충’으로 추천한다.

 

내가 집에 있을 때 잡지 않는 유일한 벌레가 있다. 바로 거미다. 이 녀석은 나의 동반자다. 내가 바닥에 엎드려 배를 깔고, 책을 읽으면 바닥을 기어 다니는 거미를 만난다. 거미의 크기는 아주 작다. 손으로 살짝 건드려도 죽는다. 거미가 사람을 물지 않아서 좋은데, 단 한 가지 불편한 점이라면 구석진 곳에 치는 거미줄이다. 창틀이나 책장에 가느다란 거미줄이 붙어 있다. 거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모조리 제거한다. 퇴근하고 나면 방 청소를 한다. 먼지떨이로 책장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 다음에 밀대 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청소하다 거미줄이 보이면 걸레로 닦아낸다. 거미줄 없어도 거미들이 알아서 잘 살 거로 믿는다.

 

거미 공포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공포증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거미의 해로운 면이 강조되는 미신 또는 도시전설이 나오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인간이 자면서 1년 동안 8마리의 거미를 삼킨다는 도시 전설이 있다. 이 내용은 나무위키 항목으로 나와 있다. 말 그대로 ‘도시 전설’이니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거미 연구가들은 거미가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일이 절대로 없다고 말한다.

 

 

 

 

 

 

 

 

 

 

 

 

 

 

 

 

 

* 백석, 김재용 역 《백석 전집》 (실천문학사 · 2012)

 

 

 

작은 거미를 만나면 죽이지 않고, 창밖으로 보낸다. 거미가 연약해서 살살 건드려서 손가락이나 종이 위로 올린다. 거미를 올려놓은 손가락이나 종이를 창틀 벽에 갖다 댄다. 그러면 거미가 알아서 창틀 벽으로 향해 기어간다. 왜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하느냐고. 작은 거미를 보면 볼수록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거대한 바닥 한가운데서 기어가는 거미를 보면 마치 정처 없이 떠도는 외로운 나그네, 또는 길을 잃어 혼자서 아무 데나 걷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작고 연약한 거미에게 각별한 관심을 주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백석의 시에 있다. 이 시를 읽고 난 후로 작은 거미만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백석, 『수라(修羅)』, 실천문학사, 39~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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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8-09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의 거미에 대한 태도·처리 방법은 저와 아주 비슷하군요. 시인 백석의 거미에 대한 연민도 비슷합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cyrus 님이나 백석의 거미에 대한 연민을 거의 동일하게 느끼리라고 봅니다. 집안/집밖 곤충 가운데 거미처럼 인간과 친근한(?) 곤충도 없을 테니까요(정확히는 곤충이 아니라 절지동물이라고 하지만요). 거미처럼 인간의 상상력과 과학적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곤충이 있을까요? SF 영화 스파이더맨, 강철보다 강한 거미줄, 생체모방공학, 거미줄의 기하학, 방적돌기의 정교한 미세구조 등등은 거미가 인간한테 베풀어준 상상력의 결과이자 첨단 과학기술의 원천이라 할 수 있죠. 정말 흥미진진하고 친근한 동물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7-08-10 12:18   좋아요 0 | URL
과거에는 거미와 요부를 결합시킨 ‘위험한 괴물’ 이미지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거미와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포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공포의 존재였던 거미가 사랑하는 여인과 도시 전체를 구하는 스파이더맨의 탄생에 영향을 준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2017-08-10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10 12:22   좋아요 1 | URL
자세한 설명 없이 들으면 ‘권연이’가 사람 이름인 줄로만 압니다. ㅎㅎㅎ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 시공아트 10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 시공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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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통해 태어나고 성을 통해 자신을 복제해 가는 우리의 삶과 예술 곳곳에 성 의식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는 서구 미술가들이 섹슈얼리티의 주술을 피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 주술로부터 창작의 모티브를 챙겼음을 보여준다. 성과 에로티시즘이 미술작품에서 어떻게 표현됐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변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미술작품을 분석 · 설명하는 방식을 택한다. 첫 번째 방식은 시대적 상황 및 미적 신념 등이 반영된 역사적 방법이다. 두 번째 방식은 범주화 작업이다. 공통적인 속성을 중심으로 분류할 수 있는 범주를 만들어 서양미술과 섹슈얼리티의 밀접한 연관성에 주목한다. 저자는 쾌락을 주는 성’, ‘신성화된 성’, ‘여성 · 동성애 · 거세에 대한 공포감등으로 나눠 서양미술이 드러난 성을 해부하고 있다.

 

인간이 언제부터 몸을 예술로 재현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최초의 인간 조각상은 2만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커다란 젖가슴과 부풀어 오른 배, 풍만하게 강조된 엉덩이와 허벅지 등 과장되게 표현된 이 조각상은 다산과 풍요에 대한 원시인들의 열망을 보여준다. 스미스는 빌렌도르프의 미녀루벤스앵그르의 그림에 등장하는 뚱뚱한 미녀의 선조라고 평가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성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지만, 성을 금기시하거나 억압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신화에 나오는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제의(祭儀)를 통해 욕구를 분출하고, 관능적인 쾌락을 도기와 화폐 등으로 표현했다. 로마 제국 후기에 기독교가 다신교 신앙을 누르면서 성은 규제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성적 욕망을 원죄로 간주하고 섹스는 자녀 생산 수단으로만 인정했다. 중세의 미술가들은 금욕을 강조하기 위해 성적 방종을 즐기는 바람에 지옥에서 벌을 받는 신체를 묘사했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재발견하게 됨에 따라 쾌락을 즐기고자 하는 태도를 강조한 미술작품들이 등장한다.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됐고, 미술가들은 에로틱한 상상을 자아내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렇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남성들은 품위 있게 그려진 에로틱한 그림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남성 고객들을 위해 남성 미술가들은 벌거벗은 여신을 주제로 여성 누드를 그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책의 1부에 해당되며, 1부는 섹슈얼리티의 관점으로 본 서양미술사라고 보면 된다. 2부는 미술가들이 즐겨 그린 상징으로 압축한 섹슈얼리티를 소개한다. 미술가들은 관음자의 시선으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여 묘사했고,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성적 행위를 그림으로 형상화하여 극대화된 섹슈얼리티를 강조했다. 2부의 내용은 여성에게 향한 차별과 편견을 드러낸 미술작품들과 미술가의 역할을 비판하는 데 적절한 근거가 된다.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미술사가 겸 시인이다. 원래는 자메이카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에 귀화했다. 그는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 문제의식을 느꼈고, 여성 미술가들의 성취를 재조명한 여성과 미술(주디 시카고 공저, 아트북스, 2006)을 펴내기도 했다.

 

 

 

 

 

그런데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출판사를 잘못 만났다. 책의 구성도 아쉽다. 2백 점이 넘는 도판 중에 원색 도판이 고작 29에 불과하다. 전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면서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던 자의 아들이 만든 회사라서 그런가. 아니면, 부자가 숫자 29를 좋아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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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9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9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9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09 16:11   좋아요 1 | URL
기독교가 섹스와 식탐에 빠지는 것을 금지시키니까 못 참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비밀장소에 모여 술과 고기를 즐기는 수도사들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박균호 2017-08-0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은 올 칼라로 나와야 제 맛인데 말이죠.

cyrus 2017-08-09 16:1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예술 도서의 꽃은 도판입니다. ^^

AgalmA 2017-08-11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다 ‘29의 저주‘ 도시전설 생기겠음요ㅎㅎ

cyrus 2017-08-11 17:26   좋아요 0 | URL
12.12 사태 때 노태우가 소장이었을 때 9사단장이었습니다. 그리고 9사단 29연대 병력을 동원했죠. 저는 9사단 30연대에 배치 받아 군 생활을 했습니다... ^^;;
 
오, 클래식
홍승찬 지음 / 별글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음악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을까? 있다. 음악은 ‘귀로 듣는 도장(圖章)’이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의 도장’을 꾹 찍을 힘이 있다. 적절한 순간에 사용된 음악은 영화나 드라마의 분위기를 살린다. 영화와 드라마를 본 후의 감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석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장면과 함께 흐르는 음악은 그 감동을 오랫동안 간직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음악을 제대로 들으라면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음악을 즐길 줄 안다. 음악을 들으면 촉각처럼 바로 전율이 온다.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짜릿짜릿해지는 기분. 그게 바로 음악의 힘이다. 우리가 음악을 좋아하는 반응은 웃음이나 울음과 같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음악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냥 즐기고 마는 것과 생각을 해야 하는 것. 영화를 예로 들면 한 번 볼 때는 즐겁지만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영화가 있고, 생각날 때마다 보고 싶은 걸작도 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귀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음악이 있고, 거기서 감동하여 반복적으로 듣고 싶은 음악이 있다. 그 순수한 울림이 있는 음악이 바로 클래식이다.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펴낸 《오, 클래식》은 음악의 힘을 가진 클래식을 예찬한 책이다. 이 책에 클래식을 통해 사람과 환경이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글 속에 일반인들(클래식 입문자도 포함한다. 수년째 클래식 입문 단계에 머무는 나도 여기에 속한다)은 잘 모르는 음악 용어와 곡목이 언급된다. 어떤 클래식 입문서는 많이 알려져 진부한 레퍼토리에 되지도 않는 해설로 독자들을 가르치려 한다. 이런 책을 보고 나면 상당수 독자는 오히려 무시당했다는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홍 교수의 글은 그렇지 않다. 당연히 학창시절 음악 시간에 배웠을 음악 용어가 나오지만, 억지로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삭막한 교도소에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아리아 ‘편지의 이중창’이 울려 퍼지는 장면은 압권이다. 삭막한 교도소의 운동장에 있던 모든 죄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비록 몸은 갇혀 있어도 음악을 듣고 있던 죄수들의 표정은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홍 교수는 이 영화의 명장면과 명대사를 언급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의 힘’의 위력을 알려준다.

 

홍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는 예술론이 아니다. 삶의 정수가 들어있는 인생론이다. 홍 교수는 클래식 음악의 묘미를 ‘오래 묵은 장맛’으로 비유한다. 잘 익은 장맛은 구수한 감칠맛이 난다. 장맛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맛이 삭아 깊어지듯 이 클래식의 맛을 오래 즐긴 사람의 마음도 숙성된다. 클래식의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텁텁하거나 톡 쏘는 맛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즉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재즈, 팝 음악 등 새로운 언어를 클래식 음악에 접목한 크로스오버 음악은 클래식 음악계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경박한 혼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흐나 베토벤이 음악을 만들던 시절이 아니다. 음악을 엄숙하게 듣는 시대는 한참 지나갔다. 인간의 온갖 경험과 감정 상태가 축적된 클래식을 많이 들으면 가슴을 울리는 절정의 순간들이 여러 번 찾아온다. 그럴 때 우리는 그저 클래식을 좋아하게 된다. 약간의 호기심과 노력으로 몇십 배의 감동과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클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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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엄마 2017-08-08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래식!!일단 생각만 해도 숙면이 올 것 같은 분야지만-참 언젠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장르에요.^^

cyrus 2017-08-09 12:23   좋아요 1 | URL
五車書님의 서재에 가면 클래식 음악 앨범, 관련 지식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유튜브 영상도 있어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어요. ^^

책한엄마 2017-08-09 12:28   좋아요 0 | URL
오거서님 덕분에 음악에 귀를 기울여요.전에 클래식 역사책 쓰신 세 권 책을 구입하고 고이 모셔놓고 있어요.그 책 제목도 ˝the classic˝이었던 것 같아요.

2017-08-08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09 12:27   좋아요 0 | URL
지금까지 살면서 클래식 연주회를 한 번도 안 가봤어요. 제가 집돌이라서 집에서 음악을 들어야 마음이 편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