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페미니즘 - 일상을 뒤집어보는 페미니즘의 열두 가지 질문들
김보화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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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오죽했으면 성폭력을 당했겠어.’, ‘옷을 야하게 입고 다니니까 성폭력을 당했지.’ 성폭력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친구들에게까지 상처를 준다. 가해자 못지않게 피해자에게도 사회적 비난이 쏟아지는 것도 언어적 폭력이다. 이미 상처를 당한 피해자에게 이중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 피해자의 행동과 태도가 사건을 유발한 것이 아니므로 사건 당시 피해자의 행동을 책망해서는 안 된다. 어떤 때는 피해자에게 성폭력을 방지하지 못한 데 대해 죄의식이 들 수도 있다. 편견이나 잘못된 지식에 근거한 엉뚱한 도움 등은 오히려 피해자에게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잘못된 사회적 통념에서 빚어지는 문제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성폭력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강간은 낯선 사람에 의해 발생한다.’, ‘강간범은 정신 이상자거나 사이코패스다.’, ‘부부간에 강간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믿는 남자들이 있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이 일어나기 쉬운 사회다. 과거의 남성은 힘이 세고 주먹을 휘둘러야 강인한 남자로 인정받았고, 여성을 남성보다 아래인 나약한 인간으로 봤다. 남성에게 성적인 문제가 생기면 쉽게 용서되나 여성에게 성적인 문제가 생기면 이혼을 당한다든지 집에서 쫓겨나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주변 관계에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피해자로 인정하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성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환하려면 일상적이었던 것을 뒤집어 볼 수 있는언어화가 필요하다.[1] 과거 아내 폭력은 칼로 물 베는 부부싸움으로 인식되는 바람에 남편의 아내 구타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 대중화되어 확산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은 여성 혐오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언어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오랫동안 쌓인 남녀 불평등과 여성 혐오에 무감각한 사회적 분위기에 저항했고, 이를 공론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처한 개인적 상황(일상 속 성차별, 아는 사람에게 당한 성폭력 등)을 언어화하는 일은 그 상황을 변화시키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Mirroring)’은 여성 혐오에 저항하는 추세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은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표현할 기회의 땅이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에서도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가 팽배하고,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의 적대행위가 비일비재하다. 인터넷 공간상에서 여성들에게 폭력적인 언어로 인신공격을 일삼는 일베 회원은 사이버 마초(Cyber Macho)’들이다. 여성의 발언권 기회를 축소하는 남성 중심 인터넷 문화에 대부분 여성은 침묵을 지키거나 그 공간을 떠나버렸다. 성숙한 인터넷 토론문화를 만들기 위해 남성 중심의 인터넷 문화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여성들의 연대 운동도 진행되었다. 하지만 남성 유저들의 묵살이 계속되자 메갈리안(메갈리아 회원)을 중심으로 한 미러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발화를 남성들이 했던 것 똑같이 하는 것이다. 남성은 동성끼리 모인 은밀한 장소에서 여성을 소재로 성적 농담을 주고받는다. 메갈리안은 남성만이 향유할 수 있는 농담을 미러링하여 공개된 농담으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따라서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전복시킨 급진적인 여성의 유머이다.[2] 미러링은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 미러링이 남성 혐오를 부추기기 때문에반 여성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권력의 억압과 위선을 깨부수는 웃음, 농담의 효과를 모르거나 의도적으로 은폐한다. 페니스는 남성의 서열이나 권력과 같은 사회적인 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메갈리안은 미러링 스피치(Mirroring Speech)를 통해 상징의 전복을 시도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런 말을 했다. 권위에 가장 강력한 적은 경멸이며, 권위를 훼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웃음이라고.

     

그럼에도 페미니즘(은행나무, 2017)은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유만 설파하는 책이 아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성 평등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놓칠 수 있는 문제점(레즈비언 여성, 트랜스젠더 여성이 차별받는 사회적 구조)도 명확하게 알려준다.[3] 성노동 비범죄화를 바라보는 두 필자의 상반된 글[4]을 배치함으로써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푸는 성노동 비범죄화의 장단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집필진에 참여한 김홍미리페미니즘을 남녀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여성이 처한 문제를 외면하는 남성 진보 논객뿐만 아니라 남성 모두 페미니즘과 같은 방향을 서보는 연습을 시작할 것을 권한다.[5] 앞으로 남성들은 여성에게 잘 해주겠다, 행동에 반성하겠다는 식으로 공약을 내세우기보다는 여성 혐오, 성 평등 문제 등에 여성과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공부해야 한다. 말보다 행동이 우선이다.

 

 

 

 

 

[1] 그럼에도 페미니즘3치정과 멜로, 그 경계에서 데이트 폭력을 묻다, 김보화

 

[2] 같은 책, 1메갈리아의 거울이 비추는 몇 가지 질문들, 윤보라

 

[3] 같은 책, 7여성을 사랑하는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나영

 

[4] 같은 책, 8성노동 비범죄화, 한국에서는 안 될 일인가?, 박이은실 / 9성매매 비범죄화, 안 될 일이다, 박은하

 

[5] 같은 책, 4남성 진보 논객과 담론 헤게모니, 김홍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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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9-05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성폭력은 꼭 젊은 여성만 당하는 게 아니야.
여성 노인이 당하는 성폭력은 제외되어 있지.
그들은 늙고 힘없다는 이유로 더 많이 노출되어 있을 수 있는데
그거 생각하면 아찔하다.

난 어떤 면에서 여성을 혐오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나 싶기도 해.
겉으로 여성을 옹호하는 척 하면서 결정적일 때 본색 들어내는
남자들 보면 좀 웃긴다 싶어.

cyrus 2017-09-05 18:15   좋아요 1 | URL
황혼 부부의 가정 폭력, 노년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 · 성폭력 문제도 공론화되어야 해요.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대두될 거예요. 여성 혐오가 팽배한 사회일수록 여성이 피해 받는 문제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05 15: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위의 댓글은 역대급이네요.. ㅎㅎ어떻게 저런 사고가 가능하지 ?!

2017-09-05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5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장의사

(The Handler)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번역 : 정태원)

 

 

 

 

레이 브래드버리에 관해서는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는 인기 작가다. 그의 아름다운 환상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이 작품은 조금 잔혹하다. 본 작품이 <위어드 테일즈>(47년 1월호)에 씌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괴기스러운 면도 브래드버리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1]

 

 

 

 

 

 

 

 

 

베네딕트는 아담한 자택을 나왔다. 현관에 선 베네딕트의 눈에는 햇살이 따갑도록 부셨으나 가슴에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이 어려 있었다. 영리한 눈을 한 작은 개가 지나갔다. 영리하다는 증거로 베네딕트는 그 개의 시선을 잡을 수가 없었다. 교회 옆의 묘지를 둘러싼 철문 사이로 아이 한 명이 보고 있었다. 그 아이의 찌르는 듯한 호기심에 찬 눈을 보고 베네딕트는 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아저씨는 장의사야?”

 

아이가 물었다. 베네딕트는 자신의 껍질 속으로 몸을 움츠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교회는 아저씨 거야?”

 

아이가 또 물었다.

 

“그래.”

 

베네딕트가 대답했다.

 

“이 장례식 하는 가게도?”

 

“그래.”

 

베네딕트는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이 묘지도, 묘석도 모두 아저씨 거야?”

 

아이가 물었다.

 

“그래.”

 

베네딕트는 약간 쑥스러움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업적인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덕분에 베네딕트는 오랫동안 밤낮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했다.

 

베네딕트는 사업의 첫 출발점으로 침례파 사람들[2]이 남기고 떠난 교회와 푸르게 이끼가 낀 묘가 몇 구 서 있는 부속묘지를 사들였다. 2단계로 착수한 것은 산뜻한 시체 임시 안치장(물론 고딕풍 건축의)에 자신을 위한 거처를 준비했다. 이것으로 베네딕트는 자신은 언제 죽어도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이들 건물을 차례차례 출입하면서 최소한의 혼란과 최대한의 조직적 축복을 받으며 묻힐 수 있었다. 베네딕트가 조간에 내는 커다란 신문 광고는 ‘화장은 사절!’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교회를 나와 땅 속에 매장되기까지는 휘파람을 불 수 있을 정도로 손쉽게 행해지는 것이다. 보존 장치도 더없이 쾌적한 것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베네딕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바람에 꺼진 양초처럼 참을 수 없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베네딕트는 깊은 열등의식이 있었다. 그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변명할 여지가 없는 우울한 기분에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뜻을 받아들이려고만 했으며 서로 논쟁을 하거나 큰소리를 지르거나 상대의 말을 부정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어떤 상대와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베네딕트는 그 콧구멍이나 귀나 머리의 가르마 따위를 수줍음을 담은 눈으로 쳐다볼 뿐 결코 정면으로 상대의 눈을 쳐다보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상대의 손을 마치 그것이 귀중한 선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차가운 양손으로 감싸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던 당신이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상대는 베네딕트가 자신의 말 따위는 한 마디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베네딕트는 현관의 계단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에게 미움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정말로 착한 아이구나.”

 

베네딕트는 돌계단을 내려가 문을 나섰지만 자그마하고 아담한 시체 안치소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즐거움은 나중에 만끽할 것이다. 모든 사물은 순서가 중요하다. 임시 안치장에서 베네딕트를 기다리고 있는 시체 위에 천부적 재능을 떨칠 기쁨을 지금 떠올린다는 것은 오히려 손해였다. 정말로 그렇다, 우선 정해진 순서대로 시작하는 게 좋다. 먼저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켜야만 한다.

 

어디로 가야 분노할 거리를 건질 수 있을지 베네딕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반나절 걸려서 이 작은 마을의 여기저기를 방문하며 돌아다니고는 살아 있는 이웃 사람들의 우월감에 압도당해 자기 자신을 열등감 속에 빠뜨리곤 했다. 그리고는 진땀투성이로 만들어 심장도 뇌도 두려움에 떠는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것을 일상의 일과로 삼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우선 약방 주인인 로저스 씨를 상대로 무의미한 아침인사를 질질 끌며 나누었다. 그러면서 로저스가 내뱉은 모멸한 표현의 억양 하나하나까지를 모두 가슴에 담아 두었다. 로저스는 장례 사업을 하는 베네딕트에게 언제나 자극하는 듯한 말을 퍼부었다.

 

“하하하.”

 

베네딕트는 지금 자신에게 퍼부어진 농담에 웃어 보이지만 그 마음속은 왈칵 울어버리고 싶은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것 봐. 당신은 냉혈동물이야.”

 

오늘 아침의 로저스는 더욱 더 신랄했다.

 

“냉혈동물이라고요, 하하.”

 

베네딕트는 웃어 보였다. 약방을 나온 베네딕트는 스테이브선트를 우연히 만났다. 스테이브선트는 베네딕트와 잡담을 하고 있는 동안에 누군가와의 약속을 꾸며내려고 적당한 시기를 엿보면서 큰소리를 질렀다.

 

“베네딕트, 경기는 어때? 열심히 장사에 힘쓰고 있겠지?”

 

“예, 그저.”

 

베네딕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 일은 잘 돼가고 있습니까, 스테이브선트 씨?”

 

“아니, 당신 손이 아주 차잖아? 오한이 드는 모양이군? 불감증이 있는 여자에게 방부제라도 채우기 시작한 거 아닌가? 나쁜 일은 아니군. 이봐, 내가 하는 말 들리나?”

 

스테이브선트는 이렇게 말하며 상대의 등을 두드렸다.

 

“예, 들리고말고요! 그럼, 이만.”

 

베네딕트는 엷은 미소를 뗬다. 다음 사람들과도 그런 인사가 계속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베네딕트는 온갖 쓰레기가 내버려지는 호수 같았다. 사람들은 맨 처음에는 자갈을 던지지만 베네딕트는 반항의 잔물결조차 일으키지 않는다는 걸 알면 작은 돌에서 벽돌, 둥근 돌 같은 점차 큰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베네딕트에게는 바닥이 없고 물보라도 일으키지 않았으며 찌꺼기도 남기지 않았다. 호수에는 반응이 없었다.

 

해가 짐에 따라 베네딕트는 더욱 더 자포자기가 되고 사람들에 대한 노여움을 더해, 건물들을 찾아다니며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속으로는 학대받는 즐거움을 가지고 그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더욱 커질 밤의 즐거움을 위하여. 그래서 베네딕트는 그러한 어리석고 건방지고 무례한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깊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머리를 조아리고, 위에 집어넣기 전의 비스킷처럼 그 양손을 꽉 쥐고는 그저 냉소당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이었다.

 

“이거 이거, 사람 장사[3] 아니오?”

 

식료품점 주인 프린저가 말했다.

 

“어떻소, 댁의 콘비프나 뇌 절임의 맛은?”

 

여기에 이르러 베네딕트의 열등의식은 극도에 달했다. 귀가 따가울 정도의 모욕과 무시무시한 자기 학대의 절정에 이른 베네딕트는 미친 듯이 손목시계를 보고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고는 홱 발길을 돌려 쏜살같이 거리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절정에 선 베네딕트의 심경은 완전히 준비가 갖추어져서 마침내 이뤄야 할 일, 자기 자신의 즐거움에 몰두하기 위한 완전한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다. 하루 중 두려운 시간은 끝나고 즐거운 부분이 시작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베네딕트는 부리나케 계단을 올라가 시체 안치소로 뛰어 들어갔다.

 

 

 

 

 

눈이 내린 경치처럼 새하얀 색으로 칠해진 방이 베네딕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하얀 작은 언덕이 늘어서 있고 시트 밑에 누워 있는 것의 윤곽이 희끄무레하게 드러나 있었다. 문을 있는 힘껏 밀쳤다. 베네딕트는 빛의 홍수에 싸인 채 입구에 서서 한쪽 손으로 부자연스럽게 손잡이를 잡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다른 한 손은 높이 들고 연극조의 인사를 했다.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돌아온 것이다. 베네딕트는 오랫동안 무대 중앙에 우뚝 선 채로 있었다. 베네딕트의 머릿속에서는 아마 빗발치는 갈채가 울려 퍼지고 있었을 것이다. 베네딕트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다시 머리를 깊이 숙임으로써 너무나도 친절한 관객들에게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베네딕트는 상의를 벗어 걸고 하얀 새 작업복을 걸치고 재빠른 직업적 손놀림으로 소매 단추를 채우고 손을 씻으면서 천천히 주위의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수확이 많은 일주일이었다. 시트 밑에는 기호에 따라 서로 다른 각양각색의 시체가 모여서 자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그들 앞에 서자, 자신의 몸이 점차 커지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도록 치솟아가는 것을 느꼈다. 베네딕트는 스스로도 몹시 놀라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아니지만 점점 더 높이 치솟으면서 호기심도 더해진다!’[4]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양손을 높이 뻗었다.

 

베네딕트는 그때까지도 이 방에 맨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그 경이감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기쁨과 동시에 망설임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베네딕트의 꼭두각시에 불과해서 하고 싶은 행위를 그들에게 할 수가 있었고 게다가 상대는, 당연한 일이지만, 베네딕트의 행위에 은근한 협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베네딕트는 옛날처럼 자유롭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쑥쑥 자라나는 것이었다.

 

“오오, 위로 위로, 높이 높이 자란다. 이제 곧 머리가 천장에 부딪칠 것 같아.”

 

 

 

 

- 2부에 계속 -

 

 

 

 

 

 

 

 

* cyrus의 주석

 

 

 

 

[1] 원작 출전은 1947년에 발표된 단편집 <Dark Carnival>, 번역문 출전은 《나의 꿈꾸는 여자 : 환상 미스터리 걸작선》(동숭동, 1993). 이 책은 정태원 씨가 번역했고, 총 12편의 환상소설을 모아 놓은 앤솔로지다. 알라딘에 이 책을 검색하면 출판사명이 '민족사'(주로 불교 서적을 펴내는 출판사가 왜?)로 나온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뿐만 아니라 어거스트 덜레스(August Derleth), 로버트 블록(Robert Bloch), 패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 리처드 매드슨(Richard Matheson)의 소설 등이 수록되어 있다. 환상소설 앤솔로지의 제목은 리처드 매드슨의 작품명이다. 이 책은 이듬해에 《식인 달팽이》라는 괴랄한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는데, ‘식인 달팽이’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명이다. 브래드버리의 소설을 소개한 짤막한 글은 정태원 씨가 썼다.

 

 

 

※ 어거스트 덜레스와 로버트 블록을 소개한 필자의 잡문

 

* 《공포특급 5》 리뷰

(2016년 4월 25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8452837)

 

* [누가 러브크래프트를 죽였는가?]

(2017년 5월 29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9366364)

 

 

 

 

[2] 침례파

자각적인 신앙고백에 기초한 침례를 시행하는 그리스도교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신약성서의 내용에 따라 신앙 고백을 한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믿으며 이 때문에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 네이버 백과사전 ‘침례교’ 항목)

 

 

[3] 이 문장에서 나오는 ‘장사’는 ‘물건을 파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가 아니다.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일(葬事)을 뜻한다.

 

 

[4] 베네딕트는 루이스 캐럴(Lewis Carrol)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 소녀가 몸집이 거대해지는 장면을 자신의 모습에 빗대어 표현한다.

 

 

 

 

 

 

 

 

 

 

 

 

앨리스가 거인이 되는 장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잡문 [거인 앨리스를 사랑한 난쟁이](2017년 8월 29일 작성)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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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니 모두 함경도에서 피난 내려온 실향민이라 우리에겐 친척도 하나 없었어요. 아시다시피 그때는 분유도 귀해서 일제 모리나가 분유를 사야 했는데 우리에겐 그럴 여유조차 없었지요…‥.” (공지영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97)

 

 

 

GS25 편의점에 가면 모리나가 밀크캐러멜 맛 아이스크림을 구할 수 있다. 와플 형태의 아이스크림인데 그 안에 캐러멜 시럽이 들어있다. GS25는 이 제품을 대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스크림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회사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모리나가는 일본의 업체이다. (GS25일본에 생산되는 아이스크림을 대만 인기 아이스크림으로 둔갑해서 판매하는 이유가 있다. 이유는 곧 알게 될 것이다)

     

1910모리나가 상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되었고, 1912년에 모리나가 제과 주식회사로 변경되었다. 모리나가가 생산하는 대표적인 제품이 모리나가 밀크캐러멜이다. 모리나가 밀크캐러멜은 1979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였고, 모리나가와 오리온의 기술 제휴로 오리온 밀크캐러멜이 출시되었다. 모리나가와의 기술 제휴로 나온 또 다른 오리온 제품이 초코파이고래밥이다.

     

1949년 모리나가 제과 회사에서 독립한 모리나가 유업은 우유, 분유 등 유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다. 공지영 소설에 언급된 일제 모리나가 분유가 바로 모리나가 유업에서 제조된 제품이다. 1950년대에 모리나가 분유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거로 추정한다. 매일유업1974년 모리나가 유업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맘마분유를 내놓으면서 조제분유 시장에 뛰어들었다.

 

 

 

 

 

 

 

 

 

 

 

 

 

 

* 민족문제연구소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생각정원, 2017)

    

 

 

모리나가 제과와 모리나가 유업. 이 두 회사가 국내 제과 및 분유 산업 성장에 큰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모리나가 제과가 걸어온 길에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와 관련된 불편한 진실이 있다. 모리나가 제과는 전범 기업이다. 모리나가 제과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일본군에게 전투식량을 대량으로 제공한 전력이 있다. GS25는 모리나가 제과의 전범 이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불매 운동이 펼쳐질 것이고, 제품 판매가 저조해진다. 그래서 GS25은 밀크캐러멜 아이스크림을 대만 인기 아이스크림으로 홍보했다.

 

 

 

※ '모리나가 우유 중독 사건'에 대한 간략한 설명 (환경운동연합)

http://kfem.or.kr/?p=37215

 

 

모리나가 유업이 설립된 지 6년 후에 모리나가 비소 우유 중독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일본 최악의 식품 안전사고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으로 우유(환경운동연합은 유아용 분유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는 언급된 우유는 유아용 분유를 포함한 것이다)를 먹은 어린이들이 비소 중독을 일으켰다. 130여 명의 어린이가 사망했고, 환자 수는 약 13,000여 명이었다. (환경운동연합의 소개에 따르면 비소 중독으로 사망한 어린이가 ‘13이라고 한다) 우유에 들어간 식품첨가물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모리나가 유업이 사용한 식품첨가물은 비소가 포함된 공업용 약품이었다. 비소 우유를 먹은 어린이 대부분이 십 년 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는데도 모리나가 유업은 사고가 일어난 지 15이나 지나서야 보상 조치를 마련했다. 1950년대에 모리나가 분유를 먹으면서 자란 우리나라 어린이들도 비소 중독증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시절엔 분유가 귀했기 때문에 분유를 먹은 어린이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모리나가 제과가 전범 기업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리나가 제과의 과자를 먹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모리나가 제과의 불편한 진실을 모르는 채 그 제품을 선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모리나가제과 그룹은 아베 신조 총리의 부인의 외가 집안이 운영하는 기업이다. 하지만 전범 기업이 만든 과자 하나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라고 자극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에게 적대감을 키우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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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9-03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리나가가 전범기업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니콘 카메라로 쓰지 말아야 하는데...

cyrus 2017-09-03 08:42   좋아요 0 | URL
최근에 모리나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서야 늦게 알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스크림 맛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먹을 일이 없습니다.

2017-09-03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03 08:44   좋아요 0 | URL
일본 정부가 반성하지 않고,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니까 전범 기업들도 과거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오거서 2017-09-03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리나가, 이름 때문이지만, 셜록 홈즈를 괴롭히는 악당 모리아티를 생각나게 합니다. 전혀 상관 없는 얘기지만서도…
모리나가 아웃!

cyrus 2017-09-04 08:57   좋아요 0 | URL
‘모리나가‘를 자꾸 ‘모리가나‘, ‘모리가라‘로 잘못 쓰는 경우가 있어요. ^^;;

잠자냥 2017-09-0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 아이스크림 사먹었는데... 음 이 포스팅으로 많은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감사!

cyrus 2017-09-04 08:58   좋아요 0 | URL
한 두번 먹는 것 가지고 비난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전범 기업 제품이나 식품을 구매한 것을 SNS에 인증하는 행동은 문제 있습니다.

stella.K 2017-09-0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대단하다.
모리나가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기업하는 사람들 정신이 나갔구만.
그런 것도 잘 알지도 못하고...
이거 뭐 삼성이 그모냥인데 더 말해 뭐하냐?
삼성이 정신 차리면 바람잡이 효과로 적어도 3분의 1은
나갔던 정신 다시돌아오지 않을까?
그래도 역시 믿을 건 소비자의 고발정신 같다.
더 많이 난리쳐야 하는데...ㅠ

cyrus 2017-09-04 09:03   좋아요 0 | URL
전범 기업의 제품과 식품에 의존하는 실정이라서 불매운동의 파급력이 촛불 운동만큼이나 나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fledgling 2017-09-03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국내저작류에 대한 리뷰가 점점 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저만 그런게 아니겠죠~ 본격적으로 이제 국내작가들을 섭렵하는 겁니꽈~^^

cyrus 2017-09-04 09:04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fledgling님. 섭렵까지는 아니구요, 내용이 궁금한 책이 있으면 그 기분에 따라 읽으려고 합니다. ^^

또 봄. 2017-09-12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동실에 하이추가 한 박스나 남았는데요.T.T

cyrus 2017-09-12 14:48   좋아요 0 | URL
이미 구매한 것은 버리기가 아까워요. 그냥 먹어야죠. ㅎㅎㅎ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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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

다만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셰익스피어)

 

    

 

우리는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늘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아주 작은 것에서조차 행복을 찾아내는 마음가짐이다. 마음을 다친 상처가 고통, 수치심, 절망, 불안을 낳고 이러한 것들을 거부하다 보면, 무력이나 분노, 경멸, 실망 등의 부정적인 마음 상태가 형성된다. ‘진짜 나를 무시한 채, 열등감에 휩싸인 자아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의 감정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감정들은 결국 자신의 마음에 상처만을 남긴다. 이 모든 문제가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차분히 생각해보면 나의 문제점을 무엇인지 되돌아 살펴볼 수 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은 시급히 개선할 수 있으며,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까지 생기게 된다.

     

글쓰기는 삶을 더듬어가는 여행이다. 우리 앞에 마련돼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생 앞에 항상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존재다. 공지영월춘 장구(越春 裝具)맨발로 글목을 돌다를 통해 우리는 희망이라는 실체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두 편의 작품 모두 작가가 주인공 겸 화자로 등장한다. 월춘 장구는 자신의 내적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작가의 세밀한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월춘 장구봄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장비를 뜻한다. 불완전한 삶 속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이 소설을 쓰였다. 삶의 역경을 뜨거운 인내로 녹여낼 때 거기서 싱싱하고 힘차게 자라나는 희망의 새싹이 돋아난다. 작가는 어둡고 쌀쌀한 계절을 의지로 넘길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본질과 이질적인 것은 상흔을 남긴다. 그리고 그 상흔으로 인해, 그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아픔의 힘으로 우리는 생의 모퉁이를 돌기도 한다. 그것이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인지 아닌지는 나는 아직도 모른다. 블라인드 포인트, 라고 산에 오르던 친구는 말했다. 모퉁이를 돌면 그곳에 무슨 죽음과 무슨 삶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험악한 등정에서 산악인들은 언제나 그 블라인드 포인트를 돌아야 한다고. 그리고 초보자들에게 그것은 대개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고통을 준다고. 거기서 주저앉는 사람이 참 많이도 있다고, 그러나 그 공포를 이겨낸 자에게만 산은 그 정상을 허락한다고. (17~18)

 

 

이 대목에서 맨발에서 글목을 돌다맨발글목의 의미를 재확인할 수 있다. ‘글목글이 모퉁이를 도는 길목을 의미하는데 작가가 만든 단어다. ‘맨발은 작가 자신을 포함한 상처 받는 존재를 가리킨다. 월춘 장구맨발에서 글목을 돌다의 유사성은 삶의 상처를 진솔하게 묘사하는 글쓰기다. 자기 상처를 드러내며 세상과 대화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작가의 성숙함 앞에서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을 독자는 없을 것이다.

     

소설집의 표제작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조금은 과장되고 웃음이 섞인 블랙코미디다. 6개월째 사망 선고를 받고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할머니를 관찰하듯이 바라보는 소녀인 화자와 그 가족들의 심리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할머니의 재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가족들은 할머니 곁을 떠나지 못한다.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미음 대신에 흰 쌀밥과 갈비를 먹기 시작하는데, 이 장면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의 감정 상태를 읽을 수 있다. 공포관리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에 관해 생각하면 슬퍼지기보다는 평소보다 행복해진다. 자기 죽음에 관한 생각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뇌가 무의식적으로 행복감을 찾거나 유발함으로써 자각적인 고통에 자동으로 대처하게 된다. 어쩌면 할머니는 죽음의 공포에 대처하기 위해 평소에 좋아하는 갈비를 입에 댔을 거고, 의도치 않게 생명이 연장된 것이다. 할머니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행위로부터 심신의 안정은 물론 죽음의 공포를 최소화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은 할머니의 생명 연장을 지켜보면서 공포를 느낀다. 다음 장면은 인간의 삶과 죽음, 공포와 웃음, 비극과 희극의 양면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외삼촌과 막내외숙모는 다시 할머니의 방으로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그들의 젓가락에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갈빗살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할머니가 웃으면 함께 웃고, 할머니가 호통을 치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들의 얼굴에 눈에 띄게 공포가 어렸다는 것이고, 그 공포를 감추려는 듯 표정은 더 딱딱해지고 있었다. (76)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절망인 죽음을 마주쳐야 하는 할머니가 생의 의지를 끝까지 놓지 않는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 ‘블라인드 포인트의 공포를 이겨낸 할머니의 의지인 걸까, 아니면 더 살고 싶어서 살아있는 자들을 억지로 붙잡으려는 집착일까.

    

 

 

 

Trivia

 

* 12

걸레를 빨다 말고 키다리 아저씨를 쓴 오스카 와일드를 생각했다.

 

→ 「키다리 아저씨의 작가는 진 웹스터(Jean Web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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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7-09-03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라인드 포인트‘의 공포를 이겨낸 할머니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의지를 잡아당긴 것은 희망의 새싹이구요.^^
‘글목‘이란 말 앞에서 한참 생각이 머뭅니다. 글을 쓰려고 컴퓨터나 종이 앞에 섰을 때마다 긴장이 되거든요. 발상이 떠오를 때 시작을 하지만 제 글이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게 될 지 처음부터 알 수는 없거든요. 다른 이들이나 저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다만 가보는 거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맞닥뜨리는 미지의 감성에 대한 스릴이 있습니다. 이 마음 역시 희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 글이 도달하게 될 곳이 썩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

cyrus 2017-09-04 09:08   좋아요 2 | URL
저도 논쟁이 될만한 주제의 글을 쓸 때면 긴장됩니다. 합당한 비판을 받고 싶어서 제 생각을 소신있게 밝힙니다. 그런데 쓰다 보면 ‘비난‘받을 만한 엉터리 내용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비난 받는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제 글쓰기의 원칙입니다. 그 글은 실패한 글입니다. ^^
 
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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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 그 한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김예슬 선언> 중에서)

 

 

고려대 교정 건물에 붙여진 대자보의 주인공은 대학을 과감히 뛰쳐나왔다.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며 당돌하게 말이다. <김예슬 선언>을 읽었을 때 심장이 찔렸다. 고통스러웠다. 아팠던 이유는 대자보 속에 우리 모두의 문제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만두고 거부하였던 것은 고작 대학이 아니다. ‘대학이라는 이름 아래 성공과 경쟁만을 강요하는 세상이다. 대학 문제는 우리 모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자리 문제와 교육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김예슬의 외로운 대항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이십 대들을 슬프게 했다. 그 슬픔은 7년이 흐른 오늘에도 전혀 걷히지 않았다. 슬픔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 눈물이 피눈물이 되어 우리 발목을 차갑게 감싸고 있다. 7년 전 대학생이었던 이십 대는 이제 삼십 대가 되었다. 누군가는 결혼했고, 누군가는 여전히 취업을 준비하는 백수이고, 누군가는 직장에 취직해 삶에 충실히 하고 있다. 우리가 안고 있었던 고민은 고스란히 후배들에게 넘겨졌다. 영초 언니(문학동네, 2017)를 읽으면 가슴에 답답함을 느꼈던 7년 전 청춘들의 모습이 떠올린다.

 

책의 저자인 서명숙천영초와 함께 데모했던 대학 후배다. 영초 언니는 저자의 젊은 날의 초상이면서도 천영초 한 사람을 위한 자화상이다. 천영초는 70, 80년대 시대의 아픔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녀는 부당한 권력에 당당하게 맞선 운동권의 전설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저자에게 언니를 기억하는 회상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영초 언니는 그 당시 ‘386 운동권 세대가 겪어야 했던 처절한 고통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저자와 천영초는 386 세대가 헤쳐 나온 시대적 운명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쯤이면 쉰을 바라보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날의 청년세대가 생각났을까?

 

386세대는 자유가 억압된 70년대와 민주화에 대한 희망이 차가운 환멸로 돌변한 80년대를 보냈다. 유년기에 유신독재를, 대학 시절엔 전두환 군부독재를 겪으면서 반쪽짜리민주화의 과정을 지켜본 이들이다. 그 시절의 대학은 최루탄과 휴교가 일상이었다. 대학생들은 화염병과 최루탄이 매캐한 거리에 뛰어들었고, 자유를 갈망하는 열정은 빨갱이로 낙인 찍혔다. 386 세대의 부모들은 경찰에 붙들리거나 고문당하는 자식을 볼 때마다 가슴 치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성동구치소로 향하는 저자가 호송차 창문 넘어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

 

 

호송차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가로수의 새잎들이 연녹색으로 간질간질 움트는 5월의 거리 풍경은 눈물겹도록 사랑스러웠다. 지나는 이들의 얼굴도 다들 행복해 보였다. 난 언제나 저 거리, 저 풍경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중에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둔 세상은 피안의 세계처럼 아득했다. (164)

 

 

거리의 중심에서 소리 질렀던 저자는 이제 희망 없는 청춘의 실체를 감지한다. 그녀의 상념은 민주주의라는 공적 가치에 청춘을 바친 바보 같은 세대의 아픈 혼잣말이다. 나아가 희망 없는 청춘을 보냈던 삼십 대 독자들을 슬프게 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지금의 삼십 대는 십 년 전만 해도 ‘88만 원 세대 또는 삼포 세대 등으로 불렸다. 청년세대를 규정하는 이름이 많지만, 의미가 썩 좋지 않다. 그 단어 속에 취업난과 고용 불안, 치솟는 학비에 시달리며 외로운 생존경쟁을 해내야 하는 이십 대의 차가운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쓸쓸한 외침은 사회 전체를 진동할 합창이 되지 못했다. 기성세대는 울부짖는 청년들을 향해 나약하게 자책하지 말고, 더 노력해라고 닦달했다. 어떤 이는 그들 보고 빨갱이에게 사주받은 미성숙한 세력으로 규정했다. 정당한 분노마저 빨갱이로 몰아가는 작태가 낯설지 않다.

 

청년세대가 겪고 있는 이 세상은 80년대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등장은 반쪽짜리민주화로 귀결되었고, 끝까지 살아남은 정치 기득권 세력은 권력과 부를 불공정하게 독점했다. 정치 기득권 세력은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암세포처럼 퍼진 적폐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적폐 세력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늘 권력 주변에 기생했고, 권력에서 흘러나오는 단물을 마음껏 빨아대면서 자란 악성 종양이 바로 최순실과 그녀의 딸 정유라. 정유라는 청년세대와 다른 삶을 살았다. 잘난 어머니 덕택에 돈을 걱정 없이 썼다. 그래서 그녀가 돈도 실력이야!”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발언에 가슴 아픈 의문의 1를 당한 청년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비상식적인 세상으로부터 연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은 청년세대는 광장으로 나가 촛불을 들었다. 빛나는 촛불로 그동안의 긴 연패의 굴욕을 잊는 빛나는 1을 추가했다. 빛나는 1이 없었다면 최순실은 떵떵거리며 살면서 민주주의를 우습게 봤을 거고, 서명숙은 영초 언니를 쓰지 못했다. 지금 상상하기 끔찍하지만, 국정 농단 세력의 정부가 뻔뻔하게 지내고 있었어도 저자는 영초 언니를 썼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삶과 청춘을 바친 사람들을 무시한 적폐 세력들은 저자의 이름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추가했고, 영초 언니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했을 게 뻔하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캠퍼스의 일상적 삶을 좌우하던 현실 속에서 대학을 다닌 386 세대의 이야기들이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낯선 무용담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영초 언니는 어려운 시절을 기어이 극복한 화려한 성공 미담을 부각한 386 세대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천영초를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자 시점으로 일관한다. 천영초를 포함한 386 세대가 기성 사회에 어렵게 적응하는 모습이 담긴 심리적 풍경(영초 언니 프롤로그 9)’을 지켜보고 서술한다. 천영초와 그의 남편 정문화는 여전히 사회변혁을 열망했으나 그들의 뜨거운 열정을 알아주고 동조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운동권의 삶을 살았던 386 세대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평생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다. 천영초도 예외가 아니다. 정당 생활을 접은 천영초는 혁명자금을 모으려고 다단계 회사에 들어갔고, 똑똑했던 정문화는 경제 감각이 떨어져 궁핍한 생활을 보냈다. 천영초는 운동권 동지로서의 정문화를 사랑했지만, ‘가정을 책임지는 남편으로서의 정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자는 기성 사회에 대한 경험이나 준비가 미흡한 386 운동권 세대의 씁쓸한 뒷모습까지도 낱낱이 기록했다. 젊은 날에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꿈꿔야 할 미래를 빼앗겼던 386 세대는 삭막했던 청춘의 슬픈 결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영초언니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건 우리 사회 전체를 확 바꿔놓을 혁명자금이 아니라 당장의 생활비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니의 마지막 자존심이랄까, 스스로 믿고 싶어하는 바를 눈앞에서 박살내고 싶지는 않다. (261)

 

 

안타깝게도 삭막했던 청춘은 지금의 청년세대에게 대물림 되고 있다. 오늘도 청년들은 답답한 도서관 건물 안에서 좋은 직장, 좋은 결혼, 좋은 노후 생활을 위해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다. 앞으로 달려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될수록 절망의 고리를 끊겠다는 의지가 사라진다. 경쟁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있다. 영초 언니를 다 읽고 나니 여러 가지 걱정이 든다. 세월이 흘러 나 자신 또한 따뜻한 현실이라는 소파에 파묻히면서 제2, 3의 김예슬을 비웃을까 봐. 수십 년 후에 우리가 한때 열광했던 김예슬이 천영초처럼 잊힐까 봐. 쉽게 변하지 않는 세상을 다행이라 여기며 요즘 젊은이들은 그저 뭘 모르는 것들이라 손가락질할까 봐. 알게 모르게 시간이 지나면 청년세대도 기성세대가 된다. 저자가 천영초를 아직 완전히 잊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물결에 휩쓸려 정신없이 망각해버린, 그럼에도 언제나 의식 한쪽에 찜찜하게 남아 유령처럼 짓누르는 사회적 열망의 냄새를 여전히 맡고 있다. 영초 언니386 세대와 청년세대가 스스로 자신의 삶과 시대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특별한 책이다. 따라서 책 속에 변함없이 젊은 ‘20대의 영초 언니는 절대로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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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09-01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땅에서,얼마나 많은 ‘영초 언니‘ 가 외롭게 살다 갔을까요..

cyrus 2017-09-02 12:12   좋아요 0 | URL
남성의 역사에 파묻힌 언니들의 기록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북프리쿠키 2017-09-0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글 보고 갑니다^^;

cyrus 2017-09-02 12:13   좋아요 0 | URL
이 책, 정말 좋습니다. ^^

2017-09-01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02 12:1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현재 삶의 질을 과거와 비교해봤자 작은 위안만 얻을 뿐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