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왜 책을 사랑하는가? - 예술에서 일상으로, 그리고 위안이 된 책들
제이미 캄플린.마리아 라나우로 지음, 이연식 옮김 / 시공아트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 독서의 역사는 곧 인류의 지성사이며 문화사다. 알베르토 망겔(Alberto Manguel)《독서의 역사》에서 ‘독서’를 ‘책에 담은 의미를 알아내는 행위’라고 말했다. 세상을 이해하는 행위로 그만큼 독서의 의미가 크고 깊다는 뜻이다. 책은 애서가 또는 작가의 전유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예술가도 있었다. 반 고흐(van Gogh)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다독가였다. 책은 모든 장르의 그림에 카메오로 등장했다. 초상화에 그려진 인물의 학식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는지 암시해주고, 비싼 장식품으로도 그려지기도 했다. 몇몇 애서가는 농담으로 사놓고도 읽지 않은 책들을 장식품으로 취급한다고 말한다. 과거 예술가와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유럽은 중세 이래 책을 아름답게 꾸미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책은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 교수 등 극히 한정된 인텔리만 읽을 수 있고 소장할 수 있었다.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신분 과시용이요 유산계층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화려한 장식품이었다. 그림에 책을 그려 넣은 예술가들은 책이 장서가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증명해주는 소품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책이 등장하면서 예술가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예술가는 왜 책을 사랑하는가?》‘도판이 풍부한 독서의 역사’라고 보면 된다. 책의 원제는 ‘The Art of Reading’이다. 《예술가는 왜 책을 사랑하는가?》는 중세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독서의 거대한 역사를 예술가들이 남긴 다양한 그림을 통해 보여준다. 이 책의 공동 저자는 책이 그려진 그림들을 살펴보면서 책을 대하는 예술가들의 생각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아본다.

 

책을 많이 읽은 예술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가와 책이 서로 무관한 관계라고 단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책의 등장으로 ‘무명의 장인’으로 취급받았던 예술가의 지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화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1550년에 <예술가 열전>(국내에서는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이라는 책을 썼다. <예술가 열전>은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기록물이다. 이 책이 나오지 않았다면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그림은 ‘작가 미상의 그림’으로 알려져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을 것이다.

 

책이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절은 절대로 다시 오지 않는 책의 황금기이다. 이때 책은 상류층의 권위를 발산하는 그림을 장식하는 데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필수 소품이었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유행이 변하듯이 책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와 그 책에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가들의 생각도 조금씩 달라졌다. 17세기 유럽에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하는 정물화인 ‘바니타스(vanitas)가 유행했다. 바니타스를 즐겨 그린 화가들은 책을 유한하고 덧없는 인간의 삶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인식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지식이 대중화되고, 책의 개인 소유가 가능하게 되면서 책은 상품으로 거듭났다. 아, 물론 이때도 여전히 책은 기득권층의 지위를 돋보이게 해주는 소품으로 활용되었다. 전근대의 책이 왕족, 귀족, 기독교 수도사들의 지위를 드러나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면, 근대의 책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었다. 앞서 나는 책과 독서의 역사를 인류의 지성사라고 언급했는데, 이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면 책과 독서의 역사는 ‘기득권 중심의 지성사’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층은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이용했다. 역사적으로 책은 기득권층의 대변인 역할을 해온 것이다. 결국 책은 기득권층이 승인한 지식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왜 책을 사랑하는가?》를 번역한 미술사가 이연식‘독서는 위험하다. 특히 예술가에게 위험하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는 독서 자체를 피해야 할 행위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책 읽는 사람은 분명 그저 읽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인 것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지식은 부당한 세상에 맞서는 무기를 만들 때 필요한 재료가 된다. 독서가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우리가 그 속에 있는 재료를 어떻게 쓰느냐(어떻게 읽고 소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책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책은 위험하지 않다. 책 속에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이 위험하다.

 

 

 

 

※ Trivia

 

* 278쪽에 미국의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동성 연인의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그녀의 이름이 ‘앨리스 토클러’라고 되어 있다. ‘앨리스 토클러스/토클라스(Alice B. Toklas)라고 써야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8-03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03 11:4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을 너무 안 읽는 사람도 문제고, 또 책을 너무 많이 읽는 사람도 문제에요. 전자는 글 한 줄 못 쓴다면, 후자는 잘못된 신념을 강조하는 글을 너무 많이 써요.

라이너스 2019-08-04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체가 담고 있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수용자의 태도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군요~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cyrus 2019-08-05 16:25   좋아요 0 | URL
주제와 내용이 어렵지 않아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
 

 

 

 

초등학교[주] 시절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중략]

 

되찾은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엘뤼아르, 오생근 옮김, 『자유』 중에서)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가 쓴 유명한 시 『자유』의 원래 제목은 ‘단 하나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엘뤼아르는 이 시의 맨 마지막 문장에 자신이 사랑하는 두 번째 부인의 이름(Nusch, 뉘쉬)을 쓸려고 했다. 엘뤼아르에게 사랑이란 ‘자유’의 동의어다. 『자유』라는 이 시 한 편이 너무나 유명해서 대부분 사람은 엘뤼아르를 ‘저항 시인’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초현실주의자 그룹에서 활동한 이력이다.

 

 

 

 

 

 

 

 

 

 

 

 

 

 

 

 

 

 

* [품절] 엘뤼아르 《이곳에 살기 위하여》 (민음사, 1994)

*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미메시스, 2012)

 

 

 

 

초현실주의는 이성과 합리주의로 대변되는 서구 문명 전반에 대한 반역을 꿈꾸는 예술 운동의 하나였다. 꿈과 무의식의 세계, 공상 등의 비현실적인 세계와 이성에 속박되지 않고 상상력의 세계를 회복시키며 인간 정신을 해방하는 것을 큰 목표로 하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삶도 예술의 연장선으로 여겼다. 자유연애는 기본이었고, 주목받기 위해 기행도 일삼았다.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은 처음으로 초현실주의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려고 하였다. 그는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학에 영향을 받아 꿈, 광기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을 이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으로 인간의 원초적 무의식, 즉 꿈을 ‘해석’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 캐서린 잉그램, 앤드류 레이 그림 《This is Dali》 (어젠다, 2014)

* 돈 애즈 《살바도르 달리》 (시공아트, 2014)

* 크리스티아네 바이데만 《살바도르 달리》 (예경, 2009)

* 피오렐라 니코시아 《달리: 무의식의 혁명》 (마로니에북스, 2007)

* 장 루이 가유맹 《달리: 위대한 초현실주의자》 (시공사, 2006)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몽상가는 아니었다. 의외로 그들은 정치와 현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브르통은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1930년대 말에 멕시코를 방문해 그곳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를 만나기도 했다. 브르통 이외에도 시인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등도 공산주의자였다. 이념에 심취하다 보니 초현실주의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고 이로 인해 불거진 갈등으로 인해 초현실주의 그룹을 떠나는 화가들이 속출했다. 브르통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돈에 환장한 사람(Avida Dollars)이라는 별명을 붙여가면서 비난했고, 그를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했다. 브르통이 달리를 조롱하면서 만든 별명은 달리 이름의 철자를 바꾼 것이다. 달리는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와 파시즘을 찬양했다. 파시즘을 지지하는 달리의 망언은 파시즘에 반발하며 자유를 갈구하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엘뤼아르는 스페인 내전과 두 번의 세계대전을 지켜보며 ‘저항 시’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쓰인 시에는 전쟁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 엘뤼아르는 독일군에 맞서는 레지스탕스(Resistance)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작가 단체의 책임자가 돼 독일을 비방하는 비밀 출판물을 만들었다. 엘뤼아르는 『시는 구체적인 진실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라는 시에서 저항 시를 쓰지 않는 동료 시인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자네들은 목적도 없이 걷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인간은

뭉쳐야 하고 희망하고 투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네

 

 

(엘뤼아르, 오생근 옮김, 『시는 구체적인 진실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중에서)

 

 

엘뤼아르는 이 시에서 ‘사랑’을 주제로 한 순수시를 쓰는 일에 몰두한 동료 시인을 ‘까다로운 친구들’이라고 부르면서 세계를 바꾸려는 희망과 투쟁심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들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그들을 진짜 현실 속으로 걸어나가도록(참여시 또는 저항 시를 쓰는 일) 인도한다. 재미있는 건 반전이 있는 이 시의 구조다. 엘뤼아르는 1연부터 4연까지 순수시를 쓰는 척한다. 5연부터 시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5연은 저항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의 행보와 순수시를 쓰는 시인들을 비교한 내용이다. 엘뤼아르는 ‘조국을 거침없이 노래하고 있다면’, 동료 시인들은 ‘사막 같은 곳’으로 가려고 한다. ‘사막 같은 곳’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시인들이 원하는 유토피아 또는 공상의 세계이다. 엘뤼아르도 한때 초현실주의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사막 같은 곳’을 지향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7연에서 자신을 ‘힘이 없는 존재’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힘이 없는 존재’는 초현실주의에 심취했던 시인의 과거 모습을 의미한다. 전쟁의 참화를 목격한 이후로 엘뤼아르는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정신적 가치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는 현실을 해방해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시는 구체적인 진실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자신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동료 시인들에게 바치는 시로 알려졌지만, 이 시는 초현실주의에서 시작해 현실주의(realism)로 변모하는 엘뤼아르의 참 모습이 그려진 ‘자화상’으로도 볼 수 있다.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 시인’과 ‘저항 시인’, 이 두 가지 모습으로 오랫동안 기억되어야 한다. 그는 ‘초현실’ 속에 있는 인간과 ‘현실’ 속에 있는 인간이 공통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를 담아낸 시를 썼다. 그 공통된 가치란 바로 ‘자유’였다. ‘자유’는 엘뤼아르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한 가치였다.

 

 

 

[주] 민음사 번역본에는 ‘국민학교’라고 적혀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8-02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03 06:46   좋아요 0 | URL
지금까지 댓글을 통해 하신 말씀 중에 정말 좋았어요. 사유와 행동을 일치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유와 행동이 서로 반대가 된 상태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사는 것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주변 인물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책을 읽으면 내가 믿고 싶은 생각들이 하나둘씩 많아져요. 그러면 이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됩니다. 성찰하면서 책을 읽는 것이죠. 이런 과정을 글로 기록하고 싶습니다.
 
다윈의 실험실 - 위대한 《종의 기원》의 시작
제임스 코스타 지음, 박선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요즘 서점을 둘러보거나 온라인 서점에 서핑하면 올해 과학계와 출판계가 누구를 가장 주목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다.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을 번역한 책, 진화론 입문서와 그의 이론을 지지하는 책들이 나오고 있다. 올해는 다윈이 태어난 지 210주년, 《종의 기원》 초판이 출간된 지 160년이 되는 해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명사(名士)의 생일이나 기일, 심지어 기념비적인 책이 처음 나온 날을 기리는 데 익숙해졌다. 과학계에서도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과학자를 기념하는 일만큼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다윈은 이상하리만큼 인기 없는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인슈타인(Einstein)처럼 천재로 주목받지 않았으며 리처드 파인먼(Richard Feynman)처럼 재미있는 후일담이 많은 과학자도 아니다. 다윈은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론들을 정리한 책들을 썼지만, 그렇다고 정재승이나 김상욱처럼 글을 재미있게 쓰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윈은 어떤 사람인가? 대부분 사람은 다윈을 ‘진화론의 창시자’로만 알고 있지, 실험 결과나 지식을 여러 사람과 공유하면서 소통한 지식인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그리고 다윈은 현장 실험을 선호했다. 그가 살았던 집 주변의 정원은 교과서에 나와 있는 축적된 과학적 발견을 검증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공간이다. 이미 누군가 발견하여 잘 정리해놓은 실험 결과를 재확인하는 것은 진정한 현장 실험으로 보기 어렵다. 아무도 도전해 보지 않은 실험을 시도하는 실험실에서 기존에 나온 지식은 참고용 지식일 뿐, 실천적인 지식이 될 수 없다. 다윈에게 실험실은 ‘매일매일 새로운 지식이 시험되고 태어나는 공간’이었다.

 

《다윈의 실험실》은 현장 실험을 중시한 다윈의 삶을 온전하게 알리고, 현장 실험을 하면서 새롭게 확인된 정보를 뼈대로 삼아 진화론이 형성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다윈은 20대 때부터 5년간 해군 측량선 비글호(Beagle)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며 박물학자로 거듭났다. 비글호는 다윈에게는 미지의 자연을 만나게 해주는 연구실이나 다름없는 공간이다. 그렇지만 다윈이 학문적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실험실은 다운 하우스(Down House)이다. 비글호 여행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다윈은 정신적 동반자인 엠마 웨지우드(Emma Wedgwood)와 결혼했고, 다윈 부부는 평온한 시골 마을 다운에 정착한다. 다윈 부부는 40년 이상 다운 하우스에 살았다. 다운 하우스의 정원은 ‘다윈에 의한, 다윈을 위한, 다윈의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그곳에는 다윈이 직접 구입한 여러 품종의 비둘기가 있는 비둘기장이 있었으며 온실에서는 끈끈이주걱과 파리지옥의 식충 습성에 대한 실험이 진행되었다. 다윈은 일반인과 어린 아이들도 참여할 수 있는 실험을 즐겨 했다. 다윈의 일곱 자녀는 다윈의 든든한 조수가 되어주었다. 다윈의 자녀들을 가르친 가정교사도 다윈이 계획한 실험에 참여했다. 캐서린 솔리는 10년 동안 다운 하우스에 지내면서 다윈의 자녀들에게 프랑스어와 무용, 음악 등을 가르쳤다. 평소 식물 이름을 알아맞히는 것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식물을 관찰하기도 했다.

 

정원에서 현장 실험을 한 다윈은 기존 학자들이 고수해온 ‘실험실 안에 있는 지식’이라는 고정관념을 허물었다. 다윈은 동료 생물학자와 박물학자와 다르게 흙을 손에 묻혀가면서 실험하는 것을 좋아했다. 《종의 기원》은 현장 실험이 이루어진 다운하우스 정원의 열매이다. 이 열매가 완전하게 맺어지길 원했던 다윈은 신중하게 진화론을 만들었다. 그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때까지 실험을 반복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단정해서 주장하기보다는 자신을 지지하는 동료 학자들에게 공유하면서 검증받기를 원했다.

 

《다윈의 실험실》은 다운하우스에서 진행된 역사적인 현장 실험을 복원할 뿐만 아니라 다윈의 실험에 직간접으로 도움을 준 주요 인물들도 소개한다. 다운하우스 안에는 다윈의 가족과 가정교사가 다윈 실험실의 보조 연구원으로 활약했다. 다운하우스 밖에서는 다윈의 지적인 스파링 파트너(sparring partner)이자 식물학자인 조지프 후커(Joseph Hooker)가 있었다. 후커는 미흡한 진화론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면서 이론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동료였다. 다윈은 자기 생각을 검증받기 위해 후커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역사는 논문이나 교과서 혹은 연구 노트 등에 기록된 실험 결과들이다. 그러나 실험 결과에 초점이 맞춰진 과학의 역사에는 ‘기록되지 못한 것’이 있다. ‘기록되지 못한 것’이란 실험실 안에서 수행된 실험 방법이나 소소한 경험들이다.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용어로 로 과학 지식을 분류하여 설명하자면 문자로 남겨진 모든 과학 지식‘명시 지식(明示 知識, Explicit Knowledge)이고, 기록되지 못한 경험 및 상황 중심적인 지식‘암묵 지식(暗默 智識, Tacit knowledge)이다. 따라서 암묵 지식은 학자의 개인적 관심사와 관련되어 있거나 실험실에서 학자가 실험을 수행하면서 알게 된 지식이다. 《다윈의 실험실》은 과학 교과서에서 볼 수 없거나 《종의 기원》에 언급되지 않은 다윈의 암묵 지식을 소개한 책이다. 지루한 《종의 기원》에 무모하게 도전하는 것보다 《다윈의 실험실》을 먼저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다윈의 실험실》을 읽으면 다윈을 인기 없는 학자라고 여기는 통념이 틀렸음을 알게 될 것이다.

 

 

 

 

※ Trivia

 

* 조지 허버트 웰스는 이 글을 읽고 영감을 얻어 그로부터 몇 년 뒤 <기묘한 난초의 개화>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356쪽)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의 오식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9-08-04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욱 교수 책이 재밌다는 데 동의 못합니다ㅎㅎ 김상욱 교수 글은 다윈과라고 저는 생각하는데ㅎ

cyrus 2019-08-05 16:27   좋아요 1 | URL
제가 김상욱 교수의 책을 한 권만 읽어서 그 분의 글쓰기 스타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아요... ㅎㅎㅎㅎ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착각했네요... ^^;;
 
팡타그뤼엘 제5서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권국진 옮김 / 신아사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디어 프랑수아 라블레(Francois Rabelais)《팡타그뤼엘 제5서》가 번역돼 나왔다. 이 작품은 1979년 을유문화사에서 번역본이 나온 뒤 오랫동안 절판됐다. 라블레의 대표작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 ‘가르강튀아 대연대기’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라블레는 1532년에 ‘팡타그뤼엘’을, 1534년에 ‘가르강튀아’를 발표했는데, 이 두 작품을 합본한 책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라는 익숙한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거인국의 왕 팡타그뤼엘(Pantagruel)과 그의 아버지 가르강튀아(Gargantua)의 행적을 다룬 연대기 형식의 소설이다. 거인 부자는 음식을 실컷 먹고, 술을 벌컥 마시고, 실없는 대화를 하는 등 소란스러우면서도 유쾌하게 살아간다. 지상의 기쁨을 누리는 데 여념이 없는 거인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보는 금욕적이고 천상의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던 중세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는 외설스럽고 반종교적인 작품으로 낙인찍혔지만, 그때는 중세의 낡은 관행들을 뚫고 근대 세계가 서서히 움트던 시대였다. 대중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희망이 담긴 라블레의 소설을 좋아했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라블레는 1546년에 《팡타그뤼엘 제3서》, 1552년에 《팡타그뤼엘 제4서》를 발표한다. 라블레는 155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1564년에 저자명이 라블레로 되어 있는 책이 나온다. 그 책의 제목은 ‘선량한 팡타그뤼엘의 영웅적 언행록에 관한 다섯 번째 그리고 마지막 책’이다. 이 책이 바로 《팡타그뤼엘 제5서》이다. 라블레가 쓴 거인 연대기는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어째서 《제5서》가 전작들과 비교해 많이 주목받지 못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그동안 《제5서》가 ‘위작’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현재 《제5서》와 관련된 판본으로 확인된 책은 총 세 권이다. 세 권 모두 라블레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왔다. 세 권의 판본을 연도순으로 정리하면, 1562년에 ‘종이 울리는 섬’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고, 1564년에 결정판인 《제5서》가 나왔다. 나머지 판본은 연대 미상의 필사본이다. 이 필사본은 라블레 사후에 활동한 무명작가가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5서》의 진위에 대한 학자들의 논점은 크게 세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제5서》는 라블레가 쓴 작품이 맞다. 두 번째, 라블레가 《제5서》를 쓰는 도중에 세상을 떠난 바람에 《제5서》는 미완성된 작품이 된다. 그러나 라블레의 필체를 잘 이해하고 있고, 종교개혁 정신을 가진 무명작가가 소설을 완성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약간의 가필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세 번째, 전작과 너무나 다른 문체로 봐서는 《제5서》는 위작이다. 세 번째 입장은 오랫동안 《제5서》를 설명할 때 꼭 거론되었고, 다수의 학자에게 지지받아왔다. 이렇다 보니 《제5서》는 읽을 가치도, 연구할 가치도 없는 작품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5서》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가 달라진다. 《제5서》가 라블레의 초고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위작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에 공감하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제5서》는 《제3서》와 《제4서》의 주인공이자 팡타그뤼엘의 친구인 파뉘르주(Panurge)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술병 신(神)의 신탁을 받으러 항해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당연히 이 책도 기존에 나온 전작처럼 산만하고 소란스러운 대화가 전개되고, 인물들은 기이한 섬에 당도하면서 황당한 소동에 휘말린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섬 주민들은 ‘새 인간’에 가까운 모습인데, 권력을 남용한 종교인들을 풍자하는 알레고리(allegory)로 볼 수 있다.

 

《제5서》에는 전작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칼리그램(calligram, 상형 시)이다. 칼리그램이란 ‘글자로 만든 그림’을 뜻한다. 라블레가 직접 만든 것인지 아니면 《제5서》를 가필한 무명작가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독특한 글임은 분명하다. 《제5서》 44장에 ‘에필레미’라는 노랫말이 술병 형태의 그림 안에 들어 있다. 에필레미는 포도를 수확할 때 주신 바쿠스(Bacchus)를 찬양하면서 부르는 익살스러운 노래를 말한다.

 

 

 

 

 

 

“오, 신비로 가득 찬 술병 신이여,

난 한쪽 귀로도 그대의 목소리를

듣겠나이다. 당장에, 내 마음이 간구

하는 말을 베풀어주소서. 이처럼

거룩한 성수(聖水)에 인도를 정복한 바커스를 모든 진실을 간직하도다. 성스러운 신주(神酒)여, 그대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시오. 모든 허위와 모든 기만은 노아의 시대에는 극도의 기쁨이 되지만 그대가 그 비법을 우리에게 베푸나이다. 원하건대, 내 고통을 삭혀주는 아름다운 말을 베풀어주소서.

                 이처럼 한 방울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겠나이다.

                                흰 것이나 붉은 것이나 모두.

오, 신비로 가득 찬 술병 신이여,

난 한쪽 귀로도 그대의 목소리를

듣겠나이다. 당장에.”

 

 

(권국진 옮김, 212~213쪽)

 

 

 

그런데 《제5서》의 역자는 《제5서》의 실제 판본에 실린 칼리그램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제5서》가 번역되기 한참 전에 유석호 연세대 불문과 교수는 자신의 라블레 연구서에 《제5서》의 칼리그램을 언급한 적이 있다.[주] 책 14쪽 역주에 ‘호메르스’라는 이상한 단어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Homeros)의 오자이다.

 

 

 

[주] 유석호 《라블레, 새로운 글쓰기의 모험》 (연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이슬 2024-12-30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을유문화사판 《제 5서》에도 에필레미를 번역했지, 칼리그램이란 언급은 없습니다.
권국진 역이 2019년에 나왔는데도 2016년에 유석호가 언급한 칼리그램 설명이 빠진 걸 보면, 무얼 참고했는지 감이 오네요.
을유문화사판 번역은 이렇습니다.

오, 신비에
넘치는
술병 신이여
나는 한쪽 귀로도
그대의 소리를 듣는다.
당장에
나의 마음이 의지할
말을 내리라.
이처럼 거룩한 성수(聖水)에
인도를 정복한
박쿠스는
모든 진실을
간직하도다.
성스러운 신주(神酒)여
그대보다 멀리
  떨어져 있으라
모든 허위,
  모든 기만(欺瞞)은.
노아의 심령(心靈)은
  기쁨에 싸이나
그 비법(秘法)을 그대는
  우리에게 베풀도다.
염원컨대
  나의 괴로움을 제거하는
아름다운 말을
  내리소서.
이처럼 귀한 것이라면
  한 방울도 헛되게 하지 않으리
희고 붉은 것도 모두.
오, 신비에
  넘치는
성스러운
  술병이여,
나는,
  한쪽 귀로도
그대 소리 듣겠노라,
  당장에.

(민희식 옮김, 814~815쪽)

cyrus 2024-12-25 23:00   좋아요 0 | URL
을유문화사 <제5서>가 상당히 오래된 책이고 절판본이라서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서점극장 라블레>라는 세계문학 전문 책방에 있는 을유문화사 <제5서>를 본 적이 있어요.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서 그 자리에 읽지 못했는데, 다음에 그곳에 가면 시간을 내서 읽어봐야겠어요. 제가 몰랐던 내용을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7월 22일 월요일

세 번째 강의. 퀴어와 장애의 교차

 

 

 

 

 

[레드스타킹 페미 스쿨] https://cafe.naver.com/redstocking

 

 

 

‘병리화’는 참으로 생소한 단어입니다.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단어이기도 해요. 예전에 책을 읽다가 ‘병리화’라는 단어를 몇 번 보곤 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쉽게 설명해줄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랐어요. 전혜은 선생님은 병리화의 정의를 ‘정상성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기제’라고 말했습니다.

 

정상성을 생산하고 강조하는 병리화는 건강을 ‘정상’으로, 질병과 장애를 ‘비정상’으로 구분 짓게 만듭니다. 건강한 몸이 정상성의 기준이 되는 순간, 아픈 몸과 장애인의 몸은 각각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 몸’, ‘결핍된 몸’으로 취급받습니다. 병리화는 환자와 장애인을 ‘불행의 아이콘’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병리화는 그들에 대한 결함, 오류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고착화하는 혐오를 재생산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병리화, 즉 정상성을 해체하는 작업은 결국 ‘정상적인 몸’과 ‘병리적인 몸’을 구분하게 만드는 위계 체계를 비판하는 일입니다.

 

‘병리적인 몸’으로 규정된 몸은 그 몸의 실제 경험과 관련 있는 섹슈얼리티도 병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병리화된 장애 여성은 섹슈얼리티를 탐색하고 실험할 계기를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혜은 선생님이 번역한 앨리슨 케이퍼(Alison Kafer)의 글 『욕망과 혐오: 추종주의 안에서 내가 겪은 양가적 모험』은 일종의 금기가 되어버린 장애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앨리슨 케이퍼는 장애학과 퀴어를 연구하는 여성학자이며 장애인입니다. 이 글의 제목에 나오는 추종주의“신체 절단 장애 여성에게 성적으로 이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 비장애인은 추종주의의 의미를 처음 알게 된 순간 “뭐야? 이상해. 변태 아니야?”라는 반응할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케이퍼는 추종주의자를 ‘변태’라고 규정하는 반응을 의심합니다. 만약 절단 장애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느끼는 것을 ‘병리화’하여 부정하게 된다면, 절단 장애 여성의 섹슈얼리티마저도 부정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장애 여성은 무성적 존재로 간주되고 맙니다. 케이퍼는 절단 장애 여성들의 동의 없이 그녀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해서 공개하고, 심지어 스토킹하는 일부 추종주의자들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추종주의자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가 절단 장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대안적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케이퍼는 이 『욕망과 혐오』라는 글에서 추종주의에 대한 자신의 양가적 반응을 솔직하게 밝힙니다. 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추종주의와 장애 여성의 섹슈얼리티 문제를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으로 비유합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비유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유래와 관련된 전설에 따르면 아시아를 정복하려는 알렉산더(Alexandros) 대왕은 이 매듭을 푸는 대신에 칼로 매듭을 잘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케이퍼는 추종주의라는 매듭을 자르지 않습니다. 추종주의에 대한 양가적 입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스스로 질문을 하면서 천천히 매듭을 풀어나갑니다.

 

만약 제가 케이퍼의 글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추종주의를 알게 되었다면, 저는 알렉산더 대왕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추종주의는 장애 여성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거야. 그건 문제가 있어’라고 부정적으로 단정 지었을 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떤 복잡한 문제를 단순 명쾌하게 해결하고 싶어 합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버린 저 알렉산더 대왕처럼 말이죠. 하지만 케이퍼가 생각했듯이 추종주의가 얽힌 장애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아주 복잡하며,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 쉴라 제프리스 《코르셋》 (열다북스, 2018)

 

 

 

사실 제가 추종주의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도록 영향을 준 책이 쉴라 제프리스(Sheila Jeffreys)《코르셋》(열다북스)입니다. 트랜스 여성을 배제하는 제프리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남성의 눈요기를 위해 여성의 몸이 훼손되는 행위(SM, 피어싱)‘유해 문화’라고 보는 입장에 일부 동의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케이퍼의 글을 읽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절단된 몸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마저 ‘유해 문화’로 단순하게 규정해버린다면 추종주의도 유해 문화가 되고, 절단한 몸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장애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병리적인 욕망’으로 남게 됩니다. 결국 신체 절단 행위를 비판하는 제프리스의 주장은 ‘목욕물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리는’ 오류를 피하지 못합니다.

 

 

 

 

 

 

 

 

 

 

 

 

 

 

 

 

 

* 전혜은, 루인, 도균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8)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편집부 《여/성이론 통권 제39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8)

 

 

 

 

서로 상반된 입장으로 나누어지는 페미니즘 논제에 접근할 때 알렉산더 대왕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처럼 되지 않으려면 양쪽 입장 중에 한쪽을 선택해서 (그 입장이 옳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양쪽 손을 동시에 잡아’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고민하는 방식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공부 방식이 혜은 선생님이 말한 ‘교차성을 사유하기 위한 기본적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후기를 빌어서 케이퍼의 글을 번역하신 혜은 선생님께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번역한 케이퍼의 글 일부는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 수록된 『장애와 퀴어의 교차성을 사유하기』(글쓴이: 전혜은)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전문은 《여/성이론》 제39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페미 스쿨 커리큘럼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케이퍼의 글을 꼭 읽어보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