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착각 - 인간 본능이 빚어낸 집단사고의 오류와 광기에 대하여
토드 로즈 지음, 노정태 옮김 / 21세기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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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큰 소수가 집단 전체를 잘못 대변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 15쪽

『평균의 종말』에서 토드 로즈가 보여준 탁월한 통찰을 잊을 수가 없다. 최초의 발견이거나 새로운 발명이어서가 아니다. 이론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비교 분석하는 엄밀함, 인간의 삶과 현실에 적용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한 사람의 모든 책이 후질 수 있으나 훌륭한 책을 사람의 모든 책이 좋을 수도 없다. 그래서 믿을 만한 저자, 믿고 보는 작가가 내게는 없다. 책 선택의 어려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독서는 시간과의 싸움이며, 밥벌이를 위한 노동처럼 자기 삶의 일부와 맞바꾸는 행위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행위는 무언가를 하기 위한 노력만큼 숭고한 일이다.

저자의 이력이 순탄하지 않은 건, 배우가 삶의 경험을 연기에 녹여내는 상황과 유사하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생각과 감정이 반영되고 지향점과 방향이 색다르기 때문이다. 평범한 저자들의 책이 모두 평범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연구자의 태도 또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교하고 엄정한 결과에 대한 해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토드 로즈의 관점과 태도는 우리에게도 충분한 울림을 준다. 집단 착각에 빠진 현대인을 향한 저자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강렬하다. 침묵하는 다수에 대한 경구, 휘둘리는 당신을 위한 세네카의 조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관습적 사고에 젖은 사람, 밴드 왜건 효과에 익숙한 사람, 필터 버블로 에코 탬버에 갇힌 사람을 위한 도구다.

그러나 언제나 중요한 건 독자의 태도다. 스스로 자기 점검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선택하기 어렵고, 선택한다 해도 자기 객관화 능력이 없다면 남의 얘기로 치부할 수 있다.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한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경계와 선이 분명하며 나만의 기준이 확실하다는 판단과 선택의 오만함,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한 도덕적 기준,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착각에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자기 검열에 시달리며 지나치게 경계하고 끊임없이 살피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을까.

전체 3부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집단 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진영 논리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점검할 수 있는 소중한 지침서다.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 전가의 보도는 아니지만 객관성을 확보하며 공론장에서 합리적 토론을 가능케 하는 지침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논리적 사고 훈련이 미흡하면 나이, 직업 등과 무관하게 ‘감정’에 휩쓸려 진실을 묻어버리고 자기 이익에 충실한 아비규환의 세상이 되기 쉽다. 우리가 문명사회로 한발씩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공동체의 합의, 타인의 감정과 생각에 대한 존중,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 등이 보장된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업, 학교, 국가 등 어떤 조직도 집단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지속 가능할 수 없다. 뒤처지거나 자연스럽게 도태되거나 자멸하는 지름길은 독단과 고집, 일방적 의사소통, 침묵과 순응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심리학적 질문을 아끼지 않는다. ‘다수의 무지Pluralistic Ignorance’, ‘집단 착각Colletive Illusions’, ‘동료 압박Peer Pressure’으로 인해 우리가, 아니 ‘나’가 얻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일까. ‘따라쟁이의 함정Copycat Trap’이 본능에 가까운 생존 전략이라면 집단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모방의 연쇄Copying Cascade’,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 등 이론과 개념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아니, 어쩌면 몰라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가, 현실에서, 수없이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한 명명법에 불과하니까. 문제는 언제나 해결책과 대안이다.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고치지 않으면 그대로다. 그래서 때때로 ‘읽는’ 행위 덧없음과 허무함이 밀려온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대로 괜찮은가. 이 질문만 반복한다.

삶에서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 상관없다. 사적인 자아와 공적인 자아를 정렬하는 일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 조화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헌신할 때,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이들은 집단 착각을 만들고 키워나가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 집단 착각에 빠져 있는 다른 사람들이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 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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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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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인물이자 친구인 출판업자 에두아르트에게 보내는 샤미소의 편지도 모자라 푸케의 편지까지 덧붙인 ‘픽션’이라니. 이러한 장치들 – 액자 구성, 편지 형식 등은 소설의 한계, 어차피 서로 꾸며낸 이야기, 공상과 상상에 기댄 허구, 실제하지 않는 인물과 사건이라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암묵적 합의에 도전하는 장치다. 목적은 단 하나, 이 이야기가 진짜 거짓말인지, 거짓말 같은 진짜인지 헷갈릴수록 ‘재미’있기 때문이다.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실제’로 착각하게 하거나 적어도 실제일 수도 있다는 기대 혹은 의심을 갖게 했다면 충분한 효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회색 옷을 입은 사내에게 그림자를 파는 순간, 편지는 무용지물이 되고 개연성 없는 허구, 어른을 위한 우화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난다. 노력에 비해 효과는 거의 없는 셈이다. 어쨌든 페테 슐레밀이 샤미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고백과 하소연은 읽는 내내 독자들에게 먼 옛날 혹은 아주 먼 곳에서 실제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으로 자신을 속이는 효과를 얻는다.

금화와 바꾼 그림자의 상징 혹은 알레고리를 두고 80쪽 가까이 해설해야만 했는지 찬반이 팽팽했다. 본문(130쪽)에 비해 해설과 보론의 분량이 너무한 거 아닌가. 정답을 찾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게 아닌데 그간의 해석과 논의들을 상세히 알아야 하는가. 개별 독자의 해석과 상상력 혹은 오독의 자유를 무참히 짓밟는 건 아닌가. 의도가 무엇이든,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대부분의 독자는 끝까지 읽었으리라. 그래서 ‘그림자’는 금화를 주고도 살 수 없는 혹은 팔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훈인가, 잃어버린 시간이나 양심일까, 공동체가 공유하는 암묵적 가치일까. 무엇 때문에 사는 동안 지켜야 하는 그림자보다 죽은 후에야 가져가겠다는 영혼을 지키려 하는가. 아니, 영혼은 무엇이며 사후세계는 존재하는가.

열두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각자의 생각과 추측 혹은 기대가 뒤섞이거나 무너지는 동안 각자 새로운 생의 감각들을 찾는 시간은 아니었을까. 오직 모를 뿐이기에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답이 없는 삶에 의문부호만 보태는 건 아닌가. 결국, 그림자를 되찾지 못한 슐레밀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서거나 그 상처로 절망하는 대신 장화를 신고 세계를 누비는 호모 노마드의 삶을 택한다. 자연으로 회귀하는 인간의 숙명, 아니 물질적 순환 구조에 대한 순응, 그도 아니면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 혹은 희망 따위가 삶의 고통에서 구원해줄 환각제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영혼을 팔라고 유혹하는 회색옷 입은 사내는 악마가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보편적 현대인의 모습이 아니냐는 도발적 질문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교환가치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악마를 닮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낭만적 문제해결방법은 현실도피일까. 낭만주의 예술 동화이면서 19세기 본격적인 자본주의 태동기의 사회소설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봉건 영주제가 물러나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자리 잡는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는 반영론적 관점은 정호승의 『연인』, 안도현의 『연어』처럼 따뜻한 어른 동화로 읽으려는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걸까. 프랑스 혁명으로 고향을 떠난 작가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대신 독일사회에 동화되어 경계인, 전달자, 매개인의 역할에 충실한 듯하다. 수많은 구전 동화, 신화와 전설과 민담들에서 모티프를 차용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의 통일성이 부족하고 장화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작동했더라도 우리에겐 여전히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이야기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냥 그렇게 때로는 꿈을 꾸며, 상상을 즐기고, 일탈과 변주를 즐기고, 비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짜릿하고 아쉬운 설렘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소설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기대를 줄이고 한계를 명확히 하면 실망 대신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이 든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는 건 금화가 없어도 되지 않은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세계는 유한하며 그 인식의 한계는 개인의 앎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데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은 앎이 아니라 현실 원칙에서 벗어난 쾌락 원칙을 따른다.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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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을 말하다
장강명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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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메시지다’(『미디어의 이해』)라는 마셜 매클루언의 말은 언제나 유효할 예정이다. 1964년에 출간되었으나 60년간 변화된 과학기술의 급격한 변동에도 구조와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발신자-매체-수신자’의 소통 구조에서 레거시 미디어는 정보를 독점했다. 그러나 1인 미디어 시대에 접어들면서 언론의 신뢰도, 정보의 유통 시스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수신자가 발신자로 거듭났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정보 유통의 허브 역할을 하는 수신자이면서 동시에 발신자이다.

픽션인 문학의 역할과 의미가 축소된 건 미디어의 발전 속도와 그 궤를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현실이 생중계되고, 뉴스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들이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소설은 갈 길을 잃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그건 소설가의 탓이 아니라는 항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종이 신문은 소설 유통의 중요한 통로였으며 문단권력을 주도하던 영광의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건, 아니 책보다 재밌는 미디어가 계속 출현하는 건 소설가나 출판사의 잘못이 아니다.

‘지금-여기’ 한국 사회를 픽션으로 보여주겠다는 한 신문사의 기획이 아니러니하다. 그러나 소설, 문학이 아니라면 피상적 현실을 톺아볼 수 있는 안목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객관적 사실 뒤에 숨은 진실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양극화된 정치와 이념 사회로 회귀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개탄한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소란스럽고 자극적인 미디어다. 텍스트를 통해 상상하며 생각에 잠기고 이면의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카더라’ 통신도 하루 이틀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라지만 왜곡된 사실과 숨은 진실이 끝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사람들은 지연된 정의는 관심이 없듯,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지금-여기가 중요하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때 명징해지는 은유와 상징이 아니라면 이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장강명의 「프롤로그 소설 2034」부터 최진영의 「식단 삶은 계란」까지 21편의 짧은 이야기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독자 개인의 관점과 태도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문제가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개인과 대중이 문제다.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문제다. 과연 그런가. 현실의 인식 방법은 소설이 아니라도 좋다. 다만,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해야 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느 시대든 소설은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해왔다. 개연성 없는 허구에 몰입하는 독자층이 두터워지는 건 시절 탓일까. 웹소설과 환타지가 현실에 대한 외면은 아니겠으나 현실 극복 의지라고 볼 수도 없다. 본격, 순수 소설이 우월감을 갖던 시대도 끝났다. 소설은, 아니 문학은 이제 과거의 빛나는 왕관을 내려놓고 지금-여기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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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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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말씀,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도 한 생애가 필요하다. 자기 범죄를 부인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을 ‘용서’하는 일은 종교인도 어렵다. 타인을 향한 서운함에서 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을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하고 처리할까. 인간의 본능에 가까우며 가성비 최고라는 ‘뒷담화’가 정답일까. 문제는 알고 외면하는 사람보다 무엇이 잘못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인지부조화로 극복하는 인간이 더 심각하다. 물론 이 유형에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모두 포함된다. 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두려움과 혐오에 맞서는 대중 행동은 보복과 증오가 아니라 희망, 화해,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포용적 연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 아닐까 싶은 회의가 든다. 넓게는 정권 교체마다 반복되는 과거 청산 혹은 정치 보복에서 좁게는 연인과 친구, 가족은 물론 직장동료, 지인에 이르는 ‘관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는 적절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문화와 관습에 따라 법률로 처벌하거나 공동체의 암묵적 질서로 배제하거나 개인적으로 보복하거나...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법’이라는 부제에 낚이지는 않는다. 그런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모두 개싸움을 하는 시대에 혼자 우아하게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상대가 진흙을 던지는 데 우아하게 대처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나, 폭력을 폭력으로 이길 수는 없다. 개같은 상대를 개가 되어 물 수도 없다. 그래서 마사 누스바움은 ‘두려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다. ‘두려움의 군주제’라는 원제 뒤에는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우아하게 건너는 법’ 따위를 언급한 적조차 없다.

현대인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불안해지고 계급과 계층 간의 갈등이 속출하며 기후 변화가 미래의 불안을 경고하는 시대를 지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다. 그것은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다.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해석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철학자의 경고다.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며 그럴듯한 포장지로 자기를 감쌀 때, 타인을 향한 혐오에 내 일이 아니라며 침묵할 때, 상대를 공격하고 제거함으로써 두려움을 해소할 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희망’을 떠올린다.

이 책은 주로 미국 사회를 분석하고 있으나, 준거 집단을 미국으로 삼는 대한민국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들이다. 정치적 분노, 차별과 혐오, 시기와 비난, 성차별과 여성 혐오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을 살피고 분석하는 글이 부족한 현실에서 돈벌이에 혈안이 된 유튜버만 날뛴다. 분석과 해석이 아니라 감정의 배설과 증오 마케팅이 판을 친다. 이런 현실을 톺아볼 수 있는 차분한 시간, 넓은 안목과 사유의 도구를 제공하는 마사 누스바움의 태도는 시종 일관 차분하지만 날카롭다.

논리를 갖춘 객관적 태도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숭고함이다. 글을 읽는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치든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글쓴이의 관점과 태도가 냉정하고 합리적일 때 비로소 새로운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감정적 선동이나 정답을 제시하는 오만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하든 마찬가지다. 겸손과 성찰은 기본이며 조심스런 태도로 좌고우면해야 실수를 줄이고 자기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누적된 사유의 흔적들이 배어 있는 글은 어떤 형태로든 아름답다. 편안하게 읽히지만 뼈를 때리는 문장들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깊이 사고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두려워하고 비난하기란 쉬운 선택지다. -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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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는 법
류시현 지음 / 따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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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이 『인간다움의 순간들』에서 “개인은 자기를 기록함으로써 태어난다.”라고 썼다. 어떤 블로그의 인상적인 기록 혹은 일기 혹은 단상들을 읽다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적이 있다. 나탈리 제인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읽을 때처럼 미시사의 관점으로 한 개인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읽었다. 학창시절의 나이브한 귀여운 감성뿐만 아니라, 김연수의 말대로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버린 청춘의 고민, 자책, 방황, 불안에 이어 성장과 인정 욕구에 이르는 과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나의 독서일기처럼, 오랜 시간 공들여 적은 누군가의 일상과 기록 그 많은 흔적들이 한 ‘개인’을 완성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역사다.

그렇게, 역사는 대단한 위인과 영웅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지 않는다. 내가 아이였을 때 『플루타크 영웅전』은 읽은 적이 있다. 천병희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로저 에커치의 『밤의 문화사』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 이유는 분명하다. 역사는 세종과 나폴레옹처럼 뛰어난 개인뿐 아니라 이완용이나 히틀러처럼 저열한 개인의 충격과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채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친 류시현의 『역사를 읽는 법』은 감동 그 자체다. 역사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관점, 즉 사관史觀에 따라 전혀 달리 해석 가능하다. ‘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출토된 문화재, 텍스트로 남은 기록 등 숱한 사료를 재구성하고 연결지어 그들(he)의 이야기(story)를 만드는 작업이 역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류시현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법, 역사를 보는 관점과 태도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결국 역사는 기록된 자료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즐거움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물론 사건의 인과관계를 살피고 시간 순서와 주고 받은 영향을 살펴 재해석하는 일이 독자 개인에게 버거울 수 있으나 주체적인 인식의 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은 ‘동료 압박’이라는 착각과 검색 정보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대개 대중적 역사서로 출판되는 책들은 재미와 가독성, 이면의 진실, 엇갈린 해석에 관한 것들이라면 류시현은 역사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과거의 기록으로서 텍스트가 아니라 오늘, 여기를 사는 우리의 문제를 살피라고 요구한다.

흔히, 역사를 ‘오래된 미래’라고 한다.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살아숨쉬며 오늘을 만들고 미래를 꿈꿔야 한다고 요구하는 듯하다. 기원과 시간성, 시대적 맥락과 시기 구분, 사료의 선택, 우연과 필연, 해석과 관점, 인물의 평가, 역사교육과 상상력 등 각 장은 에세이 형식으로 저자의 소회와 경험이 녹아 있어 감성 독자든, 인문 독자든 모두에게 감동과 통찰을 줄 수 있다. 독특한 형식과 서술이라서가 아니라 저자의 ‘진심’은 좋은 책을 만드는 기본 요소다. 강만길의 『해방 전후사의 인식』, 이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님 웨일즈의 『아리랑』, 이사벨라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등을 읽으며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에 만났던 이야기들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책을 읽은 사람 사이의 공감 때문도 아니다. 자기 삶에 열정을 다한 이의 겸손과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계속 여러 책을 읽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역사가의 역할과 임무가 무엇인지에 관해 여전히 고민하게 된다.” 이제 환갑이 된 역사가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다. 겸손한 태도와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이 없는 책을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은 없고 책은 많다. “역사학자가 되었지만, 인문학자가 되고 싶었다.”라며, “문제에 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책을 준비했는데, 갈증이 심해져간다.”라는 고백이 가장 마음에 드는 개인적인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해와 공감은 관점과 태도에 기인한다.

생각을 유연하게 하고 싶다. 생각이 유연한 것은 균형 감각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 나의 판단, 나의 결정 등을 정답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맺음말,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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