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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가짜 결핍 - 욕망의 뇌가 만들어 낸 여전히 부족하다는 착각
마이클 이스터 지음, 김재경 옮김 / 부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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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나는 죽을 때까지 고민할 예정이다. “을마믄 되겠니?” 원빈이나 송혜교에게 관심도 없고 그 드라마를 보지도 않았는데 저 유명한 대사는 가끔 곱씹게 된다. 이수일이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넘어간 심순애에게 던졌을 법한 대사의 세기말 버전. 찾아보니 2000년 드라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변함없는 자본주의 작동 방식은 인간의 뇌 구조를 자주 리셋한다. 법정 스님도 떠나고 풀 소유 스님도 떴다 가라앉았다. 종교와 정치도 ‘조금만 더’를 외치다 망가진다. 일상을 사는 평범한 우리들도 ‘만족’은 불가능한 미션이다. 주머니에 얼마가 있든 아쉽고 부족한 게 ‘본능’이라는 마이클 이스터의 『Scarcity Brain』의 번역판 제목은 『가짜 결핍』이다. ‘배신’ 시리즈에 이어 ‘가짜’ 시리즈를 염두에 뒀을지 모르나 원제와는 거리가 먼 제목이다. 저자의 말대로 결핍에 집착하는 마음을 다시 설계하면 충분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진화 심리학과 뇌 과학이 들여다보는 인간의 ‘본능’은 개인 차를 무시한 모든 인간의 교집합 부분일 것이다. 누구나 그러해야 한다. 아니 최소한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사람에게 적용돼야 설득력이 있다. 특히 ‘욕망’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분야의 핵심 주제다. 철학과 문학은 물론 경제학과 사회학, 과학과 예술 분야까지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그들이 모여사는 세상 그리고 자연을 향한 호기심이 우리가 읽는 모든 책의 주제라면 마이클 이스터가 들여다보는 주제나 관심 분야는 너무 식상하거나 뻔하다. 특별한 결론이나 비법은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이런 종류의 책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많을까. 세상에 수백만 가지의 종류의 사랑 이야기가 나왔고 앞으로도 나올 예정이지만 사랑 이야기를 외면하거나 재미 없을 가능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메타인지metacognition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모든 인간이 자기 객관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던 것처럼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왜 ‘결핍’을 기본값으로 세팅되어 태어났는지 원망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다. 부단한 노력과 인간으로 불가능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모든 걸 내려놓고 비우며 살아갈 수 있을까. 단순히 ‘생존과 번식’을 위해 DNA에 새겨진 어쩔 수 없는 유전 정보라고 결론 또한 너무 쉬어 보이니 계속해서 새로운 해석과 주장이 난무하는 걸까.

우선,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당신의 진짜 결핍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 책을 읽는 최종 목적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과정일 수도 있다. 가짜 결핍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충분함, 즉 ‘만족’을 모르는 뇌의 착각 혹은 부족하지 않은데도 결핍을 느끼는 습관적 태도 등이 그렇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본능이라면 차라리 내가 특히 ‘결핍’을 느끼는 부분이 어디인지 살펴봐도 좋다. 콤플렉스 혹은 아킬레스 건에 해당하는 결정적 약점 혹은 결함? 아니면 낮은 자존감으로 아무도 모르지만 자기만 아는 열등감?

그것이 무엇이든 저자는 거꾸로 ‘중독’에서 출발한다. 카지노에서 그 해답을 찾아 나간다. 결핍의 고리는 ‘기회의 발견 + 예측 불가능한 보상 + 즉각적 반복 가능성’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 모든 중독이 가상의 세계에서 극단적 쾌락을 느끼는 웹툰과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 등이 모두 비슷한 구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핍의 고리 속으로 도망간 사람들은 장기적인 보상, 성장, 의미를 대가로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결핍의 고리를 벗어나는 건 결코 쉬운 일 아니다. 어쩌면 마이클 이스터는 지치고 힘든 세상에서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즐거움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건강하게 살려면 술, 담배 끊고 고기 먹지 말고 채식 위주로…… 의사의 이야기를 듣던 환자가 “그럼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합니까?”라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를 수도 있는 내용이다.

이야기의 결론은 ‘행복’으로 모아진다. 당연히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행복’을 만난다. 조금 삐딱하게 이 책을 읽으면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다. 그 숱한 ‘행복’에 관한 철학과 문학과 심리학과 뇌과학과 예술적 태도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이 책은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읽으면 좋다.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 훌륭한 자기계발서지만 저자는 두 발로 글을 썼다. 그 진지함과 노력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실제 사례와 구체적 상황들은 읽는 이에게 ‘감동’을 전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디에 갈 것인가 고민하는 일보다 ‘누구’와 문제가 관건이듯 어떤 책들은 주제와 키워드, 해법과 노하우 보다 그 과정 자체를 즐길 필요가 있다. 이 책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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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 - 인간관계가 불편한 사람들의 관계 심리학, 7주년 기념 개정판
오카다 다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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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인간에 대한 거부 반응을 갖게 되면 여러 가지 곤란한 사건들을 겪게 된다. 이를 테면 ‘고슴도치 딜레마’로 알려진 갈등 상황이 그것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전혀 기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상대와 너무 가까워지면 여러 가지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짜증이나 불만으로 시작하여 점차 비난, 공격, 험담, 고집, 괴롭힘, 말싸움, 폭력으로 번진다. 온갖 마찰과 충돌을 일으킨 결과 상대방과 자신 모두 상처를 입는다.

역세권, 초품아, 숲세권을 넘어 언제나 ‘책세권’을 강조해 왔다. 힘들지 않게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이 있다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건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런데, 도서관 재건축이라니. 밀리의 서재 요금제로 변경했지만 적응할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 처음 만나면 사람이든 기계든 다 그렇다. 탐색과 관찰이 필요하고 거리 조절이 관건이다. 혼자 친해졌다는 착각이 관계를 망친다. ‘나’는 ‘너’와 다르다, 아니 너는 내가 아니다. 종이책의 손맛은 대체 불가능이다. 새책이 도착하면 표지를 쓰다듬고 휘리릭 넘기며 바람을 일으키면 옅은 잉크 냄새가 난다. 오감으로 즐기는 독서는 시작부터 두근거린다. 어떤 책은 서문이 너무 좋아 본문에 실망할까 싶어 책꽂이에 몇 주를 꽂아 둔 적도 있다. 어떤 시집은 뒤 표지부터 읽고 묵혀두기도 한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그렇게 세상 곳곳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책을 온몸으로 즐긴다. 전자책에는 그게 없다. 버스와 지하철은 기다리면 온다. 물론, 막차를 놓칠 수도 있지만. 도서관도 기다리면 재건축을 끝내고 최신식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러다 예전 살던 동네 재건축이 끝나면 다시 그리로 이사가야 하나. 대한민국은 이래저래 재건축의 나라다. 전자책을 넘어 오디오북까지 대세가 이동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2023 국민독서실태」) 그러나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습관은 무섭다. 그것이 생각이든 행동이든 감정이든.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 바꾸려는 노력보다 뒤엎고 새로 시작하는 게 낫다.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헤매다 비율과 방법을 적절하게 조절하겠지만 한동안 혼란은 피치 못할 사정이다. 어쩌다 오카다 다카시의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를 골랐는지 생각하다 기억이 나지 않아 여기 저기 뒤적거린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

‘인간 알레르기’라는 원제에 딸린 부제다. 부제가 더 자극적이고 직관적이다. 얄팍한 자기계발서는 아니다. 처세술과 관계 기술 혹은 상황별 대처법은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없다. 비법을 알려주겠다는 책을 믿지 않아야 하는 것은 ‘개별성 결여’ 때문이다. 80억 인구가 다 다르다. 인간의 일반적 속성과 공통점에 기반한다 해도 그렇다. ‘나’는 ‘너’와 다르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의 해법을 고민하지 않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제안이 소용없다. 다만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를 보려는 태도를 가진 저자의 이야기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개 인간은 듣고 싶은 것만 들을 뿐 아니라,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독서라고 다를까. 읽고 싶은 것만 읽고, 읽고 싶은 대로 이해한다. 같은 책을 서로 다르게 읽는다는 의미와 다르다. 벽을 넘으려고 기어오르는 담쟁이처럼 책을 읽는 태도는 가르치거나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 그 너머를 향한 안타까운 까치발을 나는 많이 본 적이 없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대개 ‘의견(해석과 주장)’을 확정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일상생활, 각종 매체의 뉴스, 한 다리 건너 들은 가십, 가족과 친구와 대화 혹은 업무 추진 과정에서도 빈번하다. 다른 생각, 다른 감정에 대한 수용 여부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할까.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몇몇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불편할 수도 있다. 대개 내향인과 외향인으로 구별하기도 하고 MBTI나 혈액형으로 가늠하기도 한다. ‘관계 지향형’도 스타일이 각자 다르지만 원하는 거리는 더더욱 천차만별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서로를 미워한다. - 순자(荀子)

인간의 마음속에는 타인의 행복을 질투하는 감정, 즉 ‘르상티망ressentiment’이 깔려 있다. - 니체(Nietzshe)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심리학이 ‘과학’이냐는 의심이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니다. 실험심리학이 꽤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나 표본 수의 문제보다 실험 조건과 대상에 따라 매번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한계는 극복하기 어려우니 일반적 성향으로 이해하거나 정규분포곡선의 중앙값 80% 정도라고 생각하면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철학을 전공한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뇌과학에도 관심이 많다.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접근이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과 감정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앞서 언급했듯 그렇다고 해서 정답을 제시하거나 단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원제 그대로 ‘인간 알레르기’ 증상 있다는 전제로 개별 독자는 ‘나’를 점검할 것이다. 이 책이 그걸 요구한다. 어제까지는 좋았는데 오늘은 싫어지는 이유, 인간 알레르기의 역사 등이 그렇다. 다만 마지막에 ‘이유를 아는 순간 인간관계의 봉인이 풀린다’라는 주장은 좀 의심스럽다. 5장 “나는 나를 조종할 수 있다!”라는 저자의 권유는 인류 역사에서 가능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아 그렇다. 읽는 사람마다 속이 시원할 수도 있고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기도 하겠으나 답이 없다는 걸 전제로 한 번쯤 들여다보면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대인 관계의 어려움, 대인 기피증, 성격장애, 적응장애 같은 단어보다 ‘인간 알레르기’라는 메타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당혹스럽겠지만, 자극적인 표현보다 이면에 숨은 저자의 의도와 개별 독자의 상황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앞부분의 잔인한 처형 묘사에 책장을 덮는 사람도 있고, 오징어를 씹으며 심드렁하게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다르다. 인간은.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은 ‘악인’이 아니다. 괴벨스, 아이히만, 노덕술도 따뜻한 아버지였다. 모든 관계는 상대적이다. 상황이 인간을 지배한다. 개인적인 대인 관계도 그렇다. 상대방의 거친 말과 성난 얼굴은 때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 사람이 ‘악인’이라서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만 악인일 수도 있다. 그 정도까지 생각이 열린다면 이 책은 충분히 의미를 만들 것이다. 다만 부록으로 ‘싫어하는 사람 대응 매뉴얼’ 같은 걸 적어 놓은 건 ‘나’에게는 무의미한 “착하게 살자”는 선언처럼 들린다. 모르는 게 아니라 알아도 실천할 수 없는 게 있다.

우리는 종종 사소한 일을 계기로 방금 전까지 친밀함과 애정을 느꼈던 존재에게 결코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분노를 느끼곤 한다. 일단 그 사람에 대한 거부 반응이 나오면 접촉할 때마다 경멸이 가득 차고 혐오감이 솟구쳐 올라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인내하면서 살거나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 이 두 가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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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부조화 이론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82
레온 페스팅거 지음, 김창대 옮김 / 나남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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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부조화 이론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심리적으로 불일치하는 두 개의 인지 요소(아이디어, 생각, 믿음 등)가 사람들에게 있을 때 부조화가 발생하며, 사람들은 행동이나 인지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인지 요소를 추가함으로써 부조화를 감소시키려고 한다는 이론이다. 1957년, 레온 페스팅거는 주장은 이전에 보상과 강화로 인해 인간의 행동과 태도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강화이론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인지부조화를 줄이려는 노력이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주장은 어떤가.

범죄자가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방법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정치인들이나 처벌받지 않은 권력자도 마찬가지다. 이는 신포도 기제나 달콤한 레몬 기제와 같은 합리화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레온 페스팅거는 비일관성inconsistency 대신 논리학적 의미가 덜한 부조화dissonance, 일관성consistency이라는 용어 대신에 중립적 용어인 조화consonance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생각과 행동과 태도를 설명한다. 부조화 이론의 기본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부조화의 존재는 심리적 불편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부조화를 감소시켜 조화를 달성하려는 동기를 유발할 것이다.

(2) 부조화가 발생하면 그것을 감소시키려 할 뿐만 아니라, 부조화를 증가시킬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나 정보를 적극적으로 회피하고자 할 것이다.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는 것은 마치 배고픔이 배고픔의 감소를 지향하는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부조화의 감소를 지향하는 행동을 유발하는 선행조건으로 볼 수 있다.(20쪽) 부조화가 조화를 지향한다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인지부조화 이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론이 성립하지 않거나 틀린 건 아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합리적 판단, 논리적 과정을 비난하기 쉽다. 인지부조화 때문이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이 틀렸거나, 세상이 글러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화는 모든 인간의 내면적 평화를 가져오지만 옳고 그름이나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 건 아니다.

심리학의 제반 영역들이 경제학, 법학, 철학, 정치학, 인류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에 답을 주기 시작한 건 불과 100여 년에 불과하다. 최근 뇌과학의 발달로 인체의 마지막 신비가 밝혀지는 듯하다. 모든 게 유전자 혹은 호르몬 탓이라는 농담과 함께 진화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의 관점에 대한 비판이 뒤섞여 ‘나’의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내 것이 되었는지, 그 근원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다시 한번 살폈다. 다양한 실험을 담은 논문을 정리한 이 책은 사회심리학 분야의 기념비적 이정표를 세웠다. 타인을 향한 자신의 태도와 감정 조절, 행동의 동기와 추동력은 오로지 확고한 신념이나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사유의 시간 대신 페스팅거의 주장에 귀 기울여봐도 좋겠다.

당신, 아니 그들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가. 인간은 일관성 있는 기계나 로봇이 될 수 없다. 어차피 모순된 말과 행동과 감정에 허우적거린다. 그 과정에서 겪는 내적 고통과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방법은 배울 필요가 없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기적 존재인 개인은 마음의 평화와 안정, 자존심과 인정 욕구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과 태도가 아름답고 행복하게 태어난다고 믿던 시절은 행복했을까.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여섯 살 아이의 눈과 다섯 살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없으니 각자 자기 위로와 변명으로 일관하며 객관성과 합리성에 기대는 대신 인지부조화 극복에 골몰하는 건 아닐까.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은 치유해야 할 질병이 아니다. 누구나 겪는 삶의 전제 조건이다. 자유를 누리며 불안이라는 세금을 내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군가 곁에 없어 고통스러운 외로움과 달리 타인에게 기대지 않는 고독을 즐길 수 없다면 홀로 선 단독자로 살 수 없다. 한 인간의 깊이와 넓이를 측정할 수는 없으나 사람 다 거기서 거리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심리적 태도와 본능적 욕망을 알고 대처하는 방식과 태도가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무엇이 옳은가, 더 나은 것은 어떤 것인가, 보다 중요한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 없는 한 어떤 외부적 시선과 조건으로도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즐거운 일상이 언제 어떻게 슬픔과 고통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지옥은 어딘가 구멍을 파고 기다리는 함정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영혼의 감옥일 뿐이다. 하루를 견뎌 내일을 맞이하는 평범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타인과 세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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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속는 이유 - 똑똑한 사람을 매혹하는 더 똑똑한 거짓말에 대하여
대니얼 사이먼스.크리스토퍼 차브리스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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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속는 건 속이는 사람이 나쁘지만 두 번 속는 건 속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타당한가. ‘속는다.’라는 우리 말에는 사기, 착각, 오류 등 다양한 상황을 함유한다. 살다 보면 사기꾼에 속거나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스스로 상황을 오판하기도 하고, 단순한 실수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과 상황에 속거나 자기 자신을 속이거나 결과는 다르지 않아도 해석과 대책은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인지 심리학자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는 이와 같은 인간의 ‘심리’를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대상은 ‘속는 사람들’이다. 속이는 사람이나 속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다. 속는 사람들의 속성과 심리 상태 분석은 평범한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고민과 자책의 실마리를 덜어준다.

속임수의 출발은 ‘진실 편향truth bias’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처음 보는 사람을, 그 사람의 말을 믿는다. 디폴트 값인 인간의 각종 ‘편향’은 생존을 유리하게 진화했을 거라는 추정들에 힘이 실린다. 말콤 글래드웰은 『타인의 해석』에서 “우리는 이 결정이 아무리 끔찍한 위험을 수반하더라도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는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가 굴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신뢰가 결국 배신으로 끝나는 드문 경우에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은 것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비난이 아니라 동정을 받아 마땅하다.”라고 진단한다. 이것은 “진실기본값과 거짓말의 위험 사이의 상충 관계trade-off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이따금 거짓말에 취약해지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효율적 의사소통과 사회적 조정이다. 이득은 대단히 크고 그에 비해 비용은 사소하다. 물론 가끔 기만을 당한다. 이는 일처리의 비용일 뿐이다. - Timothy R. Levin, Duped: Truth-Default Theory and Social Science of Lying and Deception(University of Alabama Press, 2019), Chapter 11.”라는 주장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인류 사회의 문명을 이룩하며 숱한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이었다. 그래서 투명성은 일종의 신화라고 일갈한다. 인간 사회에서 공정성과 투명성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양궁 국가대표 선발시스템을 어디에나 적용할 수 없다니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사기와 속임수는 진실편향에 대한 일종의 일처리 비용이라고 주장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지나치게 많이 받아들이고 너무 적게 확인하려는 우리의 성향을 점검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저자들은 사기를 당하는 사람의 인지심리, 즉 우리 모두를 취약하게 만드는 사고와 추론의 패턴을 설명한다. 누구나 가끔은 속는다는 전제다. 빈도의 차이일 뿐 속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습관과 후크가 그것이다. 습관은 집중, 예측, 전념, 효율의 문제이고 후크는 일관성, 친숙함, 정밀성, 효능의 문제다. 어느 쪽이든 덜 받아들이고 더 확인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관습적 사고가 큰 재앙을 부른다. 비판적 사고가 결여된 개인과 사회에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위정자들에게 속는 국민이 문제이듯, 맹목적 수용 태도가 비판 기능을 상실하게 한다. 긍정적 사고, 낙관적 태도의 위험은 ‘진실 편향’과 다르다. 인지 심리학으로 분석할 수 없는 개인차가 심하다. 학습과 토론, 사유하는 능력은 가방끈의 길이로 좌우되지 않는다. 인간의 속성을 넘어 사회심리학으로 확대 발전시킬 수 있는 연결고리가 조금 아쉽다.

사기가 판치는 시대, 속임수에 말려들지 않는 법이라는 부제는 후크다. 똑똑한 사람을 매혹하는 더 똑똑한 거짓말에 대한 사례가 이 책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 지식과 정보가 부족해서 속는 게 아니고, 전문지식이 부족해서 사기를 당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욕망과 기대에 근거하며 자기 자신조차 속이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 곁에 있다는 게 문제다. 선과 악, 빛과 어둠, 거짓과 진실은 법정 다툼에서 실체적 진실을 따질 때나 구별해야 하는 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다. 우리가 겪는 일상은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으며 하얀 거짓말과 사기의 거리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개인의 삶에 레드팀을 운영할 수도 없고 외부인의 객관적 조언을 수시로 요청할 수도 없다. 인간의 인지심리를 안다고 해서 덜 속을까 싶기도 하다. 아주 오래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 관한 이야기로 명성을 얻은 저자들은 연장선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나 당연한 사고 패턴과 인지 편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교묘하게 활용하는 기업, 이용하는 개인과 사회에 속지 않으려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이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작은 바람이겠으나 저자의 조언대로 “수용과 확인 사이에의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속이기 힘든 사람이 된다는 것은 모든 속임수를 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속임수가 언제 발생할 수 있는지 인지하고 중요한 순간에 그것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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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함의 힘 - 세상을 다르게 감지하는 특별한 재능
젠 그랜만.안드레 솔로 지음, 고영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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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함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내성적인 성격보다 외향적 성격을 선호하는 것처럼 우리는 둥글둥글하고 무던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나 심리학계에서는 “꽤 예민한 사람들highly sensitive person, HSP”이 전체 인구의 15% 정도 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조직과 집단의 크기와 상관없이 파레토의 법칙처럼 예민함의 비율은 상대적이다. 사회생물학자들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예민한 개미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외부의 침입을 누구보다 먼저 눈치챈다. 서로 다른 성격의 장점과 단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상대적 예민함을 비난받아 본 사람은 ‘세상을 다르게 감지하는 특별한 재능’이라는 부제에 끌려 이 책을 집어 들 수도 있다.

젠 그랜만과 안드레 솔로는 상담 플랫폼 SR,sensitive refuge의 공동 설립자이자 저널리스트라고 한다. 오랫동안 예민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상담한 결과를 담고 있다. 심리학 실험이나 논문의 결과를 풀어 쓴 이론 위주의 책이 아니라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실전편에 해당한다. 타고난 기질과 성격도 시간이 흐르고 생활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만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민한 사람을 향한 손쉬운 비난 중 하나가 “예민하게 굴지 말라, 과민반응 아니냐, 왜 너만 그렇게 느끼느냐……”라는 등의 말이다. 튀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중간만 해라 등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정규분포곡선의 중앙에 자신을 맞출 수는 없지 않은가.

저자들은 예민함이 약점인지 특별한 재능인지 묻는다. 물론 예민함은 ‘재능’이라는 관점이기 때문에 이 책을 썼다. 예민한 사람들의 특징, 장단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그들의 몸과 마음을 챙기는 법, 공감 능력, 인간관계와 사랑, 예민한 아이 양육법까지 폭넓게 이어진다. 이해받지 못하는 소수가 틀렸다고 비난받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면 ‘지금 그대로’ 유지된다. 변화는 느리고 문제는 개선되지 않으며 새로운 시도를 꺼린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예민한 사람들이 유행을 선도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현실의 문제점을 짚어내기 때문이다. 사회적 업무, 개인적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은 예민한 사람들의 몫이다. 어느 신혼부부가 집 청소는 더럽다고 느끼는 사람이 하자고 정하는 게 옳은지 논쟁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번갈아가며 하는 게 합리적인가에 대한 감정적, 객관적 주장이 오갔다. 물론 정답 없는 싸움에 끼어들 만큼 바보가 아니라서 즐겁게(?) 관전만 했으나 예민한 사람들이 겪는 불편함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그 신혼부부가 떠올랐다.

예민함은 진화적 이점이라는 저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 주변의 15% 정도는 예민한 사람들이다. 부모, 자식, 연인, 친구, 동료, 동호회원 등 어디에나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를 포함한 예민한 사람들과 그 반대편에 서 있는 15%를 떠올렸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장점과 단점, 넘치고 모자란 부분들이 서로 어울려 사는 세상일 수는 없을까. 나와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다.

사회적 학습력은 공감이 필요하다. 3루에 태어난 사람이 타석에 선 같은 팀 선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을 우리는 매일 목격한다. 공감은 연민의 전제 조건이다. 연민은 슬픔과 고통과 닿아 있다. 외면과 부정이 오히려 현명한 태도일까. 감정은 감기처럼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쉽게 퍼진다. 사실 심리학자들은 감정의 확산을 공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이를 ‘정서 전염emotional contagion’이라고 부른다. 친한 사이일수록 정서가 전염된다. 이것은 공감과 다른 문제다. 긍정적 정서든 부정적 정서든 공감을 하든 말든 정서 그 잡채는 전염된다. 물론 세월호, 이태원 사고 같은 사회적 참사는 사회적 전염이 발생한다. 잘잘못을 따지고 대안을 마련하는 일만큼 중요한 건 공감이나 정서 전염에 대한 이해다. 개인적 태도는 그에 따른 결과이며 그러한 태도가 모여 결국 자기 삶의 무늬가 된다.

카나리아는 새장에 갇혀 살며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민한 사람들은 그동안 그 일을 충분히 해왔다. 이제 예민한 사람들을 너무 오랫동안 가둬두었던 새장을 부숴야 할 때이다. 예민함을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보기 시작해야 한다. 예민함과 그것이 제공하는 모든 이점을 포용해야 할 때이다. -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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