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 절대적인 자유를 꿈꾸다 - 완역결정판
장자 지음, 김학주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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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에 읽은 『장자』는 거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게 없다. ‘앉아서 삼천리, 서서 구만리’ 같은 허황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장자. 그러나 그 상상력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호접지몽胡蝶之夢’으로만 기억하는 장자도 나쁘지 않다. 존 윅이 되어 나타나기 전 메트릭스 안에서 유연한 허리꺾기의 모티프가 됐을 거라는 추측이면 어떤가. 현실보다 꿈이, 꿈보다 더 환상적인 아니 환장할만한 현실이 매일 펼쳐질 테니. 그걸 알고 생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철학자의 장난 같은 말이지만 그야말로 내던져진 인생, 그 하나하나의 탄생과 소중함이 우주에 비견되는 고귀함들이 허망하게 스러지고 짓밟히는 현실, 그래도 내일을 향해 노력하자는 비현실적인 희망 고문을 견디며 오늘도 우리는 장차 무엇이 중요한지 고민하며 장자 한 페이지를 넘긴다.

어슬렁어슬렁 노니는 소요유逍遙遊, 세상을 살아가는 더없이 편안하고 유연한 태도. 힘빼기의 기술은 아무나 다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개 게임이 끝난 후에, 인생의 마무리 단계에서나 깨닫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직립보행의 자유와 푸른 하늘이면 충분하다는 건 상징적 수사가 아니다. 장자는 무소유를 권하지는 않으나 하늘과 땅의 본성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것은 ‘인간’, 즉 나의 삶을 위한 관찰과 사유의 과정이다. 제 눈에 뵈는 게 전부이고 자기 감정과 판단이 정답이라는 전제. 그것은 직업과 나이, 학력과 재산의 유무를 따질 수 없는 태도의 문제라는 걸 매번 확인한다. 왜 언제나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연민조차 아쉬운 순간들 그리고 남은 시간.

우리의 삶에는 한이 있으나 앎에는 한이 없다. 한이 있는 삶을 가지고 한 없는 앎을 뒤쫓음은 위태로운 일이다. 그런데도 앎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위태로울 따름인 것이다. - 제3편 養生主

읽는다고, 쓴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는 여전히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기대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 그 기대가 오히려 사람을, 세상을 미혹하게 하기도 한다. 안다는 착각, 그럴 거라는 추측이 빚어내는 비극들. 나와 다른 생각과 감정, 잘못된 전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편견 앞에서 장자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길러 주는 말들을 건넨다.

말이 말을 만든다. 생존의 비법은 침묵과 무용함이라는 아이러니. 좋은 목재는 톱으로 잘리고 못에 박힌다는 장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생존이 미덕인 시대를 지났으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장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속성은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나고 본능으로 자리 잡아야 하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한순간에 변신로봇이 될 거라는 기대나 착각은 금물이다. 즐기며 취미로 삼는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다만 그조차 아니 한다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또다시 야만의 시대가, 오욕의 세월이 돌아온다. 학벌과 직업 같은 외피를 벗기고 나면 악취만 풍길 수도 있다는 걸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보면서도 변한 게 별로 없다. 인간도 세상도, 그리하여 장자가 여전히 혀를 찬다. 거울이나 좀 들여다 보라고.

“아서라, 그런 말 말거라. 그것은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어 버리고, 그릇을 만들면 바로 깨어져 버리고,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리고,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먹는다. 재목이 될 만한 나무가 아니다. 쓸 만한 곳이 없어서 그처럼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 제4편 人間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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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AI와 공부한다 - 우리가 알고 있는 교육의 종말
살만 칸 지음, 박세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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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뎀으로 PC 통신에 접속하던 기억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로 말끔히 지워졌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거쳐 유튜브가 지식과 정보의 유통 패러다임을 바꿔놓아고 이제 생성형 AI 활용 단계에 접어들었다.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으니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의무감도, 시대에 뒤처지는 게 아닌가 싶은 불안감도 아닌 적응과 필요의 문제가 되었다. chatGPT나 Gemini가 인간의 삶을, 아니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예측하기 어렵다. 아날로그의 추억을 공유한 마지막 세대가 21세기에 마지막으로 생존했었다는 기록이 먼 훗날 어떻게 읽힐까.

살만 칸은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을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교육재단의 설립자다. MIT에서 수학과 전기공학, 컴퓨터과학을 전공학고 하버드경영대학원에서 MBA 를 취득한, 방글라데시 부근 벵골 사람 살만 칸이 보는 AI는 활용해야할 도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육의 동반자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얻는 방법이다.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 어떤 식으로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학습을 가능하게 할까. AI는 이제 획일적이고 수동적인 공교육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 단순히 교사들의 수업자료 제작에 도움을 주고, 업무를 덜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맞춤식 개별학습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꿈을 꾸게 한다. 그랜드 투어를 시키며 개인 교습을 시키던 유럽의 귀족들이나 도제식 수업으로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부터 가르쳤던 양반교육은 근대이후 국민교육 제도 안에서 경쟁과 서열화의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누구나 홈스쿨링에 투자할 만한 시간과 노력을 갖출 수 없고, 학교교육의 문제를 인식했다고 1:1 개인 학습으로 전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만 칸은 AI의 활용여부에 따라 개인의 발달단계와 학습 능력에 따른 ‘공부’가 가능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년간 전국의 동갑내기들이 기계처럼 1년에 한번씩 계단식으로 학습능력이 향상하거나 모든 과목에서 고루 흥미를 나타내는 건 불가능하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운영되는 국가수준의 교육과정과 학년제를 모두 무너뜨릴 수도 없다. 이제 무엇을 상상하든 실현가능한 현실의 토대가 마련되었으니, 남은 숙제는 과감한 선택과 방법의 변화다. 중지를 모으고 고민하며 합의하고 실천하는 데까지 또 얼마나 많은 갈등과 충돌이 벌어질까. 그렇지 않으면 늘 그러하듯 ‘지금 이대로!’

AI 시대에 인간에게 남겨진 일은 얼마나될까. 아니 ‘나’는 무엇으로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강 시대에 접어들었으나 수백억 연봉을 받는 1타 강사가 셀럽이 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살만 칸은 어떻게 바라볼까. AI보다 똑똑하거나 잘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있을까. 물론 기본 전제는 학습자 개인의 자발성이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시대를 살면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관습적 사고에 젖어 있다면 AI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교사와 협력하는 AI,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뒤바꿀 AI, 시험과 진학과 자격증에 근본적 문제를 일으킬 AI,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무력화시킬 AI, 일자리와 미래 전망을 뒤흔들 AI에 대해 이제 조금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생각할 시점이 되었다. 아니,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간이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의 이면, 눈부신 인공 지능 시대를 살아내는 힘은 여전히 인간다움이다. 오랜 시간을 견딘 인류의 지혜와 삶의 문제들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방법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건 도구의 활용보다 근본적인 질문과 철학적 고민들이다. 켜켜이 먼지쌓인 고전과 역사적 과정을 살피는 혜안은 기막힌 요약과 음성 대화로 즉답을 내놓는 퀴즈식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 인류가 지향해야할 읽기와 쓰기의 미래도 혁명적 변화가 도래했음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막막해진다. 변화를 감지하고 흐름을 읽으려는 이유가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일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너머를 고민하는 ‘공짜 공부’, 고민의 출발지점이 달라 살만 칸의 이야기에 힘이 실린다. AI 시대의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언젠가 겪어야할 변화의 과정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선택할 것이냐의 문제를 담고 있고 있는 인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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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 -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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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라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를 통찰하거나 삶의 의미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통시적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와 문명발달의 흐름을 파악하는 건 지금, 여기 를 확인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역사는 현재를 살피는 원인이며 오래된 미래다.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는 객관적성이 돋보인다. 종교인이 쓴 신과 종교에 대한 글은 신앙생활의 일환일 것이다. 신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다.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은 인간의 무지와 공포에서 출발한다.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던 시대를 지나 유일신의 시대로 접어들며 유럽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문화로 대표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은 불교나 힌두교와 양상이 다르다. 시대와 상황을 반영한 교리는 21세기에도 문명의 충돌을 일으키며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근대 이후 과학에게 내준 권위와 아우라를 되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힘, 신의 역할이 줄어든 적도 없다. 일상에서 정치, 사회에 이르기까지 뿌리 깊은 역사와 문화적 토양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중국과 인도,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문화적 교류 없이 각자 문명을 구축하며 철학과 종교가 발전했다.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축의 시대Achsenzeit’(역사의 기원과 목표, 1949)라 명명했고 카렌 암스트롱은 이를 세분화하며 기원전 900~200년에 이르는 시기를 축의 시대에서 톺아본다. 신화의 시대를 거쳐 자연의 보편법칙을 살핀 후에 인간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과정이 인류 문명의 발달 과정이다. 이제 그 관심과 지향점이 사라진 시대를 맞이한 걸까. 폭력과 혼돈의 시대에 다시 축의 시대를 소환한 저자의 의도는 마지막 부분에서 읽을 수 있다. 세분화한 시기마다 그리스와 중국과 인도와 페르시아 지역에서는 예수,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 모하메드 등 숱한 인물들이 명멸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보존된 고전classic은 우리가 접하는 사상과 문화와 예술로 남아있다.

 

축의 시대가 드리운 길고 넓은 그림자 안에서 우리는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인공지능 시대를 고민하면서도 인간의 지성과 감성은 여전히 축의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존귀하게 여기게 된 건 아마도 축의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인식적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종교와 철학 혹은 윤리라는 이름으로 문화와 전통 속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아니 무엇을 위해 사는가. 시대를 통찰하는 눈, 현재를 살피는 안목, 미래를 전망하는 관점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들 앞에서 주저하거나 길을 잃고 헤맨다. 어쩌면 안개가 자욱한 새벽길에 서서 방향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선명한 갈림길 앞에서 고민하는 사람이 더 괴롭다.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망설인다면 나오미 배런과 카렌 암스트롱의 이야기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각자가 선택한 목표와 방향, 삶의 지향점이 다를 테니까. 그러나 누적된 시간과 인간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각자의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있다. 그렇지 않으면 읽을 이유도, 생각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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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 - 현대 과학이 외면한 인간 본성과 도덕의 기원
로저 스크루턴 지음, 노정태 옮김 / 21세기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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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는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뇌과학과 진화생물학이 첨병에 섰다. 독서 모임을 하기 전에 chatGPT로 정보를 검색하는 시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게 지식과 정보일까.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진 않을 터. 영국의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은 리처드 도킨스 ‘밈’ 이론 등 생물학적 인간론은 물론 공리주의와 도덕적 문제로 환원시킨 피터 싱어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 존재를 규명한 존 롤스까지 치열한 논쟁을 거친 ‘인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이 책은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한 인간성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 현대 윤리학의 오해, 신성한 인간적 삶에 대해 고민한다. 물론 정답이 없어 가능한 질문들이다. 아니, 질문하지 않는 인간들을 향한 경고다. 대개 인간의 본질은 생각보다 높이 평가하기 힘들다. 그 평가의 기준과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태도가 본질을 흐리게 하는 대부분의 원인이다. 단단한 합리화, 논리적 착각 속에서 비판과 비난 사이를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2013년 프린스턴대 특별 강연 내용이 도움이 좀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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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사는 세계 - 책, 책이 잠든 공간들에 대하여 페트로스키 선집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정영목 옮김 / 서해문집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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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부터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한다고 가정해 보자. 일주일에 한 권씩 1년에 50권, 70세까지 한 주도 거르지 않는다면 60년간 겨우 3,000권이다. 책이 그렇다. 공부도 그러하다. 뭔가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패배 의식이 아니다. 그래서 겸손은 태도나 예의가 아니라 절망적 필연이다. 개인차가 있겠으나 3년에 1만 권을 읽었다는 무의미한 자의 자기 자랑을 제외하면 선구안의 중요성이 더더욱 절실해지기 마련이다.

어쩌다 책을 가까이 한 자들은 책에 관한 책을 놓지 못하고 남의 서가에 꽂힌 책등을 흘깃거리거나 읽은 책 목록을 기웃거리거나 책과 관련된 에피소드에 탐닉한다. 헨리 페트로스키는 책이 사는 세계, 즉 ‘책꽂이’ 이야기로 책 중독자들을 매료시킨다. 북엔드부터 도서관 서고에 이르기까지 책이 놓인 자리와 방법에 관한 역사적 고찰은 그대로 책의 역사이자 인류의 지적 탐험기에 가깝다. 두루마리 파피루스에서 지금 우리가 보는 형태의 책까지 발전 과정은 문명 발달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책등이 보이게 책을 세워 꽂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 놀랍다. 도서관의 설계와 책꽂이의 설계와 서고의 수서 방식에 관한 이야기들은 덕후들의 뒷담화에 가깝다. 전혀 ‘안물안궁’인 사람들에겐 폭력에 가까운 책일 수도 있겠다.

근대 이전까지 책을 읽고 쓰는 사람은 한정적이었며 일종의 계급적 특권에 가까웠다. 읽고 쓰는 일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식이 권력이었던 시대를 기억조차 못하는 세대다. 차고 넘치는 정보와 지식의 홍수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며 모두 읽고 누구나 쓰는 시대다. 그래서 책이 사는 세계는 오히려 향수에 가깝다. 물성을 가진 책은 얼마나 유지될까. 마치 종이돈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 종이책을 들고 읽는 사람은 특별한 취미를 가진 소수로 분류될 날도 멀지 않았을까 싶다.

책에 미쳐도 평생 겨우 몇천 권이 전부다. 코끼리 뒤꿈치를 더듬다 끝난다. 분야별로 줄기와 흐름을 파악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덤벼들면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짧다, 인생이. 알라딘의 ‘so many books, so little time’이 새겨진 굿즈로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 외엔. 그래도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씩 계속 나아갈 수 있지 않은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분들에게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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