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체험판)
장하준.정승일.이종태 지음 / 부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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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위원회가 프렌차이즈 업체와 자영업자 사이의 계약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인테리어 변경 기간과 비용 등 일방적이고 노골적인 업체의 배불리기 수법이 불공정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과연 몰라서 지금까지 관여하지 않았을까.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대로 모든 것은 시장에 맡겨두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절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선거 이틀 전에야 손을 대는 정부의 태도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상식과 자주 부딪친다. 사람들은 저마다 선택과 판단의 기준이 다르다. 선악의 가치 판단 기준도 다를 뿐 아니라 태도와 방법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그래서 서로 알고 있는 상식도 다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의 실수를 논쟁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거나 너도 마찬가지라는 물타기 전법을 쓰는 정치인은 어떤가. 권리만 주장하고 자신의 이익만 앞세우는 태도는 금방 벽에 부딪친다.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생기면 뒤에서 욕하고 없는 사실을 만들고 소문으로 승부를 내기도 한다. 입으로 죄은 죄는 입으로 돌려받게 된다.

 

그러나 정치에는 상식도 이념도 국민도 없다. 오로지 후보자의 당선만 있을 뿐이다. 선거가 생활을 바꾸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미래가 달라진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이론으로만 사람들의 머릿속을 채운다.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강고하다. 자신의 계급에 맞지 않는 투표 행위를 어떻게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숱한 철학자와 사상가들 그리고 사회학자들이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현실적 모순을 지적하지만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 성향은 고스란히 선거에 반영되고 현실 정치와 경제에 반영되며 우리들의 삶을 좌지우지 한다. 부모의 영향, 학교 교육, 개인적 성향, 집단의 이익, 인간 관계, 지역적 특성에 따라 생각의 좌표는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여전히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어떻게 해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사회는 어떻게 변해야 하며 어떤 경제적 모델을 꿈꾸는가. 지금 우리들의 삶은 어떠하며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이 모든 고민의 바탕에는 자본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이기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본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떤 미래를 만들어가야 하는가. 끝없는 질문의 끝자락에서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만난 것이 2005년이다. 7년 만에 그 후속편에 해당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읽으면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실망과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 그리고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복지논쟁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고 서울 시장을 갈아치웠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2011년에 나온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008년의 금융위기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선언하는 듯 했지만 대한민국의 경제권력과 진보적 비판세력은 실질적인 주도권 싸움에 열을 올리며 이념 대립에만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현대사회의 아니 대한민국의 문제는 경제다.

 

2006국가의 역할, 2007나쁜 사마리안인들을 잇달아 내 놓은 세계적인 경제학자 캠브리지 대학의 장하준은 좌파로 규정되며 그의 책은 국방부 금서로 지정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벌어지기도 했다. 반면에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쪽에서 박정희 시대의 국가 통제 자본주의와 재벌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 때문에 욕을 먹기도 했다. 완전히 자유로울 수 는 없겠지만 경제가 이념으로 해결 가능한가. 아니면 미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경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복지 논쟁은 좌우의 이념 대립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곧바로 우리 삶에 직결되는 이 문제들을 우리는 외면하면서 살아갈 수 없고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둘 수도 없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필독서로 손색이 없다.

 

이종태 기자의 사회로 장하준과 정승일 두 사람이 대담을 나누고 정리한 책이다. 전작인 쾌도난마 한국경제의 형식을 그대로 빌려왔다. 우리가 자유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로 시작되는 이 책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 진보의 착각에서부터 현정부의 문제점까지 신랄하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민다. 10, 20년을 내다보고 99%가 나서야 할 상황이라는 말은 뼈아픈 우리의 현실을 말해준다. 최근까지 이어지는 금융위기의 원인과 전망, 끝없이 되살아나는 박정희식 경제 체제의 장단점, 재벌 개혁에 대한 오해와 진실, FTA의 실체와 문제점을 살펴보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미래의 화두인 복지에 대한 관점과 의미 그리고 실천방법을 조명하는 것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그러나 두 경제학자의 이야기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는 결국 실천의 문제로 남는다. 19대 총선이 치러지는 날이지만 선거 결과가 우리들 삶을 변화시키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국민은 자신의 수준의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말이 뼈아픈 현실을 겪으면서도 실감나지 않는 모양이다. 경제를 발전시켰듯이 복지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장하준과 정승일의 이야기는 사실일까. 정체제도로서의 민주주의와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소수가 아닌 다수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그 소수는 다수와 함께 행복해질 마음이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 함부로 쏟아내는 말들이 얼마나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는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현실을 관찰하고 조금씩이라도 행동이 변해야 산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가 희망으로 반짝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1표인 정치적 민주주의와 11표인 경제적 자본주의의 관계는 늘 팽팽한 긴장과 대립 속에 있는 만큼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반드시 통제된 시장, 통제된 자본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국민을 위해 시장을, 특히 금융 시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금융 위기를 막을 수 없으며, 심각한 빈부 격차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이러한 과제에 실패한다면 민주주의는 껍데기로 전락해 형식만 남게 되고, 국민의 삶은 실질적으로 시장과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는 진보적 자유주의였음을 자부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 치하에서 절실하게 체험했던 바이다. - 422

 

1204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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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 세계사 즐거운 지식 (비룡소 청소년) 17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클리퍼드 하퍼 그림,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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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은 어린 시절 수시로 의식을 잃었다.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억의 정전 상태인 블랙 아웃을 경험한 에반은 현재의 삶이 혼란스럽다. 영화를 되감듯 현재의 불행을 막기 위해 수없이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선택을 하지만 그 결과 현재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과거를 조작할 수 있는 에반도 완벽하게 만족스런 현실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 <나비효과>는 에시튼 커처의 인상적인 연기와 함께 우리 삶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현재의 삶은 지난 시간의 결과이며 연속적인 인과관계의 순환이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처럼 아주 작은 차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하물며 인류의 역사는 어떨지 생각해 보자.

영화처럼 가정법이 존재하지 않는 역사는 인류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다. 현재와 미래를 살펴볼 수 있는 전망대의 역할을 하는 역사는 우리에게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길러준다. 마치 도미노를 구경하듯 원인과 결과의 연속적인 과정을 살피는 것은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진진하다. ‘역사history’는 인간(he)이 겪은 모든 이야기에 대한 기록(story)을 의미한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지금-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본질적인 원인을 살펴보는 일이다. 또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역사는 폭넓은 시야를 제공하고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주며 단편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 문명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축적된 지식을 영원히 기록할 수 있게 되었고 기억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역사를 바라볼 때는 기록된 사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필요하다. 기록 자체에 대한 객관성을 의심할 수도 있어야 하며 그 뒤에 숨은 진실을 파악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우리 민족의 영웅인 안중근 의사가 일본인들에게는 식민지의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서로의 입장과 태도에 따라 역사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처음 역사를 접하는 사람은 세계사의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곰브리치 세계사는 역사를 설명하는 수많은 방법 중에서 스토리텔링이라는 탁월한 방법을 활용한다. 역사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이나 연대를 외우는 것이 역사 공부의 전부는 아니다. 곰브리치는 청소년들을 위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세계사를 이야기로 풀어낸다. 1936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이 여전히 읽히고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객관적인 사실과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하기 위해 부담 없이 집어 들기 좋은 책이다. 인류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계사 전체를 두루 살펴보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시작하는 데 적합하다. 단순한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라 거대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가듯 서술하고 있어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진하다. 다만 저자 곰브리치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 등의 역사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철저하게 유럽 중심의 세계사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세상은 넓고 책은 많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세계사를 끝내려는 욕심은 버리는 것이 좋다.

이어서 세계사 편지를 보면 역사가 조금 현실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이 책은 만들어진 역사, 국사와 세계사 교과서를 찢어버려라고 말하는 임지현이 두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역사 속 인물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사적인 편지 형식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더욱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에드워드 사이드부터 김일성, 박정희를 거쳐 체 게바라와 마르코스를 만나고 니키카와 나가오를 읽는 동안 독자들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세계사의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적합한 책이다. 공식적 역사를 부정하고 밑으로부터 살아 있는 역사를 갈구했던 스웨덴 역사가 스벤 린드크비스트의 네가 서 있는 곳을 파헤쳐라.’는 말은 우리와 상관없는 먼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 삶과 직접 관련된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라는 의미이다. 자와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력한국판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의미 있는 책이다.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 방법에서 벗어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은 색다른 관점으로 세계사를 바라본다. 사이토 다카시는 세계사는 암기과목이 아닙니다. 세계사는 수학이나 물리학 이상으로 그 근원적인 이치와 작동 원리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중요한 분야입니다.”라고 말하며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세계사의 흐름과 작동원리를 풀어내고 있다. 세부적인 사건이 아니라 핵심 코드(관점)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갖는다면 진짜 역사에 대한 재미를 알게 된다. 이 책은 세계사도 결국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며 역사에 대한 관심 또한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인류의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인간의 감정이라는 주장이 긴 여운을 남긴다.

이제 막 역사에 입문하는 청소년들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많이 있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의 나열이나 연대기적 서술에 의존하는 역사는 신문기사와 다름없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를 뒤적여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라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살아있는 역사를 이해하고 스스로 비판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의 책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질문을 던져 보자. 어떤 사실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해보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다면 역사는 더 할 나위 없이 흥미진진한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이 될 것이다.

 

120409-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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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눈을 위한 송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06
이이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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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마약이다. 계속 살면 피폐해진다. 사랑은 이별한다고 잊거나 잊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덮어두고 떠나는 것이다. 나는 그 안에 중독되어 독신의 처방을 얻었다. 누군가 우는 것을 보면 울게 된다. 세상에는 더 이상 반전(反轉)이 없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동안 모든 걸 그리워하게 되었다. 서로 죽이지 않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반려의 몸이여. 뒤돌아서면 등지고 온 무덤들이 많았다. 진짜 생각이란 없다. 생각을 떠나면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 나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잔류하는 이형(異形)의 삶이어도 삶이기에 죽지는 않는다. 이 색을 간직하겠다. 서로를 닮은 황홀경들이 착종하는, 인간의 미로. 그 주저흔의 골목길에서 우리는 재회하여 서로의 피를 확인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헤어질 수 있을까. 어떤 참담은 아직도 종종 나를 죽인다. 아무도 나를 갖지 못해서 나는 나를 부둥켜안았다. 이번 삶을 유폐시켜서 모두 유감이다. 기필코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아니다. 멀리 떠나서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여전히 시집이 팔리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문지의 시집은 뒤표지에 시인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시집을 다 읽고 나서 해설까지 훑은 후에 마지막으로 시인의 육성을 듣는 것 같아 표지 뒷면을 읽는 눈길은 탐욕스럽다. 질리지 않는 디자인과 판형을 유지하며 전통을 이어가는 문지의 시집을 쓰다듬다가 문득 88년생 시인의 시집이라는 사실 때문에 세월을 절감한다. 이 시인이 태어날 무렵 나는 처음 시에 눈을 뜨기 시작했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있다. 이미 당도해버린 줄도 모르고 애타리게 기다리던 봄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처럼 아쉬움만 남긴 채.

 

이이체라는 이체로운 이름의 시인은 올해 스물다섯이다. 벌써 그럴 나이는 아니지만 시집을 읽는 내내 이십대를 더듬었다. 나이가 사고를 가두지는 않지만 살아보지 않은 시간에 대해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죽은 눈을 위한 송가는 삶에 대한 불확실성과 규정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으로 가득하다. 그 시니컬한 눈빛과 사물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아름답다. 그것은 젊음과 자신감에 대한 반증이므로.

 

불은 무엇을 태우기 위해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타오르기에 무엇을 태우지 타올라서 흘러버리는 물이었지”(‘배신놀이- 김승일에게중에서)라고 말하는 것은 본질과 현상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도전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는 늘상 무언가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이 어디 그러한가.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연 혹은 연인을 시인은 우리는 서로의 몽타주다 나는 세계를 지우는 일을 했고 너는 세계를 구성하는 구멍에 빠졌던 가난”(‘연인중에서)이라고 말한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운 것 같은데, 인간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보일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시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죽는 것들을 표정 없이 떠나보내는 법을 터득하는 중이다. 사라지는 것과 죽는 것을 분별하기로 한다. 나는 모래 알갱이들을 하나하나 헤아릴 만큼 지루해져간다. 바다는 소금의 타향. 결말의 출신에 대해 깨닫고는 운다. 나는 나의 삶보다 오래된 내가 밉다. - ‘날짜변경선중에서

 

그래서 시인도 죽는 것 혹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미리 염려하는 지도 모른다. 시인이라는 천형을 받아 를 토해내는 행위를 하는 동안 스물다섯 시인에게도 세월의 파도는 몰아치겠지. 그리고 내 죽음으로 평생을 슬퍼해야 할 사람을 만나겠지.

 

 

몸에 당신의 일기를 베끼고 바다로 와서 지운다. 내 죽음으로 평생을 슬퍼해야 할 사람이 한 명 필요하다. 당신은 말해진 적 없는 말. 모든 걸 씻고. 이렇게 당신이 바다에서 눈물을 흘린 게, 눈물을. 바다의 푸른 계단이 차례로 무너져 내리고, 절벽에서 하얀 고통들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진다. 거품들이 분말처럼 흩어지면 당신이 흘려둔 해식애로 세워지던 안개 도시. 파도는 내 몸에 맞다. 나쁜 말들뿐이다. 나는 아직 당신에게 내 얼굴의 절반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당신은 몇 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가. 나는 쓴다. 쓴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쓴다. 쓴다고 생각하기 위해 쓴다. 쓴다. 지운다.

 

때로는 그것이 간절한 거짓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누군가의 간절한 거짓이었다 당신, 정말 날 사랑하는 거야? 아니, 난 당신을 믿어. - 이이체, - ‘거짓말의 목소리중에서

 

떨어지고, 흔들리고 멀어지면서 상처가 없는데도 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말할 땐 이미 비가 내리고 눈 내리는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언젠가 무너진다. 폐허에서 눈 감고 꼭 안을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이 생의 종착역이다. 부정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겸손해지거나 혹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몸부림치거나. 넉넉하게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었다면 시는 그저 작은 위로에 불과할 뿐이다.

 

너는 내게 손 내미는 대신 말을 내건다. 떨어지려는 것처럼 흔들리는 도토리들. 칡넝쿨이 더 세게 너를 옥죄고. 나는 너를 풀지 못한다. 아련해져 가는 너를 잡아보려고 손을 뻗으면, 선은 손에서 멀어져가고 손은 선에 닿지 않고. 바람을 지나쳐 보내며 신기루를 믿고 싶다고 말한다. 너무 멀리 와버렸어. 상처가 없는데 아프다. 눈 감은 내 눈앞에 눈 내리는 풍경이 펼쳐지고.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에서 너를 안고 눈을 감는다. - ‘사라지는 포옹중에서

비가 내리고, 참으로 울상이다. 하늘을 가릴 우산 따윈 필요 없다. 내가 썼던 일기들로 나는 나를 지워갈 예정이다. , 암송하지 않는 일기를 보아라. - ‘친절한 세상중에서

 

120408-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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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나를 만나는 스무살 철학 - 혼돈과 불안의 길목을 지나는 20대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김보일 지음 / 예담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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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일등이 모든 것을 갖는 게임의 법칙에서 이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생태계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적자생존의 법칙은 냉혹한 현실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그 결과는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을 순위로 결정할 수 있을까.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왕기춘 선수는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금메달 유망주였던 이원희 선수를 이기고 당당하게 올림픽에 출전해서 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왕기춘 선수의 부담감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갈비뼈 부상을 무릅쓰고 지구에서 두 번째로 유도를 잘한다고 인정받았는데도 눈물을 흘린 왕기춘 선수는 여자 펜싱부문 최초의 은메달리스트가 된 남현희 선수가 보여준 환한 미소와 비교되었다. 상황에 따라 은메달의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이등을 하고도 눈물이 나는 현실은 우리들의 각박한 삶을 돌아보게 한다.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 대신 성적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전교 1등을 해도 다른 학교 전교 1등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하지만 꽃들에게 희망을의 애벌레처럼 우리는 정상에 오르기 위해 오늘도 쉬지 않고 공부하고 스펙을 쌓기 위해 잠자고 꿈꿀 시간도 없다. 하지만 철학은 이런 현실에 대해 여전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철학자가 아닌 우리들에게 철학은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학교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온 김보일 선생님의 나를 만나는 스무 살 철학은 청소년들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타율과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난다. 대학생이 되거나 사회에 진출하는 스무 살은 성인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나이로 볼 수 있다.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일등만 부러워할 수는 없다. 내가 가진 것만 좋다고 여기는 것도 문제지만 여우의 신포도처럼 다른 이의 삶을 부러워만 한다면 지는 거다. 삶의 목적과 방향이 없다면 일등도 불행한 현실에서 모든 청춘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존재한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탐하지 않아도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막연한 불안과 상실, 욕망과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는 스무 살에게 김보일이 보내는 애정어린 충고와 철학적 조언은 가슴을 열고 진지하게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에는 어렵고 복잡한 철학 개념이나 철학자들의 삶은 소개되어 있지 않다. 대신에 스무 살로 상징되는 사춘기에서 이십대 초반의 청춘들에게 우리들의 삶에 철학이 왜 필요한가를 말해주고 있다. 철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하는 책이 아니라 불안, 선택, 고독, 욕망, 행복, 성공, 사랑 등 우리가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책이다. 성공을 위한 지침서, 자기를 계발하라고 독촉하는 실용서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와 고민 속에서 스무 살은 현재와 미래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스무 살의 불안은 희망의 다른 측면이라는 말을 기억하자.

상처받지 않을 권리리뷰보기

작가
강신주
출판
프로네시스
발매
2009.07.01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최신형 스마트폰과 MP3, 대한민국 1%라야 탈 수 있다는 자동차,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아파트……. 나의 욕망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언제 끝날 것인가. 철학자 강신주는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통해 우리들의 욕망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 위력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면 강신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책에는 이상과 짐멜, 보들레르와 벤야민, 투르니에와 부르디외, 유하와 보드리야르가 등장하기 때문에 어렵고 딱딱하게 느낄 수 있지만 청소년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돈과 욕망, 유행, 도박, 불안, 허영, 소비와 교환 등 현대 사회의 면면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두툼한 분량이지만 재미있게 읽힌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강신주의 장점은 대상에 대한 정확하고 날카로운 분석 능력과 그것을 독자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글쓰기 능력이다. 낯선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다. 강신주의 안내를 받으면 철학과 현대 사회를 재미있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작가
헬런 니어링
출판
보리
발매
2002.07.30

21세기 첨단 사회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보다 편리하고 안락한 생활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을 살펴보자. 미국에서 대공황이 최악이었던 1932년에 뉴욕에서 버몬트 숲 속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독립적인 경제와 건강, 사회를 생각하며 바르게 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직접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책은 일벌레로 살아가며 더 많은 것을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노동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 시간에는 책을 읽고 산책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는 삶은 어떤가. 모든 사람이 물질문명 사회를 등지고 살수는 없지만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두 사람은 온몸으로 삶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

결국 철학은 우리에게 삶의 목적과 방법을 고민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 하나하나의 과정과 결과가 우리의 삶이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고 싶다면 철학에게 길을 묻고 스스로 그 길을 찾아 떠나야 한다. 그렇게 철학은 우리들 삶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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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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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원을 말하는 게 좋았다.

그 소원을 하나하나 이루다보면 어른이 되리라 생각했다.

아니면 그 반대로 어른이 되면 그 소원을 다 이룰 수 있게 되거나.

열다섯 살 무렵, 어른이 된다는 건 내게 그런 뜻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몇 가지 방어기제를 갖게 된다. 마음이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은 달팽이처럼 연한 속살을 단단한 껍질 속에 가둔다. 낯선 사람과 쉽게 친해지기 어렵고 타인과의 지나친 친밀감은 부담스럽다. 자기만의 세계가 단단해서 혼자가 편할 때가 많다. 그래서 냉정하고 정확해 보이지만 그건 내 영역 안에 누군가 발을 들이밀 때의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서다. 운전을 하다가 왼쪽 뺨을 물들이는 저녁노을 때문에 울컥하기도 하고 금요일 오후 창밖의 안개비를 내다보다가 가슴이 먼저 젖어버리기도 한다.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스스로 생채기를 내는 타입이어서 차라리 이어폰을 꽂고 혼자 걷는 데 익숙하다.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완벽주의 콤플렉스가 생기기 쉽다.

 

어른이 되어서도 유년시절의 정서를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은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어린왕자처럼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영혼을 가졌기 때문에 세속적인 욕심이 없고 현실적인 것들을 하찮게 여긴다. 유치하게 행동하거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상황판단이 안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는 애늙은이도 있고 철없는 노인도 있는 법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저 시류에 휩쓸려 가는 평범한 생활인일 수도 있다. 어느 부류의 사람이든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그것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패턴은 제각각이며 나름의 이유를 만들고 그 안에서 괴로워하고 즐거운 일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작가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할까? 세상에 대한 예민한 촉수, 철들지 않는 여린 감수성, 대상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좋은 작가의 작품은 재밌는 이야기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기보다 책장을 덮고 시간이 지나도 오래 여운이 남는 울림을 준다. 김연수의 소설 원더보이를 읽고나서 며칠이 지났고 그의 소설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다가 김연수라는 작가에 대해 문득 떠오른 생각들이다. 장난기 어린 표정과 예리한 눈빛, 시인의 감수성과 깊은 사색이 만들어낸 문장들은 독자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스토리 위주의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치게 요설적인 부분이 없지 않으나 그의 소설을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은 여전히 김연수 특유의 감성과 그 감성이 빚어내는 발랄한 상상력이다. 세상에 대해 다소 시니컬한 표정으로 킬킬거리는듯한 사춘기 소년의 언어가 드러나기도 하고 인간의 삶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이 묻어나기도 하는 원더보이

김연수의 말대로 매순간 삶이 놀라움으로 가득 차기를.’(87) 바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똑같은 하루하루를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지루한 세상을 버텨낼 수 있을까. 그래서 어쨌든 우리는 모두 한 번 죽을거야. 하지만, 여러 번 살아.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서’(91) 같은 문장에 밑줄 그으며 삶의 허무에 대해 한번쯤 멍한 눈길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공이 국시(國是)였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원더보이는 마친 윤대성의 <출세기>처럼 낯설지만은 않은 우리 주변의 이야기일 수 있다.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주변 상황과 시선으로 인해 거추장스런 누더기를 걸칠 때도 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때도 있다. 원더보이는 어느 날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현실과 마주하면서 제 힘으로는 한발짝도 움직이기 힘든 삶의 올가미를 경험해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원더보이에게 공감을 보낼 것이다. 이 소설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삶의 불가해함에 대해 엄살을 떠는 것도 아니다. 읽는 사람이 걸어온 길과 켜켜이 쌓아온 시간의 결에 따라 다양한 층위를 드러낼 수 있는 소설이다.

 

많은 사람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는 소설과 특정한 매니아층을 거느린 소설,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작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모든 소설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도 없고 김연수가 어느 쪽이냐고 묻는 것도 무의미할 수도 있다. 다만 지금까지 읽어온 김연수의 소설과 원더보이가 특별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전작에서 보여준 문장과 패턴, 문제의식과 소설의 방법들이 다시 한 번 그의 색깔을 내는데 기여하고 있지만 또 다른 변화와 새로움을 간절히 소망하는 독자들에게는 조금 아쉬움을 남긴다.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외로울 뿐이라는 박두진의 <도봉>이 떠오른 것은 김연수 소설의 바탕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즐겁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것 또한 얼마나 허망한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열망,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대한 도전,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내 삶에 대한 겸손함. 이 모든 것들이 보여주는 세계가 소설이라면 김연수는 여전히 이제 시작에 불과한 소설가가 아닌가. 그의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무한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여전히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뤄질 가능성이 없는 몽상들,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꿈들,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 뿐 아무런 현실성도 없는 소망들. -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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