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인간에게 ‘자유 의지Free Will’가 없다니 무슨 말인가. 독서 모임이나 종교와 과학 논쟁에서 심심찮게 반복되는 ‘자유 의지’는 철학의 영역을 벗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숱한 심리 심리실험과 진화 심리학이나 진화 생물학에 뇌과학이 가세해서 논란을 증폭시킨다. 이게 다 ‘호르몬’ 탓이라는 의학적 태도만큼 위험해 보이는 샘 해리스의 ‘자유 의지는 없다’라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철학과 신경 인지과학을 공부한 저자는 단호하게 “자유 의지란 단연코 환상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고와 의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배경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앨프리드 R. 밀러는 현대 과학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으니 논쟁은 진행 중이라 할 만하다. 신경과학과 심리학은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두 사람은 똑 같이 생리학자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의 실험을 소개한다. “인간이 자신이 움직이기로 결심했다고 느끼기 300밀리세컨드 전부터 뇌의 운동피질에서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을 뇌파검사EEG를 사용하여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또 다른 연구소에서는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사용하여 이 연구를 확장했다. 피험자들은 스크린에 나타나는 무작위 순서의 글자들로 구성된 ‘시계’를 보면서 두 개의 단추 중 하나를 눌러야 했다. 그들은 어떤 단추를 누를지 결정하는 순간 어떤 글자가 보이는지 보고했다. 실험자들은 피험자들이 그 결정을 의식적으로 내리기 ‘7~10초’ 전에 어떤 단추를 누를지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는 뇌 부위 두 군데를 발견했다.” 샘 해리스는 이 실험을 근거로 자유 의지가 없음을 선언한다. 과연 그런가. 인간의 행동은 무의식과 사회심리학에서 주장하는 상황 논리가 인간의 행위를 촉발한다면 인간의 선택과 갈등은 이미 결정된 행동에 이르는 과정 혹은 예비 단계에 불과하며 우리는 각본대로 인생을 연기한단 말인가.

자연법칙과 우연은 자유 의지와 무관하다. 그러나 생각과 의지 그리고 적극적인 노력과 선택의 문제를 자유 의지와 무관하다고 설명할 방법은 없다. 그것은 자유 의지의 의미와 범주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자유 의지가 없다면, 범죄자의 도파민을 감옥에 가두고 자유 의지가 없는 대통령의 계엄령은 처벌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해야 한다. ‘자유 의지가 없다는 환상은 그 자체가 환상이다.’

샘 해리스의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로운 존재가 아닐뿐더러,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다고 느끼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살아가면서 겪는 선택의 한계, 무의식적 행동과 원치 않는 결과들, 발버둥 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을 돌아보면 정말 의지와 노력 따위가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면 운명론자들의 말대로 태어나는 순간 정해진 삶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사회적 계급과 자기 삶의 역할에 충실하라는 중세적 세계관이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받아들이라는 역술가의 조언만큼 당황스런 자유 의지는 없다는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할 이유와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주장과 이론에는 반론이 존재한다. 없다면 곧 나온다. 정반합의 변증법적 사고와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해 헤겔이나 토마스 쿤의 주장 그리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 대한 칼 포퍼의 주장이 떠오른 건 아마도 21세기판 인간 말종론, 아니 종말론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이론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물리학의 끈 이론과 달리 밝혀지지 않는 뇌과학이나 심리 실험으로 ‘진리’를 주장하는 모든 논의는 진행ing 상태다. 듣지 않는 사람, 단언하는 인간, 나만 옳다는 인간 혹은 그 집단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의 질병은 불안과 고독보다 심각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104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생 역사를 연구한 60대 류시현은 『역사를 읽는 법』 머리말에서 “계속 여러 책을 읽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역사가의 역할과 임무가 무엇인지에 관해 여전히 고민하게 된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책을 마무리하며 맺음말에서 “생각을 유연하게 하고 싶다. 생각이 유연한 것은 균형 감각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 나의 판단, 나의 결정 등을 정답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다짐한다. 한 생을 다해 역사를 통찰한 연구자의 말이라고 하기엔 자기 주장이 없어 겸손하게 들리지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로는 지나치지 않다. 균형과 절제를 잃은 관점과 태도는 폭력과 증오를 낳고 상대를 인정하는 기본기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줄리언 반스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보태 소설적 ‘허구’를 빚어낸다. 한없이 자유롭고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 소설과 달리 역사는 객관적 사실 여부를 고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진실은 해석의 문제이나 사실은 합의의 과정이 아닐까. 이 책이 출간 당시 서점 역사 코너에 전시됐다는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줄리언 반스는 왜 소설의 제목을 세계 역사라고 했을까.

노아의 방주, 시오니즘과 테러, 체르노빌 원전 사고, 타이타닉호 침몰, 달 착륙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소설처럼 떠오르는 장면에 숨을 불어 넣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소설적 진실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차치하더라도 독자에겐 호기심과 재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하다. 이 글을 읽고 아무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라고 강요하듯 줄리언 반스는 역사의 한 장면을 미분하여 그 의미를 적분한다. 그 중에서도 제5장 「난파」가 인상적이다. 세네갈 원정대(1816.06.17.) 365명의 운명을 다룬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1819>은 누구나 한 번쯤 보았던 그림이다. 영화나 드라마 보다 극적인 사건을 다룬 그림을 다시 생생한 소설로 묘사한 이유는 궁금하지 않다. 읽는 이에게 미적 황홀감을 주거나 역사를 환기할 목적이거나 현실을 재현하려는 욕망이거나 상관없이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는 과거를 소환해 현실을 살피게 한다. 물론 오래된 미래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문학에 있어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는 그의 소설과 단편들은, 무엇보다도 사실과 공상의 퓨전-매직 리얼리즘magic realism-소설이라는 포스트모던적 특징을 잘 드러낸다.”(역자 해설 「역사와 픽션을 오가며」에서, 신재실)라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다. 대다수 독자에겐 이런 용어와 개념이 추상적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장면들을 콜라주한 줄리언 반스의 솜씨가 뛰어나 10과 1/2장의 심포니처럼 조화를 이룬 이야기들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소설도 허구에서 신화로 그것이 다시 우화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 신선하다. 불면의 밤을 지나 눈부신 대낮에 꿈을 꾸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을 부정하고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같은 현실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아서일까.

나는 꿈을 깼다는 꿈을 꾸었다. 꿈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꿈이었는데, 내가 방금 그런 꿈을 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편지의 시대 창비시선 495
장이지 지음 / 창비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지막 손 편지를 쓴 게 언제일까. 편지의 시대라는 제목 때문에 한참 기억을 더듬었다. 파란색 펜으로 대각선으로 쓰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던 시절은 구한말쯤 되나. 키보드를 두드리고 엄지족으로 진화(?)하는 동안 내가, 아니 우리가 잃어버린 건 아날로그 감성만은 아닐 것이다. 레트로를 찾고 추억 마케팅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일도 어쩌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아니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좋은 삶, 즐거운 생활이 아니라 견뎌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주 든다. 일관성과 걱정은 상상력 없는 자들의 한계일까.

당신에게 쓰는 시는 언제나 나를 다치게 하네 쓰면 쓸수록 나는 죽음에 다가가네 수많은 통점으로 뒤덮인 글쓰기, 편지, 당신에게 쓰는 시…… 나의 수많은 기절!

_「사랑의 폐광」중에서

시집을 읽지 않으면 산소 없는 공기를 흡입하듯 활자에 질식할 수 있다. 텍스트의 안과 밖을 살피지 못하고 저자와 씨름하거나 논리의 정교함을 다투다 여유를 잃게 된다. 삭막한 마음은 메마른 모래처럼 쩍쩍 갈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금세 봄비가 그리워지다가 신발 밑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질척이는 흙을 떼어내곤 한다. 읽는 인간에게 시가 필요하듯 시인과 소설가는 사랑으로 숨쉬는 게 아닐까.

줄리언 반스의 소설보다 먼저 읽은 편지의 시대 탓일까. 소설의 한 구절을 오래 곱씹었다.

시인들은 나쁜 사랑–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랑–을 훌륭한 사랑의 시로 전환시킬 수 있는 듯하다. 산문 작가들은 이러한 놀라울 정도의 부정직한 변형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나쁜 사랑을 나쁜 사랑에 대한 산문으로 전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들이 우리에게 사랑을 이야기할 때 질투심(그리고 약간의 불신감)이 생긴다. - 『10과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줄리언 반스

장이지도 그랬을까. 사랑의 폐광에 갇힌 사랑은, 편지의 시대를 돌이켜 나쁜 사랑을 훌륭한 사랑으로 전환시킨 걸까. 줄리언 반스의 내심은 질투일까 불신일까. 아니 그보다 읽는 사람들 마음에 남은 그 사랑의 흔적들은 상처일까 추억일까. 물론, 그게 궁금하지는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관계가 사람을 망친다. 대개 인간관계(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2차적 관계인 사회자본뿐만 아니라 1차적 관계인 가족관계는 우선 인격 형성, 사회화, 보험, 복지 기능을 담당한다. 뿐만 아니라 문화자본의 전수와 경제 자본의 세습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그 단단한 체계를 거부하고나 변화시키는 건 생각보다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문화적 전통이 형성되고 관습적 사고로 굳어지면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사태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변화는 두렵고 번거롭다. 따라서 보수적 성향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디폴트 값으로 DNA에 새겨진 본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노력과 의지는 직접 경험과 학습을 통해 각성할 때 벌어지는 예외적 상황이 아닐까.

가족을 생물학적 혈연관계로 규정짓는 순간 소피 루이스의 『가족을 폐지하라』나 김지혜의 『가족 각본』은 현실에 수용될 가능성이 없다. 김희경은 『이상한 정상 가족』에서 개인 삶의 독립성을 보장하되 삶의 질은 집단적 책임에 달려있다는 ‘차가운 신뢰(국가주의적 개인주의)’를 주장했다. ‘개인-가족’ 중심의 미국과 달리 독일과 스웨덴 등은 ‘국가-개인’의 양상을 보인다. 우리는 어떤가. 이상한 가부장제, 남성들의 피해의식, 극단적 가족 이기주의가 버무려진 형태라고 하면 지나친 평가일까. 온정주의가 보여주는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공동체와 국가 차원의 윤리는 찾아보기 힘들고 개인과 가족 중심의 생존 전략과 경쟁에 골몰하는 풍토는 공포에 가깝다. 한 아이는 온 마을이 키운다는 말이 적용되기 힘든, 태어나는 순간 부모가 스펙이 되는 현실에서 세계 최저 출생률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사교육과 학벌주의, 특정 직군의 이기주의와 특혜와 카르텔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그 집단에 편입하려는 욕망의 블랙홀이 사회적 윤리와 상상력을 모두 빨아들인다. 놀랍고 기괴한 풍경을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라는 말로 포장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가족은 폐지할 수 없는 사회와 국가의 최소 단위라는 생각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 기원을 사유 재산에서 찾는다. 국가의 기원이 된 가족은 그 형태와 크기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해왔다. 국민 국가 시대에 가족을 폐지하라는 급진적 요구가 통할리 없다는 걸 소피 루이스는 몰랐을까. 그 모든 게 각본에 짜인듯 움직인다는 김지혜의 지적은 현실을 정확히 분석한 걸까. 양비론과 양시론으로 초점을 흐리고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집중력있게 문제의 본질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 세대를 막론하고, 여성 혹은 페미니즘이란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이루 남성과 여성을 제외하면 가족에 관한 논의가 ‘여성’과 닿아 있음을 충분히 짐작하리라. 물론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성급하게 추측할 수도 있겠으나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소피 루이스는 백인, 부르주아, 핵 가족에 관한 편견에 돌을 던진다.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이유는 현대사회의 복잡성과 변화 가능성 때문이다. 전통 농경 사회의 가족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그러나 1인 가구가 주류가 된 시대를 살면서도 우리는 이상적 가족 혹은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에 편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차별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할 수 있다는 착각과 그 기준에서 시작된다. 김지혜의 문제 의식은 ‘왜 며리리가 남자면 안 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결혼과 출산의 절대 공식을 넘어, 성역할과 성교육 너머에 각본 없는 가족을 꿈꾼다. ‘외 않 되?’는 ‘why not?’를 비틀어 고정관념을 헤집고 편견과 차별을 흔든다. 정말 안 되는 걸까? 그러면 안 되는 일을 하고도 뻔뻔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 탓에 시대의 변화와 흐름과 무관한 수구적 태도를 점검하는 일이 오히려 더 힘겹게 느껴질 때가 많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야말로 가족이 아닌가. 거리 두기에 실패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양상은 이수지의 대치맘 패러디가 아니라도 차고 넘친다. 자녀 교육에 대한 목표와 방향, 삶의 가치에 대해 깊이 숙고하며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나와 우리 가족만 별나게 살 수 없다는 항변은 타당한가. 성적순으로 지망하는 학과와 직업이 일치하는 사회는 정상인가. 가족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눈이 먼 맹목적 강요와 일방적 가스라이팅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관계다. 인생의 정답을 안다는 듯한 부모와 어떤 말도 소음과 잔소리로 여기는 자식 사이의 기싸움은 기본이지만 그 너머에 존재하는 신뢰와 지지,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잘 짜인 각본에 불과할 수도 있다. 동성 결혼과 비혼 출산을 인정하고 고정된 성역할을 극복하며 자녀와의 관계 양상을 재설정하지 않으면 현실 도처에 폭탄처럼 숨은 지뢰들을 피하기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은희경의 단편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아름다움은 나를 멸시한다』 수록)은 아니었고...윤대녕의 단편이었나? 기억나지 않는다.(아시는 분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진공상태의 우주에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상대를 밀어주고 그 반작용으로 춥고 어둡고 아득한 먼 우주로 하염없이 멀어지는 우주인. 그 인상적인 장면이 어느 단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칼 세이건의 『코스모드』를 읽을 때도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을 읽을 때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장면이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난 그 우주인은 아직도 멀어지고 있을까, 언제까지 멀어지다가 우주의 끝에 도달했을까, 우주 공간에 끝이라는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까, 공간의 끝이 없다면 시간도 영원할까, 시간의 끝이라는 개념은 물리학의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걸까, 실제 그 순간이 온다는 말인가.

우주의 기원, 세상의 저편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시절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라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는 이유가 혹시 무의식에 남은 유년시절의 기억들 때문일까.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나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시간의 지도』를 읽을 때의 개인적 감동은 오롯이 상상력에 기반한 나만의 세계였을 것이다. 과학의 시선은 실제계에서 벌어지는 객관적 사실을 향하고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한 해석은 과학자의 몫이 아닐 수도 있다. 브라이언 그린도 물리학이라는 도구로 우주와 생명을 포함한 세상의 기원과 작동 원리를 들여다보면서 끊임없이 인문학을 끌어들인다. 철학과 문학적 소양은 일반인에게 적절한 설명 도구로 유용할 뿐 아니라 결국 앎이 삶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 없는 웅변처럼 들렸다. 안다고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 아는 것과 이해한다는 건 다른 문제다. 시간의 끝,이라는 개념은 오히려 개인의 죽음에 닿아 있다.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사라진다. 사후 세계의 믿음이나 내세와 무관한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죽음이 시간이 끝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외한 타인의 삶, 지구의 종말, 우주의 끝에 대한 호기심과 과학적 상상력은 왜 필요한가.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이 이어지며 일요일 밤 3시간이 넘도록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우주는 무엇이며 그것은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니 그 호기심으로 얻은 얇은 지식과 생각들은 어떤 태도로 현실에 반영되어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걸까. 명쾌하고 분명한, 논란이 없는 수학과 과학도 환원주의 관점으로 회귀하지 않으려면 거시 세계의 인간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매일 묻지 않으면 단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변해야 한다는 적응과 실용적 자기계발식 금언이 아니다. 어차피 우연의 우연의 우연이 겹쳐 필연을 가장한 존재와 관계라고 해도 선택의 문제, 의지의 표상이 우리를 괴롭힌다. 인간이 ‘위대한 존재’인지 ‘먼지같은 존재’인지 논쟁을 하다가 ‘위대한 먼지’로 타협했다는 분의 이야기가 새삼스러웠다. 우리는 ‘위대한 먼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스크린 속에 이미 펼쳐져 있든, 무한한 순환 고리로 연결되어 있든, 연쇄적인 반응의 결과이든 상관없다. 곧 봄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고 인간의 삶은 바늘로 찍은 점보다 짧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정도만 자각할 수 있어도 충분하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