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거미의 사랑 창비시선 259
강은교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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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셋이

빗방울 셋이 만나더니, 지나온 하늘 지나온 구름 덩이들을 생각하며 분개하더니,
분개하던 빗방울 셋 서로 몸에 힘을 주더니, 스르르 깨지더니,

참 크고 아름다운 빗방울 하나가 되었다.

  오랜만에 나온 강은교의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의 서시다. 하나되는 사랑, 분개하던 나와 네가 만나 하나되는 아름다움이 이 시집의 전하는 메시지다. 나름의 방식대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정답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각자 주장하는, 혹은 가장 아름다운 방식의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의 순간순간 느껴지던 그 아름다움은 나의 존재 방식이기 이전에 타인과의 관계맺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한다.

  <허무집>과 <풀잎>, <빈자일기>로 이어지는 강은교의 시의 절정은 더 이상 예민한 촉수와 감각적이고 치열한 정신을 동반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느낌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들에 혼란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했던 강은교의 시도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일까. 시인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언어에 대한 참신한 감각과 전통에 대한 관심은 편안하지만 즐겁지 않다. 특히, 3, 4부로 모아놓은 가야 소리집과 행사시들은 깊이있는 울림보다 전통에 대한 또다른 방식의 어울림 정도로 그친다.

  시간이 모든 것을 무화시키지는 않는다. 풀잎에서 보여주던 명징한 언어도 깊은 성찰도 희미해져 간다는 것은 독자의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희미해져가는 빈 자리를 채워가는 다른 방식이다. 무엇으로 바꿀 것인가는 물론 시인의 몫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심도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어떤 변화인가와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를 확인하고 관찰하는 것은 독자의 즐거움이다. 그 변화와 태도가 긍정인가 부정인가는 시인이 선택할 몫이고 독자가 평가할 몫이다. 다른 시인 일반에 적용되는 문제가 강은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주목한 것은 ‘소리’이다. 귀가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소음이다. 고요 속에 빛나지 못하는 침묵은 또 다른 소음이다. 시인은 ‘소음’과 ‘침묵’ 사이에 서성거린다. 귓가에 들리는 모든 소리들을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은 특정한 소리에 대한 호감과는 거리가 멀다. 소리가 없는, 침묵은 또 다른 소리이다.

목도리

목도리를 잃어버렸다
며칠을 눈에 밟혔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지금 누구인가의 목을 한창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마치 내 목에 그랬던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그러했듯 영원한 사랑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관조적 자세다. ‘마치 내 목에 그랬던 것처럼’ 상황과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관성의 법칙과도 같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건조하게 내뱉는 시인의 목소리가 메마르다.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상실감보다 상상에 근거한 목도리의 행위가 주는 비애는 배신감이라기보다 연민에 가깝다.

  그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비온 뒤에 신발 밑창에 달라붙는 진흙처럼 좀체 떨어져 나가지 않는 지긋지긋한 그리움과 지금, 이 순간에 가지고 있는 이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질 날은 가까운 미래이거나 과거의 어느 날이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사랑에 공감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그때 몰랐’던 것들을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너를 사랑한다’는 미완성의 문장이 긴 여운보다 무미건조한 모래 바람을 일으킨다.

너를 사랑한다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의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06031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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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공중부양
이외수 지음 / 동방미디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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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로 떠오르는 꿈은 어린 시절 우리 모두가 꾸던 꿈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상에 불가능한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만 간다. 그것은 강요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스스로 깨달은 것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거나 소망과 희망을 넘어 욕심과 욕망 사이에서 괴로움을 겪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로 돌아가 황당한 공상에 빠져 보기도 한다. 가장 흔하게 하늘을 날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날개가 있든 없든, 그 과정이 어떠하든 하늘로 날아올라 현실을 벗어나 어딘가 먼 곳으로 가버리고 싶은 공상은 어린시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꿈은 성인이 되어서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구체적인 일에 대한 해결 방법으로 은밀한 욕망을 꿈꾼다.

  그 중에 하나가 글쓰기인 사람들을 위한 책도 이젠 제법 많이 출판되고 있다. 그 목적과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잘 맞는 것을 선택해야함은 물론이다.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글쓰는 방법을 ‘공중부양’으로까지 승화(?)시키기 위한 나름의 방법과 고민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외수의 것이지 독자들이나 타인의 것으로 확장시키기엔 너무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장인정신으로 습득한 노하우를 그렇게 쉽게 타인에게 전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배우는 사람이든 가르치는 사람이든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이외수도 그 불가능의 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열심이지만 역부족이다. 설명 부족이 아니라 전이과정에서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을 메울수는 없다.

  이외수를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쯤이다. <내 잠속에 비내는데>를 읽은 어머니의 소개로 처음 만난 이외수는 기인이었다. 평범을 거부하는 삶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올림픽이 열리는 해가 되어야 이발을 하고, 거지처럼 춘천에서 글을 쓰기 위해 몸부림 치던 시절과 미스 강원과 결혼한 연애사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어린 맘에 깊게 각인되었다. 이후 <꿈꾸는 식물>, <개미귀신>, <칼>, <겨울나기>등을 읽고 수필집 <말더듬이의 겨울수첩>에서 보여준 그의 감수성에 사로잡혔다. 10대 문학 소년의 감수성에 맞춤한 그의 언어는 지나치게 예리하고 깊이 영혼의 울림을 주었다. 감성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하다고 인정해버렸다. 그 시절의 인연으로 시집 <풀꽃, 술잔, 나비>, 소설 <벽오금학도>, <황금비늘>, <장외인간>, 산문우화집 <감성사전>,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외뿔> 등 그의 글들은 거의 모두 읽고 있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제자리에 머물러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답답하기 보다는 순수하다고 믿는다. 소설의 미덕과 문학성을 논하기 전에 짙은 그리움처럼, 혹은 춘천의 안개처럼 그가 떠오를 때가 있다. 물론 다분히 개인적 취향이거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해도 그에게 진 빚은 많다.

  이외수의 글쓰기의 특징은 장르를 불문하고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따뜻한 감성에서 출발한다. 현실을 뛰어넘고 싶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비현실적인 몽환적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본성들을 들추어내는 일이다. 이외수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사물들 사이에 감추어진 그 영혼의 울림을 들어 보라고. 그 소리를 듣거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육안과 뇌안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꼬집는다. 심안과 영안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이 그의 주문이다.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그의 글쓰기는 누구나 공감하기 어렵지만 천진한 어린아이의 시선과 순수하다는 추상명사가 주는 일반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오랫동안 일반인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지도해온 소설가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눈높이에 맞추기 쉽다는 장점을 지닌다. 대상과 방법이 명확한 글쓰기 강좌는 오히려 명쾌하다. 철저하게 문학적인 글쓰기에 목적을 둔 이 책은 이외수가 생각하는 나름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단어의 선택과 문장의 구성, 창작 방법까지 일반론 수준에서 글쓰기 책의 구색을 갖추고 있다. 대체적으로 중 ․ 고등학생 정도의 수준이나 글쓰기의 기초를 알고 싶은 정도의 호기심 수준에서 가볍게 읽어 볼 만한 정도다.

  이외수의 특별한 글쓰기 노하우를 전수 받고 싶거나 본격적인 글쓰기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직접 ‘격외선당’을 찾아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 될 듯하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진심을 가지고 한 발짝 다가서서 보면 된다. 지속적인 노력과 열정이 있을 때 던져주는 작은 麗?하나, 방법 한 가지는 소중할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루한 잔소리에 불과하다. 조금 냉정하게 말한다면 이제 이런 종류의 책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춘천교대를 중퇴했지만 남을 가르치는 일보다 온몸으로 보여주는 쪽이 훨씬 그에게 어울린다.


06031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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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전쟁 - 미래 전쟁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존 에드워즈 지음, 류동완 옮김, 김민석 감수 / 플래닛미디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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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세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은 전쟁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까지 유효한 이 사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발달하고 있다. 미래의 군인과 가상 전쟁을 생각할 것도 없이 현재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진화하는 전쟁>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정복을 넘어 선 자리에 환경 파괴가 놓여 있듯이 살상 무기와 보다 효율적인 전쟁을 위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가능한 모든 상상을 현실로 바꾸어 나가고 있다. 그 현재적 의미를 점검해 보는 책이 바로 존 에드워즈의 <진화하는 전쟁>이다.

  ‘미래 전쟁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전쟁은 추악한 것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지는 않다. 그보다 더 추악한 것은 전쟁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부패하고 타락한 도덕심과 애국심이다. 국민은 지배자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군대에서 대포를 쏘고 총검을 휘두르는 하나의 단순한 인간 도구로 사용될 때, 전쟁으로 인해 타락하게 된다”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말로 시작한다. 이 책이 전하는 의미가 미래 전쟁에 대한 환상과 패배를 모르는 군대를 상상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세계 정복이나 끊임없는 욕망앞에 무력한 지배자에 대한 의구심과 저자의 노파심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인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간 사이의 갈등과 폭력은 단위가 씨족에서 부족으로 그리고 국가로 확장되었을 뿐 우리 인간의 역사와 전쟁의 역사는 쌍둥이처럼 같은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복잡하고 분화된 사회에 항상 내재되어 있는 폭력에 대한 유혹과 파괴에 대한 욕망, 즉 전쟁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고찰해 볼 수 있는 반면교사로 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특히 현대사회는 이미 힘의 균형이 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말에 시작된 식민지 경쟁이나 힘의 논리에 의한 세계지배는 그 목적과 효용성에 대한 의문 때문에 재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 전망은 순진하면서도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탈냉전 이후 ‘세계화’의 미명아래 벌어지고 있는 미제국주의는 한층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세계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은 ‘세계 깡패’ 국가가 된 지 오래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오래된 전쟁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진행형인 전쟁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인류라는 종족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한 파워게임인지도 모른다.

  전쟁의 목적이 승리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도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한 현대전은 인명 살상이 목적이 아니라 군사시설의 파괴와 상대방의 지휘 체계의 무력화, 정보와 통제에 의한 지배체제의 구축은 전쟁의 목적과 양상이 과거와는 판이한 양상을 보여준다. 목적이 어디에 있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인명을 최대한 보호하고 적에게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 개발된 무기체제와 의복, 정보통신, 군수 장비의 발전은 눈부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도 군사 목적으로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책은 찾아서 파괴하기라는 제목으로 전술 체계에 대해 설명을 시작해서 정보, 통신, 정찰, 재난 구조, 보건, 의학, 생명공학, 운송, 군수, 보안, 암호기술 그리고 군복과 보호 장비에 이르기까지 전쟁 수행 과정에 동원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점검하고 있다. 대부분 오늘 현재 시점에서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그 실현가능성을 점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과학기술의 발달과 전쟁이 아닌 현실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은 행간에 숨어 있다.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서 읽다보면 독자들이 생각하는, 혹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일들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책을 읽는 목적이 새로운 정보를 얻고 사고의 폭을 넓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높혀주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값을 한다. 주의할 것은 저자의 뛰어난 능력과 높은 안목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야하는 정보들 사이의 연결고리와 상상의 즐거움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전쟁이 없는 미래를 상상해 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인명 살상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쟁 수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 진행 중인 대다수 미국의 전쟁 관련 프로젝트들의 반성적 토대다. 왜 불가능하겠는가? 2010년 실전 배치를 목적으로 진행되?있는 오브젝트 포스 워리어(0bjective Force Warrior)에 비하면 아주 간단하고 쉬운 노력만으로 가능할 지도 모른다. 철학적 반성이 필요한 종류의 책은 아니지만 미래에 대한 환상과 꿈을 전쟁으로 풀어내려는 어리석음을 미리 경계해 본다. 그것은 ‘진화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에 의한 인류의 파멸’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060316-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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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사의 라이벌 -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을 통해 본 고전문학사의 지평
고미숙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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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단어 ‘라이벌rival’의 어원은 ‘강river’이다. 같은 강물을 사용하는 건너편 사람들을 이르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농경과 목축을 하던 시대에 강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아군 아니면 적군이었다. 강을 두고 대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자연법칙을 받아 들이며 살았을 것이다.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삼국시대의 치열한 전쟁은 강의 중요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찍이 고대 인류 문명은 모두 강에서 발원한다. 강을 차지한 자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이 라이벌이라는 단어는 ‘경쟁관계’를 전제로 한다. 서로 긴장하며 발전하는 긍정적 측면과 오로지 승부에 집착하여 상대를 공격하거나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내며 자멸하는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전문학사에서 걸출한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라이벌 관계로 묶을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특히 비슷한, 혹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한국문학사를 관통하는 연속선상의 흐름에서 이해하는 방식보다 이렇게 스타카토로 끊어 읽는 방법은 단편적 사실과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할 수 있어 흥미로운 시도로 보인다.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을 서로 견주어보는 일은 색다른 방법이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 입체적인 방법으로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물의 생애와 사상이 투영된 비교문학적 관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은 삼국시대의 ‘세상과 불화한 두 천재의 갈림길’이라는 부제로 월명사와 최치원을 시작으로 ‘연행예술의 극점을 추구한 두 예술가’ 신재효와 안민영을 비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두 사람씩 묶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배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김부식과 일연, 이인로와 이규보를 비교하는 일은 당연해 보이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관점을 비교하거나 ‘시대의 충돌과 균열’이라는 관점으로 풀어낸 것은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특히 정도전과 권근의 비교가 극적이다.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동지에서 적으로 돌아선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은 흥미롭다. 서거정과 김시습을 비교하거나 김만중과 조성기를 비교하는 내용은 단편적인 내용의 서술과 일관된 관점이 없어 아쉽다. 그 중에서도 ‘유쾌한 노마디즘’으로 박지원을, ‘치열한 앙가주망’으로 정약용을 비교한 고미숙의 글은 가장 돋보인다. 두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문학적 성향의 차이를 정확하고 깊이있게 비교함으로써 동 시대를 살았으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더 안타깝게 만든다. 문장의 탄력과 일관된 설명 방식이 흡인력있게 전개된다.

  정출헌, 고미숙, 조현설, 김풍기 공저로 되어 있으나 고미숙, 조현설, 김풍기는 한 장씩만을 썼고 나머지 여섯 장은 정출헌의 글이다. 책으로 묶이고 보니 전체를 통괄하는 하나의 키워드나 주제가 없고 여러 사람의 공저이다 보니 문체와 문장이 고르지 못한 단점이 있다.

  하지만 색다른 방식으로 고전문학을 이해하는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평면적이고 객관적 사실들만 나열한 역사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문학으로서의 역사속 인물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얻게 된다. 우리 고전을 두루 섭렵한 사람이라면 글 읽는 재미가 배가 될 것이고,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고전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는 책이다.

  텍스트 상호성 측면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두 작품을 묶어내거나 책 두 권을 묶어보는 일은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자칫 단순한 분류 방법으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서로 유사한 속성을 묶어내는 지루한 방식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낯설게 묶거나 짐작할 수 없는 다른 방식의 비교 방법이 필요하다. 작품의 비교 뿐만 아니라 작가가 살아온 삶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문학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작품에 투영되었는지 비교하고 분석하는 즐거움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06032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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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열쇠 - 철학
박이문 지음 / 산처럼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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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사유 방식을 철학이라고 부른다면 철학에 대한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어렵고 딱딱한 그들만의 철학은 나에게 필요치 않다. 학문으로서 연구실에 박제된 철학은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용어와 개념에 대한 논리적이고 복잡한 진술들은 읽는 사람에게 중압감 내지 지적 허영으로 여겨진다.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면서도 사고의 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철학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중요하고 절실하게 필요하다.

  철학자 박이문의 <사유의 열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적절하고 요긴한 책으로 볼 수 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사유하는 인간에 대한 연구와 탐구에 전력을 다한 연륜과 깊이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하다. 적절한 언어의 선택과 개념에 대한 일관된 깊이는 현대인을 위한 철학 사전으로서 손색이 없다.

  우리 인간들 사유의 도구는 바로 언어이다. 언어의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철학이다. 인식의 틀과 사유 방식은 철학의 밑바탕이면서 동시에 완성된 하나의 학문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의사소통의 과정을 겪으며 생각을 공유하고 그 생각의 간극을 메우는 일은 철학의 중요한 역할이다. 우리는 여전히 살며 사랑하며 배우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의 기저에 철학이 존재한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쉽고 명료한 철학에 대한 어원 풀이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풀어나가야 할 나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사르트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언어’와 ‘존재’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고 그 관계를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쳐야 하는 일은 철학자의 몫이지만 그 깊이와 넓이를 확인하고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사유하는 도구를 제공하는 일은 철학의 몫이다. 앎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역할은 언어가 존재하므로 가능하다.

  언어와 사유의 문제에서 시작해서 가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에 의해 서술된 이 책은 단순한 철학 용어 사전과 구별된다. 일목요연한 연속선상에서 우리는 인류의 사상과 인식 방법에 붙여진 이름들에 대해 명징한 언어를 통해 확인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이 책은 단순한 개념과 용어에 대한 지식들의 편린이 아니라 저자 박이문의 ‘주관’에 따라 해석되고 정리된 언어들과 만나게 된다. 득과 실을 판단하고 구별해서 취사선택하는 문제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특징이다. 나는 여기에 높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하나 하나의 개념들을 두 세 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순서에 상관없이 찾아 읽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는 방식을 권한다. 본류에서 뻗어나간 지류들의 미묘한 관계들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 이후에 발간된 ‘과학’과 ‘종교’ 그리고 김성곤의 ‘문학’ 시리즈가 있지만 동일한 성과를 담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성곤 교수에 대한 믿음으로 ‘문학’편을 다음 목록에 올려 본다.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하는 ‘생명’의 계절에 삶에 대한 욕망과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인식보다 먼저 인간에 대한 성찰과 실존의 문제는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매년 반복되는 계절의 흐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 속에 내던져진 존재는 감성적 비애를 자아낸다. 개인의 존재가 사회적 존재로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을 되짚어 본다.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길잡이’라는 부제가 붙은 박이문의 <사유의 열쇠>는 인간의 ‘정체성’을 성찰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류의 지성사를 일별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 방에 들어가는 조그마한 열쇠 하나를 제공한다. 손에 잡힌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 무엇을 보고 어디에 앉아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는 물론 독자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060306-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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