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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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를 열자, “21C 말에는 즐거운 블루스를 출 수 있을까? - 96年 가을에.”라는 파란색 볼펜의 글씨가 한 줄 선명하다. 신현림의 오래된 시집을 꺼내본다. 비닐 코팅된 표지는 괜찮지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책 윗부분은 벌써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잊었던 그녀의 시편들이 살아 움직이는 옛날 시집을 뒤적이며 <세기말 블루스>를 통독한다. 첫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고 외치던 그녀는 2년만에 <세기말 블루스>를 추자고 덤볐었다. 미술을 전공하려다 그녀의 표현대로 ‘4수끝에 편안하게(?)’ 국문과에 입학한 그녀는 여전사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었다. 나도 20대였고,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끝장내고 싶었던 시절이었고, 세기말과 상관없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지독히 몸을 떨어야했던 시절이었다.

     자화상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 <세기말 블루스, 1996>중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끝으로 10년 가까이 시를 버렸던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짐짓 나이를 먹지 않은 듯 예전의 나를 기억해 달라는 듯,

  가난과 설움을 넘어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허기진 생활의 멜로디여
  아슬아슬한 나날의 쌀자루여
  낡은 육신의 그물을 던지는 나와 너여 -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중에서

  라고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시작한다. 그러나 “무섭게 흐르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 시간/ 달리는 바다는 달리지 않는 바다/ 시간이란 아예 없는 겁니다/ 최대의 재산인 꿈이 있을 뿐이죠”라는 신파가 시작된다.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요”라거나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고 말하는 대목들을 읽다가 울컥 짜증이 밀려온다. 시를 읽는 행위는 정교한 언어에 대한 최고의 상찬이라고 믿는다. 시간이 남아돌거나 사춘기 소녀의 취향으로 겉멋을 내기 위한 현학취가 아니라면 누가 이 시대에 시를 읽는가. 신현림은 지독하게 고생을 했는지는 몰라도, 시에 대해 고민은 하지 않은 흔적이 역력하다. 긴 시간의 공백이 주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어차피 시가 개인의 내밀한 고백의 형식이라는 변명은 할 수가 없다. 그것이 보편성을 담보하지 못했을 때 감당해야할 무게는 만만치가 않다. 싱글 맘 시리즈의 시편들은 점입가경이다.

  “그는 밥 속에 헝그리 정신을 비벼 넣고 싱글 맘으로 희망의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여성의 슬픈 등에 꽃을 피운 이 시집을 우울한 육체 위에 한 땀 한 땀 새긴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평한 천양희 시인의 생각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헝그리 정신을 비벼 넣으면 희망의 폭풍이 되는가? 배고픈 싱글 맘은 저절로 눈물과 페이소스가 뒤섞인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페미니스트가 되는가? 비극과 비장이 뒤섞여 춤을 추고 시의 형식을 빌어 신세 한탄에 가까운 일기가 되어 버렸다. 그녀의 시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큼이나 매정하게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퍼렇게 날선 감각과 세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 대담하고 솔직한 화법이 주는 신선함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았나 다시 찬찬히 들여보지만 별로 건질게 없다. 실망이다.

  인간의 가장 응축된 언어 형식으로서 시가 가지는 미덕은 읽는 사람마다 미감이 다르겠지만 일단 애정을 가지고 시를 대하는 나같은 독자가 가끔씩 지독한 혐오를 내뱉는다는 것은 염려스러운 일이다. 10년전에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고 끝냈어야 했다. <세기말 블루스>가 10만부가 넘게 팔렸었다. 부담이 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는 이제 그만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또다시 그녀의 시집을 사는 일은 없겠다. 치열한 세상살이와 민감하고 도전적인 의식들로 사진을 찍고 에세이를 써내는 것이 훨씬 더 큰 울림과 감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200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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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봉감별곡 : 달빛아래 맺은 약속 변치 않아라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5
권순긍 지음 / 나라말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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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영원한 주제일 수밖에 없는 남녀 간의 사랑은 진부하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으며 늘 새로운 형태로 전달되고 해석되어 감동을 전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관점으로 ‘단순’하거나 ‘뻔한’ 이야기로 치부될 수 없는 우리 고전소설의 아름다움은 당대의 가장 소중한 진실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춘향전이나 운영전보다 훨씬 애절한 사랑노래가 <채봉감별곡>이 아닌가 싶다. 소극적, 수동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운명과 사랑을 지키려 노력했던 춘향이나운영이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모순된 당대 현실과 제도를 온몸으로 거부한 채봉이야말로 우리 고전문학사의 가장 현대적 개념에 근접한 여인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달빛 아래 장필성과 김채봉은 한 눈에 반하게 되고 서로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긴 시간동안 시련을 극복하고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당시의 매관매직에 의한 뿌리 깊은 사회적 부패 현상과 기생제도에 대한 인권문제 등은 조선 후기 사회에 나타난 민중들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고난을 겪은 사랑일수록 더 값지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채봉이가 보여주는 눈물겨운 투쟁(?)과 적극적인 운명 개척의 정신이다. 소설의 전면에서 허판서의 첩으로 살게 될 운명을 거부하고 아버지를 구해내며 자신의 사랑까지 지켜나가려는 채봉의 적극성은 봉건시대 한국적 여인상이 지닌 미덕 아닌 미덕을 거부한다.

  평양감사의 업무 보조로 일하던 어느날 가을 달빛에 젖어 써내려간 ‘추풍감별곡’이라는 가사의 이름에서 ‘채봉감별곡’이라는 소설 제목이 연유하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설속의 장편 가사 ‘추풍 감별곡’은 당시 민중들의 애절한 사랑노래를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눈앞에 온갖 것이 모두 다 시름이라
  바람에 지는 낙엽 풀 속에 우는 짐승
  무심히 듣게 되면 관계할 바 없건마는
  이별의 한 간절하니 소리소리 수심이라
  굽이굽이 맺힌 시름 어찌하면 풀쳐낼고
  아해야 술 부어라 행여나 시름 풀까
  잔대로 가득 부어 취토록 먹은 후에
  석양산길로 을밀대 올라가니
  풍경은 예와 달라 만물이 쓸쓸하다 - ‘추풍감별곡’ 중에서


  이 시리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책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정보쌈지이다. ‘조선시대의 사랑’, ‘기방풍경’, ‘19세기 매관매직의 실태’, ‘고전소설 속의 여인들’, ‘평행기행’ 등 쉽고 재미있는 정보 페이지를 삽입해서 간단하지만 알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 속 배경지식들을 덤으로 얻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전국국어교사 모임 ‘나라말’ 출판사에서 고전읽기 다섯 번째 시리즈로 출간된 <달빛 아래 맺은 약속 변치 않아라>를 받아 들고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읽었다. 이 책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맡은 김은정씨를 비롯해서 전편을 번역했던 조현설, 신동흔 선생님등과 마지막 출판위원회를 열었던 지난 여름이 생각났다. 대학로에서 늦도록 술을 마시고 광화문에서 심야좌석을 탔던 기억이 새롭다. <함께 여는 국어교육> 여름호가 도착했으니 진짜 여름이 시작된듯 싶다. 반가운 선생님들의 글들과 고민들이 반갑다.

  우리 고전에 대한 이해와 깊은 애정은 한국문학에 대한 뿌리와 바탕을 이룬다. 정확한 해석에 의한 판본이 없어 쉽고 재미있는 우리 고전이 고전(苦戰)을 면치 못하거나 과소 평가되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정확하고 재밌는 시리즈를 기대하며 숨어 있는 고전읽기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으면 싶다.



200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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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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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구름의 장막을 걷어내듯 시원스레 퍼붓는 소나기처럼 읽혔다. 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려’ 본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눈물이 날 뻔 했던 책들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다가……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지금까지 학교만 다녔다. 배우러 그리고 가르치러 뻔질나게 학교 교문을 드나들며 난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가르쳤나하는 자괴감에 눈물이 날 듯 했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넘어 이 사회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표현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실천이다’는 J. 네루의 언설로도 설명될 수 없는 내면의 고백이었고 삶에 대한 개인적 목표로도 설명될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 칼마르크스(Karl Marx) <루이 보나파르트 브루메어 18일>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평생을 바쳐야 하는 사업이다.
    -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탱크레드>

  라는 명제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시작된다. 사이드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학문과 영국의 수상이었던 디즈레일리로 대표되는 정치를 통해 지식과 권력 - 앎과 힘의 관련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두 가지의 인용이 이 책에서 비판되는 오리엔탈리즘의 두 가지 속성 - 인식과 실천을 대변하고 있다.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자 지배방식’이다. 이것이 어떻게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와 식민 정책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실증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발생, 발전, 전개라는 논리에 따라 3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박홍규의 번역이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저자인 사이드는 문학평론가이다.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이주한 사이드는 카이로에 있는 빅토리아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과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는다. 그의 삶의 행로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을 아우른다.

  사이드의 관심이 그의 생과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것처럼 이 책에서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7, 8세기부터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적 근원을 파헤치고 실증적 자료와 문헌들을 통해 그 허구적 성격을 사이드 특유의 해박한 지식과 번득이는 예지로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은 역사서도 아니고 사회비평과 관련된 개설서도 물론 아니다. 그저 사이드가 제시하는 비판적 관점을 따라가며 인간의 성향과 속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까지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누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러한 현상들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제대로 눈뜨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수많은 질문과 반성을 유도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취급되는 크로머의 <현대 이집트>라는 책은 일본에서 1911년에 번역되어 한국지배의 기본이 되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멀리 존재하는 그들만의 논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 속에 가시처럼 박혀, 치유되지 않은 생채기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현재에도 더욱 유효하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문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등 숱한 현실적 문제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은 관습화되어 생활과 사고방식 곳곳에 숨어 삶의 목표와 사유 방식 자체를 통제하고 변질시킨다.

  유럽에게 이슬람은 치료될 수 없는 정신적 외상(trauma)이었다. 17세기말까지 ‘오토만 제국의 위협’이 유럽의 주위를 둘러싸서 모든 기독교 문명에 대한 끝없는 위험을 표상했다. 곧 유럽 문명은 그러한 위협이나 전설도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도 미덕이나 악덕도 모두 병합하여, 스스로의 삶의 옷감 속에 짜넣어 흡수했다. (본문 117페이지)

  처음부터 논의의 초점이 명확하고 문학가로서 지성과 비판 정신으로 무장한 사이드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한 권의 책에서 모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슬람 국가 이외의 지역이 논의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이 편협하다고 볼 수도 없다. <오리엔탈리즘>은 지구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종교인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대립과 갈등 측면에서 문헌학적 전개과정을 고찰하고 있으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떤 식으로 동양인들에게 자리잡고 있는가하는 논의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책을 맺고 있다.

  내가 독자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은, 오리엔탈리즘?대한 해답이 옥시덴탈리즘 곧 서양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동양인’은 자신이 이전에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쉽게 - 너무나도 쉽게 -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동양인’ - 곧 ‘서양인’ - 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도, 아루런 거리낌도 없을 것이리라. 만일 오리엔탈리즘을 아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식이 유혹에 의해 타락한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점이다. 설령 그것이 어떤 지식이든지 간에또는 어떤 곳, 어느 때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필경 과거 이상으로 지금이 그것을 생각하기에 적합할 것이다. (본문 570페이지)

  이후에 1995년판 후기가 이어지고 박홍규의 ‘옮기면서’라는 역자 후기가 붙어 책은 800페이지에 달한다. 흥미있는 것은 1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박홍규 교수의 ‘옮기면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인적으로 이 책이 나에게 빛이 되는 이유는, 본문은 물론이려니와 박홍규의 적절한 역주, ‘옮기면서’에서 보여주는 냉소주의에 가까울 정도의 신랄한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삐딱한 지성이 내지르는 허튼 소리가 아니며 덜떨어진 얼치기 교수의 사회 비판적 투정의 목소리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심각한 경고의 목소리로서 내 영혼을 울리고 갈고리처럼 살을 후벼 파는 자성의 목소리로 삶의 자세와 태도를 되돌아 보게 한다.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박홍규 번역의 증보판 <오리엔탈리즘>에 최고의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오래 간직하고 두고 볼만한 좋은 책 한 권을 책꽂이에 더하는 기쁨은 덤으로 얻었다.


2005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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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기의 방법
유종호 지음 / 삶과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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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시인의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 시집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 노래와 음악을 즐겨 시가(詩歌)문학이 발달할 수 밖에 없는 전통과 환경을 가진 대한민국의 대표선수를 뽑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다. 유종호 선생은 한용운부터 신현림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50명의 한국시 대표선수와 대표시를 선별하여 독자들에게 <시 읽기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대표시 한 편을 소개하고 쉽고 간략한 해설을 덧붙이고 그 시인의 다른 작품 한두편을 더 소개하면서 시인의 특징과 내력을 간략하게 소개하여 시에 대한 흥미와 더불어 시 자체에 대한 호감과 정서적 반응을 훈련(?)시키는 잡지의 연재물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노교수의 수고와 세월이 묻어나는 새로운 이론서이거나 나름의 독특한 방향 제시를 기대하고 직접 책을 뒤적여 보지 않고 주문한 것은 개인적인 실수이다. 책을 주문한 목적과는 차이가 있으나 일반 독자에게 시를 소개하는 방법과 안목, 쉬우면서도 탄탄한 문장은 나무랄 데가 없다.

  다만 월간지에 연재되었던 글이라서 그런지, 앞부분과 뒷부분에 시에 대한 관점과 소개가 겹치고 있는 것이 흠이다. 또한 시에 대한 주관적 호감과 해설이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가장 나쁜 책이 될 것이다.

  “시는 이해(理解)되기 전에 전달(傳達)된다”는 T. S. Eliot의 말은 내가 시를 대하는 기본 태도이다. 해석과 분석은 어찌보면 남의 생각 들여다 보기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열린 시각의 확산이다. 특히 한 편의 시를 읽고 음미하며 감상하고 내것으로 소화하는데 설명과 방법이 있다는 것에 나는 반대 입장이다. 물론 시는 어렵고 딱딱한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시를 싫어하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소개된 ‘시 읽기의 방법’이겠지만 지나친 해설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이 책은 그런면에서 나름대로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시문학의 대가들을 골고루 다루고 있으며, 그들 시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분석적 설명을 지양하고 있어 성공적이다. 반면 앞서 말한대로 한 편의 시든 그 시인의 다른 시이든 하나의 관점과 목표를 가지고 시를 대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을 독자들에게 심어 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실패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래도 시를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생활이 힘겹고 팍팍할 때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는 혹은 촌철살인의 한마디로 의표를 찔러주는 다양한 시들을 찾아 읽는 재미는 문학의 다른 장르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임에 틀림없다. 소개된 50편의 시 중에서 찾아낸 내가 공감하고 재밌게 있었던 시 한 편은 다음과 같다.

 


      오늘의 노래 - 故 이균영 선생께

  심야에 일차선을 달리지 않겠습니다.
  남은 날들을 믿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할 일은, 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건강한 내일을 위한다는 핑계로는
  담배와 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헤어질 때는 항상
  다시 보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겠습니다

  아무에게나 속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심야에 초대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신도시에서는 술친구를 만들지 않겠습니다
  여자의 몸을 사랑하고 싱싱한 욕망을 숭상하겠습니다
  건강한 편견을 갖겠습니다
  아니꼬운 놈들에게 개새끼, 라고 바로 지금 말하겠습니다
  완전과 완성을 꿈꾸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여 늙어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 살아 있음을 대견해하겠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견디기를 더 연습하겠습니다
  울지 않겠습니다

                                        - 시 : 이희중




200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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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속 여행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1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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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장르가 어차피 허구의 세계라면 인간의 상상력을 극대화시켜주는 내용이 가장 소설다운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쥘 베른의 소설들은 시대를 앞서고 있다. 1828년 프랑스 항구도시 낭트에서 태어나 1905년에 사망할 때까지 쥘 베른은 끊임없이 현실밖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상상력을 표현해 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이제 고전이 되어버렸고, <해저 2만리>와 <달나라 탐험>은 CF의 카피가 되어 작가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경우이다. 과학에서 ‘문학적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하는 실례로서 그의 소설은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단순히 SF 과학소설로만 볼 수는 없다.

  쥘 베른 컬렉션 첫 번째 작품으로 열림원에서 번역한 <지구 속 여행>은 재미있다. 다시 한번 번역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신춘문예에 관심이 있었던 고교시절 <이상의 날개>라는 작품으로 등단한 김석희의 소설을 꼼꼼히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그는 전문 번역가로서 이름만 보고, 믿고 고를 수 있는 번역서들을 수없이 쏟아내고 있다. 150여년 전 작가의 상상력은 지금도 나를 즐겁게 한다. 지구의 중심으로 떠나는 황당(?)한 여행이 아이들에게만 흥미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쁜 일상과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이 시대 어른들에게 잠시나마 휴식과 여유를 즐기게 할 것이다.

  ‘1863년 5월 24일 일요일’이라는 특정한 시간으로 소설을 시작한 것은 내용의 신뢰감을 주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보인다. 19세기 중반, 종교와 과학은 이미 대립을 넘어 주도권을 완전히 과학이 잡게 된 시기였다. 쥘 베른은 당시의 발달된 과학 지식을 총 동원하여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생물학과 지질학을 비롯하여 온갖 과학적 상식과 당시로서는 최첨단 장비들을 동원하여 지구 속 탐험을 떠나는 주인공들에게 독자들은 신뢰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여로형 구성법의 전형인 이 소설은 인간의 상상 이외에는 접근할 수 없는 지구 중심으로 떠나는 여행을 보여준다. 주인공 리덴 브로크 교수와 그의 조카, 그리고 충직한 한스는 완벽한 3인조 여행단이 된다. 나레이터는 조카인 나의 시점이다. 물론 관찰자의 역할만 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도적인 역할에서 한발 빗겨선 모습에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인 독자들에게 가깝고 그것이 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소설의 시작은 추리 소설처럼 시작된다. 룬 문자로 구성된 양피지 한 장이 고문서 속에서 발견되고 그 암호문을 해독하는 것으로 여행은 시작된다. 그런데 이 암호문의 비밀이 재밌있다.

  근대의 과학자들도 종종 자신의 발견을 애너그램으로 감춰두곤 했다. 왜? 한편으로는 종교적 검열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가 한 발견을 오랫동안 자기 혼자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는 경쟁적으로 발견이 이루어지던 시대. 나중에 발견의 우선권을 주장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겨야 했다. 공개를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상황. 감추면서 드러내는 애너그램의 이중성은 이 고민을 간단히 해결했다. -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진중권, 휴머니스트, p188>

  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애너그램으로 감추어진 문서는 아르네 사크누셈이라는 학자의 암호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단으로 박해를 받았고, 그의 저술은 1573년 코펜하게에서 모조리 불태워졌다. 그래서 그의 책은 아이슬란드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 양피지 한 장이 그의 문서 전부인 셈이다. 암호문에서 힌트를 얻은 리넨브로크 교수는 조카를 데리고 ‘지구 속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행을 준비하고 땅 속으로 들어가기 전의 준비과정이 소설의 3분의 1쯤 된다.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긴장감이 결여될 수 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이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잊고 살았던 유년의 추억과 상상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인디애나 존스’로 대표되는 헐리우드의 환타지 모험 영화들은 모두 쥘 베른에게 빚지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동화속 꿈의 세계를 꿈꾸며 현실이 아닌 허공에 발딛고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모두에게 필요한 삶의 에너지가 아닐까 싶다. 그 꿈들이 우리에게 넉넉하고 여유있는 마음을 나눠주다면 왜 거부하겠는가. 다음에는 우주로 여행을 꿈꿔봐야겠다.


200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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