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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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는 눈을 뜨면서 잠들 때까지 길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의 모든 생활은 경제학이다. 학문 영역에 기초한 영역이 아니더라도 경제와 관련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정도이다. 우리 생활은 경제와 그만큼 경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특히 ‘세계화’라는 괴물이 등장한 이후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은 전지구화와 세계화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잣대는 모호하기만하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 준거 틀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이해되었지만 판단 기준도 모호할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과의 관련성 측면에서도 반성적 성찰이 심각하게 요구되고 있다.

장하준과 정승일의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현 시점의 한국경제에 대한 거시적 관점의 문제제기였다. 이번에 출간된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Globalization, Economic Development, and the Role of the State>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진단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한 반박은 반드시 대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논의의 초점을 이끌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득력을 지닐 때가 있다. 물론 이 책에서는 대안도 제시되어 있다.

성장과 분배에 대한 지루한 논쟁, 경기 부양과 투기 억제에 대한 우려가 현재 우리 경제의 가장 거시적인 논쟁거리라면 이 책은 그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특히 ‘국가’와 ‘정부’를 중심으로 현안들을 점검하고 있다. 분명히 다른 ‘국가’와 ‘정부’를 구분없이 사용하는 것은 논의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혼용되고 있지만 모호하던 부분에 대한 명쾌한 설명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국가의 경제 개입을 부정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이나 탈정치화론의 기반인 객관적 시장 법칙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독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를 바라보는 관점을 이 책에서 빌려 올 수도 있다. 갈등 조정자로서 국가의 역할을 돌아보고 자유 무역 협정이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과 파장에 대해서도 온 국민이 심각하게 고려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강건너 불구경 수준의 현실 인식과 대응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온 국민이 한미 FTA 반대 시위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세계 경제의 미국화에 팔을 걷고 나선 것처럼 보이는 정부의 태도에 대해서는 분명한 점검과 대안이 필요하다. 어차피 국가간 자유 무역은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기업 경영 차원의 협력이 아닌가.

초국적 기업이나 거대 자본에 의한 경제 개발국과 구사회주의 국가의 예속적 경제 시스템은 국민 경제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정부의 개입과 규제는 시장에 부정적 영향만을 미치는가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정부와 기업 사이에서 국민들은 미래를 그들에게 맡겨야만 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과 반성도 필요하다. 이 책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쟁점들을 우리는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현실에 반영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냉소적인 시각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4장의 경제 발전에서 지적 재산권의 역할과 9장 개발도상국에서 공기업의 효율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근무한다고 해서 객관적일 수는 없겠지만 우리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상황들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부분들은 모호하던 개념과 상식이라고 믿었던 부분들에 대한 점검과 고민을 요구한다.

지난 50여년의 경험을 통해 확신할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세계는 우리가 믿거나 바라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실체라는 것이다. - P. 368

국가나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 경제 부분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 책 한권이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판단하는 것보다 세계는 훨씬 더 복잡한 실체라는 사실이다. 단선적인 기준과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판단력과 정책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 조차도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이라는 부제에 걸맞는 이 책이 ‘우리 모두’에 방점이 찍힐 수 있는 경제학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누구에게 바라는가. 지금 현 정부에? 아니면 미래의 정부에?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부분들에 노력과 성찰로부터 대안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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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가봐요. 저는 경제라면 너무 어려워서 잘 접근을 못하거든요. 잘 읽고 갑니다. 아 그리고 저도 쾌도난마 한국경제 읽은 기억이 나네요.

sceptic 2006-12-0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외한이라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어렵기는 저도 마찬가집니다. 쾌도난마에 대한 강렬한 인상때문에 장하준의 책을 또 읽게 되었습니다.

비로그인 2006-12-0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기 부양과 투기 억제는 초미의 관심거리이지만 서민의 입장에서는 손놓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 답답합니다.

sceptic 2006-12-08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부를 압박하고 시민운동이나 다른 방법들을 동원해서라도 적극적인 의견 제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결국 방법과 실천의 문제가 남습니다. 제대로 된 눈으로 감시하는 역할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최소한 FTA 반대 집회 때 차 막힌다고 불평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외로운 발바닥 2007-01-16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절반쯤 읽었는데 논문적 성격이 있어서 쾌도난마 한국경제처럼 쉽게 읽히진 않더군요. 잠들기 직전 읽으려 했더니 몇 페이지 못 읽고 졸려서 아예 공부하듯이 집중해서 읽으니 잘 읽히더군요. ^^; 책을 읽으면서 제 머릿속에도 시장 우선주의적인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여러번 놀라고 있습니다.

sceptic 2007-01-17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몸에 익숙하게 배어버린 습성들에 새삼 놀랐습니다. 집중해서 읽어야 할 책이죠.
 
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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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는 1992년에 유고로 출간되었다. 빛바랜 누런 책표지는 책꽂이 한 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세월을 감내하고 있다. 그 시절이 생각나면 가끔 꺼내 뒤적여 보는 책이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쓴 김현의 일기 형식의 글을 책으로 출간했다. 책날개에 어딘가를 응시하는 선생의 표정이 여유롭다. 48세의 나이로 작고한 선생의 글을 좋아했다.

장정일의 <공부>는 그가 펴냈던 <독서일기> 7권에 해당한다. <공부>라는 제목과 주제별로 묶인 제목들은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라는 가당찮은 제목은 씁쓸하기만 하다. 인문학이 고사 위기라는 이야기가 심각하게 대두되었고, 인문학 교수들이 위기 선언을 할만큼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 풍토가 척박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책 한권으로 부활이 가능한가? 그렇다 치더라도 부활 프로젝트와 거리가 멀고 그저 개인의 내면적 고백과 ‘공부’ 과정일 뿐이다. 상업적인 냄새가 나는 수식어와 선정적인 제목에 알러지 반응이 있는 나로서는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냥 <독서일기 7>이면 어떤가? 물론 이전의 책과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면 그 특성을 책의 내용과 편집에서 살리면 그뿐이다. 독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심히 불쾌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장정일에 대한 개인적인 호의와는 무관하게 책 한 권이 주는 느낌은 각양각색이겠지만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기분 나쁘다.

한겨레의 고명섭 기자가 쓴 <지식의 발견>이 이 책과 유사하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대표적인 저작을 중심으로 작가들의 상이한 관점을 비교하고 하나의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작년에 읽은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좋은 책이다. 이 책도 유사한방식과 관점을 지니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객관적이고 분석적인데 비해 이 책은 보다 주관을 많이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보다 친근하며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설득력은 떨어지고 핵심이 없이 책 내용의 요약과 설명으로 그치는 경우도 있다.

책 한 권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그간의 독서이력에 대한 정리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장정일의 내밀한 감성도 느낄 수 있고 역사와 사회에 대한 견해도 엿볼 수 있으며 정치와 세상에 대한 의견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다. 책의 본문에서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는 하이데거의 존재자를 설명하지만 실천으로 육화되지 못하고 인식에 대한 방편으로 그친다. 예를 들어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노당을 찍지 못했다는 고백은 실소를 자아낸다.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경험과 고백들은 그가 인식한 세상과 책의 내용과 뒤섞이지 못하고 행간에서 불협화음을 이룬다. 나만의 느낌일까?

이 책의 목적이 인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반쯤 성공했고, 반쯤 실패한 것으로 본다. 얼 쇼리스의 책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최근 출간된 그의 책은 미국에서 노숙인에게 삶의 희망과 메시지를 전하고 세상을 바로 보는 안목을 전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던 실천가의 책이기 때문에 관심이 간다. 인문학 자체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우리들 삶과 연결된 생생한 경험담이나 실천적 모습들이 더 필요하다. 그냥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면 공허한 울림으로 그치고 만다.

역사와 철학을 통해 세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대학에서 보다 철저하게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교양을 섭렵할 수 있도록 하고 고교 과정에서도 테크닉 위주의 논술이 아니라 비판적인 안목과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만 수행할 수 있는 논술 문항의 개발도 필요하다. 공부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과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한 목적과 의도로 책 제목을 정했으리라는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감동적인 책을 만났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서 조금 아쉽다.

<나비와 전사>에서 고미숙이 절규했던 것처럼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방법과 과정들을 소개하는 책과 프로그램들이 보다 많이 제시되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제도권 교육에서부터 평생 교육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노력만으로 공부하기엔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보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거나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목마르게 기대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공부는 학생이나 하는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할 수 없지만 ‘철학아카데미’나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같은 방식이 아니더라도 다양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문학의 대중화가 필요하다.

어쨌든 장정일의 <공부>를 읽고 다같이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중학교 중퇴라는 객관적 학력과 무관하게 내공을 연마하며 공부하는 그의 태도에는 늘 부러움과 응원의 감정이 깔려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만난 그가 통렬하게 비판하는 시인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김수영의 시를 인용하며 글을 쓰지 말고 시와 시인에 대한 독설을 멈추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했다.

생각나는 대로 떠드는 이런 종류의 리뷰도 장정일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함께 공부할 자세가 되어 있는 독자의 애정 어린 투정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장정일도 나도 열심히 공부하는 일만 남았다. 여전히,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06120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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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2006-12-04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 장정일이 2002년 대선 때 이회창을 찍었다는 말이 '공부' 몇 페이지에 나오나요???

           아무리 봐도 없던데...?

           님의 오독이거나 아님 상상?

 

 


sceptic 2006-12-05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한글 미해득? 잘 찾아보세요. 안가르쳐 드립니다. 분명히 나오니까 다시 읽어보세요. 별 쓰잘데 없는 내용을 가지고...오독이나 상상? 우습네요. 논쟁거리가 될만한 얘기를 하세요...

다시 읽고 못 찾았다면 정중하게 요구하시죠. 그러면 정확한 페이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햄릿 2006-12-0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하지 않은 말을 지어내서 한다면 충분히 논쟁거리가 되죠.
제가 아무리 정중하게 부탁해도 님은 페이지를 적시하지 못할 겁니다.
장정일을 한권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장정일이 이모씨를 찍었으리란 상상은 하지 못할 텐데...

sceptic 2006-12-05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중하게 말씀하시니 저도 예의를 갖춰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햄릿님은 <공부>를 읽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페이지를 적시하지 못할거라는 확신을 하시는지...책이 집에 있습니다. 오늘을 넘기지 않고 정확한 페이지와 장정일의 글을 그대로 올려 놓겠습니다. 장정일의 성향을 아는지라 저도 놀랐습니다. 장정일을 제대로 한 권이라도 읽은사람이라면 누구도 좀 놀라겠지만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은 그리 중요한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햄릿님이 기분나쁜신게

1. 책에 없는 말을 제가 올려놨다고 생각하시는건지,
2. 장정일이 이회창을 찍은건지,
3. 책에 대한 부정적 리뷰인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소모적인 논쟁은 이쯤에서 접어주시죠.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sceptic 2006-12-05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 191페이지, 197페이지, 260페이지 참조.

2002년 대선에서 장정일이 이회창을 찍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이에 햄릿님(장정일님으로 추정되나 어떤 분인지 알수 없어 궁금함)께 정중하게 사과드리고 리뷰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1. '부서진 손잡이'는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개혁과 민주를 미끼로, 개혁과 민주를 열망하는 대중의 표를 도둑질해 가는, 제도 정당이다! 부르주아 정당이 희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표를 찍는 나의 어리석은 투표양식이다! - 본문 191페이지

2. 이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앞으론 반드시 고려하겠다. - 197페이지

3. 탄핵 정국 속에서 실시된 17대 총선에서 필자는 민주노동당을 찍지 못했다. - 260페이지

1번 내용으로 미루어 2002 대선에서 이회창이나 노무현을 찍었을 거라는 암시를 제가 '노무현'이 아닌 '이회창'으로 표현한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그러나 3번 내용에서 보듯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민노당을 찍지 못했다는 장정일의 글을 보고 자연스럽게 '부르주아 정당'인 한나라당과 연결시킨 것은 저의 오독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 제 변명입니다.

직접 표현하지 않은 부분을 리뷰에 올린 것은 저자에게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풋내기 시인이었던 시절부터 애정을 가지고 읽어왔던 장정일의 글들과 내가 미루어 짐작했던 정치적 성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실망감의 표현이었습니다. 민노당스러운(?) 작가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과 불평으로 쓴 글입니다. 민노당이 아닌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은 당명만 다를 뿐이라는 개인적인 판단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장정일씨.

햄릿 2006-12-05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 우리당도 부르주아 당이죠...
장정일의 글을 좋아하는 애독자일 뿐입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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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은 심장을 동경하듯이 인간의 유전자에는 폭력이 내재해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영화 <뮤직박스>를 거쳐 <인생은 아름다워>, <베를린 천사의 시>,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피아니스트>에 이르기까지 난 주로 각색된 이미지를 통해 아우슈비츠를 기억했던 것이다. 사실에 바탕을 둔 역사적이고 체계화된 방식으로 유대인 학살에 대해 공부하지 못했다. 이 책 저 책을 통해 단편적으로 혹은 인상적으로, 피상적으로만 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현실이고 나의 역사 인식의 한계이다.

그래서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아픈 기억을 훑어내듯이, 차마 감았던 눈을 다시 뜨듯이 지나간 시간을 들여다 볼 때가 있다. 간접적인 추체험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 대학에 들어가 광주 비디오를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그러했다. 이후 크게 심호흡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절규와 혼돈으로 가득했으며 비관적 전망으로 암울했다. 지금도 기본적인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과장일까?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살아 숨쉬는 보고서이다. 그녀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뒤 1933년에 프랑스에 망명한 뒤 1941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 한나 아렌트는 2차 세계 대전의 포화를 피해 떠난 수많은 유대인 중 하나였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 지식인 계층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남긴 논쟁거리는 여전히 잠재워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의 말미에 언급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이다.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이 개념은 아이히만 개인의 문제에서 인류에게 내재해 있는 보편적 원리의 개념으로 바꿔버린 데 있다.

히틀러나 괴벨스, 아이히만으로 대표되는 개인들의 경악할만한 범죄 본능이나 야만적 폭력성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저자의 개념이 얼만큼 커다란 후폭풍을 일으켰을지는 짐작이 간다. 어쨌든 정치 철학의 지평을 연 그녀의 저작 중 가장 대중적이고 쉽게 읽히는 책이라는 데 위안을 가지고 책장을 열었다.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비밀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다음 해에 예루살렘 지방법원에서 독일인 변호사 세르바티우스 박사의 도움을 받아 재판을 받지만 교수형에 처해진다. 예정된 수순을 밟듯 진행된 재판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mankind of crime)와 인간성에 대한 범죄(humanity of crime)라는 미묘한 관점을 짚어내는 저자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인다. 그녀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미국에서 이 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날아간 저자의 생각은 <뉴요커>에 게재된 이 책의 내용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이히만을 통해 국가 권력에 의한 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450만에 600만으로 추정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대학살의 책임을 몇몇 개인에게서 찾는다는 것 또한 희극에 가깝다. 유리 상자 안에 들어앉아 원숭이처럼 살아남은 자들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아이히만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분노를 먼저 확인하게 되는 것이 이 책의 의미이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과정과 방법은 이 책에서 부수적으로 다루어진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에서 확인된 사실들을 재삼 언급하지도 않는다. 15여년이 흐른 후에 뒤늦게 체포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저자에게 새로운 의미로 보여졌을 것이다. 미국에서 건너간 그녀의 시선은 동족을 살해한 살인자의 재판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 아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는 여기에 있으니 직접 확인해 볼 일이다.

전체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추방, 수용, 학살로 이어지는 3, 4, 5장이 잘 알려진 내용이고 나머지 부분들은 아이히만의 활동과 행동 반경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헝가리, 스로바키아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이 참여한 이송과 학살센터에 관한 증거와 증언들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아이히만에 대한 판결과 항소 그리고 처형으로 끝을 맺는다.

한 번 시도된 악은 반드시 인류에 의해 재발할 수 있다는 그녀의 후기가 섬뜩하게 읽힌다. 난징 대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등 헤아릴 수 없는 학살의 예가 있다. 얼마나 죽었나가 문제가 아니라 왜 죽였냐가 문제다. 명분이 무엇이든 방법이 어떠하든 여전히 계속되는 폭력과 살인은 어쩌면 인간의 원죄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역사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단순한 교훈만이 아닐 것이다. 예루살렘에 나타난 아이히만을 바라보며 우리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아이히만을 말이다.


06113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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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악의 평범성 : 희생양 제의 뒤 추악함들에 대한 묘사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006
    from Fly, Hendrix, Fly 2009-07-07 14:48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한길사 PD저널 헨드릭스의 책읽기 2009년 7월 4일 지행네트워크의 예사인(예술, 사상-사회, 인문) 세미나의 두 번째 책은 한나 아렌트의 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한길 그레이트스트 북스에서 나온 책을 완독했다. 책은 손의 질감과 눈으로 느끼는 두께보다 훨씬 빽빽했다. 다른 사회과학서를 읽을 때 보통 시간당 100페이지를 읽는 데, 이 책은 시간당 30페이지 읽기가 쉽지 않..
 
 
짱꿀라 2006-12-01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악에 대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주시는군요. 기독교에서는 악이란 과녁을 벗어난 것이라고 하던데요. 저는 아직도 악이란 정말 잘 모르겠더라구요. 한달 밖에 남지 않은 올해도 좋은 일 많이 생기시고 잘 마무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sceptic 2006-12-0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12월이니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소리 들립니다. 님도 건강하고 행복한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kleinsusun 2006-12-0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치와 아우슈비츠를 "각색된 이미지"로만 갖고 있어요.ㅠㅠ
미루고 있었던 책인데, 님의 글을 읽고 보관함에 넣었어요. 감사합니다.^^


sceptic 2006-12-02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말씀을요...많이 긴장하지않고 편안하게 읽어볼만 합니다. 즐거운 독서하세요.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문학과지성 시인선 323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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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당신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구해 빈 터를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깊이 숨은 것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마종기의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에는 켜켜이 먼지 묻은 시간들과 세월의 흔적이 많이 묻어난다. 낡고 오래된 것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 쉽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들은 그렇게 특별한 모습이 아니다. 비루하고 누추한 모습으로 다가서기도 하고 신산스런 표정으로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래도 이렇게 책을 읽고 내일을 기다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이 이 시집의 1부를 보며 짓는 다양한 표정을 상상한다.

방 안 가득 무거운 편견이 가라앉고
멀리 이끼 낀 기적 소리가 낯설게
밤과 밤 사이를 뚫다가 사라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게 보인다.
부서진 마음도 보도에 굴러다닌다.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 ‘이름 부르기’ 중에서

너를 만난 피부에서만 땀이 났다.
감추어놓은 절망이 터져나온 연옥,
소금의 단호한 결정체가 물이 되었다.
돌 속에 흐르는 땀까지 뽑아
돌 속에 살아 있는 고백까지 뽑아
떠나는 너에게 묘비명으로 보낸다.
- ‘땀에게’ 중에서


방 안에 가득한 무거운 편견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 한 사람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친구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방식대로 규정하고 타인을 객체화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무수한 비극들! 그들이 서로 부르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묘비명’을 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낭패감.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시 읽기는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더 클 때가 있다.

출판 시장의 졸렬함과 시인과 소설가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신문 기사를 읽다가 문득 손에 든 시집의 작가를 떠올린다. 그 오랜 시력(詩歷)과 연륜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다 서글퍼진다. 젊은 시인의 시를 읽은 지 오래됐다는 생각 때문이다. 시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말보다 독서도 안전함과 편안함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그 선택은 그만큼의 감동을 돌려준다. 그 감동이 어떤 형태이든.

알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너를 떠나지 않았다.
지난 며칠 왠지 밤잠을 설쳤을 뿐이다.
얼굴과 머리는 늙어 낙엽으로 날리지만
한 평 침대에 누운 저 꽃 잠 깨기 전에
재갈 물린 세월아, 모두 잘 가거라, 잘 가거라.
- ‘귀향’ 중에서


세월에 재갈을 물릴 수 있다면 절대로 풀어주지 않겠다. 떠난 적이 없다는 말은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 된다. 세월의 흐름에 대해 말할 나이가 아니지만. 먼 훗날 그 순간을 기억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세월과 사랑을 묶어낸 것이 이 시집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여전한 삶에 대한 거리감은 여유과 객관적 거리에서 나온 것 같다. 아니, 삶에 대한 거리감이 아니라 생에 대한 관조라고 해야 하나. 그의 시에 묻어나는 무게는 결코 만만치 않다.

그가 기다리는 ‘당신’ 이 누구이든 모두가 기다리는 ‘당신’이듯이.

알래스카 시편 1

1

네가 올 때까지는
물소리밖에 없었다.
높은 빙산이 녹아 흐르는
연둣빛 물소리밖에 없었다.
네가 오고 나서야 비로소
분홍빛의 밝고 진한 잡초 꽃들이
산과 골을 덮으면서 피어났다.
그리고 바람이 늦게 도착했다.

분홍 꽃들이 바람과 춤추고
가문비나무들은 그늘 쪽에 서서
장단에 맞추어 몸을 흔들었다.
왁자하던 꽃들이 잠잠해지자
저녁이 왔다. 정말이다.
네가 여기 올 때까지는
물소리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물소리밖에 없었다.

2

당신은 머리를 잠시 들어
주위를 살폈을 뿐이라고 하지만
당신이 와서야 파란 하늘이 생겼다.
정말이다. 지난날의 솜 덩어리들
하늘 밑에 구름도 생겼다.
잡초 꽃들이 고개 한 숙인 것 같은데
양쪽으로 분홍빛 길이 만들어졌다.

저 높은 끝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
누구도 걸어보지 않은 길로
당신이 화해를 하자며 다가왔다.
정말이다. 잡은 당신의 손이
따뜻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내가 걸어가야 할 남은 길이
옛날같이 다정하고 확실하게 보였다.


06112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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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1-27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나게 하는 시를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종기 시인이 너무 좋아하거든요. 잘읽고 갑니다.

sceptic 2006-11-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할 때 의미가 있겠지요. 읽고 난 후의 느낌이야 제각각이구요. 행복한 날들 보내세요.

비로그인 2006-11-2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것에는 자신만의 추억을 곁들여 미화하기 쉽지요.
그래서 새로운 것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을지도 모르구요.
많은 것을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sceptic 2006-11-28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관적 해석이 가장 극대화되는 장르가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낯설고 새로운 것에 대한 변화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겠죠. 자꾸 손이 가는 이유가 '익숙함'때문이라면 좋은 것만은 아니겠죠.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인간에 탐구와 진지한 관심이 문학의 출발이다. 그 개인이 사회와 인류로 확장된다. 문학의 중심에는 항상 사람이 놓여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 수많은 소설들 중에서 유독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이 우리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다양한 이유들 때문이다. 작품의 배경이 된 시대와 상황, 작가의 특별한 죽음, 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 등등.

<금각사>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 11월 25일, <천인오쇠>의 마지막 원고를 신조사에 넘겨 준 후, ‘다테노카이’ 대원들과 육상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 난입, 자위대의 궐기를 외치고는, 동부 방면 총감실에서 할복자살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과 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심각해지는 상황이 지금 현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길고 긴 세월속에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일본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넘어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의 죽음이 주는 의미와 일본 문학에 끼친 영향들에 대해 다른 책을 통해 읽다가 문득 그의 <금각사>를 읽었다. 1956년에 완성된 일본 소설을 평가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없다. 소설의 완성도에 대한 의견이나 우리 문학과의 비교도 의미 있겠지만 호기심은 이 소설을 쓴 작가에 집중되어 버렸다.

소설의 주인공 미조구치와 그의 친구 가시와기는 작가에게 분명히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한 분신처럼 보인다. 미시마 유키오의 성장배경과 성격이 반영되어 나타난 부분이 많다. 우리 소설에서 김동인 보여주였던 유미주의 계열의 소설로 볼 수 있는 이 소설의 미의식은 다양한 방식으로 평론가들에게 변주되었다.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인식가’인 가시와기와 ‘행동가’인 미조구치 사이의 관계다. 애증 관계에 있는 두 주인공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관계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서로 갖지 못한 부분에 대한 열등감은 정신병적 이상 증상으로 나타나 결국 ‘금각사’를 불태우는 극단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먼 옛날의 사건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둔감한 사람들은 피가 흐르지 않으면 허둥대지 않는다. 하지만, 피가 흘렀을 때에는 비극은 끝나 버린 다음인 것이다. - P. 22

잊혀진 ‘기억’은 일종의 역설이다.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먼 옛날의 사건들이 존재한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고 삶을 결정하며 현실을 조종하기도 한다. 주인공에게 있어 우이코의 죽음은 그의 생애 전반을 지배한다. 소설 초반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버린 우이코는 ‘금각’에 투영되어 환영처럼 나타난다. 주인공에게 있어 우이코가 금각이고 금각이 곧 우이코가 된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한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악마적인 모습들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이 가진 콤플렉스에 반응하는 방식들에 대해 되볼아보게 하기도 한다. 엉뚱한 방식의 소설읽기는 자유롭게 상상될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종종걸음으로 가는 꾀죄죄한 허리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유달리 추악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를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은 희망이었다. 습기 찬 담홍색의, 끊임없이 가려움을 느끼게 하는,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더러운 피부에 번진 완고한 옴과도 같은 희망, 불치의 희망이었다. - P. 210

희망을 추악하다고 말하는 미시마 유키오는 한 인간에게 있어 부질없는 희망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이 작가의식이든 주인공의 성격에 대한 반영이든 나는 이 소설에서 손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풀처럼 끈끈한 희망의 지겨움을 읽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의미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얼마나 큰 욕망 속에 존재하는지 확인하게 된다.

현실이 서글프다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더욱 명료해진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희망이 용도 폐기되는 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에게 무의미한 단어를 이 소설에서는 애써 외면한다.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니?”
“아니. 나머지는 광기나 죽음이지.”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절대로 인식이 아니야.”라고 얼떨결에 나는, 고백에 가까운 위험을 무릅쓰고 반박하였다.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행위야. 그것밖에 없어.” - P. 226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은 ‘인식’이 아니라 ‘행위’라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행위 이전에 용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식을 통해 용기가 생기가 그것은 현실에서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 실천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미조구치는 금각사에 대한 ‘방화’를 행동으로 옮겼다. 어떤 행동이든 그것은 우리를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는 없다. 다만 현실을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니면 영원히 현실에서 격리된다. 전후 일본 소설의 정점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재미없는 소설이지만 의미있다.


06112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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