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떼가 나왔다 -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안보윤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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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장의 아들이 마트에서 사라졌다. 배꼽에 악어 모양의 문신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모든 아이들의 배를 까볼 수는 없다. 사라진 아이 때문에 전국에는 미아 찾기 열풍이 불고 아이의 부모들은 미아 방지를 위해 아이 몸에 문신을 새겨 준다. 안보윤의 <악어떼가 나왔다>는 이렇게 코믹한 시트콤처럼 시작된다. 악어 문신은 사실 배꼽 옆에 난 점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아이를 기점으로 순환적 알레고리가 형성되는 중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는 10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이다. 스물 다섯의 여성인 작가 안보윤의 ‘가능성’을 보고 선정했다는 성민엽의 말을 듣고 보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소설의 완성도보다 가능성을 보고 읽어 내는 것은 평론가의 몫이지 독자들이 감당할 몫은 아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소설은 일단 재미있고 감동적이거나 정수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쏟아 부어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안보윤의 소설은 미지근한 물에 발을 담근 느낌이다.

코믹잔혹극이라는 장르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럴듯한 표현이라서 인용한다면 적절하게 어울릴만한 소설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은 전통적인 미의식의 반영이다. 그 전통을 고전문학에서 찾을 필요도 없지만 오래동안 우리에게 큰 즐거움은 웃음을 통한 카타르시스였다. 후련한 배설과 같은 감정의 정화 작용은 소설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아이들에 대한 과잉 보호, 미아에 대한 사회적 관심, 외모 지상주의, 자살과 살인에 대한 추억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혼란스럽기도 하다. 중편 소설의 분량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얽히다 보니 간결하고 깔끔한 맛은 없다.

하지만 잔혹한 살인 장면과 일상의 필연성을 뛰어넘는 도약적 상상력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이다. 빠른 속도로 사건을 진행시키다가 인물의 심리를 간접적으로 서술하는 장면에서는 작가의 의도인지 미숙함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후의 작품들을 통해 그녀를 판단해 볼 일이다.

영화 <조용한 가족>이 주는 재미와 긴장을 비교한다면 적절할 것 같다. 비일상적이고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소설과 비교해서 소설같은 현실이라고 말하거나 현실같은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소설은 이미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야 한다. 특정한 분야나 역할을 한정시키는 일이 아니라 활자 책의 종언을 예고하는 시대에 더구나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영화와 소설의 장르를 동종교배한다고 해서 슈퍼맨이 탄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특집극 분량 정도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어 영화가 아니어도 영상물로 읽힌다.

다소 긴장과 극적인 재미가 떨어진다. 옴니버스식의 몇 가지 이야기들이 꼬리를 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악어떼’가 말하는 진한 감동이나 충격은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한강에서 무더기로 떠오르는 익사체가 ‘악어떼’인 것 같지만 현실에서 ‘악어’가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꿈과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마술적 리얼리즘과도 거리가 멀다.

새롭고 낯선 것을 나와야지 신인은 아니다. ‘가능성’만 믿고 나올 수도 없다. 나이가 무기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박민규의 쓰잘데 없는 인터뷰도 작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아직은 그녀의 보다 많은 작품들을 통해 독자들이 그녀를 알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문학의 위기(?)라고 불리워졌던 수많은 시대에 등장했던 작가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즐거운(?) 소설들을 독자에게 선보일 수 있는 작가가 되길 바란다. 독자가 기다리는 작가가 될 것인가의 여부는 그녀의 다음 작품이 말해줄 것이다.


0609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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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는 둥둥 창비시선 265
김승희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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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들렸다

폭설의 밭 속에서 살고 있는 것들!
백설을 뻗치고 올라가는 푸른 청보리들!
폭설의 밭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들!
시퍼런 마늘과 꿈틀대는 양파들!
다른 색은 말고 그런 색들!
다른 말은 말고 그런 소리들!

하루를 살더라도 그렇게
사흘이나 나흘을 살더라도 그렇게!

<왼손을 위한 협주곡>으로 김승희를 처음 만났을 때 ‘언어의 테러리스트’라는 과격한 수식어에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다시 접한 그녀의 시는 많이 다르다. 시간의 무게도 세계관의 변화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변화다.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가 발전과 진화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 흔하게 발견한다. 표현과 상상력이 무뎌지지 않았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시인의 영혼과 만나는 일은 즐겁기만하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시인들에게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 중에 하나가 ‘사소함’의 발견이다.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 속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발견은 새로운 깨달음과 통찰이라기보다는 인식의 힘이다. 생명에 대한 관찰과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삶에 대한 단순한 성찰이 보편성을 획득한다. 누구나 나이 들어 그런 눈과 귀를 갖게 되는 것인지는 더 살아봐야겠다. 그것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이 감춰둔 사랑

심장은 하루종일 일을 한다고 한다
심장이 하루 뛰는 것이
10만 8천 6백 39번이라고 한다
내뿜는 피는 하루 몇천만 톤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 4천 9백 6십만km인데
하루 혈액이 뛰는 거리가
2억 7천 31만 2천km라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두 번 갔다올 거리만큼
당신의 혈액이 오늘 하루에 뛰고 있는 것이다
바로 너, 너, 너! 그대

그렇게 당신은 파도를 뿜는다
그렇게 당신은 꺼졌다 살아난다
그렇게 당신은 달빛 아래 둥근 꽃봉오리의 속삭임이다
은환의 질주다

그대가 하는 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이 사업은 하느님과의 동업이다
그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발견하겠다

김승희가 가져왔던 여성에 대한 관찰과 관심도 여전하다. 생활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 페미니즘이나 휴머니즘 같은 ism으로 거칠게 분류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시에는 뛰어난 상상력을 토대로 삶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 오롯이 솟아오른다.

한 가지 목에 걸리는 것은 신과 사랑의 문제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신과 사랑의 문제는 안일한 태도로 귀결되기 쉽다. 포근하고 따뜻한 신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는 시인은 반쯤 눈을 가린 난독증 환자처럼 세상을 잘 못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법 아래서

가시오
서시오
대기하시오
일단 멈춤
우회
직진
비보호 좌회전
U턴
U턴 금지

口 속에서 사는 囚
口 속에서 쉬는 숨

계몽적 차원의 현실 비판은 독자들을 피곤하게 한다. 그러나 ‘口 속에서 사는 囚’는 언어의 형태와 의미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다. 부분으로 전체를 통찰하는 것은 어렵지만 참신한 상상력이 주는 힘은 무한하다. 현실에 대한 재해석은 새로운 상상력과 결합되어 시가 가지는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고정희, 최승자, 김혜순 등 ‘여류’라는 편협한 시각과 한계를 지워버린 시인들의 시는 깊이와 넓이를 더해가리라 믿는다.


06092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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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과 철학 강의 2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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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철학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져도 우리가 쉽게 답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철학은 실용적인 학문이어야 한다. 실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 상황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삶의 목적과 가치를 생각해 보는 관념론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질문들에 대해 안내자와 길잡이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부단한 훈련과 노력은 개인의 몫으로 돌리더라도 생각하는 방식과 세상과 삶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들은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어렵지도 않고 비현실적이도 않은 철학은 불가능한가?

김용옥의 <논술과 철학강의 2>는 1권 논술편에 이어 ‘철학강의’로 구성되어 있다. 발에는 오른발과 왼발이 있지만 신발에는 없다. 왜 오른쪽과 왼쪽 신을 구분해서 신어야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도올의 어린 시절은 암담했다.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들에 대한 관찰과 생각으로부터 철학은 시작된다. 철학은 보편을 지향하지만 절대를 말하지는 않는다. 상식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된 철학의 길은 정치와 종교에 대한 당연한 질문으로 연결된다. 철학으로 가는 길은 쉽고 간단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복잡해서 현실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도올은 말한다.

철학은 서양언어에서 비롯된 ‘지혜의 사랑’도 아니고 일본식 한자어인 ‘밝은 배움’도 아니다. 철학은 정의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철학을 정의하는 사람의 관심의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가치를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지식도 아닌 철학을 우리는 왜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들려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중고생을 위한 논술과 철학을 위한 강의록이라는 명분으로 쓰여졌지만 누구나 한번쯤 스스로 ‘돌대가리’라고 선언하는 도올의 철학 이야기에 귀기울여 볼만하다. 근엄한 제목과 들어본적도 없는 용어들 사이에서 좌절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철학의 길을 제시해 준다. 우리의 삶이 텍스트이고 세상이 콘텍스트일 때 철학은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모든 가능성을 전제로 한 무전제의 전제가 철학이라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우상과 편견들을 깨뜨리는 일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내 마음의 우상을 깨뜨리고 개방적인 시선과 비판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서 철학은 시작된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당연하고도 다양한 전제 중의 하나이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말한 화이트 헤드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현실과 이상을 분리해서 인식할 때 철학은 우주 밖으로 멀어진다. 존재하지도 않는 ‘이데아’에 대한 탐구와 믿음은 현실과 유리된 철학을 낳았다. 동양의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한 개구리는 소견이 좁을 뿐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큰 흐름속에 작은 흐름을 포함시켜 관견管見을 이야기할 뿐이다.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개구리도 결국 현실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올의 관점과 방식이 정답일 순 없다. 그가 이미 밝히고 있듯이 철학에는 절대가 없으므로.

이 책은 동서양의 철학의 차이를 통해 동양 철학의 우월성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책은 아니다. ‘철학은 문화사’라고 말할 정도로 문화적 토양과 삶의 방식에 뿌리를 둔 철학을 맹목적으로 따를 이유가 없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언어의 차이와 생각의 차이를 낳고 결국 철학적 사유를 결정 짓는다. 우리가 발붙히고 살고 있는 이 땅에서 필요한 철학은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들의 삶을 이야기 해야 한다. 철학은 인간학이 되어야 한다는 도올의 말이 철학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방식중 하나라고 하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도올이 보여준 삶의 이력들과 그가 말해온 많은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읽는다면 도올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글은 곧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이해하고 편견없이 그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는 일은 독자가 판단할 일이지만 도올을 지우고 그의 주장만을 놓고 보더라도 크게 실망할 만한 책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을 ‘대학 입시를 위한 논술과 철학강의’로 읽는다면 조금 거리가 멀다. 실전과는 다소 거리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할 논술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뚜렷한 자신의 목소리와 나름의 독특한 해석으로 철학과 세상을 읽어내는 도올의 목소리는 내게 신선한 울림을 준다. 서양 철학자 하나를 붙잡고 목숨거는 철학 교수보다 그를 비교 우위에 두는 이유는 교수가 아니라 철학자라는 이름으로 이 책에서 보여주는 생각 때문이다. 도올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떠나 그의 주장이 언제나 비판과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도 지나친 확신과 소신에서 비롯된 뚜렷한 신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독선이나 아집과는 거리가 멀다. 철학에 대한 수많은 생각과 방법들 중의 하나로 도올의 말에 귀기울여 보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06092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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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321
남진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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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을 넘긴 다음부터
거을 앞에 서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내가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거울에 비친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

서른여섯 거울 속의 나는 죽고
텅 빈 거울 속에 더 이상 나는 비치지 않고
거울 속 어두운 물 저편으로 흘러가
나는 흑사병이 도는 폐허의 도시에 도착한다
                                                              - ‘베니스에서 죽다’ 중에서

인간에게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다. 소중한 이유는 선악, 오호의 감정을 넘어서 한 사람에게 인생은 단 한 번 밖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직접 경험이든 간접 경험이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마디 마디가 모여 우리의 전 생애를 이루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그것이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고 쌓여온 세월이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든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뒤로 한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아야 바뀌는 것은 크지 않다. 모든 경험은 자신의 세계에서 비롯되지만 ‘용기’만으로 인생이 뒤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윤동주의 ‘파란 녹이 낀 청동거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은 너무 많다. 눈을 뜨는 순간 만나는 모든 것들이 바로 거울이고 내 얼굴의 다른 모습들이다. 갇힌 공간과 좁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자화상이다. 모든 사람들은 사물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꺼린다. 선택적 기억과 자신에 대한 안일한 태도, 미래에 대한 쓸데 없는 희망으로 치장한다. 계산된 위장과 가식이 아니라 눈감고 싶은 현실과 특별할 것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남진우의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는 이런 현실에서 일탈한다. 쉽게 일탈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꿈꾼다. 영원히 우리의 일부이면서 ‘타자’로 인식하는 죽음까지도.

그 대상들이 사자와 악어 같은 짐승이다가 낯선 장소이다가 비가 내리는 기후이기도 하다. 낯선 세계를 꿈꾸는 자는 현실에 부유하는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길들여진 습관은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지금-여기에 단단히 뿌리박지 못한 꿈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없는 곳을 꿈꾸는 자의 절망은 쉽게 드러나지 않고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간다. 남진우의 시는 그렇게 마술 같은 현실을 반영하는 만화경이다. 프리즘처럼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방 연속 무늬를 반복하는 만화경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준다. 내게는 그렇다.


얼마나 먼 길을 걸어 빗소리는
내 곁에 찾아온 것인지
깊은 밤 잠 깨어 내 머리맡 적시는 빗소리를 듣는다
비를 맞지 않아도 이미 빗소리만으로 나는 축축히 젖어
잠자리 위를 아득히 떠내려가고
연못가 흰옷 입은 여인들 버드나무 아래 울고 있다
그 울음 다 그치기 전 이 비는 또 누구를 깨우기 위해
먼 길 떠나는 것인지
가고 또 가버려도 빗소리는 남아서 내 머리맡을 적시고 있다
                                                                                   - ‘오래된 정원’ 중에서

누구에게나 비에 대한 기억은 있다. 오래된 정원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특별하진 않다. 세상 자체가 오래된 정원이다. 이 세상에 내리는 모든 비는 누군가를 찾아간다.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는 주관적 판단과 인식이 독자와 공감할 때 시는 의미가 있다. 세상과 소통하는 모든 방식은 이기적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객관과 이성과 합리를 가장한 모든 주과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혼란을 가져온다. 때때로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시인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막 꿈에서 깨어난 듯한 나른함이 묻어난다.

여기가 어디인가, 새벽 세시에 목마른 사자 한 마리가 방 문 앞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방문을 열자 사자의 꼬리만 슬쩍 비친다. 그가 기다린 것은 과연 사자일까. 동화적 상상력을 넘어선 자리에 대입할 수 있는 주관적 대상은 모두 독자의 몫으로 파악해야만 하는 막막함!

독서

독이 묻은 페이지를 넘긴다
나를 암살하기 위해 누군가 발라놓은 독을
침과 함께 나는 삼킨다
독 묻은 책을 읽는 것은 독에 잠겨 서서히 익사해가는 일
피 속에 움트는 날카로운 외침에 귀 기울이며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그 어느 시인도 독으로 일생을 살진 못했다
그가 남긴 독이 책에서 책으로 돌고 돌다
어느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
책을 펼쳐든 나를 깨문다
서서히 독에 마비되어가는 몸을 젖히고
나는 책 속을 빠져나가는 독사 한 마리를 본다

무릇 모든 독서란
독사 한 마리씩 길들이는 일이니


이 시집의 마지막을 ‘독서’가 차置構?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이후 특별할 것 없는 그의 시들은 여전히 낯선 감각 속에 살아 있다. 독서는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을 읽고 나를 읽는 것이다. 물론 ‘너’를 읽기 위한 모든 독서는 ‘너’를 길들이기 위한 행위이다. 독사와 독서의 유사성은 치명적인 ‘독’에 대한 해석이다. 읽는 행위가 독이 된다는 전제는 그 대상이 책이든 세상이든 사람이든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인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반복되는 일상 속의 치명적 ‘독’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중독성은 뿌리칠 수 없는 강렬한 유혹만큼 치명적이다.


0610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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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윌리엄 슈니더윈드 지음, 박정연 옮김 / 에코리브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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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태어나서 한 번도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같다. 종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불쌍한 영혼이다. 절대자나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나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기회가 없었다. 책으로 만나는 그들의 이야기는 지루하고 따분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크리스마스를 즈음하여 친구를 따라 딱 한 번 교회에 가 본 적이 있지만 심드렁한 느낌으로 기억한다. 난 어렸을 때부터 애늙은이였다.

가끔 어머니가 절에 가신다. 마음이 복잡할 때나 사월 초파일 등 기껏해야 일년에 몇 번이지만 등산 겸 해서 절에 다시시는 어머니의 그것을 한 번도 종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종교는 나약한 인간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영혼의 아버지뻘 쯤 되겠지만 여전히 호기심도 없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종교에 대한 개인적인 태도는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오로지 관심뿐이다.

그러나 한 인생을 살면서 종교와 무관하게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다만 ‘믿음’의 문제와 부딪히면 고개를 외로 튼다. 무식하고 몰라서 하는 소리겠지만 성경을 읽어도 불경을 읽어도 책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당연한가? 종교에 대한 관심과 신앙심과는 무관한 것 같다.

윌리엄 슈니더윈드의 <성격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는 종교에 대한 또 다른 질문에 답한다.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불교든 정전의 힘은 막강하다. 코덱스(책)의 형태로 묶여진 성경이나 코란이나 불경은 그 종교를 대표하는 권위를 지닌다. 처음부터 그랬을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다.

유대교와 그리스교의 정전인 ‘성경bible’은 ‘비블리아biblia’라는 그리스어에서 비롯되었다. 비블리아의 뜻은 ‘책들’ 혹은 ‘두루마리들’의 뜻을 담고 있다. 이렇게 성경을 뜻하는 말의 어원을 찾아보면 성경을 누가 썼는지 왜 썼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처음에는 현재의 책과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두루마리로 쓰여진 모세 오경이 바탕이 되어 있던 텍스트들을 순서를 정해서 지금과 같은 책이 되었다.

현재까지는 대략 페르시아 제국과 헬레니즘 시기(기원전 5세기 ~ 3세기경)에 구약성서가 기록되고 편집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슈니터윈드는 고고학적 고증을 통해 기원전 8세기에서 6세기경으로 그 시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흥미롭게 전개되는 성경의 시작과 끝을 확인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는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구전 문화와 기록 문화의 충돌이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말을 전하는 사람들이 가장 강력한 종교적 권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문자가 등장하면서 문자는 왕과 제사장들의 절대 권력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행정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었다. 문자가 대중화되면서 ‘말씀’과 ‘글’에는 충돌이 생겼고 그것은 권위와 믿음에 대한 종교의 기본적인 믿음의 대상에 대한 충돌로 이어진다. 결국 ‘글’이 ‘말’의 권위를 눌렀으나 그 변화 과정은 종교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당연히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게 읽혔다.

어쨌든 게임은 끝났고 성경이라는 ‘책’은 종교인들에게 ‘말씀’을 넘어선 권위를 지키게 되었다. 기록된 한 권의 책이 가지는 사회적 권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이후 기독교라는 종교가 사회에 미친 영향은 유럽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종교와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이러한 종교의 사회적 역할 때문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보여주는 모습이 개인적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물론 모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종교의 순기능을 축소하려는 생각도 없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일 뿐.

성경은 언제 기록되었을까? 왜 글로 기록했을까? 성경은 어떻게 한 권의 책으로 탄생했을까?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독자들을 고대 이스라엘로 인도한다. 기록된 글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성경의 역할과 책으로의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가 안내하는 고대로의 여행에 동참하고 싶은 독자는 성경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나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나 이도저도 아니면 그저 책이라는 형태의 기원과 탄생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고 싶은 사람이어도 좋을 것 같다.

글과 문자성은 자유를 줄 수도, 억압할 수도 있는 두 가지 힘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 P. 165

엉뚱하게도 나는 이 책을 읽어면서 이 한 줄이 기억에 남는다. 모든 책이 각각의 독자에게 다르게 해석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이 책은 나에게 또 하나의 책에 관한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도 성경은 사라지고 책만 남았다.


06100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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