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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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17년 붉은 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회주의는 현실이 되었다. 1991년 구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74년간 지속된 인류의 또 하나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충격은 한 국가의 패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국가 건설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은 실망을 넘어 사회주의 진영을 공황에 빠뜨렸다. 60년대는 물론 70년대와 80년대라는 질곡의 시대를 지나왔지만 90년대의 전망은 불투명하기만 했고 21세기에 들어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요원하기만 하다.

얼마 전에 읽었던 하종강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의 서평 시작부분이다. 우연하게도 조정래의 <인간연습>은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남북 분단 문제의 완결판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인류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인 ‘이념’의 문제가 그 중심에 놓여 있다. <태백산맥>과 <아리랑> 그리고 <한강>으로 이어지는 현대사를 대하소설로 일단락 지은 조정래의 <인간 연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는 외적 지향의 거대담론에서 내적 지향의 미시담론으로의 변화이다. 한국인에게 현대사의 질곡은 견뎌내기 힘든 집단적 트라우마였다. 그러나 개별적 인간에게 부여된 의미와 상처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세부적인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인간 연습>은 작가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조정래 분단문학의 마침표로 읽어도 좋겠다. 두 번째는 사회적 관점의 이념과 역사가 아니라 개인적 관점으로의 이행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 연습>은 한 인간이 사회적 신념 속에서 겪어야했던 내면의 본질적 갈등이다. 본능과 이기적 욕망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념과 신념에 대한 질문들로 가득하다. 길이가 중요한건 아니지만, 이 소설을 장편으로 보기엔 길이도 내용도 부족하다. 단편과 장편 중간쯤 된다.

장기수 문제를 다루었던 영화 <송환>에 출현했던 노인 한 분을 떠올리며 읽었다. 현실과 소설을 중첩시키는 바보같은 방법이 통할만큼 사실적인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전향 장기수 윤혁 노인의 내면적 갈등과 방황이다. ‘사상의 조국’이었던 소련의 붕괴는 물리적 폭력에 의해, 정신이상 상태에서 전향해버린 윤혁, 박동건 두 노인에게 정신적 공황상태를 일으킨다. 더구나 북한의 굶주림에 대한 사실 확인 취재 기자에게 전해들은 후 박동건 노인은 숨을 거두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김형사의 보호감찰과 같은 방에 살았던 운동권 강민규의 도움으로 번역을 하며 살아가는 윤혁 노인은 수기를 쓰게 되고 부모없는 두 아이의 후견인 노릇을 하며 살아간다.

당과 조국을 위해 남파하던 순간의 아내의 얼굴. 그 얼굴은 윤혁 노인을 평생 따라 다닌다. 결정적인 순간에 당과 인민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는 인간적 고백이 더 아프다. 그렇다고 해서 이념과 사상에 의해 희생당한 한 인간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소설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신념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 같은 시대적 변화에 충격을 받는 두 노인의 모습이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아픔으로 보일 뿐이다. 30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은 사회와 인간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어쩔 수 없이 이 사회에 적응해가야 하는 전향 장기수의 삶은 비전향 장기수의 삶보다 오히려 더 비참하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편견에 가득찬 시선들, 사회적 냉대가 어우러져 견디기 힘든 세월이 된다. 민주주의를 국가의 정체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현실과의 부조화가 아이러니하다.

조정래라는 이름만으로 의심없이 읽게 된 소설이다. 소설 자체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주제가 주는 무게와 깊이가 만만치 않다. 쉽게 답을 얻거나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 연습이 필요할까? 이 땅에서 ‘인간’으로 대접받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과연 윤혁에게는 없는 것일까? 끊임없는 회의와 질문들이 쏟아지게 하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은 우리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고민과 합의를 묻고 있다. 통일을 위한 우리의 마음가짐과 이념적 갈등에 대한 논의는 계속 되어야 한다.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밤새워 읽으며 작가 조정래 선생님께 느꼈던 마음이 이 책에서도 여전히 식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의 삶,
그것은 결국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다.


06071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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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 -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e시대의 절대사상 2
김용환 지음 / 살림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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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더 힘센 자가 없으니 누가 그와 겨루랴!(욥기 41장 24절)”는 말처럼 국가와 교회를 통합하는 강력한 통치자의 출현을 홉스는 <리바이어던> 속에 담아내고 있다. 출판 당시의 표지 그림으로 나타난 리바이어던의 모습은 한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교구장을 들고 있다. 국가의 권력과 교회의 권위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그의 권능을 이보다 잘 묘사한 그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현재의 국가는 그처럼 ‘괴물’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과연 국가는 괴물인가?

17세기 초반 유럽의 지성사를 뒤흔들었던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한 평가와 견해는 다양하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인 것처럼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홉스 전문가 김용환의 견해는 당연히 <리바이어던>에 대한 애정과 긍정적 평가로 넘친다. 대부분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인 내용이지만 홉스가 과연 국가 권력에 대한 믿음과 종교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을 이 책에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국내에 <리바이어던> 완역본이 없다는 아이러니는 일반 독자들에게 논의 자체를 차단시킨다. 박영사에서 나온 유일한 완역본이 절판되었고,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검색해보니 3월에 나온 책이 있는데 완역본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저자의 말대로 홉스의 사상과 철학적 견해를 전부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당시의 종교와 철학의 흐름이 홉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또 홉스는 로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쉽게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홉스의 견해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영향을 주는 까닭은 인간과 국가 그리고 종교에 대한 그의 깊은 사유 방식 때문이다.

김용환은 홉스가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절대군주론자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종래의 왕권신수설에 의한 무소불위의 절대 군주가 아니라 백성과의 계약 관계로 성립되었으며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부분이 있고 통치자가 계약 당사자라는 점을 들어 절대군주론에서 ‘유사 민주주의자’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리바이어던 발췌 부분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 유명론, 유물론자라는 사실과 로크와 더불어 자유주의자로서 그의 사상이 시대의 이단아처럼 보였던 것은 과학적 합리주의가 싹트기 이전 시대라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리바이어던>이 왜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신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현재의 관점으로 상식이 통할 수 있는 합리적 사고와 인식의 틀을 제공하는 면면이 그의 생각들에 동의하게 하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무한한 권력으로부터 많은 나쁜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할지 모르나, 통치권이 없기 때문에 오는 결과,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끊임없는 투쟁이 훨씬 더 나쁘다.(P. 231)”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끊임없는 투쟁’보다 ‘무한한 권력’이 훨씬 더 나쁜 결과를 보여준 사례를 우리는 수많은 역사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부분적인 인용과 반박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홉스의 견해가 모두 수용될 수는 없다. 당연한가? 어떤 사상과 철학이든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면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평가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홉스가 꿈꾸었던 세상은 “현실적인 힘을 소유한 사실적 통치자(de facto ruler)이자 사회계약을 통해 정통성을 획득한 합법적 지배자(de jure ruler)가 헌정 중단 시기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가 바로 진정한 리바이어던이다.(P. 154)”는 말처럼 ‘진정한 리바이어던’이 지배하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서 항상 괴물의 모습을 드러냈다. 홉스 이전과 이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이상적 정치와 국가를 꿈꾸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상상속에서만 존재한다. 이것은 비극적 현실 인식이 아니라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욕망과 이기심에 대한 인정일 뿐이다.

자유는 외적인 방해(external impediment)가 없음을 의미하며, 방해는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의 일부를 종종 앗아가지만 판단과 이성의 지시에 따라 남겨진 힘의 사용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 P. 112

홉스는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겠지만, 인간과 국가에 대한 그의 견해의 핵심과 가치는 ‘자유’에 있다고 믿고 싶다. 종교와 국가를 아우를 수 있는 절대 권능의 ‘리바이어던’이 ‘자유’와 상치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모두의 꿈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을 여전히 믿고 싶다. <리바이어던> 완역본을 읽어봐야겠다.


060712-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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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바이어던 -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from 다르게 그리고 옳게 2008-01-07 22:55 
    리바이어던 - 김용환 지음/살림 홉스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생각난다...면 ^^ 제대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게된 이유는 엉뚱한데...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무한의 리바이어스라는 것이 있다. 거기서 리바이어스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따왔다고 생각하고 보기 시작했다. 다 보고 나서 느낀 생각은 크게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성서에서는 괴물로 나오지만, 홉스는 그것을 국가권력을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조금은..
 
 
 
커피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89
김성윤 지음 / 살림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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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유리잔에 커피를 마신다. 인스턴트 커피로 ‘테이스터스 초이스 부드러운 블랙 오리지날’이다. 이제 커피믹스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즐기는 음료가 되었다. 이 커피믹스는 커피와 설탕과 크림의 혼합비가 1 : 3 : 2로 소위 다방커피라 불린다. 커피가 전 국민의 기호식품이 되는데 기여한 일등공신은 당연히 커피믹스다. 동서식품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커피믹스는 불과 40여 년 만에 전 국민을 커피잔에 빠뜨렸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피는 그만큼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중요한 필수 기호 식품이 되어버렸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커피에 중독된 사람들은 하루 한 잔으로는 택도 없다.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담배를 피우는 이유처럼 다양하다. 맛 때문에, 혹은 분위기에 맞추어, 혹은 특별한 대안 음료가 없어서…… 그러나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카페인 성분 때문이다. 담배의 니코틴 성분만큼 중독성이 강하지는 않지만 각성 효과를 주기 때문에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일찍이 이슬람문화권에서 시작된 커피는 본래 약재로 쓰였다. 만병통치약처럼 영험한 효과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후 유럽과 인도네시아, 남미로 확산되면서 세계인의 음료가 되었다. 이제 커피는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와 고유한 생활방식과 결합되어 독특한 맛과 향을 발하고 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보통 로부스타라고 하는 싼 커피로 맛과 향에서 질이 낮다. 맛과 향이 좋지 않다는 것은 커피 원두인 체리가 잘 익지 않았거나 건조과정과 볶는 과정인 로스터 과정에서 구별되기도 한다. 아라비카라고 하는 고급 커피는 당연히 맛과 향이 뛰어나다. 고추를 말리는 방식과 유사한 건식법이 아니라 12.5%의 적정 수분을 유지하고 커피 원두를 상하지 않도록 습식법으로 건조시켜 풍부한 맛과 다양한 향을 만들어낸다. 커피의 귀족으로 불리우는 아라비카는 고산지대에서 적당한 온도와 햇볕을 받고 자란 연약한 커피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즐기는 로부스타 커피와는 태생부터 다른 것이다. 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이 대표적인 커피다.

1999년 스타벅스 이대점이 오픈하면서 바야흐로 제 2의 커피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대학시절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던 자장면과 라면의 가격을 훌쩍 뛰어넘는 에스프레소 커피 한 통씩을 손에 들고 다니며 마시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말로 빠르다는 뜻으로 뜨겁고 강한 압축기에 의해 커피 원두를 순간적으로 걸러낸다. 물론 여기에 우유를 섞고 휘핑크림을 얹거나 캐러맬을 혼합한 커피를 대부분의 사람들 선호한다. 테이크 아웃 커피 위주인 스타벅스는 우리나라에서 매장에서 마시고 갈 수 있는 분위가 더 선호된다.

차와 커피는 대화를 이끌어주기도 하고 한가로움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문화현상이자 실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피가 주는 즐거움은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커피에 대한 지식이 맛을 배가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깊은 이해는 깊은 애정을 낳는다. 특히 계절과도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모든 음식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비오는 날은 커피의 향이 특히 진하고 강하게 느껴진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연인과 마셨던 자판기 커피 한 잔의 추억은 강렬한 미감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커피 탄생의 간략한 역사와 제조 과정 그리고 각 나라의 커피 문화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지만 매일 마시던 커피에 대해 궁금한 독자라면 왼손에 <커피 이야기>를 오른손에 커피 한 잔을 들고 읽을 만한 책이다. 다만,

커피의 맛뿐만 아니라 커피를 재배하는 사람들의 땀, 커피 생산을 위해 희생되는 환경에 대해서도 한 모금쯤 음미해 보는 것이 어떨까. - P. 85

는 말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공정거래 커피에 대한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커피 1잔당 4원이라는 잔인한 가격은 커피 재배 노동자들의 땀을 착취하고 있다. 대규모 중간 거래상과 다국적 로스터들이 대부분의 수익을 거둬가는 자본의 논리는 커피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노동자들의 최저 생계비를 지불하고 구입했음을 인증해주는 공정거래 커피가 널리 확산되길 바랄 뿐이다. 자본주의는 결국 소비자의 손에 의해 좌우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 올바른 소비자 운동과 더불어 커피의 맛을 잃지 않길 바란다. 물론 차가 아니라 커피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060714-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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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 이야기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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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세상과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토론과 논쟁에 자신이 없다면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하라!”는 세네카의 일갈은 토론과 논쟁에 대한 반어이자 역설이다. 상대의 인격을 모욕하거나 인신 공격을 시작하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일이 있다. 신념과 주관대로, 마음이 시키지 않는 일에 대해 굽히느니 차라리 부러지는 편이 낫다는 생각 자체가 자괴감을 가져 올 때가 있는 법이다. 산다는 일은 역시 녹록치 않으며 옳고 그름은 항상 법의 잣대 이전에 주관의 잣대로 모든 것이 재단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느낌이 들 때 소설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회의한다. 조경란의 <국자 이야기>는 나와 세상과의 이야기다. 나와 또 다른 나의 이야기는 문학에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어 왔기 때문에 새로울 것도 없고 참신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하늘아래, 아니 문학에 새로운 것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 없다고 한다면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조경란의 <국자 이야기>는 나와 ‘타자’의 이야기다. 여기서 타자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이며 가족이며 타인이다.

이 ‘타자’와의 불화가 소설의 모티브가 된 것은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과 ‘타자’와 나와의 관계나 밀도가 문제일 뿐이다. 조경란은 <국자 이야기>에서 기본적으로 내 안의 나와의 만남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족을 이야기한다. 아버지와 엄마와 동생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나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나는 봉천동에 산다’와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 ‘잘 자요, 엄마’는 부모와의 관계를 풀어낸다기 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거주하는 인간에 대한 관찰을 보여준다. 그것은 봉천동이라고 하는 특정 장소에 얽힌 일화들이 뒷받침되어 사실감을 더해 준다. 현실 속에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물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가족의 범위를 연장하면 ‘국자 이야기’의 외삼촌과 조카로까지 확대된다. 신체의 일부와 같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국자로 상징되는 외삼촌의 이야기는 타자와 구별되는 특징을 저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을 법한 현대인의 상징으로 비춰진다. ‘돌의 꽃’이나 ‘100마일 걷기’ 그리고 ‘입술’과 ‘좁은 문’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는 없으나 사람과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을 통해 ‘나’를 확인하는 과정과는 사뭇 다른 양상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소설의 말미에 해설을 부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나 안읽은 적도 없다. 손정수는 조경란의 이 소설집을 ‘나를 이야기하는 칼리그람으로서의 글쓰기’라고 명명했다. 칼리그람은 부분을 보면 전체를 볼 수 없고 전체를 보면 부분을 확인할 수 없는 점묘화와 같은 기법이다. 예를 들어 무수히 많은 龍자를 써서 용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용을 그린 그림이지만 수많은 ‘龍’이라는 글자는 확인할 수가 없다. 글자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림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조경란이 ‘나’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이와 유사한 방식이라는 평론가의 글에 공감할 수 없으나 전체적인 그림이 틀린 것도 아니다. 모더니즘 계열의 난해한 소설은 아니지만 사건 중심의 감상적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이전과 이후를 조금 더 살펴 볼만한 흥미로운 작가다. 소설을 읽는 재미가 타인의 생을 들여다보고 내 생을 돌아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색다른 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소설이다. 또한 차라리 철저하게 개인에게 매몰된 자세와 태도가 타인에게 훨씬 효과적인 화법이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어설픈 감상과 불완전한 몰입이 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조경란의 소설은 주목할 만하다.

미친듯이 세차게 퍼붓는 휴일 저녁의 비도 언젠간 그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해 보는 것뿐이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칠 정도의 애착은 없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 이 전에 세상에 대한 애정부터 가져 볼 일이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 대한 자괴감을 지울 수 없는 밤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기 합리화를 넘어 그것이 내 한 부분을 지킬 수 있는 힘이라면!


060717-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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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학의 탄생 - 철학, 종교와 충돌하다
미셀 옹프레 지음, 강주헌 옮김 / 모티브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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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 여부를 아직까지도 논쟁의 중심에 두고 있는 바보 같은 사람이 있다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끝난 이야기로 믿었으나 아직까지도 열심히 외치고 있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교사 미셀 옹프레는 <무신학의 탄생>이라는 책을 통해 ‘신학’에 대한 전방위적이고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신들이 그의 표적이 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주된 목표물이다. 여기서 기독교는 프로테스탄트인 개신교를 포함하고 있으나 주로 카톨릭이 논의의 중심이다. 역자는 이것을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지구상의 가장 많은 신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공통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 종교의 대상이 모두 신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닮았다는 데 있다. 그게 왜 중요하냐고? 이 책에서 주장하는 미셀 옹프레의 주장은 신의 허구성과 종교의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들은 학술 논문과는 다른 방식이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수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와 역사성을 검토해 왔던 모든 논의들을 아우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철학과 과학의 입장에서 바라본 종교와 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철학과 역사 그리고 고고학과 해석학,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신화를 바탕으로 종교가 신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 왔는지 밝히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 차원의 논의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종교가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신의 존재에서부터 그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경전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성과 과학, 논리와 철학의 눈으로 신과 종교의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최근 ‘행복’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관적이고 모호한 개념의 ‘행복’은 에피큐러스 학파의 ‘쾌락’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행복과 쾌락의 지속성 여부가 물론 중요하다. 또한 물질적 쾌락인지 정신적 쾌락인지 육체적 쾌락인지 그 대상과 범위,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만큼 다양하다. 이런 시대에 신과 종교는 오히려 현실적인 행복과 즐거움들을 억압한 대표적인 수단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무신론이다.

무신론은 역사 속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고 체계적으로 연구된 적도 없으며 드러내 놓고 논의의 중심에 세워 진 적도 없다. 인류가 이룩해 온 수많은 진화 과정 속에서도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중 하나가 종교와 신의 존재이다. 미셀 옹프레는 ‘무신론’이라 명명한 이야기들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개의 축을 통해 그 진위를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는 제쳐두고 작가의 논의를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생활의 중심에서 그리고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발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나 패러다임의 대 전환을 이루기 위해 한 권이 책을 읽으라는 말이 아니라 또 하나의 고정관념이나 맹목적인 믿음과 신념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야기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물론자이며 무신론자이고 급진주의자이며 냉소주의자’인 나같은 사람에겐 더위를 잊을 수 있는 아주 유쾌하고 즐거운 책이었다. 종교를 가진 사람에겐 큰 거부감이나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읽다가 팽개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종교의 유무에 따라서가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일 수 있으니 그저 무심히 읽어보는 정도가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동아일보사에서 출판된 <예수는 신화다>는 책을 독실한 크리스찬들에게 적극 권장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그 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읽은 사람들은 책을 쓴 사람이 아니라 나를 욕했다. 그따위 책을 권해 줬냐고. 감리교와 가톨릭의 수장들이 ‘믿음’을 통해서냐 ‘선행’을 통해서냐 하는 논쟁을 끝내고 신의 구원에 대한 합의에 대한 선언문을 우리나라에서 발표할 예정이라 시점에서 <무신학의 탄생>이라는 책이 갖는 의미는 신선하게 느껴진다.

신과 종교도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논의할 수는 없을까? 과연 인간에게 절대자가 필요한 것인지 궁금하다. 가까운 사람과 종교와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충고는 이 책에도 적용될지 모르겠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는 추천하기가 머뭇거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킬킬거리며 속시원하게 읽은 책이다.


060724-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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