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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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감각적인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단숨에 읽어버렸다. 체감 재미도 100점을 줘도 아깝지 않다. 워낙 평소에 축구를 좋아하는 개인적인 성향도 한 몫 했겠지만,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충분히 ‘재미있게’ 빠져 볼 수 있는 소설을 간만에 만났다. 그 재미라는 것도 단순하거나 뻔한 스토리와 분위기를 몰아가는 통속(?)소설과는 거리를 분명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 소설의 재미는 독특한 형식과 참신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소설의 의무는 재미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반론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재미없는 소설은 의미만 있을 뿐 소설의 역할을 다시 한 번 고민해 봐야 한다. 재미라는 모호한 말 속에 많은 함의가 들어 있다. 감각적 쾌락과 지적 즐거움을 동시에 가져다 줄 수 있는 탁월한 작품을 우리는 주저없이 명작이라 부른다. 이 소설을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는 물론 없다. 하지만 소설이 거둘 수 있는 극단적 재미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김영하와 성석제를 비벼놓은 듯한 감각적인 문장과 키치세대를 떠올리게 하는 스피디한 전개와 직설적인 화법은 그대로 TV 드라마나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다.

소설이 발표되자마자 10여개 영화사에서 판권을 사겠다고 덤볐다는 후일담에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연애와 결혼 부부와 가족이라는 작은 주제를 순서대로 나열하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생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니 일단 모든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거기다가 2002년 월드컵의 흥분이 가라앉기 전에 50여일 앞으로 다가온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기다리는 국민들을 겨냥한(?) 시의성 또한 기막히다. 한 남자의 연애사와 축구 이야기라는 두 개의 축은 소설의 구성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다. 각각 따로 국밥이 아니라 하나로 어울어지는 교묘한 합체와 분리가 소설의 흥미를 배가 시킨다. 작가 박현욱이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했든 문학이라는 넓은 바다에 이런 소설가가 발끝을 적신다고 해서 큰 누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쓰면 쓸수록 글은 계속 늘 것이라는 믿음이 지켜지길 바란다. 독자의 입장에서 다양한 소설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미식가가 느끼는 그 즐거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축구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만남은 필연을 가장한 우연이다. 물론 작고 사소한 계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만남은 우연이고 그 우연 속에서 서로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연애의 시작이다. 연애와 결혼에 관한 사회사적 고찰과 전 지구적 자료를 뒤적이며 다양한 형태의 결혼 제도와 형태를 소설 속에 녹여내고 있지만 현실에서 용인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현실의 잣대로 소설을 비추어 보는 멍청이가 있다면 당연히 책을 덮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만을 놓고 살펴보아도 일부일처제가 갖는 의미와 역사는 너무 짧다. 주인공 남자의 아내 인아의 말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말 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주인공은 오로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의 논리와 눈물에 설득 당하고 만다. 아내가 결혼하다니? 누구나 제목을 읽고 나면 전처의 이야기에 관한 소설일 거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작가는 허를 찌른다. 전처가 아니라 아내가 결혼 하겠다고 남편에게 청첩장을 보내오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우습고 혹은 비참한 제도 중의 하나를 끝까지 고수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렇게 지켜내면서 얻어야 하는 그래야만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작가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사회, 그 중에서도 결혼 제도의 모순을 한 사내를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풍자나 비판의 목소리가 아니라 솔직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아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재치있는 문장과 유머는 내용의 황당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축구에 관한 많은 자료와 역사는 인류에게 특별한 의미를 준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축구는 특별하다.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이번 기회에 축구와 친해지거나 호기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인 서사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이 소설은 결말이 없다. 물론 궁금하지도 않다. 결말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은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순간순간 상황이 보여주는 선택과 갈등 미묘한 움직임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랑과 연애, 결혼과 부부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되묻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인생이 무얼까. 낯설게 바라보는 인간 생활과 귀찮아서 묻어둔 이야기들을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다. 단 세 명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장편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현욱은 그걸 해냈다. 대단하다. 긴 말이 필요 없는 책이 가끔 있다. 이 책은 그냥 읽으면 된다. 재밌으니까.


06050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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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 종언 바리에테 5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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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근대의 기점과 개념에 관한 논의는 어떤 면에서 길고도 지루하다. 그만큼 중요하고 인류사에서 전환기적 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살고 있는 지금을 현대라고 한다. 현대는 ‘현재’라는 개념과는 물론 구별되어야 한다. 불과 200여년 사이에 인류의 삶과 사상은 그 이전의 어느 시대도 빠르게 변화해 왔다. 중세를 넘어 근대로의 이행기의 특징은 거칠게 표현하면 인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이다. 신 중심 사회의 미망에서 벗어나 인간과 이성이 중시되는 사회로 변화한다. 민족과 국가를 앞세운 파시즘은 맑시즘에 대한 반발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인류 문명은 급격한 변동을 겪었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은 근대의 분수령이 되었으며 예술은 그 언저리에서 언제나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의 역할을 했왔다. 특히 문학은 사회 변혁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문학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지루한 논쟁은, ‘요즘 애들 버릇없다’는 함무라비 법전의 문구처럼 ‘문학의 위기’ 또한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끊임없이 논의되는 지루한 반성문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문학은 어디에 자리매김 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되기 된다. 이 문제는 언제나 있어왔다는 반성적 고찰로 끝날 수도 있으나 그대로 넘길 수도 없다.

  일본의 지성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은 이러한 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문학계의 엄살이 아니라 ‘근대 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라타니의 논문은 한국문학계에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003년 10월 긴키대학에서 발표된 논문이 <문학동네>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이후 비평계가 아니라 언론에서 더 관심을 보였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말한것처럼 문학의 위기 운운이 아니라 ‘근대 문학의 종언’에 대한 선언적 의미는 가히 충격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제 문학의 위기를 넘어 ‘종언’이라고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가라타니의 말은 여러 가지 논쟁을 가져왔다. 한국 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선언인가하는 문제부터 일반화될 수 없는 문학에 대한 종언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짚어 볼 사항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라타니가 던진 화두이다. ‘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문학의 종언’이라니?

  여기서 문학의 범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가라타니는 근대 문학을 특히 소설로 한정 시키고 있다. 사회와 제도를 넘어서서 문학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끝이 없어 보였다. 소설로 표현되는 사상들은 어떤 장르와 매체로도 감당할 수 없는 위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판단이다. 사르트르의 <구토>를 예로 들면서 사르트르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은 소설가 이상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의 역할과 기원은 18세기 러시아와 유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본 문학에서는 소세키의 ‘문학론’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회화의 역할과 의미가 재정립 되었듯이 영화의 출발과 더불어 소설은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부정적 전망이었다. 그러나 회화처럼 소설은 그 위치와 역할의 무한한 위협과 도전 속에서도 근근이 버텨내고 있다. 가라타니는 여기에 종지부를 찍는 선언을 한 것이다. 아메리카 문학은 50년대에 그리고 일본 문학은 80년대에 이러한 현상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여러번 방문한 적이 있는 가라타니는 한국에서 만큼은 아직도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 낙관적 전망을 보았다고 한다. 물론 일본에 비교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근대문학의 종언’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는 함의를 이끌어 낸다. 과연 그의 말은 진실인가?

  물론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종언’이라니. 작가들에게는 귀에 들리지도 않을 말이다. 가라타니가 특히 비판의 화살을 겨누고 있는 것은 문학 비평가들인지도 모른다.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 비평가로서 비교문학을 연구한 것은 시기적으로 대략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내놓은 80년부터 대략 1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다. 이후 철학자로서의 행보를 보여준 가라타니의 견해는 아직 확신에 찬 선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그 선언적 의미가 주는 화두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가라타니는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영문학으로 석사를 받았다. 이 책에서 그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심도 있게 다루거나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가고 있지 않다. 짧은 논문은 발표문 형식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고민의 일부를 던져주고 있을 뿐이다. 1부에서 번역가 시메이와 소세키의 문학론을 살펴보고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논문을 실었다. 나머지 2부 ‘국가와 역사’,3부 ‘텍스트의 미래로’에서는 가라타니 사상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60년 주기의 역사의 반복에 관한 특이한 견해와 교환과 폭력에 관한 국가관, 그리고 자신만의 어소시에이션이즘 이론을 펼치는 대담은 흥미롭다. 책 전체가 강연과 대담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가독성이 높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부터 <공산당 선언>을 통해 경제 체제와 국가의 역할에 대한 견해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생산단계에서 자본과 노동자의 충돌과 투쟁보다 소비 단계에서 ‘선택’의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본도 최종 소비단계에서 한 번은 약자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산업 사회에서 물질을 토대로 한 자본의 경우에 한정되는 문제가 있지만 한 번도 주목한 적이 없는 부분에 대한 고민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만하다. 또 대담에 참여한 학자들의 자신감이 눈여결 볼만하다. 겉으로 드러난 자신감이 아니라 일본의 학문이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갖는 의미와 세계성에 대한 고민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자성과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아 온 교수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소개에 급급한 우리 학계의 현실을 잠깐동안 돌아보았다. 비판과 반성을 위한 계기로 삼을 만하다. 비난과 자조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만 대담자들이 보여주는 논의의 범위와 이론들은 우리의 그것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양한 문제들이 계통 없이 뒤섞여 있다는 느낌보다는 가리타니 고진에 대한 최근의 견해와 이론들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는 책이다. 보다 깊이 있는 관심과 고민은 물론 다른 책을 통해 확인해 보아야 할 문제다. 아쉬웠던 것은 일본 문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가 예를 들어 설명하는 일본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한 거지만 모든 분야에 통달한 전문 독자는 없다고 위로할 뿐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에서도 자주 접하게 되는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과 <다중>이 숙제로 남겨졌다.



060506-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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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문답 - 개혁을 꿈꾼 과학사상가 홍대용의 고뇌
홍대용 원저, 김영호.이숙경 지음 / 꿈이있는세상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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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8세기 조선의 임금은 영조와 정조였다. 왕조 중심의 역사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인물에 대해 살펴 볼 때도 임금부터 확인한다. 나만 그런가? 당시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확인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 인물의 생애와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 사건을 찾아내는 일보다 그러한 토대를 제공한 상황이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18세기 조선은 이앙법으로 토지의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증가했으나 백성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고, 중국을 통해 자연 과학적 지식이 조금씩 전파 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랑민이 발생했으며 상업 자본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자본과 권력이 결탁되고 신분 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한다. 예송 논쟁 등 그야말로 쓸데없는 소모적 권련 다툼이 이어지고 정조의 탕평책이라고 하는 개혁은 정약용 일가 등 천주교도에 대한 비교적 관대한 태도로 이어지지만 오히려 정조 사후 신유박해 등 피바람을 몰고 오는 원인이 된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변화와 개혁의 시도는 그 어떤 혁명보다도 어려운 법이다.

담헌 홍대용은 이런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1731년에 태어난 홍대용은 18세기 실학자로 기억된다. 이덕무나 유득공, 박제가처럼 서자 출신도 아니고 노론 집안에서 태어나 출세가 보장된 그의 관심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노나라 공자의 유학이 주희의 성리학으로 굳어지면서 조선 사회는 철저하게 성리학적 이념이 통치의 근간이 된다. 이것은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백성들을 다스리는 이념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 태도와 사상적 근간이 되어 올가미처럼 벗어나기 힘든 것으로 만든다. 성리학에 대한 근본주의적 태도는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진 자들과 권력층의 기득권 옹호를 위한 전가의 보도가 된다.

홍대용의 기본 사상은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그의 사상의 단면을 확인 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의산문답醫山問答>이다. 음직으로 40세가 넘어 관직에 나갈 때까지 홍대용은 치열한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둔 채 세상의 이치와 만물의 원리에 관심을 갖는다. 그가 보인 관심은 당연히 고정된 틀에 사로잡힌 조선 사회의 모순이다.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내고 대안을 제시한 해결사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혁명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만한 인물을 18세기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우리는 누리지 못한다. 동시대 인물인 박지원이 시대를 주유한 ‘유목민’으로 명명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시대를 온몸으로 거스른 실천적 지식인을 찾을 수는 없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살펴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자위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홍대용은 18세기 북학파 혹은 실학파의 대표 주자로 손색이 없는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은 종교에서 이성으로의 변환이다. 인간의 이성이 사물의 기준과 가치 판단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이어진다. 관념론적 세계관으로 이해되지 않는 유물론적 세계관이 펼쳐지는 것이다. 물론 두 세계의 합종연횡은 이후 끊임없는 논쟁과 연구가 지속되지만 그러한 사유가 시작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18세기는 의미 있는 시대였다. 홍대용의 사상적 전환은 중국 방문에서 연유한다. 35세에 6개월간 북경에 다녀온 홍대용은 자연과학에 더욱 지대한 관심과 열의를 갖는다. 그러한 사유의 증거가 바로 이 책 <의산문답>이다.

허자虛字와 실옹實翁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홍대용은 기존의 통념을 명쾌하게 박살낸다. 이미 이름에서 감지하듯이 ‘허자’는 지금까지 가졌던 그릇된 지식과 사물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실옹’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헛된 것들로 가득 찬 ‘허자’와 실재적인 것들로 무장한 ‘실옹’의 대화는 ‘허자’의 깨달음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풍자된다. 우회적이고 애매한 태도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통렬한 방법으로 허자를 꾸짖는 실옹의 목소리는 바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대한 홍대용의 비판의 목소리로 들린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동양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단편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책이 아니라 홍대용이 지니고 있는 사물에 대한 혹은 세계관 자체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과 ‘패더다임의 변환’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하는 책이다. 18세기에 이런 주장과 생각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당시의 현실과 그와 사상적 교류와 친분을 나눈 동시대 인물들에 대한 관심과 비교는 한층 더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이다. 박지원과 정약용은 물론이고 북학파의 저작과 사상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생긴다.

겨우 250여 년 전 급격한 사회 변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홍대용의 사상은 <의源??이라는 저작을 통해 그 단초를 제공한다. 1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와 그 이후 ‘탈근대’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그 변화의 조짐들을 읽어내는 일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짧은 내용에 중간 중간 해설을 덧붙이고 쉬운 말로 번역해 놓은 책이라서 원문과 멀어진 단점이 있고 해설 자체가 일반적이고 평범한 내용의 반복이라서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든다. 중간에 삽입된 해설 때문에 전체 내용의 흐름에 맥이 끊기기도 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기획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출판사의 좋은 기획과 출판 의도가 좀 더 완성도 높은 책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060509-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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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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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 순간도 곧, 과거가 된다.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금방 현재가 되어 버린다. 시간의 모든 주름들 사이로 시간은 하나가 되고 일직선상의 모든 흐름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의 고리가 되는 순간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공간을 탈주하라.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모든 시공간의 의미에 대해 해체와 분석을 시도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에게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는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 이후의 삶과 앎의 의미를 고민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거쳐 가야할 텍스트로 손색이 없는 훌륭한 책이다.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라는 저자의 표현은 이 책의 의미 전반을 투사하는 조명등이다. 18세기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가 이루는 세 개의 그물망이 이 책을 가로지르는 의미망이다. 그런데 이 의미망이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대단히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고미숙의 의도는 텍스트 전체가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 사유의 틀을 제공하고 각 장의 의미들이 엮어내는 경계들을 넘나들며 나비처럼 자유롭게 ‘앎의 혁명’을 꿈꾸고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지식 코뮌에서 숙성된 고미숙의 글은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학문적 틀 안에 갇힌 아카데미즘과 학술 보고서에 기초한 죽은 지식들의 파편들을 해체한 후, 죽어버린 지식과 인식의 틀을 바로 잡고 인공호흡을 통해 생명의 따스한 온기를 불어 넣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이 신통력은 사이비나 이단, 사파로 분류될 수 없는 강렬한 흡인력을 갖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뛰어난 글쓰기 능력 때문이다. 이 능력은 독자에게 충분한 설득력과 긴장감을 동시에 공급한다. 18세기의 동양사를 가로지르는 깊이와 넓이는 설득력을 높이는 지적 헛기침이 아니라 자유롭게 확대 재생산된다. 적절한 인용과 글의 흐름에 탄력을 붙이는 솜씨가 일품이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고미숙만한 성찬을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스타일리스트의 일면을 여지 없이 보여주는 글이다.

  ‘나비’로 상징되는 박지원의 글쓰기에 숨어있는 유쾌하고 발랄함을 기본으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인용하면서 ‘근대’가 우리에게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다가 왔는지 흥미진진하게 근대의 접힘과 펼침을 반복한다. 이런 방식은 각 장 첫머리에 인용되는 ‘푸코’를 통해 재확인된다. ‘전사’의 냉정함과 날카로움은 고미숙이 꿈꾸는 이중적 방식 중의 하나였겠지만 내용이 아니라 전체를 구성하는 틀과 근대를 바로보는 인식 방법으로 재현된다. 그래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연암에게서 춤사위를 빌려 왔으나 안무는 푸코에게 맡긴 것 같다.

느림 또는 시간의 유목주의란 이 ''얼빠진'' 일정표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코드화된 방향을 벗어나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 삶과 지식의 새로운 배치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질적인 집단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때 속도, 균질화, 화폐의 삼중주는 깨어진다. …… 느림의 또 다른 표상은 자기속도를 지니는 것이다. 순간속도가 강렬도의 문제라면, 자기속도는 이질성과 관련된 사항이다. 노마드의 여정에는 목적지가 없다. 아니, 여정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해야 맞다. 따라서 그는 여정마다에서 마주치는 온갖 대상들과의 능동적 접속을 시도한다. - P. 84

  이 책의 출발은 우리가 인지하는 시공간에 대한 개념이다. 여기에서부터 일탈이 시작된다. 직선상의 펼쳐진 팽팽한 긴장감. 이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부딪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다. 이곳으로부터 탈주해야 우리는 그녀가 안내하는 여행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책의 전체 구성은 ‘시공간-인간-성-몸-앎-글쓰기’으로 되어 있다. 11장으로 각 장이 구분되어 있으나 말과 사물들이 두서 없이 충돌하는 자유로운 해방의 공간이다. 여정 자체가 목적인 노마드는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인간의 존재와 성(性)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하는 몸에 대한 성찰이 안을 들여다보는 과정이라면 앎과 글쓰기는 밖으로 표출되는 존재 방식이다. 고미숙은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 글쓰기를 택했다고 스스로 선언한다. 공부해서 글쓴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부럽다! 젠장!

  그러나 그 당당함과 유쾌함에 독자들은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다. 최근에 읽었던 수잔 손탁의 <은유로서의 질병>, 홍대용의 <의산문답> 등 근대를 이야기하는 중요한 주제와 관심사, 필수적인 저작들이 절묘하게 녹아 있기 때문에 편안하고 쉽게 쓰여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완전히 소화해내고 적절하게 버무리는 솜가 일품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여기에 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텍스트가 이렇게 재밌게 읽히는 것은 독립적인 장과 절들의 재미와 유기적인 연관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특별한 주장이나 핵심적인 요소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지식들간의 합종 연횡, 주름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여유, 깔끔하고 탄력적인 문장들의 조합은 이 책의 가치를 배가 시켜준다.

  이 책의 고별사에 적힌 다음 글에 공감하며 나도 평생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공부는 더 이상 취미나 교양이 아니다. 더 이상 소위 전문가 집단이 독점하는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네 삶에서 날마다 하고, 평생을 해도 변함없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공부 말고 달리 무엇이 있는지를. 그러므로 대학 안에 있건 없건 누구나 평생 배워야 한다.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을 때, 그때 공부는 비로소 최고의 지식이면서 동시에 자기 삶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된다.
공부와 일상이 이렇게 오버랩될 때, 지식은 비로소 근대적 표상으로부터 탈주하여 삶의 역동적 흐름 속으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 "마음을 비워 공부함에 있어 사해(四海) 안에 모두가 형제(兄弟)이며, 중생(衆生)이 모두 깨달음의 스승들이다." 고로, 공부에 외부는 없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 P. 592


06051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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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za 2007-09-09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쾌한 리뷰 보면서 다시 한번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을 쓴다는 건 많은 노하우가 필요한 거지만, 쓸 때만큼은 자기를 잊고 책의 내용에 흠뻑 잠기어 절단.채취하는 것이 더 중요한 거 같아요~
 
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의 의식은 은유를 동반한다. 더구나 색채가 주는 강렬함은 이성적 판단을 넘어선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종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색깔에 대한 문화적 습성은 원형적 이미지를 벗겨내지 못하고 한 민족이나 모든 인류에게 고착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도 변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만 겉으로 표현을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일 따름이다. 금기시 되어 있는 법적 효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을 지배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아직도 선입견을 넘어선 차별을 경험한다. 이 차별은 당연한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나 현실에서의 변화는 만만치 않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매일 부딪히는 문제다. 동남아 노동자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뿌리 깊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미국과 서구 유럽에 대한 근대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혹자는 ‘한국 속의 세계’를 외치지만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약육강식의 국제질서는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자본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권리와 차별의 거부는 작은 외침으로 공허하게 들릴 때가 많다. 뿌리 깊은 인간의 의식의 원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이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얼마나 탁월한 사상가들을 배출했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변화와 삶의 본질적 모습이다. 그 끝이, 완성된 이상적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다만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라는 낙관적 전망만이 오늘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될 지도 모른다.

  1951년 스물 일곱의 나이에 쓰여진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2006년에 읽는 심회를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끼친 명저의 공통점은 선구적 안목과 새로움, 탁월한 분석과 이론으로 보편성과 항구성을 유지한다. 다양한 가치를 긍정하고 인류의 사상사에 진일보한 족적을 남긴 책으로 손꼽히는 책들은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거나 고통스런 사유의 결과물이다. 검은 피부를 가진 앙띨레스 출신 정신분석 의사가 써내려간 한 줄 한 줄이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이 책은 프란츠 파농의 육성 고백을 듣는 느낌을 전해준다.

  흑인의 정체성을 거론하는 것은 ‘타자’화된 ‘백인’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앙띨레스 출신 흑인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곧 흑인 전체를 대표하는 전형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관계를 고찰하고 동 시대인들의 관찰과 저작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식민지 민중의 의존 콤플렉스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글은 스물 일곱 청년의 육성이 배어 있다. 특히 흑인성이나 흑인과 정신병리, 흑인과 인정투쟁을 이야기할 때 드러나는 감정적 진술은 오히려 객관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인 검은 피부에 대한 회한과 절규로 들린다. 검은 피부가 백인에게 주는 은유들이 수없이 많다. 특히 사르트르의 <반유대주의와 유태인>을 인용하면서 흑인과의 유사성과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은 탁월하다. 유럽인들의 트라우마인 반유대주의와 흑인에 대한 반응은 겹침과 펼침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다. 백인들이 흑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편견과 흑인들 스스로 규정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원칙적으로 무언가를 기술한다는 것의 의미는 비판적 접근을 내포한다. 따라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P - 203

  원칙과 나이와 상관관계는?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고민하는 프란츠 파농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서른 여섯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한 그의 고뇌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프랑스의 흑인 문제로 국한된 것처럼 보이는 그의 글은 이후 그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60년대 킹 목사나 말콤 X의 방법과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근본적 원인은 동일하다. 이십대에 프란츠 파농이 겪은 사유 과정이 시대를 넘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직도 그의 고민이 끝나지 않은 채 흑인 문제 뿐만 아니라 차별과 편견이라는 서로 다른 문제들에 공통적인 접근법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의 말이 현재형으로 다가오는 것은 반성적 태도를 요구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것이다. 프란츠 파농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향한 웅변으로 들리는 이유는 검은 피부보다 더 역겨운 하얀 가면들이 세계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연구를 끝마치면서 나는 희망한다. 이 세계가 나와 더불어 활짝 열려진 모든 종류의 의식의 문을 느낄 수 있기를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기도한다.
  “오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P - 292


060517-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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