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활사박물관 3 - 고구려생활관 한국생활사박물관 3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3권) 지음 / 사계절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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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칠 수 없는 본능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다. 안으로 향하는 눈이 없어서다. 거울을 보면서도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인간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항상 남의 탓이다. 한 인간에 대한 관찰과 평가가 쉬운 한 마디로 대체되거나 편견과 선입견이 되어 버린 말들은 고정된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탓이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망은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 않다. 그 끝없는 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과연 시간만일까?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증오가 국가 차원으로 확대된 것이 전쟁이다. 물론 생존권 확보를 위한 동물적 본능에 의한 투쟁이 발단이 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후 인간들은 끊임없이 싸워왔다. 항상 너를 탓하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었고 호전적이고 적극적이며 자유로운 기상을 지녔다는 고구려의 멸망도 전쟁에서 비롯된다.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는 중요하지 않다. 국가의 존립마저 뒤흔들어버리는 갈등은 개인이든 국가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의 인간성이 파괴되듯 국가는 멸망에 이른다.

  고구려의 벽화에서는 특이한 두 신이 등장한다. 야철신과 제륜신이다. 야철신은 철과 도구를 담당하는 신으로 그리스나 로마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바퀴를 관장하는 제륜신은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당시 수레를 통한 운송 수단의 발달을 보여주는 증거다. 수레는 단순히 많은 물건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다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 삶의 터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유목과 정착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가 문제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직경 1.5미터가 넘어 보이는 바퀴는 2천 여년 전 작품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찬란한 발명이다.

  왕과 귀족이 사는 성안과 성밖 사람들의 구분이 생겨나고 세금 징수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해졌을까? 복잡하고 정교한 통치수단과 민중들의 삶의 모습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벽화에 그려진 왕과 귀족들의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항상 주변에 작게 그려진 사람들이다. 능력과 신분이 일치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교육과 예술 분야에서도 탁월한 진전을 보인 고구려는 이제 본격적인 인간 사회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 예술이라는 것이 생겨난 측면도 있지만 삶의 과정 속에 드러난 부분들이 실용성을 배제한 채 본격 예술도 등장하기도 했다.

  고분에 그려진 고구려인들의 생각은 지금도 비슷하다.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다. 죽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 많은 부장품과 고분 천장의 그림이 그것을 말해준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등 각각 방위를 담당하는 동물들의 역할은 사후 세계에 인간의 두려움과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해 주었을 것이다. 어둔 밤하늘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별들을 관찰했던 선조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우리들이 바라보는 하늘과 달랐을까? 무덤에 그려진 별 그림들은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다. 다만 명칭과 위치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 별들을 묶어내고 관찰하는 방식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죽어서 하늘로 간다고 믿은 것인지, 하늘로 가는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을 놓고 아직도 일본과 견해가 다르다. 많은 설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답과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불행했던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비문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 해석과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아 보인다. 경험에 보지 못한 상황들과 감정들에 대해 더 크게 떠들고 있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의 자부심과 영토에 대한 아쉬움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나라 고구려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의미 이전에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어떤 모습과 구체적인 형태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한다. 그것이 기록으로 남든 그렇지 않든. 개인이든 국가든. 지나온 시간과 쌓아온 세월에 대한 흔적들은 고스란히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남겨진다. 객관성이라는 성격 자체가 역사에서는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방식들은 지금도, 여전히, 개인이든 국가든 반복되고 있다. 정답이 있겠는가.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인간들의 반복된 습관인 것을.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너 자신을 알라’

06012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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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사박물관 3 - 고구려생활관 한국생활사박물관 3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3권) 지음 / 사계절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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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칠 수 없는 본능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다. 안으로 향하는 눈이 없어서다. 거울을 보면서도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인간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항상 남의 탓이다. 한 인간에 대한 관찰과 평가가 쉬운 한 마디로 대체되거나 편견과 선입견이 되어 버린 말들은 고정된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탓이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망은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 않다. 그 끝없는 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과연 시간만일까?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증오가 국가 차원으로 확대된 것이 전쟁이다. 물론 생존권 확보를 위한 동물적 본능에 의한 투쟁이 발단이 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후 인간들은 끊임없이 싸워왔다. 항상 너를 탓하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었고 호전적이고 적극적이며 자유로운 기상을 지녔다는 고구려의 멸망도 전쟁에서 비롯된다.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는 중요하지 않다. 국가의 존립마저 뒤흔들어버리는 갈등은 개인이든 국가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의 인간성이 파괴되듯 국가는 멸망에 이른다.

  고구려의 벽화에서는 특이한 두 신이 등장한다. 야철신과 제륜신이다. 야철신은 철과 도구를 담당하는 신으로 그리스나 로마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바퀴를 관장하는 제륜신은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당시 수레를 통한 운송 수단의 발달을 보여주는 증거다. 수레는 단순히 많은 물건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다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 삶의 터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유목과 정착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가 문제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직경 1.5미터가 넘어 보이는 바퀴는 2천 여년 전 작품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찬란한 발명이다.

  왕과 귀족이 사는 성안과 성밖 사람들의 구분이 생겨나고 세금 징수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해졌을까? 복잡하고 정교한 통치수단과 민중들의 삶의 모습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벽화에 그려진 왕과 귀족들의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항상 주변에 작게 그려진 사람들이다. 능력과 신분이 일치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교육과 예술 분야에서도 탁월한 진전을 보인 고구려는 이제 본격적인 인간 사회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 예술이라는 것이 생겨난 측면도 있지만 삶의 과정 속에 드러난 부분들이 실용성을 배제한 채 본격 예술도 등장하기도 했다.

  고분에 그려진 고구려인들의 생각은 지금도 비슷하다.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다. 죽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 많은 부장품과 고분 천장의 그림이 그것을 말해준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등 각각 방위를 담당하는 동물들의 역할은 사후 세계에 인간의 두려움과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해 주었을 것이다. 어둔 밤하늘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별들을 관찰했던 선조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우리들이 바라보는 하늘과 달랐을까? 무덤에 그려진 별 그림들은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다. 다만 명칭과 위치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 별들을 묶어내고 관찰하는 방식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죽어서 하늘로 간다고 믿은 것인지, 하늘로 가는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을 놓고 아직도 일본과 견해가 다르다. 많은 설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답과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불행했던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비문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 해석과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아 보인다. 경험에 보지 못한 상황들과 감정들에 대해 더 크게 떠들고 있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의 자부심과 영토에 대한 아쉬움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나라 고구려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의미 이전에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어떤 모습과 구체적인 형태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한다. 그것이 기록으로 남든 그렇지 않든. 개인이든 국가든. 지나온 시간과 쌓아온 세월에 대한 흔적들은 고스란히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남겨진다. 객관성이라는 성격 자체가 역사에서는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방식들은 지금도, 여전히, 개인이든 국가든 반복되고 있다. 정답이 있겠는가.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인간들의 반복된 습관인 것을.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너 자신을 알라’

06012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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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경제학 - 상식과 통념을 깨는 천재 경제학자의 세상 읽기
스티븐 레빗 외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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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해가 마무리되면 각종 매체에서 발표하는 올해의 책이나 독자 선정 올해의 책은 선정과정과 분야별로 천차만별이다. 믿을만한(?) 사람들과 매체에서 발표한 책들 중 중복되는 몇 권을 골랐다. <괴짜 경제학>이 그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혹은 흥미를 유발한 만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는 믿음 때문이다. 항상 베스트셀러에 속지 말자는 당연한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과 기자 스티븐 브러너가 공저한 이 책은 ‘경제학’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경제학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야기다. 습관적인 생각과 단순한 사고는 세상을 한가지 색으로 인식하게 한다. 상식과 통념을 깨는 통찰력을 갖는다는 것은 산을 옮기는 일보다 어렵다. 낯설게 바라보고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판단하는 일의 어려움은 주변 사람을 돌아보면 안다. 아니, 그보다 먼저 거울을 들여다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현상과 본질에 대한 철학에 대한 기초적인 사유방식만 갖고 있더라도 어떤 사건에 대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본질보다 현상을, 그것도 전해진 사실과 확인되지 않았거나 부풀려지고 확대된 현상들이 거품처럼 떠다닌다. 그래서 이런 책들이 잘 팔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극적이고 매혹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욱 그러하다. 교사와 스모 선수의 공통점은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라는 결론과 마약판매상이 어머니와 같이 사는 이유는 판매대금의 대부분을 보스가 챙기고 똘마니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점에 대해 통계적 수치를 통한 경제학적 분석으로 객관화하고 있다. 데이터를 통한 객관적 사실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진실은 실제보다 많아 보인다.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능력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실도 아니잖는가? 특별한 발견과 대단한 통찰력은 범죄율의 감소 원인을 각종 정책과 경찰력의 증가등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낙태 허용법안에서 찾고 있는 것 정도가 되겠지만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상적 세계를 말하는 윤리학과 달리 현실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 경제학이지만 하나의 요인으로 하나의 결과가 벌어진다는 단선적인 해석은 위험해 보인다. 한 여성의 낙태금지법 반대 투쟁을 통해 미국 전체 범죄율이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북경의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미국에 허리케인이 올 수도 있다니까. 하지만 객관적 데이터와 숫자 놀이가 경제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이라면 또 다른 변수와 다양한 원인들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인과 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 속에서 찾아내지 못한 원인들은 의미있는 결론이 아니다.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자녀교육에 대한 객관적 서술들은 현실 적용문제에서 간단치 않다. 이름을 짓는 방식에 대한 경제학적 관점과 분석은 별로 흥미롭지 않으며 새로운 방법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회학이나 인류학적 관점에서 혹은 자연과학의 관점으로도 다양한 원인과 분석이 가능한 문제들이다. 물론 스모 선수의 승률을 통한 부정행위나 학생들의 답안지를 분석해서 교사들의 부정을 찾아내는 일은 통계 자료의 의한 분석으로 찾아낸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일이다. 그 역할과 중요성이 축소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선적이고 직접적인 원인들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현대사회의 삶의 표층을 벗겨내어 그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이다.

첫째, 인센티브는 현대의 삶을 지탱하는 초석이다.
둘째,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사회 통념 가운데는 잘못된 것들이 많다.
셋째, 전혀 예상치 못한 극적인 결과는 흔히 거리가 멀고 미묘한 요인을 원인으로 한다.
넷째, 범죄학자에서 부동산 중개업자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전문가’들은 정보의 우위라는 강점을 자기
자신의 아젠다를 위해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를 알면 복잡한 세상이 훨씬 단순해진다.


  이 책의 집필 목적과 내용의 얼개를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통계나 데이터를 통한 경제학적 관점으로 ‘훨씬 단순’해 보이는 ‘복잡한 세상’이 절대 단순하지 않았는데 문제가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이의 제기일 뿐이다. 다양성에 대한 논의와 방식은 존중한다.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잠자리의 무수한 겹눈 중 하나일 뿐이다.조각난 그림들이 제대로 맞추어져 하나의 퍼즐조각처럼 복잡한 세상의 이야기들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영원한 꿈일 뿐이다.

  경제학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메시지가 무궁할 것이란 사실에는 동의한다. 수학과 통계자료에 매몰된 학문적 관점이 아니라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관점과 논의들을 쏟아내고 연구하는 학자들이 필요하다는 데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쉽고 재밌는 이야기책처럼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대박에 성공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대중성은 동면의 단면일 뿐이다. 좋은 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060125-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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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 시작시인선 49
김신용 지음 / 천년의시작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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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 ‘환상통’중에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88년에 무크지로 시작한 고려원의 <현대시사상>은 계간지로 전환되어 96년 겨울호까지 간행되었다. ‘모더니즘과 마르크시즘’, ‘해체주의’로 시작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비평, 페미니즘, 전위시론, 저자의 죽음, 라깡, 푸코, 데리다, 아방가르드, 탈식민지 문화이론, 타자에 대한 논의까지 현대시에 관한 다양한 사상적 주제들을 담아 내던 계간지였다. 책 꽂이 한 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책들 속에 시인 김신용이 자리잡고 있다. ‘버려진 사람들’과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이 그것이다.

  김신용의 시의 주제는 고통이다. 시가 상실의 예술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고통스럽지 않은 시는 많지 않다. 그러나 김신용의 고통은 직접적인 통각에서 비롯된다. 가난과 삶의 모멸에서 비롯된 고통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일용잡부의 삶을 이어오며 ‘시멘트 침대’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의 고통을 무엇 때문에 시로 담아냈던 것일까?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의 시들은 여전히 아프다. <환상통>에서 보여주는 시세계는 김신용의 시가 자기영역을 확보했다는 표지로 읽힌다. 늦은 나이에 등단의 형식을 거쳐 일용직 노동자 시인의 삶을 이어온 그의 시는 깊이와 넓이를 더해 간다. 현실에 대한 안주와 나타로 대변되는 관념의 유희, 그것을 넘어선 그의 시는 깊은 울림이 있다. 시인의 경험과 깊은 사유가 길어올린 우물물에 비유할 만하다. 깨끗하고 담백하다. 군더더기나 잡스러움이 없다. 관념의 언어로 자기 만족에 함몰되는 많은 시와 비교될 수 있다. 삶의 방식과 태도를 가다듬는 내면의 고백으로 그치지 않고 가난과 신산스런 삶이 그려주는 물결 무늬가 투명하게 드러난다. 

지하도 구석에 구겨 박힌 몸뚱이 하나가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오늘도 숲 속의 너와집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뿌린 만큼 거두는 흙 속의 집을 짓고 있는 것일까?
그 꿈틀거림이, 낮게 자신을 성찰하는 자의 몸짓을 닮았다

- ‘시멘트 침대’중에서

  그들이 꿈꾸는 ‘숲 속의 너와집’은 김신용이 오래동안 꿈꾸었던 지상의 집 하나와 유사하다. 실존의 문제는 관념에 앞선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먹을것인가의 문제와 부딪히면 얘기는 달라진다. 여전히 배고픈 사람들과 생존 자체가 치열한 문제인 사람들은 인식의 틀이 다르다. 그 꿈틀거림조차 ‘자신을 성찰하는 자의 몸짓’으로 볼 수 있을까? 시인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반성의 질문으로는 아쉽다. 자연에서 인간을 들여다보는 눈은 대체로 과거와 현재가 동일하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비목어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성찰이 생내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가진 비목어가 되어 가고 있다.

比目魚여,
눈이 하나 밖에 없어, 세상의 한쪽 밖에 보지 못한다는
눈이 하나 밖에 없어, 그대의 뒷면을 보지 못한다는

물고기여,

그 하나 밖에 없는 눈의, 또 다른 물고기를 만나
둘이 한 몸이 되었을 때, 세상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다는

비목어여.

- ‘비목어’ 중에서

  ‘세상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 중의 우리는 하나일 뿐이다. 그러면서 비목어를 비웃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나부터. 내가 가진 시선과 관점으로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충고가 아니라 시인은 비목어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반쪽 비목어를 찾아서 온전한 눈을 갖고 싶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것이 사랑일까? 모두가 불행한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 고통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지껄인다. 귀가 따갑다. 손톱밑에 박힌 가시가 전해주는 고통은 타인의 생명보다 중요하다. 자신의 불행은 항상 타인의 불행을 능가하는 법이다.

자신의 불행에 짓눌려, 타인의 불행에 눈길 돌릴 여유 하나 없는, 삶은 얼마나 불행한가? - ‘다시, 풀잎에 기댄다’ 중에서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삶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시인의 바람일 뿐이다. 타인의 불행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나와 가족의 울타리를 넘지 않는다. 이기주의와 가족주의를 넘어설 수없는 세상이다. 시인의 말이 공허한가? 각자 거울을 들여다 볼 일이다. 답이 없고 대안이 없어 답답한게 아니라 수많은 상상의 여지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시는 아름다운 감상주의를 넘어선 자리에 위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김신용의 시집<환상통>에 갈채를 보낸다.

가시 1

가시에 얼굴이 비쳐 보일 때가 있다

핏방울이 묻어날 듯 날카롭게 돋아 있는 가시가
거울처럼 얼굴을 비쳐 보여 줄 때가 있다

내가 가시가 되었을 때다
내가 가시가 되어 가시를 바라 볼 때이다

그때, 가시는 드므다 된다
가시가 된 내 얼굴을 맑게 떠올려 주는 물거울이 된다

가시가 가시를 겨누는 그 전율!

내가 또 하나의 敵意 앞에 섰을 때의 삶이
덫과 같은 맑은 물거울에 파동 치는 순간!


060127-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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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
레스터 서로우 지음, 현대경제연구원 엮음 / 청림출판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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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은 세계화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글로벌 스탠다드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화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쟁은 자본주의의 판정승으로 끝났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세계화라는 이름표를 달고 21세기를 풍미하고 있다. 이 거대한 공룡과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냉전시대를 지나 구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는 지구상의 이념 대립에 종지부를 찍은 듯하다. 이후 급속도로 미국의 패권시대를 이루고 있다. 유럽 연합이 탄생했으나 강력한 통일체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며 일본은 장기간의 경기 침체로 국제 사회보다 국내 경제에 몰두해왔다. 견제와 브레이크가 없는 미국의 독주는 세계화를 미제국주의화로 인식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고 반미가 자연스런 현상으로 나타난다. 좌우의 이념대립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처럼 세계화에 대한 찬반논쟁은 이미 의미없는 논쟁이 되어버린 듯하다. 세계화는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해결해야하는 구체적 현실태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사회 양극화는 어제 오늘이 문제가 아니다. 국가 차원의 아젠다로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참여정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긴급 상황이라는 뜻이다. 올해 참여정부의 국정과제가 ‘양극화 해소’라고 하니 이제 본격적으로 모두 양극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문제의 심각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 되었으나 무시되었거나 소홀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정부와 민간 차원의 대책과 해결책 마련이 시급하지만 여전히 남의 나라 이야기로 여기는 사람도 많다. 구체적으로 내가 밥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다. 물론 그 단계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개인의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과 대책은 거의 전무하다는데 이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세계화는 정부가 나서서 막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기업이나 개인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레스터 C. 서로우라는 미국인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물론 그의 입장과 견해에 한 줄 한 줄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감정적으로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지만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세계화는 진행되고 있으며 제1세계 중심의 세계화와 제3세계 입장에서의 세계화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물론 세계화는 이제 선택의 문제를 넘어섰다는 가정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대안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종속적인 산업구조와 자본의 지배구조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다. 국가의 권력은 오히려 축소되거나 위축되고 경제권력의 힘은 막강해지고 있다. 욕심, 낙관주의, 군중심리라는 자본주의의 유전요소를 적절히 통제하는 것만이 세계화라는 글로벌 경제체제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입장에 일정부분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세계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경제가 스스로 진화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의 문제를 떠나 이제 의도대로 구상하고 구축하느냐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이 책을 계속 읽어나가도 좋겠지만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은 이 책을 아예 펼치지 않는 것이 좋다. 살아 숨쉬는 유기체와 같이 스스로 진화하는 자본이라는 괴물이 모두에게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한 불안은 나만의 기우일까? 자본주의 넘어에는 무엇이 우리의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스스로 통제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미래의 사회 구조와 형태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지역간 민족간 국가간 경쟁을 넘어선 자리에 소수만 살아남는 제도가 완성될 것인지 양극화로 대표되는 세계화의 물결은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지는 수많은 논의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로 여겨진다.

  당장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미시적 접근과 국가 경제 차원에서 구상할 수 있는 거시적 문제들이 혼재에 있는 복잡성이 문제 해결에 쉽지 않은 양상을 보여준다. 저자의 말대로 세계화를 전제로 그 이후의 ‘부의 지배’에 대해 관심과 문제 해결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것도 또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재는 여전히 우울하고 마르크스가 말했던 자본주?우울한 유령들이 이제야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몽상에 빠져본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가지자!”는 체 게바라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감상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꿈꾸어왔던 인간들의 삶이 모습이 급격한 형태로 변화하는 전지구적 모습을 떠올렸을 때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다. 한 경제학자의 견해에 왈가왈부하는 것 이상의 논의와 대책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세계화에 동참하려면 새로운 환경에 뛰어드는 대담함이 필요하다는 서로우의 말은 다양한 문화를 가진 개인을 새로운 문화에 통합시킬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정사실로 세계화를 받아들인다면 최대의 부를 창출하려 한다면 그의 말처럼 “뛰어드는 사람이 더러 패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패배자일 뿐이다. 부는 용기 있는 자의 편이다.”라고 외치며 달려가야 하는 걸까? 부의 접근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한 고민과 점검없이 달려온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아직도 맹목적으로 달려가야 하나? 지금 우리의 자화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시간이 더 필요한가, 아니면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우리들 모두의 행동이 필요한 것인가. 각자 그리고 더불어 고민해 볼 문제다.


0602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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