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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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과 신세기의 구분은 의미 없다. 하지만 인간은 늘 무엇인가 정리하고 구분짓고 싶어하는 버릇이 있다. 불연속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두가 따로국밥이다. 20세기가 끝났다고 해서, 21세기가 시작됐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많지 않다. 그것은 분명 심리적인 문제일 것이고 하나의 계기를 만들고 싶은 또 다른 욕망일 것이다.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고 매주 다시 맞이하는 월요일에 대한 반복적인 시간 패턴에 적응하는 인간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난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늘 대화는 필요하다. 상대방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눈으로 내가 비쳐지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공존과 대화보다 대립과 갈등이 심했다. 서로에게 부족한 면을 보충하자는 전략적 제휴도 아니고 모르는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와는 다른 대화가 진행되어 왔다.

  비판적 지성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주장하는 영문학을 전공한 인문학자 도정일과 안다는 것은 아름다움의 기초가 된다는 신념을 가진 동물사회학을 전공한 자연과학자 최재천의 만남이 <대담>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특별한 만남도 아니고 출판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대한민국 지성사 최초의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지만 아주 의미있는 일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생각의 방식과 사물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는 즐거움은 덤으로 얻는다. 우리는 늘상 우리 곁에 존재하는 사물들에게 무심한 눈길을 보내고 선택적 관심과 고정된 시선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인문학을 전공한 나에게는 자연과학적 관점과 시선이 누구보다도 부족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방식과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니 사물과 사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세상에 대한 삶의 방식도 달라진다.

  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는 전제하에, 많이 안다고 해서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을 믿을 수도 없다. 호기심과 끊임없는 앎에 대한 욕망은 사람을 때로는 지치고 힘들게 한다.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 사람의 긴 대화를 읽어가면서 결국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 회귀했다. 문득, 누군가 내게 위선보다 위악이 더 나쁘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유전자를 통해 세상에 태어나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과정과 방법은 실로 경이롭다. 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조차 본질적으로는 아름답고 신기할 따름이다.

  자연과학적으로, 아니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속성과 이해가 필요하듯 인문학적 인간에 대한 관심과 통찰은 더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두 가지 성향을 지닌 인간에 대한 관심과 탐구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이 책의 역할은 충분하다.

  박학다식한 두 석학의 지적 유희와 번지르르한 말장난을 우려하지는 않아도 된다. 나름대로 도정일은 폭넓은 자연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최재천은 문학 소년이었던 시절을 말할 만큼 인문학과 공감할 수 있는 학문인 동물들의 사회생물학을 전공했다.

  두 사람 사이의 불꽃 튀는 논쟁과 첨예한 대결은 찾아볼 수 없다. 시종일관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이고 상이할 것 같은 두 학문 분야의 접점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의미 있을 뿐이다. 서로 놓치거나 구멍이 뚫려버린 부분들을 비추어 주고 중첩되는 부분에 대해서 공유하는 방식은 하나의 사유 방식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해석과 대안에 일정부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대학에서 학부제가 운영되는 취지가 제대로 살려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의 학문과 전공의 교육과정이 이렇게 철저하게 분과주의로 흐른 원인도 고민해보고 앞으로의 길도 모색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진정한 교양인으로 길러내기 위한 노력을 대학이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닌지,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사회의 ‘능력있는 공부기계’만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점검도 필요하다. 효율과 결과에 집착하고 경제성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에 대한 반성도 절실하다.

  21세기는 이미 시작되었고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은 언제나 불투명했다. 인간이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두 학자의 말에서 찾아본다.

  저는 21세기의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강의를 많이 합니다. 2003년 1월에 모리 전 일본 총리의 초?받아서 일본에 갔다가 이런 강의를 했습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도 하고 호모 폴리티구스이기도 하지만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즉 공생인간이기도 하는 내용이었어요. - P. 593
  남미의 이반 일리치 같은 사람도 공생의 지혜와 철학을 끊임없이 이야기했어요. 일리치는 인간이 가진 대표적인 ‘공생의 도구’로 자전거, 도서관, 그리고 시(詩)를 꼽았습니다. - P. 596(최재천)

  두터운 세계를 꿈꾸는 호모 심비우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충돌하는 지점도 이곳이고, 과학과 인문학이 손잡고 공생을 추구해야 할 지점도 이곳인 것 같습니다. - P. 597(도정일)


060116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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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온 편지 작가정신 소설향 23
장정일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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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선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내 경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 혹은 ‘하이퍼링크’ 방식으로 이름 붙여 놓은 방법이 있다. 책을 읽다가 꼭 보고 싶은 책이 눈에 띄거나 저자가 소개를 하면 그 책으로 갈아타는 방식이다. 영역과 장르를 넘나들며 읽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같은 분야에서 다양성을 확보할 수도 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주변에서 얻어지는 책에 대한 정보들이다. 한겨레 서평이나 추천 목록을 참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전자보다 위험하다. 출판사의 뛰어난 마케팅 능력이나 주례비평의 낚시 바늘에 걸려들기 십상이고 특히 검증되지 않은 신간에 대한 불안감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장정일의 <중국에서 온 편지>는 첫 번째 방법으로 선택한 책이다.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에서 저자가 적극 추천했던 두 권 중의 하나다. 나머지 한 권도 읽고 있다. 탁선생이 추천한 이유는 세상에 대한 시선과 관점을 위해서다. 소설은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된다.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시점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다고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3류 쓰레기 통속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김유정의 동백꽃의 서술자가 점순이였다면 사춘기 시골 소녀의 일기장이 되어버린다. 고정된 관점과 시선은 얼마나 위험한가.

  중국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진나라의 시조 진시황에게는 스무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중 가장 출중하고 명석했던 큰 아들 부소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를 토대로 장정일은 다양한 문헌을 뒤적이며 역사의 ‘구멍’을 찾아냈다. 그 구멍은 호기심의 블랙홀처럼 모든 상상력과 추측을 빨아들이는 대신 어둠속에서 선명한 한 줄기 빛을 내뿜는다. 무언가 할 말이 남아있을 역사속의 인물을 되살려내는 전지전능하신 작가는 타당한 이유를 독자에게 설명해야 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분명히 이 글은 소설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부소이자 부소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가면이라고 선언하는 서술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역사적 사실을 따지거나 소설의 잣대를 거부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형식의 이야기든 아주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또 한가지 이 책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주 훌륭한 소설이다. 개연성 있는 ‘허구’가 아니라 ‘진실’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소설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찌됐든 독자의 오감을 충분히 만족시킬만한 책을 뒤늦게나마 만나서 다행이다.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부소가 아버지 진시황의 견제를 받아 만리장성까지의 먼 길을 떠나야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기록도 희미하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소가 떠난 지명조차 밝혀놓지 않았으나 작가의 구라는 들어줄만 하다. 변방의 만리장성을 쌓아가며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천하통일의 일등 공신이었던 몽염에게 보내 희생양으로 삼는 전략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눈이 멀어 몽염에게 도착한 부소는 극진한 치료와 대접을 받고 다시 시력을 회복하며 몽염과 사랑에 빠진다.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몽염에게로 옮아갔다고 볼 수 있다.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부소는 아버지와 죽음을 통해 이세 황제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허망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제목처럼 편지의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끝없이 떠벌이는 형식은 단 한 번의 휴지기 없이 한 호흡으로 길게 하소연한다. 말없이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아버지와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이는 아들 부소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1인칭 서술자의 끊임없는 언변에 혀를 내두르도록 만들어버린 역사적 상황과 틈새에 있지 않다. 중요한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이 소설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기본 토대라면 아버지와 비교를 통해 한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삶의 진정성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항변으로 들린다.

  진시황의 무덤에서 출토된 실물크기의 병마용들을 전시했던 코엑스 전시회에 다녀왔던 적이 있다. 그 엄청난 규모와 부장품에 놀란 것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한 인간의 욕망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절대 권력에 오른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이 역사를 이렇게 만들어 온 것은 아닐까 싶다. 부소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지껄이고 있지만 이 책은 어쩌?아버지 진시황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토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다른 역사적 인물을 살려내서 진시황에 대해 에둘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이 들었다.

  가정법이 통용되지 않는 역사를 뒤집어보는 일은 철지난 노래를 부르는 가수와 같을까? 우리의 관심은 확인되지 않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호기심일 것이다. 기록된 역사의 구멍과 간극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상상력이 소설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자유롭게 지껄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만은 사실 아닌가?


060117-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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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사 교과서 -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테마로 본 11개국의 역사교과서
이시와타 노부오.고시다 타카시 엮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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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교과서가 만나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역사 자체에 대한 논의만으로도 시대와 사관에 따른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도 사학계는 논쟁중이다. 물론 건전한 학문의 발전과 역사에 대한 발전적 논의가 진행 중일 것이다. 국정교과서 제도를 채택하면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이제 7차를 시행하고 있다.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통치이념을 주입하는 수단으로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해방이후 대한민국 교과서의 특징이다. 특히 윤리와 도덕, 국어와 역사는 더욱 교묘한 헤게모니의 장악 수단이 된다.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 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과 논란은 앞으로도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다. 개별적 사건에 대한 원인과 배경을 이해하는 방식은 계층에 따라 혹은 국가와 민족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국가 간의 전쟁에 대한 역사 서술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러한 현상들을 비교 분석하다보면 무엇인가 접점을 보이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눈으로 바라보길래 같은 사건에 대해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이토록 상이한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그것이 후세에 대한 역사교육의 관점이라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이시와타 노부오와 고시다 다카시가 편저한 <세계의 역사교과서>는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우선 주제가 선명하다. 세계사의 수많은 사례와 쟁점들을 점검하려는 무모한 계획은 애초부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는 ‘전쟁’과 ‘식민지지배’라는 두개의 주제만을 다룬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각국의 입장과 태도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을 것이다. 1, 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나라들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방식은 일본과 관련된 국가들을 살펴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첩되는 나라들의 역사교과서를 분석하는 일은 일본의 현재와 미래를 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11개국의 작은 소제목이 각 나라의 역사교과서를 특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민족주의사관에 의거한 역사 - 한국,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기술 - 중국, 1980년대 ‘교서 문제’가 불러일으킨 ‘변화’ - 싱가포르, 역사교육과 ‘과거의 기억’ - 베트남, 독립을 쟁취했다는 자부심 - 인도네시아, 역사를 현대의 문제로 생각한다 - 독일, 역사의식은 가정에서 형성된다 - 폴란드, 세계를 다각적으로 이해하는 인식력을 기른다 - 영국이 그것이다.


  각 나라는 고유한 역사 발전과정을 가지면서 현재를 이루고 있다. 객관적이면서도 자유로운 태도로 역사를 바라보고 인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겠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그렇지 못하다. 선택적으로 자국의 피해사실에 대한 부분은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가해 사실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아예 회피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식민지 지배 사실은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로를 세습시켜나가지만 베트남 민족에 대한 가해 사실은 기초적인 사실관계와 피해 사실조차 확인하고 있지 않다. 미국의 침략 전에 가세한 한국의 경우 베트남전에 대한 성격규정조차 모호하다. 그나마 7차 교육과정에 ‘근현대사’라는 과목이 설정된 것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역사교육이란 사실만을 가르치면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배우는 학생들의 마음속에 형성되는 역사인식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사실의 학습과 역사인식을 동시에 시야에 넣고 실시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역사교육입니다. - P. 42


  역사교육에 대한 논의가 각국의 교육당국과 국민들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런 논의의 과정을 거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교육은 한 나라의 미래다. 특히 역사 교육은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나와 우리, 사회와 국가를 넘어 세계사의 흐름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문제다. 눈물 질질 짜는 애국주의에 호소하거나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인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서술에서 벗어나 전국역사교사모임 등에서 활발히 벌이고 있는 제대로 된 역사교육에 관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획일적이고 공통된 관점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 국가와 민족에 복무하는 역사가 아닌 현재 우리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역사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같은 교과서를 읽어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또 달라야 정상이다. 서로 다른 해석을 두고 대화하는 장소가 교실인 것이다. 빵틀에 구워낸 듯 똑같은 생각을 하는 섬?한 공부기계들은 이제 그만 생산을 중단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교사는 전쟁에 대해서나 다른 일들에 대해서나 언제나 비폭력, 인권존중이라는 가치관을 가치관을 가지고 수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교육이 아닐까 합니다. - P. 291


  역사를 국가에서 분리하고, 보다 더 민중 쪽으로 이끌어 가는 역사가 교과서에 배어 나와야 할 것입니다. - P. 338


  역사교육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사의 역할이다. 위와 같은 관점이라면 교사와 역사교육의 위치가 그래도 적당하다고 합의할 수 있을까? 우리 현실에선 아직도 이념논쟁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소원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인간의 향기가 나지 않는 역사는 의미 없다. 차갑고 냉정한 논리만 남은 역사교육은 더 위험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는 일본인들에게 정신적 외상으로 남아있다. 각국의 역사교과서를 비교 하면서도 반드시 점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그것을 반증한다. 어쨌든 이런 거시적인 프로젝트가 민간에 의해 주도되고 올바른 역사인식과 미래의 역사교육에 대한 거시적 담론을 이끌어 내는 작업들은 쉽지도 않을 뿐더러 그 의미와 성과 면에서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일본 내에서 벌어지는 ‘후소샤 교과서’ 파동에 대한 우려로 시작된 작업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나름의 의미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한중일 공동 역사 교과서를 넘어서 앞으로의 논의와 진행과정이 주목된다.


060118-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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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0-30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은 기억이 납니다. 세계에 대한 역사를 정확하고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 매우 독창적이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sceptic 2006-10-30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님도 즐거운 독서 계속 되시길 바랍니다.
 
아나키스트 문학과지성 시인선 311
장석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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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멜랑콜리 맨의 현대적인 사랑법
나는 우울한 남자, 이성주의자를 몰아내고 싶은 남자
나는 우울한 남자이기 때문에 다섯 사람만 사귀고 싶어
우울한 남자라서 다섯 손가락 펴고 다섯 세상을 꿈꾸고 있지만 나는
우울하기 때문에 눈물에 젖어 저 너머에 세워질
이성주의자의 묘비명을 생각하고 있어

  - ‘내 마음의 아나키’ 중에서

  지루한 이성과 감성 놀이의 틈바구니에서 허구적 거리는 몸짓을 보여주는 시인이 장석원이다. 라고 한다면 시인은 화를 낼 것이다. 설익은 목소리와 탄탄하지 못한 내공을 섣불리 판단하긴 어렵지만 첫 시집을 읽는 독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신선하다와 돈 아깝다 사이에서 방황해야 한다. 미래를 알 수 없고 현재가 전부가 아니지만 아직 멀었다.

  ‘아나키스트’는 체제와 조직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자유에 대한 사랑과 자아를 넘어선 타자에 대한 열림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시집 <아나키스트>는 자아의 각성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초록은 깊으나 치명적이지 않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 벌 받아 마땅하다
얼굴 앞의 공포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는 자 벌 받아 마땅하다

  - ‘근원적 센티멘탈’ 중에서

  반복되는 ‘멜랑콜리’와 ‘센티멘탈’ 사이에는 어떤 간극도 없다. 선언적이고 감성적이지만 때때로 공감과 울림으로부터 멀어진다. 시가 여전히 유효한 장르가 되기 위해서는 독자와 감흥 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넘어서는 자리에 홀로 눈물 흘려서는 안된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될 수 없는 장르가 시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잠언적 경구를 떠나 조화된 한 편의 시를 만나고 싶은 것이 독자들의 소망이다. 예를 들어,

크레모아 들고 적진에 뛰어드는 용기.
우리의 만남, 부자연스런 체위, 시와 혁명,
술과 사상, 노동자와 시인.
우리와 그들의 사랑은 소도미야.
소돔 성이 소도미 때문에 망하지는 않았어.
사랑의 힘 때문이야. 서풍이 분다.

  - ‘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 중에서

  차라리 통속적이고 서툴러 보이는 위의 시 같은 경우가 ‘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이라는 지나간 시절의 한 순간을 추억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정밀한 언어 예술로서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드러내는 데 목숨을 건 나머지 소통의 측면에서 부족하다면 ‘대중예술’로서의 직무를 유기를 했다는 혐의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한 편, 한 편 음미할 수 있는 시집을 만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지도 모르지만 전체가 주는 울림 속에 개별적인 시편들이 드러내는 의미를 찾아내는 즐거움을 주는 시집도 드물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시의 제목은 의미 심장하다. 독자와 시인,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새로운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간결하고 짧은 詩行 속에서 수많은 곁가지를 뻗어내는 마지막 구절의 선언처럼.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우연하게도
『창작과 비평』 전질 외판원이었던 그는
지하철 공사 한창이던 네거리 건널목
지하의 발파음 중심을 기울게 하던 그곳에서
정확하게 16일 전 보광동 81번 종점 앞 포장마차 황금시대의 末路 시비 끝에 주먹다짐 파출소 연행 후 지루한 調書 하룻밤 새우잠
그리고 아침의 어색한 화해 끝에 헤어졌던 그 사내를
즉석 복권을 긁고 꽝을 확인한 후
재수 없다 없어 안 되는 놈은 다 안 된다
담배 필터 씹으며 전봇대에 기대 하늘 보다가 다시 만났다
이 도시에서 우연은 격렬한 사랑을 수반할 때가 있다


06011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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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 공감 - 사람, 관계, 세상에 관한 단상들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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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개별성 안에 보편성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정혜신의 이야기는 놀랄만큼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개별적 경험이 세상의 진리라고 굳게 믿는 행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인간과 사회 일반에 관한 이야기들은 결국 개별적 특성을 통한 일반화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정혜신의 <삼색 공감>은 특별한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짤막한 단편들이 모여 있어 긴 호흡으로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과 고민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단점은 촌철살인의 한마디 한마디로 상쇄된다. 한겨레를 통해서 최근에 접한 칼럼도 포함되어 있지만 지나간 이야기들로만 치부할 수 없는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는 일은 의미심장하다.

  우선 ‘사람, 관계, 사회’라는 이 책의 편집이 제목이 되어 버렸다. 삼색은 분명하다. 인간과 사회를 이어주는 관계의 모습.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기 색깔과 관점을 가지고 뚜렷한 목소리를 내거나 일관된 흐름으로 그것을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정신과 의사가 바라보는 세상은 좀 더 객관적이고 분석적일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은 오히려 책을 읽는데 방해 요소가 된다. 직업과 학력, 출신과 성분은 상대를 이해하는 최소한의 배경지식이 아니라 편견과 선입견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직업을 가지고서도 얼마나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가.

  다만 정혜신은 직업과 전공을 병리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보다 일반들의 이해를 돕는데 사용하고 있어 부담스럽거나 주관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칼럼의 특성상 잘난 척하거나 전문가로서의 충고를 잊지 않으려는 시혜적 태도를 버리기 어려운데 비해 비교적 설득력 있고 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매 꼭지마다 일상에서 만나기 쉬운 일화나 비유를 사용해서 평이한 목소리고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하고 싶은 말들을 군더더기 없이 적확하고 명료하게, 때로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어 설명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들에 공감하게 된다.

  짧은 글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데 모범이 될 만한 형식과 내용들을 담고 있다. 물론 지나치게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고 시사 문제와 직결된 인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겠으나 발표된 지면의 특성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주관을 배제한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정혜신이 가지고 있는 성향과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고정되어 있다. 그 관계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냉정하고 차분하며 설득력 있다.

  나는 개인의 특별한 경험을 아주 쉽게 일반화해버리는 사람들이 미덥지 않다. - P. 77

  개인적 경험에 객관과 통찰이 더해지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세상의 모든 진보는 ''경험적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의 ''밝은 눈''에서 출발한다고 나는 믿는다. - P. 77

  본능은 핵심을 놓치지 않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본능이란 정교하고 미세한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존재 이유'' 그 자체에 의해 움직이는 힘이다. - P. 91

  자신의 경험들과 개인적 통찰력을 ‘경험적 문제의식’으로 바꿀 줄 아는 ‘밝은 눈’을 가진 정혜신도 본능처럼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 고민들이 좀 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측면까지도 담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모두가 활동가나 선동가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기본임은 물론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목에 핏대 세우지 않고도 설득할 수 있는 이런 방식의 이야기가 폭넓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지적 권위주의' 성향이 있는 이들에게 '앎'은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다. 매사 ''너 그거 알아?'' 하며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따지기 좋아하고 상대의 이해력을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지적 권위주의'는 '앎'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려는 경향성이다. 논리와 사실을 바탕으로 하므로 대개의 경우 합리적이지만 권위주의적 색채가 짙어지면 제3자를 무시하거나 냉소적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 P. 101

  논리성이 실체적 진실을 알려주는 알파와 오메가도 아니고 사람을 설득하는 요소의 전부도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향력의 90%는 언어적 요소가 아닌 비언어적 요소에 의한 것이다. - P. 102


  정신과 의사라는 ‘지적 권위’나 논리성의 메마름이 아닌 부드러운 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정혜신에 대한 나의 판단이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그러나 강약 조절보다 그 설득과 생각의 편린들을 전달하는 방식들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밝힌 것처럼 ‘비언어적 요소’를 통해 그녀를 만날 수 없다면 논리와 사실을 바탕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적 권위주의’와는 무관하다는 것은 그의 글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06012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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