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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속의 흰머리뫼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06
박남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혼란스런 질문을 던지게 한 시인이 있었다. 80년대 해체주의가 절정에 달하고 있을 무렵에 만난 박남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형식에 대한 파괴와 도전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한 현상이나 처음 시도되는 것도 아니었다. 장르에 대한 도전과 파괴는 시인들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초절정 경직 사회였던 제 3공화국이 무너지고 박정희가 저격당하자 사회는 한동안 무질서와 혼란속에 빠져든다. 그것은 부정적 상황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질적 전화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기득권과 정치권력에 의한 군부독재는 지속되는 현실을 많은 사람들은 목도하게 된다. 5 ․ 18 학살의 원흉 전두환이 정권을 잡게 되는 충격적 사건을 맞는다. 이런 혼란 속에서 문학이라는 장르와 시의 의미를 고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노동 운동이 정점에 달하면서 박노해와 백무산, 김신용과 같은 대중적 노동자 시인이 등장했고 순수시는 혼란과 자기 파괴를 거듭하고 있었다. 박남철은 1984년 <지상의 인간>을 통해 세상에 대한 야유와 풍자, 신랄한 비판과 독설을 퍼붓는다. 기존의 도덕과 질서, 형식에 대한 파괴를 통해 독자들에게 충격 요법을 선사하고 있다. 시대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이 학자들의 몫이라면 박남철은 그 시대를 온몸의 촉수를 동원해서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혹은 거부하고 혹은 비틀어 놓고 있다.
그의 시 일부를 발췌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시집 전체와 통어하는 독자들의 감수성을 해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표지부터 마지막 페이를 덮을 때까지 그가 이끄는 혹은 그가 살아온 세월과 시절을 더듬어 스스로를 ‘가짜 시인’이라 명명하는 박남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박덕규와 함께 첫 시집이자 공동 시집인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를 발표하고 두 번째 시집 <지상의 인간>을 내놓은 박남철은 이후 <반시대적 고찰>에서는 더더욱 극명한 시에 대한 분열적 태도와 해체시라 분류될 만한 시들을 발표한다. 그때 갓난 아기 사진이었던 아들 ‘해미르’가 이제 수험생이 되었다는 시의 내용은 그의 가족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이 가져온 변화를 미세하게 감지한다.
독자놈들 길들이기
내 詩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 놈들에게 - 차렷, 열중쉬엇, 차렷,
이 좆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 차렷, 헤쳐모엿!
이 좆만한 놈들이……
헤쳐모엿,
(야 이 좆만한 놈들아, 느네들 정말 그 따위로들밖에 정신 못 차리겠어, 엉?)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차렷……
- 박남철,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36, 1984, 64페이지
피터 한트게의 연극 <관객모독>을 연상시키는 이 시는 가히 충격이었다. 충격은 단순히 충격으로 끝나지 않고 논리와 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스무살 내게 점점 다른 시선과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구체적 모색을 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박남철이 모든 독자들에게 권유했던 고정관념과 기존질서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었고 야유와 풍자의 목소리였다. 그 방법도 여전히 유효하고 때때로 절실하게 요구된다. 과거의 수많은 예술에 대한 도전들 다다를 비롯해 초현실주의와 현대 예술의 다양한 방식들이 여전히 반시대정신을 요구한다.
‘파괴’를 넘어서 ‘무시’에 가까운 문학적 태도와 논의는 독자들에게 충격요법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현실로부터 일탈하려는 사람들과 목숨걸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동시적 경고에 해당되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 결국 모든 예술도 인간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의 영역을 넘나든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제 문학과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의미 없어 보인다.
다만 세월과 시간의 벽을 넘어 ‘어디 머리가 약간 모자라는 돌고래 한 마리도 꼬리에 걸리’는 것이 시인의 운명인 듯하고 말하는 박남철의 변화가 주목된다. 정말 오랜만에 나온 시집을 찬찬히 읽어가며 나이와 시간이 주는 변화를 기대해 본다. 단순히 늙은 시인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이제는 동해바다의 고래를 잡으러 떠날 정도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술에 취해서, 시외 전화까지 걸어와서, 자꾸 ‘죽음’이란 말을 입에 올려서 - 그는 지금 오랫동안의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리라! - 나는 제법 차분하게 “죽음이란 없다!”고 단언해주었다.
죽음이란 없다.
그대가 그대의 태어난 순간을 모르듯이, 그대는 그대가 가는 순간도 모르리라.
다만 있 것은 생물학적인 공포와 개체 보존 본능만이 있으리라.
니체가 ‘영겁 회귀’같은 것을 얘기했지만, 나는 아직도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지만, ‘영겁 회귀’같은 것도 없으리라.
- 본문 11페이지 <어제 누가>중에서
20051203